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투, 해피밸리 전투의 격전장을 60년만에 찾아온 영국의 노병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5.03 20:05

1951년 새해가 밝았지만 전쟁중인 남한은 암울한 분위기에 있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대철수중이었다.

서울도 내주기로 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대부분 서울을 떠났고
중공군은 바로 서울 북방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때 1.4 후퇴를 후방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은 영연방 여단은
새해 첫날 서울 북방에 긴급 전개하였다.

영연방군중에 얼스터 대대는 고양과 양주군 경계선인 쟁고개라는 지역에
고지에 방어 진지를 만들고 대기 했지만 이틀간은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중공군은 1월 3일 드디어 나타나 백주에 진지를 공격해 왔으나
얼스터 연대는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철수명령에 따라 철수 중이던 얼스터 연대는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대장 대리 브레이크 소령을 비롯한
장병 157명이 전사하고 지원차 출동했던 크롬웰 탱크 14량이
모두 파괴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해피 밸리 전투에서 유기 된 크롬웰 전차. 두달 뒤에 촬영한 것이다.
크롬웰 탱크 14량이 쿠퍼 대위 지휘하에 지원 나갔다가 모두 돌아 오지 못했다.
그중 한 량은 중공군이 가져다가 한강가에 배치했다가 노량진쪽에 나타난
영국군 센추리언 탱크에게 격파되었다.

영국군의 시체가 동네와 들에 널려있었지만 중공군은
중공군의 사체만 챙기고 영국군 사체는 약탈하고 팽개쳤다.
동네 주민들은 이 사체들을 모두 매장해주었다.

수복 후 찾아온 영국군들은 주민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전사자 유해를
모두 거두어 메네미 고개 옆 산자락에 묻고 이곳에 추모비를 세웠다.

일요일이면 영국군들이 찾아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1956년 유해를 모두 이장해 갔다.

해피 밸리에 있는 기념탑 앞에서의 추모식.
주민들도 이런 추모식을 구경했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분도 있었다.

영국으로 운반해간 줄로 알았는데 이번에 오신 노병의 말을 들으니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당시 추모비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
쓰러진 상태로 몇 년 동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추모비를 1962년 영국 벨파스트 시의 얼스터 연대 기지로 가져가 건립되었다가
1966년 얼스터 부대가 다른 부대와 병합되어 없어지자
추모비는 벨파스트 시청 뒷마당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그곳에 있다.
이 해피밸리 전투는 그 이후 까맣게 잊혀졌다.

미국 기록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한국에서는 군 전사 서적은 물론 어느 미디어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고양군이나 양주군의 담당자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단지 고양 전투로만 희미한 이름으로 전해오는 것만을 알게 되었다.

울프독(김창원 작가)은 국방부의 지원으로 현지를 수차 방문해서
나이 80이 넘는 어르신네를 여러분 만나서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가 있었다.

마침 영국의 더 타임스지 서울 주재 기자 앤드류 새먼 기자가 저술한
영국군의 한국전 활약을 다룬 ‘마지막 한발’에서
전투의 전모를 알게 되어서 반가웠다.

해피밸리 전투라고 영국에 전해 오는 이 전투는
한국에서 최초로 6ㆍ25 사업단 블로그에 최초로 상세 포스팅되었다.

이어서 취재를 도왔던 고양군의 문동일 전문위원이 이 내용을
고양군 시 잡지에 그대로 전재하여서 이제는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지난주 4월 23일 설마리에서 임진강전투 6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울프 독은 이 기념식에 참석하여 정말 기대치 않게 얼스터 연대의 모자를 쓰신
노병을 한 분을 발견했다.

부대를 확인한 나는 혹시 해피밸리 전투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해피밸리 전투 최전방 고지에 배치되어 주간 전투를 치룬
B중대의 중대장 로빈 찰리 대위였다고 말했다.

대령으로 예편했으며 지금은 87세로서 해피 밸리 추모비가 있는
벨파스트시에서 아직도 여러 사회 활동을 한다고 한다.

내가 해피밸리전투 이야기를 꺼내자 그 분은 흥분하여
당장 그곳을 방문할 수 없냐고 통사정을 한다.

케서린이라는 이름의 따님이 같이 동행했는데 따님 또한
옛 격전지에 가보는 것이 아버지의 평생소원이라고 한다.

마침 그 분과 대화중인 더 타임스지 기자며 앤드류 새먼 기자가
큰 관심을 표하며 자신도 꼭 방문하고 싶지만 지금은 바쁜 일정으로 인해
나중에 꼭 방문할테니 취재를 하게 해달라고 말한다.

이에 국방부 6ㆍ25사업단 기획부장 이 강수 대령이 적극 지원하에
사업단의 이진형 소령이 안내를 해주었다.

월요일 이날은 마침 찰리 대령의 생일날이다.

그는 거동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사용했었다. 이진형 소령이 정성스럽게
도와 드린데다가 자기가 염원했던 옛 격전지를 방문하게 되어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 없다고 한다.

영국군 참전자들은 한국을 방문하면 모두 파주의 글로스터 전적비만
찾아 갔았는데 이제 고향 벨파스트로 돌아가면 얼스터 참전용사들에게
해피밸리 전장도 찾아 가도록 권고하겠다는 말도 했다.

방송국 PD를 했고 지금은 선생을 하고 있는 따님 캐서린은
지휘관 블레이크 소령의 따님과 친구 사이란다.

이곳에 설마리의 글로스터 연대 전적비와 같은 작은 추모공원이라고 서게 되면
벨파스트 시청의 추모비 반환 운동에 앞장서겠다는 결심도 잊지 않는다.

추모비가 서있던 장소와 묘소 발견이 이번 방문의 성과였다.
따님 캐서린이 추모비 있던 곳에서 격전장 일대를 가리키고 있다.

멀리  전신주가 서있는 산밑 불미지리에서 기습을 당해
이곳 메내미 고개까지 오면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공격에
많은 인원피해를 입었다.

기념비의 정확한 위치를 안내해 준 인근 농원 설 사장님
왕년의 해병대 대위 출신이시며 많은 정보를 얻었다.

철수하던 얼스터 부대가 산을 넘어온 중공군에게 기습당한 불미지 마을
원래는 4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비닐하우스가 들어섰고
세네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불미지 마을 옛 격전지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얼스터 부대가 최초로 배치 된 쟁고개,
영국군 대대는 이 고개 좌우의 다섯개 고지를
각 중대가 점령해서 방어선을 형성했었다.
로빈 찰리 대위는 최고로 높은 최전방 고지에 배치되었었다.
영국 전사에 이 고개를 채근현 고개라고 하는데 현지 어르신중에
이 이름을 알고 있는 분은 한 분도 없었다.

찰리 대위의 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던 쟁고개 좌측 B중대 고지,
이분이 평생 다시 보고 싶었던 고지는 주간에 중공군이 공격했다가
찰리 대위의 B중대에게 패퇴 당했다.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관계로 찰리 대위의 B중대는 제일 먼저 철수했다.
기습이 있기 직전이었다.
찰리 대령은 자기 부대가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말을 수원 농과 대학에
도착해서 알았다고 했다.
행운과 불운이 바늘 하나 사이로 교체되는 이 전투에서 행운은
찰리 대령을 찾아 왔었다.

삼하리 농원의 김 사장 어르신.
이분은 14살 때 영국군과 중공군의 전투를 직접 목격했었다.
그리고 영국군의 매장과 기념비 설치를 생생하게 들려주셨다.
해피밸리 전투의 가장 중요한 증언자이시다.

돌아오는 길에 본 메네미 고개 중공군이 이곳 철수로도 점령하고 있다가
첫 불미지 기습에 놀라 철수하는 영국군을 기습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아래에서 최대의 영국군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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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적을 좌절 시킨 서부전선의 혈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02 08:22

  당시 서부전선은 국군 제1사단이 고랑포일대를 그 우측을 미 제3사단에 배속된 영국군 제29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지경선인 감악산일대를 글로스터쉐어연대 1대대(1st Battalion of the Gloucestershire Regiment 이하 글로스터대대)가 담당하였습니다. 4월 22일 22시경, 중공군은 글로스터대대 정면에 1개 사단의 주력을 집중하여 임진강 도하한 후 교두보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월 23일 동이 트면서 유엔군의 항공폭격이 개시되는 틈을 타서 글로스터대대는 감악산 전방의 설마리 일대에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였으나 그날 저녁 재개된 중공군의 공세로 인접대대들이 밀려남으로써 적중에 고립되는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고립된 설마리에서 적에게 응전하는 글로스터대대 박격포]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미 제3사단에 배속 된 필리핀대대가 1개 전차중대를 지원받아 적진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브로디(Tom Brodie) 영 제27여단장은 소울(Robert H. Soule) 미 제3사단장에게 글로스터대대의 야간철수를 건의하였으나 사단장은 중공군이 우세한 야간에 이동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미 제65연대가 구출할 때까지 현 진지를 고수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현지 고수를 지시받은 대대는 적의 파상공격을 물리치고 있었으나 구원에 나선 미 제65연대는 적진 돌파에 실패하였습니다. 완전히 고립된 글로스터대대를 제거하여 전선 전체를 밀어 붙일 목적으로 중공군은 집중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때 미 제1군단이 전 부대에게 후방 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여단장은 칸(James P. Carne) 글로스터대대장에게‘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으니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철수하거나, 불가능하면 중공군에 항복하라’는 최후 결정권을 위임했습니다.


  대대장은 중대장들에게 자신은 50여명의 부상병과 함께 잔류할 것임을 선언하고 중대 단위로 철수를 지시하였으나 군목, 군의관, 위생병은 대대장과 함께 현지에 남기를 자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10시경 A중대를 선두로 비장한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한 D중대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탈출도중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이로써 영국 제29여단은 전체 병력의 1/3이 손실을 입는 대패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3일간이나 현지를 사수하며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3일간이나 고착 견제하였고 이로써 군단 주력부대의 안전한 철수와 차기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에 글로스터대대의 희생은 그야말로 값진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한 D중대원들]


  같은 시각 중공군 2개 사단이 임진강을 도하하며 파평산 일대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 전면에도 나타났습니다. 기습을 당한 제1사단은 임진강을 이용하여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극 방어에 나서 적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항공기와 포병화력을 집중 운용하여 방어선 바로 앞에 몰려있는 중공군을 공격하여 3.000여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밤이 되어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공세가 재개되었고 날이 밝으면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발판삼아 아군이 반복하여 중공군을 격퇴시키기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러던 3일째 되는 4월 24일 밤, 중공군에 의해 파평산일대의 방어진지가 아깝게 피탈되었습니다. 주간에 국군 제1사단은 공군과 포병의 지원을 받아 이곳을 탈환하려 하였지만 3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북한군 제1군단이 추가 투입되면서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선 전체, 특히 전선 중앙부가 대책 없이 붕괴되고 있던 당시 중공군 제5차 공세 전체를 살펴보았을 때 이는 상당한 선전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미 제1군단으로부터 철수명령이 하달되어 국군 제1사단은 파평산 탈환을 포기하고 월롱산-부곡리-삼방리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설마리에서 탈출한 글로스터대대 D중대원 40명이 국군 제1사단 지역에 도착하여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7여단이 혈전을 벌인 임진강]


  중국은 그들의 전쟁사에서 제19병단이 장파리,고사동 일대를 점령하였지만 파평산 북쪽에서 국군 제1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주진지 신속히 돌파하지 못하였고, 설마리에서 글로스터대대에게 발목이 잡혀있어 후속 공세 재개에 상당한 차질을 빚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야심만만했던 제5차 공세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군의 반격에 애를 먹고 진격이 멈추었지만 이러한 고백을 토대로 판단하자면 서울을 재점령하여 전세를 완전히 재역전 시키려던 중공군의 전략이 바로 이곳에서 멈추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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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밸리 전투(제 3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0 09:31

남쪽으로는 얼어붙은 곡릉촌을 도하하여 매내미 고개로 가는

길을 탔던 영국군들도 중공군이 추격 포위하고 

공격했다 .

이 지역은 현재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다.



영국군의 탈출 출구였던 매내미[큰 고개] 고개에서 본
해피 밸리 격전장.이 전투의 후반에 격전을 벌인 삼하리 벌판.
고가 차도 건너 멀리 철탑 옆에 보이게 우뚝 솟은
산 아래가 불미지 격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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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넒은 들에서도 영국군의 피해가 컸다.

현지에 가면 당시의 전황을 보면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곡릉천 좌우,고양시 선유리와 양주시 삼하리에

직경 1km의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군은 이 포위망을 벗어났어도 매내미 고개를 넘을 수는 없었다.

매내미 고개로 올라가는 가파르고 좁은 곳에서 탈출했던 트럭이

피격당해 불타오르며 길을 막아 버렸다.

이 길은 차 한대가 겨우 통행할 만한 폭을 가지고 있다.


중공군의 박격포가 때렸는지 중공군이 달려와서 고개를

밀봉 공격했는지는 확인 할 수는 없다.

[트럭은 마지막으로 전차와 같이 행군했던 유조차량일 수도 있다.]



삼하리를 가로 지르는 작은 농로에서 전차들과 보병들의
피해가 많았다.
지금은 이 옛 길과 농수로는 없어졌지만
매내미 고개로 통하는 옛길의 흔적같은 것이 보인다.

비닐 하우스 우측 차가 나오는 길은 가파르게 매내미 고개로
연결된 자취가 있다. 대단히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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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전차들은 곡릉천 북쪽 고양 선유리에서부터

진드기 같이 달려드는 중공군의 공격 때문에 해치를

닫고 잠망경으로 밀폐 조종을 해야 했었다.

그래서 곡릉천에 빠지는 전차들도 있었다.


그리고 곡릉천을 넘어 삼하리로 이동한 전차들도

밀폐 조종으로 좁은 길을  간신히 타고 가야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소달구지나 다닐 좁은 길을 암흑 속에서 밀폐 조종은
사실 무리였다.

여러 전차가 좁은 길을 벗어나 길옆 수로에 빠지고 길을 막아
전차병들도
전차를 떠나 살길을 찾아야 했다.


삼하리 격전장의 유기 된 전차를 전투 며칠 뒤에 보신 어르신네는

6-7대쯤 되어 보이는 전차들이 포신을 전부 서쪽으로 돌리고

유기 되어 있었다고 말씀 하셨다.


[요약하자면 14대의 전차들은 그 절반인 6-7대가

곡릉천 북쪽에 유기 되었고 나머지 절반이 좀더 전진한

곡릉천 남쪽 농로에서 유기 된 것으로 발견되었다.]


-------------------------------------------------------------

그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전차대를 공격했던 중공군이 항상 하는 대로 우회한후
삼하리 서쪽 방향에서
전차대들에게 공격을 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매내미
고개가 막히거나 선두 전차가
수로에 떨어져 기동로가
막혀 버리자 전차들이 차체를 돌려
서쪽 구파발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제시하기도 한다.


[말씀해주신 어르신네는 조종석의 방향이 어느 쪽이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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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리의 다른 어르신네는 영국군 전차 2대가 도로를 벗어나

자기 집 논에 들어와서 유기되었다는 말씀을  해주었다.


두대의 전차는 논바닥에 엔진 오일을 쏟아 놓아서

그 논의 농사가 삼년동안이나 잘 되지를 않았었다.


이 전차들은 곡릉천을 건너 매내미로 가던 전차였는데 논으로

들어간 것은 막힌 농로를 우회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탈출하는 영국군의 위치에서 본 매내미 고개.
옛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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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에 투입 된 크롬웰 전차 14대중 한 량도 귀환하지 못했다.

지옥의 전황은 영국군이 대량으로 살상당하고 남은 병력을 수습한

부사관 쇼가 이들을 인솔하고 전장을 탈출함으로서 끝났다.


그는 중공군이 도로 구간마다 달려 붙어 공격을 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죽음의 현장에서 목숨을 내놓고 체득했다.


그는 부하들을 인솔하고 중공군이 붙은 도로를 떠나서

매내미 고개 서쪽 1km 지점의 언덕을 넘어 탈출했다.


그가 인솔하고 나온 부대 인원은 겨우 70명 내외였다.

상황이 종료된 이 때가 1월 4일 새벽 03:40분이었다.


이날 전투에서 영국군은 157명이 전사했다.

원래 208여명이 실종 되거나 전사한 것으로 믿어졌지만

며칠이 지나면서 생존한 영국군이 귀환했고 나중에
포로가 되었던
장병도 귀환하였다.


영국군이 죽거나 탈출한 현장에서는 중공군들의

약탈이 극성을 부렸다.

중공군들은 전투 중간부터 틈만 나면  몇 차례나 사체를
뒤지고
중요 전리품을 챙겼다.    
  


영국군이 격전장에 유기했던 크롬웰 전차.
중공군 점령중 두달이나 이 위치에 있다가 
수복후 회수되었다.
 
현지 어르신은 영국 전차가 작았고 하꼬가다[상자형]이라고
회고 했다.크롬웰 전차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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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되었다.

삼하리에 사시는 한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밤새 총소리와 폭탄소리와 비명소리에 간을 콩알만큼 조리고 있던

식구들은 날이 밝자 필요한 보따리만 싸서 급히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은 몇 백 미터 되지가 않았다.

동네 입구에서 지키던 중공군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난생 처음 보는 중공군들이었다.

식구는 그들의 명령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아직 소녀였던 할머니는 비로소 마을 주변과 동네 길에

부서진 트럭과 영국군 사체가 즐비한 것을 발견했다.

사체들은 보기에도 처참하고 무서웠다.


전투가 종료되고 몇 시간이 되었는데도 영국군 트럭들은

시동이 꺼지지 않고 계속 엔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끔찍해서 한손으로 눈길이 발길만 보이게 가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집으로 돌아와 며칠간 집밖으로 나가지를 말았다.


밤에는 젊은 영국 군인의 귀신이 찾아와 구슬피 울 것 같은

두려움도 들었다.


중공군들은 자기들 사체만 치우고 자기들이 마구 함부로 하며

약탈하던 영국군의 사체는 그대로 내 팽개쳐 놓았었다.


서울이 점령되고 마을의 중공군이 떠나자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먼 이국에서 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뜬 불쌍한 외국 젊은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정중히 장례지내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원칙이

확인되었고 동네의 성인들은 모두 영국군 전사자 매장 일에

자원하고 나섰다.


침략군이니 뭐니 하며 매장을 반대하는 빨갱이스러운

인간들은 이 인간적인 도리를 논하고 실행하는 상황에

한 명도 나오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영국군인들이 그렇게 도달하려고 노력했던

전장의 끝 매내미 고개 우측 언덕에 길고 깊은 장방형 묘지를 팠다.


그리고 동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영국군 유해들을 거두어서

자기들이 마련한 장지로 운구해갔다.

동네 분들은 영국군 유해들을 가능한대로 정중히 취급했다.


이 때 이일을 한 어르신네는 눈을 반쯤 뜨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숨을 거둔 금발의 영국군을 보니 가슴이 메어지더라고 했다.


동네 분들은 아픈 마음으로 유해들을 판 묘소에 일렬로

한명 씩 최대한 편하게 눕혀서 안치했다.


그리고 겨울이 가고 봄이 어른거리는 3월이 되었다.

두 달 간 동네 여기저기에 방치한 영국군의 트럭이나 전차들은

아무도 손대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


서울이 탈환되고 유엔군이 고양군에 들어오고 불과

수일 뒤에 영국군이 찾아왔다.


그들은 영국군이 피해를 당한 지역을 돌아보고 전사자들의

행방부터 찾았다.


동네 어른들이 잘 모셨다고 말하고 집단 묘역으로 안내하자

그들은 안심한 듯 고마움을 표하고 돌아갔다.


그 뒤에 영국군이 그 묘역에 자주 찾아왔다.

일요일에는 수십 명이 여러 대의 트럭을 타고 와서

추모 예배를 드리고 갔다.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자 영국군은 그 묘역에 위에 위령비

[또는 추모비]를 세웠다.


매내미 고개 바로 우측 농원의 바로 뒤에 위령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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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 전투가 왜 해피 밸리 전투로 명칭이 붙었는지

짐작이 간다.

1차 세계 대전 1917년 4월 11-12일에 있었던 아라스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 12 사단의 장병들을 안치한
Monchy-le-Preux 의
군 묘지 명칭이 해피 밸리[HAPPY VALLEY] 영국군 묘지다.
76명이 잠들어 있다.



프랑스 카레 근처 영국군 해피 밸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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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힌트를 주어서 이 영국군 묘역을 발음하기 힘든

현지명대신 해피 밸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
전투 명칭까지로
발전한 것 같다.


이 참혹한 전투는 해피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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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인이나 민간인의 추모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다가

전쟁이 끝났다.


어느 날 묘역이 분주해지더니 영국군의 유해를 모두 영국으로

이장해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며칠간 묘역을 다시 파고 영국군의 유해를 수습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유해는 모두 발굴되어 아마천으로 정성스럽게 싸여져
관에 놓여졌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 영령들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안도와

허전한 마음으로 전송했다.


유해가 영국으로 운구 되어 가고도 영국군이 세운 위령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년이 지나자 이 위령비가 쓰러져 버렸다.


행정당국이 이 사실을 영국 대사관에 알리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때의 지방 행정부서나 당국은
연락수단도 시원치 않았고 해서
그대로 두어 버리는
무심한 대응을 했다.


동네 사람들도 오고 가면서“저것 다시 세워야 하는데---”
하면서도
자기일과 무관하니 안타까운 마음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몇 년이 그대로 지난 어느 해인가 비석이 보이지 않았다.

풍문에 영국으로 가져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주민들은 한국인들이 쓰러진 위령비에 몇 년씩 관심을 안 가져 준

사실에 영국 당국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이 비를 본국으로

가져갔다고 하면서 미안하게 생각했다.


한 어르신은 이 비석을 영국이 가져간 때가 작은 고개와 매내미

고개를 직선으로 잇는 큰 도로가 뚫릴 무렵인 1980년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조사를 해보니 위령비는 그 보다 훨씬 전에 영국으로

이전시킨 것이 발견되었다.


영국 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 비는 1962년 영국으로 가져와

북 아일랜드 얼스터 부대가 주둔했던 벨리메나의
세인트 패트릭 기지에 재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영국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위령비 일대가
도시화 되어가고
있어 소멸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장소는 큰 도로 하나 뚫렸을 뿐이고 지금도

전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영국이 위령비를 가져간 이유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네 분들 말씀대로 비가 수년간 쓰러진 채 방치 된 사실에

자극을 받고 가져갔다는 말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한국인들이 위령비를 앞으로도 그렇게 함부로 방치되면

종내는 없어질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가져간 것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목숨을 바쳐 지켜준 나라의 냉대에 영국이나 영국 영령들이

화가 날 만도하다.


얼스터 연대는 1968년 로얄 인니스킬링 푸시리에 부대와

합병하여 로얄 아이리쉬 레인저스 부대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였다.  


비석이 서 있던 부대의 기지도 얼마전 폐쇄 되었다.

이 기구한 비석은 2008년 5월 벨파스트 시청으로
이동하여 현재는 다른 전쟁 기념 동상들과 함께
시청의 마당 한구석에 전시되고 있다.
시청을 찾는 관광객들은 다 둘러 볼 수가 있다.



위령비가 있는 벨파스트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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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문해서 만난 고양시의 격전지 현지 주민 한분은

삼년 전에도
영국인들 세 명이 이 지역을 찾아와서
비석 위치와 격전지 위치를
물어보았다.


자신은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별 도움이 못되었다고 했다.

그 영국분들은 주변 여기저기를 반나절이나 헤매다가
낙심한체 돌아갔다.

이 사실은 아직도 영국인들이 해피 밸리를 완전히
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한국이 빈곤에서 벗어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6·25전쟁 때
참전하신 분들의 방문 행사도 하고  전적 기념지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국군 얼스터 부대가 크게 희생했던 이 해피 밸리
지역에는
희미하게 전해오는 전설 같은 영국군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서두에서 말했듯 파주군 설마리 전적기념 공원과 너무나
대조가
된다.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 -
우리 한민족에게 해피 밸리 전투에서 희생한 영국군 장병들의
가치는 설마리에서 산화한 장병들 희생의 그것과 다를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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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비극인 서울 시민의 1.4 후퇴를 결사 엄호하다가

희생한 영국군의
영령들이 한국의 국민들에게 이렇게
잊혀 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희생 영령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한  전적 기념 공원이
전투지에 건립되어야
할 것이고 한국인의 무심함에 서운했던
영국인들이 가져갔지만
또 다시 갈 곳을 잃고 북 아일랜드
벨파스트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그 위령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간청으로 다시 찾아와 

이곳에 건립되기를 염원해본다.

그것이 1.4후퇴의 처절한 상처를 적지않게 입었던
동방예의지국 한국인들이 꼭 해야 할 보은의 성의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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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0 2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김현수 2010.07.23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령들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국민들은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

  3. 바부퉁이 2010.07.23 22: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병 1개 중대로 증강된 전차 중대를 먼저 출바시켰으면, 야간에 소음 으로 인해 집결해있던(철수전 집결했는지는... 배치된 상태에서의 철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장소가 아군의 기도가 노출되고, 그 위치로 어렵풋이 박격포의 조명탄을 솼다면, 바로 노출되어 전위부대인 전차 중대부터 공격 당하지 않았을까 하네요... 또한... 그때까지 중공군의 전술을 잘 몰랐던 영국군의 지휘관으로써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수도 있을거 같습니다(물론 잘못된 선택 이었죠)

  4. 강헌 2010.07.24 0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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