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mm 무반동총의 적 벙커 공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9.20 08:28

- 백암산 고지 탈환작전,1951년-

옛 보병 장비인 57mm 무반동총은 6·25전쟁에서 대활약을
했음에도 자매격인 60mm 박격포와 같이 그 전공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7mm 무반동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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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6·25전쟁 참전 용사인 이봉조 선생이 썼던
‘분대장’이라는 옛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1951년 7월 18일.
중공군이 포진하고 있던 백암산[1279고지]의 탈환을
명받은 국군 5사단 35연대는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은 이미 전날 [17일] 대대적인 박격포 준비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봉조 이등 중사는 60mm 박격포 분대장으로

이 고지 탈환
전투에서 박격포 사격을 지휘했다.

아래는 그 분의 전투 수기다.


이봉조 이등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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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본부가 위치한 바로 아래에 우리들 박격포반이
자리를 잡았다.
적진은 우리 부대가 있는 지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공격하는데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기필코 부대의 명예를
걸고
신명을 다 바쳐 백암산을 탈환하겠다고
굳게 결의하였다.


57mm로 적진을 강타하고 있는 미군- 1951년 3월 38선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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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산은 워낙 높은 지대라 박격포탄 운반에도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공격에 동원한 박격포는 예비 중대 것까지 합치면
9문이었으나 위치와 포탄 보급 관계로
최초에는 내가 지휘하는 포 1문만 자리를 잡아
기점 사격을 하다가 나중에 다른 박격포도
사격에 참가하게 되었다.


60mm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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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나는 포반장의 결원으로 분대장에서
박격포 3 문을
지휘하는 박격포 반장으로 현지에서
임명을 받았다.

각 분대에는 포 분대장과 사수가 있었으나
사격술이
미숙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중대장은
나로 하여금
직접 포를 운용하여 지원 사격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그간 소총 분대장으로서 실전 경험을 쌓아 왔었고

박격포 포술에는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명령에 따라 임무 수행이 가능하였다.

우리 포반은 고지 정상을 집중적으로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적과의 거리는 불과 400미터 내외여서 가늠대를
포목선상[砲目線上] 꽂아 직접 조준하면서 사격제원을
산출할 수 있었다.


오후 늦게 시작한 포격을 밤새도록 하고도 뒷날에도

하루 종일 계속 하였다.
우리들의 포격이 정확했음인지 적군의 활동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유개진지[有蓋陣地]내에 대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어느 때는 적군 몇 명이 뛰는 것을 나의 포진지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 포반은 포탄 보급정도에 맞추어 쉴새없이 포격을

가해서 적의 활동을 견제하고 시설을 파괴하였다.


단장의 능선 -한국 전쟁 기간의 삼분지 이 세월은 피아 쌍방
이런 험준한 산악에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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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17일 바로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공격 개시 전에서
적진에 퍼부은 박격포탄은 무려 5,000여 발에 가까웠다.
적의 벙커는 명중탄을 여러 발 맞았는데 흙먼지만
일으킬 뿐 파괴되지 않았다.


쌍안경으로 세밀히 관찰한 바로는 벙커를
덮은 훍의 두께가 1m 이상 되는 것 같았다.


60mm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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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으로 통하는 9부 능선이 시작되는
곳에
적은 두 개의 벙커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그중 한 곳에 기관총과 따발총으로,
벙커 정면으로
공격하는 우리 부대원이 보이기만 해도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우리는 박격포탄을 계속 벙커에 명중시켰으나

불을 뿜는 적 벙커의 총안[銃眼]는 멀쩡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군 돌격 부대는 적의 기관총 사격 때문에 이 능선

양쪽 계곡에서 더 이상 전진을 못한 채 호를 파고
대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목격한 우리 중대 본부 소대 선임하사인

김정대 중사가 중대장에게
“중대장님 화기 소대의 무반동총으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고 건의하였다.

중대장은
“아! 그걸 잊고 있었군, 빨리 무반동총 가져와!“ 명령하였다.


57mm 무반동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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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 계곡에 놓아 둔 57mm 무반동총을 관측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즉각 배치하였다.
배치 완료된 시각은 오전 9시 경이었다.

무반동총을 정 조준한 다음 포탄 한 발을

장진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급히 살펴보니 공이가 부러져 있었다.

폐쇄기 뭉치에서 고장 난 공이를 제거하고 새 공이를

갈아 끼웠다.
무반동총을 손 보고 다시 발사하기 까지는
10여 분이 걸렸다.

이번에는 이상이 없이 발사되었으나 첫 탄은

총안을 명중하지 못했다.

무반동총 진지에서 적 벙커까지의 거리가 300미터에
불과했는데도 그것을 명중시키지 못한 것이 몹시 쑥스러운지
김중사는 머리를 긁적이었다.

다시 침착하게 조준하여 발사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탄착 지점을 확인 할 수가 없었다.
모두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펑!“하고 적의 벙커가 폭발했다.
적 기관총 진지 총안으로 포탄이 들어 간 것이었다.


57mm 고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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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진지 옆에서 보고 있던 중대장 이하 전 대원의 환호성이
요란하게 퍼졌다.“됐다! 명중이야 , 대성공이다.”
이어서 각 소대장에게 돌격명령이 무전으로 하달되었다.
각 소대장은 중대장으로부터 돌격 명령을 받자마자
“소대 ! 돌격 앞으로-!”
백암산 능선 사면을 잽싸게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적군은 사방으로 놀란 토끼처럼 달아나느라고 야단이었다.
중대원들은 고지 하단부로 도주하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고지가 원체 가파른 곳이라 추격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대대에서 내려왔다.

우리 박격포반원들이 산정으로 올라올 때 보니까 문제의
기관총 벙커는 지붕이 무너져 있었다.
그 곳은 적 기관총 조 2명이 완강히 저항했던 곳으로
두 놈이 죽어 있고 기관총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런데 놈들이 독하다는 것은 거기서 또 증명이 됐다.
그 곳은 흙으로 후방 출입구를 완전히 막아 놓아 사방이 막힌
폐쇄된 곳이었다.

두 명을 그렇게 가두어 놓고 죽을 때까지 저항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반동총으로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던 김 정대 이등 중사는
이봉조 씨와 친한 전우였고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적 벙커 파괴의 수훈을 세운 그는 산 아래로 도망가는

중공군 낙오병을 추격하다가 아군 타 부대원이 던진 수류탄에
아깝게도 희생되었다.

다음 날 7월 19일 아침 각 소대 각 분대 별로 휴식도중 6사단

병력이 올라와서 우리 사단과 진지 교대를 하고 우리 중대는
방어선 후방으로 내려가서 대기하며 정비를 했다.


이봉조 이등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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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 참가자인 이봉조 씨는 1950년 11월 자원입대해서
1954년 5월 제대할 때까지 3년이 넘게 전방을 누비며
소총수, 자동소총 사수, 그리고 소총 분대장, 박격포 분대장
반장직을 역임하면서 싸운 역전의 용사이다.

대담한 적진 잠입으로 중공군 2명을 생포해와
화랑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피의 능선 - 고지 전투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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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당시 소위 ‘빽’없는 보통

국민이었는데
그는 국방의 일선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가 2년간 틈틈이 원고지 1,000매에 쓴 전투 수기 ‘분대장’을

읽어 보면 그가 전쟁기간 내내 보이는 상관에 대한 존중심,
동료 전우들과의 전우애,
부하들을 아끼는 애정,
그리고 업무를 연구하고 열중하는 태도는 물론 전투에 임해서
그가 내리는 냉정한 판단과 지휘의 용감함은 읽는 후배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을 발간하던 1980년도에 50대의 가장으로

택시 운전을 했었는데
지금은 연로하여서
은퇴했을 것을 추측된다.


6·25전쟁에서 영웅들만이 호국의 중책을 수행했던 것이 아니다.

이와같이 국가의 부름에 받고 불평 한마디 없이 일선에 배치되어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일반 서민 출신‘보통 병사’들의
무수한 희생과 무공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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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영보 2010.09.21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수많은 선배님들의 덕분에 오늘으이 있음을 항상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2. 비도승우 2010.09.22 0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존경스러운신분입니다. 다만 5000여발의 60mm 박격포탄이 아깝게 느껴지네요..

    57mm 한발로 이리 쉽게 해결될것을.. 그래서 중요한것이 적재적소에 대응화기와 전술을

    대입하는 지휘관의 판단력같습니다. 아무튼 이봉조 선배같은 분들덕에 이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분들의 노고를 언제나 기억합시다.

  3. 바라는것이란 2010.09.22 20: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역 군인입니다....

    분대장이라는 책은 저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혹 출판사나.. 구매할만 한 곳이 있으면 리플을 달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실전에서 쓰여진 책이니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수 있을것 같습니다....

    사실... 국/군내에서 구할수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분대급 이하 제대의 전투경혐이 담겨 있는 책은 구하기가 힘듭니다.

  4. 울프 독 2010.09.23 1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좋은 생각입니다. 이 책은 30년전에 출판되어서 지금은 절판되었습니다.
    병학사라는 곳에서 출판했었습니다. 저는 남산 도서관에서 처음 읽었고
    이번에는 국회 도서관에서 복사했습니다. 필요하시면 국회 도서관에 가셔서
    등록하시고 모두 복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병 교육 자료로 쓸만한 같은 책으로서
    일본인 병사가 쓴 '이런 중대장도 있었다'도 추청 할만합니다..- 같은 병학사 간-입니다.

  5. 2010.09.25 19: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하늘바라기 2010.09.25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암산=흰바위산(하얀 바위산이랍니다) 7사단이 관리하고 제2땅꿀이 근처에 있죠 전 적근산 대성산에서 근무했는데
    옛날생각 많이 나네요

  7. 황태 2010.10.05 11: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7미리 메고 다니는 거 보고 많이 놀린적이 있었는데.
    3.5" 하고 57 무반동총 이것도 무시할게 못되는군요.

  8. cthwn 2010.11.06 17: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참고 자료로 양해해 주시리라 믿고 복사해 가겠습니다.
    그런데 서두에 백암산 공격개시일 1951년과 중간 부분에 박격포 5천여발 발사싯점의 1953년이 시차가 커서 제가 다른 경로로 확인해 본 결과 1953년이 맞는것 같습니다. 아마 오타인것 같은데어째튼 좋은 자료 제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9. save money tips 2012 2012.05.23 1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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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밸리 전투(제 3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0 09:31

남쪽으로는 얼어붙은 곡릉촌을 도하하여 매내미 고개로 가는

길을 탔던 영국군들도 중공군이 추격 포위하고 

공격했다 .

이 지역은 현재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다.



영국군의 탈출 출구였던 매내미[큰 고개] 고개에서 본
해피 밸리 격전장.이 전투의 후반에 격전을 벌인 삼하리 벌판.
고가 차도 건너 멀리 철탑 옆에 보이게 우뚝 솟은
산 아래가 불미지 격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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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넒은 들에서도 영국군의 피해가 컸다.

현지에 가면 당시의 전황을 보면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곡릉천 좌우,고양시 선유리와 양주시 삼하리에

직경 1km의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군은 이 포위망을 벗어났어도 매내미 고개를 넘을 수는 없었다.

매내미 고개로 올라가는 가파르고 좁은 곳에서 탈출했던 트럭이

피격당해 불타오르며 길을 막아 버렸다.

이 길은 차 한대가 겨우 통행할 만한 폭을 가지고 있다.


중공군의 박격포가 때렸는지 중공군이 달려와서 고개를

밀봉 공격했는지는 확인 할 수는 없다.

[트럭은 마지막으로 전차와 같이 행군했던 유조차량일 수도 있다.]



삼하리를 가로 지르는 작은 농로에서 전차들과 보병들의
피해가 많았다.
지금은 이 옛 길과 농수로는 없어졌지만
매내미 고개로 통하는 옛길의 흔적같은 것이 보인다.

비닐 하우스 우측 차가 나오는 길은 가파르게 매내미 고개로
연결된 자취가 있다. 대단히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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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전차들은 곡릉천 북쪽 고양 선유리에서부터

진드기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의 공격 때문에 해치를

닫고 잠망경으로 밀폐 조종을 해야 했었다.

그래서 곡릉천에 빠지는 전차들도 있었다.


그리고 곡릉천을 넘어 삼하리로 이동한 전차들도

밀폐 조종으로 좁은 길을  간신히 타고 가야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소달구지나 다닐 좁은 길을 암흑 속에서 밀폐 조종은
사실 무리였다.

여러 전차가 좁은 길을 벗어나 길옆 수로에 빠지고 길을 막아
전차병들도
전차를 떠나 살길을 찾아야 했다.


삼하리 격전장의 유기 된 전차를 전투 며칠 뒤에 보신 어르신네는

6-7대쯤 되어 보이는 전차들이 포신을 전부 서쪽으로 돌리고

유기 되어 있었다고 말씀 하셨다.


[요약하자면 14대의 전차들은 그 절반인 6-7대가

곡릉천 북쪽에 유기 되었고 나머지 절반이 좀더 전진한

곡릉천 남쪽 농로에서 유기 된 것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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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전차대를 공격했던 중공군이 항상 하는 대로 우회한후
삼하리 서쪽 방향에서
전차대들에게 공격을 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매내미
고개가 막히거나 선두 전차가
수로에 떨어져 기동로가
막혀 버리자 전차들이 차체를 돌려
서쪽 구파발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제시하기도 한다.


[말씀해주신 어르신네는 조종석의 방향이 어느 쪽이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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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리의 다른 어르신네는 영국군 전차 2대가 도로를 벗어나

자기 집 논에 들어와서 유기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었다.


두대의 전차는 논바닥에 엔진 오일을 쏟아 놓아서

그 논의 농사가 삼년동안이나 잘 되지를 않았었다.


이 전차들은 곡릉천을 건너 매내미로 가던 전차였는데 논으로

들어간 것은 막힌 농로를 우회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탈출하는 영국군의 위치에서 본 매내미 고개.
옛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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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투입 된 크롬웰 전차 14대중 한 량도 귀환하지 못했다.

지옥의 전황은 영국군이 대량으로 살상당하고 남은 병력을 수습한

부사관 쇼가 이들을 인솔하고 전장을 탈출함으로서 끝났다.


그는 중공군이 도로 구간마다 달려 붙어 공격을 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죽음의 현장에서 목숨을 내놓고 체득했다.


그는 부하들을 인솔하고 중공군이 붙은 도로를 떠나서

매내미 고개 서쪽 1km 지점의 언덕을 넘어 탈출했다.


그가 인솔하고 나온 부대 인원은 겨우 70명 내외였다.

상황이 종료된 이 때가 1월 4일 새벽 03:40분이었다.


이날 전투에서 영국군은 157명이 전사했다.

원래 208여명이 실종 되거나 전사한 것으로 믿어졌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생존한 영국군이 귀환했고 나중에
포로가 되었던
장병도 귀환하였다.


영국군이 죽거나 탈출한 현장에서는 중공군들의

약탈이 극성을 부렸다.

중공군들은 전투 중간부터 틈만 나면  몇 차례나 사체를
뒤지고
중요 전리품을 챙겼다.    
  


영국군이 격전장에 유기했던 크롬웰 전차.
중공군 점령중 두달이나 이 위치에 있다가 
수복후 회수되었다.
 
현지 어르신은 영국 전차가 작았고 하꼬가다[상자형]이라고
회고 했다.크롬웰 전차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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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되었다.

삼하리에 사시는 한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밤새 총소리와 폭탄소리와 비명소리에 간을 콩알만큼 조리고 있던

식구들은 날이 밝자 필요한 보따리만 싸서 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은 몇 백 미터 되지가 않았다.

동네 입구에서 지키던 중공군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난생 처음 보는 중공군들이었다.

식구는 그들의 명령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아직 소녀였던 할머니는 비로소 마을 주변과 동네 길에

부서진 트럭과 영국군 사체가 즐비한 것을 발견했다.

사체들은 보기에도 처참하고 무서웠다.


전투가 종료되고 몇 시간이 되었는데도 영국군 트럭들은

시동이 꺼지지 않고 계속 엔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끔찍해서 한손으로 눈길이 발길만 보이게 가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집으로 돌아와 며칠간 집밖으로 나가지를 말았다.


밤에는 젊은 영국 군인의 귀신이 찾아와 구슬피 울 것 같은

두려움도 들었다.


중공군들은 자기들 사체만 치우고 자기들이 마구 함부로 하며

약탈하던 영국군의 사체는 그대로 내 팽개쳐 놓았었다.


서울이 점령되고 마을의 중공군이 떠나자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먼 이국에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뜬 불쌍한 외국 젊은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정중히 장례지내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원칙이

확인되었고 동네의 성인들은 모두 영국군 전사자 매장 일에

자원하고 나섰다.


침략군이니 뭐니 하며 매장을 반대하는 빨갱이스러운

인간들은 이 인간적인 도리를 논하고 실행하는 상황에

한 명도 나오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영국군인들이 그렇게 도달하려고 노력했던

전장의 끝 매내미 고개 우측 언덕에 길고 깊은 장방형 묘지를 팠다.


그리고 동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영국군 유해들을 거두어서

자기들이 마련한 장지로 운구해갔다.

동네 분들은 영국군 유해들을 가능한대로 정중히 취급했다.


이 때 이일을 한 어르신네는 눈을 반쯤 뜨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숨을 거둔 금발의 영국군을 보니 가슴이 메어지더라고 했다.


동네 분들은 아픈 마음으로 유해들을 판 묘소에 일렬로

한명 씩 최대한 편하게 눕혀서 안치했다.


그리고 겨울이 가고 봄이 어른거리는 3월이 되었다.

두 달 간 동네 여기저기에 방치한 영국군의 트럭이나 전차들은

아무도 손대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


서울이 탈환되고 유엔군이 고양군에 들어오고 불과

수일 뒤에 영국군이 찾아왔다.


그들은 영국군이 피해를 당한 지역을 돌아보고 전사자들의

행방부터 찾았다.


동네 어른들이 잘 모셨다고 말하고 집단 묘역으로 안내하자

그들은 안심한 듯 고마움을 표하고 돌아갔다.


그 뒤에 영국군이 그 묘역에 자주 찾아왔다.

일요일에는 수십 명이 여러 대의 트럭을 타고 와서

추모 예배를 드리고 갔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자 영국군은 그 묘역에 위에 위령비

[또는 추모비]를 세웠다.


매내미 고개 바로 우측 농원의 바로 뒤에 위령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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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 전투가 왜 해피 밸리 전투로 명칭이 붙었는지

짐작이 간다.

1차 세계 대전 1917년 4월 11-12일에 있었던 아라스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 12 사단의 장병들을 안치한
Monchy-le-Preux 의
군 묘지 명칭이 해피 밸리[HAPPY VALLEY] 영국군 묘지다.
76명이 잠들어 있다.



프랑스 카레 근처 영국군 해피 밸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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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힌트를 주어서 이 영국군 묘역을 발음하기 힘든

현지명대신 해피 밸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
전투 명칭까지로
발전한 것 같다.


이 참혹한 전투는 해피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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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인이나 민간인의 추모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다가

전쟁이 끝났다.


어느 날 묘역이 분주해지더니 영국군의 유해를 모두 영국으로

이장해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간 묘역을 다시 파고 영국군의 유해를 수습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유해는 모두 발굴되어 아마천으로 정성스럽게 싸여져
관에 놓여졌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 영령들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안도와

허전한 마음으로 전송했다.


유해가 영국으로 운구 되어 가고도 영국군이 세운 위령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이 지나자 이 위령비가 쓰러져 버렸다.


행정당국이 이 사실을 영국 대사관에 알리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때의 지방 행정부서나 당국은
연락수단도 시원치 않았고 해서
그대로 두어 버리는
무심한 대응을 했다.


동네 사람들도 오고 가면서“저것 다시 세워야 하는데---”
하면서도
자기일과 무관하니 안타까운 마음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몇 년이 그대로 지난 어느 해인가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풍문에 영국으로 가져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민들은 한국인들이 쓰러진 위령비에 몇 년씩 관심을 안 가져 준

사실에 영국 당국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이 비를 본국으로

가져갔다고 하면서 미안하게 생각했다.


한 어르신은 이 비석을 영국이 가져간 때가 작은 고개와 매내미

고개를 직선으로 잇는 큰 도로가 뚫릴 무렵인 1980년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조사를 해보니 위령비는 그 보다 훨씬 전에 영국으로

이전시킨 것이 발견되었다.


영국 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 비는 1962년 영국으로 가져와

북 아일랜드 얼스터 부대가 주둔했던 벨리메나의
세인트 패트릭 기지에 재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영국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위령비 일대가
도시화 되어가고
있어 소멸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장소는 큰 도로 하나 뚫렸을 뿐이고 지금도

전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영국이 위령비를 가져간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네 분들 말씀대로 비가 수년간 쓰러진 채 방치 된 사실에

자극을 받고 가져갔다는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한국인들이 위령비를 앞으로도 그렇게 함부로 방치되면

종내는 없어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가져간 것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목숨을 바쳐 지켜준 나라의 냉대에 영국이나 영국 영령들이

화가 날 만도하다.


얼스터 연대는 1968년 로얄 인니스킬링 푸시리에 부대와

합병하여 로얄 아이리쉬 레인저스 부대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비석이 서 있던 부대의 기지도 얼마전 폐쇄 되었다.

이 기구한 비석은 2008년 5월 벨파스트 시청으로
이동하여 현재는 다른 전쟁 기념 동상들과 함께
시청의 마당 한구석에 전시되고 있다.
시청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 둘러 볼 수가 있다.



위령비가 있는 벨파스트 시청
---------------------------


내가 방문해서 만난 고양시의 격전지 현지 주민 한분은

삼년 전에도
영국인들 세 명이 이 지역을 찾아와서
비석 위치와 격전지 위치를
물어보았다.


자신은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별 도움이 못되었다고 했다.

그 영국분들은 주변 여기저기를 반나절이나 헤매다가
낙심한체 돌아갔다.

이 사실은 아직도 영국인들이 해피 밸리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한국이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6·25전쟁 때
참전하신 분들의 방문 행사도 하고  전적 기념지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국군 얼스터 부대가 크게 희생했던 이 해피 밸리
지역에는
희미하게 전해오는 전설 같은 영국군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서두에서 말했듯 파주군 설마리 전적기념 공원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 -
우리 한민족에게 해피 밸리 전투에서 희생한 영국군 장병들의
가치는 설마리에서 산화한 장병들 희생의 그것과 다를바 없다.
---------------------------------------------------------


민족의 비극인 서울 시민의 1.4 후퇴를 결사 엄호하다가

희생한 영국군의
영령들이 한국의 국민들에게 이렇게
잊혀 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희생 영령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한  전적 기념 공원이
전투지에 건립되어야
할 것이고 한국인의 무심함에 서운했던
영국인들이 가져갔지만
또 다시 갈 곳을 잃고 북 아일랜드
벨파스트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그 위령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간청으로 다시 찾아와 

이곳에 건립되기를 염원해본다.

그것이 1.4후퇴의 처절한 상처를 적지않게 입었던
동방예의지국 한국인들이 꼭 해야 할 보은의 성의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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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0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김현수 2010.07.23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령들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국민들은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

  3. 바부퉁이 2010.07.23 2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병 1개 중대로 증강된 전차 중대를 먼저 출바시켰으면, 야간에 소음 으로 인해 집결해있던(철수전 집결했는지는... 배치된 상태에서의 철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장소가 아군의 기도가 노출되고, 그 위치로 어렵풋이 박격포의 조명탄을 솼다면, 바로 노출되어 전위부대인 전차 중대부터 공격 당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또한... 그때까지 중공군의 전술을 잘 몰랐던 영국군의 지휘관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수도 있을거 같습니다(물론 잘못된 선택 이었죠)

  4. 강헌 2010.07.24 0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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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밸리 전투(제 2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0 08:38

퓨시리어 대대와 같이 한 시간 만 더 일찍 명령을 접수했다면

얼스터 대대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명령접수 지연은 그날 밤 큰 불행을 얼스터 대대에게 안겼다.


철수명령을 늦게 받은 대대는 유기 장비들이 없도록 모든

짐을 다 트럭에 적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군들은 급한 상황 철수시 모두 버릴 장비도 영국군은

모두 챙겼다.


보병들은 언덕에서 내려와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철수 행군 순서는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B중대가 앞장서고

그 뒤를 대대 본부가 뒤따랐다.


그리고 전투식량과 탄약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다음,

그리고 C,D A,중대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을 크롬웰과 대대에 배속된 탱크 지원중대의

파견대가 후위를 맡았다.


마지막 기만과 정찰을 위해서 박격포로 무장한 소대병력
장갑차 부대가
작은 고개에 잔류하여 불규칙한 교란 사격으로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 부대의 장갑차들은 11시 20분에 철수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낮에 제일 높을 고지인 작은 고개를 점령했다가 공습으로

공격대가 전멸당한 중공군은 고지에서 영국군이 모두 철수하자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고지를 점령하고 그 연이은 언덕들에
신속히 침투하였다.



철수로는 우측 위의 쟁고개로부터 아래로 그은 푸른 선이다.
이 소로옆을 따라 언덕이 연이어 있다.
동그라미로 표시한 곡릉철교를 전후에서 전투가 격화되었다.
---------------------------------------------------------

나증에 비극의 현장을 이 된 이 작은 고개 지역은 100미터도
안되는
언덕들이 도로를 따라 몇 백미터 내려오다가
곡릉천을 만나면 오른쪽
즉 하류 쪽으로 휘어져 하천을 따라 갔다.


다른 말로 쉽게 설명하면 ‘ㄴ’를 거꾸로 휘어 놓은 것 같은

형태를 띄우고 있다.


지금은 작은 고개를 통과한 도로가 남쪽을 향하여 직선으로
힘차게 뻗어 갔지만
영국군이 싸울 때는 도로가 바로
작은 고개를 넘어와 곡릉천을 만나면
다시 옆으로 휘어져
언덕과 하천 사이를 따라 가다가 하천을 건너 삼하리
벌판을 
가로 질러 매내미[큰 고개]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작은 도로였다.
새도로가 뚫리고 이 도로는 없어졌다. 


우마차나 겨우 다니는 소로였고 지역 물류나 교통은

이 지역을 지나는 열차가 담당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대를 수송할 차량부대가 이 역 L자가 끝나고

곡릉천을 건너 삼하리로 들어가는 지점, 다시 말하면 교외선의

철교가 지나는 지역의 눈 덮인 논에서 정렬하여
대기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곡릉 천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구도로 -이 길로 영국군의
보병들과 전차들이 철수했다.
------------------------------------------------------


문제는 이 지점이 중공군이 은폐해서 접근할 수 있는 언덕애서
불과
2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대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근처 언덕을 따라  빠르게 전개했다고 믿었다.


그래서영국군은 어둠을 이용해서 이 소로를 타고
빨리 전선을 벗어 나기로 했다.

기도비닉이 중요하였다.


-------------------------------------------------------

사후약방문 격이지만 이는 잘못된 전술적 판단으로 보인다.

중공군의 전투 자산은 ‘밤’과 ‘산’이다.


이 중공군의 전술적 자산은  밤이 되면 산을 타고

은밀하게 유엔군의 틈새로 침투해서 후방 도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활용되었다.

이미 한달전 미 1 기병사단의 한 대대가 이같은 우회침투와
도로 차단의 전술에 의해서 궤멸 되어 버렸다.

영국군의 철수로 좌측은 낮은 산[언덕]이 동행하듯 같이

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는 영국군 철수도중 중공군이 얼마든지 도로차단과

측면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공군 전술이 이날 밤 이 순간에 꿈틀대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군에게 이 우회 침투 가능성이 높은 도로 옆
언덕[산]에서
일 분이라도 빨리 떨어지는 것이 중요하였다.


즉 '기도비닉'보다도 '신속이탈'의 전술적 명제가

더 급한 상황이었다.

쟁고개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철수로와 나란히 뻗은
언덕형 산맥- 철수시 이 언덕의 위험을 인지하고
빨리 이탈해야 했었는데 --- 유감 스럽다,
------------------------------------------------


전차부대 지휘관 쿠퍼 대위가 선두에 서겠다고 자원했지만

전차의 요란한 엔진 소리가 적에게 부대 철수를

알린다고 믿어서 이 요청은 거절당했다.


모든 트럭과 보병이 떠난 후  전차 부대는 뒤에서 천천히

후위를 맡아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탁상공론을 또 해본다.

먼저 전차와 트럭에게 보병 1개 중대를 배속시켜

중공군이 붙은 우측 산에서 신속하게 이탈하여

후방 매내미 고개로 철수하고  이들로 하여금

철수 부대의 화력지원을 하게 한다.


보병들은 도로에서 벗어나 구보로 삼하리 들을 가로지르는
직행으로 3킬로 떨어진
매내미 고개로 가게 했다면 그날 밤
아무리 상황이 나빴어도
전차 14량을 다 잃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철수는 계획대로 되어 가는 듯했다.


우측 언덕의 중공군은 영국군이 철수하는 줄은 알았지만

어둠 속에서 길 위의 이 부대를 무턱대고 공격할 수는 없었다.

병참이 빈약한 중공군은 실탄을 물처럼 쏴대는 미군들에 비하면

무척 사격군기가 강해서 실탄을 아껴 함부로 교란 사격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전투 지역에 두 개의 철교가 있다.
이 철교는 첫번째 철교로서 얼스터 대대는 그 우측 길을
무난히 통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


이 철수 부대에 갑자기 불행이 찾아 온 것은 밤 9시 30분이었다.

선두 B중대와 본부 중대는 이미 매내미 고개를 넘어서

전투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고 그 뒤를 일부 부대가 승차한

트럭 부대가 후속하는 철수의 중간이었다.


검은 하늘에 출동한 미 공군기가 낮에 항공 공격을 했던

이 지역에 이르자 조명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움직이던 영국군의 모든 것이 언덕위의 중공군에게

백일하에 들어났다.

중공군은 즉시 자동화기 포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하고 이어서

수백발의 박격포탄이 날아보냈다.



중공군의 매복 공격.
-------------------


이동하던 영국군과 트럭들은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았다.

일부 트럭들은 정지하기도 하고  불에 타기로 했고

많은 보병이 죽어 나갔다.


최대의 비극적인 전투가 대대가 최종 목적지인 곡릉천 이북

철교 근처 작은 마을 불미지 인근의 수송 트럭 집결지에서
발생했다.


영국군이 중공군에게 불의의 첫 일격을 맞은 곳은

곡릉천 철교 오른쪽의 논에 수송트럭들이 집결한 곳이었다.


중공군의 지휘관은 매우 노련하였다.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으로 영국군의 지휘체계를

충분히 흔들어 놨다고 판단하고 언덕으로부터 이 지점으로의

돌격을 명했다.


돌격 나팔 소리와 함께 언덕으로부터 중공군 대병력이

새까맣게 언덕 아래 영국군의 측면으로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와
부대를 덮쳤다.



중공군들이 내려와 영국군을 급습한 낮은 언덕의 한 부분.
이 연속 언덕은 앞 사진 언덕의 연속이지만 앞의 언덕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이 언덕은 곡릉천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다.
-----------------------------------------------------------


중공군이 항상 장기로 삼는 단병접전(短兵接戰)의 전술이

어둠 속에서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적의 공격은 집요했다.

그들은 사격을 하며 몰려와 삽시간에 영국군과 뒤섞여 버렸다.

아무리 정예 부대라도 이 상태로 기습을 당해
지휘체계가 붕괴 되었다면 어쩔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근거리의 영국군을 닥치는대로 쐈다.

영국군들도 스텐 기관총과 소총, 브렌 기관총으로 용감하게
응전했으나
이미 지휘체계가 마비 된 상황에서 그것은 각 병사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전투는 탈출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영국군과 이를

살육하려고 쫓는 중공군 때문에 전투장이 서쪽과 남쪽으로

직경 1km정도로 확대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서쪽으로는 전진하는 영국군이 진입한 불미지

마을과 그 동쪽 터널로 전투장이 확대되었다.


영국군의 기록에 의하면 중공군들이 크롬웰 전차의 궤도를

궤도 파괴용 특수 폭탄을 써서 파괴 했다고 되어 있지만

현지를 방문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중공군은
특수 폭탄이 아니라
평범한 방망이 수류탄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

크롬웰 전차의 궤도는 방망이 수류탄에도

파괴 될 만큼 좁고 얇고 연약하였다.


방망이 수류탄에 전차 14대가 나가 떨어지는

전무후무한 진기한 기록을 만들었다.


현지에 가서 확인했지만 이곳 지형은 센츄리온 전차나

크롬웰 전차의 기동에 차별적 제약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탁상공론만 하지 말고 더 튼튼한 궤도를 가진 센츄리온

전차를 파견 헸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에 참전한 센츄리언 마크 3 형 전차- 20 파운드[84mm]
포를 가지고 있다.
---------------------------------------------------------

6·25전쟁 참전 센츄리언 탱크는 특히 그 탁월한 야지 횡단
능력과 고지 등판 능력으로 미군들의 전차들 보다도
휠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 튼튼한 철 궤도의 현수장치는 나중에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할 때 참조했었다. 

1960년대에 한국군에서 센츄리온 탱크와 비슷한

크기의 M-47 탱크 철궤도에 수류탄을 넣고 폭파하는

실험을 했지만 궤도는 끄덕 없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


크롬웰 전차대의 소대장 알렉산더는 사방에서 공격하는

중공군들을 피해서 곡릉천 제방 위를 달렸다.



곡릉천. 이 하천은 당시 얼어 있었다. 남쪽 제방에서 본 북쪽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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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하면서 그는 중공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진지에 75mm

전차포를 발사했다.

크롬웰 전차들과 보병들은 적이 점거한 불미지 마을로 진입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전차는 불미지를 통과했지만 적의 방망이

수류탄 공격으로 궤도가 벗겨지고 정지해야 했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피다가 피격당해

전사했다.

그의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를 버리고 탈출했다,


뒤에서 후속하던 대장 쿠퍼 대위 역시 전차 궤도가 끊어져

포수 쿠퍼 하사와 함께 곡릉천쪽으로 피했지만 이들은

중공군 20여명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목격당하는 것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일부 전차들은 철로를 따라 고양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집요하였다.


철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 터널 [용본 터널-동네 어르신네는
굴칸이라고 부른다.]
안에 진입한 크롬웰 전차를 공격해서
기동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뒤에 따르는 두 여대의 전차들도 정지하고 승무원들은 중공군의

사격 속에서 피신할 곳을 찾은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유기된 크롬웰 탱크.
중공군이 고정 포대로서 활용하려고
위장 했었다.

크롬웰 전차 한 대는 중공군이 몰고 한강 철교까지
내려와서 배치되었다가 마침 반대편의 남안에 나타난
영국군 센츄리언 탱크에 의해서 격파 되었다.
--------------------------------------------------
 

중공군은 영국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섬멸작전을 계속하였다.

불길에 휩싸인 불미지는 영국군의 묘지가 되었다.


부대의 맨 뒤에서 행군하던 대대장 대리 브레이크 소령은

이 난전을 지휘하려 애쓰다가 이 동네 외곽에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중공군의 공격은 곡릉천 남쪽 양주시 삼하리에서도 전투가
격심했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철교와 불미지 마을 일대가
최대의 격전장이었다고 했다.



전투의 분깃점인 곡릉철교- 이 좌측에
해피 밸리 전투 최대의 격전장이 있었다.
--------------------------------------


전투 후에 곡릉천 북쪽 선유리에서만 파괴되고 유기된 전차만

6-7대나 되었다고들 하였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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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hasiswa terbaik 2011.10.23 0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파일입니다. 나는 비즈니스 프레 젠 테이션을 자신의 콘텐츠를 작성 데이터의 형식을 배우고, 이것은 또한 분명합니다.

  2. cobra wellbeing insurance 2012.05.28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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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xpress village insurance 2012.05.28 10: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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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overnment wellness insurance 2012.05.28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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