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진반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10.06 화령장 전투 (10)
  2. 2010.08.03 백인엽대령의 희생정신 (38)
  3. 2010.02.10 14. 제 17연대의 복수전 (15)

화령장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06 08:24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대승리를 거둔 화령장 전투는 1950년 7월 17일과
7월 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을 말한다. 

북한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7월 중순,
충청북도를 지나 경상북도까지 물러섰다.


서울 점령후 시가 행진하는 북한군 -이 때만 해도 김일성은
남한을 금방 먹어 치울 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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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앙 축선에서 후퇴하던 국군은 초등학교의 엉성한
괘도를 가지고
작전을 짜느라 괴산과 상주를 잇는 977도로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나중에 미군은 일본이 총독부 시절부터 작성해서 보관했던
한반도
지도로 긴급히 군사지도를 만들어서 미군과 한국군에
지급했다.]


이 지역은 좌측의 국군 1사단과 우측의 6사단 사이의
30km
빈 간격이었다. 여기에는 국군이 한 명도 없었다.


북한군은 이 방면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15사단을
충북 괴산에서 상주 방향으로 977번 도로축을 따라
침투 시켰다.


김일성이 만주 안도현에서 불량 농촌 소년들을 모아서
무장 단체를
조직했던 초기부터 따라 다니며 유격대 활동을 하던
그의 졸개
박성철이 사단장인 이 사단은 이미 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었다.


북한 15사단의 대표적인 대패는 7월 7일 충청북도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에게 호되게 당한 동락리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15사단 48연대는
궤멸적인
섬멸을 당했다..


그런데 2주가 지나 그럭저럭 재정비와 충원을 한 이 연대가
다시 남침의 선봉에 서서 화령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들어서자 주민들은
신속히
경찰라인을 따라 국군 1군단과 2군단과 정보 부서에
신고했다

1군단과 2군단, 두 군단은 정찰 부대를 내 보냈다.


[1군단 정찰대는 방원철 소령이,
2군단 정찰대는 
배상록 대위가 지휘했다.]


1군단장 김 홍일 장군-오래간만에 뵙는
사진이라 업로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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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북한군 15사단이 이 텅 비어놓은 틈을 이용해서
은밀히 남하 중임을
확인했다.


군단은 이 보고에 옹진반도에서 싸웠던
17연대를
2군단으로 배속 변경하여 이 쪽으로 급파했다.

이 연대는 옹진 반도 철수후 대전에 집결했다가
진천과 청주등에서 격전을 겪은 뒤 보은에 잠시 주둔중이었다.

17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먼저 보은의 1대대[대대장 이관수]를
급히 화령장으로 파견했다.

부대는 자정경 명에 의거 출발했다.
[연대장은 백인엽 대령이었으나 부상으로
후송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지휘]


역시 서울 시내를  행군하는 북 T-34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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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1950년 7월 17일 오전 07:00 이었다.

1대대가 977 도로를 타고 진입했을 때 한 주민이 차량 행렬을
가로 막고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선발대가 이미 지난밤에
이 길을 따라 상주 쪽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1 대대는 적의 부대 중간에 끼게 된 것이었다.


연대장은 적의 후속 부대가 필히 있을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야 상주로 간 부대를 놔두고 후속 부대를 치자고
결심하고 괴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977도로 중간에 있는
갈령 남쪽 방향을 따라있는 상곡리 일대에 1대대 병력으로
길게 매복진지를 만들었다.



화령장 북동쪽 977도로의 상곡리에서 
있었던 매복 전투 상황도.
푸른 선이 아군, 붉은 선이 북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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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을 완료한 부대는 매복 지대 아래 상주 쪽에 있는

상곡교에서 자전거로 북상하고 있던 북한군 연락병을
잡아 이미 선두로 상주로 내려간 부대가 박 성철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확보했다.


1대대는 이 통신 보고서에서 적 48연대가 곧 후속할 것이며
바로 1대대 매복진지 앞의
일대에서 숙영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1950년 8월 고되게 행군하는 한국군- 복장으로 보아
전투 경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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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가 조금 지나자 갈령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이 행군 대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보부대에 뒤이어 각종 포와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40여 대의 우마차를 끌고 왔으며 북한 연락병
통신문에서와
같이 국군 17연대 1대대 정면 길가에 정지하더니
대 휴식에 들어갔다.


이들의 일단은 매복 정면 북쪽인 하송리의 송계 초등학교
부근에서
휴식하고 다른 일단의 병력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했는데
이들은 학교 교정과 도로가에 사총[斜銃]한 후
경계는 소홀히 한 채
일부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마을에 들어갔는데 잠시 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의 서쪽 사면 3부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제 1 대대
장병들은 코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한군의 목욕 광경 등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면서 사격 명령이 빨리 하달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병력의 후방 390고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적이 목욕을 하는 등
무방비 상태이기는 하나
넓게 흩어져 있으므로 좀 더 좋은
여건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인 19:30분경 흩어져 목욕하던 북한군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병사들은
수저를 놀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판단한 이관수
대대장은
대대 작전장교 김희재 중위로 하여금
적색 오성 신호탄을 발사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에 따라 400여 정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고
박격포와 기관총도 쉴 사이 없이 쏘아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집결하거나 식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은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쓰러져 갔고 그 때까지도 하천에서 목욕하던 자들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쓰러졌으며 다행히 살상을 면한 자들은
부락으로 숨어들거나 삼밭에 몸을 숨겼으며 일부는 뒷산으로
도주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40여 필의 말과 소들이 포성에 놀라
날뜀으로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 1대대가 1시간 가까이 적을 섬멸하는 사이 연락을 받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전투현장에 도착하였는데 대대장이
소탕 작전을 건의하자 연대장은

“야음이 다가왔고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내일 17연대
  본대가
도착한 후에 하라“라고 명령하며 전투 현장에서
살아 남은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 매복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대장은 후방 진지에서 예비대로 있었던 제 2중대를
북한군이 행군해왔던 도로의 후방을 차단해서 도주자를 색출했다.


김희중 연대장은 어제 16일 밤에 청주 전투에서 고전을 하고
철수하여
보은에 집결하고 있던 제 2대대와 제 3대대를
화령장으로 급파시켰다.


먼지로 뒤덮힌 한국의 도로는 미군들에게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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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한 1대대는 살아남은 적을 색출하가며 잔적소탕을 했다.

북한군이 식사하려고 집합했던 곳은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기습 현장의 뒷 산으로 도주했던 잔적들을 소탕했다.


북한군 정치 장교 놈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아 바위 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아 !부산은 벌써 함락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저항하느냐!" 하며 속임수의 선동을 하다가
국군의 사격에 도주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살했으나 뒷산 바위틈에서 기관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박격포 사격으로도 제압되지않아 특공대를 투입해서 제압하고
보니 북한군 간부들은 기관총 사수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발목이
쇠사슬로 묶이고 기관총에 연결된 채 죽어 있었다.


[모두 단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북한군 간부들이 사병을
 희생삼아
살길을 도모했던 치사함이 노출 되어 보인다.]


전장 정리의 마무리가 끝나고 전과 확인을 해보니 포로 30여명,
사살 250명, 박격포 20문,45mm 전차포 7문, 소총 1,200정,
그리고 수점의 통신장비와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부대를 확인한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보병 2개 대대로서
통신 중대와 대전차 포 중대 및 기마대인 것이 밝혀졌다.


총을 사총[斜銃]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으므로 도주한 자들은
대부분 비무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획한 소총이 많았음에 유의]


미국 기록은 두 사람이 북한군이라고 설명했지만 평양에서
신상철 사단장과  다른 사단장이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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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18일 적의 후속 부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정보참모 유 창훈 소령을 지휘관으로 한 정보 부대를
전방으로
파괴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 현장에서 북쪽인 갈령을 넘어가서 잠복했다가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올라오는 두 명의 북한군 연락장교를
잡았다.


두 연락 장교로부터 15사단장 박 성철이 이미 궤멸된
48연대장 김 치구에게 아무런 보고하지 않음을 질책하고
49 연대가
곧 후속함을 알리는 통신문이 압수했다.


박성철은 이렇게 두들겨 맞은 48연대의 운명을 알지도
못 했을 뿐더러
후속 연대가 뒤따른 것이라는 것을 국군에게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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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대 상곡리 기습에서 후방으로 도주해서 48 연대가
 섬멸되었음을 
제대로 보고한 적군이 한 명도 없었을 뿐더러
 [전멸을 의미함]북에 정보 협조해주는
주민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군이 정보 획득에 주민들의 절대적인 협조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또한 중요 정보를 자전거를 탄 전령들로부터 연달아
 두번이나 입수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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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연대장은 19일 전투후 적을 기습하기로 하고
송호림 소령이 지휘하는
2대대를 파견했다.


2대대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1대대가 대첩을 거둔
577도로의 위쪽,
즉 갈령과 기습 현장인 심곡리 사이에 있는
동관리와 하성리 중간 계곡에
매복진지를 구축했다.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며칠 전 차량 전복 사고로 기동조차
불편한
형편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진지를 구축하고 후속할
적 49연대를 기다렸다.


그는 적이 계곡 안에만 들어와 준다면 일개 연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대대가 집결지인 화령장에서 동관리로 이동하여 매복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대대가 전장 정리를 완료한 20;00이었다.


아래 심곡리에서 윗쪽으로 올라간 곳인 동관리에서
화령장의 두번째 전투가 벌어졌다.[3개 중대의 공격선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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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중대를 적이 들어올 입구인 좌측 갈령 쪽, 5중대를 중앙,
6중대를 적이 나가는 방향인 우측 상주 쪽 으로 배치했다.


다음날 7월 19일 16;00시 말을 탄 적 장교 두 명이 인솔하는
우마차 20대와 적 20여명이 7 중대 매복 망에 들어왔다.


대부대를 기다리는 대대로서 그냥 통과 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 병사가 선두 기마 장교를 우발적으로 사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7 중대는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기습으로 적병 17명, 소 두 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두 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했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는
많은 양의 탄약과 식량들을 노획하였다.

이들이 징발했던 민간인 두 명도 희생된 것은 유감이엇다.


송 호림 대대장은 이 우발 사격을 크게 질책하고
대대 관측소를
전방의 7중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더 이상의 
실수가 
없도록 중대를 직접 통제했다.


다음날 7월 20일 새벽이 되었지만 적정이 없었다.
송 호림 대대장은 연대 본부에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김희준 중령이 이거 우리가 속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2대대 철수를 생각할 때 선두 7중대장 조 경학 중위는
송 호림 대대장에게 피아 식별 불능의 대병력이 갈령에서
도로를 따라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한군의 훈련. 앞에 지형 모형 사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술 훈련중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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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훤히 샐 무렵이었지만 골짜기는 안개가 온통

뒤 덮여 길 위로 이동하는 부대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적 부대는 4열 종대로 행군해 오고 있었다.


적 부대는 7중대 앞을 이미 통과하여 선두 부대는
7중대 화망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송호림 대대장으로부터 적 식별을 분명히 하라는 지시를
받은 조경학 중위는 유선 전화기로 안개 사이에 희미하게
통과하는 대부대에 관한 관측 정보를 계속 보고하였다.

“배낭 같은 것을 모두 메고 있다.”

“총에 긴 송곳 같은 것이 꽂혀 있다.[총창이다]”

“바퀴 달린 기관총을 끌고 가고 있다.[수냉식 맥심 기관총이다.]”
등의 정보를 보고하는 조 중위는 이 대열이 분명 적이라고
판단하는
어조였다.


소제 수냉식 1910년 맥심 기관총.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체코 군에게서 
구입한 이 기관총들로 일본군을 격멸함,
바퀴가 달려 있어서 강아지처럼 줄을 매어 끌고
이동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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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군은 한강 이북에서 배낭을 모두 잃어버려서
배낭이 없는 상태였고 배낭이 있는 부대도 배낭은 차량으로
운송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피아 식별을 하고 싶었던
송 호림 대대장은
주저했다.


적이 7중대를 통과하여 좌측 6중대 지역으로 진입하자
6중대장 곽성범 중위는 이들의 선두가 중대 정면을 지나가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빨리 사격명령을 내려주기기를 간청했다.


김희준 연대장에게 보고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송호림 대대장은 자신의 판단으로 아군 부대를 잘못
공격했을 때는
죽음으로 속죄하기로 하고 적색
오성 신호탄 3 발을 쐈다.
전 대대 동시 사격 명령이었다.


명령일하 전대대의 화력이 도로에서 행군하던 적에게 쏟아졌다.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대는 적 후미인 갈령 방향에는 81mm 박격포로 견제사격을 하고
중대간의 중기관총으로 교착사격을 하며 도로 건너편 개활지와
산으로 도주한 적에게는 중대의 60mm 박격포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 화기는 977번 도로를 최저 표적사 할 수도 있도록
지가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안개로 인하여 표적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격만
하면 화망 안에 깔려든 적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숨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뛰었으나
은폐물이 없는데다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쓰려져 갔고 일부 병력은 논바닥에 엎드려 저항을 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송호림 대대장은 불편한 몸 상태를 잊고 붉은 기를
흔들며 “죽여라! 죽여라!”하고 부대를 독려하였다.


08:00경 안개가 걷힌 후 977도로 위와 논바닥에는 시체와
장비가 즐비하였고 아직도 삶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삭발한 머리였다.
박박깎은 머리는 북한군의 특징이다.

기습한 국군은 이들이 진짜
북한군들임을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반대편 산으로 도주했던 적들은 미리 746고지에 배치했던
7중대의 1개 소대에 격멸되었다.


이틀 전 1대대의 상곡리 전투에서는 이 배비가 없어서 적들이
반대편 산에
붙어 저항했지만 이번에는 아래 계곡해서
도주해 오는 북한군을  산정에서 사정없이
쏴 거꾸러뜨렸다.

09:00, 제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예비로 있던 제 6중대로
하여금 잔적 소탕을 하게 하였다.


6중대가 소탕 작전을 전개하자 이때까지 죽지않고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북한군들은 상당한 저항을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소탕 되었다.


이 당시 5중대에 탄약 추진차 갔다가 전투를 관전하게 된
하송리의 박 무진 씨는

“적이 길 위와 논바닥에 새카맣게 쓰려져 있었는데 7-8명이
 
하천 직경 70cm의 배수관 속으로 기어 들어가자
  소탕 작전을 하던
국군 한 명이 배수관 속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았어요. 
  국군들은 참 용감하였습니다.“

이날 작전은 오후 14;00에 종료되었다.


송호림의 2대대는 적 현장 확인 사살 356명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 며칠 후 현지민들이 논과 도로에서 모아다가
매장한 적군 시체만 600구가 넘었었다.

노획 무기로서 박격포 16문, 반 탱크 총 2문,
기관총[수냉식 15문, 경기관총 15문, 체코 식 경기관총 23정,]
소총 186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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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멸된 15사단의 두 연대 보유 노획 무기가 빈약함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주전인 1950년 7월 7일, 국군이 충북 동락리에서 6사단
7연대에게
1차로 격멸당한 48연대에서 거둔 노획품은 막대했다.

동락리 사살은 2186명, 포로가 132명,

노획 장비는 122mm 곡사포가 6문,
76mm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12.7mm 중기관총 6정,
장갑차 4량, 2 1/2트럭 60대, 1/4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등이다.


탄피를 수거하고 있는 국군, 탄피의 양으로 보아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화령장 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 24연대가 이어 받아 7월 25일까지
계속되었고 북한군과 미군사이에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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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북한 연대는 남침 때는 완전 차량화 되어 있었다.
참패했던 동락리에서도 전 연대가 차량을 타고
매복선에 들어와서 주차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이 동락리 전투에서 막대하게 노획했던
차량과 중포가 화령장에서는 전무함이 들어난다.


보건데 적 15사단 48연대는 동락리에서 전 장비를 상실하고
인원만을 급히 충원했지만 한국 침공 개전 때의 화려한 장비는
북한으로부터 재보급 받지 못해 우마차나 자전거 같이
빈약한 것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48연대장 김치구 중좌는 동락리 전투 대패후
국군이
다 후퇴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며
지방 주민들을 수 십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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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리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에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 15사단은 15:00에야 자기들 연대가 섬멸된 것을 알고
감히 갈령을 넘어 오지는 못하고 포격만 했지만 2대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이미 진지 이동을 한 뒤였다.


김 일성이 생각없이 일으킨 6.25남침으로 남북 양쪽의
주민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손자를 데리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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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령장에서 적 15사단의 두 개 연대를 섬멸하는 승리에는
한국군 정보부대의 민활한 활동에 크게 힘입은 바가 컸지만
현지 주민들의 협조가 압도적인 공헌을 하였다.


화령장 주민들은 첫 첩보 부대인 방 원철 부대나
배 상록 부대가 화령장에
파견되었을 때부터 국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는데
대한 청년단원들은 단장
김 기영을 중심으로 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마을을
경비하며 보급 추진 업무를
도와주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탄약 운반이나 취사 업무등은
우리가 맡을 터이니 군인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장에 나가서
적을 물리치도록 해 달라“고 하면서
탄약 운반, 취사등을 자원했으며
박 삼덕[청년 단원- 38세]씨는
자신의 약방을 치료소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약품을 지원하고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서울 탈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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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은 동락리와 화령장 두 번의 대패로 사단장에서 해임되었다.


김일성이 아무리 신임하던 졸개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대패에는 어쩔 수없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사단은 남침 3개월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급조직
된 사단으로서 출발 초기부터 그 전투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북한 군부내있었다.

그래서 남침초기 최 선봉에도 서지 못하고 예비대로
따라오다가 국군과 맞붙으면서 그 문젯점을 여지없이 들어냈다.

무기를 다 빼았기고 문자 그대로 거덜이 난 이 15사단은
두 달간 계속된 낙동강 전투에서 옹골진 전투력 한 번
발휘하지 못하고 비실대다가 북으로 패주했다.

15사는 6·25전쟁 최약체 북한 사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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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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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령장 2010.10.06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어이없겠네요... 아니 말을 탔다고 북한군으로 간주하다니.... 본 순간 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

  2. 화령장 2010.10.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 분 무슨 소리하고 있는가 ?

    본순간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라고 ?

    말을탔다고 붃한군으로 간주했다니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나?

  3. chaffee2090 2010.10.07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탄피 회수 장면은 실제 화령장 전투 당시가 아닌 것이라는 얘기죠?

  4. 조조 2010.10.24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럭리 전투에서 대패한 15사단 박 성철의 군대가 화령장에서 다시 국군의 재물이 됏구먼 북괴15사는 완전 봉이였구먼,,,,ㅎㅎ 정말 웃기는 넘들이엿군 15사

  5. clothing factory 2011.05.25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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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엽대령의 희생정신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8.03 08:21


 
오늘날 인내의 화신이자 각 대기업 경영진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
  그가 남긴 유훈은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세대들에게 큰 감흥이 되고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정실 쓰키야마 부인을 처형하고 장남 노부야스를 할복시킴은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지 이동령에도 아무런 불평 불만없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결과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타니 요시쓰구, 우키다 히데이에가 주축이 된 서군을 격파하고 일본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うて 遠き道を行くが如し
  急ぐべからず。
  不自由を常と思えば不足なし
  心に望み起らば
  困窮したるときを思い出すべし。
  堪忍は無事長久の基、怒りは敵と思え
  勝つことばかり知りて、負けることを知らざれば
  害その身に至る。
  己を責めて人を責めるな
  及ばざるは過ぎたるより勝れり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 ━

 
아! 6·25를 방문하시는 분들 중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에 대해 아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흔히들 일본 통일의 3대 주역으로 꼽히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평가가 남다르지만 그 중에서도 온갗 수모와 치욕을 견뎌내며 참고 또 참아내며 아무런 불평없이 살아온 결과 최종적으로 에도 바쿠후를 창건하고 200년이 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은 오늘날 우리 세대들에게 많은 감흥을 줍니다.


  그 중에서도 1616년, 슨푸성에서 임종하기 전에 남긴 유훈은 시간에 쫓기고 한탕 인생을 추구하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데 이 중 '
不自由を常と思えば不足なし, 즉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에 해당되는 일화가 바로 6·25 전쟁 중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1950년 6월 25일, 개전 이후 1년 동안
육·해·공 3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을 역임하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정일권 중장(위의 사진)이 자신의 계급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제 2보병사단 사단장에 임명되었던 일입니다.
  명색이 육군참모총장 및 3군의 수장을 역임한 장성에게 국방부 장관도 아닌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 사단장을 맡으라니, 이렇게 황당한 인사가 또 없을 것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아마 정일권 중장은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기 위해 전역 지원서를 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정일권 중장은 이러한 부당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제 2보병사단장 부임을 앞두고 "이 충무공의 백의종군 정신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일선에 투신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개전 이래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백선엽 제1 보병사단장의 동생 백인엽 대령이 사단장을 역임한 후 다시 연대장으로 임명된 경우입니다. 


  백인엽 대령은 개전 직전에 발발한 여수·순천 제14 보병연대 반란사건 당시 제12 보병연대를 지휘해 진압작전을 성공리에 이끈 지휘관이었습니다.


  1950년 7월 말까지 경북 안동에서 청송에 이르는 전역 기간 중 북한군에게 혹심한 피해를 입은 한국군 수도사단은 결국 국방부에 의해 문책을 받아 사단장 김석원 준장이 보직 해임되고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추천으로 백인엽 대령(위의사진)이 후임 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개전 초 제17 보병연대장을 역임한 후 1950년 8월 1일, 27세의 나이에 최연소 사단장으로 승진한 백인엽 대령!
  요즘 같으면 고향 주민들이 동구밖 가수원길부터 경축 현수막을 내걸고 중·고등학교 동문들은 학교 교문에 현수막을 내걸며 자축할 경사와도 같은 일이었지만 전시의 상황에서 그런 여유는 한낱 꿈속의 꿈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백인엽 대령은 준장 진급( 1950년 10월 24일이 되어서야 겨우 '별'을 달았습니다 )도 하지 못한 채 사단을 이끌게 되었으니까요.
  여하튼 진급은 못했지만 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인엽 대령은 8월 한달 동안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인 안강~기계 방면에서 포항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온 북한군 제 12사단과 766유격대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해당 지역을 사수합니다.
  이 부대는 최근 좋은 흥행성적을 낸 '포화 속으로'에서 학도병들이 포항여중에서 결사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던 부대죠.
  이 전투에서 수도사단에 패한 766유격대는 비학산에서 해체돼 제12사단에 흡수되는 치욕을 겪습니다.
 
포항 지구의 격전이 마무리 되어갈 무렵 현재의 고착된 전선을 타개하는 한편 북한군에게 통쾌한 반격을 가할 크로마이트 작전, 즉 인천상륙작전에 한국군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지휘관으로 누구를 임명하는가? 에 대한 인사 문제가 국방부와 육군본부에서 심각하게 논의되었습니다.


  
백인엽 대령이 사단장과 연대장으로 각각 임명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가급적이면 전투를 잘 지휘할 수 있는 장교가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했고 이에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이 때도 수도사단장 백인엽 대령을 추천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 합시다!"
  이승만 대통령은 흔쾌히 백인엽 대령의 임명을 승낙했습니다.
  문제는 크로마이트 작전에 참가할 한국 육군이 1개 연대라는 점이었습니다.


  역사적인 크로마이트 작전을 앞두고 한국군의 참전이 결정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지만 그 규모는 겨우 1개 연대에 불과해 백인엽 대령에게 큰 고민으로 다가섰습니다.

  당연히 신성모 장관은 사단장을 한 대령에게 다시 연대장을 역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결국 백인엽 대령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거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현재 계획 중인 반격작전에 참가하는 연대의 지휘를 맡아주었으면 하오. 지금 사단장을 하고 있는 사람한테 이러는 것은 곤란하지만 백 대령의 의견을 듣고 싶소. 어찌하시겠소?"
  그러자 백인엽 대령은 불만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장관님,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떻겠습니까? 뭐 중대장도 괜찮습니다. 까짓거 백의종군 하지요. 맡겨만 주십시오”고 당차게 답변했습니다. 
  현재 연대를 지휘하는 사단장 보직을 수행하는 그에게 있어 이는 대단히 큰 치욕이자 불명예였음에도 나라를 위한 우국충정과 더불어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사단장에서 연대장으로 강등시킨 백인엽 대령!
  하지만 그가 어느 부대를 지휘하느냐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할 부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반드시 한국군의 이름을 드날릴 훌륭한 부대를 선정할 것을 신신당부했습니다.
  따라서 신성모 장관은 백인엽 대령을 호출해 어느 연대를 지휘하겠느냐고 물었고 백인엽 대령은 주저할 것 없이 개전 초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한 제17 보병연대를 선택했습니다.

  두번째로 연대장을 맡게 된 백인엽 대령의 의지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제17 보병연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17 보병연대는 요충지인 경주 일대에 배치되어 있었고 당연히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중장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사단장에서 연대장으로 강등시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백인엽 대령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제17 보병연대는 경주에서 이동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 그리고 미 제7 보병사단과 한국군 제17 보병연대 등이 참여한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의표를 찌르며 성공리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개전 이후 두번째로 제 17보병연대장에 부임한 백인엽 대령은 인천을 탈환한 후 다시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제 17보병연대는 개전 초 옹진반도에서 당했던 참패의 치욕을 되갚으며 인천 상륙 이후 미 제7 보병사단에 배속돼 잠실 방면에서 한강을 도하한 뒤 남산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증원부대 및 퇴로 차단을 위해 망우리에 전개했습니다.


 
서울에 입성해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고 있는 미 해병대원들. 제17 보병연대는 백인엽 대령의 지휘 하에 북한군의 발악적인 저항을 격퇴하며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9월 28일 서울을 북한군에게서 탈환한 제17 보병연대가 폐허가 된 시가지의 잔해들을 치우는 한편 경무대 경호와 수도경비임무에 전념했고 이를 지켜본 미군들은 제17 보병연대를 ‘서울연대’로 호칭했습니다.
  이렇듯 백인엽 대령의 제17 보병연대는 서울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백인엽 대령은 10월 24일 준장 진급과 동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영전했고, 제17 보병연대는 제2 보병사단에 예속된 후 저격능선전투에서 중공군을 격파하며 그 용맹을 과시했습니다.
  백인엽 대령의 희생정신을 통해 우리는 아무리 불합리한 대우라도 아무런 불만없이 잘 받아들여 성과를 낸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따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혹시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받거나 정도 이상의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으시더라도 백인엽 대령의 희생정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호쾌하게 "예! 맡겨만 주십시오!!"를 외친다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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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타임머신 2011.07.02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적을 위해서, 민간인들을 안중에 두었겠습니까.... 그냥 갈기고 보는거죠...
    형님인 백선엽 장군은 지리산 근처에서 빨갱이 잡는다고, 지리산 주변 주민들까지
    준빨갱이로 몰아서 죽이고,
    동생인 백인엽 장군은 여순사건 때, 반란 군인들은 이미 지리산 및 다른 지방으로
    도망쳤는데, 민간인 중에서 빨갱이 잡는다고, 사람들 죽이고...

    햐.... 자신들의 공적을 위해서, 민간인 죽이는거...
    뭐 별거 있습니까?

    임진왜란 때 공적을 위해서, 민간인들을 죽인다는 것...
    다 구라갔죠? 전시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치안이 불안할 때, 무력이 최고고
    그 무력으로 공적을 위해서라면, 민간인 가지고 노는거
    일도 아니죠...
    (요즘에야 개념이 잡혔지만... 글쎄요... 전시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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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개념상실 2012.08.25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인엽 성질 더러운 놈으로 유명했죠. 후퇴하다가 사병한명이 짚차를 막아서 통행에 방해했다고 권총으로 즉결처분한적도있고, 공산군에 부역한 민간인들 잡아내서 일본도로 참수하기도하고, 자기형인 백선엽장군 아니었다면 피해가족들한테 생매장되었을겁니다.
    그리고 선인재단 만들어서 온갖 비리를 저질렀죠. 인천의 화교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려서 대만대사관에서 항의하고, 강제철거하면서 온갖 폭행사건 터지고..
    글쓴분은 역사공부 많이하시고 정신차리세요.

  6. 지랄하네 2013.02.03 15: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미친 새끼 때문에 형 백선엽까지 도매급으로 욕 처먹는 건 아슈?

    • 영웅 2013.10.21 1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백선엽이 지 자신만으로도 욕쳐먹어 마땅한 기회주의자 인데 동생의 개망나니짓은 화룡점정 정도....ㅋㅋ

  7. 개념 2013.02.13 2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도 모르는 사람들이 안보인다고 댓글로 똥을 싸놓네
    6.25전쟁때 북괴에 맞서 목숨바쳐 나라를 위해 충성한 장군아닌가?

  8. 개그 2013.03.05 1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인엽 일화 많지....
    병사가 지프차 앞 막았다고 처형, 지프 시동 껐다고 운전병 처형...
    진정한 친일파 인간 쓰레기가 백인엽이다 차라리 채병덕이 양반이지..그나마 전선에서 뒤지기라도 했으니
    그러고도 아직도 살아있는거도 웃기고 이런걸 좋다고 빠는넘이 있는건 더한 개그다

  9. chat random 2013.05.02 01: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날 인내의 화신이자 각 대기업 경영진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

  10. 바른역사 2013.05.08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인엽, 신성모 대한민국역사이래 최고의 기회주의자요 야비하고 잔이한 아부꾼들 찬양하는 글을쓴 인물은 도데체 누구? ㅉㅉㅉ

  11. Click here 2013.05.27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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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www.bonnevillefinancial.com 2013.09.30 2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엽 제1 보병사단장의 동생 백인엽 대령이 사단장을 역임한 후 다시 연대장으로 임명된 경우입니다.

  13. 영웅 2013.10.20 0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인엽을 칭송하네 ㅋㅋㅋ 조를까서 쳐 잡수세요 ㅋㅋ

  14. 양심좀가져라 2013.10.29 14: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인엽이를 빠는 글도 있네. 최고의 부패쟁이, 최고의 기회주의자, 최고의 살인마. 이런 걸 좋다고 글을 쓰다니...위에서 시킨다고 뇌없이 그냥 글쓰지말고 머리로 생각 좀 하면서 살길.

  15. Relationship with Luminix Power 2014.02.13 0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의 부패쟁이, 최고의 기회주의자, 최고의 살인마. 이런 걸

  16. 여방오 2014.02.15 1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양이 있으면 음이 있는 것.. 백인엽씨에게도 전쟁 중 공은 있겠죠..그런데 너무 찬양일색인 것 같은 아쉬움은 뭘까요.. 정일권씨나 백인엽씨. 개인적으로 인간애를 발휘한 김백일장군이 더 좋게 보여집니다, 전시라곤 하지만, 부하들에대한 즉결처형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휴전 후에 벌어진 이들 두 장군의 비리는 보릿고개에다 전후피해에 시름하던 국민들을 생각하면... 지휘관들의 공적도 많지만 이름없이 쓰러져간 하급장교, 병사들. 그 호국영령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글들도 많아졌음 좋겠습니다, 너무 탈도많았던 장성급만 다루시고 그분들만이 이 나라 이 겨레를 구한 것 같은 이 느낌은.. 평소 전사에 관심많아 예까지 와서 글은 잘 읽었습니다...

  17. Lawyers In Greentree 2014.04.10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자 백인엽 대령은 불만을 드러내기는 커녕 오히려

  18. seattle roofing 2014.04.13 16: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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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http://lamari.pl/ 2014.04.24 17: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20. 보름달 2014.05.14 06: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인마 미국놈 작전에 독립운가와 백성 민족을 잡는 쥐잡이 놈들이 결국 백인협 백선엽 살인을 일삼고 제주도 살인자 14연대 살인자 부대놈들이 헬리곱터원정 전라도 의상봉 중심으로 경찰살인자 박가놈 3인방과 묵인 6인배후 열락책 위조책이 용변산반도 전라도민을 무자비 죄도 묻지 않고 살인을 하고 지역감정을시킨 살인마 미국놈들이 우방국이라니 한심한 친일파놈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니 미래가 없다..

  21. Invincible76 2014.08.05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글쓴이는 인간의 기본 윤리개념도 없는 정신이상자 이신 듯..?
    큰 잘못도 없는 부대원이나 다른 장병들을 심심하면 밥먹듯이 '즉결처분'이라고 총살하던 그 인간백정 쓰레기를 찬양하는거 보니, 사탄의 자식이라도 되는겁니까 당신?

14. 제 17연대의 복수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2.10 08:25


 

  국토가 38선으로 분단되면서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의 역외 영토가 된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옹진반도였습니다. 전쟁 직전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가 독립 제17연대였는데 무려 10배의 전력을 가진 북한군의 공격으로 개전 이틀 만에 이곳을 완전히 포기하고 해상으로 후퇴하였습니다. 사실 6·25전쟁 초기에 모든 아군 부대가 후퇴를 하였지만 개전 당일 당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의 후퇴 지시가 내려왔을 만큼 이곳을 사수할만한 전략적 가치는 사실 없었습니다. 비록 마지막 철수선에서 장병들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옹진반도를 바라보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전쟁 전 옹진반도의 제17연대를 위문 방문한 여학생]


  전력을 보존한 채 해상 철수에 성공한 제17연대는 새롭게 창설된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청주지역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그러던 7월 중순, 중부 전선에서 부산을 향하여 남진하고 있던 북한군은 험준한 소백산맥을 돌파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한군은 개전 이래 그들에게 계속하여 치욕을 안겨준 국군 제6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충주-문경-상주 축선을 돌파기 위해 2개 사단을 집중하였습니다. 비록 제6사단이 선방하고 있었지만 병력증원이 절실히 요구된 중부전선의 위기였습니다.


  다급한 상황을 직감한 육군본부는 제17연대를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고, 상주 북방의 함창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17연대는 제1대대를 선발대로 하여 7월 17일 04시에 대대별로 출발을 개시하였습니다. 청주를 출발한 제1대대는 보은을 거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선 부근인 상주의 화령장을 통과하는 도중 시골 노인으로부터 어젯밤 북한군이 이곳을 지나 상주 쪽으로 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교육 훈련 중인 북한군 보병]


  화령장은 산간의 협로였지만, 소백산맥을 통과하여 보은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에서 상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합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하지만 전력이 부족하였던 국군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였고 이점을 간파한 북한군은 이 곳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을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제1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정찰대를 파견하여 때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북한군 전령 1명을 생포하여 북한군 1개 대대가 어제 밤 이곳을 통과해 상주로 진출했으며, 본대인 제48연대가 후속할 예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대장은 북한군 사이에 끼여 상주 쪽으로 행군할 것이 아니라, 상곡리에 매복하여 북한군 제48연대 본대를 기습할 것을 결심하고, 7월 17일 15시경까지 전투준비를 완료한 후 북한군의 접근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16시경, 제1대대가 매복중인 상곡리에 북한군의 행군대열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선발대대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관계로 경계를 풀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그때 제1대대의 모든 화기는 일제히 불을 뿜었고 1시간의 공격 끝에 북한군 제48연대는 붕궤되어 버렸습니다. 이 전투로 제1대대는 250명의 적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200여정의 소총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전사는 이를 ‘상곡리 기습전’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제17연대의 선전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령장 전투 기념행사]


  다음날 제17연대 제2대대가 제1대대를 후속하여 화령장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북한군 제15사단의 제49연대가 제48연대를 후속할 예정이라는 귀중한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제17연대장 백인엽(白仁燁) 대령은 제49연대마저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제1대대를 현 위치인 상곡리에, 제2대대를 상곡리 북서쪽 동관리에 매복시켰습니다. 그리고 3일 후 도로를 따라 밀집종대로 행군하며 내려온 북한군 제49연대는 제2대대의 포위망 안에 완벽하게 갇히게 되었고 기습에 순식간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작전으로 적 356명이 사살되고, 26명의 포로가 잡혔는데 이 전투가 바로 동관리 기습전입니다.


  제17연대 제1대대의 상곡리 전투와 제2대대의 동관리 기습전은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방심하고 있던 북한군 선두부대를 격파해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육군본부에서는 제17연대 1대대의 상곡리 전투와 2대대의 동관리 전투를 합하여 화령장 전투로 명명하고 화령장에서 대승을 거둔 제17연대 전 장병을 1계급 특진시켰습니다. 제17연대는 연대 전체가 특진하는 2번째 연대가 되면서 옹진반도 철수시 흘린 통한의 눈물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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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시니 2010.02.10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전투에서 피흘리신 우리 할아버지들과 아버지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복수전을 승리로 이끌어도 눈물만 흐르는군요...

  2. Koreanwar60 2010.02.11 0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참전용사를 포함한 우리의 어른신들께 감사의 마음을

    항상 잊지말아야겠죠.....

  3. 우리밀맘마 2010.02.11 1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감한 그분들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

  4. 탐진강 2010.02.11 21: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인엽의 17연대군요.

  5. Koreanwar60 2010.02.12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6. kynam 2010.02.25 12: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부친도 전투에 참가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입고서 부대는 산산히 부셔지고 심한 부상을 당해서 명예제대를 하셨다네요~

  7. Koreanwar60 2010.02.25 1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문 감사합니다.
    kynam님의 아버님께 경의와 감사를 보냅니다.

  8. MinSk 2010.08.28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7연대 2대대에서 군복무한 사람입니다. 선배님들의 조국에 대한 숭고한 희생정신에 다시한번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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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당시 참전하셨던 분들이 대부분 80대 입니다.
    더 늦기전에 그분들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보내야하지
    않을까 하네요.

  13. shock collars for dogs with remote 2012.12.03 2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력 증강은 유엔 해,공군의 후방 차단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유엔

  14. cipro 2013.03.24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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