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밸리 전투(제 3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0 09:31

남쪽으로는 얼어붙은 곡릉촌을 도하하여 매내미 고개로 가는

길을 탔던 영국군들도 중공군이 추격 포위하고 

공격했다 .

이 지역은 현재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다.



영국군의 탈출 출구였던 매내미[큰 고개] 고개에서 본
해피 밸리 격전장.이 전투의 후반에 격전을 벌인 삼하리 벌판.
고가 차도 건너 멀리 철탑 옆에 보이게 우뚝 솟은
산 아래가 불미지 격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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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넒은 들에서도 영국군의 피해가 컸다.

현지에 가면 당시의 전황을 보면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곡릉천 좌우,고양시 선유리와 양주시 삼하리에

직경 1km의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군은 이 포위망을 벗어났어도 매내미 고개를 넘을 수는 없었다.

매내미 고개로 올라가는 가파르고 좁은 곳에서 탈출했던 트럭이

피격당해 불타오르며 길을 막아 버렸다.

이 길은 차 한대가 겨우 통행할 만한 폭을 가지고 있다.


중공군의 박격포가 때렸는지 중공군이 달려와서 고개를

밀봉 공격했는지는 확인 할 수는 없다.

[트럭은 마지막으로 전차와 같이 행군했던 유조차량일 수도 있다.]



삼하리를 가로 지르는 작은 농로에서 전차들과 보병들의
피해가 많았다.
지금은 이 옛 길과 농수로는 없어졌지만
매내미 고개로 통하는 옛길의 흔적같은 것이 보인다.

비닐 하우스 우측 차가 나오는 길은 가파르게 매내미 고개로
연결된 자취가 있다. 대단히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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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전차들은 곡릉천 북쪽 고양 선유리에서부터

진드기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의 공격 때문에 해치를

닫고 잠망경으로 밀폐 조종을 해야 했었다.

그래서 곡릉천에 빠지는 전차들도 있었다.


그리고 곡릉천을 넘어 삼하리로 이동한 전차들도

밀폐 조종으로 좁은 길을  간신히 타고 가야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소달구지나 다닐 좁은 길을 암흑 속에서 밀폐 조종은
사실 무리였다.

여러 전차가 좁은 길을 벗어나 길옆 수로에 빠지고 길을 막아
전차병들도
전차를 떠나 살길을 찾아야 했다.


삼하리 격전장의 유기 된 전차를 전투 며칠 뒤에 보신 어르신네는

6-7대쯤 되어 보이는 전차들이 포신을 전부 서쪽으로 돌리고

유기 되어 있었다고 말씀 하셨다.


[요약하자면 14대의 전차들은 그 절반인 6-7대가

곡릉천 북쪽에 유기 되었고 나머지 절반이 좀더 전진한

곡릉천 남쪽 농로에서 유기 된 것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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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전차대를 공격했던 중공군이 항상 하는 대로 우회한후
삼하리 서쪽 방향에서
전차대들에게 공격을 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매내미
고개가 막히거나 선두 전차가
수로에 떨어져 기동로가
막혀 버리자 전차들이 차체를 돌려
서쪽 구파발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제시하기도 한다.


[말씀해주신 어르신네는 조종석의 방향이 어느 쪽이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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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리의 다른 어르신네는 영국군 전차 2대가 도로를 벗어나

자기 집 논에 들어와서 유기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었다.


두대의 전차는 논바닥에 엔진 오일을 쏟아 놓아서

그 논의 농사가 삼년동안이나 잘 되지를 않았었다.


이 전차들은 곡릉천을 건너 매내미로 가던 전차였는데 논으로

들어간 것은 막힌 농로를 우회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탈출하는 영국군의 위치에서 본 매내미 고개.
옛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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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투입 된 크롬웰 전차 14대중 한 량도 귀환하지 못했다.

지옥의 전황은 영국군이 대량으로 살상당하고 남은 병력을 수습한

부사관 쇼가 이들을 인솔하고 전장을 탈출함으로서 끝났다.


그는 중공군이 도로 구간마다 달려 붙어 공격을 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죽음의 현장에서 목숨을 내놓고 체득했다.


그는 부하들을 인솔하고 중공군이 붙은 도로를 떠나서

매내미 고개 서쪽 1km 지점의 언덕을 넘어 탈출했다.


그가 인솔하고 나온 부대 인원은 겨우 70명 내외였다.

상황이 종료된 이 때가 1월 4일 새벽 03:40분이었다.


이날 전투에서 영국군은 157명이 전사했다.

원래 208여명이 실종 되거나 전사한 것으로 믿어졌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생존한 영국군이 귀환했고 나중에
포로가 되었던
장병도 귀환하였다.


영국군이 죽거나 탈출한 현장에서는 중공군들의

약탈이 극성을 부렸다.

중공군들은 전투 중간부터 틈만 나면  몇 차례나 사체를
뒤지고
중요 전리품을 챙겼다.    
  


영국군이 격전장에 유기했던 크롬웰 전차.
중공군 점령중 두달이나 이 위치에 있다가 
수복후 회수되었다.
 
현지 어르신은 영국 전차가 작았고 하꼬가다[상자형]이라고
회고 했다.크롬웰 전차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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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되었다.

삼하리에 사시는 한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밤새 총소리와 폭탄소리와 비명소리에 간을 콩알만큼 조리고 있던

식구들은 날이 밝자 필요한 보따리만 싸서 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은 몇 백 미터 되지가 않았다.

동네 입구에서 지키던 중공군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난생 처음 보는 중공군들이었다.

식구는 그들의 명령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아직 소녀였던 할머니는 비로소 마을 주변과 동네 길에

부서진 트럭과 영국군 사체가 즐비한 것을 발견했다.

사체들은 보기에도 처참하고 무서웠다.


전투가 종료되고 몇 시간이 되었는데도 영국군 트럭들은

시동이 꺼지지 않고 계속 엔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끔찍해서 한손으로 눈길이 발길만 보이게 가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집으로 돌아와 며칠간 집밖으로 나가지를 말았다.


밤에는 젊은 영국 군인의 귀신이 찾아와 구슬피 울 것 같은

두려움도 들었다.


중공군들은 자기들 사체만 치우고 자기들이 마구 함부로 하며

약탈하던 영국군의 사체는 그대로 내 팽개쳐 놓았었다.


서울이 점령되고 마을의 중공군이 떠나자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먼 이국에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뜬 불쌍한 외국 젊은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정중히 장례지내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원칙이

확인되었고 동네의 성인들은 모두 영국군 전사자 매장 일에

자원하고 나섰다.


침략군이니 뭐니 하며 매장을 반대하는 빨갱이스러운

인간들은 이 인간적인 도리를 논하고 실행하는 상황에

한 명도 나오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영국군인들이 그렇게 도달하려고 노력했던

전장의 끝 매내미 고개 우측 언덕에 길고 깊은 장방형 묘지를 팠다.


그리고 동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영국군 유해들을 거두어서

자기들이 마련한 장지로 운구해갔다.

동네 분들은 영국군 유해들을 가능한대로 정중히 취급했다.


이 때 이일을 한 어르신네는 눈을 반쯤 뜨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숨을 거둔 금발의 영국군을 보니 가슴이 메어지더라고 했다.


동네 분들은 아픈 마음으로 유해들을 판 묘소에 일렬로

한명 씩 최대한 편하게 눕혀서 안치했다.


그리고 겨울이 가고 봄이 어른거리는 3월이 되었다.

두 달 간 동네 여기저기에 방치한 영국군의 트럭이나 전차들은

아무도 손대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


서울이 탈환되고 유엔군이 고양군에 들어오고 불과

수일 뒤에 영국군이 찾아왔다.


그들은 영국군이 피해를 당한 지역을 돌아보고 전사자들의

행방부터 찾았다.


동네 어른들이 잘 모셨다고 말하고 집단 묘역으로 안내하자

그들은 안심한 듯 고마움을 표하고 돌아갔다.


그 뒤에 영국군이 그 묘역에 자주 찾아왔다.

일요일에는 수십 명이 여러 대의 트럭을 타고 와서

추모 예배를 드리고 갔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자 영국군은 그 묘역에 위에 위령비

[또는 추모비]를 세웠다.


매내미 고개 바로 우측 농원의 바로 뒤에 위령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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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 전투가 왜 해피 밸리 전투로 명칭이 붙었는지

짐작이 간다.

1차 세계 대전 1917년 4월 11-12일에 있었던 아라스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 12 사단의 장병들을 안치한
Monchy-le-Preux 의
군 묘지 명칭이 해피 밸리[HAPPY VALLEY] 영국군 묘지다.
76명이 잠들어 있다.



프랑스 카레 근처 영국군 해피 밸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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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힌트를 주어서 이 영국군 묘역을 발음하기 힘든

현지명대신 해피 밸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
전투 명칭까지로
발전한 것 같다.


이 참혹한 전투는 해피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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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인이나 민간인의 추모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다가

전쟁이 끝났다.


어느 날 묘역이 분주해지더니 영국군의 유해를 모두 영국으로

이장해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간 묘역을 다시 파고 영국군의 유해를 수습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유해는 모두 발굴되어 아마천으로 정성스럽게 싸여져
관에 놓여졌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 영령들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안도와

허전한 마음으로 전송했다.


유해가 영국으로 운구 되어 가고도 영국군이 세운 위령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이 지나자 이 위령비가 쓰러져 버렸다.


행정당국이 이 사실을 영국 대사관에 알리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때의 지방 행정부서나 당국은
연락수단도 시원치 않았고 해서
그대로 두어 버리는
무심한 대응을 했다.


동네 사람들도 오고 가면서“저것 다시 세워야 하는데---”
하면서도
자기일과 무관하니 안타까운 마음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몇 년이 그대로 지난 어느 해인가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풍문에 영국으로 가져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민들은 한국인들이 쓰러진 위령비에 몇 년씩 관심을 안 가져 준

사실에 영국 당국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이 비를 본국으로

가져갔다고 하면서 미안하게 생각했다.


한 어르신은 이 비석을 영국이 가져간 때가 작은 고개와 매내미

고개를 직선으로 잇는 큰 도로가 뚫릴 무렵인 1980년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조사를 해보니 위령비는 그 보다 훨씬 전에 영국으로

이전시킨 것이 발견되었다.


영국 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 비는 1962년 영국으로 가져와

북 아일랜드 얼스터 부대가 주둔했던 벨리메나의
세인트 패트릭 기지에 재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영국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위령비 일대가
도시화 되어가고
있어 소멸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장소는 큰 도로 하나 뚫렸을 뿐이고 지금도

전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영국이 위령비를 가져간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네 분들 말씀대로 비가 수년간 쓰러진 채 방치 된 사실에

자극을 받고 가져갔다는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한국인들이 위령비를 앞으로도 그렇게 함부로 방치되면

종내는 없어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가져간 것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목숨을 바쳐 지켜준 나라의 냉대에 영국이나 영국 영령들이

화가 날 만도하다.


얼스터 연대는 1968년 로얄 인니스킬링 푸시리에 부대와

합병하여 로얄 아이리쉬 레인저스 부대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비석이 서 있던 부대의 기지도 얼마전 폐쇄 되었다.

이 기구한 비석은 2008년 5월 벨파스트 시청으로
이동하여 현재는 다른 전쟁 기념 동상들과 함께
시청의 마당 한구석에 전시되고 있다.
시청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 둘러 볼 수가 있다.



위령비가 있는 벨파스트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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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문해서 만난 고양시의 격전지 현지 주민 한분은

삼년 전에도
영국인들 세 명이 이 지역을 찾아와서
비석 위치와 격전지 위치를
물어보았다.


자신은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별 도움이 못되었다고 했다.

그 영국분들은 주변 여기저기를 반나절이나 헤매다가
낙심한체 돌아갔다.

이 사실은 아직도 영국인들이 해피 밸리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한국이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6·25전쟁 때
참전하신 분들의 방문 행사도 하고  전적 기념지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국군 얼스터 부대가 크게 희생했던 이 해피 밸리
지역에는
희미하게 전해오는 전설 같은 영국군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서두에서 말했듯 파주군 설마리 전적기념 공원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 -
우리 한민족에게 해피 밸리 전투에서 희생한 영국군 장병들의
가치는 설마리에서 산화한 장병들 희생의 그것과 다를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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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비극인 서울 시민의 1.4 후퇴를 결사 엄호하다가

희생한 영국군의
영령들이 한국의 국민들에게 이렇게
잊혀 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희생 영령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한  전적 기념 공원이
전투지에 건립되어야
할 것이고 한국인의 무심함에 서운했던
영국인들이 가져갔지만
또 다시 갈 곳을 잃고 북 아일랜드
벨파스트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그 위령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간청으로 다시 찾아와 

이곳에 건립되기를 염원해본다.

그것이 1.4후퇴의 처절한 상처를 적지않게 입었던
동방예의지국 한국인들이 꼭 해야 할 보은의 성의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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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0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김현수 2010.07.23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령들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국민들은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

  3. 바부퉁이 2010.07.23 2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병 1개 중대로 증강된 전차 중대를 먼저 출바시켰으면, 야간에 소음 으로 인해 집결해있던(철수전 집결했는지는... 배치된 상태에서의 철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장소가 아군의 기도가 노출되고, 그 위치로 어렵풋이 박격포의 조명탄을 솼다면, 바로 노출되어 전위부대인 전차 중대부터 공격 당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또한... 그때까지 중공군의 전술을 잘 몰랐던 영국군의 지휘관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수도 있을거 같습니다(물론 잘못된 선택 이었죠)

  4. 강헌 2010.07.24 0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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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 밸리 전투(제 1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19 17:35

아래 글은 1951년 1월 3일 밤 서울 북방에서 1.4후퇴를
엄호하고 
철수하던 중 미군이 잘못 투하한 조명탄에 노출된
영국 얼스터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장렬히 싸우다가
대대장 이하 157명이 전사한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이 전투는 북한 운산에서 1950년 11월 말에 미 육군 1 기병사단이

중공군에게 당했던 비극이 남한에서 또 되풀이 됐던 것이라고

평가 할 수가 있다.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육해공군을 파견했었고 그만큼 피해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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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전투', 또는 '해피 밸리'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영국에서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미국 전사에도 거의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며 이들이 목숨 바쳐 싸웠던 한국에서는

서글플 정도로 잊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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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스터 연대 약사[略史]에서도 이 비극적인 전투는
언급되지 않고
어물어물 넘어갔다.


영국인들에게 해피 밸리 전투는 치욕적인 패배의 전투로

평가되었고 따라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는 어느 월남전사 기록에서 한 한국군 소대가 경계에
소홀해서 전멸했던
전투를 단 몇 줄로 간략히 소개 한 사실을
보았을 때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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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이 해피 밸리 전투는

책에서 거의 만나보지 못했던 전투였다.


나는 2주전 미국 언 라인 북스토어 아마존에 주문한

영국 책자 -Tank war Korea-에서 이 전투를 비교적 자세히 접하고

그 전투가 우리 민족이나 우리 국방사에  의미하는 바 크다고
생각하고
조사에 나섰다.


인터넷을 뒤져 겨우 전투장에 철로가 통과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나는 멍청하게 철로 연변에서 이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문산까지 왕복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지를 못했다.


돌아온 나는 고양시와 옆 양주시는 물론 면단위까지
전화를 걸었지만
이 전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힘들게 고양시 전문위원 정동일 씨를 만나서
그분의 주선으로
젊은 시절 전투 현장을 생생히 보셨던
이강만 선생님을 뵙게 되었고
나중에 현지를 두 번이나
더 방문해서 이 전투를 증언하시는 여러
현지 어르신네를
만나 자료를 수집하였다.



지도를 들고 여러번 현지 답사를 다녀서 지도가
께끗하지가 않다.맨위의 동그라미가 있는 쟁고개가
영국군이 배치되었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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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잊혀진 전투는 결코 한 민족이 외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전투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사적 가치로서 민족의 비극인 1.4후퇴와 엄호하던
영국군들이 다수 희생 된 전투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얼마 전 파주시 설마리의 영국군 전적지에 많은 영국의
노병들이 다녀갔다.


그러나 설마리 전투 이상으로 의미를 가진 이 전투의 현장에는

전적비는 커녕 아무런 흔적도 없고 기억해주는 이는 오직

옛 격전장에 거주하는 나이 80이 넘으신 토박이
어르신 분들 뿐이다.


나는 이 포스팅에서  해피밸리의 전투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이 전투에 대한 재평가내지 재인식이 절대적으로

다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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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일 암담한 새해가 밝았다.

한 달 전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기습당했던 미군은

총 퇴각 명령을 내리고  38선을 되 넘어 서울까지 철수했었다.


서울은 6·25전쟁 초기 석달간 북한의 정떨어지는 행패 경험과
정부의
피난 권유로 시민들은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정초  새해 첫날인 이날 서해안을 따라 멀리
평북 안주까지 북상했다가 
서울로 철수했던 영국군 29여단은
명에 따라 거꾸로 북진 길에 올랐다.


서울 북방에서 서울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1사단에 추격해온
중공군이
압박을 가하고 있으니 측면을 찔러서 궤멸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릿지웨이의 서울 철수 결정으로 이 명령은 1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고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유엔군과
서울 시민의
피난을 엄호하다가 다시 명에 의해 적절한
후퇴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부대는 다시 후퇴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중공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이들이 배치된 산등성이는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서

더욱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중공군의 공격 위치에서 본 쟁고개 최고 고지- B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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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상한 영국군의 영국 29여단은 3개 대대였다.

한개 대대, 즉 후시리에 대대는 우측 송추에서 방어선을

형성했고 로얄 울스터 라이플 대대는 좌측, 즉 서쪽의 고양군과
양주군 경계선인 도로 좌우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다른 대대인 그로스터 대대는 후방에 예비로 전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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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로스터 대대는 4개월 뒤인 1951년 4월 22일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임진강가에서 중공군 대병력의 기습을 받고

섬멸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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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고양읍에서 3킬로 지점이고 고양군과 양주군 경계선인

‘작은 고개’지역이었다.

현재는 ‘쟁고개’로 불린다.


여기서 직선거리로  3킬로 남쪽 후방에 ‘큰 고개’라는

이름을 가졌던 매내미 고개가 있다.

매내미 고개가 휠씬 가파르고 높아 이런 대칭되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두 고개는 직선이 아니라 활대와 같은 구부러진

둥글게 휘어진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영국전사는 이 작은 고개를 채근현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 해피 밸리 전투를 채근현 전투라고 표시한 것도 있는데 

현지의 어르신네들을 전혀 들어보지를 못한 지명이라고 
말씀하였다.


한국에 파견된 29여단 소속 얼스터 연대는 1793년

북부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유서 깊은 부대였다.



로얄 얼스터 라이플스 연대의 부대 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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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파견된 얼스터 부대는 연대의 1대대였다.
역사적으로 여러 전투에서 용명을 날렸다.

이들은 전사에 라이플스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1차 대전 프랑스 솜므 전선에서의 얼스터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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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얼스터 라이플 대대의 대대장 행크 칼슨 중령은 병으로

일본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있었고 대대는 부대장인

토니 브레이크 소령이 대대장 대리로 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보병 대대에 에슬리 쿠퍼 대위가 지휘하는
크롬웰 탱크 14대가 배속되었다.

크롬웰 전차 - 무게 28톤, 75mm 포, 2정의 기관총을 장비했고
시속 40마일이라는 쾌속을 자랑했지만 장갑이 약한 단점이
있었다. 주조 기술이 아닌 리베트 결합의 구식 기술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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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 대위는 영 여단의 후사르 [경기병]대대소속으로
이 지원전차 부대
를 로얄 아티렐리 부대에서
크롬웰 전차 8대 ,정찰 중대에서
크롬웰 전차 6대를
배속 받아 총 14대의 전차로서 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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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의 전차가 10랑이라는 설도 있으나 위의 14량 설을 채택한다.

전투현장에 가서 확인해 봐도 14량 설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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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은 더 대형인 84mm [20파운드]로 장비된

센츄리언 전차도 있었으나 근처 지형이 좁은 농로들로 이루어져

중전차의 기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서 더 소형인 크롬웰
전차를
보냈으나 결과는 그 판단과 전혀 다른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서
파견 전차대 전멸이라는 비극을 가져왔다.


얼스터 대대의 동쪽에는 3킬로 지역에는 앞서 말한 후시리에
대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서쪽 1.5킬로 떨어져  즉, 고양을
지나 지금의
구파발 쪽은 미군 25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두 대대는 긴급 전개했던터라 이어진 긴 전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역의 고지등 중요한 곳만 점령하는 거점 방어의 형태를 취했다.

얼스터 대대는 도로 양쪽의 여러 고지들을 점령해서
방어 호를 구축했다.


천지가 얼어붙은 추운 신년 첫 날을 보내고 다음날인
1951년 1월 2일도
중공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한국군 1 사단이 띄엄띄엄 철수해갈 따름이었다.

영국군 장병들은 온 몸이 냉동 될 만큼 추운 겨울밤을 버티어 냈다.


다음날 3일 날 새벽 5시, 드디어 도로 우측 최전방고지이며
근처를
감제하는 최고 높은 고지에 배치된 B중대 후방 고지의
D중대를
중공군이 공격해왔다.


중공군의 서쪽으로 침투해서 북쪽을 향해 배치된

D중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몰 소위가 지휘하던 4소대는 이 기습에 별다른 저항을 못하고

고지 아래로 밀려 내려왔다.


이어서 중공군의 공격은 확대되어 최고 고지인 B중대의
고지도 점령했다.

전방의 A중대 고지도 빼앗겼다.



쟁고개[작은 고개] 좌측 언덕이다 - A 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양 고지를 공격해서 점령했다가 영국군의 반격으로
패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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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공군은 64군의 116사단 전위 부대였다.

지역을 공격할 때 지역 최고 고지부터 확보하는 전술의
기본이
중공군의 전술에도 적용이 되었다.


대대장 토니 블레이크는 적이 진지강화를 하기 전에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기로 하였다.


대대가 가진 가용한 모든 화력이 고지의 중공군에게 퍼 부어졌다.

박격포와 탱크들이 한참을 두들긴 후 A중대가 가파른 고지를

기어 올라가 반격을 했다.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능선에 올라간 부대는

전방 고지의 중공군을 박살 낼 항공공격을 요청했다.


미 공군의 F -80슈팅 스타기 4기 편대가 내습해서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고지를 점령했던 중공군은 백주에 숨을 곳이 없었다.

정확한 네이팜 공격으로 중공군 전원 몰살이라는 위력을 발휘했다.


A중대가 고지를 쉽게 탈환하자 영국군은 지역에서 제일

높은 B 중대의 전방 고지를 공격해서 재점령했다.


점심이 조금 지나 끝난  이 전투에서 적군은

약 30구의 시체와 2명의 포로를 남기고 도주했다.

얼스터 대대에는 네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얼스터 대대가 그 작년 11월 초순 한국에 온 이래

최초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대대원들의 사기도 높아졌다.


그러나 영국군이 선전(善戰)하는 동안 후방 서울의 미 8군은

다음날 4일을 완전 서울을 철수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고

전방 부대들은 그날 중으로 중공군과의 접적을 끊고
철수 하도록 명령했다.


철수 명령은 오후 3시에 얼스터 대대의 오른쪽 미 25사단에

제일 먼저 하달되었다.


철수 명령을 먼저 받은 미군의 25사단은 번개같이 움직여서

불과 한 시간 반만이 오후 네 시 반에 철수를 완료했다.


중공군에게 데인 경험이 많은 미군은 다가올 밤이라는 것이

중공군의 기습에 어떤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국군의 우측 송추 쪽 후시리에 대대도 얼스터 대대보다

한 시간 먼저 철수 통보를 받고 철수를 완료했다.


후시리에 대대도 이날 하루 전방에 밀려온 중공군과

격전을 치러서 200여명을 사살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대대의 철수 특징은 차량을 먼 후방에 대놓고 도보로

적전 이탈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승차를 완료한 시각은 다음날 새벽 1시였다.


얼스터 대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것은 인접 퓨시리에 부대가

철수명령을 받은 시각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지난 18시 30분이었다.

이미 어둠의 그림자가 찾아 올 시각이었다.


얼스터대대에 전방에 중공군이 집중되어 있었던 상황에

철수 명령도 제일 늦게 받았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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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pohobag 2010.07.20 13: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이 블로그를 발견하고 아주 푸욱 빠졌습니다. 매일같이 시간만 나면 쉬지않고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자료와 답사를 거친 후에나 쓸 수 있을지 모르는 글들입니다

    거의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또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네요.

    더위에도 쉬지 않고 수고하시는 필자를 격려하기위해 삼계탕 한 그릇과 커다란 수박이라도 한통 들고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을 여러사람들의 블로그에도 이어 올리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만
    네이버나 다음에 카페를 만들어도 좋겠구요

    아무래도 널리 읽혀지려면 여기저기 붙이는 게 좋을 듯한데
    이 엄청난 力作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요

  2. 몰러요원 2010.07.26 07: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 울프독님의 블로그에 들려서 개 이야기도 보고 가고 물고기 이야기 도 보고 갑니다.
    많은 블로그가 있지만 이렇게 전사를 직접 현장까지 둘러보고 써주시는 분은 참 드믈게 봅니다.

    비밀에서 왔다 갑니다.

    몰러 드림

  3. 보도연맹은 빨갱이 2010.10.12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통에는 무고한 희생은 어쩔수 없는거 아닌가
    보도연맹 빨갱이들이 죽창들고 인민재판 한건 왜 언급을 안 하는지

  4. nogiuook 2011.05.17 0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안보입니다. 솜즈사진을 제외하고는

  5. Jewellery Making Supplies 2011.10.30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알고 싶어서 찾다 보니 좋은싸이트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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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jus mengkudu 2013.02.23 2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적으로 나는 전체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이 정보

임진강전투 상기행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톡!톡! 자료실/홍보 톡!톡! 2010.04.05 18:50



 초대의 말씀

   임진강전투는 51년 4월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3일간 방어해낸  대표적인 ‘고립방어전투’로서 영국군 글러스터셔 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되는 극한상황에서도 끝까지 저항하여 남하하는 중공군의 공세를 3일간 차단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이 수도권 북방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서울을 빼앗기는 것을 방지한 의미있는 전투입니다.
   60년 전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지원해 준 영연방과 참전용사에게 깊이 감사하고 전투재연을 통한 6‧25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 설마리 전적비와 25사단 사령부 일대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36번째 임진강 전투행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행사개요

   ◦ 일  자 : '10. 4. 17(토), 10:00 ~ 18:00
   ◦ 장  소 : 영국군 전적비(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 기념식), 
                 25사단 사령부(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 식후행사)
   ◦ 내  용
    - 기 념 식 : 전투약사보고, 추모행사, 장학금 수여 등
    - 식후행사 : 사진전·유해발굴 전시회·전투재연·특공무술·축하비행


 프로그램


  ※ 연예병사 팬사인회

      - 11:00 ∼ 12:00, 14:40 ∼ 15:10, 16:50 ∼ 17:50
      - 붐, 앤디, 토니안, 김정훈, 이동욱, 이현균, 김재원

  ※ 주먹밥 먹기 체험 : 10:00∼18:00 / 6,000여명 대상(1인당 1개)

  ※ 먹거리 장터·황금마차 : 10:00∼18:00 / 분식류(김밥, 어묵, 순대,

     떡복이, 계란김치전, 파전), 핫바, 닭꼬치, 컵라면, 건빵 등 판매

 행사문의

   ◦ 전국 어디서나 국번없이 110
   ◦ 국방부 : 02-748-5882, 5884 / 25사단 : 031-867-7290


 찾아오는 길
   ◦ 주  소 : 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산리 95-1호 25사단(031-863-5617)
                (네비게이션 : 양주시 남면사무소ㆍ남면초등학교)
   ◦ 지하철

       - 1호선 동두천 중앙역 하차(1번 출구) 후 버스 이용
       - 1호선 덕정역 하차(1번 출구) 후 버스 이용
   ◦ 버  스
       - 동두천 중앙역(동두천 방향에서 오실 때) 하차51번(배차 30분)
         → 1번 출구 약 500m 직진 후 탑승 → 남면농협 하차(20분 소요)

       - 덕정역(의정부ㆍ양주 방향) 하차25-1번(배차 60분)
         → 1번 출구 앞에서 탑승 → 사단 앞 하차(20분)

       - 적성터미널(파주 방향) 하차25번(30분)ㆍ25-1번(60분)
        → 터미널에서 탑승 → 사단 앞 하차(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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