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플리트'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8.10 70. 매봉 및 한석산 전투 (3)
  2. 2010.07.28 65. 거인의 퇴장 (5)
  3. 2010.07.22 음지에서 승리를 이끈이들 (6)

70. 매봉 및 한석산 전투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10 09:04

 

  공산군의 제5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즉시 반격에 나섰습니다. 전임 사령관 리지웨이는 일단 상황을 본 후 점진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신중한 스타일의 지휘를 하였지만 밴 플리트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즉각 추격을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공산군의 전투력이 고갈된 취약시기를 이용하여 적을 38선 이북으로 완전히 밀어 붙이고 공산군에게 차기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재편성과 휴식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밴 플리트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합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 )


  사실 이것은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약점이 무엇인지 간파한 이상 그들이 회복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5차례의 공세를 통해서 중공군은 한번 공세가 끝나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의 회복기를 두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알게 된 이상 집요하게 파고들어 적을 괴롭게 만들수록 중공군의 재정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이번 중공군의 공세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인 중동부전선을 좀 더 위로 쳐올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세 당시에 공산군 주력을 서부전선에서는 훌륭히 막아내었지만, 오히려 중공군 조공이 견제 공격을 가한 중동부 전선에서 아군은 고전을 겪었습니다. 전선 중앙의 사창리에서 벌어진 국군 제6사단의 붕괴는 서부전선에서 선전을 펼치던 아군이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군하여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더불어 중-동부전선의 주 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간 도로가 북한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였습니다. 따라서 태백산맥 서쪽의 국군 제3군단과 동해안 연안의 국군 제1군단은 보급로가 제한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밴 플리트는 전술도로의 탈환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부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좌절시키자마자 즉시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전방 각 사단들에게 5월 2일부터 위력수색과, 중요목표지역에 대한 공격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동부전선의 국군 6개 사단이 5월 7일, 미주리 선(Missouri Line)으로 명명된 춘천-인제-미시령-속초를 연하는 선을 향해 일제히 반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히 확보해야할 고지가 인제의 우측을 감제하는 위치에 있는 한석산과 매봉이었습니다. 당연히 적 또한 이곳을 계속하여 차지하려 하면서 연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한석산과 매봉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 포로가 된 북한군 )


  당시 한석산을 공격한 부대는 국군 제3군단 9사단 30연대였는데, 이 전투에서 제30연대는 72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적 사살 895명, 포로 42명과 4트럭 분량의 보급품 및 탄약을 노획함으로써 지난 제5차 공세 당시에 깊숙이 남진하여 있던 북한군에게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 전투는 1,000미터가 넘는 산악 능선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는데, 여담으로 참패를 당한 북한군은 약 1년 전 6.25전쟁 초기에 바로 인근의 홍천에서 굴욕을 겪었던 제12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30연대가 혈전 끝에 확보한 한석산은 차후공격을 위한 유리한 발판으로 사용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실 고지는 차지하면 적을 감제하기는 쉽지만 후속 보급이 어려워 지속적으로 확보하기가 생각보다는 어렵습니다. 특히 전선이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어 유동적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뒤이어 실시된 중공군 제6차 공세를 견디지 못한 국군 제3군단이 현리 일대에서 붕괴되었을 때 어렵게 확보한 한석산은 이 같은 이유로 곧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음 공세를 준비완료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제5차 공세를 슬기롭게 막아내고 5월 2일부터 5월 중순까지 곧바로 실시된 반격작전으로 전선을 12~14킬로미터를 북상시켜 38선 일대에 다시 고정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중공군의 출혈을 유도하며 전선을 오히려 북상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막을 내린 제5차 공세에서 공산군은 아군 전선의 결정적 약점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곧바로 개시된 제6차 공세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제5차 공세 당시에 중공군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6차 공세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되었고 이것은 전사에 엄청난 피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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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거인의 퇴장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28 08:13

 
  전쟁 종결 방법에 관한 맥아더의 강력한 의지는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측의 반발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지으려는 트루먼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군이 아닌 유엔군사령관의 직위를 가진 맥아더가 전쟁을 지휘하는 한 정부와의 불화는 더욱 격화될 것임이 명확하게 되었습니다. 맥아더가 설득당하여 그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던 워싱턴 당국은 맥아더를 해임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임된 전쟁영웅의 귀환을 반기는 뉴욕시민]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해임시켰다는 워싱턴 발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당시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이라는 직위 외에도 주일 연합군사령관, 극동 미군사령관, 극동 미 육군사령관의 직위를 함께 보유한 제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군인이기 이전에 일본을 통치하는 총독과 같은 존재였고 인천상륙작전에서 알 수 있다시피 6·25전쟁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하던 또 하나의 주요 정치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거물의 갑작스런 해임소식에 세계는 놀랐으나 사실 맥아더의 해임은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필요에 따라 지휘관을 교체하는 것은 군 통수권자의 고유권한이지만, 문제는 맥아더가 미군뿐만 아니라 국민들과 공화당으로부터도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전쟁영웅이라는 점이 정치인 트루먼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맥아더의 해임은 선거에 임박해 있던 그에게 분명히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심을 거듭한 트루먼은 마샬, 브래들리, 애치슨, 해리만 등의 참모들과 협의를 거쳐 극약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의 후임으로 어려운 시기에 제8군을 잘 이끌어 왔던 리지웨이를 임명하였습니다.
   

  1951년 4월 14일,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한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공석이 된 제8군사령관에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중장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제1급 전투사령관이라는 보증서가 붙어 있는 역전의 용사로 상당히 공세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같이 최고 지휘부가 일거에 교체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공세적인 성격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와 신중한 성격의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의 지휘체제로부터 신중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와 공세적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체제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내한 한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안내하는 리지웨이와 밴플리트]


  이 시점에서 새로운 지휘부의 최대 화두는 소련의 개입이었습니다. 소련의 개입은 지상군을 투입하는 전면개입, 해-공군만 투입하는 제한개입, 장비와 물자만 지원하는 간접개입 등으로 나뉘어 질수 있었는데, 당시 정보에 의하면  간접개입단계로 파악하고 있던 중이었고 규모는 중국군의 참전이후 더욱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현 단계에서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는 개입이 이뤄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한마디로 가장 큰 고민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1951년 4월말까지 소련은 북한이나 중국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국과 북한이 소련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간절히 도움을 원했던 것은 절대 열세 상태에 있던 공군이었습니다. 비록 소련이 MIG-15같은 최신병기를 공급하여 주었지만 흔히 미그회랑(MIG Ally)이라 불리던 한만국경에서나 작전을 펼칠 수 있었지, 정작 가장 중요한 38도선일대는 공중지원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더불어 야포나 전차의 지원도 그리 충분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원인으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이유가 거론됩니다.


  가장 큰 가능성이 중국이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어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는 사태를 소련이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는 가능성입니다. 다음으로 소련의 국력에서 더 이상의 개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소련은 불과 6년 전에 끝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천만 명이상의 인명손실을 입었고 국토의 대부분도 황폐화되어 재건에 매진하여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언급되는데,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이 미국과의 직접대결을 회피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1945년 8월 만주점령 당시 환영받는 소련군,

소련은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지만 적극적인 개입은 주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소련이 6·25전쟁에 확대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주요 당사자였고 중국의 개입을 사주하기도 하였던 소련이 막상 이런 소극적인 자세를 전쟁 내내 견지하자 중국은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이것은 후일 중-소 이념분쟁의 한 가지 원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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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berdashery 2011.10.30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번도 없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 있으니 또한 고마울따름입니다.

  2. qwe 2012.02.19 08: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병전우회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중공군이 물밀듯이 서울로 향하여 내려오고있던 1950년12월23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서울북쪽 의정부의 미군부대를 방문하는 길에 아들 샘 워커중위에게 은성훈장을 직접 수여하기로 했다. 얼어붙은 도로를 맹속도로 달리고 있던 워커중장의 짚을 추월하려던 한국군 트럭이 추월했다. 짚이 옆으로 뒹굴면서 보좌관과운전병은 튕겨나와 살았지만 워커중장은 즉사했다. 이승만대통령은 이 소식을 전해 듣자 사고를 낸 한국군 운전병을 즉시 처형하도록 지시한다. 옆에 있던 미 군사고문관 짐 하우스만 대위가 말려 운전병은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이 짐 하우스만 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런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하버드 대학의 고풍어린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서 목숨을 바친 20여명의 하버드생 병사들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미국은 한 도시에서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한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내보냈다. 교수들도 참전해 더러는 전사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도병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한 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게하는 표지는 없다. 존경하는 소대장님, 용감한 중대장님, 대대장님, 그리고 생명을 던져 진지를 지켜낸 병사들의 애기는 입으로만 전해질 뿐 그들을 기릴 수 있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은 전후 팔응 잃은 국회의원, 눈이 날아간 국방장관을 갖지 못했다. 행사장이나 연회장 같은 데서 한국전 전상자들을 만나 본 적도 없다.>
    여중생 두명이 미군 장갑차 깔려 죽은 것만 기역하는 젊은이들은 6.25때 한국을 지키는 작전을 총지휘했던 미군사령관이 한국인의 과실로 죽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도 다른 미군 사령관의 아들이 자원하여 참전, 폭격임무에 종사하다가 전사한 사실도 모를 것이다.
    알아도 아무 감흥이 없다면 국가적으로,인간적으로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위와 같은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로 모교를 소개 했습니다.

    "6.25때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중장"이라는 글을 써주신 참전 해병 선배님,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많은 가르침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배님께서 "한국의 어느 학교에도 전사학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지나는 자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표지는 없다."라고한 하우스만 대위의 회고록을 인용하셨는데 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모교 '서울고등학교'는 한국전쟁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학생이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많은 학교입니다. 제일 많은 학교가 제주 오현고등학교고, 저의 모교가 2번째라고 합니다. 저의 모교에는 1956년도에 포충탑(褒忠塔)이라는 탑을 건립, 제막하였습니다. 포충탑의 뜻은 충성된 마음을 기리는 탑이라는 뜻이며, 초대 이승만 대통령께서 하사하신 친필 휘호입니다. 그 탑의 뒷면에는 "조국을위해 생명을 바친 학우들에게"란 15자의 글을 그 당시 모교 은사로 재직하고 계셨던 시인 조병화 선생님께서 지어주셨고, 6.25전쟁 참전 학도병들숭에서 전사한 30명의 학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그 후 4.19의거 때 희생된 학우들, 또 월남전 파월전에 수류탄을 덮고 산화하신 강재구 학우등 총 33명의 이름이 각인되어있어 후배들에게 애국의 정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강재구 소령의 흉상은 그 동기들이 졸업 30주년 기념으로 제막하였습니다. 포충탑,강재구 소령 동상,삼일탑(3.1탑)등 3개 시설물은 국가보훈처로부터 2002년 12월11일 국가보훈시설로 지정된 바 있습니다.
    선배님 제 모교 자랑인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도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학우들"의 뜻을 기리는 학교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상과 같은 글을 해병대 전우회 자유게시판에 올렸습니다. What an excellant high school we attended! How smart and nice the education we received was!! How noble

    __________

    지난 해 7월 8일 독립신문(http://independent.co.kr/ )독립군 게시판 623번 글에 실렸던 이 칼럼은 비록 짧지만 우리가 주한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우정을 이해하기 위해 몹시 중요한 글이므로 일독을 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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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서 승리를 이끈이들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7.22 08:30

  전쟁의 승패에 있어 병참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6·25전쟁 또한 군수지원의 중요성이 입증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이던 북이던 38선을 넘어 서면서부터 심각한 군수문제에 시달리고는 하였습니다. 특히 제공권, 제해권을 유엔군에게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수송수단도 열악한 공산군 측의 군수조달 문제는 전쟁 내내 고민거리였습니다.


[수송기를 이용한 보급은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군수조달 환경이 좋았던 아군 측이라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산악이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다보니 최전선의 군수지원에 있어서 상당히 불리하였습니다. 도로가 많이 개통된 현재도 동부전선의 산악지역은 폭설이라도 한번 내리면 병참선이 차단 될 정도로 조건이 나쁩니다.


[미군도 산악지대에서 달구지를 이용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한데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 한 6·25전쟁 당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휴전까지 진행된 참호전은 대부분 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지에 주둔한 제 부대에 대해서 제때 병참지원을 해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전쟁 중반기이후 고지전으로 바뀌자 병참문제가 더욱 중요하여졌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전술(?)이 일반 노무자들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산악지대에 대한 보급을 민간에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었는데,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소위 보국대를 비롯하여 유엔군 참전 이후 만들어진 민간 운반단 (CTC - Civilian Transport Corps), 한국근무단(일명 노무단), 부두하역단 등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산악전을 지원을 위해 조직된 민간인 부대의 모습]


  그중 최전선의 산악 고지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속칭 지게부대라고 불린 노무대가 있었습니다.  이 노무대는 전쟁 동안 산세가 험한 지역에 위치한 부대에게 포탄, 식량 등의 보급품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여 주었는데 대부분이 당장의 호구지책이 어려웠던 월남해 내려 온 청장년들이나 피난민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습니다.


[포탄 같은 중량물도 이 분들의 보급 수송에 절대 의존하였습니다.]


  물품운송에 민간을 동원하한 것은 전쟁 시작과 동시라고 추측은 되지만, 6·25전쟁사에 최초로 지게부대가 등장한 것은 1951년 2월에 있었던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 때였습니다. 1.4후퇴 후, 재반격에 나선 미 제25사단은 수리산 일대에서 저항하는 중국군 제150사단의 응전에 진격이 멈추었습니다. 이때 아군은 50여명의 노무자가 지게를 이용하여 고지대로 보급을 추진하는데 성공하였던 반면 중공군은 보급이 차단되어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화물 적재 후의 모습]


  전쟁 당시 노무자들의 규모는 육군 사단에 편성되어 전투근무지원을 직접 수행한 노무단원 9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며 공식 기록에 의하면 전쟁 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당한 노무자들의 규모가 전사 2,064명, 실종 2,448명, 부상 4,282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노무자들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이 분들을  A특공대라고 불렀습니다.]


  노무자들의 지원 수단은 주로 지게였는데 그 모습이 알파벳 A와 흡사하다고 하여 통상 근무단을 ' A Frame Army ' 즉, 지게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James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회고록에서 "만일 노무자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했을 것이다."고 이들의 노고를 극찬하였습니다.

 

[이 분들의 노고는 조국을 수호하는 원동력 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처럼 지게부대는 戰史의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군의 승리를 위하여 묵묵히 맞은바 임무를 다한 최고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힘써 주신 지게부대 대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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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인영 2010.07.22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보급품을 수송한 분들이네요.

  2. 모글리 2011.10.15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BS스펀지 131회 방송도 있네요...

    쫌 내용은 틀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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