여러분이 진정한 대한민국의 영웅입니다.

톡!톡! 자료실/홍보 톡!톡! 2010.09.01 08:10

-참전용사 1,800여명 초청 낙동강 지구 전투 전승행사 -

국방부는 9월 3일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 및 왜관철교 일대에서 6·25전쟁 60주년 '낙동강지구전투 전승기념행사'를 실시한다.



낙동강지구 전투는 6·25전쟁 당시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전선을 치열한 격전 끝에 지켜냄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보장하고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의미있는 전투로, 왜관·다부동전투, 창녕·영산전투, 기계포항전투, 영천전투 등 '50년 8월 ∼ 9월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진 모든 전투를 아울러 '낙동강지구전투'로 명명하여 전승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낙동강 지구 전투는 남한면적의 10%에 해당하는 낙동강지역만을 제외하고 북한군에게 전부 빼앗긴 상황에서 국가역량이 총동원된 상태에서 치러진 전투였기 때문에 경북 지역만이 아닌, 전국 21개 시·군에서 낙동강전투에 참전했던 국내 참전용사를 초청하여 최고의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행사로 진행될 예정이다.

참전용사를 연도하여 환영하는 참전용사 개선 / 환영식으로 시작되는 이번 행사는 구미 시립합창단의 승리의 함성 합창과 의장대 시범, 모듬북 공연 등 60년전 낙동강지구 전투 승전을 축하하는 식전행사와 기념식, 식후행사로 진행된다.

특히, 당시 국군과 북한군 복장을 갖춘 500여명의 장병과 항공전력 8대, 낙동강 도하용 단전 10척 그리고 음향 및 시각효과 장비(TNT, 탄약, 크레모아, 모의탄, 신호킷 등)가 동원되어 현장감 있게 재연할 전투장면 재연은 참석자에게 감동과 깊은 인상을 심어줄 것이다.



이외에도 6·25전쟁 사진전, 피아전투장비 전시, 낙동강 도하 / 단정 탑승체험, 연예병사 팬 사인회 등 병행행사도 진행되며 건강상담 코너를 마련하여 참전용사 및 지역민의 큰 호응이 예상된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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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멸을 각오한 사투 다부동 전투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7.28 17:09
  혹심한 손실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혼을 발휘해 다부동을 사수해낸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6·25 전쟁 중 가장 격렬한 전투가 계속된 기간은 언제쯤일까요?
  많은 분들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와 고지 쟁탈전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의외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 인천상륙작전 )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대전 전투의 참패와 더불어 북한군 제6 보병사단의 전라도 석권으로 인해 한국군과 UN군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밀려났고 곧 치열한 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경상남북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내어준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마저 상실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마저 없던 셈이었습니다. 
  낙동강에서 북한과 유엔군 측의 대결은 물자와 전투기술의 대결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신력과 의지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죠.

  치고 내려올 수 있는데까지 내려왔기에 최후의 승리를 목전에 둔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 좌측 사진 )은 이미 전 사단에 8월 3일에 8월 6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이미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 하에서 실시된 낙동강 도하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부산 점령의 날짜는 뒤로 밀리자 초조해졌습니다. 
  하지만 8월 12일 한국군이 대구 북방으로 퇴각하자 김책은 이 기회를 이용해 8월 15일까지 작전을 종결하고자 일선 사단장들에게 서둘러 대구를 함락시킬 것을 독촉했습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대구로 접근하기가 용이한 다부동이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습니다.
   북한군은 이 곳을 사수하고 있던 국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개전 이래 숱한 실전을 겪으며 활약한 정예 부대인 제1, 13, 15 보병사단을 투입했습니다.
 
이로써 발발한 다부동 전투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보다 융통성있는 방어작전을 위해 전선을 축소 조정한 후 제1 보병사단이 경상북도 칠곡군의 다부동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8월 13~29일까지 무려 16일간이나 지속됐습니다.
  백선엽 준장의 제1 보병사단은 다부동 전면의 험준한 유학산 839 고지, 좌측의 숫데미산 518고지와 328고지, 그리고 우측의 신주막~대구 간 도로의 방어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사단 좌측 지경선 너머인 왜관 너머에는 미 제1 기병사단이 낙동강 중류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군위와 신녕을 방어하는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가 연접하고 있었지만 이 사단들은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쉽사리 지원부대를 보내주기가 어려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1 보병사단은 나홀로 북한의 정예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죠.
  만약 다부동을 사수하는데 실패해 대구가 함락당한다면 한국군은 전원 부산 앞바다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용호동 해군 작전사령부 인근의 해안 절벽지대.
  한편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단숨에 붕괴시키고 대구를 장악하고자 했던 북한군은 제15 보병사단이 최영희 대령의 제15 보병연대가 사수하고 있던 숫데미산과 328고지를, 북한군 제1 보병사단은 박기병 대령의 제12 보병연대가 사수하고 있던 중앙의 유학산 정상 부근의 높은 절벽과 같은 고지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동쪽의 계곡 접근로에서는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이 김동빈 대령의 제11 보병연대 방어선을 붕괴시킨 후 신주막~다부동~대구 간 도로를 이용해 남하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 제8군은 즉각 제11 보병연대 방어선 후방에 미 제2 보병사단 23 보병연대, M26 "퍼싱" 중전차를 장비한 제73 전차대대 C중대와 포병 2개 대대를 증원부대로 배치했습니다.
  한반도로 투입된 F-86 "세이버" 전투기. 다부동 전투 시기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전쟁 기간 중 미 공군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제공권을 확고하게 장악함으로써 북한군의 주간 이동과 공격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습니다.
  북한군은 7월 한달간 미 공군의 맹렬한 폭격에 의해 후방보급선을 차단당함으로써 보급이 급격하게 악화돼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병사들은 하루 1, 2끼 정도만 섭취할 수 있었고 일부 전차·자주포·야포 수송차량 등은 포탄과 경유, 휘발유 공급이 끊겨 가동 불능상태에 처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충천했습니다.
  골수 공산주의자들인 북한군 장교와 고참병들의 전의는 왕성했고 이에 따라 다부동 전투는 소강상태 없이 연일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전개됐습니다. 
  "어서 오너라! 괴뢰군!!" 대구 북방에서 90mm 대공포를 이용, 치열한 지원 포격을 감행하고 있는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장병들. 다부동 전투는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절대적인 현 위치 사수전이었습니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제1 보병사단의 대응은 놀랍게도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격작전을 감행, 함락당한 방어진지와 거점을 반드시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8월 15일,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에게 함락된
숫데미산 탈환을 위해 제12 보병연대 2대대는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15 보병연대 역시 뒤지지 않겠다는듯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8월 15~16일에 일선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모든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동원했고, 이로 인해 부족한 T/O는 갓 자대 배치된 신병들에게 할당했습니다.
  이처럼 전멸을 두려워하지 않은 작전 전개로 인해 제15 보병연대
 1대대는 단 하루 만에 중대 병력 130명이 60~70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중 전투경험이 있는 선임병이 겨우 15~16명일 정도로 참담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초기 개전 부분에서 말도 안되는 고증 오류로 인해 비난을 받았던 MBC 미니시리즈 로드 넘버 원에서도 다부동 전투는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혹심한 인명피해로 인해 사단 사령부는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만 수백 명의 신병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격렬한 전투 중 많은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후송당하는 통에 중대에서는 소대장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이렇듯 다부동 전투는 제1 보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사병이나 투혼을 발휘한 방어전이었습니다.
  특히 방어선에 갓 배치된 많은 신병들이 북한군의 함성소리와 쉴 새없이 날아드는 박격포탄의 작렬로 동요하고 흔들리자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접 착검한 M1 개런드 소총을 움켜쥔 채 돌격의 선두에 나섬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에 따라 사단은 부대 건재와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결사적인 방어전으로 잇따른 공세의 감행에도 불구하고 진격이 다부동 서측방과 중앙에서 돈좌되자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장 최용진 소장은  마침내 8월 21~23일 밤에 걸쳐 T-34/85 9대를 집중시켜 신주막~다부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통해 야간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마지막 희망을 T-34/85에게 걸었지만 의정부와 오산, 대전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번 6·25 전쟁의 수호신, M26 "퍼싱" 중전차를 열람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훗날 "볼링 앨리" 전차전이라 불린 이 격전에서 미군은 M26 "퍼싱" 중전차를 동원해 치열한 야간 전차전 끝에 돌격해 들어왔던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 대부분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미군 전차대에 의해 마무리지어졌습니다.
  결국 다부동 전투 종전까지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T-34/85 14대와 Su-76 대전차 자주포 5대를 손실해 사실상 기갑전력을 완전 손실하며 전투력을 상실했고 이로써 제1 보병사단은  혹독한 희생을 치른 끝에 적 3개 보병사단의 맹공을 격퇴시키며 다부동과 대구를 지켜냈습니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군의 T-54 전차. 만약 제1 보병사단이 다부동을 사수해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런 사진을 바라보며 공산치하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부동 전투를 통해 전투는 의지와 인내력의 싸움이며 하도 전사자가 속출하다 보니 주변이 온통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차고 여름의 찌는 듯한 폭염 아래에서 죽음과 부상의 공포를 이겨내며 3배에 달하는 적을 맞아 승리할 때까지 버티며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고군분투한 제1 보병사단 장병들의 투혼에 존경심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단장 백선엽 준장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문자 그대로 계급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감투정신은 북한군의 정예 3개 보병사단의 맹공을 막아낸 제1 보병사단의 승리라 더 후대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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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 美 노병의 지평리 방문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5.14 08:29

- 아래 글은 2사단 항공대 정비병으로 6.25사변 참전용사였던
  댄 브로스나헨씨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고 쓴 여행기이다
. -

2000년 9월 12일 6:30분. 
한국 정부로부터 초대받은 힌국참전용사 방문단은
서울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30명의 키가 크고 날카로워 보이는 한국군
의장병들의
환영을 받았다.


우리들은 앞에 총 자세로 선 의장병들을 사열했다.

감동스러운 환영 의식이었다.

의장대 사열을 앞으로 한국의 어디를 가건 우리들이 어떻게
융숭한 대접을
받을 것인지 미리 짐작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디서나 한국인들은 우리들이 한국을 위해서 싸운 것에
감사의 표현을 진심으로 했었다.

 


지평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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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대 사열 후 우리는 대구행 항공기로 바꾸어 타고
대구로 향하였다.

[다부동 전적지 행사 참석이 예정되었던듯]

우리는 대구에 도착해서야 한국의 3일 연휴인 한국의
추석 절에 우리가
한국에 온 것을 알았다.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도로는 차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50년 전 대구는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300만의 인구로 붐비는 대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관광 전세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 기사는 대구가 초행길이라 길을 잃고 몇 번을 헤매다가

겨우 캠프 워커와 캠프 헨리[둘 다 대구 시 소재]로 가서

점심을 들 수가 있었다.


우리의 첫 방문지는 유엔군과 북한군이 치열한 격전을 치룬

낙동강변의 옛 격전지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대구와 가깝고 미군이 혈전을 되풀이 한 왜관 부근인듯]


그러나 엄청난 교통 혼잡과 버스 기사의 지리미숙으로 방문단은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최악의 서행을 거듭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버스는 그런 느림보 걸음으로 내가 기억을 되살려 알아볼만한

한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지만 새 빌딩이 가득 들어서서

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교통 혼잡이 너무  심해서 우리는 결국 목적지 방문을 단념하고

거북이 걸음으로 다시 캠프 헨리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캠프 헨리의 사람들은 우리가 중도 포기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을 알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

우리를 수행한 한국인 안내인은 피곤하지만 저녁을 들고

그곳 지역 사령부 장군[육군 소장-대구 2군 사령부인 듯]의

환영을 받으시라고 요청했다.


우리를 초대한 사업본부는 방문단 개인기록을 검토했던 듯했다,

그들은 방문단원들 중에 린 프리먼 대령과[지평리에서 싸운

23연대 연대장 폴 프리만 대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알빌 필스와 나, 세 사람은 방문단을 대표하는 권고 받았다.‘’

우리를 위한 환영식만을 위해서 특별히 맞춘 커다란 케익을

큰 군도로 자르는 행사를 가졌다.


다음날 아침 06:30분 

우리는 대기하던 전세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보니 어제 지리를 제대로 몰라서 헤매던 버스 기사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그는 첫 출발부터 길을 잘못 드는 실수를 했다,

우리는 실수를 반복하는 그가 재미 있어졌다.


나는 그 아침 식사에서 프리먼 대령과 식탁을 같이 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지평리에서 싸웠던 미 23연대 B중대에서

소위로 근무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행사장으로 향하자 억수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행사장에 도착하자 부산 교두보를 뚫고 북진하는

유엔군을 묘사한 한국전 50주년 놋쇠 기념패를  증정 받았다.

[다부동 전적비 제막식에 참가한 듯하다,]


행사장은 거대하게 만든 '부산 교두보 돌파' 기념물이 있는

야외에 차려져 있었다.


다부동 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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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세 명의 방문단 대표는 특별석을 할당받았다.

가랑비로 우리들 모두가 젖자 같이 참석했던 미군들이
우리들에게
몇 개의 비닐 비옷을 주었다.


좌석이 야외에 설치되어 있어서 우리는 빗속에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젖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안 되었다고 봤던가, 한국군 장교가 방문단 모두에게

우산을 지급했다.


우리가 한국에 체류하는 닷새간 매일 비가 왔기 때문에
그 우산은
유용하게 써 먹을 수가 있었다.


행사장에는 대형 프로젝션 스크린이 있어서 우리 대표
세 명의 얼굴과
우리들이 한국전에서 수여받은 훈장들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었다.


비가 오는데도 그냥 앉아 있는 우리들을 보고 한국 참석 관중들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행사가 진행되면서 여러 번의 연설과 박수가 번갈아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지만 한국군 군악대의 연주도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방문단은 대구의 한국군
장교 식당[2군 사령부?]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대접한 음식은 푸짐했다, 고기, 국, 김치등등 ------


융숭한 대접은 한국군이 아직도 우리들을 충분히 대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보였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큰 무대가 있고 잘 꾸며진 큰 강당으로 갔다.


몇 번의 스피치가 있고 한 사람이 우리들 대표 세 명을 

무대에 설치된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다른 한국전 참전자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스타들이 분명한 두 명의
남녀 진행자가
진행을 맡아했다.


그들은 2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우리들에게 한국전의 경험과

방문 소감을 물었다,


나는 물어보는 질문의 요지를 잘 몰라 잠시
헤매었지만
하여튼 성의껏 대답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세 명의 대표는 큰 박수를 받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우리는 나중에 이 대담이 한국 전국에 방영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방문단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 다시 성대한 저녁을

대접받았다.


저녁 식사후 방문단을 위한 두 시간 반의 공연이 있었다.

한국 춤과 현란한 북춤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가수가 출연해서 열창도 했다.

기타 일일이 소개할 수 없는 재미있는 공연도 있었다.


공연은 밤 열시 삼십분에 끝났다.

숙소에 들기 전 내일 일정도 오늘과 같이 아침 6시 30분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통지 받았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종전같이 기상했다.

미국식의 맛 좋은 아침을 든 방문단은 버스를 타고
4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가는 노정에도 비는 엄청나게 퍼부었다.

다행히 추석 연휴가 끝나서 고속 도로의 교통 사정은
훨씬 나아졌다.


버스는 비로 엄청나게 불은 여러 개의 강을 지났다.

버스는 수원에서 점심을 들기 위해서 수원에서 잠깐 멈추었지만

서울로 계속 직진해서 이태원의 8군 사령부 옆에 위치한
4성급 호텔인 
캐피탈 호텔에 도착했다.



케피탈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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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젊은 시절의 전시에 서울을 미리 보지 않았다면
한국인들이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고 달성해낸 업적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서울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서울은 완전히 파괴된
폐허였었다.


지금의 서울은 수많은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숲을 이루고 있고

현대식 지하철이 수백 키로나 되는 길이로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 있는 현대적 도시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용산 미군 부대의 네이비 클럽에 가서

중국식 저녁을 들었다,


정말 괜찮은 클럽이었다,

춤추는 젊은 아가씨들도 미군 젊은 병사들이 즐겁게
노는 것도 구경했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산책삼아 인근 이태원 상가에 나가서
구경을 했다.

이태원 상가는 일 마일 되는 길이로서 다양한 상품을
파는 상접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으나 다시 들리면 몇 가지 선물을

사겠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금요일 우리는 여섯시에 일어났다.

비는 계속 내렸다,

태풍이 북상중이라는 것이었다.,


버스는 방문단을 서울 북방 동두천에 있는 캠프 케이시의

2사단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먼저 판문점부터 방문했다.

인접한 DMZ에는 다수의 전쟁 유적들이 있었다.

이 곳 자유의 다리를 50년 전 미국의 포로들이 걸어서

돌아왔다는 것은 믿기가 힘들었다,


자유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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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도로 옆에 철조망들이 대규모로 쳐있었고

무장한 초병들이 서있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다시 DMZ지역을 떠나 2사단으로 돌아왔다.

2사단은 사단이 보유한 여러 최신식 무기들과 장비들을

우리들에게 전시하였다,


비가 너무 와서 2사단은 무기들의 실탄 사격 시범을

보여주지를 못했다,


대신 2 사단은 근사한 점심을 대접했다,

식당에서 젊은 미군 장병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면서
나는 젊은 군인들이
사기가 높고 수준이 높은 것에  
든든한 인상을 받았다,


점심 후에 방문단은 사단 PX로 가서 약간의 쇼핑을 했다.

오후 세시에 버스는 의정부에 있는 캠프 레드 클라우드

2사단 사령부를 향해 출발했다.


2사단 사령부에서는 2 사단 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은 아주 잘 전시되어 있었다.

구경 뒤에 사단의 미첼 홀에서 잘 차려진 저녁을 들었다.


2사단의 한 대령이 오더니 사단장이 바쁜 일정으로 우리들과 같이

자리를 못함을 유감이라는 말을 전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방문단 모두에게 사단장의 방문 메달을 나누어 주었다,

식사 뒤 미군 남녀 장병들로 구성된 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은 아주 재미있어서 나는 켐코더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평리 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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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우리는 아침 일찍 호텔을 떠나 서울의 남부에 있는 지평리와

쌍둥이 터널이 있는 옛 격전지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우리는 가이드로부터 한국에 1500만 대의
차가 있다는
놀랄 말을 들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10시 30분 우리는 지평리에 도착했다.

지평리의 전적비에 오르는 계단 벽에는 지평리 전투의 전황이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나는 빈 깡통을 구해서 거기에

랄프 레이나의 탱크 승무원들, 랄프 홀 밥 린제이 찰스 프린스,

밥 푸르테스트와 도얄 스미스의 이름을 적은 종이쪽지를 넣어

전적비 뒤에 묻었다. [이들 전차병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양평리 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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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중 후리먼 대령과 나만 지평리 전투 참가자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생존해있는 멤버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쌍둥이 터널로
방문하였다.


지평리에서 프랑스 대대와 미 23연대는 협동하여 중공군
5개 사단이
도로와 철도가 사통팔달로 뚫린 교통 중추
지평리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좌절 시켰다.


중공군은 이 지역에서 저지당하여 더 이상 남하하는 못했다.

반면 전쟁의 주도권이 바뀌어서 유엔군의 북진이 뒤따랐다.

지평리는 전쟁의 주요 터닝 포인트였다.


좌측 도로로 크롬베츠 특임대의 전차들이
지평리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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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단에게는 쌍둥이 터널 부근 다른 전적지도

방문 계획도 있었으나 비가 너무 와서 이 순서는 취소되었다.


지평리 방문 뒤에 우리는 한국 전쟁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했으므로 전쟁 기념관 방문을

취소하고 저녁의 공식 만찬을 위해서 준비했다.


한국 도착이후 최초로 정장을 입어야 헸던 만찬이었다.

우리는 이 만찬에서 한국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을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방문단은 코리아 내블 리그 빌딩[어느 곳을 말하는지를
알아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의 만찬장으로 향하였다.

주최 측은 최고 수준의 한국식 갈비구이 정식이 제공되었다.

여러 한국 참전에 대한 스피치가 있었고 연회가 계속되었다,


방문단의 각 테이블에는 미군 현역장병들이 동석을 했다,

우리들 테이블에는 스물 다섯 살된  미모의
여성 해군 2등 통신병이 동석했다.


그 녀는 군 복무 중에 대학에 진학하여 일 학년을 마쳤다고
말해주었다.

저녁 식사 후에 한국 당국자는 우리에게 적 백 청의 리본이 달린

한국 참전 사은 메달을 각자의 목에 걸어 주었다,


우리가 훈장을 기대했던 것과 조금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한국 측 인사는 참전 용사에게 훈장 수여가 추진되었지만

심사에 필요한 우리들의 서류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양해를 구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방문단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내일 귀국할 짐을 꾸렸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귀국을 위해서 캐피탈 호텔에서 첵크 아웃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방문 내내 내리던 비가 높이 뜬 태양이

비행장 행 우리 버스 창문을 비쳤다, 아쉬웠다.


※  아래는 필자와 지평리 전투의 추억에 관한

   특별 회고이다.

   필자는 미 3사단 소속 항공대의
   정비병으로 근무했다.


한국 여행은 나에게 특별한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우연한 상황으로 지평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중공군으로부터 지평리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미 23연대의

연대장 폴 프리먼 연대장은 전투 중 중상을 당했다.

사령관 리지웨이는 그에게 즉시 지휘권을 인계하고 후송을

가도록 명령했다.


L-19,세스나 정찰기.
6·25 전쟁이 실전 데뷔 무대였다.
나중에 O-1 버드 독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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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 정찰기 L-19 한 기가 긴급히 지평리의
비상 활주로로 파견되었다.

이 정찰기는 임시 변통으로 만든 활주로에 착륙하다가
구덩이에
바퀴가 빠져 타이어가 터져 버렸다.


두 번째 정찰기가 파견되었다.

나는 상관으로부터 정찰기를 수리해서 꺼내 올 수 있겠는지를

질문을 받았다.


나는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수리에 필요한 도구와 예비 타이어를 가지고 두 번째

정찰기를 타고 출발했다.


지평리에 접근하면서 공중에서 보니 23연대가 엄청난 대병력의

중공군에게 어렵게 저항하게 있는 상황이 잘 파악이 되었다.


지평리에서 부상당한 프랑스군의 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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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착륙할 즈음 중공군 포위 병력은 고장 난 L-19를 해치우기로

마음 먹고 원거리에서 박격포 사격을 퍼붓고 기관총 사격을
하고 있었다.


나는 부서진 정찰기를 점검해보았다 타이어가 터진 것은
물론
브레이크도 라이너가 망가져 있었다.


나는 중공군의 사격을 받으면서도 고장 난 정찰기를 몇 번이나

움직여서 안전지대에 옮겨 타이어를 교체했다.

그러나 브레이크는 어떻게 손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비상 활주로의 구덩이를 메꾸고 활주로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박격포 파편들을 치웠다.


문제의 정찰기 조종사 톰슨 대위는 정찰기에 탑승하고

다시 이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륙에 충분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터진 브레이크가 한쪽 바퀴의 회전에 장애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정찰기는 똑 바로 활주를 못하고 점점 한쪽으로 치우쳐 졌다.

톰슨은 활주로 끝에서야 정지를 할 수가 있었다.


검토를 해본 나는 그에게 정찰기가 이륙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찰기의 무게를 줄여야 했다.


나는 내가 태평양 전쟁 중에 해병으로서 항공모함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 보니 해병 조종사들은 이륙 전 엔진의 출력을 최고로 올려서

튕겨 나가듯 이륙하면 활주 거리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가 있었다.

톰슨 대위는 나의 제안에 시도해자고 동의했다.

나는 정찰기를 바람이 오는 쪽으로 이동했다.


활주로 주변에 몇 명의 보병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해 주도록 요청했다.

나는 두 사람을 각각 바퀴 다리를 꼭 붙들고 있다가
엔진의 파워가
최고조에 오를 때 나의 신호에 따라
다리를 놓아 정찰기가

활주로로 튀어 나가게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다리를 놓는 것이 중요했다.


6·25전쟁 참전 미 해병대의 L-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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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슨 대위는 엔진을 스타트하고 엔진의 알피엠을 최대로 높였다,.


바퀴 다리를 꼭 잡힌 정찰기는 몸부림치듯 꼬리를 바짝 들어올렸다.

그 것은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나는 즉시 두 사람에게 다리를 동시에 놓도록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시키는대로 동시에 다리를 놓았다.

정찰기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이 똑바로 가지 못하고 옆으로 약간 비트러

지기 시작했다. 그 전면에는 트럭이 있었다.


이륙을 필히 해야 될 타이밍에 정찰기는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바퀴가 트럭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순간이었다.


그는 해낸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후  며칠 동안 그를 볼 기회가 없었다.

톰슨의 비행기는 동체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아무 것도
싣지 않고 떠났고


그가 떠난 뒤 나는 지평리에서 올 데 갈 데가 없는 고아가 되었다.

내가 23연대에 새로 배속된 신병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나는 나를 받아 준 박격포 중대와 같이 며칠 지냈다.

그 후 나는 프랑스 대대로 옮겼다.

그들은 나에게 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드디어 포위가 풀렸다.

포위망을 부순 미 탱크 부대가 우리들에게 도착한 것이다.


나는 나와 같이 지낸 박격포 부대의 부대명이나 장병들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까지 그들이 나에게 대해 주었던
친절한 도움
을 잊지 못한다.




지평리전투 상기행사 안내

바로가기(
http://koreanwar60.tistory.com/157)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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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선종 2010.05.24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태어난곳이 지평리입니다. 52년12월생입니다. 초등학교입학하기전 에 여기저기에 탱크가 있는것을 보앗습니다.수고하셧습니다.

  2. 김선 2010.05.24 14: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묘금리 전투에서 적군200을 없앳다 지금은 휴전중이다 적군에게 쌀을 보내지말자 오직 칼과총의 매서운 맛을보여줄볼뿐이다

  3. 파란 하늘 2010.05.24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o-1 기 4대가 우리 사단 항공대에 있었고 나는 항공대 옆의 쌍열 초소 경게병으로 근무했는데 근무할때 군용 지포라이타에 기름을 채운다고 비행기 날개에서 기름을 빼서 채우곤 했었는데 어느날 기름을 빼고는 제대로 잠그지 않아서 비행기의 기름이 다 떨어진 후에 후배가 또 라이타에 기름을 채운다고 비행기에 다가가서 기름을 채우고는 확인한다고 라이터에 불을 키는 순간 매복하고 있던 항공대 병사들에게 잡혀서 사단 헌병대에 끌려가서 영창 15일을 살고 나온 적도 있답니다. 어떨때는 우리는 L-19 기라고도 부르기도 했었지요! ... ㅋㅋㅋ

  4. 은혜 2010.05.24 22: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그대들의 고귀한 희생을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기억할겁니다.

  5. 혜진 2010.05.24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왜관에 사는 학생입니다. 저희집 에서 낙동강이 보이는 곳에 살고 있지요..아주어렸을때. 왜관이 지금보다 덜 발전 했을 적에, 산에서 사람시체가 발굴되어 사람들이 왔다가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미군부대가 아주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잘 모르지만 다부동 적비와 낙동강 왜관이라는 글의 내용에서 전쟁의 대한 이 내용이 어릴적 다부동 전적비관에 소풍을가서. 들은 참전용사들 이야기를 생각하게 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6. 정석 2010.05.25 09: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네요.. 오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7. Brenton Mclee 2012.05.12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 비즈니스가 블로그를 작성하는 데 도움과 내가 진정으로 피사체 자료를 감사하는 데 일반적이다. 내용이 정말로 봉우리 내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목표는 정보와 사실을 선택해 보는 지키는면서 인터넷 사이트를 저장하는 것입니다.

  8. Viva Andriopulos 2012.05.12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이미이 거의 몇 몇 시간에 대한 몇 가지 좋은 정보를 요구 되었기 때문에 난 내가이 특정 사이트를 발견하는 단지 그러므로 황홀 해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제의 자신의 콘텐츠에 사용 가능한 여러 브랜드를 새롭고도 편리한 구체적인 내용을 읽고 이외에 확실하게 문제를 많이 해결. 이러한 특정을주는 많은 감사합니다!

  9. Beulah Durrance 2012.05.12 1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유익한 일상적인 운동 웹사이트를 통해 진행됩니다 밝혀졌다. 제대로 항목 생각하는 쾌거를 만들기 위해 아주 좋은 정보와 사실을 통해 때나 항상 모든 상상력과 실제 경계를 elongates있다. 내 작은 개인 컴퓨터에 일반적으로이 사이트를 백업 방법을 찾고 시작합니다. 확산 주셔서 감사합니다

  10. delta stewardship council 2012.05.29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종류의 정보 매우 유용을 게시 기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 좋은 post.Be! 너무 오래하는 방법이 역학 교육 도서에 대한 사냥을 나타납니다. 지금은 내가 당신을 발견 그중 단지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다가오는 제출을 위해 앞으로 쇼핑. 그것을 감사합니다

  11. expedia coupons 2012 2012.05.29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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