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0.07.05 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7)
  2. 2010.06.09 압록강 상공의 캐나다産 F-86 (6)
  3. 2010.05.18 44. 비호산에서 빛난 칠성 (6)

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5 09:50


6·25전쟁 후, 한국 전투 경찰의 활약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않다.


내가 기억하는 전투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자는

불과 서 너 권 밖에 되지가 않다.

그러나 6·25전쟁 전후  경찰 전사자는 일만명이나 되었었다.


월남전 8년간 전몰 파월 장병이 5천명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희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경찰은 육군에 비하면 훈련도 장비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때의 공비들은 경찰 전투력을 우습게보기도 했었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 일 만 명이나 세를 불려 기세를 올린

공비들에게 연타를 안겨 그 세를 꺾은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던 육군이었지만 6·25전쟁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을 물고 늘어져 소멸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이 전투 경찰들이었다.


한국 경찰은 육군처럼 강력한 병력과 화력이 없었기에

산야를 쓸어내리는 듯한 대규모 토벌을 자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지의 한국 경찰 기사에서 빌려온 사진을 다시
싣는다. 부상 공비를 운반하는 전투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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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형편이었던지라 빈약한 병력으로 공비들에게 타격을 주는

전술을 개발해내고 또 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공비들을 실핏줄을 토막토막 잘라 말려죽이듯 서서히

섬멸해갔다.

전투 경찰의 전술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비용대 효과의

절대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한국 경찰이 일선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창안하고 개발해낸

그 공비 말려죽이기 전술은 ‘매복 전술’이었다.


해방 후부터 경찰에 몸담으며 공산당 무리들과 싸웠던

김두운 선생의 공비 토벌 수기‘지리산 호랑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김두운 씨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자 경찰에 투신했다.



김 두운 서장-1951년 무주 경찰서장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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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수기에서 식량 약탈을 자행하고 귀소(歸巢)하는

부안군의 공비 일당을 매복 섬멸했던 작전을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경찰의 공비 소탕 매복 전술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분이 전북 부안 경찰서 경무 계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늦은 가을철이었다.


김두운 선생은 타 경찰서에서 이미 공비 토벌을 경험하며

자신 나름의 공비 토벌 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경찰 입문 이래 호남 일대에 공비들이 준동하자
아무 군사 훈련도
실전 경험도 없었던 간부들은 단지
일본군 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공비 토벌을 
떠 맡겼다.

그는 전북 도경의 기동대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군 경험이래야 일본군 고사포 부대에서 약간 근무했을 뿐이었던

김두운 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우왕좌왕 산을 쏘다니며

허탕을 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매복 섬멸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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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 토벌의 초창기에 여러 일선 경찰서에 매복

전술만이 토벌의 최고 유효 수단이라는 의견은 떠돌았었다.


그러나 표준 교안이 없어서 일선 전투 경찰 지휘관들은

김 두운 씨처럼 연구와 실전 경험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비방[?]을 개발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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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운씨는 자신이 개발할 매복 전술에서 전투요령을
복격술이라 이름짓고 아래와 같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첫째,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낯춘다음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다.

둘째, 기동선을 따라오는 적의 순서와 우리의 매복 순서에
맞추어 한 명이 적 한 명만을 겨냥한다.

세째, 쏴의 신호와 동시 단 한발만 발사하고 함성없이
그대로 각자 조준했던 적에게로 돌진해 생포,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넷째, 도망치는 적은 너무 멀리 추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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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관심 있게 볼 대목은 그가 공비들이 통과할 목을

미리 집어내고 매복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치 돼지 명포수가 목을 잡는 요령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아래는 김 두운씨의 글이다.

전북 도경 기동대장에서 부안군 경무계장으로
전출되었을 때 겪은 전투를 회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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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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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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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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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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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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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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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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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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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

※ 2편으로 계속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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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2. 홍이아빠 2010.07.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약력입니다.

    약 력

    1923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3. trading account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

  4. allstate auto insurance corp 2012.05.26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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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좋은 글이지만 일제 때부터 항일투쟁으로 빛났던 좌익세력을 죽인 건 크나큰 오류였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일,반미,반이승만,반독재,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 두고 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조선노동당 부안군당의 혁명 전사들은 죽인 김두운 서장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는 미국의 무한독주가 무너지고 러시아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이라크의 저항이 빛을 봐 미군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미국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참된 민주해방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돈과 권력을 쥔 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이 거셀 텐데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해 이 자들은 저 미국으로 쫒아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단결합시다 투쟁합시다 항일세력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문하던 반민주,친일친미 세력들을 반드시 처단합시다 그리고 역사의 장대한 길에 이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세들에게 진실된 역사들 가르칩시다
    투쟁합시다 투쟁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을 때까지 싸웁시다 투쟁

    • ㅉㅉ 2014.03.25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 미쳤네.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런 놈 헛소리 해대는 거 보면 진짜 어느 정도 민주주의도 제한해야 한다. 꽁꽁 잡아 북한으로 보내던지. 투쟁? 혁명전사? 미친놈.

압록강 상공의 캐나다産 F-86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6.09 12:42

 

6·25전쟁중 캐나다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육상 전투 부대와
해군의 구축함을 파견에서 싸웠지만
공군 부대는
전투기의 유럽 파견으로 여유가 없어서
파견하지를 못했다.



캐나다 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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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2명의 캐나다 전투기 조종사가 한국
전선에 파견되어
미 공군의 F-86을 몰고 압록강 상공에서
공산군의
미그-15기와 싸웠다.


캐나다 조종사들은 실전경험을 쌓으려는 캐나다 공군의
희망에 따라
교환 프로그램으로 미 공군에 배속되어
실전을 경험했었다.


이 교환 프로그램은 미 공군이 미 해군이나 해병대와도

공동 실시하는 것으로 미 최초 지구 선회 우주인 미 해병대
조종사
존 글렌 중령[후에 상원의원]은 F-86으로 출격하여
9일 간 미그기 3기를 격추하였다.


그렇지만 캐나다산 F-86기는 한국 전선에 출동했었다.

이 캐나다 제 F-86기들은 캐나다 조종사들이 조종하지 않았었다.


말이 왔다갔다해서 이상하지만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캐나다의 공중 곡예팀 골든 호크팀이 운용하던
황금색의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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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항공전 최고 스타 미국 노스 아메리칸 사
F-86기부터 알아보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미 최신예기 F-86는 아직 미국에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1월부터 북한 상공에서 소련제 미그기가 
도전해오자 미군은 그 예기치 않았던 공산기의 성능에 경악했다.


그 전투기는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한국 전장에 투입한
어떠한 전투기보다도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놀란 미군은 본토에서 F-86A기를 가져와 긴급 투입했다.

미그 15기가 F-86보다 속도나 상승력에서 약간 나은 점도 있었지만

사격 조준 장치라던가 엔진의 내구성등, F-86은 미그 기보다는

한 수 위의 전투기였다.


이 신예기가 투입되어서야 겨우 미그 15기의 위협을
압도할 수 있었다.


F-86은 3년 가까운 6·25전쟁에서 대활약을 했었다.

뛰어난 비행기의 성능과 우수한 조종사의 솜씨로 미공군은
공산 공군에게
 10대 1의 우수한 전과를 거두어 800기의
공산 적기를
북한 상공에서 격멸했다.

[요즘 들어 이 격추율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설도 나오고 있다.]


F-86기는 2차 세계 대전의 최우수기라는 평가를 받은

F-51 무스탕 기를 탄생시킨 미국 노스 아메리칸 항공기
제조회사
가 미 공군이 내건 까다로운 스펙에 맞추기위해서
고심스럽게 개발해서 한국전쟁 2년 전에 탄생시킨 전투기이다.


F-86 디자인에는 전후 미군이 독일에서 압수해온 Me-262기의

설계 기술이 대폭 유입되어서 활용되었다.

제비 날개처럼 뒤로 제켜진 후퇴익이나 수평타등은
독일 기술 차용의
결과였다.



메사슈미트 Me-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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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선에서의 대 활약은 F-86기를 세계 각국의 공군들이

욕심내는 전투기가 되게 하였다.



영국 공군의 캐나다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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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나 일본 대만은 물론 아시아나 중동, 남미, 유럽의
여러 나라가 F-86기를 자국 공군의 주력기로 선택했다.


다시 말하면 6·25전쟁의 활약을 바탕으로 F-86기는 50년대

세계의 대표 전투기라는 명예를 누릴 수가 있었다.


실전에서 F-86기는 세월이 한참 흐른 1972년대
인도와 파기스탄의 전쟁에서도
사용될 만큼 장기간 사용되었다.


노스 아메리칸 회사는 총계 10,000기
정도의 F-86기를 생산해냈다.

이 회사는 나중에 록웰 인터내셔날이라는 회사와 합병했고

이 회사는 나중에 보잉사에 합병되었다.


여기서 캐나다 산 F-86기에 대한 소개를 한다.

최신 F-86기의 성능을 탄생 때부터 지켜본 캐나다는

1948년 미국과 교섭하여 노스 아메리칸 회사의 전투기를

캐나다 내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추진했다.

생산을 담당한 캐나다 항공기 회사는 몬트리얼 소재
캐나다에어[CanadAir]
항공기 제작사였다.


이미 상당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던 캐나다 회사는
10년간 6가지 모델의
F-86기를 생산해냈다.


캐나다 산 F-86기의 총수는 2,000여기에 달한다.
[캐나다 산 F-86 후계기도 역시 미국 F-104의 캐나다
라이센스 생산형이었다.] 


캐나다는 F-86기의 생산에 비록 미국의 기술을 가져왔지만
점차 엔진을 포함한
부품등 모든 것을 100% 캐나다 국산으로
제조했다.


캐나다는 F-86앤진까지도 국산화 했다. -캐나다제 오렌다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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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산 F-86기들은 성능이 좋다는 평판이 퍼져서
영국은 물론 독일이나 터키 그리스등에 수출했었다.



그리스 공군의 캐나다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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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캐나다 F-86기를 도입한 국가 중에 놀랍게도
F-86기를
생산하던 미국도 있었다.


미국은 캐나다 F-86 60기를 도입해서 대부분을
한국 전선으로 보냈다.

미국이 도입했던 캐나다 F-86기는 미국의 E형에 해당하는

MARK- 2로서 캐나다 산 F-86기의 두 번째 모델이다

총 350기가 생산되어 그중 3기는 영국으로 보냈고
캐나다 공군이 287기를 구입했고
 60기는 미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한국 전선으로 다시 이동했던 캐나다 F-86기들은 물론
미 공군이 사용했으나
이 중 20기는 6.25 참전
남아연방[남아공] 공군에게 대여되었다.



남아연방[남아공]의 캐나다제 F-8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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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연방 공군은 1950년 가을부터 참전하여서 유엔군의
진퇴에 따라 한반도의 여러
기지를 전전하며 싸웠었다.


전쟁내내 F-51기를 가지고 출격했으나 1953년 1월 오산 기지에서

미군으로부터 F-86을 인수받아 훈련을 마치고 그 해 3월 11일부터

압록강 상공에 출격했다.


[일부 외부 기록은 이때 남아공 공군이 F-86F 기로

기종 전환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정보다.]


남아연방 공군은 한국 전쟁중 힘들고 위험했던 미션을
수행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참전 총 97기의 F-51기가 참전해서 이중 74기의 손실을
입었고
 34명의 조종사와 다른 승무원 두명 등 합계 36명이

전사했었다.



남아연방의 한국 참전 F-5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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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공군은 전쟁의 종료를 앞두고 수개월 동안
운용했던 F-86중
4기가 전투 출격에서 격추했다.


남아공 공군은 전쟁이 종료되고 얼마 후 F-86기들을
미 공군에게 반납하고
귀국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조종했던 캐나다제 F-86의 성능에 크게 만족하여

귀국 후 미국아닌 캐나다로부터 더 신형인 마크 9형의 F-86기
34기를 도입했었다.



남아연방의 조종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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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매니아들에게 6·25전쟁중  유엔군의 전투기가 모두
미제 아니면 영국제로만
알려져 있지만 캐나다제의
최신형 전투기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져 있지않다.

캐나다제 F-86을 생산했던 캐나다에어[Canadair]는
현재 BOMBARDIER AEROSPACE로 변신해서 중거리
여객기들을 생산하고 있다.
몇년전 한국의 저가 항공사에서 이 회사 제품인
터보 프롭 여객기를 구입했었다.


봄바디어 터보프롭 중거리 여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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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를 수출하기도 하는등
기술면에서 한국과 상당한 인연이 있다.
그 긴 인연은 6·25전쟁 부터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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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r insurance 2011.10.08 1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조종사의 솜씨로 미공군은
    공산 공군에게 10대 1의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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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비호산에서 빛난 칠성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5.18 09:52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등장으로 초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부대는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앞에 서있던 제6사단 2연대는 후방의 온정리가 점령되면서 연대 전체가 붕괴되는 참사를 입게 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출몰한 중공군은 야간 및 산악전투에 상당히 능숙했고 더불어 피리와 꽹과리 등을 이용하여 아군의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심리전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더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제파식 집중공격을 감행하여 아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은 참전 초기에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중공군 특유의 공격방식을 국군과 유엔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 불렀는데, 사실 중공군 참전 초기에는 중공군의 병력이 아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만큼 많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국군 담당지역이나 교통요충지처럼 반드시 돌파하여야 할 핵심지역으로 가용한 전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따라서 넓게 퍼져있던 아군 입장에서는 중공군이 출몰하지 않아 평온한 지역도 있었지만 중공군과 조우한 부대는 체감 상 엄청나게 많은 적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인해전술은 1951년 봄에 연이어 있었던 세 차례의 대공세 당시였습니다.


  엄청난 변화에 놀란 국군 제2군단은 10월 27일, 가용 전투역량을 총집중하여 10월 29일까지 3일 동안이나 온정리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중공군의 공격에 퇴로가 차단되어 증원부대들 까지 한 번에 붕괴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제2군단은 무참히 붕괴되어가고 있던 예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최대한 수습해 후방인 청천강 방어선까지 철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퇴로를 확보해 주어야 했는데 이때 구원투수로 평양탈환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 제7사단(칠성부대-七星部隊)이 나섰습니다. 당시 육군 예비로 영변 일대에 집결하던 제7사단은 제2군단이 붕괴되어 가자 10월 29일부로 제2군단으로 배속을 전환하여 군우리(軍隅里)로 출동합니다.


[제7사단이 위기를 막기 위해 출동합니다.]


  위기가 고조되어 가던 11월 2일, 제7사단은 청천강 상류지역을 감제(瞰制)할 수 있고 군우리에서 안주와 순천에 이르는 도로와 철도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해발 622미터 비호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곳을 중공군이 점령한다면, 제8군의 후방으로 향하는 통로가 순식간 개방되면서 아군 전체가 일순간 붕괴될 수 있는 결정적인 지형이었으므로 제7사단은 반드시 사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4개 사단으로 편성된 중공군 제38군(군단급 부대)의 선두부대가 제7사단 방어진지로 돌격하여 들어왔습니다.


  전쟁 중반기 이후에서나 볼 수 있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비호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제7사단은 최초 중공군의 공격에 잠시 정상을 허락하였지만 반격을 가하여 즉시 되찾고 끈기 있게 방어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에 결국 11월 5일 정상이 다시 중공군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중공군이 청천강 후방으로 곧바로 진출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을 잘 알고 있던 신상철(申尙澈) 제7사단장은 11월 6일 08시, 모든 역량을 총 집중하여 비호산 정상을 다시 탈환하였습니다. 이처럼 2차례의 공방전에서 패배한 중공군 제38군은 서서히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인근의 중공군 제39, 40군도 공세를 멈추었습니다.


[제7사단의 선전으로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였습니다.]


  비호산 전투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라는 상징성과 함께, 제8군 전체를 위기에서 구출한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중공군은 제1차 공세를 통해 제8군 전체를 일거에 격파하려 하였으나 운산, 온정리, 운산 일대에서 일부 아군부대를 격파하는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을 뿐입니다. 이후 밝혀진 여러 자료에 의하면 11월 5일을 끝으로 중공군의 보급역량이 바닥나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힘들었다고 밝혀졌지만, 중공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국군 제7사단의 용전분투가 없었다면 청천강 방어선 구축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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