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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14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14)
  2. 2010.08.10 해군의 해상 북진 작전 (4)
  3. 2010.07.30 미 90 mm 전차포에 관통당한 북 T-34 (4)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9.14 08:04

       

지난 4월, 6·25특집 TV 프로에서 터키 참전 용사인 슐레이만
비르빌레이라는 분이 60년 만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자신이
한국 근무시 딸처럼 살피던
한국인 여자 고아를 찾는 사연이
보도되었었다.


술레이만 씨와 어린 아일라 [지금의 김은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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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혈전장 평북 군우리 근처에서 부모를 잃고 떠도는
이 어린아이를 구한 25 세의 술레이만은 아이에게 아일라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국 파병 기간동안 친 딸처럼 길렀다.


1952년 한국 파견 기한이 다 된 술레이만은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 가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모색해 봐도 잘 되지가 않자
할 수없이 아일라를
터키군이 수원에 세운 고아원
‘앙카라 학원’에 맡기고 떠났었다.


술레이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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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속에 엮어진 휴머니즘의 이야기는 술레이만이
어쩔 수없이
귀국하여야하는 시점에서 영원히 헤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부녀 이상의 정이 든 두 사람은 그 긴 세월을 서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를 앙카라로 방문했던 방송국의 협력으로 아일라라고 불리던

한국 고아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이미 손자들을 둔 아일라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된 아일라 김 은자 씨가 북받치는 울음 속에
슐레이만 씨와 부등켜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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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술레이만 부부는 방송국의 주선으로

여의도 앙카라 공원에서
60년 만에 옛 아일라였던 김 은자씨와
눈물의 재회를 했다.

그 장면은 나에게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 상봉을 계기로 참전 터키군의 활동을 테마로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기회가 잘 되지 않았다.
오늘 그 기회를 가져본다.


터키 군은 6·25전쟁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을 파병해서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뒤져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한국 참전 터키 여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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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어키 군은 돌격 선에서 총검을 번득이며 적진으로 돌격해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터키 군이 세계에 그 용맹함과 함께 이름을
드높게 날린 것은
포로 생활이라는 극한 상활에서
발휘한 강철 같은
군기와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한국 파병 터키 군은 1950년 10월 유엔군이 한창
북상할 때
한국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1950년 10월 부산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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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북쪽으로 이동해서 미군 25사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배치되었던 터어키 군은 11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연달아 격렬한 전투를 했다.


터어키 군 -참전국중 제일 많은 병사들이 콧수염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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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한국 전투에서 터키 군은  와원, 신림리,
군우리 협곡,
그리고 선천등에서 연달아 벌어진 네 번의 전투에서 
잘 싸웠지만
21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매복을 당한 군우리에서의 피해가 제일 컸다,
 보유장비의 70%를 손실했다.]


터어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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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말 초전 기습에 재미를 보아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던
중공군의 이들 유엔군 포로 취급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군사 심리전에서 연구되고 있는 차원 높은 특유의
세뇌 기술이
적용되었다.
대륙에서 일본군과 장 개석군들 포로를 취급하면서
축적한 중공군의 노우 하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미군 포로들과 터어키 영국군등의 포로들은 1950년울
지나 1951년도 중반까지도 그들의 수용소가 있었던
‘지옥의 골짜기’에서 엄청난 고초를 치렀다.

포로들은 추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받았고 환자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나갔다.
식량이라고는 귀리나 옥수수 따위 곡물을
자루 채 던져주고 먹으라고 했으나 양이 형편없이 부족했다
굶고 병든 포로들을 중공군들이 중국에서가져 온 장 티프스가
파도처럼 덮쳐서 한 수용소의 미군 포로들이 절반이나
사망하기도 했다.

포로들에게 부식 조달이 좋아진 것은 1951년 여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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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고착된 1951년 여름부터 보급도 좋아지고
병원 서비스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물질적인 상황을 개선하고 나서부터 중공군은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지나친 강제 노동도 없었고 심지어
중공군이
운영했었던 압록강가 벽동 포로 수용소는
보초병은커녕 울타리도 없었다.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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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인도적인 처우 뒤에는 중공군이 노리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포로들은 하루 여섯 시간 씩 영어를 잘하는 강사로부터
정치 강의를 들으며
미국 사회 구조의 차별성과 자본주의
비인간성을 강의 받으며 모국을 미워하는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반면 세계 최대 빈국이었던 중국은 인간미 넘치는 이상사회라는
거짓된 이미지가 세뇌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공산주의 선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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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서 중공군은 미군 포로 사회에 끊임없는 동요를 일으켰다.

중공군의 교묘한 갈등을 부채질 하는 음모는 포로와 포로들
사이에서도 공작
되었다.
포로들의 조직 통제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 조처로서 장교들의
특권을 모두 무시하는 관리 지침이 하달되었다.

“여기는 계급이 없는 사회다. 너희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
이 조처에 철없는 미군 사병들은 당장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상관으로 모셨던 장교들의 등을 툭 치며
야유를 보냈다.
“어이-! 잭!”
선임하사님이나 소대장님 그리고 중대장님의 호칭은
땅 속으로
버려져야 했다.
간부들에게는 은연중 굴욕적인 천하고 더러운 일을 시켜
사병들에게 경멸 당하게 만들었다.
포로들 자치 회장 격에는 자기 계급을 상사라고 거짓말한
질 안 좋은 일등병이 명색 '선거’로 임명되었다.
계급의 무시는 조직의 통제 내지 관리를 마비시켰다.
사회적 규범이나 개인적 염치를 챙기기 힘든 극한적인
포로생활에서
각 인간들은 묶는 끈이 다 끊어지다 보니
미군 포로들 집단들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며 갈등하는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를 바라보며 내심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최강국의 포로들이 자기들이 손을 좀 쓰니 콩가루가 되었고
콩가루들은 자기들의 밥이었다.

중공군의 단수 높은 포로 관리에 미군들은 중공군의 의도대로
심리적으로 각개 격파가 되었다.
물론 풀려날 때까지 꿋꿋이 버틴 미군들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포로들과는 갈등하면서도 중공군들에게는
협조하는
병사들은 훨씬 더 많았다.
몇몇 미국인들은 자신의 동포에 대하여 법죄적인 행위를,
그리고
매우 소수는 반역죄를 저질렀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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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포로 관리의 노회함은 결국 전쟁이 끝나고 21명의
세뇌된
미군들이 조국인 미국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당시 세계 최저
빈국(貧國)의 하나인 중국행을 택하게 만들었다.

미군으로 보면 반역자가 양산된 것이다.
전쟁 후 미국 관련 당국에서 중공군에게 휘둘려 포로들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 질시하고 반목하였던 이 포로들의
행태가 논란이 되었었다.

더구나 포로 신세가 되고 보급이 형편없는 식사와
전염병으로 다수의
미군들이 힘없이 사망했던 사건도
문제로 다루어 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군인이 발휘해야 하는 강인성이
결핍된 사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옥수수나 콩 또는 귀리나 조 따위만 배급되었으니
어떻게든 이 알량한 음식이라도 악착같이 먹어서 체력을
조정해야 하는데
미군들 중에 이런 가축에게나 먹이는
사료를 먹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삶은 물만 마시는
철부지도 많았었다.
이렇게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허약해져
죽는 병사들이 많았었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군 포로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들의 풀을 뜯어 먹는 강한
생존력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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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군의 개탄스런 포로생활의 진상을 조사하던 미군당국은

포로 생활에서 송환 된 미군들로부터 같은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터어키 군 포로들이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극복해냈는지를 듣고
경탄했다. 미군의 경탄은 바로 언론을 통하여 세계로 퍼져 나갔다.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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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6·25전쟁의 고전 작품이 된

‘This kind of War.'의 저자 T.R,페렌바크는 죽음의
계곡 수용소와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슐리히터 상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 여러 가지 사실 가운데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은 미국인
포로중에
50 퍼센트가 죽고 영국군 포로의 사망률이
영국 정부에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포로는 별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터어키 포로들은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


터키 군들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초지일관
터키 군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비록 포로의 몸이 되었지만 터키 군인들은 전투중의
명령체계를
단단히 고수했었다.


미군처럼 중공군에게 아부하던 병사가 선거로 자치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로 중 가장 계급이 높은 터키 장교가 당연히
포로들의 지휘를 맡았다.
포로가 되었지만 장교는 장교였고 부사관은 부사관이었고
사병은 사병이었다.
명령은 명령이고 복종은 복종이었다.


페렌바크는 계속 써내려갔다.
터키군의 대장은 매일의 근무표를 작성했다.
따라서 누가 나무를 하고 물을 길며 병자를 간호하는가를
대해
조금도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부사관이나 군의관, 그리고 군목은
병자를 간호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자의 옷을 빨아 주며
불을 때는데 쓸 나무를
하도록 사병들에게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부들이 사정을 하면 사병들은 “제길할 ----너는 뭔데?”
하고 빈정댔다.

벽동 포로들은 대부분 온돌을 사용하는 민가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대량의 장작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큰 업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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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포로들의 최고 책임자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중공군
관리병들에게 반항했다는 죄로 붙잡혀 갈아 치워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 3, 제 4의 선임자 또는 그 아래의 책임자가 줄줄히 터키군
지휘를 맡아도 그들이 하는 터어키 포로들을 통솔하는 방법이나
형식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터키 포로가 지나치게 중공군과 친하게 지내면
군법회의가
열리고 슐리히터는 방청하도록 초청되었다.


선임하사가 심판관으로 앉고 법정은 열렸으며
논고와 증언이 속행되었다.


그 터어키 사병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개같이 두들겨 맞았다.

그의 변호인도 그런 반역자를 감히 변호했다고 해서 얻어맞았다.

슐리히터가 물었다.

“그런 짓을 두 번하면 어떻게 하는가?”
질문에 터키군 간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때는 죽여 버린다.“


중공군은 세뇌시키려 든 대상에 물론 터키 포로들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6시간씩 포로들을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실시하던
정치 교육
이나 숱한 공산주의 선전물이나 영화 상연의 홍수에도
이들 중에 마음이 변심하여 조국 터어키을 버리고 중공으로
간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어 놨던 중공군의
인간적인 대우에도 터키 군들은 그 뒤에 숨어있는 흉계를
경계하며
마음가짐을 단단히 가졌다.


지루한 정치 교육후 형식적인 자체 분임 토의 시간.
영어를 모르는 터어키 군과는 관계없는 시간이었다.
터어키 포로는 이런 시간에는 몰래 코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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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 출신이 다수였던 터키 포로였지만

터어키 인들이 제일 증오하는 원수인 소련의 이데오르기가
공산주의였으니 그들이 본능적으로 거부했던 것은 당연했다.


터어키 포로들이 중공군이 떠벌리는 공산주의 세뇌교육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은 그런 헛 눈길은 자기의 사망 선고문에
스스로
도장을 찍는 행위였었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중공군이 뭐라 하루 종일 떠들어도 그들에게는 오직
알라
신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페렌바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학자나 군인이나 의사들은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왜 공산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는가, 
 왜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살아남았는가? 캐물을 것이다.

 그 답은 명쾌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계산기로 튕길 수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


그는 터키 군 포로들의 행태가 답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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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전쟁중에 1만 5천여 명의 터어키 군이 참전해서 2,000여 명이

부상하고 168명이 실종했으며 721여 명이 전사했다.
그 중 462명이 그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 낸 한국 남쪽
부산 재한 유엔 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터키 여단은 전쟁이 끝나고 1960년까지 한국에 주둔했었다.


462명의 터키 전사자가 잠든 재한 유엔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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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앞에서 소개했던 술래이만 씨와 아일라와의

재상봉 장면에 어떤 한국 방문 UN군 장병들의 휴만 드라마보다도
한층 더 진한 감동을 받았던 것에는 그 배경이 있었다고
하겠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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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ogunking 2010.09.14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 터키가 세계 최강 제국 오스만 투르크가 된 것이 아니었군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2. 武運長久 2010.09.14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한 정신력과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적의 선전과 회유에 굴하지 않은 터키군은 진정한 이슬람 전사들입니다...

    그래도 포로수용소와 그곳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의 선전이라는게 정말 무서운것 같습니다...

    사병, 부사관, 장교 모두 갈라지게 만드는 중공군의 흉계...

    중공군의 포로대우가 북한군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들었는데 그 부드러움 이면에 저런 무서운 내면이 있을줄은...

    명령을 받고 수행하고 따르기만하는 사병들의 심리와 스트레스를 이용해서 군기와 질서를 무너뜨리면...

  3. 武運長久 2010.09.14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마지막에서 두번째 사진의 터키군 사진에 오른쪽 병사가 쓰고있는 모자는 소련군 전차병 모자 닮았네요...

  4. 웊프 독 2010.09.14 14: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북진중에 노획한 것을 장난스럽게 쓰고 있는것 같습니다.

  5. chaffee2080 2010.09.14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어키는 당시 소련과 긴장관계에 있었고, 소련의 침공을 걱정하던 상황에서 참전했으므로 군인들의 반공의지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특히 배신자가 될 경우 본국의 가족들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하여서 이탈을 방지하였다고 합니다. 미군의 경우는 일단 숫자가 많아서 스스로 통제도 힘들었을 뿐더러,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장병들인지라 비교적 힘든 고난을 당하면 의지가 쉽사리 무너졌다고 하죠.

  6. 열심히 달리기 2010.09.17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에 가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형제의 나라라고 이름을 붙일 만하게.

    오스만 투르크의 용맹한 전사들의 모습을 여기서 잘 보고 갑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육박전을 펼치면 부상병도 없게 상대편을 쓸어버린다는 이야기요.
    예니체리 군단의 후예들 답습니다. ㅎㄷㄷ

  7. 비도승우 2010.09.22 0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돌궐의 후예들이 당나라의 후예들에게 이겼군요 !!

  8. 황태 2010.10.05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군의 육박전 이야기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영어가 잘 안되니 영어로 하는 세뇌교육되 무용지물일거고
    제일 중요한건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다는것이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9. clothing factory 2011.05.25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10. mahasiswa terbaik 2011.10.23 0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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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http://www.rushessay.com/ 2013.02.12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공유 할 열망 것을 분명 있습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그림은 천 가지 말을 그린다.

해군의 해상 북진 작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8.10 08:26

6·25전쟁에서 호국의 대역을 위해서 대한민국 해군이 세운

공훈도 만만치 않다.


전쟁초반부터 백두산 함이 부산 근해에서 침투 적 수송선을

수장시키고 여러 작은 초계정들이 동해안에 게릴라 병력을 싣고

상륙하는 적 어선들을 격침하는 등 해군의 역할이 컸다.



해상 북진 작전의 기함 702 금강산함장 이 희정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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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내내 해군은 바다의 초계는 물론 적진지의 포격이나

적 기뢰 제거등 많은 영웅들이 배출된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해군의 전사는 이벤트 성으로 취급되는

백두산 함의 적함 격침을 제외하고 너무 알려져

있지 않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지만 우리 국군이 선배들이 구국의

투쟁사인 전사의 기록에 다소 무신경한 면이 많다.


한국 해군의 최대 공적중의 하나는 국토의 거의 전부를 내놓고

낙동강 전선 안으로 밀렸을 때 이미 서해안에서 북진 작전을

기획했었다는 공격성으로부터 성립되었다.


이 해상 북진작전은 결과적으로 6·25전쟁에 기대치 않은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강력한 반대의 의견을 뚫고

큰 성공을 거둔 사실은 모두 잘 아시리라 믿는다.


그 성공이 5,000분지 1의 확률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던 작전을 성공시켰다는 후대의 다소 과장한

평가로도 말해준다.


이 인천 상륙작전이 대 성공했음은 치밀한 정보활동으로

인천지역의 적정을 남김없이 캐내 유엔군 측에 제공한
한국 해군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대한 해협 해전으로 유명한 701함도 해상 북진 작전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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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이라는 대 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은 인천과

그 인근 해역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한국 해군에게 일임했다.


유엔 사령부가 이 일대에 관해 확보한 정보는 전무에

가까웠다.


해군은 이 요청을 십분 활용하여 중간의 작은 도서들을

건너 뛰어 인천 근해의 덕적도와 영흥도를 과감히 들이치기로
하고
해상 북진 작전의 시동을 걸었다.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은 8월16일 당시 서해지구

해상 전투 사령관 겸 702 금강산 함장의 보직을

받고 있었던 이희정 중령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702함장 지휘 아래 PC-701, 704, YMS-513, JMS-301,307,309,

  PG-313정으로 상륙 부대를 편성하여 영흥도를 탈환하라!“


일본 해군이 버리고 간 부품들과 자재로 자체 건조한
한국 해군 PG-313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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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증언을 소개한다.


“나는 그때 15척의 함정을 이끌고 대흑산도로 들어가 있었어요.

  이때 서해에서 적의 수중에 들어있지 않은 섬은 대흑산도와

  어청도 뿐이었어요.


  나는 대흑산도를 기지로 해서 인천까지의 서해안 섬들을 하나씩

  탈환할 계획을 구상중이었지요. 그래서 명을 받자 임시방편으로

  각 함정에서 10명씩을 차출하여 육전대를 짰습니다. “


이희정 중령은 승조원이 가장 많은 704함에서 40명, 예하

각 함정에서 중대 규모의 육전대를 편성했다.

이미 해병대가 있었지만 남해안 전선에서 작전중이라

병력을 차출 할 수는 없었다.


임시 육전대를 급조한 것이다


물론 일시적이지만 육전대는 해병대와 같은 것이니까 전황은

한국 해군을 해병대와 육전대라는 육상 작전이 가능한 두개의

전투 부대를 가진 세계 해군사에서 희귀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


중대장에게는 702 항해장 장근섭 중위, 제 1소대장 301정 항해장

오이향 소위, 제 2 소대장에 702함 포술관 서영일 소위,

제 3 소대장에 702함 기관사 이계호 소위가 임명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때 미 군함에 승함한 손 원일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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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극동 사령부는 이 작전을 이희정 함장의 이름을 따서

이[李]작전-Operation Lee-이라고 명명하고 두 척의

영국 순양함 케니아와 캐나다 구축함 아타바스칸을 지원해주었다.

두 함이 가진 막강한 함포들의 위력은 육전대에게 든든한

자신감을 가지게 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국 경순양함 케니아 . 6인치 포를 12문이나
가진 위력있는 전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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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천 해역과 지역의 정보 수집을 위한 근거지로서 덕적도

탈환이 작전 목표로 삼았다.


작전은 1950년 8월 16일 북상한 함대의 513정이
덕적도 옆에 있는 작은 섬 문갑도에
기습부대를 상륙시키면서
개시되었다.


기습대는 섬을 점령하고 있는 공산세력의 사령부격인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였다.

아무런 대비를 안 하고 있던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몽땅 연행하여
덕적도의 적정을 물었다.


덕적도에는 북한군 정규군은 없고 100여명의 의용군 조직과

빨치산들이 4-5명이 있을 뿐들이다.

기습대는 이 사실을 먼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함 702함에
연락했다.

본 작전은 이틀 뒤인 8월18일 오전 6시 15분에 시작되었다.


영국 순양함과 캐나다 구축함에 한국 해군 함정들은

상륙지점인 덕적도 동남쪽 해안[진리]을 향하여 일제히 함포를

쏘는 동안 육전대가 해안에 올랐다.
적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저항했다.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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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규군의 통제된 저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갑도 인민위원들 말처럼 정규군이 아닌 지방적색분자들로

엉성하게 조직한 자위군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함포사격에 지리멸렬하여 해안진지를
버리고 서북쪽
국수봉쪽으로 도주하였다.
섬에 오른 육전대는 해안마을 진리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구포 마을 서포 마을 등을 공격하여 차례로

탈환하였다.

다수의 사살자와 포로들이 획득하였다.


인민군에게 협조하였던 민간 조직은 반공적인 청년들로 다시

구성한 대한 청년단으로 교체되었다.

덕적도 탈환 작전의 전과는 저항하던 적색분자 24명과 7명을

사살하였다.


덕적도 점령 이틀 뒤인 20일에는 인근 대이작도에서 적색분자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PC-313 정을 보내서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적색분자 24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두 섬의 작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캐나다 구축함 아타바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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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덕적도만 점령하고 이를 기지로 해서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정보활동을 하려고 구상했으나 해군 본부의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은 덕적도가 효율적인 활동을 하기에 너무 멀다고
판단하고
인천에 훨씬 가까운 영흥도를 점령하여 이를 인천을
오가는
활동기지로 쓰자고 하였다.



함 명수 제독 -해군 참모 총장역임.
미 해군사에 스파이크 함이라는 미 해군들이 부르던 애칭으로
등장했으며 대단히 유능한 장교로 평가했던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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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구상은 해군 참모 총장
손원일 제독에게 받아 들여졌고

해군 육전대는 영흥도 정벌에 나섰다.

덕적도가 평정되고 이틀 뒤인 8월 20일 영흥도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섬은 인천의 인근이었기 때문에 소수지만 북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섬은 적치하의 서울 시장인 이승엽의 고향이기도 했다.

남로당파인 그는 북한 정부의 대남 공작의 총책임자이기도하였다.


그런 연유로 이 섬의 적색분자들은 성분이 아주 악랄한
극렬분자들이었다.


이 섬은 역시 섬의 적색 분자들 30명으로 구성된  의용단이라는
것들이
99식 소총과 M1 소총을 들고 섬의 심장부인
내리와 어성리 일대를
경비하고 있었다.


20일 오전 6시 90명의 육전대는 영흥도 북쪽
내리 해안에 상륙했다.

해안 진지는 비어 있었다.

덕적도 작전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함포 사격을 앞세운
상륙작전은
간단히 끝냈다.

함포의 화력에 겁을 먹고 도주한 것이다.


북쪽 해안 두 곳에서  동시에 상륙한 육전대는
압박해 들어갔다.


적들은 모두 영흥도의 산속으로 도주해서 저항했다.

그날 밤에는 살아 남은 잔당들이 기습적으로 반격하기도 하였다.

이 기습공격으로 4명의 육전대가 사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끈질긴 육전대의 소탕작전으로 적은 격멸되었다.

이 작전의 공식전과는 적 사살 6명, 포로 33명이었다.


영흥도가 평정되자 한 사건이 생겼다.

주민들이 한 언청이[째보]를 잡아와서 해군에게 인계하면서

신신 당부하는 것이었다.

“ 이런 악질은 꼭 처단 해주시오!”

그 자는 머슴 출신으로서 인민 위원장이었다.


본래 품성도 좋지 않았던 그는 분에 넘치는 붉은 감투를

쓰고 과거 자기를 업신 여기는 주민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했다.


이 사령관은 덕적, 영흥 양도에서 체포한 포로들과 부역자들을

기함인 PC-702 함에 승함시켜 압송하는데 이 언청이도 

본부로 압송하기 위해서 데리고 출발했다. 압송되는
인간들이 수병들보다도 더 많았다.


그러나 언청이 부역자는 묶어 놨는데도 겁 없이

갖은 욕설을 다하며 행패를 하였다.

그 자가 날뛰자 호송하는 부역자들의 눈빛들도 수상해졌다.


호송하는 부역자들도 많은데 이렇게 마음대로 날뛰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사령관은 주민들의 호소대로 이 자를 처단해서 바다에

던져 넣었다.



레드 비치 -항구 부두로 돌진하는 해병대.
위 사진의 사다리는 인천 상륙작전을 하는 미 해병대
사진의 트레이드 마크적인 존재다.

알루미늄 사다리는 일본에서 제작했는데 태풍에 제조업체가
큰 타격을 입어 하마트면 작전에 차질을 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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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 부역자들과 포로들을 거제도 수용소까지 운송하였다.

이 영흥도에 함 명수 정보 국장이 지휘하는 정보대 17명이

민간 어선 백구호를 타고 긴 바닷길을 와서 24일
영흥도에 도착했다.


함 국장은 북한 남침전 인천에서 특수 정보업무를 하던
전 '해양공사'
팀의 김순기 중위를 인솔하고 왔었다.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는 즉시 그날 밤으로
인천으로 잠행,
 과거 조직원들을 접선해서 다시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다행히 핵심 조직원들은 적의 강압으로 내무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 신분을 이용해서 정보도 캐내고 정보원들에게
통행증도 만들어 주었다.
두 장교는 인천에 잠입한채로 정보원들을 움직여 부지런히
적 정보를
수집했다.

적 병력의 규모, 적 부대의 위치, 기뢰 매설유무등의

모든 것을 다 수집해서 영흥도로 보냈다.

이 세세하고 정확한 정보 중에 나중에 해병대 상륙정들이 직접

뱃전을 대고 상륙한 부두 안벽[岸壁]의 높이도 있다.


정보원들은 인부로 위장하여 현장에 투입해서 직접 소변을
보는 것처럼
하거나 또는 바람에 날려간 물건을 주으러
가는 척하며 갯벌로 내려가
키를 대보고 높이를 재서 보고했다.



한국 해군 첩보 요원의 정확한 측정으로 미해병들은 발을
물에 적시지 않고 부두 안벽으로 상륙할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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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인 9월 1일 미군 해군 정보장교인 클라크 대위와 한국 해군의

연정 소령, 그리고 육군 첩보 부대 계인주 대령등이 영흥도에
와서
합류했다.


정보활동의 특성상 한국 해군은 전쟁 후 입을 다문 대신
클라크 대위는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에서 많은 발언을 해서
그 분이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모든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작전에 참가한 연 정 씨가 해외 활동이

많았던터라 일본 출판물에도 작전기를 기고했었고

한국 신문에도 연재했었다.

계인주 대령도 작고 전 회고록을 남겨서

작전 상황을 잘 알렸다.


더구나 이들의 활약은 상륙 함대가 인천 해역 진입전

팔미도 등대를 점화했던 사실이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분들의 활약도 컸지만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는
인천에 잠입했었던 김순기, 임병래 중위와 그들이 포섭한
정보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들이 정보가 있었기에 해공군기들이 상륙작전 전에 

정확히 폭격과 포격으로 적의 방어력을 대폭 악화시켰으며

적이 약체라는 것을 파악하고 인천의 중심지를 직접 뚫고

들어가는 블루 비치와 레드 비치의 상륙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륙 일을 바로 앞둔 9월 14일 영시 첩보부대가

철수 한 것을 눈치 챈 적들은 다시 침공해왔다.


이 전투에서 잔무 정리를 위해서 섬에 남아있던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병조는 십리포까지 밀리며 최후까지 싸우다가
"대한민국 만세!"을 외치고
장렬히 자결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뒤에도 해군의 해상 북진 작전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정보 활동이 비중이 컸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클라크 대위가 주도권을 쥐었다.

해군은 북한 해역의 섬들은 징검다리처럼 점령해갔다.


해상 북진은 압록강 하구의 섬들을 점령하고 종료하였다.

클라크 대위는 섬들을 점령하면 이를 기지로 해서 적극적인

내륙 정보 활동을 벌였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클라크 대위가

극동 사령부에 최초로 보고하게 한 것도 한국 해군 첩보대였다.


인천 상륙 작전이후 공훈이 적잖았던 한국 해군의
해상 북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드문 점이 아쉽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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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도제주도 제주 2010.08.13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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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90 mm 전차포에 관통당한 북 T-34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30 19:15

 

1950년 한국 전선에 동원이 결정된 미 해병대 1사단 완전 편성이

어렵자 일단 2개 연대만으로 여단을 급조하여 한국으로 파견했다.


여단에 배속된 해병 1사단 소속 1전차 대대 A중대는  

8월 초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낙동강 교두보의 미군들이

서쪽 측방의 적 위협 제거 작전에 참가하여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8월 3일 창원역에 도착한 미 해병 1 전차대대 A중대.
미국 출발전 M-26전차를 수령했었고 시험 발사는 단 두 발만했었다.
전차대는 이 창원역 구내에서야 겨우 틈을 얻어 90mm
포의 영점 사격을 할 수있었다.
이 사실은 해병들이 얼마나 급하게  한국 전선으로
출동했는지를 알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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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습적으로 낙동강을 도강하여 미 전선으로 파고 든

북한군을 구축하기 위해서 낙동강 남안으로 급거 이동하였다. 


북한군은 미 공군의 거센 폭격에도 불구하고 몰래

밤마다 은밀하게 낙동강에 수침교[水沈橋]를 건설했다.


1950년 8월 6일 야간.

이 다리 위로 북한군 정예 4사단과 서울 점령의 선두에 섰던

105전차 사단의 병력과 전차들이 도강했다. 


이들은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을 완수하려는 광기로서 병사가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저돌(猪突)공격을 해왔다.


천혜의 낙동강 벙어선이 뚫린 미군은 사력을 다해

이들 침투부대의 격멸에 나섰고 이에 해병들이 참가

한 것이다..


8월 15일 낙동강 남안 오봉리 능선을 점령하라는 명에 따라

해병들은 공격에 나섰다.


이 오봉리 격전장에서 활약한 전차 소대는 A 중대3 소대였다.

소대장은 스위트 중위, 그는 1942년 군에 입대하여

괌섬 상륙작전과 이오지마 상륙작전의 실전을 경험한

노련한 고참 군인이었다.


뒤의 높은 산 전면의 낮은 산맥이 오봉리 능선.
적 전차들은 앞 도로를 따라 공격해왔다.
---------------------------------------
그의 소대는 오봉리를 공격하는 진격하는 해병의 머리위로

무수한 포탄을 날려 보내 능선의 북한군을 격멸했다.

전차 소대가 날려 보낸 적 76미리 사단포만도 12문이었고

기관총 진지는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소련제 76mm 사단포
----------------------------

포탄과 연료 소모도 극심해 전차들은 수시로 후방 1마일 지점에

설치한 이동 정비소 및 보급소로 돌아와 포탄을 적재해야만 했다.

미 해병들의 분전으로 오봉리 능선의 일각을 점령했으나

예상되는 적 반격에 대비할 예비대가 없었다.

할 수없이 철수한 해병들은 다음 날도 적과 대치했다.


그 전투일 8월 17일 밤 20;00

적 전차 부대가 선도하는 보병들이 도로를 따라 공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전차 소대와 해병들은 급히 영격할 기동을 했다.


이 전투에서  해병 전차 소대는 적 T-34와 격돌했다.

이 전차전에서 아주 드문 전과가 있었다.

해병 M-26 전차가 발사한 신형 90mm 철갑탄이 소련제

T-34를 관통해 버린 것이다.


90mm 포탄이 T-34 우측 전방 기관총 아래에 구멍을 
만들고 대각선으로 차체를 통과했다.
다른 한 발은 조종석 전방 아래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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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중위가 지휘하는 해병 전차 소대는 오봉리 능선과

126 OP 고지 사이의 좁은  고개를 장악하고 소대 전차 4량이

횡으로 전개되었다.


고개의 좌측에 플러튼[A-34]의 전차가, 중앙에 스위니크

전차[A-33]가 우측에, 그리고 이들 3량의 전차 후방에

소대장 스위트 중위의 지휘 전차가 자리 잡았다.


소대는 5량의 전차 편성인데 스위트 소대의

닉 프라이어 전차가 고저각 조작이 되지 않았다.

그 전차는 열외로 시키고 투입되지 않았다.

 

적 전차 4량의 선투 전차는 어둠을 뚫고 출격한 공군기의

로케트 공격에 파괴되어 버렸지만 나머지 3량은

계속 전진해 왔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들은 미군 방어선의 측면을 성공적으로

기습했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 잠복하고 있던 소대장 스위트 중위는 적 전차가

사거리 내에 들어오자 전방의 플러튼 하사에게 말했다.

“고속 철갑탄[HVAP]을 쏴라 !”


이 신형탄은 탄두심이 텅스텐과 카바이드로 되어 있고

탄속이 M-16탄보다도 더 빠른 3,350 ft/초나 되어

관통력이 기존 철갑탄보다 훨씬 우수했다.

이미 낙동강 서부의 고성 부근 전투에서 적 T-34전차를

깨끗이 뚫어 버린 전과를 올렸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플러튼이 신형탄을 장전하기도 전에

고개 밑 125 고지 아래쪽에 배치된 육군의 3.5 로케트 포 사수가

지근거리에서 적 전차에게 일탄을 발사했다.


로케트 탄은 적 T-34 전차 궤도를 파괴하고 전차 후미에 장착된

연료 탱크에 화재를 일으켰다.

그러나 T-34는 그런 상태로 계속 달려왔다.


그 전차가 100야드의 거리에 들어오자 플러튼은

포수 스탠리 타노우스키에게 사격 명령을 내렸다.

타노우스키는 90mm 신형 탄 세 발을 연속해서 발사했다.

 

타노우스키는 명 사수였었고 사거리도 100야드 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세발을 연속 발사했으니 불명중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적 T-34에는 아무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플러튼은 세 발 모두 빗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는 포수 타노우스키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이 멍청아! 안 맞았잖아!”


그러나 타노우스키 하사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항의했다.

“절대 명중 시켰습니다!”


나중에야 타노우스키가 발사한 신형 철갑탄이 T-34

전방 사수 전면을 뚫고 포탑내로 들어가 대각선으로

관통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적 85mm 포탄을 유폭시키지 못해 차내 폭발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고속 철갑탄은 적 승무원을 살상하고 포탑 뒷 부분을
뚫고
엔진의 절반쯤을 부수고 다시 관통해서 오봉리 능선의
사면을
때렸다.


근처의 해병들은 전차들이 자신들을 오포격 하고 생각해서

전차에 사격중지 요청을 하려고 까지 하였다.

믿을 수 없는 관통력이었다.


T-34 전방 기관총,- 위가 관측구,아래가 총신이 나온 총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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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전차 차례였다.

그 전차도 90 mm 탄 사격에 간단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적 행군 순서 네 번째 전차가 정지해서 좁은 계곡 건너
OP 고지의
해병들에게 사격을 해댔다.


스위트 소대의 전차 한 대가 더 잘 보이는 길 복판으로

이동하여 시야를 확보하고 이 전차에 포격을 가했다.


이 전차는 적 네 번째 전차에게 무려 6 발이나

퍼부었다.

전차에 화재가 발생했다.


첫 탄 명중 순간 승무원들이 전차에서 탈출하려고 했으나

해병 전차들이 가한 우박 같은 기관총 소사(掃射)에 모두

다시 전차로 기어 들어가 전차와 운명을 같이 했다.


세 번째 전차도 올라오는 고개 중간에서 90mm탄을 무려

여섯 발을 두들겨 맞고 폭발했다.

공격해오던 전차들은 모두 격파되었다.


후속하던 보병들은 A중대 2소대의 105mm 곡사포를 장비한

셔만 탱크들에게 기총 소사를 받고 모두 섬멸되었다.

오봉리 능선은 다음날 해병들에게 점령당했다.


8월 18일 밤에 이들은 다시 공격을 해왔지만 엄청난

손실만 입고 격퇴 되었다.


낙동강을 건너 공격해왔던 적 4사단과 105전차 사단은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고 무질서하게 낙동강을 건너

도주했다. 완전 패잔병의 패주 그것이었다.


적 전차를 관통 사격한 세실 플러튼 하사의 M-26 전차
.-----------------------------------------------
전차들의 두꺼운 장갑 속에 숨으면 모두 안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서울 수복 당시에도 서울 시내로 진입한 M 26은 적 14.5mm
대전차
총에 관통당하여 총탄이 포탑 내부에 박히기도 했었고


후에 서부 전선에서 적이 발사한 122mm 포탄이 M-26 전차의
포수 잠망경을
내부로 때려넣어 포수의 두부를 타격, 전사하게 했다.


6.25전중 미 육군과 해병대의 M-26 전차가 발사한 90mm

고폭탄이 적 T-34 탱크를 파괴한 사례가 보고 되기도

했었다.

고폭탄이라는 철갑의 관통용이 아니라 인마 살상용인데도

사격의 상황에 따라 T-34 포탑이 파괴되기도 했다.


미 기갑 부대의 일부 연구 부서에서는 의외의 T-34 파괴가 소련의

열등한 금속 공학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었다.


이날 밤 고개에서 파괴 된 T-34 전차를 밀어내서
기동로를 확보하는 미 M4A3 도저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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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에서 대활약을 한 해병 전차 부대의 스위트 중위

소대는 한 달 뒤 9월 15일 인천 월미도 상륙작전에서 

월미도를 점령하는 주역을 하게 된다.


위에서 소개했던 일화의 주인공 세실 플러튼 [하사-SSG]는
월미도
육교의 인천 쪽에 나타난 북한 장갑차를 한 발로
날려 버리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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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SDAP 2010.08.03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싱 전차 강하죠...

    제2차세계대전때는 활약못하고 6.25떄 T-34 잡은...

  2. orbitz promo code 2012.05.25 18: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그 또는 그녀 사회의 거의 모든 중요한 상태로 이해를 전파하기위한 상상력 전략이된다. 나는 전세계 국가보다 볼륨 유사한 수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3. last minute travel deals from detroit 2012.05.25 18: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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