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7.21 63. 다시 38선으로 (3)
  2. 2010.07.19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1] (18)
  3. 2010.03.24 국군 기계화부대의 시초, 장갑대대 (16)

63. 다시 38선으로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21 08:47

 

  서울의 군사적 의의가 반감되었다 하더라도 탈환한 이상 또다시 적에게 순순히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서울을 한 번 더 적에게 내어준다면 그때는 전선이 한강일대에서 완전히 고착화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38선 일대인 임진강을 연하는 선까지는 전선을 밀어붙일 필요성이 절실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공세를 생각할 수 없도록 적에게 심대한 피해를 강요하여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반복적으로 공세를 수행하는 동안 중공군과 북한군은 아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기 이전에 철수를 반복함으로써 주력을 격멸하는데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적을 후퇴시키고는 있었지만 격멸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때 의정부 북방에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26군이 몰려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들 중 의정부 서북쪽의 북한군 제1군단은 아군이 밀어붙이면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포진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아군이 문산 북방의 교량만을 먼저 차단할 수 있다면 이들을 일거에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리지웨이는 대구에 위치하고 있는 제187공수연대를 임진강 남쪽에 공수시켜 퇴로를 차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제187공수연대는 3월 23일 07시에 대구비행장을 이륙하여 문산 북동쪽에 성공적으로 낙하하는데 성공하였고 북한군 136명 사살과 149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포로 들을 신문한 결과, 중공군과 북한군의 주력은 공수연대의 투입 바로 직전에 임진강북쪽으로 철수하였음이 밝혀지면서 적의 주력을 차단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이처럼 의정부 북쪽이 텅 비게 되자 다음날 국군 제1사단이 문산-법원리까지 진출하였고 이어서 미 제3사단과 미 제25사단이 임진강까지 북상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동해안 지역에서 국군 수도사단과 국군 제9사단으로 편성된 국군 제1군단이 3월 25일부터 양양을 향하여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북한군 제69여단이 험준한 산악지역을 이용하여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동해상에 배치된 미 함정의 지원 함포사격에 의해 전의를 잃고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 27일 수도사단이 남대천을 도하하여 양양을 점령함으로써 한강하구 서쪽을 제외한 38선 일대에서 전선은 다시 형성되었습니다. 또 다시 전쟁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군은 다시 38선에 섰고 전쟁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습니다.]


  이렇게 아군이 다시 38선 일대에 정렬하자 미국정부는 38선의 재 돌파에 관한 모든 것을 야전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에게 일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난 1950년 10월에 있었던 북진과는 개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미국의 의도는 38선 이북을 완전히 회복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 상태에서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제한적인 돌파만 허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는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에 경고한 방어지대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였고 이를 캔사스선(Kansas Line)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방어선은 총 184킬로미터에 이르렀지만 서부전선에서는 22킬로미터는 한강하구를, 중부전선은 16킬로미터에 걸친 화천저수지를 방어에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4월 1일부터 현 전선을 38선에서 캔사스선까지 밀어 붙이기로 하고 이를 요철작전(Rugged Operation)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상태가 아니어서 아군은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부에서는 3.2~9.6킬로미터, 동부에서는 16킬로미터까지 손쉽게 북상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사실 애초 캔사스선은 38선 북방에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연결하여 임의적으로 설정한 방어선이었는데, 아마도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때부터 대략 이 곳을 기준으로 미래의 군사분계선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아군이 캔사스선에 이르렀을 때, 중공군의 대부대가 평강-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삼각지대(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Iron Triangle)에 집결하여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원산과 서울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여서 중공군의 차후 공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전에 단속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은 캔사스선 10~20킬로미터 북방에 와이오밍선(Wyoming Ling)을 설정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에 재차 돌입하였습니다. 4월 11일 개시된 작전의 명칭은 작전명 불굴(Dauntless Operation)이었습니다. 작전명답게 제8군은 쉬지 않고 진격을 재개하여  전선을 한 번 더 북으로 걷어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초 공세는 비교적 용이하게 진행되었으나, 4월 22일부터는 도처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전진이 멈추었습니다.


[중공군은 대응이 거세어지면서 반격이 예상되었습니다. ]


  리지웨이는 이것이 적이 새로운 대공세 준비를 완료하였다는 신호로 해석하였습니다. 지난 4차 공세이후 두 달이 경과하는 동안 중공군의 특이 동향이 없었는데, 그것은 중공군이 공세에 나설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는 각 부대에“적의 공세를 중단하고 적의 역공에 대비하여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철의 삼각지를 눈앞에 두고 공격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미의 관심사는 중공군이 언제 어디로 공격해 올 것인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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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1]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7.19 08:33
  개전 초기 한국군을 공황상태로 몰아간 북한군의 T-34/85
  전차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한국군을 상대로 북한군 전차부대는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군에게 있어 6월 25일은 치욕의 날이자 절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는 하루입니다.
  이 날 새벽 4시 30분을 기해 암호명 "폭풍"으로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 2개 군단의 일제 공격준비 포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를 앞세운 보병들의 진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특히 오전에 개성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함락된 데 이어 포천마저 함락됨은 물론 밤 10시에 동두천까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게 함락되면서 한국군 지휘부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전차라는 무기를 상상할 수도 없었던 한국군은 졸지에 T-34/85의 무한궤도에 참혹하게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참담했던 6월 25일이 지나고 26일 오전 1시가 됐을 때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 야전 사령부에는 세 명의 '별'이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 제2 보병사단 "노도부대" 사단장 이형근 준장, 그리고 제7 보병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그들이었죠. 
  한시가 급한 시각에 이들이 모인 이유는 바로 전면적인 붕괴가 시작된 중서부 전선의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채병덕 총참모장은 제2, 7 보병사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7 보병사단은 1연대와 18연대를 병렬해 덕정에서 38도선 방면으로, 2 보병사단은 5연대로 축석령에서 포천을 향하여 26일 미명을 기해 역습하시오.” 

  무모하기 그지없는 반격작전을 지시한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
  이는 정말 정상적인 상황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내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현 위치에서 방어전을 펴는 것이 아니라 적을 향해 역습을 가하라니!
  그야말로 화약을 안고 화로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죠.
  후에 육군본부 작전 명령 제91호로 공식 문서화된 반격작전의 개시 시간은 6월 26일 오전 8시로 최종 공격 목표는 급격하게 붕괴된 38도선의 회복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공격을 진행 중이라 적잖이 애를 먹고 있던 북한군에게 있어 한국군이 제 발로 진지에서 걸어나온다는 것은 행운 그 자체였습니다.
  문제는 당시 한국군이 제대로 된 반격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전력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지만 한국군 제7 보병사단은 이미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안 그래도 2개 보병연대만으로 격전을 치르는 통에 전력이 급격히 감소되었고 특히 제1 보병연대의 경우 동두천이 25일 밤 10시 무렵에 함락된 후 가까스로 수습된 잔여 병력으로 재편성을 진행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육군본부는 부랴부랴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였던  제18 보병연대( 현 제3 보병사단 예하 "백골부대" )를 제7 보병사단에 배속시켜 반격작전에 나서도록 지시했습니다.

  오늘날 동부전선의 제1 군 예하로 철통 철책경계에 임하고 있는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
  그러나 개전 초반 이렇다할 활약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사실상 사단이 궤멸되고 마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취재 협조 : 육군 제7 보병사단 5 보병연대, 필자 제공 )
  하지만 의정부는 그나마 상태가 좀 나은 경우였습니다.
  리영호 소장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3 보병사단의 주력이 배치되어 있던 포천은 이미 전면적인 붕괴가 임박했는데 우선 제7 보병사단 9 보병연대가 사실상 와해되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전선을 이탈, 25일 오전 11시를 기해 광릉 방면에서 간신히 잔여 전력을 추스려 후퇴를 하려던 찰나에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변경되었던 제3 보병연대를 증원한 것이었죠.
   원래 제3 보병연대는 제7 보병사단 예하부대였다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었는데 다시 모 부대로 돌아온 셈이었습니다.
  이후 제3 보병연대는 현재까지 제7 보병사단 예하 부대로 강원도 화천군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포천의 상황은 의정부보다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본부는 제2 보병사단 5 보병연대를 추가로 투입시켜 이형근 준장의 지휘 하에 북한군 제3 보병사단의 진격을 저지하는 한편 반격에 나설 것을 지시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때 제7 보병사단에 증원된 3, 5 보병연대가 현재도 사단 예하 부대라는 것입니다.

  6월 25일 하루 동안 육군본부에서는 전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육군본부의 결정 및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을 수령한 양 사단장은 서로 상이한 반응을 보였는데 제7 보병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자신의 사단 예하 2개 보병연대가 궤멸 직전의 타격을 받은데다 원래 자신의 예하부대인 제3 보병연대를 돌려받는 것은 둘째로 치고 제2 보병사단 병력까지 증원된데다 개전 초반의 붕괴된 전선을 회복하는 것은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2 보병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5연대는 가용 병력이 겨우 2개 대대에 불과합니다. 2개 대대만으로 적 1개 사단에 역습을 감행한다니,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현재로서는 조금만 더 현 위치를 사수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16연대와 25연대가 도착할 것입니다. 이 부대들이 완전 배치되기를 기다렸다가 그 때 반격을 감행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전장에서 병력을 축차 투입시키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소이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전선에서의 반격이라는 것은 후방에 충분한 기동 예비전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정설입니다.
  당시 육군본부의 결정은 전선에 크나큰 파국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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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슈타인╋ 2010.07.19 08: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퍼싱의 군사이야기를 연재 중인 만슈타인입니다.

    본 포스트는 연재물로서 총 3회 분량으로 계획되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들은 언제라도 답변을 남겨주시면 성심성의껏 답해드리겠습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2. 강효섭 2010.07.19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만슈타인님, 언제나 멋진 포스트 잘 보고 갑니다.

    개전 초반에 장군들끼리 저런 알력 다툼이 있었다니....

    적전에서 기막힌 추태 한 판 벌였네요 -_-;;

    • ╋만슈타인╋ 2010.07.20 18: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뭐 이런 알력다툼 외에도 5.16 군사혁명과 12.12 군사반란이라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군님들의 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3. 김수민 2010.07.19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지막 사진은 포천의 승진훈련장 같네요 ^^

  4. 조유진 2010.07.19 2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퍼싱님, 글 잘보고 있는데요

    사진을 클릭해도 크게 보기가 안되네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5. opohobag 2010.07.20 16: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채병덕 의 색깔을 의심해 볼만합니다

    6.25 발반 전후해서 나온 여러가지 명령에 의혹이 가장 많습니다

    무능을 가장한 利敵명령...이랄까

  6. 박소영 2010.10.02 1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막무가내로 몸으로 막으라는 명령은 정말 충격적인 것 같네요

  7. 김창원 2010.10.02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창군된지 얼마되지 않은 한국군의 수준이 보여준 한계였습니다

  8. 이소현 2010.11.09 1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 초기 너무나도 혹독한 희생을 치른 장병들에게 묵념을

  9. 김종관 2010.11.09 18: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속편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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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이 잘못 투하한 조명탄에 노출된
    영국 얼스터 대대가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국군 기계화부대의 시초, 장갑대대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3.24 10:29


 

  6·25전쟁 개전 초에 북한군 전차에 일방적으로 당한 기억이 너무 오래갔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약간의 기갑장비가 있었습니다. 육본직할 독립 기갑연대 예하에 장갑대대에 당시 국군 유일의 기갑장비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장갑대대는 미군정이 물러나면서 약간의 장갑차량을 인수하여 창설된 부대로 당시 최강의 전력을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지만 반면 이것은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미군정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M-8정찰장갑차]


  장갑대대는 M-8정찰장갑차 27대, M-2반궤도차량 24대과 약간의 지프(Jeep)차를 보유 한 국군 유일의 기계화부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북한군 기갑전력과 비교한다 하여도 한 없이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빈약한 수준에서 국군 기갑(기계화)부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49년 광복절 시가행진당시]


  그레이하운드(Greyhound)라는 애칭으로 불린 M-8정찰장갑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정찰용으로 개발된 차량입니다. 지금 기준의 장갑차와 비교자체가 곤란하지만 그래도 당시 국군이 보유한 유일 기갑장비였습니다. 따라서 시가행진 등 공개 행사에서 국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어필하는 주요 무기였고 전쟁 바로 직전에 38선 일대에 기획 순찰을 나가 전방의 병사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전방 부대를 시찰하면서 장비를 전시중인 모습]


  그런데 장갑대대에 속한 M-8장갑차들은 집중 운용되지 않고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소대별로 분할하여 전방의 각 사단에 배속 운용하였습니다. 사실 이들이 집단으로 북한군 전차와 맞상대 할 수 없음을 당시 군 지휘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단지 고전하고 있던 전방 각 사단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한 방법으로 이들을 각기 분산하여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열병행사를 하는 M-8]


  하지만 그보다도 통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통신강국 KOREA지만, 해방 후 우리나라의 통신사정은 몹시 열악하였고 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M-8장갑차에 장착된 SCR-506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하였고, 이런 이유로 서울 남산의 기갑연대 통신소를 키스테이션으로 하여 육군본부와 각 사단의 통신에 유효 적절히 사용되었습니다. 기록에는  강릉의 제8사단에 배속한 M-8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에서 수신되었다고 전합니다.


[개전 당일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하는 모습]


  하지만 그렇다고 전시목적으로 또는 통신용으로만 M-8장갑차가 운용될 수는 없었습니다. 북한군의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전방의 부대들이 유린되자 M-8은 T-34전차를 막기 위해 출동합니다. 명령을 내린 상부나 이를 운용하던 병사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망설임이 없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출동하였습니다.


[비록 실전외의 목적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의정부 축선을 방어하던 제7사단을 돕기 위해 출동하였던 M-8의 37mm 주포가 불을 뿜어 수많은 철갑탄을 적 전차에 명중하였지만 대부분 튕겨 나가는 참담함과 함께 차례차례 적 전차의 희생양이 되어 갔습니다.  이런 수모에도 불구하고 M-8 장갑차는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제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큰 활약을 하였고, 옥천 지연전에서는 T-34의 캐터필러를 명중시켜 기동 불능 상태에 빠뜨려 전차 공포증에 빠져있던 아군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도 하였습니다.


[1960년 동일 차체를 쓰던 M-20의 모습 ( 출처-4.19민주혁명회)]


  이렇듯 개전 초 성능 이상의 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되었고, 북진 시 청진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흥남철수 적재품목에서 발견 되지 않아 결국 1950년 말 국군전력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4.19당시의 사진을 보면 M-8과 동일한 차체를 쓰던 M-20정찰차를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M-8장갑차 대원들의 무용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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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풀칠아비 2010.03.24 1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때 우리나라에도 장갑차가 있었군요. 달걀로 바위치기인줄 알면서도 조국을 위해 출전했다는 내용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한 대도 남아있지 않다니 아쉽네요.

  2. 꿈꾸는 세상살이 2010.03.24 14: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나 지금이나 말로만, 입으로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각성하여야 한다.
    정말 무엇이 나라를 위하는 일인지, 국민을 위하는 일인지 생각하기를 바란다.

    한낱 개인의 욕심으로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남늘 깔아 뭉개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지도급의 자리에 있다면 이 나라는 위험한 나라, 위태로운 나라가 되고만다.

    적과 대처하는 시기에 무엇이 필요하고,
    평화로운 시기에 무엇이 필요한지,
    교육이 무너졌을 때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그냥 정권이나 잡고 배나 두드리며 연장하려는 자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야 한다.

    특히 교육을 빙자한 사기꾼들,
    법치를 운운하면서 법을 이용해 먹는 자들,
    나에게만 이로운 법을 만드는 자들,
    국가의 장래를 좀먹는 쓰레기들은 바로 없어져야 한다.

  3. mami5 2010.03.24 2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한 사진들을 보고갑니다..^^
    편안한 시간 되세요..^^

  4. Keva Sievertsen 2012.05.31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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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5. So Baldino 2012.05.31 17: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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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Dannette Manders 2012.05.31 17: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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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pocket fm radio india 2012.10.21 0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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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text your ex back 2.0 review 2012.12.17 1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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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Ardys 2013.04.17 15: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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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Plumber Services NJ 2013.05.22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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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tankless hot water heater nj 2013.06.23 0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군 전차에 일방적으로 당한 기억이 너무 오래갔지만, 사실 우리에게도 약간의 기갑장비가 있었습니다. 육본직할 독립 기갑연대 예하에 장갑대대에 당시 국군

  16. http://rapidlawn.com/ 2013.09.21 2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갖춘 부대로 평가를 받지만 반면 이것은 당시 국군의 무장이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