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8.10 해군의 해상 북진 작전 (4)
  2. 2010.06.29 아! 6·25 포토 에세이 해군사관학교 (9)
  3. 2010.06.22 전함 백두산(1/4) (13)

해군의 해상 북진 작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8.10 08:26

6·25전쟁에서 호국의 대역을 위해서 대한민국 해군이 세운

공훈도 만만치 않다.


전쟁초반부터 백두산 함이 부산 근해에서 침투 적 수송선을

수장시키고 여러 작은 초계정들이 동해안에 게릴라 병력을 싣고

상륙하는 적 어선들을 격침하는 등 해군의 역할이 컸다.



해상 북진 작전의 기함 702 금강산함장 이 희정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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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내내 해군은 바다의 초계는 물론 적진지의 포격이나

적 기뢰 제거등 많은 영웅들이 배출된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해군의 전사는 이벤트 성으로 취급되는

백두산 함의 적함 격침을 제외하고 너무 알려져

있지 않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지만 우리 국군이 선배들이 구국의

투쟁사인 전사의 기록에 다소 무신경한 면이 많다.


한국 해군의 최대 공적중의 하나는 국토의 거의 전부를 내놓고

낙동강 전선 안으로 밀렸을 때 이미 서해안에서 북진 작전을

기획했었다는 공격성으로부터 성립되었다.


이 해상 북진작전은 결과적으로 6·25전쟁에 기대치 않은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강력한 반대의 의견을 뚫고

큰 성공을 거둔 사실은 모두 잘 아시리라 믿는다.


그 성공이 5,000분지 1의 확률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던 작전을 성공시켰다는 후대의 다소 과장한

평가로도 말해준다.


이 인천 상륙작전이 대 성공했음은 치밀한 정보활동으로

인천지역의 적정을 남김없이 캐내 유엔군 측에 제공한
한국 해군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


대한 해협 해전으로 유명한 701함도 해상 북진 작전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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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이라는 대 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은 인천과

그 인근 해역에 대한 정보 수집을 한국 해군에게 일임했다.


유엔 사령부가 이 일대에 관해 확보한 정보는 전무에

가까웠다.


해군은 이 요청을 십분 활용하여 중간의 작은 도서들을

건너 뛰어 인천 근해의 덕적도와 영흥도를 과감히 들이치기로
하고
해상 북진 작전의 시동을 걸었다.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은 8월16일 당시 서해지구

해상 전투 사령관 겸 702 금강산 함장의 보직을

받고 있었던 이희정 중령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702함장 지휘 아래 PC-701, 704, YMS-513, JMS-301,307,309,

  PG-313정으로 상륙 부대를 편성하여 영흥도를 탈환하라!“


일본 해군이 버리고 간 부품들과 자재로 자체 건조한
한국 해군 PG-313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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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증언을 소개한다.


“나는 그때 15척의 함정을 이끌고 대흑산도로 들어가 있었어요.

  이때 서해에서 적의 수중에 들어있지 않은 섬은 대흑산도와

  어청도 뿐이었어요.


  나는 대흑산도를 기지로 해서 인천까지의 서해안 섬들을 하나씩

  탈환할 계획을 구상중이었지요. 그래서 명을 받자 임시방편으로

  각 함정에서 10명씩을 차출하여 육전대를 짰습니다. “


이희정 중령은 승조원이 가장 많은 704함에서 40명, 예하

각 함정에서 중대 규모의 육전대를 편성했다.

이미 해병대가 있었지만 남해안 전선에서 작전중이라

병력을 차출 할 수는 없었다.


임시 육전대를 급조한 것이다


물론 일시적이지만 육전대는 해병대와 같은 것이니까 전황은

한국 해군을 해병대와 육전대라는 육상 작전이 가능한 두개의

전투 부대를 가진 세계 해군사에서 희귀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


중대장에게는 702 항해장 장근섭 중위, 제 1소대장 301정 항해장

오이향 소위, 제 2 소대장에 702함 포술관 서영일 소위,

제 3 소대장에 702함 기관사 이계호 소위가 임명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때 미 군함에 승함한 손 원일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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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극동 사령부는 이 작전을 이희정 함장의 이름을 따서

이[李]작전-Operation Lee-이라고 명명하고 두 척의

영국 순양함 케니아와 캐나다 구축함 아타바스칸을 지원해주었다.

두 함이 가진 막강한 함포들의 위력은 육전대에게 든든한

자신감을 가지게 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국 경순양함 케니아 . 6인치 포를 12문이나
가진 위력있는 전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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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천 해역과 지역의 정보 수집을 위한 근거지로서 덕적도

탈환이 작전 목표로 삼았다.


작전은 1950년 8월 16일 북상한 함대의 513정이
덕적도 옆에 있는 작은 섬 문갑도에
기습부대를 상륙시키면서
개시되었다.


기습대는 섬을 점령하고 있는 공산세력의 사령부격인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급습하였다.

아무런 대비를 안 하고 있던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몽땅 연행하여
덕적도의 적정을 물었다.


덕적도에는 북한군 정규군은 없고 100여명의 의용군 조직과

빨치산들이 4-5명이 있을 뿐들이다.

기습대는 이 사실을 먼 바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함 702함에
연락했다.

본 작전은 이틀 뒤인 8월18일 오전 6시 15분에 시작되었다.


영국 순양함과 캐나다 구축함에 한국 해군 함정들은

상륙지점인 덕적도 동남쪽 해안[진리]을 향하여 일제히 함포를

쏘는 동안 육전대가 해안에 올랐다.
적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저항했다.



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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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규군의 통제된 저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갑도 인민위원들 말처럼 정규군이 아닌 지방적색분자들로

엉성하게 조직한 자위군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함포사격에 지리멸렬하여 해안진지를
버리고 서북쪽
국수봉쪽으로 도주하였다.
섬에 오른 육전대는 해안마을 진리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구포 마을 서포 마을 등을 공격하여 차례로

탈환하였다.

다수의 사살자와 포로들이 획득하였다.


인민군에게 협조하였던 민간 조직은 반공적인 청년들로 다시

구성한 대한 청년단으로 교체되었다.

덕적도 탈환 작전의 전과는 저항하던 적색분자 24명과 7명을

사살하였다.


덕적도 점령 이틀 뒤인 20일에는 인근 대이작도에서 적색분자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PC-313 정을 보내서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적색분자 24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두 섬의 작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캐나다 구축함 아타바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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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덕적도만 점령하고 이를 기지로 해서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정보활동을 하려고 구상했으나 해군 본부의 정보국장
함명수
소령은 덕적도가 효율적인 활동을 하기에 너무 멀다고
판단하고
인천에 훨씬 가까운 영흥도를 점령하여 이를 인천을
오가는
활동기지로 쓰자고 하였다.



함 명수 제독 -해군 참모 총장역임.
미 해군사에 스파이크 함이라는 미 해군들이 부르던 애칭으로
등장했으며 대단히 유능한 장교로 평가했던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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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구상은 해군 참모 총장
손원일 제독에게 받아 들여졌고

해군 육전대는 영흥도 정벌에 나섰다.

덕적도가 평정되고 이틀 뒤인 8월 20일 영흥도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섬은 인천의 인근이었기 때문에 소수지만 북한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섬은 적치하의 서울 시장인 이승엽의 고향이기도 했다.

남로당파인 그는 북한 정부의 대남 공작의 총책임자이기도하였다.


그런 연유로 이 섬의 적색분자들은 성분이 아주 악랄한
극렬분자들이었다.


이 섬은 역시 섬의 적색 분자들 30명으로 구성된  의용단이라는
것들이
99식 소총과 M1 소총을 들고 섬의 심장부인
내리와 어성리 일대를
경비하고 있었다.


20일 오전 6시 90명의 육전대는 영흥도 북쪽
내리 해안에 상륙했다.

해안 진지는 비어 있었다.

덕적도 작전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함포 사격을 앞세운
상륙작전은
간단히 끝냈다.

함포의 화력에 겁을 먹고 도주한 것이다.


북쪽 해안 두 곳에서  동시에 상륙한 육전대는
압박해 들어갔다.


적들은 모두 영흥도의 산속으로 도주해서 저항했다.

그날 밤에는 살아 남은 잔당들이 기습적으로 반격하기도 하였다.

이 기습공격으로 4명의 육전대가 사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끈질긴 육전대의 소탕작전으로 적은 격멸되었다.

이 작전의 공식전과는 적 사살 6명, 포로 33명이었다.


영흥도가 평정되자 한 사건이 생겼다.

주민들이 한 언청이[째보]를 잡아와서 해군에게 인계하면서

신신 당부하는 것이었다.

“ 이런 악질은 꼭 처단 해주시오!”

그 자는 머슴 출신으로서 인민 위원장이었다.


본래 품성도 좋지 않았던 그는 분에 넘치는 붉은 감투를

쓰고 과거 자기를 업신 여기는 주민들에게 못할 짓을 많이했다.


이 사령관은 덕적, 영흥 양도에서 체포한 포로들과 부역자들을

기함인 PC-702 함에 승함시켜 압송하는데 이 언청이도 

본부로 압송하기 위해서 데리고 출발했다. 압송되는
인간들이 수병들보다도 더 많았다.


그러나 언청이 부역자는 묶어 놨는데도 겁 없이

갖은 욕설을 다하며 행패를 하였다.

그 자가 날뛰자 호송하는 부역자들의 눈빛들도 수상해졌다.


호송하는 부역자들도 많은데 이렇게 마음대로 날뛰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사령관은 주민들의 호소대로 이 자를 처단해서 바다에

던져 넣었다.



레드 비치 -항구 부두로 돌진하는 해병대.
위 사진의 사다리는 인천 상륙작전을 하는 미 해병대
사진의 트레이드 마크적인 존재다.

알루미늄 사다리는 일본에서 제작했는데 태풍에 제조업체가
큰 타격을 입어 하마트면 작전에 차질을 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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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 부역자들과 포로들을 거제도 수용소까지 운송하였다.

이 영흥도에 함 명수 정보 국장이 지휘하는 정보대 17명이

민간 어선 백구호를 타고 긴 바닷길을 와서 24일
영흥도에 도착했다.


함 국장은 북한 남침전 인천에서 특수 정보업무를 하던
전 '해양공사'
팀의 김순기 중위를 인솔하고 왔었다.


김순기 중위와 임병래 소위는 즉시 그날 밤으로
인천으로 잠행,
 과거 조직원들을 접선해서 다시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다행히 핵심 조직원들은 적의 강압으로 내무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 신분을 이용해서 정보도 캐내고 정보원들에게
통행증도 만들어 주었다.
두 장교는 인천에 잠입한채로 정보원들을 움직여 부지런히
적 정보를
수집했다.

적 병력의 규모, 적 부대의 위치, 기뢰 매설유무등의

모든 것을 다 수집해서 영흥도로 보냈다.

이 세세하고 정확한 정보 중에 나중에 해병대 상륙정들이 직접

뱃전을 대고 상륙한 부두 안벽[岸壁]의 높이도 있다.


정보원들은 인부로 위장하여 현장에 투입해서 직접 소변을
보는 것처럼
하거나 또는 바람에 날려간 물건을 주으러
가는 척하며 갯벌로 내려가
키를 대보고 높이를 재서 보고했다.



한국 해군 첩보 요원의 정확한 측정으로 미해병들은 발을
물에 적시지 않고 부두 안벽으로 상륙할 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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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인 9월 1일 미군 해군 정보장교인 클라크 대위와 한국 해군의

연정 소령, 그리고 육군 첩보 부대 계인주 대령등이 영흥도에
와서
합류했다.


정보활동의 특성상 한국 해군은 전쟁 후 입을 다문 대신
클라크 대위는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에서 많은 발언을 해서
그 분이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모든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작전에 참가한 연 정 씨가 해외 활동이

많았던터라 일본 출판물에도 작전기를 기고했었고

한국 신문에도 연재했었다.

계인주 대령도 작고 전 회고록을 남겨서

작전 상황을 잘 알렸다.


더구나 이들의 활약은 상륙 함대가 인천 해역 진입전

팔미도 등대를 점화했던 사실이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분들의 활약도 컸지만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는
인천에 잠입했었던 김순기, 임병래 중위와 그들이 포섭한
정보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들이 정보가 있었기에 해공군기들이 상륙작전 전에 

정확히 폭격과 포격으로 적의 방어력을 대폭 악화시켰으며

적이 약체라는 것을 파악하고 인천의 중심지를 직접 뚫고

들어가는 블루 비치와 레드 비치의 상륙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륙 일을 바로 앞둔 9월 14일 영시 첩보부대가

철수 한 것을 눈치 챈 적들은 다시 침공해왔다.


이 전투에서 잔무 정리를 위해서 섬에 남아있던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병조는 십리포까지 밀리며 최후까지 싸우다가
"대한민국 만세!"을 외치고
장렬히 자결했다.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 뒤에도 해군의 해상 북진 작전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정보 활동이 비중이 컸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클라크 대위가 주도권을 쥐었다.

해군은 북한 해역의 섬들은 징검다리처럼 점령해갔다.


해상 북진은 압록강 하구의 섬들을 점령하고 종료하였다.

클라크 대위는 섬들을 점령하면 이를 기지로 해서 적극적인

내륙 정보 활동을 벌였다.


중공군이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클라크 대위가

극동 사령부에 최초로 보고하게 한 것도 한국 해군 첩보대였다.


인천 상륙 작전이후 공훈이 적잖았던 한국 해군의
해상 북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드문 점이 아쉽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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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도제주도 제주 2010.08.13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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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6·25 포토 에세이 해군사관학교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6.29 08:24

   국제 관함식에서 항진하는 KDX-Ⅲ "세종대왕함". 6·25 전쟁 당시 백두산함 등 중고 함정을 구입해와야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그 와중에도 강력한 대양해군을 꿈꿔온 이순신 장군의 후예들은 이제 아시아에서 그 누구도 쉽사리 넘볼 수 없는 강력한 해상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요람으로 굳건히 진해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군사관학교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4년간 지·덕·체 수련과정을 거쳐 조국 해양수호의 간성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입니다.
  4년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생도들은 소위로 임관, 약 5년 간의 의무복무를 거친 후 본인의 희망에 따라 전역 및 진급을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급 구축함인 DDH-972 "을지문덕함". 창군 초기 선박 한 척 없는 열악한 여건에서 시작한 해군사관학교 졸업생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은 KDX-Ⅲ를 비롯한 우수한 성능의 구축함들을 다수 장비한 강군으로 거듭났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징인 귀선 앞에서 담소 중인 생도들. 1999년 여성 생도가 입학한 이래 오늘날 해군사관학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조국 수호와 해군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군사관학교는 어떻게 개교하고 발전해왔을까요?
  격동의 19~!20세기, 영국 해군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해상 강국을 구축했던 일본의 압제를 받아왔던 전훈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손원일씨는 후배인 정긍모씨와 더불어 해군의 창설에 대한 강한 열망을 꿈꿔왔습니다.
  그리고 해방 6일 후인 8월 21일, 마침내 서울 안동교회에서 해사대를 결성한 것을 시초로 조직을 더욱 보강해 "조선해사협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정보통신의 중요성에 따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노트북과 PMP, MP3 등의 장비 활용에도 능숙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1945년 11월 11일, 마침내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이 창설되고 미 군정법령 제42호에 의거, 군사단체로 보장받음에 따라 대한민국 해군의 기초가 다져졌습니다.
  해방병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들을 교육시키고 지휘할 장교의 양성은 필수가 되었고 이에 따라 1946년 1월 17일을 기해 현 진해 군수사령부 자리에 "해군병학교"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으로 손원일 중령이 취임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해군을 이끌어갈 호국 간성을 양성하는 해군병학교의 교육과정과 군기는 매우 혹독했고 이는 동년 2월 28일에 입학한 제1기생 113명 중 54%인 62명만 졸업한 점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1946년 6월 15일, 해방병단이 해안경비대로 개칭되자 해군병학교 역시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로 개칭되었고 1947년 2월 11일에는 보다 효과적인 훈련 및 교육에 유리한 현 해군 교육사령부 기술병과학교 자리로 이전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는 "해안경비 대학", "해사대학"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며 마침내 1947년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작사하고 손원일 교장의 부인 홍은혜 여사가 작곡한 교가가 생도들에 의해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설립에 기여한 초대 교장 손원일 중령과 교가를 작곡한 부인 홍은혜 여사

  1948년 10월 25일,  해사대학은 망해봉 기슭에 위치해 광활한 해역을 관제할 수 있는 현재의 옥포만으로 증축, 이전했고 11월 26일 해군대학으로 교명을 개칭합니다.

  그리고 1949년 1월 15일, 마침내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됨과 동시에 대통령령 제87호에 의거해 해군사관학교 설치령이 제정됨에 따라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을 거듭해온 학교가 마침내 일반대학과 동등한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되는 법률적 보장을 받음과 동시에 명실공히 조국해양수호의 대임을 맡을 해군장교 양성의 요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해군사관학교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정규 교육과정을 일시 중단하고 해군사관학교 전투사령부를 발족했습니다.
  1950년 7월 13일, 아직 교육을 받고 있던 해군사관학교 4, 5, 6, 7기 생도들은 창원 지구 전투와 해상 작전에 투입되어 북한군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적잖은 생도들이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대신 전쟁 기간 중 서울지역의 권위있는 학자들이 대거 진해 인근으로 이주함에 따라 우수한 교관을 확보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미 해군 고문단의 도움으로 교육의 질적 발전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참혹했던 3년 간의 전쟁이 휴전되자 다시금 교육기관으로 가동하기 시작한 해군사관학교는 1953년 8월, 4년제 교육과정을 위한 교과과정을 마련하는 한편 1955년 10월 1일을 기해 사관학교 설치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956년부터 사관생도들은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고 이학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위풍당당한 행진

  이러한 교육과정의 발전에 발 맞춰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시설 확충에 착수한 해군사관학교는 1955년 통해관, 1958년 도서관 완공 등 기본적인 교육시설을 확보했습니다.
  여기에 장래 해군장교로서 일선에서 병사와 하사관들을 지휘할 사관생도 생활이 보다 발전적이고 체계적으로 제도화되었는데 우선 적성평가제도, 명예제도, 군기장 제도, 무감독 시험제도, 옥포회 활동 등 해군사관학교만의 독특한 전통이 바로 이 시기에 정립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로 1956년 3월 1일에 처음 시행된 천자봉 구보!
  해군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할 코스인 천자봉 구보는 생도가 단독군장으로 산악구보를 하며 천자봉을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사관생도 교육 및 생활/복지를 위한 각종 시설들이 건립되었는데 우선 생활관인 세병관과 면회 및 복지를 위한 옥포회관, 그리고 도서관과 합포관, 교회, 체력단련장, 고 이인호 동상 등이 완공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과학관, 제2 통해관, 호국사, 생도사, 생도식당, 웅포관, 실내 체육관이 건립되었고 옥포회관이 증축되었습니다.
  이어 1980년대에는 거북선 복원 및 통해로, 충무공 이순신 제독 동상 건립, 전산실, 대형 컴퓨터실, 중앙도서관이 건립되는 한편 해양체육을 위한 주정고와 수영장이 기공되었습니다.



 
원양 함정실습 중인 4학년 생도들. 졸업을 앞둔 생도들은 이제 전문적인 해군 장교로서 첫걸음을 내딜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1990년대에 들어 해군사관학교는 박물관, 교훈탑, 사관생도들의 복지시설인 벽파회관, 그리고 OCS 생활관 등을 건립했고 2000년대에 들어 충무관과 인호관, 그리고 생도사를 신축하는 한편 해군사관학교의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육 중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
  초창기 칠판과 분필로 시작했던 교육은 오늘날 첨단화된 디지털/시청각 교육장비와 강의실의 도입으로 더욱 효과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사관생도들의 교육은 어떻게 이뤄질까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군 과학화 지시에 따라 과학화 교육 계획을 수립한 해군사관학교 교육과정은 기존의 이학사에 이어 공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으로 확대되었습니다.
  2학년으로 진학한 생도들은 해군과학( 이학사 )과 해군공학( 공학사 )로 나뉘어 항해와 기관병과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해군사관학교가 기존 일반대학과 같은 수준의 전공교육을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1970년대의 교육분야 변화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시대상을 반영한 이념교육을 바탕으로 한 정신교육이 교과개편에 다수 반영된 점과 1976년 1월 17일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으로 "117 사업"계획을 수립, 일대 개혁을 실시함으로써 신교과과정이 추진되었다는 것입니다.
  신교과과정은 학술적인 면을 충실하게 보완함으로써 기존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학사학위 소지자로서 손색없게 함은 물론 전문 장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1, 2학년은 기초과목을 습득하고 3학년은 전공을, 4학년은 전공과 군사학 및 실습과 실기 위주의 교육을 받도록 세분화되었습니다.
  해군사관학교의 교육과정 중 가장 독보적이면서도 자랑할 만한 것은 바로 생도 4년간 교육의 총 결산으로 매년 실시하는 순항훈련입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사관생도들에게 항해술 및 각종 현장체험훈련, 그리고 임관 전 함상 적응능력 배양을 위해 실시하는 순항훈련은 실무 적응능력과 지휘역량을 배양하고 세계화 시대에 맞춰 국제적 식견과 안목을 갖춘 해군장교로서의 자질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1954년 해군사관학교 9기생부터 실시한 순항훈련은 60년대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항하는데 그쳤지만 1970년대에는 미국과 중동, 아프리카 지역을, 1980년대엔느 샌프란시크코, 벤쿠버, 괌, 미드웨이,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피지, 라바울 등 20여 지역을 순항함으로써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국력을 실증했습니다.

  새 천년을 맞이해 해군사관학교는 시대의 변화에 앞장 서 오늘도 학교를 새롭게 재창설한다는 각오로 정예 호국간성 육성을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해군사관학교가 어떤 기관인지 연혁을 살펴봤으니 6·25 전쟁 당시 34명의 전사자를 냈던 본교에 남아있는 6·25 전쟁의 흔적을 찾아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죠?

  다행히 해군본부 주최로 월간 디펜스타임즈 코리아와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들이 참여한 2010 안보현장 견학 행사를 통해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자 전사학 교수인 조덕현 중령님(
해군사관학교 40기 )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6·25 전쟁 관련 유물과 손원일 교장과 관련된 각종 설명을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6월 24일, 해군본부 주최로 월간 디펜스타임즈 코리아와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들이 해군사관학교를 견학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덕현 중령님의 안내로 해군사관학교의 표상인 귀선에 대한 설명을 경청 중인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 및 월간 디펜스타임즈 코리아 취재진

  해군사관학교에서 1999년에 복원한 귀선.
  오늘날 귀선에 대한 각종 논란이 분분하지만 조덕현 중령님의 설명에는 현재 이 형태가 가장 확실하다고 합니다

  귀선 내부는 당시의 형태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고 선체의 경우 나무못을 실제로 박아넣는 등 적잖은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내부의 6·25 전쟁 및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해군과 해병대의 유품 및 전시물들을 견학하는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들

  아쉽게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6·25 전쟁 관련 유물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가치가 큰 유물은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 그림은 바로 유명한 백두산함의 대한해협 해전도입니다.
  당시 한국해군이 보유한 전투함 중 강력한 축에 속했던 백두산함이지만 북한의 무장 수송선 역시 중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사투였고 결국 적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백두산함의 활약으로 후방으로 침투해 교란작전을 펼치려했던 북한군의 작전 기도는 무산되었고 이후 부산항을 통해 미군의 물자보급과 병력 증원이 이뤄져 전황이 역전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승리의 주역이었던 백두산함은 아쉽게 실물은 보존되지 못하고 모형으로만 남아있습니다.
  척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어링급 구축함보다도 작은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두산함으로 조촐하게 시작한 한국해군은 현재 KDX-Ⅱ에 이어 이지스 구축함인 KDX-Ⅲ를 보유한 막강한 전력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어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실 겸 조덕현 중령님의 연구실에서 각종 문의사항에 대한 문답이 이어졌습니다.

  해전사를 전공하신 분답게 서구해전사 및 6·25 전쟁 당시 해전사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오고갔습니다.
  특히 영국의 빅토리호나 미국의 컨스티튜션호처럼 백두산함도 보존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내셨는데 그 와중에 바로 이 부근에 백두산함의 마스트가 보존되어 있다는 제보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조덕현 중령님의 제보에 따라 직접적으로 부두로 달려간 결과 발견한 백두산함의 마스트.
  이것이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백두산함의 유일한 흔적입니다.

  비록 백두산함의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그에 못잖게 귀중한 정보와 사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고 호국 간성의 양성을 통해 강한 정예 해양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 해군의 미래를 가늠하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6·25 전쟁은 우리에게 큰 비극이었지만 해군에게는 보다 큰 미래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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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호 2010.07.01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퍼싱님!!

    대한해협 해전도는 처음보는데 아주 멋지네요

    잘 보고 갑니다.

  2. 강준일 2010.07.01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주국방 네트워크 회원 분들 여럿 보이네요

    즐거운 시간이셨겠습니다.

    멋진 사진 에세이 잘 보고 갑니다

  3. 강효섭 2010.07.02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해군사관학교 견학 기회 있으면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귀선 사진 잘보았습니다.

    특종 건지셨네요 ^^

  4. 박소정 2010.09.28 2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알고 싶었던 정보들이 많네요

  5. 박소영 2010.10.02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사진과 자료를 보니 진해에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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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武運長久 2010.06.22 1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세한 날짜는 잘 모르지만 이 전함이 한국전쟁 당시에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북괴군의 수송선을 격침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해협 해전이 었던가요...

    세계대전 때의 미국이나 일본이 치뤘던 해전에 비해서는 너무나 작은 전투였지만 당시의 우리 해군으로서는 어마어마한 성과였겠지요...

    아무튼 계속해서 연재작이 나오는데로 보겠습니다...

  2. 이형권 2010.06.22 1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두산함에 관련한 내용이군요~^^
    기대하겠습니다. 백두산함 다시 건조해서 전시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백두산함에 대해선 기록이 많이 찾지 못하겠더군요..

  3. 연이랑 2010.06.22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두산함! 그 이름도 늠름하네요.
    역사를 잘 모르는 제겐 정말 재밌는 공부가 되는 만화예요.
    다음편도 빨리 보고 싶어요.

  4. 뽀로리 2010.06.24 16: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원인모를 이유로 침몰하고... 민군합동 조사단이... ㅋㅋㅋ

    • 검은날 2010.11.26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웃으라고 하고 있는겁니까?ㅡㅡ이러니까 안보개념이 결여돼있다느니 하는말이 나오지...

    • 감사합니다 2012.03.07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원인이 북한어뢰임이 밝혀졌지요.

      이렇게 웃을만한 일이 아닙니다.

  5. 최중원 2011.05.21 2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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