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0.04.27 미 철도 수송병의 참전 사진첩 1편 (7)
  2. 2010.04.06 1사단의 운산 탈출과 미 90mm 고사포 (10)
  3. 2010.03.31 제 2차 행주산성 전투 (12)

미 철도 수송병의 참전 사진첩 1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4.27 08:14

미 철도 수송병의 참전 사진첩 1편


미군 철도 수송부대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드웨이 M.맥린 씨의 참전 사진 앨범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

그는 신혼때 군에 징집되어 육군 수송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먼 한국의 전장으로 보내졌다.

한국에 파견 된  맥린 씨는 서울 용산 중학교에 자리잡은 미 철도
수송부대 사령부에서 근무하면서 경원선과 경춘선을
따라 전방을 오가며 물자와 인원를 수송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그는 한국근무중 많은 사진을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다.
인생의 황혼녁에 온 그는 프맄커스에 그의 참전 사진을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있도록 하였다.


한국인들에게는 특히나 과거가 회상되는 많은 사진들이 있었다.
그의 사진이 너무 많아 장차 몇 차례에 걸쳐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다.

오늘은 그 첫번째 사진 앨범이다.


1952년 2월 어느 추운 새벽 3시 30분, 
새신부 메워리에게 작별을 하고 열차에 올랐다,


수송학교 동기생들. 왼쪽에서 두번째가 맥린씨.


버지니아주 포트 유스티스의 미 수송학교에 전시된 독일 기관차.
미국이 패전국 독일에서 압수해온 기관차이다.
앞은 그의 동기 밥 윌리암이다.


철의 삼각지 금성 돌출부에서 본 포격전



미 3사단 58야전 포병대대의 포격.
적진 후방 계곡에 집결하고 있는 중공군에게
제압 사격을 하는 중이다.
앞은 맥린씨의 처남 제리 하트만


경전차 M 24 채피에 장치된 40mm M-19 대공 기관포.
앞의 포대 옆에서 전방 능선을 방어하는 보병 65연대를
화력지원하는 제 3 대공포대대 소속이다. 


같은 부대의 M 16  Cal. 50 네 문으로 구성되어있다.


1953년 전곡역


경춘선의 청평역


경춘선의 풍경.
앞에 보이는 산은 현재 스키장이 있는 천마산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선 보인 디젤 기관차.

대광리에서 서울로 돌아가던 맥린씨가 보급 물자를 싣고
전방으로 가는 이 기관차를 신탄리역[경원선 연천 북방]에서
촬영한 것이다. 

기관차 번호 #2034번인 이 기관차는 다시 미국으로 되 돌아가서
군 부대에서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2007년 포트 실에서 은퇴 뒤에
오크라호마의 철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신탄리 역에 방치된 부서진 기관차


765 철도 수송대대 소속으로서 전방을 운행하는 병원열차다.
미군은 4 편의 병원 열차를 운영했다.


병원 열차는 전방에서 급송한 부상병을 싣고 바로 부산 후방
병원으로 직행했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하는 공비들의 습격에 대비해서 기관차 뒤에
호위병력이 탄 열차가 편성되어 있었고 기관차 앞에 지뢰에
대비해서 샌드백을 장착한 열차도 있었다.


1952년 10월에 촬영한 대광리 전방 연락 사무소.
화차를 개조해서 주거와 사무 겸용으로 사용했다.


1952년 10월 철원 동북방 차탄천 주변에서 벌어진 야간 전투 중 
맥린씨가 멀리서 촬영한 조명탄 사진.


일본 휴가 - 서울에서 대형 수송기 C 124로 도쿄로 직행.


맥린씨의 일본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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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귀대하는 중에 들여다 본 C 46 조종실
.

1952년 대광리에서 돌아 오던 열차에서 찍은 철도변 열차 잔해들.
이 지역이 공산 통치아래 있을 때  미 공군기에게 공습당한 것들이다.


다른 잔해들


1951년 6월

6·25전쟁 발발 직후  미 폭격기에 의해서 파괴된 철도를 미 65 공병대대가
다시 수리해서 미군이 사용하다가 한국 정부에 기증하는 기념식. 

첫 여객 열차가 통과하는 순간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프리트 사령관이 참석했다.


다수 요인들이 참석했으며 밴드까지 동원한 성대한 기념식이었다.


아이젠하우어 대통령 당선자 방한을 환영하는 장식을 하는 시내 전차.
한국은 전쟁에서 빨리 발을 뺄 생각을 하는 아이젠하우어 당선자를
한껏 환대하려 했으나 그는 미군들만 만나고 돌아갔다.
전차 앞은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이다.


한강다리 입구의 아이젠하우어 당선자 환영 프랑카드


주한 수송 사령부가 있던 용산 중학교. 바로 뒤는 지금 집들로
빽빽한 용산동 [해방촌]일대이다.


용산 중학교 입구 -부대 사령부가 있던 곳


맥린씨가 사령부 마당에서 올려다 본 남산의 서쪽
지금의 용산동과 후암동일대다



어느 추운날 남산 서쪽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
이 개천을 따라 길이 생겨 해방촌에서 후암동
으로  넘어가는 거리가 형성 되었다.

우측 상부에 사령부가 있는 용산중학교가 보인다.


맥린씨가 특별히 추억하는 랄프 릴리.

오크라호마 출신의 인디언으로서 태평양 전쟁의 노병이다.
전방 근무를 자원해서 5 RCT에 전출을 갔다.
맥린씨는 그를 서울역에서 전송했고 그는 곧 편지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몇십년이 지난 뒤 그는 전 5 RCT 대원으로 부터 그가 전출
그날 밤에 그의 호에  떨어진 중공군의 박격포탄에 전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진을 올린 맥린씨가 근무하고 있는 모습.


맥린씨와 같이 근무한 한국인 통역  이 용식씨.

멕린씨는 미군이 구축한 철도 시스템을 한국 정부에 기증했을 때
이 용식씨도 한국 정부 간부 공무원이 되었다가 나중에
대우 그룹의 CEO로 근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즐거운 서울 근교 나들이 - 남양주군의 유릉에 간 동기생 팻 캐네반이
석상위에 올라가서 장난치고 있다.


지게를 지고 포즈를 취한 또 다른 동기생  스티브 월타스 .


또 다른 수송학교 동기생 밥 윌리암.[앞의 독일 기관차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한 동기생]


한강이 보이는 서빙고 역에서의 동기생 찰리 맥고빈.
역 주변이 아파트로 포위된 지금과  너무 달라 보인다 .


미군들을 돌봐주던 하우스 보이들 .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진 한국의 소년들에게 마음대로 먹을 수있고
과자와 용돈도 생기는 이 직업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1953년 사령부 운동장에서 한국인 직원들 가족을 모두 초빙해서
성대히 가진 부활절 잔치.


부활절 잔치에 참석한 직원들의 어린이 가족들


부활절 잔치에 예쁜 꼬까옷을 입고 참석한 두 여자 어린이


.


다시 찾은 철의 삼각지대 -멀리 철원평야 건너 백마고지가 보인다.


철의 삼각지에 배치된 155mm 포


철의 삼각지대에서 촬영한 M 46전차


H 5 시콜스키 헬리콥터. 

비가 오는 데도 긴급 부상병 구조 후송 임무를 띄고
전방으로 날아왔다.


맥린씨가 구글을 통해서 담아본 차탄천과 그 북방 백마고지
주변의 철의 삼각지대

- 2 편은 곧 소개합니다 -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지략 2010.04.29 2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퍼갑니다^

  2. 꽃편지 2010.05.05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퍼갑니다. 60년전을 떠 올리게하는 사진첩 !.

  3. custom logos 2011.06.22 16: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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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단의 운산 탈출과 미 90mm 고사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4.06 07:11

  세계 포병 전투사에서 가장 풍성한 이야기꺼리를 남겼고, 그래서 포병 밀리터리 매니아의 최고 관심을 받고 있고, 또 그래서 그 프라 모델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는 포병 포는 독일 군이 사용했었던 88mm 포이다.




[88mm 포를 자세히 소개하는 동영상이다.]


  이 포는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태어나기는 고사포[지금은 대공포라는 말이 더 일반화 되었지만 이 대구경 포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고사포로 통했다.]로 태어났다. 개발의 주체도 육군이 아닌 독일 공군인 루프트바페였다. 1928년, 88mm 포는 지금 세계 전차포의 주류를 이루는 120mm포를 개발한 독일 라인메탈사에 의해서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다.



[일 라인메탈사의 88mm 포, 대량으로 생산되어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차 못지 않은 큰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 88미리 포를 세계 역사의 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 것은
독일 육군이었고 그 신화적 명성은 적기 격추가 아니라 적 전차의 격파로 얻어진 것이다. 이 88미리 고사포는 스페인 내전 시부터 히틀러가 파병한 콘도르 레지온 부대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지상 목표 포격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부터였다. 이 전격전에서 88mm 포의 지상 목표 타격의 효율성에 눈뜬 사람은 프랑스 남부를 휩쓴 기갑사단을 지휘했던 에르빈 롬멜 장군이었다. 88미리 포의 위명(威名)을 터뜨리기 시작한 것은 북 아프리카의 광활한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 전투에서이다.



[독일 88mm 포.1분간 20-24발의 속사가 가능하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사령관 롬멜은 부족했던 독일 전차의 전력을
이 88mm 포를 최대로 활용해서 메꾸었다. 롬멜은 키가 커서 노출이 잘 되는 88mm를 땅을 파고 묻어 포신을 1m도 정도 높이로만 노출 시키고  이것마저도 천막천으로 덮어서 북아프리카에 흔한 모래 언덕으로 위장해서 사용했다. 그는 리비아 전투에서 영국 전차들을 유인해서 단 하루만에 유인에 걸린  영 전차 300대중에서 230대를 대파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일군은 리비아와 이집트 전선의 여러 곳에서 영국 전차대를 교
묘히 유인해서 이 매복한 88mm포로 전멸 시키자 그 공포의 충격이 전 연합군에게 전파되었었다. 장사정의 사거리에 막강한 파괴력을 가진 독일88mm에 비해서 구경이 40-60mm정도의 초기 영국 전차들은 상대가 되지가 못했다. 전차포 사거리 포 밖에서 광선처럼 날아온 거대 폭탄을 맞고 마치 도끼에 찍힌 정어리 통조림처럼 산산조각이 났었다.




88mm 포의 귀재'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88mm포가 지상 목표 타격에 큰 활약을 한것은 88mm가 가진 또 다른 특별한 기능때문이기도 했다.
88mm가 육공 양면에서 대활약 할 수있었던 것은 대공포답지 않게 포의 고저각 운신이 엄청나게 컸었다. 즉 대공사격을 위해서 포신을 90도 가까운 고각으로 올릴 수도 있지만 고지 잠복 진지에서 포신을 수평 아래로 내려 산 아래 접근하는 전차를 타격할 수 있는 마이너스 10도 각도의 저각 사격도 가능했다.


  전쟁 초기에는 타국의 고사포들은 이런 융통성을 발휘하기 힘들었기에
88mm 포를 그렇게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88mm 포는 지형상 전투 거리가 짧은 유럽 대륙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못했지만 광활한 소련 전선에서는 대량의 적 전차 격파로 다시 대 활약을 했다. 물론 88mm가 지상목표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본연의 대공기능에도 충실했다.


  전쟁 후기 독일 영공을 밤낮없이 휘젓고 다닌 영미군의 대형 폭격기들은 포함한 많은 항공기들이 이 88mm 포가 쏘아 올린 무수한 탄들의 탄막에 걸려 격추되었었다.




[독일 88mm와 120mm 포가 터뜨리는 치열한 대공 탄막을 결사적으로 통과하는 미 B-17 폭격기대]


  미군에도 88mm 포와 비슷한 대공포[고사포]가 있었다.
90mm M2 고사포다. 미국이 제공권을 확실히 틀어쥐지 못했던 태평양 전쟁초기. 이 90mm 고사포[구형 M1]는 미드웨이나 과달카날등에서 공습해오는 일본군 폭격기나 전투기들을 상대로 포문을 열었었다.




[1944년. 오키나와, 대공 경계 중의 90mm 고사포]


  1943년도에 출현한 개량형 M 2 형은 88mm처럼 수평아래 저각 사격이 가능했다.덕택에 유명한 발지전투에서 직접 사격으로 독일 타이거 전차들을  격파하는 롬멜식 묘기를 부리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트기의 시대가 오자 대구경 고사포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미 90mm 포는 6·25전쟁에 참전해서지막 은퇴 무대를 장식했다. 6·25전쟁중 한국에 전개된 미군의 90mm 고사포는 독일의 88mm 포와 같이 대공 임무가 아니라 지상 임무에 동원되어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미 M-2 고사포의 지상 목표 포격 준비]


  90mm 고사포는 윌리암 헤닉 대령이 지휘하는 제 10 고사포 포병단
그룹의 한 포대로서 한국에 도착해서 있을 지도 모를 북한 공군의 부산 폭격에 대비해서 잠시 부산 영공 방위에 투입되었었다. [원래의 고사포병단에 다른 포병대대를 혼성했기에 고사포 포병단 그룹이라는 임시 명칭을 붙였다.] 포병단 그룹장 윌리암 헤닉 대령은 독일 이민의 후손으로서 미 육사 졸업생이다. 한국에 오기 전 해안 포대장등 다양한 포병 지휘관의 이력을 쌓은 베테랑이었다. 같이 북진하면서 손발을 맞춰온 백선엽 장군의 평에 의하면 아주 겸손하고 노련한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제 10 고사포 포병 그룹은 구성이 독특하다.


제 78 고사포 대대  [90mm 고사포 18문]

제 9야포 대대 [155mm 포 18문]

제 2 중박격포 대대[4.2인치 박격포 18문]


  1950년 한국에 도착했던 제 10 고사포 포병 그룹은 미 1군단의 군단 포병으로서 부산 방공 임무를 마치고 그해 9월 다부동 전투에서 선방했던 한국군  1 사단의 지원 업무를 부여 받았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헤닉 대령은 ”내 평생 국군 1사단과 합동 작전을 할 때 최고로 잘 싸웠었다“고 회고했다고 백 선엽 장군의 자서전은 밝히고 있다. 이 미국의 고사포가 국군 1사단에 배속되어 북진하며 싸웠던 기록이 백선엽 대장의‘군과  나’라는 자서전에서 잘 소개되어 있다.



  [백 선엽 장군의 회고록 -

  장군의 사진은 휴전회담 대표시 사진]

  10 고사포 포병 그룹은 유엔군이 인천 상륙 직후 백선엽 장군의 1 사단이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후방으로 돌입하여 보급선을 끊어 궁극적으로 적 3개 사단의 적을 붕괴시키는 공격 작전 때부터 막강한 화력 지원을 했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옛 주둔지 임진강 전선으로 복귀한 1사단은 이 10 고사포 포병 그룹과 함께 북진의 길에 올랐다. 평양 선두 탈환을 목표로 쾌속 진군하는 1 사단에 이 고사포 포병 그룹이 동행하며 지원을 했다. 북한군은 평양의 남방 15 킬로미터에 있는 지동리에  밀집된 토치카로 종심(縱深) 깊은 주 저항거점을 만들고 대기 하고 있있다. 방어선의 1사단이 12연대를 선두로 하여 야습할 때 10 고사포 포병 부대는 대규모 화력 지원으로 이 북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일조를 하게 하였다.


  평양을 탈환하고 다시 북진 길에 올라 통일이 바로 눈앞에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거 개입이라는 큰 장벽을 만났다. 백선엽 장군은 제 2군단장으로 전보 되었으나 중공군의 매복 공격으로 전선이 위급하자 다시 1사단장직으로 되돌아갔다.그 때 1사단은 평북 운산에서 며칠째 중공군과 치고받는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사단 선두의 제 15연대는 이미 중공군과의 힘 부치는 전투로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1950년 10월 31일, 다시 사단장이 된 백 선엽 장군이 운산의 1 사단을 찾아 갈 때 운산 주변 산악은 중공군들이 미 공습을 방해하느라 여기 저기 피운 산불로 연기가 자욱했었다.연기가 뒤덮은 골짜기와 산등성마다 우글거리는 중공군 병사들을 볼 수 있었고 살기(殺氣)마저 느낄 수가 있었다. 백 장군은 먼저 초등학교에 자리 잡고 있는 미 포병 사령부를 찾아가서 헤닉 대령부터 만났다.

  헤닉 대령은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헤닉 대령은 정색을 하며 경고했다. "적이 계속 아군의 틈새로 파고 들어와서 포위망을 조이고 있습니다. 오늘을 견디기가 힘들 것입니다. 사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아직 사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백 선엽 장군은 "왜 그리 투지가 없습니까?" 하며 못마땅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나의 정직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오늘 중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한국군 1 사단과 우리 미군 지원 부대는 전멸 할 것입니다."  즉, 그날  밤 안으로 운산 아군을 단단히 묶어 버릴 중공군의 포위망이 완성 된다는 경고였다.


  노련한 헤닉 대령의 진지한 경고에 그제야 충격을 받은 백 장군은 1사단 연대장들을 만나보고 상황이 엄중함을 실감했다. 그는 즉시 국군 1사단이 배속되었던 미 1군단 사령관 밀번 장군을 면담하고 의견 상신을 하고 야간 철수를 허락받았다.




[국군 1사단장 백선엽 장군과 미 1 군단장 밀번 장군]


  그날 밤 후방 영변의 1사단 사령부에서 백 선엽 장군은 불안속에
1사단의 철수가 잘 진행되기만을 기도했다. 단지 북쪽 1 사단 쪽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철수 작전이 중단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다소 안심을 했을 따름이다.


  한편 미 1군단 사령부에서 철수 명령을 받은 1사단은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밤을 도와 전 사단이 철수를 개시하였다. 헤닉 대령의 고사포 포병단 그룹은 1만 5천발의 포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백 선엽 사단장이 철수를 건의하러 가면서 부탁했던대로 적절한 사격 계획을 세워 1사단이 철수 작전을 개시하기 전부터 주변 산악에서 칼을 갈고 있던 중공군들을 이 잡듯한 지역사격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6.25 전쟁의 미 90mm 포 사격]

  헤닉 대령은 눈 한번 붙이지 않고 온 밤을 지새며 포사격을 직접 지휘했다. 표적 선정과 각 포대의 사격까지 직접 현장을 뛰어 다니며 격려하고 지도했다. 거리의 멀고 가까움, 표적의 크기와 셩격에 따라 보유했던 90mm 고사포와 155mm, 그리고 4.2 박격포의 포탄들의 불줄기를 표적에 들씌웠다. 90mm는 고사포는 표적에 따라 융통성있게 조준경으로 포착한 적군을 직사로 포격하거나 일반 곡사포와 같이 곡사를 해서 중공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일반 곡사포와 달리 째지는 듯이 날카롭게 울리는 90mm 고사포의 포성은 중공군에게 상당한 공포심을 주었을 것이다.


  한국군 1사단에게는 헤닉 대령의 고사포 포병단 그룹뿐만 아니라 미 6전차대대의 대대장 그루던 중령이 지휘하는 50여대의 최신형 M46 전차까지 있었다. 엄청난 포병의 지원과 미 전차대의 엄호가 국군 1사단의 철수를 도왔다. 중공군은 그날 밤 한국군 1 사단도 포위하고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가 상상을 초월한 대 포격에 단념하고 불벼락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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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2월초, 송시륜이 지휘하는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철수한 미 해병 1사단
섬멸에 미련을 못 버리고 함흥평야까지 쫓아 왔었다.

미군은 항구를 떠나면서 
남은 포탄을 모두 소진시키기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여분의 포탄을 모두 뒤 쫓아온
중공군 측에 퍼부었다.

이 어마어마한 포격에 간 떨어지게 놀란 송 시륜의 중공군은
미 해병이 증원 군을 받아서 반격하는 줄 오해하고
추격을
중단한채 허겁지겁 대피했었던 전사가 이날 밤 불벼락을 맞은 중공군의
행동을 추측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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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밤  미군이 무자비한 포격으로 소비했던 포탄은 무려
1만 3천발이나 되었다.




[6.25전쟁에서 적진을 타격하는 90mm 고사포]

  헤닉 대령은 1사단의 철수가 다 완료된 후에야 포병들을 철수시켰고 마지막으로 포병 사령부도 철수시켰다. [미측 기록은 철수가 이틀간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있다.]어마어마한 화력의 지원 아래 국군 1사단의 3개 연대는 무사히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나 운산 10킬로 후방에 있는 입석-영변으로 모두 안전하게 철수 할 수 있었다. 포병 화력의 덕을 입어 철수하였던 1사단은 운이 좋았다. 며칠전 바로 옆 산줄기 넘어 1사단 우익에서 중공군의 잠복 기습에 크게 패하고 철수했던 한국군 2군단[6,7,8사단]이 비워 둔 공간을 채우려 진격해 들어갔던 미 1기병사단의 8연대는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 섬멸적 타격을 입었다.


  이 연대에도 1사단과 같은 신속한 철수 명령이 내렸지만 집중적인 10고사포 포병 그룹의 사격에 국군 1 사단에 손을 못 대게 된 중공군이 방향을 바꾸어 전력을 미 연대 공격에 집중했기 때문에 포위망을 탈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최선봉의 3대대는 겹겹으로 포위당해 1기병 단장 게이 소장이 눈물을 머금고 구원을 포기했던 비운의 전멸 대대가 되었다. 900명 대대원중 700명의 대대원이 전사했거나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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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대 실종자 상당수가 포로가 되었다.중공군은
대다수가 부상자였던
미군 포로들을 북한군에게 넘겨주었고
북한군은 수백 명의 이들 포로들을 강변의 모래 사장에
끌고가 모두
학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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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련한 헤닉 대령이 불안한 전세를 읽고
철수를 강력 건의 한 것이 전쟁 발발 초기 임진강 전선에서 사수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 때문에 시간을 끌다가 1사단이 붕괴당한 쓰라린 경험을 했던 백 선엽 장군의 신속한 결단을 하게 했고 고사 포병단 그룹의 이은 활약이 1사단을 구조해 냈던 것이다. 8군 휘하에서 한국군 사단들 중에 별 피해 없이 건제를 유지하고 탈출했던 사단은 1 사단이 유일하다. 이 공로로 헤닉 대령은 미 정부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수여받고 나중에 장군으로 진급하여 근무하다가 은퇴했다.



[전쟁기념관에 숨어있듯 조용히 전시 된 M-2 고사포]

 

  고사포 포병 여단은 전선 교착후 1사단과 작별하고 중부전선에 배치되어 높은 고각 사격이 가능했던 90mm 고사포는 보통의 곡사화기들이 다루기 힘든 높은 고지의 적을 포를 높이 올려 쏘는 직사 사격이나 곡사 사격으로 강타하며 보병사단을 지원했다. M2 고사포는 6·25전쟁 뒤 국군에게 제공되기도 했지만 현역에서 은퇴했다. 유도탄이 도래한 신 시대는 그런 대형 대공 무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6.25전쟁에서 미 90mm 고사포의 지상 목표 포격 실적을 
독일 88mm 고사포에 비교해보면 그렇게 화려하거나 거창하지는 않다. 그러나 90mm 고사포는 한국 제일의 정예 사단을 적의 포위에서 구출해낸 공적을 세우고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의 마지막 무대를 알차게 장식했다고 하겠다.



[전쟁 기념관의 M 2 고사포. 한국 수호의 한 공신인데 자기를 몰라보는 관람객들의 무심한 눈길을 서운하게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이 포는 서울 용산 전쟁 기념관에 가보면 볼 수가 있다.
별다른 설명도 없어 아무런 특징 없는 무기로 여긴 관람객들이 지나쳐 버리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국군 1사단을 중공군이 만든 죽음의 함정에서 구출했다는 이 고사포가 가진 역사의 향기를 맡아 보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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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mi5 2010.04.06 0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전쟁이 난다면 어찌될까 하고 생각해보네요..
    갑자기 끔찍해지네요..
    절대 그런 일 없어야되겠죠..^^

  2.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07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시에 작전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런 작전을 원할하게 해주는 것은 장비와 물자다.
    우리는 자주국방을 말로만 외치지 말고 현대식 최신 장비를 갖추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3. 배상원 2010.04.08 1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기념관을 갈때마다 전시된 포들을 무심하게 지나쳣는데 다음엔 유심히 보아야 겠네요 ㅎㅎ

  4. 독립군토벌대장 2010.10.29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백선엽이 개새기 목을 잘라 버리고 가족을 전체 매장시켜 버려 그 치욕을 너희 피로써 갚을 것이다

  5. 독립군토벌대장 2010.10.29 1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드시 갚는다 백선엽 백인엽이 북한에서 일제앞잡이 처단에 쫒겨 남한으로 내려와 이승만이의 반공주의에 되살아나 예전 독립군 토벌의 자랑스러운 경력은 내세우지 않은 채 개한미국의 장군으로 33의 나이에 합참의장이 되었다지? 역시 사람은 시대를 잘 만나고 눈치가 빨라야 하는구나 하지만 당신 가족과 당신의 목 그리고 당신이 죽고 난 후의 유골도 반드시 찢고 갈아 역사의 치욕을 반드시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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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행주산성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3.31 10:51
 

[인천 상륙 작전과 행주 산성 도하에 사용된 LVT 앨리게이터]


  1593년 2 월 12일 한양으로 들어가는 수운[水運]의 통로인 한강을 옆에 둔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왜군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왜군 수 천 명이 전사 했다.
한국 역사에 길이 기록 된 행주 대첩을 말한다.


[강건너 한강 남안에서 본 행주산성]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카를 쫓아낸 명군 이 여송이 한양 공략을 목표로 남하하자 수원 독산성에 있던 권율 장군은 이 여송군과의 협동을 목적으로 은밀히 행주산성으로 이동했었다. 권율 장군은 이 행주산성을 한양 탈환을 위한 중요한 교두보로 보았었다.  한양에 가장 가까우면서 점령 가능한 방어 거점이었고 ‘북에서 내려오는 명군과도 연결이 가능할뿐더러 한강을 통해서 강화도를 확보하고 있는 김 천일 의병대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가 있다고 판단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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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의병들은 완전히 한강의 수상권을 틀어쥐고 지금 흑석동
앞에까지 오르내리며 왜군들에게 무력 시위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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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여송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의 기습 공격에 패배하고 후퇴했다. 명군을 내친 왜군은 여세를 서울의 측방을 노리는 권율 부대를 30,000의 대병력을 동원해서 공격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이 행주산성은 방어 시설이 미약했다. 주변을 흙으로 만든 낮은 토성이 둘러있을 뿐,문루[門樓] 같은 것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 허술한 곳에 방어진을 친 조선군 병력은 권율의 부대와 강화도를 근거지로 했던 김 천일의 의병과 처영의 승병이 가세한 약 2,300명이었다. 이들은 바삐 허술한 토성 주변에 목책을 세우고 방어를 강화하였다. 행주나루 인근의 마을 주민들도 모두 성에 들어와 전력을 보탰다. 1593년2월 12일 이른 아침, 우키다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한 왜군이 30.000만의 대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해왔다.




[우키다 히데이에 - 당시 스물 두 살 애송이였지만 57만석의 히젠 영주였으며 히데요시 5대로의 하나였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에게 대항했다가 패하고 남양 하지죠지마[八丈島]로 유배되어 50년간 살다가 죽었다]


  이 병력은 고니시 유키나카가 부산에 상륙해서 한반도를 거슬러 한양을 지나 평양까지 진격했을 때 거느렸던 병력의 두 배에 달한다. 왜군들 역시 자기들 목에 바짝 붙어 비수를 겨누는 행주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후환의 근절하고자 대군의 적을 동원했던 것이다. 성의 군과 민은 죽기를 결하고 응전했다. 주민들은 물을 길어오고 돌을 날라 와서 수비병들을 도왔으며 건장한 장정들은 돌을 던지며 전투에 직접 일조를 하기도 하였다. 한 때는 성의 한쪽이 뚫려 환갑이 다 된 권율이 직접 칼을 빼들고 달려가 침투한 적을 베어 물리치기도 했다. 화살이 떨어져가자 경기 수사 이 빈이 두 척의 선박에 화살을 가득 싣고 와서 한강을 거슬러 와서 보급을 했다. 보급을 완료한 이 빈의 두 전선(戰船)은 왜군의 배후에 상륙 할 듯이 위협했다.


  행주산성을 쉽게 먹어치울 줄 알았던 왜군은 기세가 죽고 이 빈의 후방 차단 위협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면서도 용감히 싸운 권율 부대와 행주 주민들의 덕택도 있었지만 이 엉성한 토성에서 왜군을 격퇴한 것은 권율이 한양 공격을 기대하며 가져온 조선의 다연장 로케트포인 화차(火車) 40량과 비격 진천뢰, 수석포라는 투석기[投石機]들의 활약이 컸다. 행주산성 방어에서 화차의 눈부신 활약은 권율이 직접 인정한 것이다.




[행주 산성대첩의 숨은 공신 화차 - 변 이중이 발명했고 권율은 이 화차들을 한양 탈환에 사용하려고 40문이나 가지고 행주산성에 들어갔었다.]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한 왜군 지휘관들은 모두 일본의 역사에서 이름을 올린 쟁쟁한 유명 인사들이다.(우끼다 히데이에[宇喜多 秀家], 이시다 미쓰나리[石田 三成], 고니시 유키나카[少西 行長], 기쓰카와 히데이에[吉川 廣家])


  이 전투에서 선두에서 기세를 올리며 지휘하던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가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져 망신스럽게 부하의 등에 업혀 도망치기도 했다.[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이었다.]  남해에서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에게 연타의 펀치를 먹었던 와카사카 야쓰하루[脇坂 安治]가 바다를 떠나 이 먼 행주산성에 나타났다가 역시 온 몸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고 줄행랑을 놓았다. 나중에 모오리 가문의 모사로서 일본 역사에 기록을 남긴 기쓰카와 히로이에도 큰 부상을 입었다. 도주하는 왜군을 본 권율은 즉각 기병을 풀어 추격해서 130여개의 수급(首級)을 거두었다.


  침략자 왜군을 격퇴하고 360년의 긴 시간이 지나고 그 긴 세월 고요 속에 흐르는 한강을 지켜만 보던 이 행주산성이 다시 한번 귀 터지는 포성에 휩싸인 전장이 되었다. 그 전략적 가치가 다시 주목 받았기 때문이었다. 
동족을 침략해서 형언 할 수 없는 고통의 피를 흘리게 한 북한군대를 내쫓기 위한 UN 군이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9월 15일 200척의 함선들이 기습적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해서 한미 연합군이 적지의 후방인 인천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을 개시했다.



[인천 상륙작전]


  9월 17일 경인가도를 방어하던 북한군을 격퇴해가며 진격한 미 해병대는 아주 중요한 김포 공항을 점령했다. 당황하여 북한군은 위장해서 숨겨 둔 비행기까지 버려두고 도주하였다. 다음 날 해병 전투기 콜세어 기 3개 편대가 일본에서 김포 비행장으로 비래(飛來)해서 작전을 시작하였다.




[세계 최강 대지 공격능력을 가진 미 해병 항공대가 6·25전쟁중 사용했었던 콜세어 기들, 인천 상륙전에 이어 해병대의 장진호 탈출 때 맹활약을 했었다.미 해군도 운용했었다.]


  김포 공항이 점령되었고 이제는 한강 도강 작전이 남았다. 상륙 해병의 일대가 육군과 함께 당시 한강 남쪽에서 유일한  서울시의 일부 도시인 영등포 쪽으로, 다른 일대는 한강에서
도하하여 서울을 서쪽 측면에서 찌르는 작전 계획은 이미 세워 둔 바였다. 도하 할 지점은 김포 공항에서 멀지 않은 행주나루였다. 이 도하를 위해서 해병들은 인천 상륙작전에서 사용했던 수륙 양용 장갑차들을 경인가도를 통해 이곳까지 가져 왔었다. [적으로부터 은폐 된 지금의 개화산 아래가 도하 장비들의 집결지였다.]


  미 해병대는 서울 점령을 위한  한강 도강지점을 세 곳으로 예정하고 있었다. 하류 쪽의 행주 나루와 다음 영등포로 점령이 성공하면 실시할 도하 작전 지점은 여의도 건너 마포 나루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당 동 길을 내려온 동작진 부근이었다. 한강 도하 작전에는 모두 인천 상륙 작전 때 크게 기여했던 수륙양용전차[LVT]들이 활용 될 예정이었다. 이 LVT들은 태평양 전쟁의 많은 상륙작전으로 그 가치를 이미 입증 받은 전투무기였다. 해병대의 수륙양용전차들이 바다가 아니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도강 작전에 동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첫 한강 도하 작전의 임무가 주어진 부대는 미 해병 1 사단 5연대 3대대였다. 3대대는 대대장 태프렛 중령[대령으로 퇴역, 2004년 작고]의 지휘로 월미도에 상륙하여 섬에 주둔하던 북한군들 일축 해버린 정예 부대였다.



[월미도 상륙과 한강 도하 작전을 지휘한 태프렛 중령]


  전쟁 때문에 나룻배의 운행도 중단 된 건너 북쪽 행주 나루는 조용하게 보였다. 나루 우측에 강을 따라 누에처럼 길게 누어있는 행주산성 능선에도 별다른 적정이 보이지 않았다. [미군들은 행주산성을 그 표고를 따라 125고지라고 불렀다.] 그래도 일단 야간을 이용해서 수색대를 보내서 건너 강안을 수색 해보기로 하였다.

  20시 40분, 14명의 해병 수색대가 두 개의 고무보트를 타고 강 건너로 도하하여 수색을 했지만 나루 주변에서 거동 수상자인 민간인 2명을 체포해서 역류했을 뿐, 별다른 적정이 없었다. 4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옆 행주산성 쪽으로 정찰을 나갔던 케숀 소위도 길게 누운 능선 중턱까지만 올라가 보고 아무런 적정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김포 비행장을 탈환당한 북한군은 서둘러서 1 개 대대 병력을 긁어 모아 하필 해병 도강 수색이 있던 그날 오후에 지금  기념탑이 있는 행주산성 정상 부분에 배치해두었던 것이다.
케숀 소위가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수색대장 호튼 대위는 강 건너에 적정 없음을 보고했다.

[케숀 소위는 행주산성 능선 중턱인 이곳을 정상으로 잘못 알았다.]


  이 정보에 5연대장 머레이 중령[중장으로 전역, 2004년 사망]은 그날로 야간 도하 작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기에 일단 중대 규모 부대를 강 건너로 도하시켜 교두보를 확보한 뒤에 익일 5연대 병력과 후속해온 한국군 해병대를 안전하게 도하시키자는 판단 때문이었다.  3대대 1중대가 교두보 확보 부대로 선발되어서 개화산 뒤에서 대기하던 LVT 9량에 승차하여 출동했다. 중대는 엔진 소리도 요란하게 한강 도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LVT가 중간쯤 건너자 행주산성에서 쪽에서 박격포탄과 기관총탄이 비 오듯 날아왔다. 당황한 연대 본부는 도강 중에 적의 화망에 걸린 LVT들에게 즉시 퇴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방향을 돌려 돌아오던 9량의 LVT들은 행주 대교 하류 물속 모래톱에 걸려 그중 네 량이 좌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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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들은 몰랐지만 이 모래톱은 조선 500년 동안 한양의 물류 고속도로였던 한강의 최대 장애물이었다. 무거운 쌀을 싣고 광흥창으로 가던 세곡선이나 무거운 화물을 싣고 마포나 용산 나루로 가던 대형선들은 이 모래톱을 넘지 못해 수면이 최고가 되는 한달 두 번의 사리 때까지 한강 하류 강령포에서 대기 해야만 했다. 조선 수운사에 유명했던 장소가 현대 전쟁에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은 이색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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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상황이 안 좋았던 것은 먼저 건너가서 강변에서 대기 중이던 14명의 정찰대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도주를 시도했던 두 거동 수상자를 사살하는 바람에 그 존재를 적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적의 화력이 아무런 엄폐도 못한 이들 주변에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티니언 섬에 상륙작전을 하는 LVT]


  지휘관 호튼 대위는 장비들을 주변에 은폐시키고 건너편으로 되돌아 퇴각하라고 지시하고 자신도 강에 뛰어들었다. 모래톱에 걸린 4량의 LVT중 두 량은 몸부림쳐서 겨우 빠져나와 김포 쪽으로 철수했지만 아직도 두 량의 LVT는 모래톱에 걸려 있었다. 승무원들은 역시 지시에 따라 수영으로 김포 쪽으로 철수해서 좌초 된 LVT에는 아무도 없었다. 박격포 탄이 계속 강 수면에 떨어져 근탄을 맞은 호튼 대위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부하들에 의해서 비어있는 LVT로 긴급 후송되었다. 그와 그 부하들은 심야에 김포에서 보낸 고무보트로 구출되었다. 그날 두량의 LVT가 좌초되고 강을 건너갔던 정찰대원 한 명이 행방불명되는 피해를 입었다.[그 정찰대원은 숨어 있다가 다음날 구출 되었다.]


  성급하게 서두르다가 좌절을 맛 본 해병 3대대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다음날 새벽 다시 도강 작전을 실시하였다. 도하 작전은 익일 9월 20일 새벽 6시 45분에 개시되었다. 지금 신 행주 대교가 있는 지점이 도강 지점이다. 도하 지점에 대한 포병 준비 사격이 여명과 함께 포병에 의해서 실시되었지만 근탄이 많아 수면에 떨어지는 포탄들도 적지 않았다. 6량의 LVT가 먼저 강에 들어서서 북쪽 나루로 향했다. 적의 박격포 사격이 치열했지만 전부 도강에 성공했다.



[9월 20일 새벽 도하 작전을 감행하는 해병대. 적의 박격포탄이 강 수면에 떨어지고 있다.]


  행주 나루 강변에 도착 즉시 3소대부터 하차하여 행주 성의 긴 능선의 강변을 따라 나있는 오른쪽 오르막 사면을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2 소대는 LVT를 타고 그대로 90도로 길을 오른쪽으로 꺾어 달려 행주산성 능선의 우측에 붙었다. [현재 음식점들이 많은 지역이 공격개시선이었다.] 부대원을 내려놓은 LVT는 장비된 50구경 대공 기관총으로 정상의 적에게 지원사격을 했다. 적의 저항은 격심했다. 특히 적들이 밤새 참호를 파고 기관총 진지를 구축해놓은 강변 쪽 사면을 공격했던 3 소대 쪽에 적의 화력이 집중되어 3소대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김포 비행장에서 출격한 4 기의 콜세어 기들이 기관포와 폭탄으로 공중 지원에 나섰지만 고지에 붙은 북한군은 끈질겼다. 북한군들은 권율 장군이 했듯 행주산성을 성공적으로 방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중대장 맥멀린 대위는 예비대로 보유했던 1소대를 직접 지휘해서 고전하고 있는 3소대 지원에 나섰다. 두 소대는 오르막 능선을 따라 전진을 해서 겨우 5부 능선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중대장 맥멀린 대위까지 부상을 입는 격전을 벌여야 했다.



[행주 산성 전투에서 부상당한 해병의 후송]


  공격을 더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에 비교적 저항이 적었던 좌측 능선을 전진했던 2소대장이 무전 보고를 했다.  저항하던 고지의 북한군들이 퇴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맥멀린 대위는 부상을 잊고 혼신을 다해 부하들을 휘몰아서 행주산성 고지로 돌진했다. 마침내 고지는 해병들에 의해서 점령당했다. 북한군은 무질서하게 행주산성 동북쪽 급사면을 뛰어 내려와 논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이 곳은 현재 인천 공항에 들어가는 공항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있는 곳이다.


  행주산성은 논들에 둘려 싸인 고도와 같아서 은폐나 엄폐없이 퇴각할 수가 없다. 공중에서 지원하던 콜세어 기의 편대장은 회심의 미소를 뗬다. 훤히 노출된 논에 뛰어든 북한군들은 문자 그대로 닭장의 닭들처럼 콜세어 기들의 화력 앞에서 피할 수가 없었다. 콜세어 기들은 번갈아 가며 논 속에서 도주하는 북한군에게 기총 소사와 로케트 공격을 가했다. 콜세어 기의 20mm 기관포는 네 발 중 한 발이 고폭탄이라서 지면에 맞으면 폭탄처럼 폭발하는 위력이 있었다. 논에 핏물들이 흥건해지며 북한군은 이곳에서 지리멸렬해버렸다.




[해병들이 확보했던 행주 교두보를 통하여 서울을 탈환할 병력과 장비가 쏱아져 들어갔다.]


  3대대의 행주산성 고지가 확보 되자 공병에 의해 도하 시설이 설치되고 2대대 병력들이 LVT에 승차하여 도강, 피로 확보한 행주산성을 우측으로 끼고 그대로 능곡과 수색 사이 경의선으로 돌진해서 철로 주변 95고지와 51고지들을 점령했다. [지역을 확보하면 주변 고지부터 점령하는 전술 원칙에 해병은  특히 철저했다. 이 선[先] 고지 점령 원칙 고수가 장진호에서  해병들이 겹겹으로 싸인 포위망을 뚫고 탈출함에 큰 기여를 했다.]




[행주 산성 정상에서 본 95고지. 해병들은 95고지 점령후 오른 쪽으로 진격해서 두 고지를 더 점령하고 이날 작전을 종료하였다.]


  이어서 전차 9량이 도강해서 2대대를 지원하자 이들은 철로를 따라 더욱 전진해서 수색역이 보이는 지점에서 경의선을 감제하는 중요한 대덕산과 망월산을 점령하여 서울로 들어가는 서쪽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보병들과 함께 서울로 전진하는 해병대 M 26 퍼싱 전차]


  두 산을 점령한 뒤인 15시 45분 한강 북방 교두보 작전 종결을 했다. 9월 20일 최초의 한강 이북 교두보 확보 작전에서 적병 200여명을 사살했지만 해병대도 43명이 전사하는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한미 해병대가 LVT를 타고 도하 했었고 나룻배가 오가던 강길에는 지금 큰 행주 대교가 놓여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해병들이 공격을 개시했던 행주산성 후방부이다.]


  한국 해병대는 인천 상륙 작전 뒤 김포공항을 습격하라는 특명을 받고 한강을 건너 김포 반도에 침투한 북한군 107연대를 격멸하고 다음날 9월 21일 한강을 도강해서 연희 고지와 중앙청 탈환의 전공을 쌓았다. 행주 교두보를 확보한 것은 서울 북한군의 서울 방어선의 서쪽 측면을 그대로 두들겨 부수어 서울 탈환의 큰 전기를 이룬 것이다.


  350년 전 한양 탈환을 위한 행주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고 한강을 도강해서 점령했었던 권율 장군이 예지가 정확했었다는 사실을 현대에서도 입증 된 것이 이번 2차 행주산성 전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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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런 2010.03.31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사는곳 근처라 관심이 가게되네요.
    오늘도 좋은 역사 잘 읽고갑니다~

  2. 오지코리아 2010.03.31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행주산성이 왜란때부터 중요한 격전지였군요.
    전쟁이야기는 읽을때마다 재미있긴한데,이젠 전쟁이 없어야겠죠.

  3. oxkm 2010.03.31 15: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새롭네요. 당시에 울 아버님도 성동사는 빨갱이 놈들이 잡을려고 했었다고 하더군요,,,,,
    자랑스러운 곳이라 조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라 지금도 앞으로도 아기고 잘 보존토록 하겠읍니다,,,,,,,,,,,

  4. 꿈꾸는 세상살이 2010.03.31 1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행주산성 주위의 논으로 도망치는 적군이 그려집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행주산성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5. Polaris 2010.03.31 21: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지역은 내가 터줏대감이지,,,,글이야기 눈에 선한 지역 나의 발자취길들,,, 돌뿌리 추억길 지역,,,,,복괴군 후퇴로...

    경사면에,,, 화전 30사단 지역으로 퇴로... 행주산성지역은..... 사춘기시절에 나의 새 사냥터들....고양군 귀신 터줏대감,,,

    눈에 선하다..... 60년대초에,,,, 5.16 군사혁명난후에,,,,, 공기총들고,,,, 멧새.종달새.참새.산비둘기,,,,잡던 시절...

    행주산성 나룻터에,,,, 화전.능곡.백마.일산 파주 원능.벽제.일영.송추....... 고양군 터줏대감 사춘기시절... 한국 정통문화의 산교육장,,,,,


    추억속에 고양군........ 이지역에 항상 가면........ 기분이 이상했던 고양군일대,,,

    화전에서,,, 60년대에,,, 낙하산 쟘프에 사고도 기억이 난다,,,,북괴군 퇴로 들판에서 낙하산 사고,,,,,

  6. Polaris 2010.03.31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춘기시절에,,,, 20대 시절에,,,,, 봄이되면.... 생각나게 하는... 나를 부르는 고양군,,,,,

    아지랑이 피는 이른봄에,,,, 행주산성에 해변가 뚝으로,,, 일산도,,,, 봄나들이 가던,,,, 혼자서 가던 추억길들,,,

    나의 엄마 품속같은곳.... 고양군 곡창지대 하늘을 바라보던 추억속에 하늘,,,,, 달밝은 밤에,,, 친구집에 놀로가서

    보름달보던 추억속에 고양군,,,, 겨울철 곡창지대로,,,, 종달새 잡으로 다니던,,,, 몸보신하던 새사냥터,,,,

    원능.벽제.송추로 새사냥갈때...... 산속에 들어가면 ????????? 무장공비 생각들이 문득 문득 생각에 겁나던 산속들..

    1.21 사태에 무장공비 청와대 루트?????? 근처들도.....지금생각하믄 겁나던 나에길들,,,, 나는 그때 뭣도모르고,,

    고양군 사냥가면.... 붉은 삐라가.... 엄청나게 많은....경찰사갔다주면,,,, 엄청나게 줍어서 갔는데,,, 연필한자루...

    상금주기 바랬을텐데.... *(^-^)*ㅋㅋㅋㅋ

  7. 유 량 2010.05.26 16: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재미있게 잘 읽었읍니다.
    몇가지 건의를 필자와 국방부 해당 사업단에.
    전사를 18세 되던 해부터 읽어왔는 데, 한국전사의 취약점은 전장(battlefield)의 세세한 지도와, 연관되는 전투양상의 시간적 진전(Time-Sequence), 관련부대운용의 상세(부대배치의 상세, 군수,지원, 인접 세력분포, 등등)등의 기호화 표시(: 정확한 전사지도)등이 지극히 해외의 기준급들에 비해 미흡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취약한 예산지원 탓이 겠지만, 이의 지원에 대폭 상향된 예산이 배정되고, Documentation을 수행하는 분들이 여러각도에서, 지원을 받아, 그 이용자가 확대될 뿐만 아니라, 민족/세계의 거대한 전쟁이, 사회에 더욱 많은 인식이 되어 기대되는 사회발전의 수혜를 주기를 기대합니다.

    통상 흔한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종사한 이들이 더욱 나은 사기와 발전을 갖도록 재삼 부탁드립니다.

    . . .

    늦은 봄-여름-가을에 걸쳐 행주산성이 3시방향에서 보이는 위치에서의 김포평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웁다.
    특히 안개낀 날들이나, 가을의 황금 빛 물결들에서. 위의 스토리에서 기인하는 지는 몰라도 이 지역은 이상하리 만큼, 푸르른 서기가 항상 감돌고 어리는 것을 방문자들은 느끼게 될 것. . .

    민족의 성역으로, 다시 태어나고, 연관된 사업이 좋은 관광지로서도 발전되길 기대.

    작성자에 再拜

  8. across the country insurance 2012.06.05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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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심에 감사합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단순히 미국의 교육 기사 이런 종류 공유할 것을 다행으로 ...

  11. survival kit in a can 2012.10.21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늦은 봄-여름-가을에 걸쳐 행주산성이 3시방향에서 보이는 위치에서의 김포평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웁다.
    특히 안개낀 날들이나, 가을의 황금 빛 물결들에서. 위의 스토리에서 기인하는 지는 몰라도 이 지역은 이상하리 만큼, 푸르른 서기가 항상 감돌고 어리는 것을 방문자들은 느끼게 될 것.

  12. indonesia rattan furniture 2012.12.30 2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가을의 황금 빛 물결들에서. 위의 스토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