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승일교 박승일 대령의 최후 행방은?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21 08:39


서울에서 북으로 올라가면 한탄강 상류에 놓인
승일교라는
다리와 만나게 된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을 있는 다리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다리는 남쪽 절반과 북쪽
절반의 디자인, 즉 생김생김이 다른 언바란스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승일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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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승일교라는 다리 이름이 남쪽의 이승만 정부가
절반을 짓고
북쪽의 김일성 도당이 절반을 지어
승만의 승자와 일성의 일자를
따서 승일 교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자 승일교라는 이름은 6·25전쟁에서 평북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박승일 연대장[대령]을
기린 이름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승일교 다리 현장의 다리 설명이나 인접 승일 공원에도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념해서 명명했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박승일 연대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좀 알아가자 나는 꼭 같은 덕천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고근홍 대령이라는 분도 전사했음을 알았다.


고근홍 대령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다부동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국군 1사단이 분전할 때
백선엽 사단장 지휘 하에서 김점곤, 김종갑 대령들과 함께
연대장으로서 격전중의 어려운 전황에서 부대를 지휘했던 분이다.


나는 다부동 전투에 관련된 여러 글을 자주 읽어서
이 분의 이름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박승일 대령도 처음 접한 분이었다.
관심을 갖자
차츰 관련 정보들이 들어왔다.

고근홍 대령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고 박승일 대령은
만주군 출신으로서 둘 다 육사 1기 생이었다.
박대령은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20년 생이다.


오른 쪽에서 두 번째 카이젤 수염을 기른 분이 박승일 대령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별을 단 철모를 쓴 분이 7사단장 신상철 준장.

내가 유일하게 구할 수있는 그 분의 사진이다.

승일교가 있는 철원군에서 행정 경로를 밟아 성우회와
연락해서 육사 1기생 앨범을 구해 보면
박승일 연대장의 사진을 찾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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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박승일 대령이 덕천에서
고근홍 대령과 같은 시기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투 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글을 볼 수가 있었다.


글을 쓴 분은 6·25전쟁때 한국군 총 참모장이었고
총리도 역임한 정일권 장군이었다.


그 분은 회고록에서 박승일 대령이 부하들과 함께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산악지대로 탈출해서 한동안
유격전을 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 분은 박승일 대령이 유격전을 하다가 중공군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한 뒤 무선으로 "중공군이 온산을 겹겹히 포위했다"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내고 소식이 끊겼다고 썼다.


나는 그래서 박승일 대령이 상당한 세월 북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격 활동을 하다가 최후를
맞은 것으로 상상했었다.


그러면서 연대 급에 지급된 무선기가 어떻게 남한까지
교신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 3사단 장병들.
이때만 해도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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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여 년 전, 북한 문제에 관한 글도
많이 쓰고 책도 여러권 출판했던 이기봉 선생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1950년 11월 덕천에서 작전중인 국군 7사단, 오른쪽의
무전기를 맨 병사가 이 기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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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국군 박승일 연대장의 7사단 5연대 소속
무전병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뒤 평양 인근 순안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1951년 4월 초 탈출 했었다.

그러나 대동강을 건너다가 붙잡혀서
평양 사동 교화소에서 당분간 수감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다시 탈출, 갖은 역경 끝에 그 해 5월 25일
임진강을 넘어 국군 1사단으로 귀대했다.

그는 그의 저서 제 5 전선- 장백산에서 임진강까지-
이라는 저서에서 포로가 된 박승일 연대장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 온 미군들 모습.
한 책자는 이들이 1951년 2월 중공군 4차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들이
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책자에는 중공군이 석방한 미군
포로들이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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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은 포로가 된 직후 온 천지가 얼어 붙는 추운 날씨에
북으로 끌려 가면서 수많은 참혹한 장면을 목격을 했었다.


그는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 고근홍, 박승일 대령이
포로가 되어
북한군에게 넘겨졌다는 정보를 동료
포로들에게 들었다.


궁금해 하던 그는 우연히 포로가 된 박승일 대령을 목격했다.
이 선생은 자기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포로로 끌려 가서 아연 광산인 초산군 화풍 광산
얼음굴에서 고생하다가 다시 분류되어 이동하기 위해
광산 사무소 앞에 전 포로들이 집결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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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병들의 포로 인원 점검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다.
“야! 저기 7사단 5연대장 아녀?”


포로 중에 누가 이렇게 외치며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귀가 번쩍 틔어 그 쪽을 바라봤다.


물론 나뿐이 아니라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그는 분명히 박승일 대령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그는 지난 날 [6·25전쟁]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부터
이른바
귀신 유격대 대대장 [당시 제 5사단 3연대의]으로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거구와 카이젤 수염으로 이름난
명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운(武運)이 다 했단 말인가?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무척 인정 많고 부하를 친형제처럼 아끼던 지휘관이었다.
적병에게도 인자했다.


지난 날 중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북한군의 포로를
자기 지프에
싣고 의무대로 달리는 걸 보았고 때때로 최전방
초소에 나가 사병들과
산병호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박 대령의 부대[국군 제 7사단 5연대]에 배속되어
낙동강 전선의 영천에서부터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덕천에서 중공군 포위망에 빠져
함께 적중을
헤매다가 헤어지지 않았던가?


그 후 포로가 된 박 대령은 이 수용소 어딘가에 따로
감금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역시 국군의 고급장교
[연대장 또는 대대장급]로
짐작되는 수명의 다른 포로와 함께
소 달구지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박 대령의 얼굴에 그 인상적인
카이제르 수염이 안 보인다.
스스로 깎아 없애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쓰라린 심정이 오죽 했을까?


일반 포로들이 모여 서있는 광장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박 대령 일행을 태운 소달구지는 이내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는 착검한 총을 든 5-6명의 북한 병들이 따랐다.

“ 연대장님!”
포로 가운데 누군가가 이렇게 불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 대령은 달구지 위에서 머리에 쓰고 있던 방한모를
벗어
우리를 향하여 흔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머리를 죄수처럼 박박 깎지 않았는가?
박 대령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 방한모를 흔든다 .

서글픈 듯한 미소를 띄우며---


“ 연대장님 !”

“ 박 대령님 !”

포로들의 목 메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잇달아 일어난다.
박 대령은 달구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팔을 쳐들어
포로들의 아우성에 응답을 했다.

“아, 아니! 이 동무들 덜 돼 먹질 않았구만잉 !
  닥치라우. 쌍 ---!”

북한 경비병들은 당황해서 포로들의 머리 위에 총대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박 대령을 부르는 포로들의 아우성은 곧 잠잠해져 버렸고
박 대령과 그의 몇몇 고급장교 포로들을 태운 소달구지는
계속 계곡 아랫길로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압송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압송 당하고 있는 본인들도 물론 모르리라.
이것이 박승일 대령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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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 선생은 고근홍 대령의 신상도 전했다.

이 선생은 앞에서 말했듯 포로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평양 사동  교화소에 구속되었었다.


그는 이곳에 고근홍 대령이 갇혀 있었고 그가 수준 이하의
대접에 분노하여 격렬히 항의하자 교화소 경비자가 그를
구타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혜산진에 도달한 미 7사단 17연대 장병들이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바라보고 있다.

서부 전선이나 장진호 방면과 달리 이 방면에는
중공군이 투입되지 않아 한미 연합군은 비교적 쉬운 북진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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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연대장이 포로가 된 덕천 전투를 간단히 소개한다.
한국군의 7사단이 주축이고 6, 8사단이 구원군으로 나선
군단 병력이 중공군의 대병력에 두들겨 맞고
붕괴 된
덕천 전투는 1950년 11월 26, 27일 양일간에 걸쳐
평북 덕천에서
발생했었다.


중공군이 군우리와 운산에서 미군들과 한국군들을
격파해서 재미를 본 제 1차 전역에 이어 보급과 정비를
마치고
다시 공세를 시작한 2차 전역에서 7사단을 주축하는
국군의 3개 사단이
무참히 당한 것이다.


포위되었던 신 상철 7사단장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미 고문관과 함께 연락기 L-19로 탈출했다.

사단장도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라 장군을
포로로 넘겨줄 수 없다는 상부의 결정에 의한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덕천에서 북창 방면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는 설이 유력하기도 하다.]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왼 쪽]과 24사단장
윌리엄 딘소장[오른 쪽].

그는 대전 전투후 35일간 헤매다가 포로가 되었다.
북한은 그가 포로가 된 사실을 1년 반이 지난
1951년 12월 18일까지 알리지 않았다.

북한은 그의 손가락 밑에 성냥개비 같은 뾰족한 것을
넣고 고문했었다.

체구가 당당했던 그가 돌아 올 때는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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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사단의 국군 패잔병이 우글거리는 덕천의
텅빈 7 사단 CP에 모인
연대장들은 8사단 10연대의 고근홍 대령,
6사단 2연대의 김봉철 대령,
7사단 5연대의 박승일 대령,
7사단 8연대의 김용주 대령이었다.


이들은 선임인 고근홍 대령을 임시 총 대장으로 추대하고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대가 혼재 되어 와글거리는 상황에서 지휘할
병력조차
파악 할 수가 없었다.

김용주 대령과 김봉철 대령은 산을 타고 탈출했지만
그런대로 부대를
편성해서 밤까지 저항하던 고근홍, 박승일
두 연대장은 부대가 궤멸되고 포로가 되었다.

박승일 대령은 산위에 고립되어 겹겹으로 포위 된 뒤에
중공군의 거듭된
권고에 할 수없이 산을 내려와 투항했다고 하니
앞서 정일권 장군이
회상한 유격전은 이 짧은 전투가
와전되어서 그렇게 오해를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덕천 전투에서 피해가 컸던 7사단 중에서도
박승일 대령의 5 연대는 거의 전멸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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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다.

나는 그 뒤에도 틈만 나면 두 연대장이 북한에 남긴 무슨 자취가
있을까하고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 간 기회에 그 곳 연변 대학교 도서관에서도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두 분의 자취는 없었고 좌익 월북자 강 태무
소령의 전후 행적만 부수적으로 수확할 수가 있었다.

이 자는 표무원 소령[지원병 출신]과 함께 군에 잠복하고
있었던 좌익이었는데 숙군의 초점이 자신들을 겨누자
지휘하던 대대를 이끌고 이북으로 넘어가서 국군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알아보니 그 자는 전쟁이 끝날 무렵 동해안에 주둔한
북한군의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더 찾아보니 세월을 흘쩍 넘어 1980년대 초, 노쇠한 강 태무가
자신에 의해 강제 월북한 부하들과 촬영한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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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흑인 구성 24연대의 병사들-
전투력에 문제가 있어 흑인 연대는 해체되었다.

중.북한은 유엔군 포로들을 국군들 보다는 비교적
나은 대우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1951년 봄에 수용소에
창궐한 발진 티푸스로 절반이 사망했다.
이 기간 국군 포로가 당한 학대는 이루 표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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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연대장은 물론이고 고근홍 연대장의 그 뒤
소식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접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전 두 분이 과연 전사 처리가 되었는지 알기위해
전쟁 기념관을 찾아가 전사자 명단을 검색하니 고근홍 대령은
덕천에서
사망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단지 전사일이 덕천 전투가 있던 때보다 열흘 정도 빠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승일 대령이 전사자 명단에 보이지 않았다.
검색을 여러번 시도해봐도 발견할 수가 없어서 한가닥
기대감이
생겼다.

행여 내가 모르던 사연이 있어 박대령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생존해 있기 때문에 다르게 분류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이었다.

국군 전사자를 관리하는 국방부의 성기욱 사무관에게
긴급 부탁을 했다.


이런 것도 마치 국가 기밀인양 쉬쉬하던 인간들도 있었던지라
조바심이 났지만 이 국방부의 얼짱 사무관은 엘리트답게
이 주제의
중요성에 빠르게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가 찾아낸 자료는 박승일 대령이 역시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실오라기 같은 기대가 사라지자 낙심천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더 알아 볼 길은 없었다.


승일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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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한탄강의 상류에 걸린 승일교는 흐르는 물에
묵묵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다리는 등록 문화재 26호로서 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북한 김일성 일당의 손아귀에 그 운명이 던져진 것을
마지막으로 보이
고 사라진 박승일 대령의 최후는 물론
고근홍 대령 두 분 최후의 진실이 어땠는지 정말 궁금하다.

북한과 교류가 있으면서 궁금했던 이광수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들이 밝혀진 것처럼 북한에서
종적이 묘연해진 행방불명 국군중 제일 계급이 높았던
두 분 국군
장교들의 마지막도 밝혀졌으면 한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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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울프 독 2010.10.23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ppsp님
    감사합니다.

    연대장 구타 정보가 자꾸 출현하는 것을 보면
    저놈들이 이분들을 무척 구타한것은
    그 실제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3. 이재필 2011.07.04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큰아버지 두분이 형제분으로 7사단5연대에서 같이 전투에 참전하셨죠 큰형님이 바로 덕천에서 중공군에 잡혀서 북으로 잡혀가시다가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셔서 몇달몇일을 남쪽으로 산맥을타고 남아하셨는데 얼마후 대구 근방까지 오셔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했지요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생분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입니다 같은연대 대대인데 중대가 달랐는데 영천전투에서 작은 부상으로 후송같다는 같은중대 동료의 말이 마지막으로 듣지못햇죠 그후 병적확인 결과 최종부대가 7사3연대로 나오고 행방불명이 된시점이 51년11월4일 입니다 그시점이 강원도 양구에서 중공군에 밀릴때 오마치 고개에서 중공군 일개중대에 고개가 점령당하면서 3개사단이 괘멸된 시점인것 같은데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요 그리고 전사자 기록을 조회해도 같은 이름이 많고 그시절 시골집으로 전사통지서인지 행방불명 통지서인지 할머니가 받어셨다는데 워낙 빨치산이 많은 시절이라 경찰관이 주고간 서류를 가족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아궁이에 넣고 불질러 버려서 전사장소도 군번도 현제까지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4. Medical Tourism 2012.02.08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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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지나가다 2012.06.18 0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슬프네요...울컥하여 막걸리 힌잔 올립니다.............김일성과 좃도없는 공산주의 그리고 남북 분단과 내전!!!!!!그런 지금 남쪽의 종북은 뭡니가?

  8. 지나가다 2012.06.18 0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모든 비극은 스탈린과 김일성 그 좃같은 역도넘입니다...두고 보십시요...역사가 평가할겁니다...물론 미국/영국의 나몰라(남이라고)하는 태도도 있지만...그리고 근원적 실마리는 일본넘과 무능한 우리 민족에도 있지만..... 결국은 김가놈 그넘입니다........통일이 오고 그넘들의 실체가 들어날때 우리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알겁니다!!!!

  9. do my writings 2012.12.22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명대학들이 주변에 널려있어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건물 하나인 것 같았는데, 아마도 주변의 건물들을 함께 사용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10. what are the top ten research paper writing companies 2013.01.12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구보다도 여기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울 상당히 확신합블로그를 즐겨찾기에 나의 아이들이 여기 자주 점검해야합니다.

  11. buy VPN 2013.02.02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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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의 좋은 소식입니다. 필자 전에 물건을 읽고 당신은 너무 멋져요.

  13. herbal 2013.05.30 1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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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maag herbal 2013.05.30 1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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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pelangsing 2013.05.30 12: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너무 좋은 사이트를하지 발견했습니다

  16. 김석 2013.08.08 0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요한 전쟁의 기록을 보고 지식을 얻고자 하는데 사진들이 모두 깨졌습니다. 웹사이트 관리가 안되는 것인지요.

  17. online transcriber 2013.08.10 2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련은 동유럽의 직업 영역에 대한 자신의 협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미국의 직업 영역 경계에 동의하고, 그들이 어디에 서 각각 일본의 항복을 받아 들일 것 때문이다.

  18. Look for Christina Noble Movie Here 2014.02.16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미국의 직업 영역 경계

  19. what does bubblegum casting do 2014.03.23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승일교라는 다리 이름이 남쪽의 이승만 정부가

  20. Go to Crib and Whip 2014.03.27 2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5전쟁, 강원도, 공비토벌, 미군, 박승일, 서울, 승일교, 연대장, 이승만, 중공군, 지리산, 철원, 철원군, 포로, 한탄강

  21. Natural Garcinia Cambogia 2014.05.22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この記事は、多分この記事は、ここで説明を受けされる必要があり、特にここに掲載の画像は、他の人と比較して、このブログは、より優れた作るのですので有益である

미스터리에 숨어있던 그 시절의 자화상[上]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18 08:38

  대한민국 군번 제1호로 유명한 이형근(李亨根 1920~2002) 예비역대장은 199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이른바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습니다.  개전 당시에 제2사단장이었고 이후 여러 요직을 거쳐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던 인물이 의심을 가졌을 만큼 전쟁 초기의 정황을 살펴보면 상당히 이상한 점이 많기는 하였습니다.


[ 6.25전쟁 초기의 10대 미스터리를 제기한 이형근 전 참모총장 ]


  그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경고하는 일선 부대의 적정동향보고를 수뇌부에서 철저할 정도로 묵살했다는 의혹으로 시작하여, 전쟁발발 열흘 전인 6월 15일 중앙요직은 물론 일선사단장과 연대장을 거의 동시에 대폭교체한 점, 6월 13일부터 20일에 걸친 대대적인 부대 재배치 등등 모두 10가지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이것들은 전쟁초기에 너무나 일방적으로 적을 이롭게 하고 반대로 아군의 몰락을 가져온 미스터리로 거론되기에 충분한 주장들입니다.


[전쟁직전인 1951년 6월 초 서울]


  그러한 이상 정황은 아직도 논란이 많고 여기에 대한 추가 연구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지만, 북한 측의 전쟁 사료가 완전하고도 가감 없이 사실그대로 공개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오래 동안 미스터리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데 이형근 예비역 대장이 꼽은 미스터리들 중에서 네 번째가 6월 24일 0시 (또는 6월 23일 24시)를 기하여 육군본부가 전군에 내려져 있던 비상경계조치를 해제시켜 버렸던 사실입니다.


[창군 초기의 국군(1948년 여순 반란 당시)]


  사실 이점은 이형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적인 의심사례로 거론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전쟁 징후를 느껴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불과 30시간도 지나지 않아 북한이 침공했다는 자체가 내부에 적을 의심하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사전에 남침을 계획하고 있던 북한군이라 하더라도 아군의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지 불과 하루 만에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전쟁을 감행하기는 물리적으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개전 초기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더구나 당시 육군본부의 비상경계 해제명령에도 불구하고 부대 자체판단으로 긴장된 경계태세를 계속하여 유지하였던 제6, 8사단의 경우는 개전 초에 상당히 선방하였던 반면, 4할 정도의 병력이 일거에 외출 외박을 나가 전력이 약화 된 제7사단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점만 봐도 비상경계령의 유무가 전쟁 초기의 전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훈련 중인 창군 초기의 국군]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살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1950년 들어와 아군은 정보기관이 수집한 각종 정보에 의거 북한의 전면 남침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점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4월 29일 처음 비상경계령을 발령하여 긴장된 전투태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쟁 발발 전까지 5월 3일~5월 9일 사이, 6월 2일~6월 11일의 두 차례에 걸쳐 경계령이 일시 해제가 되기도 하였지만 비상은 계속 이어진 상태였습니다.


[창군 초기 국군 수뇌부]


  따라서 6월 24일의 경계해제는 영구적인 조치가 아니라 앞선 두 번의 경우처럼 일시적인 해제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전의 예를 참조한다면 일단 경계해제 후 상황이 나빠지면 다시 비상경계에 돌입할 가능성은 농후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군 수뇌부에 잠입한 간첩의 공작 때문이라는 미스터리가 아니더라도 북한은 국군의 비상경계령 해제 조치가 가까운 시일 내 또다시 반복될 것이라 충분히 예측하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 전 국군 기갑연대를 검열하는 미 군사고문단]


  그런데 지난 두 차례의 비상경계령 일시 해제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국군이 비상경계 태세를 계속하여 유지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북한 측도 충분히 가까운 시일 내에 국군이 일시적이라도 경계령을 해제할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설명할 그 이유는 어쩌면 그 시절 우리의 아픈 자화상이기도 하였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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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반격 대첩-동락리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6 08:37

이번  포스팅 글은 한강 이북에서 기습을 당해 참패를
당하고 후퇴하던
국군이 전쟁 발발 12일 만인 1950년 7월7일
충북 진천군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2 대대가 2개 중대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 15사단 1개 연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킨
전투를 소개하는 글이다.


전략의 본질이 공격이고 그 이상적인 형태는 기습임을

상기해보면 동락리 전투야 말로 대첩(大捷)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없는 6·25전쟁 최대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독립문에 선전물을 붙이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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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한강 이북에서 대패를 하고 미국을 위시한 여러 우방국으로

부터 그 전투력에 불신을 사던 한국군이 한판의 대승으로
면목을 일신한
전투이기도 하다.


승리의 주역에 대해서는 몇 주 전 이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다.

춘천 시 외곽 원창고개에서 북한군에게 기만을 당해 다 잡았던

완벽한 승리의 영예를 내놓고 철수했던 6사단
김종수 대대[7연대 2대대]다.


대승과 대패를 오갔던 풍운아 6사단의 부대답게 2대대는
대승을
동락리에서 거두고 실추한 위신을 당당히 회복하였다. 
[당시 충북 음성군 신니면 동락리, 현재는 충주시]



서울 점령후 한강을 도강하여 남하하는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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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 대한 기록과 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1960년대에 아직 전투의 기억이 생생했던 김종수

[욱군 중장-수산청장역임]장군이 일본 방위대학의

사사키 하루다카 씨[한국전쟁 전문가]에게

직접 회상한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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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임부택 연대장으로부터 가엽산에서 644고지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개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자 도중에 큰 사찰이 있어 많은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부녀자이며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약간 세련된 느낌의 아가씨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쏘아 보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에 걸렸으므로 정보장교에게 물어보게 한바, 그녀는

동락국민학교의 교사라고 신분을 밝혔다. 말을 걸자

“지난 날에는 국군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꼴이냐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 같은 고생을 시키느냐?”

하고 거리낌 없이 울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죄어지고
기분이 무거워졌다.

춘천에서 이곳까지 후퇴하는 도중에도 무수한 피난민의
참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는데 국민으로부터 직접 이같이
후퇴의 책임을 추궁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어떻게라도 전쟁에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결의에 불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답답한 심정으로 고지에 올라 진지 편성에 착수했다.


당시의 대대 실 병력은 300명 정도였었고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대원들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으므로 망원경으로
산 아래를 둘러보자
적의 대부대가 동락국민 학교 교정에
모여 있었다.

[민간인이 달려와서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북진하는 국군
-------------


포나 인원수는 대충 눈어림해보자 실로 1개 연대의 대병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없었던 것이 이런 대부대가

아무런 경계를 안하고 있었다.


아마 패주에 급급했던 한국군들을 깔보는 분위기가 북한군
부대에 퍼져있던 것이
이런 느슨한 경계태세를 취하게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적은 15사단이었다.

나는 중대장을 모으고 긴급 작전회의를 하였다.


중대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 공격하자!”고 했다.


확실히 절호의 기회이었으나 내 임무는 644고지의 확보였으므로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축한 방어선을 버리고 산을 내려가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임무 밖이므로 작전 명령의 변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대와의 통신 수단은 없었으며 지휘소에 내려가

임부택 연대장의 인가를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적을 공격하기에 대대는 병력도 부족했고 중화기라고는

81mm 박격포 1문과 50구경 기관총 1 정뿐이었다.

적 대부대를 공격하기에 너무 화력도 약했다.


중대장들은 자꾸만 공격하자고 졸랐다.

망설였으나 마침내 독단으로 공격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결심에는 여교사의 꾸중을 들은 것이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피난민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자는 생각도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3명의 중대장과 작전회의를 통하여 1개 중대씩 적을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기로 했다.


작전은 곧 개시되었다.

사격 개시 시간을 17:00으로 미리 정했다.

시간이 되면 별도의 대대장의 별도 명령 없이 중대장이 알아서

사격명령과 공격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미리 정한 1700 대대의 제 6중대는 집중 사격을 개시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우왕좌왕하고 그늘에 숨었으나

교정에 정열 해 놓은 적 포들은 포구를 6중대 쪽으로 돌리고

시사(試射)했다.



소련제 76mm 사단포 방탄 장갑이 있다.
이 포는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약간 개조 된 PAK39 포다.
---------------------------------------------------


그래서 김종수 대대장은 즉각 박격포 반장 

신동관[7기-준장예편]
중위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포신만 있고 포판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북한군 포병은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제 6중대는

폭연(爆煙)에 덮였다.

전멸했는가 싶을 정도로 지독한 포격이었다.


거기에 포판이 도착했으므로 신중위는 직접 조준으로
제 1탄을 발사했다.

사거리는 300미터 정도였다.

놀랍게도 초탄부터 적 포병들의 한가운데 떨어져 폭발하면서

적병 수 명을 날렸다.



미군이 2차 세계 대전시 사용하던 81mm 박격포
-------------------------------------------

이어 신 중위는 효력사로 옮겨 최대 발사 속도로

지역사격을
가하자 적의 포병은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제 7중대의 기관총 소사(掃射)에 포착되었다.


또한 동쪽으로 도망친 북한군은 용원리의
제 3대대에게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3대대의 역할이 크다는 이설도 비중이 크다.]

도망칠 곳을 잃은 북한군은 뿔뿔히 흩어져서 야음을 타고

북쪽 산속으로 궤란해갔다.


다음 8일 날이 새는 동시에 전장 청소했던바 유기시체만
800여구를
헤아렸으며 포로 90여명을 잡았다.


그 중에는 북한 제 15사단의 군수 참모인 모 소좌나

제 48연대 본부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이 적은 북한 제 48연대였는데
민간인들로부터 무극리 부근의 국군은 전부 철수했다고
들었으므로 안심하고 동락리에서 연대 정지를 했다.


저녁 식사 후에 다시 행군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므로
전연 경계하지 않았다.


제 2대대장이하 많은 장교가 전사했다.


대 승리를 올린 제 2대대 용사들은 자기들이 올린 전과에

스스로들 놀랐다.

막대한 전리품이 동락리 국민 학교 주변에 유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76mm포 12문 장갑차 3량, 박격포 35문, 각종 기관총 47정,

소총류는 약 1,000정, 차량 60량, 무선기 기타 다수였다.

또한 기막히게 놀랄 일은 이런 전과를 올린대대의 아군의 손상은

단 1명의 경상자뿐이었다.


6사단은 이 전리품들의 수송을 위해서 사단의 수송수단을
총 동원해서
대전의 수송되어서 시민들에게도 전시가 되었다.

동락리 대승은 거듭된 패퇴에 의기소침했던 민과 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했다.

각종 무기는 1점씩 유엔 본부에 보내져 북한 침략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크게 기뻐한 이승만 대통령은 전대대 장병들을
1계급씩 특진 시켰다.

이 전투의 후일담이 여럿 있다.

대패를 당한 15사단 사단장 박성철은 해임되었다.

이 정도라면 군인으로서 그 생명은 끝장이 나겠지만

박성철은 10대 때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그의

똘마니로 따라 다녔던 관계로 신임이 깊었다.


나중에 다시 중용되어 1971년 최초의 남북 대화 때
남한을
방문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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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없고 무식했던 빨치산 부대 출신 사단장
[박성철, 오백룡, 최용진등]들은 실전에서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중국 해방군 출신 사단장[김웅, 방호산, 이권무]들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역량이 못 미침을 들어냈었다.

박성철의 대패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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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주민들이 알려준 것은 거짓 정보가 아니었는데도 대패배로
머리가 돌은
그에게 진위를 따질 기분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대전에서 학살한 양민들- 국군 포로들과
미군 포로도 학살했다.
------------------------------------


그리고 이 전투 자체보다도 한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은 김종수 대대장을 부끄럽게 만든 김재옥 교사다.


그녀는 나중에 군인 김득주 중령과 결혼했다.

1963년 그녀에게 불행이 닥쳐와 고재봉이라는 살인범에 의해서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일가족이 오인 살해당했다

[그가 원한을 가졌던 전임 대대장 가족으로 오인했었다.
전임 대대장 부인은 고재봉을 절도로 고발해서
영창에 갔다오게 했었다.].


그 녀의 이야기는 영화 '전쟁과 여교사'로도 만들어 졌었다.

현재의 충주시 동락리 격전장에 그녀의 추모비가 서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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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코비치 2010.07.26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한국전쟁 관련 포스팅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혹시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미군, 국군에 의한 것은 많이 나와 있는데, 북한군에 의한 것은 찾기가 어렵더군요.

  2. 김현수 2010.07.29 1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국을 수호했던 선열 들이시여 삼가 감사 드립니다,

  3. 팬클럽회장 2010.08.01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재옥씨 배우자는 2대대 중위였던 이득주라고 인터넷에 나오네요. 그리고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신동관 아니고..)중위가 행양경찰대장때 현충비를 세웠답니다.

  4. Jeremy 2010.08.25 0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신지요.

    고 정일권 총리의 회고록(당시 참모총장이었죠)에도 첫번째 승리로 저 전투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그 책에는 한 여교사가 제보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동일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5. united healthcare rate increases missouri 2012.05.26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얼마 동안 다음과 같은 문제에 매료되었습니다. 나는 시간이 몇이 조사하여 매우 흥미로 게시 발견되었습니다. 행복을 빌어요.

  6. major medical insurance companies 2012.05.26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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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employee vs independent contractor benefits 2012.05.26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토와 함께 제출 끝내 이런 종류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놀라는 느낌! 그 길에의 종류와 같은 정보를 보존.

  8. Read More about Commodity Warrants 2014.02.13 00: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류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놀라는

  9. Greentree Legal Team 2014.04.10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10. http://andersenconstruction.co 2014.04.13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