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5.07 41. 중공군의 준비되었던 참전 (2)
  2. 2010.04.13 33. 치열했던 서울탈환 (4)
  3. 2010.01.21 필리핀의 참전과정 (23)

41. 중공군의 준비되었던 참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5.07 08:20

 

  중공군의 참전은 아군에게 너무나 갑작스런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중국은 1950년 7월부터 8월 중순사이에 18개 사단 25만 여명으로 구성된 동북변방군(東北邊方軍)을 편성해 만주일대에 배치해 두었는데, 그 때는 북한군이 가장 극성기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다만 이때는 중국의 보편적인 정책인 “적대국가와 국경을 같이하지 않는다”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 사상에 따라  만약을 대비하기 위한 사전조치였습니다.


[중국의 참전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마오쩌둥]


  그런데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북한군이 서울에서 철수한 9월 29일, 김일성과 박헌영의 공동명의의 스탈린에게 긴급지원을 요청했을 만큼 상황이 돌변하고 아군의 38선 돌파가 점차 가시화되자 중국의 생각도 복잡 미묘해 졌습니다. 일단 9월 30일,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는 국경절 연설에서 중국 가까이에 적대세력이 근접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한반도나 6·25전쟁을 구체적으로 직접 거론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10월 1일, 박헌영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대표단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소련군의 직접 참전이 곤란하다고 판단한 스탈린이 주중 소련 대사를 통해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청하자 중국의 태도도 보다 적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즉시 정치국 상임위원 회의를 소집해 파병문제를 토의에 붙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10월 3일, 주중 인도 대사를 통하여 “미군이 38선을 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보다 직설적인 의사를 표현하면서 군사개입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중공군 사령관 펑떠화이와 김일성]


  10월 8일, 갑론을박의 격론 끝에 마침내 마오의 결단으로 파병이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마오는 압록강 북쪽에 배치해둔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으로 개칭하여 펑떠화이(彭德懷)를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10월 15일 압록강 건너 입북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유엔군의 공식 북진 개시일보다 하루 앞선 결정이었을 만큼 즉각적인 조치였습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기회가 되면 한반도에 즉시 개입할 준비를 완료한 상태와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마오도 미국을 두려워하고는 있었지만 이처럼 빨리 참전을 결심하였던 것은 소련 공군의 참전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10월 10일, 마오는 비밀리에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1개 사단 규모의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직접 참전에 난색을 표명하고 대신 10개 사단 분량의 전쟁물자 지원만을 약속하여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오는 만주에 출병해 있는 펑을 소환하여 참전 여부를 재검토했을 만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고 이것은 이후 중-소 이념갈등의 원인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오는 소련공군의 지원여부에 관계없이 출병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게는 한반도의 의미가 소련에 비해 더욱 절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강을 건너는 중공군]


  드디어 10월 19일 야간, 선두부대로 선정 된 12개 사단이 접경지대에서 압록강을 도강하고, 10월 20일에는 지원군사령부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大楡洞)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아군과 교전이 벌어진 10월 26일에 6개 사단으로 구성 된 제2진이 압록강을 도강함으로써, 불과 일주일 만에 총 18개 사단 26만 여명의 대부대의 이동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들 중공군 부대는 황혼과 함께 이동을 개시하고, 날이 밝으면 은폐하여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완벽에 가까운 놀라운 기습 전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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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창균 2012.08.12 14: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충성!
    1107 공병단 130환경대대 상병 신창균입니다.

    중국이 참전하게 된 상황과 소련과의 관계 등을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2차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제 3차세계대전까지 발발한다면 인류멸망이란 시나리오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소련이 참전하는 것을 두려워 나중에 만주까지 진격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은 인해전술이 대표적 전술이기도 했지만, 기습작전이나 교란작전 등 전술전략에도 능한 군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은폐하여 휴식을 취하고 황혼과 함께 이동을 개시하여 완벽에 가까운 놀라운 기습전개를 하는 것에서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충성!

    tlsckdrbs123@hanmail.net

33. 치열했던 서울탈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13 07:58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10군단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서울탈환을 위해 동진하면서 김포공항과 영등포외곽까지 진출하였고,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는 낙동강에서 치고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기 위해 안양, 수원, 오산방향으로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 수복과 동시에 낙동강가 몰려있던 북한군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대담한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수도 서울이었는데,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만큼 이곳을 사수하려는 북한의 집념도 컸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9월 20일 새벽 2시,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가 김포공항에서 행주산성으로 최초로 한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을 만큼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강력하였습니다. 결국 엄청난 폭격으로 북한군의 저항 근거지를 제거한 후 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장악한 아군은 곧바로 신촌 방향으로 진격하여 들어갔고 21일 저녁에는 중앙청 바로 목전인 연희동 일대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진격한 미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 시가지에서 치열하게 방어에 나선 북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22일 아침, 노량진 한강일대까지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중앙청(현재 광화문)까지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9월 22일,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연희고지를 공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였습니다. 목표까지 거리는 불과 1킬로미터 정도였지만 이곳을 요새화한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이틀이 지나도 점령은커녕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국군을 대신하여 미 해병대가 공격을 계속하였는데도 연희고지는 함락되지 못하였고 결국 항공기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9월 24일 오후 천신만고 끝에 연희고지를 탈취하면서 북한군의 서울 서측방어선이 붕괴되었습니다. 더불어 미 제1해병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마포방향으로 진출했습니다. 인천상륙 후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을 만큼 이때의 전투는 격렬하였지만 적 1,750명이 사살 된 것으로 파악되었을 만큼 북한군의 피해도 극심하였습니다.


[연희고지 전투에서 피아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한강 남쪽까지 순식간 진출하였을 때 당황한 북한은 최용건(崔庸建) 서해안방어사령관의 지휘로 경인지역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부대들과 사리원, 철원, 김천에 위치한 20,000여명 정도의 모든 가용 병력을 끌어 모아 서울에 투입하였고 또한 시민을 강제로 동원해 진지와 바리케이드를 구축해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남쪽에서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 번 차지한 서울을 결코 내어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습니다. 아니 바로 직전까지 부산을 집요하게 위협하고 있다가 일순간에 반전 된 이러한 상황을 북한수뇌부는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었고 그만큼 서울 시내에서의 저항은 극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서울탈환이 지연되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낙동강에서 반격하여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려 수원방향으로 진출중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를 서울 공격부대로 추가 투입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9월 25일 미 제7사단 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가 서울 남쪽에서 공격하자, 힘을 얻은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일제히 북한군을 소탕하고 서울중심부로 돌입하여 들어갔습니다. 여기에서도 바리케이드를 치고 북한군이 격렬히 대항하였으나 사실 이 이상의 저항은 무리였습니다.


[환도식의 모습]


  9월 27일 15시 08분, 점령한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북한군의 저항은 종식되었고 서울시 전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완료한 국군과 유엔군은 28일을 기해 각부대별로 경계태세에 들어감으로써 전쟁발발 3일 만에 북한군에게 내어준 서울은 91일 만에 다시 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스런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상황을 환원시켰으나 동시에 새로운 과제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38도선 돌파의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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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13 1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수.
    무엇을 사수하려 하는 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집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수하는 것,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수하는 것,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사수하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2. emergency essentials for car 2012.10.21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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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필리핀의 참전과정

생생! 6·25/6·25전쟁 지원국 2010.01.21 14:15

필리핀의 참전과정


  필리핀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4년전에 독립하여 줄곧 공산반란군과 교전으로 국내정세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지만 필리핀 정부는 유엔이 대한군사원조를 결의하자 먼저 전차 17대의 지원 제의에 이어 8월에는 5,000명 규모의 1개 연대전투단 파견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무렵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방어선으로 밀려나고, 병력소요가 급증하자 미국과 필리핀은 협의를 통해 즉각적으로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부대의 파병에 합의하여 공산반란군 토벌작전에 투입된 부대 중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제 10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 10대대는 1,367명으로 3개 소총중대, 수색중대, 그리고 경전차, 포병, 공병, 통신, 의무 등 제병과를 망라한 지원중대를 편성함으로써 독립전투능력을 갖춘 대대 전투단으로 재편성하고 1950년 9월 2일 6만 시민이 운집한 리잘 메모리얼 스터디움에서 필리핀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파병 환송식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후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개시하던 9월 15일 미 수송선에 승선하여 마닐라항을 출발해 9월 19일 해질 무렵 한국정부 대표와 주한유엔 대표 및 부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선상에서 1박을 한 대대는 20일 아침 부대기를 앞세우고 상륙함으로써 필리핀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 지상군 참전국이 되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필리핀 제 10대대]

 
   대대는 밀양으로 이동하여 10일간의 현지적응훈련을 마치고 9월 28일 낙동강선에서 미 제 25사단에 배속되었으며 10월 1일 진주 남쪽의 사천으로 이동해 비행장 경비임무를 인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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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eneric Propecia 2011.05.21 19: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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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clothing factory 2011.05.25 19: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립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서울의 점령보다 서울 일대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 개전 초 작전의 주목적이었는데 북한군의 서울 지체는 이런 계획 자체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Movie torrrents 2011.06.03 0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Words from Korean War veteran and President Fidel V. Ramos:

    “The Republic of Korea was threatened with destruction, we Filipinos responded without hesitation. This show of willingness and commitment by the Philippines and its Allies in the United Nations Command led to a strong partnership with South Korea that endures to this day. Strength in partnership’ is, therefore, not a hollow slogan but a powerful watchword that reflects our two countries’ shared sacrifices during the Korean War,”

  5. Torrent sites 2011.06.23 2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 사진. 우리 아카이브에 보관하십시오.

  6. NIT Warangal 2011 Admissions  2011.07.26 15: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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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Free classified ads 2011.08.04 0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리핀은 어려울때 우리나라를 도와줬는데 우리나란 보답이 없군요.

  8. English songs 2011.09.30 1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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