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에 숨어있던 그 시절의 자화상 [ 下 ]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25 09:40

 

  공식 발간된 전사를 살펴보면 1950년 6월 24일 0시를 기해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는 합니다.  첫 번째로 장기간의 경계 태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별다른 도발 징후가 보이지 않았던 반면 정치적인 평화공세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우선 들고 있습니다.  북한은 평양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남로당의 거물 간첩인 이주하, 김삼룡의 신병을 맞교환하자는 제의처럼 다양한 각종 평화선전 공세를 펼쳤습니다.

[북한의 민족지도자였으나 공산당의 탄압을 받은 조만식]


  사실 6·25전쟁 직전까지 38선 일대에서는 상당 규모의 국지전이 종종 벌어졌지만 오늘날 DMZ같은 팽팽한 긴장상태가 항상 유지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38선의 경비가 강화되기는 하였지만 남북 간의 통행이나 통상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아니었을 만큼 국민들도 설마 동족의 가슴에 북한이 총을 쏘겠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군 당국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습니다.  따라서 장기간의 경계태세의 계속 유지가 힘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6·25이전 최대의 국지전이었던 송악산전투 기록화]


  두 번째로 병사들의 피로 누적주장입니다.  당시 10만도 안 되는 병력으로 후방에서 공비토벌도 하고 38선 일대를 철저하게 경계하기는 사실 무리였는데, 특히 전방의 제1, 6사단 같은 경우는 담당하는 38선 구역만 해도 80~90Km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한정된 자원으로 계속하여 비상경계 태세를 유지하기는 상당히 힘들었고 이 때문에 부득불 중간 중간에 경계령 해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쟁 직전 38선을 시찰하는 덜레스 미 국무부 차관보]


  그런데 상식적으로 판단할 할 때, 단지 경계령이 해제되었다고 장병들의 휴가, 외출, 외박이 일거에 허용될 필요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당시에 일부 부대는 거의 절반 정도의 병력이 영외에 있었을 만큼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군에 걸쳐서 동시에 대규모의 장병들이 부대를 벗어났습니다.  어쩌면 비상경계령 해제 자체 보다 이러한 사실이 미스터리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 전쟁 전 국군의 모습 ]

  이와 관련하여 거론되는 주장이 농번기 일손 부족입니다.  당시 38선 이남의 최대 산업은 농업이었는데 그것은 대한민국의 생존에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양력 5~6월은 농사에 가장 바쁜 시기인데 특히 당시는 거의 대부분을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고 대다수 장병들도 농촌 출신이어서 일을 거들어야 할 절박성이 컸습니다.  따라서 국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경계령을 해제하고 병사들의 외출 외박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48년 서울 근교 농촌의 가을걷이 모습]


  그런데 이와 더불어 더욱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군량미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고, 6·25전쟁 발발 당시의 미스터리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도 그리 중요하게 평가된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요소라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양력 6월이면 보릿고개가 절정에 다다른 때로 온 국민이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던 시기였고 군대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보릿고개는 온 국민이 고통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면 전쟁 발발 당시에 부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보유 군량미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6·25전쟁사에 따르면 국군 제6사단은 1950년 3월이 되었을 때 이미 보유한 알곡은 전무한 상태였고, 비상식량도 하루치에 불과한 약 700상자의 건빵뿐이었다고 나와 있는데, 여타 부대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가난은 6·25전쟁을 반추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화상이었습니다]


  따라서 호구지책을 해결하라고 병사들을 병영 밖으로 적극 내보내고는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가난한 나라의 궁핍했던 군대의 자화상이었고, 우리의 선배들은 그렇게 굶주린 상태에서 도발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미스터리라는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오늘날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사례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직전의 비상경계령 해제는 결론적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처럼 비참했던 우리시대의 자화상이 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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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L 2010.08.30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당시 한국군 식량부족에 대한것은 공감이 갑니다...6사단의 춘천전투 일화(증언?)에서도 우두산 부근 164고지부근에서 적의 공격을 한번 저지시키고(혹은 자주포 1대까지 나포했다고 함...) 고지에서 살구로 점심을 때웠다고 하였으니...

  2. 흑기사 2011.06.23 1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나 더 빼신 게 있으신데요...

    위의 주장들이 백번 옳다고 쳐도 장교 구락부 낙성식에 군 수뇌부들이 죄다 몰려 있었던 것은 어떤 (큰) 이유가 있는가요?

    병사들을 (위의 이유로) 휴가를 보내줬다쳐도 (그 중요한 때에) 지휘관만이라도 제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면 초전 대학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만...

    또 그 장교 구락부 낙성식에 거물급 간첩이 관련되어 있다고 하던데 이 또한 연구하셔야 되지 않을까요?

  3. 실버스타 2011.08.05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상경계령 해제와 땐스파티는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인 라이트 대령이 채병덕 참모총장을 종용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당시에도 소문이 파다 했습니다.

    라이트 대령은 걸핏하면 헨리 대령이라는 명찰로 바꾸어 달았기에 육본 정보국에서 라이트 대령의 신변 조사도 했습니다.
    라이트 대령은 라이트 형제중 동생 오빌 라이트의 후손이 된다는 사실도 알아 냈어요...

    이로 인해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음모설이 생겨 났지요.

    미국 정부는 남침을 유도하지 않았습니다.
    단 맥아더가 남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본국으로 가는 남침 정보를 모두 차단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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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에 숨어있던 그 시절의 자화상[上]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18 08:38

  대한민국 군번 제1호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1920~2002) 예비역대장은 199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른바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습니다.  개전 당시에 제2사단장이었고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쳐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던 인물이 의심을 가졌을 만큼 전쟁 초기의 정황을 살펴보면 상당히 이상한 점이 많기는 하였습니다.


[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를 제기한 이형근 전 참모총장 ]


  그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일선 부대의 적정동향보고를 수뇌부에서 철저할 정도로 묵살했다는 의혹으로 시작하여, 전쟁발발 열흘 전인 6월 15일 중앙요직은 물론 일선사단장과 연대장을 거의 동시에 대폭교체한 점, 6월 13일부터 20일에 걸친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 등등 모두 10가지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이것들은 전쟁초기에 너무나 일방적으로 적을 이롭게 하고 반대로 아군의 몰락을 가져온 미스터리로 거론되기에 충분한 주장들입니다.


[전쟁직전인 1951년 6월 초 서울]


  그러한 이상 정황은 아직도 논란이 많고 여기에 대한 추가 연구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지만, 북한 측의 전쟁 사료가 완전하고도 가감 없이 사실그대로 공개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오래 동안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데 이형근 예비역 대장이 꼽은 미스터리들 중에서 네 번째가 6월 24일 0시 (또는 6월 23일 24시)를 기하여 육군본부가 전군에 내려져 있던 비상경계조치를 해제시켜 버렸던 사실입니다.


[창군 초기의 국군(1948년 여순 반란 당시)]


  사실 이점은 이형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적인 의심사례로 거론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징후를 느껴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불과 30시간도 지나지 않아 북한이 침공했다는 자체가 내부에 적을 의심하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사전에 남침을 계획하고 있던 북한군이라 하더라도 아군의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지 불과 하루 만에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전쟁을 감행하기는 물리적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개전 초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더구나 당시 육군본부의 비상경계 해제명령에도 불구하고 부대 자체판단으로 긴장된 경계태세를 계속하여 유지하였던 제6, 8사단의 경우는 개전 초에 상당히 선방하였던 반면, 4할 정도의 병력이 일거에 외출 외박을 나가 전력이 약화 된 제7사단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점만 봐도 비상경계령의 유무가 전쟁 초기의 전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훈련 중인 창군 초기의 국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살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1950년 들어와 아군은 정보기관이 수집한 각종 정보에 의거 북한의 전면 남침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4월 29일 처음 비상경계령을 발령하여 긴장된 전투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쟁 발발 전까지 5월 3일~5월 9일 사이, 6월 2일~6월 11일의 두 차례에 걸쳐 경계령이 일시 해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비상은 계속 이어진 상태였습니다.


[창군 초기 국군 수뇌부]


  따라서 6월 24일의 경계해제는 영구적인 조치가 아니라 앞선 두 번의 경우처럼 일시적인 해제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전의 예를 참조한다면 일단 경계해제 후 상황이 나빠지면 다시 비상경계에 돌입할 가능성은 농후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군 수뇌부에 잠입한 간첩의 공작 때문이라는 미스터리가 아니더라도 북한은 국군의 비상경계령 해제 조치가 가까운 시일 내 또다시 반복될 것이라 충분히 예측하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 전 국군 기갑연대를 검열하는 미 군사고문단]


  그런데 지난 두 차례의 비상경계령 일시 해제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국군이 비상경계 태세를 계속하여 유지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북한 측도 충분히 가까운 시일 내에 국군이 일시적이라도 경계령을 해제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설명할 그 이유는 어쩌면 그 시절 우리의 아픈 자화상이기도 하였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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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1.18 09:28

 6. 서울에서 지체한 북한군

  상식과 전혀 반대로 엉뚱한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이를 흔히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가장 극한 상황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이런 모습은 의외로 흔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 또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개전 초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공격하지 계속하지 않고 3일간이나 지체하였던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중동부전선에서 선전한 국군 제6사단 외에 전선의 상황은 상당히 비관적이었는데, 바로 이때 북한군 주력이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상징하는 중앙청에 게양된 인공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아군 주력을 고립시키면서까지 시도된 한강교 폭파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강에는 인도교(현 한강대교 구교)와 3개의 철교가 있었는데 2개의 철교가 폭파에 실패하여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은 물론 국군에게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남침의 선봉장 노릇을 하던 전차들까지 마음만 먹었다면 신속하게 한강을 건너 패주하고 있던 국군을 추격을 계속할 수 있었었습니다. 만일 이때 북한군의 진격이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국군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사실 북한 스스로 이에 대하여 명쾌하게 밝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만 있고 이것이 미스터리가 되어버렸지만, 그러한 이유 중 하나로 당시에 북한이 정세를 크게 오판하고 있었다는 점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남침계획 수립당시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전 지역에서 남로당원이 봉기하여 이승만 정부가 순식간 붕괴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6월말까지도 민중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것은 전후에 김일성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세력을 숙청 할 때 구실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폭파되지 않은 한강 철교를 6월 30일 미군기가 폭격하는 모습 ]


  하지만 무엇보다도 북한군이 3일간 서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알아본 바와 같이 북한의 초기 계획을 완전히 망쳐버린 국군 제6사단의 대승과 김포축선을 방어했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분전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의정부 축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선점한 북한군 제3, 4사단의 좌우익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더 이상 단독으로 앞서 나가기 힘들었던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북한군의 지체를 틈타 육군본부는 한강선 방어를 위해 임시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편성했고 삼삼오오 한강을 도하해오는 철수병력을 재편성하여 6월 29일에는 간신히 한강방어선이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을 지체했던 북한군은 그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더불어 미국 지상군의 조기 참전가능성이 대두되자 6월 30일 밤부터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전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을 마주보고 치열한 공격과 방어가 이어지고 난 후인 7월 1일 04시, 철교를 이용하여 4대의 적 전차들이 강을 건너고 후속하여 북한군 주력이 영등포까지 진출하자 그동안 아군이 필사적으로 막아내던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국군은 7월 3일, 경부축선을 따라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북한군 전차]

  필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강 방어선은 붕괴되었지만 국군과 북한군이 한강을 사이에 놓고 대치했던 6월 29일부터 7월 3일까지의 5일간은 전쟁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그러한 시간이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한강교 폭파로 인해 적진에 고립되며 붕괴되었던 국군 주력 부대들이 천금같은 5일간의 시간을 이용해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하여 지연전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그 시간 동안 미군이 증원되어 참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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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sablanca 2010.01.22 0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은 비극이지만 마치 소설처럼 미스테리가 많군요.

  2. clothing factory 2011.05.25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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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르 2011.10.20 22: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전쟁역사를 좋아하는데.. 이런 보물같은 자료들을 찾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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