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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20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표적 전투, 오산전투(1/4) (6)
  2. 2010.08.11 길목에 남겨진 역사 (2)
  3. 2010.07.01 56. 다시 한강으로 (4)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표적 전투, 오산전투(1/4)

생생! 6·25/6·25전쟁 10대전투 2011.03.20 15:56


 20세기 이후 전투 중 아무리 강한 나라도 순간의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과 함께 철저히 준비한 군대 앞에서는 아무리 첨단무기를 갖춘 군대라도 패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전투가 바로 1950년 7월 벌어진 오산전투(Battle of Osan)입니다.

                 <오산전투 전적비 (사진-연합뉴스)>

 6.25전쟁 초기에 벌어졌던 이 전투는 대대규모의 부대가 벌인 반나절 정도의 전투여서 단지 규모로만 본다면 그리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기는 힘듭니다.

 그럼에도 연구대상이 되는 이유는 충분히 예견하고 전투를 벌였음에도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정보도 없이 상대를 얕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미군에게 뼈아픈 교훈이 되었습니다.

 1950년 6월 30일, 미군의 파병이 결정되자 급박한 전황을 고려하여 본대 투입 전에 대대규모의 선발대를 항공편으로 먼저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일본 큐슈(九州)에 주둔하던 미 24사단 예하 21연대 1대대가 선발대로 결정되었는데 1개 포대를 증강시켜 7월 1일 부산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선발부대의 이름을 대대장이었던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s)로 정하였습니다.

                   <1980년대 방한 한 찰스 스미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북한군이 한국을 쳐들어왔다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북한군이 어느 정도의 병력과 장비를 갖추었는지, 어떤 전술작전 능력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지형과 환경은 어떤지 등등,
전투를 위한 기본적인 사전 지식과 준비도 없이 그들은 무작정 한국으로 이동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미 8군사령부 그리고 미 24사단, 그 어느 지휘부도 북한군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미군 정보당국은 북한군을 일제 구식장비로 무장한 7만 명 병력의 4개 사단 정도로 
잘못 판단하였는데, '북한군은 훈련이 제대로 안된 오합지졸의 미개한 군대로서 미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갈 것이다. 반면 국군은 사기가 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때문에
미군 1개 사단이면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충분히 늦출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습니다.

     <미군은 북한군을 전형적인 후진국 군대로 오판 하였습니다>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미 24사단과 25사단 1개 연대전투단으로 북한군을 최대한 북쪽에서 저지하고, 7월 22일경 해병대와 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남북에서 북한군을 공격하여 7월 말에 전쟁을 끝내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임무는 단지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북한군의 선두와 접촉하여 미군의 존재감을 알려주어 북한군이 지레 겁을 먹고 전쟁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후속하여 투입 될 사단 본대도 마찬가지여서 대부분 미군들은 기껏해야 며칠 동안 한국에서 머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다즈케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이동 준비 중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한마디로 명령을 내린 장군부터 전투에 참가하는 말단 병사들까지 자만감에 가득 차 너무 상대를 깔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 할 때도 불과 5년 전
독일ㆍ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세계를 주도하고, 거기에 더해 핵폭탄이라는 필살기를 보유한 미군은 정말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미개한 북한군이 그들의 모습만 보면 겁을 먹고 물러날 것이고, 그 다음은 오늘날 평화유지군처럼 전쟁이전의 상태로 복구 될 동안 잠시 주둔하면서 단순히 치안활동만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 북한군과 싸워서 이들을 격멸하겠다는 전투의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2차대전 후 변모한 스스로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사상 최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제 2차대전 종전 당시 미군의 규모와 전투력은 어마어마하였는데, 대대적인 감군을 단행하여 병력과 장비가 대폭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최신 무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인류 역사상 최대살상무기인 핵무기는 미국만이 보유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5년이라는 세월은 미군이 늙은 사자로 전락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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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25 2011.03.20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에 올라오는글이네용 @_@ 즐겁게 보고갑니당

  2. 이진형 2011.03.20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올해에도 쉽고 유익한 6ㆍ25자료를 많이 올리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3. 찌니후 2011.03.21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로 시작하나요? 오랜만에 올라온 글이라 아주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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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에 남겨진 역사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11 08:30

 

  현재도 우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6·25전쟁의 유산 중 하나가 한미동맹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동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미동맹의 법리적, 외교적 근거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현재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 곳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서류상의 조약보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미국이 전쟁에 전격 개입하여 우리와 함께 피를 흘림으로써 동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 당시에 미국 외에도 수많은 나라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귀중한 전투병을 파견하여 피를 흘려주었지만 당시 유엔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은 단연코 미국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중 미군의 역할이 제일 컸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쟁 기간 중 총 178만 명의 미군이 참전하여 우리를 도왔고 그중 사망자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수많은 물자지원이 함께 있었는데, 이러한 고귀한 희생과 지원은 대한민국이 초유의 국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엄청난 힘이 되었고 한미동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미군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그것은 동맹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 당시는 물론 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6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미군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한반도를 거쳐 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문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주한미군의 병력도 많이 축소되었고 장거리 항공 교통이 발달한 관계로 오산에 있는 미 공군기지가 중요한 통로역할을 담당하지만 오래 동안 주한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들고나가는 길목은 인천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인천을 통해 떠나는 미군들의 모습 ]


  전쟁 초기에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대부분은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지만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내륙교통망의 파손도 심하고 전선이 가까운 관계로 인천항은 주요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인천항이나 인천이 전쟁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이지만 사실 이처럼 전쟁 내내 묵묵히 아군의 생명선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중 현재 인천항 제1부두에 설치된 제21운송대 입구 ]


  물론 한반도 최대의 항구인 부산의 역할은 계속하여 컸지만 주로 군수물자에 한정되었고 병력이나 시급한 화물은 인천항을 통해 전선과 계속하여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이 미군의 통로가 된 것은 전쟁 훨씬 이전부터였습니다. 1945년 9월 8일 미 제24군단 예하의 제7사단이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인천으로 상륙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45년 9월 상륙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으로 진입하는 미 제7사단]


  행정상륙이었지만 인천은 미군이 상륙주정을 이용하여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고 부대 또한 5년 뒤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인천으로 상륙한 제7사단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인천을 발판으로 한반도에 손쉽게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1949년 철군한 미군은 이듬해 다시 인천에서 거대한 상륙을 성공시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가 되었고 1951년 이후에 오래 동안 주한미군의 관문 노릇을 하였습니다.


[인천항에서 유류를 하역하는 모습 (1952년)]


  특히 인천항과 내륙을 연결하는 초입인 부평일대에 설치된 애스캄(ASCOM)이라 불린 거대한 미군병참기지는 197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로 들어오는 미군과 미군 물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1945년부터 1970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근무한 미군들이 남긴 사진들을 보면 주로 복무한 자대뿐만 아니라 들어오고 나간 인천항이나 일대의 모습이 예외 없이 잡혀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중 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설치된 제8057보충대]
좌에서 우로 6·25전쟁에 참전한 제3, 2, 1기병, 45, 40, 7, 24, 25사단의 마크가 표시 되어있습니다 (사진-Dewey Mclean)


  1953년경 철도수송대에 근무하면서 찍은 Dewey Mclean씨의 희귀한 컬러사진에도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부평의 애스캄으로 완전히 옮겨가기 전에 인천 서림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운영된 제8057보충대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습니다. 긴박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전쟁 중에서도 미 제8군의 보충대답게 예하부대들을 일일이 표시하여 놓은 모습은 한편의 여유를 느끼게도 만듭니다.


[인천 외곽에서 제8057보충대로 가는 길(현재의 제물포역 부근)의 이정표인데, 미국에 있는 집으로 가는 출입구라는 푯말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제 한국의 그 어느 곳에서도 6·25전쟁 당시의 참담했던 모습을 떠 올리기는 힘들고 그것은 미군이 전쟁 이전부터 그리고 전쟁이후에도 거대한 관문 노릇을 하였던 인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 한반도로 처음 들어왔고 전선이나 자대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아니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던 수많은 미군들에게 인천항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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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ealth insurance businesses big apple 2012.05.22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와 함께 쓰기까지 정말 멋진셔서 너무 감사, 완벽하게 놀랐 있습니다! 이것이 올과 같은 물건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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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다시 한강으로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01 09:34


 

  실험삼아 실시한 울프하운드작전의 성과는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중공군에게 지난 두 달간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짓눌려왔지만, 생각보다 현재 상황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공군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유엔군이 반격할 차례였습니다. 하지만 리지웨이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성급하였던 지난 북진의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이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신중한 반격을 결심합니다.]


  썬더볼트(Thunderbolt)작전으로 명명된 이번 작전은 서두르지 않고 한 단계씩 앞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예정되었습니다. 유엔군은 서부전선을 오산과 여주를 연하는 선에서부터 한강까지를 총 5개의 통제선으로 구분하였고 이를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전의 진정한 핵심은 진격 그 자체보다 중공군의 소탕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리적인 점령은 그다지 의의가 없고 중공군을 최대한 소모시켜 버리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한 전제 요건으로 중공군이 우회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전선을 최대한 오밀조밀하게 연결하면서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오로지 적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이제까지 부대들이 산개하여 도로를 따라 앞으로 나가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부대의 좌우가 완전하게 연결된 상태로 전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또한 적을 섬멸한 후 사전에 정한 5개의 통제선을 통과할 때는 군단장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 1월 25일, 오산-여주를 연하는 선에 정렬하고 있던 미 제1군단 25사단과 미 제9군단 1기병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청천강 일대에서 지난 11월 24일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공세이후 꼭 2개월만의 이루어진 유엔군의 공세였습니다.


[1951년 2월 포격당하는 적진을 관측하는 미 제25사단 병사들]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어깨를 나란히(shoulder to shoulder)하라는 리지웨이의 의도대로 유엔군은 조심스러운 전진을 계속했습니다. 초반에 오산, 수원, 이천 등에서는 적의 저항이 있었으나 예상보다 경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1월 31일, 선도부대가 안양-양평을 연하는 선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주력을 앞으로 투입하여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하라고 예하 군단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 서울의 초입인 한강을 향해 내달릴 준비를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강을 향해 계속 진출하기 위해서는 수리산과 관악산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했습니다. 더불어 중공군의 저항강도도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공군 제150사단 예하 1개 연대가 점령한 수리산 일대는 수원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1번 국도와 수원에서 인천을 연결하는 42번 국도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거점이었는데 이곳을 터키여단이 증강 된 제25사단이 공격하였습니다. 싸움이 고지전으로 격렬해지자 문제는 보급이었습니다. 아군은 50여명의 노무자가 지게를 이용하여 고지위로 보급을 추진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중공군은 그들이 보유한 탄약과 보급품을 소모하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치열한 공방전 중공군이 공격을 멈추고 도주하면서 전투가 막을 내렸습니다.


  2월 9일, 제8군은 한강으로 가는 길목의 마지막 장애물인 관악산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중공군은 고지정상 일대에 기관총과 박격포를 배치하고 완강히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의 공격에 중공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추격을 계속한 국군 제1사단은 다음날인 영등포-노량진 일대에 진출함으로서 먼저 한강선에 도착하여 있던 미 제3사단과 연결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지난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한강을 건너온 지 한 달 만에 아군은 다시 한강에 섰고 이제부터는 서울 탈환을 결정해야할 차례였습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터키군의 모습 ( 사진은 군우리전투 당시 )]


  그런데 신중한 리지웨이는 유엔군 전력이 중공군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지 못한 현재의 상황 하에서, 성급한 서울 재탈환은 군사적으로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서울 점령이전에 중부전선을 남양주-가평선까지 끌어올려 서울의 동측방을 포위하여 배후를 안정시킨 후 한강을 도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일단 여기서 진격이 멈추어 아쉬움은 남았지만 서부전선의 아군은 훗날을 기약하며 전력 재정비에 몰입하였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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