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8.19 너무 싱거운 2차 서울 탈환 (13)
  2. 2010.06.28 전차 중대의 양수리 도강 작전 (3)

너무 싱거운 2차 서울 탈환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8.19 09:16


  불과 3명의 적병을 사살하고 서울을 탈환한 제1 보병사단  오늘날에도 국토방위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
  6·25 전쟁 기간에 치러진 수많은 전투 중에서 1950년 9·28 서울 수복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에 비해 51년 3월 15일에 있었던 제2차 서울 수복작전은 비교적 적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마도 50년 9월의 1차 수복작전이 수만 명에 달하는 적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한 후 이뤄졌던 데 반해, 2차 수복작전은 좀 싱겁게 끝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1951년 3월 14·15일에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선봉인 제15 보병연대가 서울에 입성한 이후 적의 경미한 저항만을 받았을 뿐 이렇다 할 치열한 교전없이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서울을 함락한 이후 중앙청 앞에서 승리의 퍼포먼스를 벌이는 중국 인민지원군 병사들. 
  이 작전은 미 제8군이 3월 7일부터 발동한 리퍼작전(Operation "Ripper")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인데 당시 제8군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대장은 이 작전을 통해 중부의 미 제9 군단 예하 25 보병사단이 양수리와 팔당 부근에서 도하작전을 전개해 서울 동측을 위협하는 한편 한강 남안 진지를 확보하고 있던 미 제1 군단( 한국군 제1 보병사단·미 제3 보병사단)을 투입시켜 큰 피해 없이 서울을 탈환하려 했습니다.
  1951년 3월 7일 전 전선에서 UN군의 리퍼 작전이 개시되자 중·조연합사령관 펑더화이는 미 제25 보병사단의 도하와 중동부 지역에서 감행된 미 제10 군단과 한국군 제1 군단의 공격에 대해 지연전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전선을 시찰하고 있는 펑더화이. 리퍼 작전이 개시될 시점에서 펑더화이는 현재 극심하게 소모된 전력으로 반격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점을 명확하게 파악했고 신속한 철수 지시를 하달합니다.
  당시 베이징 방문 이후 막 전선 사령부에 복귀한 펑더화이는 3월 9일 한강 남안 진지에 있던 제38군의 1개 보병사단과 제50군의 1개 보병사단에 한강 북쪽으로 도하에 성공한 미 제25 보병사단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철수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3월 11일에는 베이징의 저우언라이에게 “우리 군은 그 동안의 전투로 전력이 너무 많이 손실되었습니다. 따라서 재편성할 시간을 벌기위해 어쩔 수 없이 서울을 포기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후미 부대로 지연방어를 펼치면서 일선의 유생역량을 보존하고 적 주력을 흡수해 38선까지 진출하도록 합니다.”는 내용의 작전 의도를 밝히는 전문을 발송했습니다. 
  그의 전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시점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극도로 혹심한 손실을 입었다는 점입니다.
  아! 6.25 방문자 여러분 중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저그와 테란을 통해 "인해전술"과 "화해전술"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흔히 저그하면 빠른 확장과 부화장, 3마리씩 생산되는 라바를 통한 압도적인 인해전술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중국 인민지원군을 저그족으로 보면 되는 셈이죠.
  반면 테란은 대량 생산능력 및 보병 전력이 취약하지만 대신 공장에서 생산되는 아크라이트 공성전차와 토르, 전투 순양함 등으로 대표되는 '화해전술'을 구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테란이 UN군이었던 셈입니다.
  실제 1951년 1월 말에서 2월에 걸쳐 매튜 리지웨이 대장은 부족한 병력의 열세를 강력한 화력으로 보완하는 '화해전술( 火海戰術 )'을 구사했습니다.
  안 그래도 추위와 적시에 보급을 받지 못해 허덕이던 중국 인민지원군은 인해전술을 감행할 때마다 우뢰와 같이 쏟아지는 포탄과 기관총탄, 폭격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고 서울을 함락시킨 후 한강 남쪽까지 진출하는 과정까지 누적된 수치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연히 UN군의 리퍼 작전에 맞서 과거와 같은 대 반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무리였던 셈이었고 지금 시점에서는 당연히 철수하여 후방에서 전력을 재정비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1951년 1월 말부터 감행된 UN군의 맹렬한 공격은 오랜 국공내전 및 중일전쟁으로 단련된 인민지원군의 정예병들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펑더화이로서는 중국에서 추가적으로 증원부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현재 전선에 배치된 전력만으로 싸워야했던 한계를 고려한 탁월한 선택이었던 셈이죠.
  이에 따라 서울을 방어하던 북한군 제47 보병사단과 중국 인민지원군 제50군에는 3월 13일, 도시를 포기하고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들은 3월 14일까지 서울에서 완전 철수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있던 한국군 제1 보병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3월 14일 제15 보병연대장 김안일 대령에게 수색대를 투입시켜 한강을 도하한 다음 중앙청까지 진출해 적정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강남까지 진출해 있던 미 제3 보병사단과 제1 보병사단 15 보병연대는 치열한 시가전을 치를 것을 각오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정 반대였죠. 솔직히 위 게임장면을 봐도 알 수 있듯 일선 군인 입장에서는 가급적 피를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수색대의 지휘를 맡은 제15 보병연대 3대대 9중대 3소대장 이석원 중위는 소대를 이끌고 마포 쪽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역을 거쳐 중앙청으로 진출했습니다.
  이들이 중앙청까지 행군하는 동안 적의 저항은 하나도 없었고 사실상의 무혈입성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죠.
  이석원 중위의 수색대는 중앙청에 다가갔을 무렵에야 처음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며 저항하는 적을 발견하니 사실상 싱겁게 서울에 진입해 작전을 수행한 셈이었습니다.
  이석원 중위의 수색대는 중앙청에서 적 기관총팀의 저항을 받았을 뿐 사실상 서울에 무혈입성했습니다.
  이석원 중위는 별다른 문제없이 전방 고착견제와 측방 타격조 우회 전술을 이용해 적 기관총팀 3명을 사살하고 중앙청에 입성했습니다.
  "뭐야, 이 녀석들. 전부 도망간 것 아냐?"
  이석원 중위와 수색대원들은 문자 그대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좀더 수색한 결과 서울 시내에 적이 철수하고 없다는 정황을 확인한 후 저녁 무렵 강남까지 진출해 있던 연대 본부에 복귀했습니다.
  이석원 중위의 최종 보고를 접한 김안일 대령은 3월 15일, 예하 3개 대대 전체를 서울 시내로 진출시켰고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습니다.
  무혈입성하기는 했지만 이미 서울은 치열한 격전 끝에 완전 폐허가 되어 있었죠. 사진은 전화로 피해를 입은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1차 수복 당시에는 해병대가 그 몫을 차지했지만 이번에는 당당하게 1 보병사단이 그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죠.
  제1 보병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치열한 격전 끝에 탈환했던 평양과 달리 너무나도 손쉽게 무혈입성한 서울 탈환으로 기분이 영 찝찝했지만 아무도 희생되지 않았기에 장병들의 기쁨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습니다.
  물론 북한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요.
  펑더화이의 ‘서울 자진철수’ 결정 및 제47 보병사단이 서울에서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중국 측에 격하게 항의했지만 현실을 무시한 의견이었던 탓에 저우언라이에 의해 간단히 묵살당했습니다.
  결국 이 일로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1951년 5월 중순까지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은 채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제1 보병사단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서울을 완전 수복한 제1 보병사단의 활약은 오늘날에도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제1 보병사단이 탈환한 서울은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의 맹렬한 대공세에도 끝까지 함락되지 않고 휴전을 맞이하며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굳건히 건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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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슈타인╋ 2010.08.19 2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준기님// 감사합니다.

    제2차 서울탈환작전은 중공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작전을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이번 탈환작전으로 서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전세에 중요한 국면으로 자리매김했다는데 의의를 둬야겠죠

  2. 강현구 2010.08.22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타크래프트Ⅱ : 자유의 날개 화면이네요. 울트라리스크와 히드라리스크 대군에게 쫓기는 테란군이라....

    딱 적절한 대조 같습니다.

  3. 김준기 2010.09.15 0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슈타인 님

    내가 김준기인데 위의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요.

    우리 아빠가 내이름으로 열어놓은 블로그인데
    거기에 링크까지 걸었군요.

    어처구니가 없네요.
    양심적으로 실고 싶으면 삭제하세요..

  4. 박소영 2010.10.02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번 지상군 페스티벌 2010에서도 멋진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뉴스 보니 서울에서 당장 내려가 보고 싶네요 ^^

  5. 코튼 맨 2010.10.02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왜 이렇게 국방부 블로그에서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안타까워요 ㅠ

  6. 리산 2011.06.07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51년 3월 9일경 한강도하에 성공한 미25사단이
    실제로 어디로 도하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

    일부 책에는 현재의 양수리(두물머리공원),
    전적비는 조안면 쪽에..

    어떤 책에는 덕소쪽이라고 하는데,

    3군데 모두 도하를 한건지, 궁금합니다.

    혹시 아시면 부탁드립니다.

  7. 용뿔 2011.06.23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소하지만, 오타지적입니다. '우뢰와 같이 쏟아지는' 에서 우뢰는 우레로 정정합니다.우레는 순수 우리말로 천둥이라는 의미입니다.

  8. 이민하 2012.03.25 19: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로 뺏기고 뺏기는 ..북한 남한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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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성 ! 상무대 보병학교 교육단 교도대대 화기중대 상병 박성현 입니다.

    본 포스트를 읽으면서, 먼저 일반적으로 20대들에게 친숙한 스타크래프트2를 인용하며 포스트를 해 주셔서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 포스트로 제 1보병사단의 활약을 볼 수 있었는데, 각자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신 참전 용사들에게 다시한번 감사,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포스트를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자신부터라도 남은 군생활 동안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복무하겠습니다.

    충성 ! 상병 박성현 이었습니다.
    21sunghyun@naver.com

  13. Get more info about Luminix Power 2014.02.13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을 볼 수 있었는데, 각자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신 참전 용

전차 중대의 양수리 도강 작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28 09:38

 

한강 도강하는 89전차대대 C중대 - 유엔군이 서울 탈환을
목표로 전개했던 리퍼 작전중인 1951년 3월 촬영이다.

배경의 산야가 눈이 덮힌 것을 보니 본 포스팅의
A중대가 도강을 완료한 뒤에 따라서 도강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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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치열한 전차전들이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 내내 유엔군 전차들의 주요업무[?}는
대전차전이 아니라
보병 지원업무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각 출판물에 6·25전쟁에 대표 전차로 소개되는 M 26 전차와

M 46 전차뿐만 2차 세계 대전의 M 4 셔먼 전차가 여러 주요 임무를

맡아 실행했던 일꾼이었음도 별로 각광받지 못한 점도 유의하자. 


오늘 소개하는 전차의 사례는 전투의 클라이막스가 ‘화려한’

전차전과는 달리 양수리 인근에서 남한강을 도강해서

보병들을 지원한 한 전차 중대의 ‘착실한’ 전투의 기록이다.


한국적인 지형에서 전차 단독이 아닌 보전포의 협력된

전투가 이상적인 작전형태가 될 터인데 이의 한 참조고가

될 사례로서 기대해본다.



1952년 철원 평야의 셔만 전차 중대 집결지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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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89 전차대대 A 중대는 3월 2일 8군으로부터

한강을 도하할 25사단 35연대 3대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수령했다.


본래 작전 계획은 보병들이 도강하는 동안 전차 중대는
강변에서 화력지원을 하고 한 나절을 기다린 뒤에
부교 설치가 끝나는 저녁에야 도강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강한 보병들이 전차의 동행없이 강변에서 멀리
진격해 들어 가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전차 대대장 돌빈 중령과 중대장 브레넌 대위는 토의끝에
전차도 보병들과 같이 동행 도강해서 작전 시작부터 끝까지 
보병대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보병대대의 요청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 하면서도
더 나은 지원을 하겠다는 전차 부대의 자발적인 의사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951년 3월 4일.

중대장 브레넌은 전차 중대를 염두에 두고 있던 도강 지점에서

3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귀여리의 전방 집결지로 이동시켰다,


[지금은 팔당호의 최 상류지점이 될 듯하다.
그러니까 전차의 공격은
팔당호 연안을 따라 양평으로 가는
호반 길을 따라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전투 상보. 왼쪽이 지금은 팔당호 상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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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그는 소대장들을 그가 중대 본부로 쓰는 초가집으로

불러 그가 구상하는 한강 도강 계획을 밝히고 토의를 했다.


그의 계획은 전차 한 량를 전차 구난차의 윈치 케이불로 연결하여

강을 시험 도강을 해 보는 것이었다.

만약 수심이 너무 깊어 전차가 빠지게 되면 이쪽 제방에 있는

구난차가 끌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전차가 북쪽 제방에 건너가게 되면 나머지 전차들은

개척했던 길을 쫓아가면 되었다.


셔만 전차 차대를 활용한 M 32 구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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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대장[토마스 앨리 중위]이 그 첫 번 전차를 강으로

끌고 가겠다고 자원했다.


이튿날 브레넌 대위는 한강의 남쪽 제방을 정찰했다.

그는 정찰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지점에서 1,000야드
남한강
쪽에 작은 섬이 존재함을 발견하고 이를 도강지점으로
선정했다.

그 작은 섬의 이 쪽은 강변과 250피트,
섬 건너
다른 한 쪽은 200 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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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지점에서 상류 쪽으로 조금 올라간

지점이 보병들이 도하 작전을 했던 곳이다.- 지도 참조 -
전차는 양평쪽으로 더 올라간 상류의 사잇섬에서 도강했다.
이곳은 팔당 댐이
들어 선후 강 수면이 크게 상승하여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이곳에 작은 섬이 있었고 흙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농사가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도 수초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서 표시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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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병들이 도하하는 도중 화력지원을 해줄

각 전차 소대의
진지도 선정했다.

보병들은 더 하류 쪽에서 도하 지점을 선정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중대가 지원할 보병 25사단 35 연대와
지원업무를 협의하고
보병들이 타고 강을 도강할 단정을
챙길 공병 부대장과도 협의를 했다.


공병 대장은 브레넌에게 전차들로 하여금 단정을 적재한

트레일러 8량을 도하지점인 한강까지 견인 해줄 것을 간청했다.

각 트레일러마다 단정 5척, 합계 40척이 적재되어 있었다.



한국전 후반의 고지에서 활약하는 M4 셔만 탱크
셔만 전차는 작아서 한국의 좁은 산길이나 농로를
잘 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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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들의 요청은 트레일러 견인 트럭들이 진흙탕이 질척한
물가로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고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병 및 공병들과 최종 합의한 작전 계획은 강변에 전개한
전차들이
0555부터 20분간 포격을 하고 0615분에 보병대대가

단정을 타고 한강을 도강하기로 하였다.


3월 7일 0330분에 기상한 전차 중대원은 0345에 이른 아침을 먹고

전차들을 도로에 행군 대형으로 정렬을 했다.
전날 내리던 눈도 그쳐서 주위가 조용한 은세계였다.

중대 편성은 전차 3개 소대 15량의 전차와 구난차 1량이었다.


서두에서 밝힌대로 중대는 전날 밤에 반쯤 파괴된 마을
귀여리에 도착해서
다음날 미리 행군 순서를 정해놓고
행군 대형을 짓기 좋게
분산해서 숙영했었다.


0430 브레넌 대위는 중대에게 출발 명령을 내렸다.

전차들은 느린 속도로 이동했다.

전차 15량 중 8량은 주정을 실은 트레일러를 전차 뒤에

견인하고 있었다.


한 척에 12명씩의 보병들이 승선할 수가 있었다.

너무 어두웠고 전차의 마력을 올려서 엔진소리가 적 진지까지

들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전차들은 트레일러를 끌고 하류 쪽 보병 도하 지점으로
일단 가서
트레일러를 분리시키고 사잇섬이 있는
상류 쪽으로 이동하여
소대별로 미리 선정한 진지를 점령했다.


진지 점령 완료시각은 0545였다.

0555 105미리 곡사포 1개 대대와 영국군 포병 1개 연대와

이미 지정된 표적들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드디어 명령일하 불레넌 대위 중대 전차들도 포문을 열었다.



도강 직후의 셔만 전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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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셔만 전차들은 그날 격전이 될 것을 예상하고 포탑내에

71발의 포탄을 만재하고도 뒤 엔진실위에 예비포탄 54발을

최대한 적재했었다.

[76미리 포탄은 90미리나 105미리 탄 보다 훨씬 작아서

 다량 적재가 가능하다.]


첫 사격에는 엔진 실위에 적재했던 포탄부터 사용했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아 강 건너 적 진지가 있는 고지들은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
전차들은 할당된 사격구역의 주요 적 진지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을 지역 사격으로 두들겼다.



한국 전쟁중 M4 셔만 전차와 보급품을 투하하는
C119 플라잉 복스카 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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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대대 보병들은 신속한 동작으로 단정을 강 속으로

밀어 넣고
희미한 여명 속에서 제파[梯波]별로 도하를
하기 시작했다.


적의 기관총이 사격을 개시하였다.

몇몇 주정에 구멍이 나고 보병들이 부상을 당했지만
도하는 계획대로
진전되었다.


보병들은 강을 건너자마자 내륙으로 깊숙히 진출했다.

적의 기관총 사격은 치열해져 보병들에게 사격이 가해졌다.

적의 포병들 사격도 치열해서 설치 준비를 하던 부교도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보병대대의 단정 도하 작전은 아침 0740에 완료되었다.

중대장 브레넌 대위는 계획했던 전차의 시험 도강를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3소대장 엘리 중위의 전차는 구난차를 데리고
강변 200야드 지점까지
진출했다.


구난차의 케이블은 도강을 감행할 앨리 중위 전차의
후미에 연결되었다.

0800 앨리 중위의 전차는 강 복판의 사잇 섬을  

향하여 조심스럽게 물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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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도강은 엄밀히 배를 타고 건너는 도하[ferry]와

도섭[ford]이 있다.

이 경우는 전차의 도섭(渡涉)에 해당한다.

그러나 독자들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도강이라는 일반 용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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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더 좋은 전차장 석의 앨리 중위는 조심스럽게 전방

강 수면을 살피며 차내 전화로 조종수
길로리 존슨 하사를 유도했다,


강의 수심은 생각보다 얕아서 3피트가 되지 않았다.

전차가 모래섬까지 거리의 3분지 2쯤 왔을 때 구난차의 윈치가

갑자기 멎었다.


그러나 전차는 탄력으로 케이블에 달린 구난차를 끌고
3,4피트를 가자
전차에 연결한 윈치 케이블의
커플링이 떨어져 나갔다.

조종수 길로리 존슨은 속력을 올려 사잇섬 물가에 무사히 올라섰다,


원래 도강 계획은 섬을 횡단해서 그대로 직진하고자 했으나

앨리 소위는 섬의 상류 쪽에 흙다리 교각과 이어진 발 디딤돌을

발견했다.


인간이 다리를 놓을 지경이라면 분명 그곳이 제일
얕은 곳일 것이다.

그는 즉각 섬의 상류 쪽 다리 기초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지도 다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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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 곳의 수심은 깊었다.

전차는 급경사로 물속에 머리를 들이 밀고
물이
조종수와 전방 사수석으로 물려와 두 승무원은
당장 물로 흠뻑 젖었다.


경험 많은 조종수 길로리 하사는 엔진이 침수되어 정지할 것을

막고자 악세레이타를 밟아 그대로 빠르게 전진하였다.

흙다리 나무 교각을 세 개쯤 지나자 또 수면이 깊어지며 물결이

포탑 아래 부분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은 수 초뿐, 전차는 다시 얕은 바닥으로 올라서며

강 건너편 강변에 도달했다.


마지막 구간을 건너는데 단 2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안전하게 강안에 자리 잡은 앨리 중위는 건너편 강변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중대 전차들에게 빨리 도강하라고 송신했다.


제 2 번 전차 스탈린 W.하몬 중사가 꼭 같은 루트를 타고
도강을 해서
단 5 분도 안되어 소대장 전차와 합류하였다.


전차 한 량씩 차례로 수중 도강을 하기를 원했던 앨리 중위는

2번 전차가 완전히 도강을 완료한 후에 3번 전차에게
도강을 명했다.


그러나 3번 전차는 바로 전 강변에서 화력지원을 하던 중

충격으로 조종석 아래의 비상탈출 해치가 느슨하게
풀려 있던 것을
미처 몰랐었다.

해치는 물속에 떨어졌다.


조종석과 전방 사수석에 물이 마구 밀려 들어와
조종 불능 상태가
되었다.


전차는 섬에 도착도 못하고 비교적 얕은 모래섬 강변에
정지하고 말았다.

앨리 중위는 남은 두 량의 전차들에게 조심해서 강을 건너도록
지시해서
모두 완료하였다.


5 량의 전차에서 좌초[?]한 한 량의 전차를 제외한 네 량의 전차가

도강에 성공하자 앨리 중위는 미리 도하를 완료한 보병과

합류하기 위해서 방향을 왼쪽으로 돌려 남한강을 따라 내려갔다.

이 때가 083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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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량 1개 소대인 미군 전차 부대 편제에서 소대장이 3 량을,

선임 하사가 2 량을 지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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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당시에 보병들을 승차 시키고 한강을 넘어
후퇴하는 89전차 대대의 M4 셔만 전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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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반 3번 전차가 물속에 좌초되어 있었기 때문에

앨리 중위는
단 2 량을 지휘하고 앞서 갔다. 그 뒤를 약간

거리를 두고 선임 하사반의 전차들이 따랐다.


도하에 성공했던 보병은 1,000야드 정도 전진하다가 북한강과

한강 사이의 좁은 지역을 가로 지르는 도로 근처에서 잠시

교착되어 버렸다.


600야드 전방의 작은 고지와 철도 둑에서 적의 심한 사격을

받는 좋지 않은 상황에 노출 되었기 때문이다.


앨리 소대 전차 중 소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소대장반

전차 2량이 고지를 맡아 앞으로 돌진했다.

포사격과 기관총 사격을 연속으로 가하자 고지로부터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고지의 적이 침묵하자 전차 2량은 양수리에서 양평으로 가는

중앙선 철도 둑에 붙어서 저항하는 적들에게 포문을 돌렸다.


철로에는 다 부서진 화차 6량이 서있었다.

화차들은 공습에 전소되고 기총소사에 벌집이 되어 있어

기동불능상태였다.


중공군은 기관총 3정을 화차 밑에 거치하고 미군들에게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앨리 중위의 두 전차는 공축 기관총과 76미리 주포의
12-15발의
포탄을 날려 적 기관총 3정을 모두 격파시켰다.


화차 밑의 기관총 3정이 제거되자 보병들과 전차는 철도를 넘어

보전 협동의 전진을 600야드 정도 계속했을 때 적의 새로운

기관총 3정이 전방에 나타나서 사격을 해왔다.


앨리 중위는 그중 한 정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고
76미리 포탄
두 발을 쐈다.


두 번째 포탄이 정확히 명중하여 적의 기관총과 사수, 조수가

공중으로  분해 되어 비산했다.

앨리 중위의 두 전차가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때 조금 뒤에서

후속하던 2 량의 전차가 알맞은 타이밍에 도착했다.

선임하사 커티스 D. 해럴 상사가 지휘하던 2 량의 선임 하사반

전차들이었다.


선임 하사반 전차 2 량은 나머지 두정의 기관총을 찾아내서

포사격으로 침묵시켜버렸다.


소대장반 2 량의 전차와 합세한 선임 하사반 2 량의 전차가
합쳐진
4량의 전차는 30분간 공축 기관총 소사를 하며
다시 보병들과
700야드를 전진했다.


엘리 소대가 분전[奮戰]할 때 강 저쪽에 남아있던 중대 전차중

일개 소대가 단 20분 만에 도섭에 성공했다.


후속 소대가 전차의 지원이 절실했던 다른 보병 중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전방으로 이동을 하는 동안 마지막
전차 소대도 도강을 완료했다.


오전 10시까지 물에 빠진 한 량을 제외한 A중대의 모든 전차가

강을 건너 보병들과 함께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다.


비상 탈출 해치가 떨어져 나가 이른 아침부터 물속에
고립되어 있던 전차도
그 오후에 구난되어 수리를 마치고
강을 건너 중대에 합류하였다.

그날 오후 보병대대는 전차 중대의 헌신적인 화력지원으로
목표를 어렵지 않게 점령하게 되었다.

도하 작전은 완전 성공으로서 보병 대대장 리 중령은
작전 성공은
전차의 성실한 근접 지원에 힘입은 바가
절대적이라고 하며 브레넌 대위에게 감사를 표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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