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7.05 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7)
  2. 2010.06.11 공비들의 열차 습격 (6)
  3. 2010.04.05 32. 감격적인 합류 (6)

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5 09:50


6·25전쟁 후, 한국 전투 경찰의 활약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않다.


내가 기억하는 전투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자는

불과 서 너 권 밖에 되지가 않다.

그러나 6·25전쟁 전후  경찰 전사자는 일만명이나 되었었다.


월남전 8년간 전몰 파월 장병이 5천명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희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경찰은 육군에 비하면 훈련도 장비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때의 공비들은 경찰 전투력을 우습게보기도 했었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 일 만 명이나 세를 불려 기세를 올린

공비들에게 연타를 안겨 그 세를 꺾은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던 육군이었지만 6·25전쟁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을 물고 늘어져 소멸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이 전투 경찰들이었다.


한국 경찰은 육군처럼 강력한 병력과 화력이 없었기에

산야를 쓸어내리는 듯한 대규모 토벌을 자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지의 한국 경찰 기사에서 빌려온 사진을 다시
싣는다. 부상 공비를 운반하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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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형편이었던지라 빈약한 병력으로 공비들에게 타격을 주는

전술을 개발해내고 또 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공비들을 실핏줄을 토막토막 잘라 말려죽이듯 서서히

섬멸해갔다.

전투 경찰의 전술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비용대 효과의

절대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한국 경찰이 일선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창안하고 개발해낸

그 공비 말려죽이기 전술은 ‘매복 전술’이었다.


해방 후부터 경찰에 몸담으며 공산당 무리들과 싸웠던

김두운 선생의 공비 토벌 수기‘지리산 호랑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김두운 씨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자 경찰에 투신했다.



김 두운 서장-1951년 무주 경찰서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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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수기에서 식량 약탈을 자행하고 귀소(歸巢)하는

부안군의 공비 일당을 매복 섬멸했던 작전을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경찰의 공비 소탕 매복 전술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분이 전북 부안 경찰서 경무 계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늦은 가을철이었다.


김두운 선생은 타 경찰서에서 이미 공비 토벌을 경험하며

자신 나름의 공비 토벌 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경찰 입문 이래 호남 일대에 공비들이 준동하자
아무 군사 훈련도
실전 경험도 없었던 간부들은 단지
일본군 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공비 토벌을 
떠 맡겼다.

그는 전북 도경의 기동대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군 경험이래야 일본군 고사포 부대에서 약간 근무했을 뿐이었던

김두운 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우왕좌왕 산을 쏘다니며

허탕을 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매복 섬멸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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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토벌의 초창기에 여러 일선 경찰서에 매복

전술만이 토벌의 최고 유효 수단이라는 의견은 떠돌았었다.


그러나 표준 교안이 없어서 일선 전투 경찰 지휘관들은

김 두운 씨처럼 연구와 실전 경험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비방[?]을 개발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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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운씨는 자신이 개발할 매복 전술에서 전투요령을
복격술이라 이름짓고 아래와 같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첫째,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낯춘다음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다.

둘째, 기동선을 따라오는 적의 순서와 우리의 매복 순서에
맞추어 한 명이 적 한 명만을 겨냥한다.

세째, 쏴의 신호와 동시 단 한발만 발사하고 함성없이
그대로 각자 조준했던 적에게로 돌진해 생포,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넷째, 도망치는 적은 너무 멀리 추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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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관심 있게 볼 대목은 그가 공비들이 통과할 목을

미리 집어내고 매복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치 돼지 명포수가 목을 잡는 요령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아래는 김 두운씨의 글이다.

전북 도경 기동대장에서 부안군 경무계장으로
전출되었을 때 겪은 전투를 회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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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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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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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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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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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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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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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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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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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

※ 2편으로 계속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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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2. 홍이아빠 2010.07.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약력입니다.

    약 력

    1923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3. trading account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

  4. allstate auto insurance corp 2012.05.26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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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김현석 2013.03.25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당히 좋은 글이지만 일제 때부터 항일투쟁으로 빛났던 좌익세력을 죽인 건 크나큰 오류였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일,반미,반이승만,반독재,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 두고 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조선노동당 부안군당의 혁명 전사들은 죽인 김두운 서장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는 미국의 무한독주가 무너지고 러시아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이라크의 저항이 빛을 봐 미군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미국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참된 민주해방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돈과 권력을 쥔 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이 거셀 텐데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해 이 자들은 저 미국으로 쫒아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단결합시다 투쟁합시다 항일세력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문하던 반민주,친일친미 세력들을 반드시 처단합시다 그리고 역사의 장대한 길에 이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세들에게 진실된 역사들 가르칩시다
    투쟁합시다 투쟁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을 때까지 싸웁시다 투쟁

    • ㅉㅉ 2014.03.25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 미쳤네.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런 놈 헛소리 해대는 거 보면 진짜 어느 정도 민주주의도 제한해야 한다. 꽁꽁 잡아 북한으로 보내던지. 투쟁? 혁명전사? 미친놈.

공비들의 열차 습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11 08:05

 

올림픽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때까지 금기시하던

사상 분야의 출판물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금기시했던 분야의 틀을깨고 국민들에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테마중의 하나가 남한 지리산 지역에서 항거하다가
소멸당했던 북한 무장세력,
자신들은 빨치산이라고 부르고
당국에서는 공비라고
부르던 공산무장 조직원들의 이야기였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지만 이들은 근세 한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비들의 사진은 정말 찾기 힘들다.
이 라이프지 사진을 다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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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과거 빨치산이었다가 투항해서 석방되거나 형을

살고 나와 남한 사회에 발을 붙인 분들이 쓴 책이

한 두 권이 아니다.


나 윤주 씨의 ‘누가 반역자냐? ’육철식 씨의 “빨치산 ‘

등이 내가 이런 분야에서 최초로 접했던 책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지리산 언저리에서 소멸되어버린 빨치산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 것은 이태 씨가 썼던 ‘남부군’이었다.


이 출판물의 큰 인기는 남부군이라는 영화가 나왔던 사실이
증명해준다.


남부군의 인기는 때마침 사회에 일기 시작한 진보의
사상적 호응을
받아 그간 금단의 울타리 넘어에 있던
빨치산들의 이미지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빨치산의 이미지가 굶주리고
병든체 무자비한 군경에 쫓겨 죽어간 역사적 희생자라는
불쌍한 존재로 형성되는 감을 감지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은 사실과 매우 차이가 있다.


이러니 학생들을 데리고 빨치산의 장악하던 본거지를
무슨 성지방문하듯 답사여행을
다니는 선생들까지 나올만했다.


그러나 해방후부터 십여년간 이들 빨치산들은 북한과 함께
대한민국의
존립을 행동으로 위협하던 존재였다.


즉 이들은 군사적으로 엄연한 대한민군의 적이었으며 대한민국은

이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소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들 위협세력의 제거에 말 할 수 없이 많은 무고한 피아의

인명이 살상되고 막심한 재산과 삶의 희생이 있었지만

이들을 결코 천진하고 감상적으로 평가해야할 존재는
아니었었다.



구속된 여자 공비들-이들중에 이미 살인죄로 사형 언도를
받은 여자 공비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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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공비의 준동과 북한이 남파한 북한 유격대의 토벌을 위해서

1948년부터 195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은 과대한 국방 예산의

지출로 국가의 재정이 휘청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군사력은 상상외로 강해서 1951년 국군 2개 사단을

전방에서 이동시켜 대토벌을 할 무렵에는 근거지인 지리산,
백운산
일대에 덩지를 틀고 있었던 이들 세력이
일 만 명이나 되었었다.


사실 한국은 북쪽과 남쪽 두개의 전장에서 공산군과
전쟁을 했던 것이다.


만약 이들이 월남의 베트공처럼 외부의 꾸준한 지원을

받았거나 중국처럼 유격전의 충분한 지역적 공간이 있었다면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에 취약했던 당시 대한민국의

말로는 월남처럼 공산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남한 활동 공산세력 ,즉 빨치산이나 공비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들의 여러 게릴라 활동에서

가장 독특했던 열차 습격사건들을 소개한다.


서부활극에서 볼 수 있었던 열차 강도 사건이 남한에서도

한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발생했었다.


모두 공비들이 준동했던 서남부를 관통하는 호남선 전라선과

경전선에서 발생했었다.


1.1950년 11월 24일 이양[화순군 이양면] 철로 폭파 작전

화순군 유격대가 주축이 되어 펼친 작전이었다.

군의 병력 수송 수단을 파괴하여 징집되어가는
청년들을 구출[?}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제 2국민 병들인 듯한 청년들을 실은 열차가 24일 오후 4시에

통과하리라는 정보에 따라 화학산 깃대 봉에서 동쪽으로

내리 뻗은 당그래 능선 자락 철로에다 폭약을 장치해놓고

매복 대기했다.


열차가 절벽 밑을 통과 할 즈음 유선 격발 장치로 폭발시켰다.

절벽위에서는 일제 사격이 퍼부어졌다.


열차는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울어 멈추고 끌려가던 청년들

수 백 명이 논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호송하던 군경들도 그 속에 섞이어 도주했다.


10여 명의 호송 군 경들은 현장에서 포로가 되었고 들판으로

도망쳤던 군경들은 냇물 건너 품평리 앞산에 군복으로

변장 매복하고 있던 화순 유격대에게 잡혔다.


[제 2 국민병 시스템은 물의를 크게 일으키고 폐지되었다.]


2.1951년 10월21일 쌍봉 열차 습격

공비 15연대가 1951년 7월 창설해서 육성했던
항미 소년 돌격대라는
십대들의 전투 부대가
열차 습격에 출동하였다


이들은 보성 -이양간 철도에 삼중(三重)으로 매복했다.

1지점, 2지점, 3지점에서 연달아 통과하는 한 개의 열차를

연타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들은 폭약이 없이 작전을 개시했다.

공비들은 쌍봉이라는 곳에서 매복했다.


새벽이 다 된 오전 4시에 1 지점에서 나타난 기관차를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기습했다.

그러나 열차는 그대로 통과해서 도주했다.


그러나 제 2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사격에 열차는 심하게 요동하며 속도가 느려졌다.


세 번째 매복조의 공격에 열차는 탈선하여 철도 옆

절벽을 길게 긁으며 정지했다.

탈선한 열차는 모두 9량이었다.


10대 공비들은 탈선한 열차에 뛰어올라 약탈과 살상을 하고

도주했다.



가면 상태에서 출동을 대기하고 있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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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51년 11월 중순 장성 갈재 열차 습격

노령지구 공비들은 아침 일찍 월동한 보급 투쟁을 위해서

강제 동원한 농민들을 대기 시켜놓고 장성 갈재 
터널 남쪽에서
서울 발 목포행 열차를 공격했다.


공비들은 철도에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아 기차가 이를

들이 받고 정지한 뒤에 수류탄과 소화기로 공격했다.

공비들은 열차에 뛰어올라 군경들을 무차별 사살하고

승객들을 약탈했다.


공비들은 강제 동원한 노무 부대들에게 약탈품을 지워서

백아산 아지트로 운반했다.



공비들의 도로 차단을 막기 위해서 고개 정상에
구측힌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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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1년 11월 14일 풍무재 열차 습격

공비들은 경전선 순천- 광주간의 구간에서 이날 오전 11경에

운행하고 있던 열차 습격을 했다.


열차가 이양과 춘양 경계인 풍무재 협곡의 속도가 느려지는

곡선 구간에서 철도를 폭파하고 일제 사격을 가했다.


기관차 2량에다가 11개 객화차를 연결했던 이 열차는

군수물자와 전선으로 가는 노무자들을 태우고 있었다.


기관차와 화차가 4량이 탈선하고 나머지들도 탈선된 열차를

들이 받고 정지했다.

이 습격으로 기관사와 미군 종군 기자 한 명이 죽었다.


5.1952년 6월 24일 사거리- 신흥구간 열차 습격

오후 2시경 노령 병단 소속 공비들은 전날 밤부터

매복하고 있던 호남선 사거리 -신흥 간에서 대전을 떠나

목포로 가던 열차를 공격했다.


매설한 폭약을 터뜨려 열차를 탈선시키고 집중 사격을 가했다.

이 습격은 공비들의 열차 습격사건으로 가장 대규모적인 것으로

이들의 만행으로 열차 10 량이 전소되고 승차해있던 군경 25명과

철도 운행 요원 4명,그리고 미군 두 명이 사살 당했다.



이 블로그에서 세편으로 나누어 소개했던 드웨이 맥클린씨의
참전 사진첩에서 - 부산으로 가는 병원 열차에 무장 호송병이
탄 열차가 연결되어 있고 기관차 앞에 폭탄 매설에
대비한 샌드 백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미군들이
위에서와 같이 공비 열차 습격에 피해를 입어서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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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열차만 기습한 것이 아니라 촌락을 오가는 버스도
여러 번
기습했었다.

여기에 버스 습격 사건의 한 사례를 소개한다.


1953년 봄.

전남 부대가 광양- 진상간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습했다.

평지로 내려와 대숲에서 잠복하고 있던 소년 공비

6명은 오후 세시쯤 통과하는 버스를 정차시켰다.


군복 차림의 변장이었기 때문에 검문하는 척하면서

한사람씩 하차시켰다.

군인 1명과 경찰 학교 학생 7명이 타고 있었다.

공비들은 카빈 1정과 군복등을 노획하고 이들을 훈방했다.


위의 경우는 훈방했다고 하지만 대개 공비들은
 

버스에 타고 있던 군경은 그 자리서 잔인하게 사살했다.



귀순 공비들로 조직된 특수부대 - 보아라 부대나 이기자
부대등 서너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공비들의
핵심을 기습해서 섬멸시키는 작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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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를 탈선시키고 승객들을 약탈하고 군경을 무자비하게
죽여 버린
공비들의 이미지는 거지같이 헐벗고
아귀같이 굶주려서 식량 약탈이나
다니다가 군경에게
타살되다시피 했을 것이라는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믿는 공비들의 불쌍한 이미지와는 너무 차이가 있다.


공비들은 기세를 올리다가 1952년 초 전방의 2개 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켜 감행했던 군이 토벌 작전에서
대 타격을
  입었다.


그 뒤에 그들의 준동이 많이 잠잠해졌지만 휴전이 되고나서도

지리산 일대의 평화는 요원했었다.


휴전이 되던 해 12월에 군 병력을 동원한 대 토벌이 있고나서

공비들은 급속히 소멸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정 순덕이라는 여자 공비로 기억되는 5-6명의
잔당 공비[망실공비]
들은 생존하며 경찰대를 괴롭히다가
마지막으로 근절된 것은
60년대 초기였다.

3년간의 전쟁을 겪었던 대한민국은 뒷마당에서는
비정규전이라는 전쟁을 15년 가까이 치루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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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nghoseo 2010.06.2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비들의 도로 차단을 막기 위해서 고개 정상에 구축한 요새라는 설명을 해주신 사진을 보니 왠지 하늘에서 본 월남전 당시 한국군 중대기지 모습과 많이 닮아있는 듯 보입니다. 한국전 당시 유격부대를 이끌었고 초대 파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내신 채명신 장군님의 아이디어로 채택된 중대기지와 무관해보이진 않은 것 같네요. 호기심이 생깁니다.

  2. 리산 2011.03.23 2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51년 12월-1952년 2월의 백야전사령부(Task Force Baik)의 지리산 및 주변 토벌에는
    수도사단과 8사단이 동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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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감격적인 합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05 08:36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일순간 붕괴되자 북한군은 소백산맥과 금강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9월 21일경부터 인천상륙 소식이 전선에 전파되었고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북한군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북한군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며 독전을 강요하였지만 이런 비이성적인 노력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9월 22일부로 추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드디어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낙동강으로부터 전선을 밀고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을 벗어나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1기병사단]


  워커로부터 경부가도를 따라 38선으로 밀고 올라갈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고 그중에서도 선봉은 제7기병연대였습니다. 제7기병연대는 보다 신속하게 전방을 개척하고자 린치(James H. Lynch)중령이 지휘하는 예하 제3대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9월 22일 08시, 다부동을 출발시켰습니다. 그날 중으로 낙동강을 도하한 린치특임대(TF Lynchs)는 다음날 상주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의 저항 태세를 점검한 결과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해도 될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일, 사단의 후속부대들이 상주에 집결을 완료하자, 린치는 그의 특임대에 배속된 제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에 수색대를 합류시켜 “보은-청주-천안-오산방향을 따라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전진하고 저항하지 않는 적은 대응하지 말라”는 진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린치의 판단대로 전선은 밀고 댕기며 교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군의 진격이 멈춘 곳에서 전선이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일 보은으로 출발한 수색대는 오후에 청주를 지나 저녁에 진천 남쪽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그것도 북한군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색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군이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북한군 수송대가 미군 전차를 발견하고는 3대의 트럭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공교롭게도 트럭에는 휘발유가 가득 실려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연료를 보충 받은 수색대는 전차에 다시 시동을 걸고 전진을 계속하여 그날 20시 30분경 천안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교통정리를 하던 북한군 병사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자, 북한군 병사가 얼떨결에 오산방향을 안내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까지 발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진격은 빨랐습니다.


[양쪽에서 전진하던 아군의 선두 부대들은 오산부근에서 연결됩니다.]


  쉬지 않고 오산남쪽 16킬로미터 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전방에서 갑자기 치열한 사격이 벌어져 노출된 전차병 1명이 전사하면서 일순간 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곧 교전이 멈추었습니다. 전방 부대는 인천으로 상륙하여 오산으로 남진하고 있던 미 제7사단 31연대였는데, 다행히도 오인으로 인한 아군간의 교전이 확대되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9월 26일 22시 26분으로 인천상륙부대와 낙동강 반격작전 선두부대가 감격적으로 이렇게 연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선두부대가 조우한 장소가 미군이 한반도에서 북한군과 처음 접촉하여 망신을 당한 죽미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8시경, 미 제1기병사단 본대가 상륙부대인 제7사단의 본대와 연결 되면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전선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맥아더의 대담한 도박은 제8군의 낙동강 반격이 성공함으로서 단숨에 북한군 13개 사단의 배후를 포위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적으로 반전을 이루고 38선을 향한 진격은 계속되었지만 포위망 안에 갇힌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전의를 상실한 잔적을 소탕하는 것보다 전쟁이 종결을 위해서 전진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남한 각 지역에 쪼개져서 게릴라가 되어 갔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여기지는 않고 천천히 소탕하면 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지리산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북한군 패잔병 게릴라들은 두고두고 후방지역의 암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엔군의 놀라운 진격에 일순간 패퇴하였지만  북한군 대부분은 부대 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로 잠입해 아군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의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까지 지연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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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05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2. mami5 2010.04.06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킨을 시원스레 바꾸신거네요..^^
    글 잘 보고갑니다..^^

  3. home insurance mail quotes 2012.06.05 1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 블로그 사이트와 함께 제공 내용은 이해하기 절대적으로 매우 가치뿐만 아니라 간단하다. 그것은이 웹 사이트를 참조 반가워하며 유료 교육입니다.많은 감사합니다.

  4. home insurance renowned estimates 2012.06.0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좋은 기사, 화려한 텍스트입니다 .. 밀린! 당신의 능력 밖으로 볼 수있다, 우리는 당신이 우수한 기사를 작성하는 계속 기대 ..

  5. mercury insurance arkansas 2012.06.07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점검 시간이 걸릴 결정할 때 그것은 아주 좋은 개인의, 나는 단호하게 이번에 미래에 더 찾는 데 끝내준 모두 이것에 관한 거예요. 할 수있다면, 노하우 습득으로, ​​당신은 추가적인 유용한 정보와 함께 더 자주 블로그를 변경하는 생각하나요? 진심으로 그것은 자신을 매우 유용합니다.

  6. pocket fm radio best reception 2012.10.21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