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을 혼란시켜라! (인민유격대의 남파)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05 11:37

남한을 혼란시켜라! (인민유격대의 남파)

 

김일성은 1948 7남북 노동당연합중앙위원회의 구성, 1949 6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창설, 1949 7 1일 남로당과 북로당(북조선노동당)조선노동당으로 통합 등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거나 통합하여 완전히 평양이 주도하는 권력체계를 확립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해 그간 남로당을 이끌던 핵심 멤버들도 평양으로 넘어가고 남한에는 서울지도부만 남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남정책과 공작의 구심점도 자연히 북으로 옮겨 갔고, 남로당의 혁명 역량은 단지 보조적인 수단으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

 

이처럼 남북 양쪽에서 두 공산당 세력 사이에 벌어진 한반도 적화를 위한 지하공작활동의 주도권 다툼에서 그 구심점은 평양의 김일성 쪽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부터 남로당은 북로당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하위 부서로 들어가 종전의 독자투쟁 노선에서 점차 평양의 노선과 지시를 수행하는 하급 단위조직으로 전략되어 갔다.

 

주도권 싸움에서 뒤쳐지게 되자 고립감과 초조감을 느낀 남로당은 상황반전의 수단으로 무장 유격투쟁을 전개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러한 노선변경은 남한 내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정부가 각종 좌익사건을 계기로 1948 12월 초 국가보안법을 입법화하고, 1949 10월부터 남로당을 불법 이적집단으로 규정해 그들에 대한 단속조치를 취하자 활동영역이 축소된 남로당의 처지에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장 유격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남로당은 194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무력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세포 중 열성당원을 무장시켜 각 지방의 유격 거점으로 입산시켰다. 또 각 도마다 한두 곳을 해방구로 설정하여 북한군이 남침할 때까지 그 지역을 확보토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시기 남한 각지에서 발생한 각종 유격 소요사건은 기본적으로 남로당이 수행한 것이 사실이지만, 큰 틀에서는 북한정권이 무력통일 노선의 전초전으로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 북한 인민유격대 (당시는 빨치산으로 불렸다)

 

Tip.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또는 프랑스어 파르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정규 군사조직을 뜻한다. 즉 적의 배후에서 신속한 이동과 기습을 통해 적에게 피해를 입히며, 일정한 조직체계가 없는 소규모 전투부대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빨치산은 그 당시 좌익 무리의 잔당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속치 빨갱이와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빨치산이란 6.25전쟁 전후에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한 공산게릴라를 일컫는다.

 

 

북한은 대남적화의 선행단계로서 북한 전역을 무력남침을 수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조성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1949 7인민유격대를 조직해 그 요원들을 양성.남파하였다.

 

인민유격대의 남파는 북한군이 강조하는 배합전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전선에서의 전투와 병행하여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비정규전 형식의 또 다른 전투를 유발하여 배후에 제2전선을 형성하려는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의 목적은 적의 동원 및 증원을 방해하여 전후방을 동시에 전장화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하여 격멸한다는 개념이 이었다. 이는 결국 조만간에 있을 북한 정규군의 남침공격을 앞두고 남한 내에서 그에 호응하기 위한 제2전선을 형성할 목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참모들

 

인민유격대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과 경남 지역에 집중돼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남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남한 내 각 지역의 무력투쟁은 이후 한층 격화되었다.

 

1948 11월부터 6.25전쟁 직전인 1950 3월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침투해 온 유격대원 수는 무려 2,400명에 이르렀다.

 



지리산지구 전투부대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표창장.


이들 인민유격대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2,000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지만 나머지 400여 명은 남한 각지의 오지에 틀어박혀 남침 직전까지 계속 저항하였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전방 사단의 일부와 후방 3개 사단을 포함해 총 4개 사단병력과 경찰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였다. 그 때문에 국군은 38도선의 방어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방경계도 허술하게 되는 등 적의 남침공격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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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작전, 중공군이 공세와 유엔군의 철수 – 반격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30 14:15

북진작전, 중공군이 공세와 유엔군의 철수 반격

 

38도선 돌파가 결정됨에 따라 북진작전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원산과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청천강선(희천)까지 진출하였다.

 

여기에 이르자 맥아더 장군은 총 추격명령을 하달하여 한-만국경선을 향해 진격토록 하였으나 중공군의 기습공세로 국경선 진출이 좌절되었다.

중공군의 공세는 총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중공군은 제1,2차 두 번의 공세로 유엔군을 38도선일대까지 철수하게 만들었다. 이 공세로 인해 군우리에서 미 제2사단이 괴멸되었고, 장진호에서는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가까스로 죽음의 계곡이라 불리는 험난한 포위망을 뚫고 나와 흥남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38도선을 돌파하기 위해 세 번째 공세를 감행하였고 이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의 1951 1 4일 또다시 서울을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평택-삼척선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계속된 공세로 중공군의 능력이 한계점에 이른 것을 간파한 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남쪽 횡성까지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예상하지 못하던 유엔군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 4차 공세를 실시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이를 격파하고 제2차 반격작전을 실시하여 3 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3월 말에는 38도선을 다시 회복하였다.




대동강을 건너는 국군 제1사단

1950 10 19일 제일 먼저 대동강을 건너 동평양을 향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다

-만 국경선 초산까지 진출하는 데 최선봉의 영예를 얻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고 있다.




중공군의 참전

스탈린과 김일성의 파병요청을 받은 마오쩌둥은 출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0 10 19일 야간에 중공군 선두부대 12개 사단이, 이어서 10 26일에는 2차 부대 6개 사단 등 총 18개 사단 26만여 명이 한반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중공군의 공세

한반도에서 외국군을 철수시킬 목적으로 참전한 중공군은 총 5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공세를 실시하였다. 유엔군은 산악과 야음을 이용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중공군의 전술에 고전하기도 하였다.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후부터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은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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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chaelA 2013.11.01 0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koreanwar60.tistory.com 매일 방문 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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