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09.14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14)
  2. 2010.08.11 길목에 남겨진 역사 (2)
  3. 2010.07.21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2] (10)

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9.14 08:04

       

지난 4월, 6·25특집 TV 프로에서 터키 참전 용사인 슐레이만
비르빌레이라는 분이 60년 만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자신이
한국 근무시 딸처럼 살피던
한국인 여자 고아를 찾는 사연이
보도되었었다.


술레이만 씨와 어린 아일라 [지금의 김은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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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혈전장 평북 군우리 근처에서 부모를 잃고 떠도는
이 어린아이를 구한 25 세의 술레이만은 아이에게 아일라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국 파병 기간동안 친 딸처럼 길렀다.


1952년 한국 파견 기한이 다 된 술레이만은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 가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모색해 봐도 잘 되지가 않자
할 수없이 아일라를
터키군이 수원에 세운 고아원
‘앙카라 학원’에 맡기고 떠났었다.


술레이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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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속에 엮어진 휴머니즘의 이야기는 술레이만이
어쩔 수없이
귀국하여야하는 시점에서 영원히 헤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부녀 이상의 정이 든 두 사람은 그 긴 세월을 서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를 앙카라로 방문했던 방송국의 협력으로 아일라라고 불리던

한국 고아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이미 손자들을 둔 아일라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된 아일라 김 은자 씨가 북받치는 울음 속에
슐레이만 씨와 부등켜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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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술레이만 부부는 방송국의 주선으로

여의도 앙카라 공원에서
60년 만에 옛 아일라였던 김 은자씨와
눈물의 재회를 했다.

그 장면은 나에게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 상봉을 계기로 참전 터키군의 활동을 테마로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기회가 잘 되지 않았다.
오늘 그 기회를 가져본다.


터키 군은 6·25전쟁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을 파병해서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뒤져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한국 참전 터키 여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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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어키 군은 돌격 선에서 총검을 번득이며 적진으로 돌격해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터키 군이 세계에 그 용맹함과 함께 이름을
드높게 날린 것은
포로 생활이라는 극한 상활에서
발휘한 강철 같은
군기와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한국 파병 터키 군은 1950년 10월 유엔군이 한창
북상할 때
한국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1950년 10월 부산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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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북쪽으로 이동해서 미군 25사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배치되었던 터어키 군은 11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연달아 격렬한 전투를 했다.


터어키 군 -참전국중 제일 많은 병사들이 콧수염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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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한국 전투에서 터키 군은  와원, 신림리,
군우리 협곡,
그리고 선천등에서 연달아 벌어진 네 번의 전투에서 
잘 싸웠지만
21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매복을 당한 군우리에서의 피해가 제일 컸다,
 보유장비의 70%를 손실했다.]


터어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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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말 초전 기습에 재미를 보아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던
중공군의 이들 유엔군 포로 취급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군사 심리전에서 연구되고 있는 차원 높은 특유의
세뇌 기술이
적용되었다.
대륙에서 일본군과 장 개석군들 포로를 취급하면서
축적한 중공군의 노우 하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미군 포로들과 터어키 영국군등의 포로들은 1950년울
지나 1951년도 중반까지도 그들의 수용소가 있었던
‘지옥의 골짜기’에서 엄청난 고초를 치렀다.

포로들은 추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받았고 환자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나갔다.
식량이라고는 귀리나 옥수수 따위 곡물을
자루 채 던져주고 먹으라고 했으나 양이 형편없이 부족했다
굶고 병든 포로들을 중공군들이 중국에서가져 온 장 티프스가
파도처럼 덮쳐서 한 수용소의 미군 포로들이 절반이나
사망하기도 했다.

포로들에게 부식 조달이 좋아진 것은 1951년 여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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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고착된 1951년 여름부터 보급도 좋아지고
병원 서비스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물질적인 상황을 개선하고 나서부터 중공군은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지나친 강제 노동도 없었고 심지어
중공군이
운영했었던 압록강가 벽동 포로 수용소는
보초병은커녕 울타리도 없었다.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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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인도적인 처우 뒤에는 중공군이 노리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포로들은 하루 여섯 시간 씩 영어를 잘하는 강사로부터
정치 강의를 들으며
미국 사회 구조의 차별성과 자본주의
비인간성을 강의 받으며 모국을 미워하는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반면 세계 최대 빈국이었던 중국은 인간미 넘치는 이상사회라는
거짓된 이미지가 세뇌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공산주의 선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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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서 중공군은 미군 포로 사회에 끊임없는 동요를 일으켰다.

중공군의 교묘한 갈등을 부채질 하는 음모는 포로와 포로들
사이에서도 공작
되었다.
포로들의 조직 통제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 조처로서 장교들의
특권을 모두 무시하는 관리 지침이 하달되었다.

“여기는 계급이 없는 사회다. 너희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
이 조처에 철없는 미군 사병들은 당장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상관으로 모셨던 장교들의 등을 툭 치며
야유를 보냈다.
“어이-! 잭!”
선임하사님이나 소대장님 그리고 중대장님의 호칭은
땅 속으로
버려져야 했다.
간부들에게는 은연중 굴욕적인 천하고 더러운 일을 시켜
사병들에게 경멸 당하게 만들었다.
포로들 자치 회장 격에는 자기 계급을 상사라고 거짓말한
질 안 좋은 일등병이 명색 '선거’로 임명되었다.
계급의 무시는 조직의 통제 내지 관리를 마비시켰다.
사회적 규범이나 개인적 염치를 챙기기 힘든 극한적인
포로생활에서
각 인간들은 묶는 끈이 다 끊어지다 보니
미군 포로들 집단들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며 갈등하는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를 바라보며 내심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최강국의 포로들이 자기들이 손을 좀 쓰니 콩가루가 되었고
콩가루들은 자기들의 밥이었다.

중공군의 단수 높은 포로 관리에 미군들은 중공군의 의도대로
심리적으로 각개 격파가 되었다.
물론 풀려날 때까지 꿋꿋이 버틴 미군들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포로들과는 갈등하면서도 중공군들에게는
협조하는
병사들은 훨씬 더 많았다.
몇몇 미국인들은 자신의 동포에 대하여 법죄적인 행위를,
그리고
매우 소수는 반역죄를 저질렀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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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포로 관리의 노회함은 결국 전쟁이 끝나고 21명의
세뇌된
미군들이 조국인 미국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당시 세계 최저
빈국(貧國)의 하나인 중국행을 택하게 만들었다.

미군으로 보면 반역자가 양산된 것이다.
전쟁 후 미국 관련 당국에서 중공군에게 휘둘려 포로들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 질시하고 반목하였던 이 포로들의
행태가 논란이 되었었다.

더구나 포로 신세가 되고 보급이 형편없는 식사와
전염병으로 다수의
미군들이 힘없이 사망했던 사건도
문제로 다루어 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군인이 발휘해야 하는 강인성이
결핍된 사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옥수수나 콩 또는 귀리나 조 따위만 배급되었으니
어떻게든 이 알량한 음식이라도 악착같이 먹어서 체력을
조정해야 하는데
미군들 중에 이런 가축에게나 먹이는
사료를 먹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삶은 물만 마시는
철부지도 많았었다.
이렇게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허약해져
죽는 병사들이 많았었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군 포로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들의 풀을 뜯어 먹는 강한
생존력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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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군의 개탄스런 포로생활의 진상을 조사하던 미군당국은

포로 생활에서 송환 된 미군들로부터 같은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터어키 군 포로들이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극복해냈는지를 듣고
경탄했다. 미군의 경탄은 바로 언론을 통하여 세계로 퍼져 나갔다.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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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6·25전쟁의 고전 작품이 된

‘This kind of War.'의 저자 T.R,페렌바크는 죽음의
계곡 수용소와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슐리히터 상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 여러 가지 사실 가운데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은 미국인
포로중에
50 퍼센트가 죽고 영국군 포로의 사망률이
영국 정부에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포로는 별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터어키 포로들은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


터키 군들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초지일관
터키 군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비록 포로의 몸이 되었지만 터키 군인들은 전투중의
명령체계를
단단히 고수했었다.


미군처럼 중공군에게 아부하던 병사가 선거로 자치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로 중 가장 계급이 높은 터키 장교가 당연히
포로들의 지휘를 맡았다.
포로가 되었지만 장교는 장교였고 부사관은 부사관이었고
사병은 사병이었다.
명령은 명령이고 복종은 복종이었다.


페렌바크는 계속 써내려갔다.
터키군의 대장은 매일의 근무표를 작성했다.
따라서 누가 나무를 하고 물을 길며 병자를 간호하는가를
대해
조금도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부사관이나 군의관, 그리고 군목은
병자를 간호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자의 옷을 빨아 주며
불을 때는데 쓸 나무를
하도록 사병들에게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부들이 사정을 하면 사병들은 “제길할 ----너는 뭔데?”
하고 빈정댔다.

벽동 포로들은 대부분 온돌을 사용하는 민가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대량의 장작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큰 업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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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포로들의 최고 책임자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중공군
관리병들에게 반항했다는 죄로 붙잡혀 갈아 치워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 3, 제 4의 선임자 또는 그 아래의 책임자가 줄줄히 터키군
지휘를 맡아도 그들이 하는 터어키 포로들을 통솔하는 방법이나
형식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터키 포로가 지나치게 중공군과 친하게 지내면
군법회의가
열리고 슐리히터는 방청하도록 초청되었다.


선임하사가 심판관으로 앉고 법정은 열렸으며
논고와 증언이 속행되었다.


그 터어키 사병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개같이 두들겨 맞았다.

그의 변호인도 그런 반역자를 감히 변호했다고 해서 얻어맞았다.

슐리히터가 물었다.

“그런 짓을 두 번하면 어떻게 하는가?”
질문에 터키군 간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때는 죽여 버린다.“


중공군은 세뇌시키려 든 대상에 물론 터키 포로들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6시간씩 포로들을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실시하던
정치 교육
이나 숱한 공산주의 선전물이나 영화 상연의 홍수에도
이들 중에 마음이 변심하여 조국 터어키을 버리고 중공으로
간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어 놨던 중공군의
인간적인 대우에도 터키 군들은 그 뒤에 숨어있는 흉계를
경계하며
마음가짐을 단단히 가졌다.


지루한 정치 교육후 형식적인 자체 분임 토의 시간.
영어를 모르는 터어키 군과는 관계없는 시간이었다.
터어키 포로는 이런 시간에는 몰래 코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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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 출신이 다수였던 터키 포로였지만

터어키 인들이 제일 증오하는 원수인 소련의 이데오르기가
공산주의였으니 그들이 본능적으로 거부했던 것은 당연했다.


터어키 포로들이 중공군이 떠벌리는 공산주의 세뇌교육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은 그런 헛 눈길은 자기의 사망 선고문에
스스로
도장을 찍는 행위였었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중공군이 뭐라 하루 종일 떠들어도 그들에게는 오직
알라
신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페렌바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학자나 군인이나 의사들은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왜 공산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는가, 
 왜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살아남았는가? 캐물을 것이다.

 그 답은 명쾌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계산기로 튕길 수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


그는 터키 군 포로들의 행태가 답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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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전쟁중에 1만 5천여 명의 터어키 군이 참전해서 2,000여 명이

부상하고 168명이 실종했으며 721여 명이 전사했다.
그 중 462명이 그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 낸 한국 남쪽
부산 재한 유엔 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터키 여단은 전쟁이 끝나고 1960년까지 한국에 주둔했었다.


462명의 터키 전사자가 잠든 재한 유엔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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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앞에서 소개했던 술래이만 씨와 아일라와의

재상봉 장면에 어떤 한국 방문 UN군 장병들의 휴만 드라마보다도
한층 더 진한 감동을 받았던 것에는 그 배경이 있었다고
하겠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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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ogunking 2010.09.14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 터키가 세계 최강 제국 오스만 투르크가 된 것이 아니었군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2. 武運長久 2010.09.14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한 정신력과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적의 선전과 회유에 굴하지 않은 터키군은 진정한 이슬람 전사들입니다...

    그래도 포로수용소와 그곳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의 선전이라는게 정말 무서운것 같습니다...

    사병, 부사관, 장교 모두 갈라지게 만드는 중공군의 흉계...

    중공군의 포로대우가 북한군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들었는데 그 부드러움 이면에 저런 무서운 내면이 있을줄은...

    명령을 받고 수행하고 따르기만하는 사병들의 심리와 스트레스를 이용해서 군기와 질서를 무너뜨리면...

  3. 武運長久 2010.09.14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마지막에서 두번째 사진의 터키군 사진에 오른쪽 병사가 쓰고있는 모자는 소련군 전차병 모자 닮았네요...

  4. 웊프 독 2010.09.14 14: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북진중에 노획한 것을 장난스럽게 쓰고 있는것 같습니다.

  5. chaffee2080 2010.09.14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어키는 당시 소련과 긴장관계에 있었고, 소련의 침공을 걱정하던 상황에서 참전했으므로 군인들의 반공의지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특히 배신자가 될 경우 본국의 가족들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하여서 이탈을 방지하였다고 합니다. 미군의 경우는 일단 숫자가 많아서 스스로 통제도 힘들었을 뿐더러,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장병들인지라 비교적 힘든 고난을 당하면 의지가 쉽사리 무너졌다고 하죠.

  6. 열심히 달리기 2010.09.17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에 가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형제의 나라라고 이름을 붙일 만하게.

    오스만 투르크의 용맹한 전사들의 모습을 여기서 잘 보고 갑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육박전을 펼치면 부상병도 없게 상대편을 쓸어버린다는 이야기요.
    예니체리 군단의 후예들 답습니다. ㅎㄷㄷ

  7. 비도승우 2010.09.22 0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돌궐의 후예들이 당나라의 후예들에게 이겼군요 !!

  8. 황태 2010.10.05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군의 육박전 이야기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영어가 잘 안되니 영어로 하는 세뇌교육되 무용지물일거고
    제일 중요한건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다는것이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9. clothing factory 2011.05.25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10. mahasiswa terbaik 2011.10.23 0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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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how to save money 2012.05.23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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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http://www.rushessay.com/ 2013.02.12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공유 할 열망 것을 분명 있습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그림은 천 가지 말을 그린다.

길목에 남겨진 역사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8.11 08:30

 

  현재도 우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6·25전쟁의 유산 중 하나가 한미동맹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동맹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미동맹의 법리적, 외교적 근거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입니다. 이 조약에 근거하여 현재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 곳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서류상의 조약보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도 되지 않아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미국이 전쟁에 전격 개입하여 우리와 함께 피를 흘림으로써 동맹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 당시에 미국 외에도 수많은 나라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귀중한 전투병을 파견하여 피를 흘려주었지만 당시 유엔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것은 단연코 미국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중 미군의 역할이 제일 컸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쟁 기간 중 총 178만 명의 미군이 참전하여 우리를 도왔고 그중 사망자 3만6940명, 부상자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 13만7250명 희생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수많은 물자지원이 함께 있었는데, 이러한 고귀한 희생과 지원은 대한민국이 초유의 국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엄청난 힘이 되었고 한미동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미군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그것은 동맹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전쟁 당시는 물론 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6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미군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한반도를 거쳐 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나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관문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주한미군의 병력도 많이 축소되었고 장거리 항공 교통이 발달한 관계로 오산에 있는 미 공군기지가 중요한 통로역할을 담당하지만 오래 동안 주한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들고나가는 길목은 인천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인천을 통해 떠나는 미군들의 모습 ]


  전쟁 초기에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대부분은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지만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내륙교통망의 파손도 심하고 전선이 가까운 관계로 인천항은 주요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인천항이나 인천이 전쟁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이지만 사실 이처럼 전쟁 내내 묵묵히 아군의 생명선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중 현재 인천항 제1부두에 설치된 제21운송대 입구 ]


  물론 한반도 최대의 항구인 부산의 역할은 계속하여 컸지만 주로 군수물자에 한정되었고 병력이나 시급한 화물은 인천항을 통해 전선과 계속하여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천이 미군의 통로가 된 것은 전쟁 훨씬 이전부터였습니다. 1945년 9월 8일 미 제24군단 예하의 제7사단이 38선 이남의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인천으로 상륙하였던 것이었습니다.


[1945년 9월 상륙하기 위해 인천항 내항으로 진입하는 미 제7사단]


  행정상륙이었지만 인천은 미군이 상륙주정을 이용하여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었고 부대 또한 5년 뒤 미 해병 제1사단과 함께 인천으로 상륙한 제7사단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인천을 발판으로 한반도에 손쉽게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1949년 철군한 미군은 이듬해 다시 인천에서 거대한 상륙을 성공시켜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가 되었고 1951년 이후에 오래 동안 주한미군의 관문 노릇을 하였습니다.


[인천항에서 유류를 하역하는 모습 (1952년)]


  특히 인천항과 내륙을 연결하는 초입인 부평일대에 설치된 애스캄(ASCOM)이라 불린 거대한 미군병참기지는 197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로 들어오는 미군과 미군 물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1945년부터 1970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근무한 미군들이 남긴 사진들을 보면 주로 복무한 자대뿐만 아니라 들어오고 나간 인천항이나 일대의 모습이 예외 없이 잡혀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중 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설치된 제8057보충대]
좌에서 우로 6·25전쟁에 참전한 제3, 2, 1기병, 45, 40, 7, 24, 25사단의 마크가 표시 되어있습니다 (사진-Dewey Mclean)


  1953년경 철도수송대에 근무하면서 찍은 Dewey Mclean씨의 희귀한 컬러사진에도 이 부분이 잘 나옵니다. 부평의 애스캄으로 완전히 옮겨가기 전에 인천 서림초등학교를 징발하여 운영된 제8057보충대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 깊습니다. 긴박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전쟁 중에서도 미 제8군의 보충대답게 예하부대들을 일일이 표시하여 놓은 모습은 한편의 여유를 느끼게도 만듭니다.


[인천 외곽에서 제8057보충대로 가는 길(현재의 제물포역 부근)의 이정표인데, 미국에 있는 집으로 가는 출입구라는 푯말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제 한국의 그 어느 곳에서도 6·25전쟁 당시의 참담했던 모습을 떠 올리기는 힘들고 그것은 미군이 전쟁 이전부터 그리고 전쟁이후에도 거대한 관문 노릇을 하였던 인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통해 한반도로 처음 들어왔고 전선이나 자대에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아니면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던 수많은 미군들에게 인천항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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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ealth insurance businesses big apple 2012.05.22 1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뷰와 함께 쓰기까지 정말 멋진셔서 너무 감사, 완벽하게 놀랐 있습니다! 이것이 올과 같은 물건을 유지합니다.

  2. ideal medical insurance plans for anyone 2012.05.22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는 환상적인 게시물의이 유형에 대한 많은 있으며 검토 .. 전 절대 만족! 접근 이러한 종류와 유사한 자료를 잡아.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2]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7.21 08:32
  예나 지금이나 반격에는 항상 충분한 기동 예비전력이 필수입니다.
  고대 전사에서도 기병이 예비대이자 반격의 중추로 활약했고 대포가 발명된 이후에는 공격과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죠( 모든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반격작전을 지시하는 육군 총참모장에게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형근 준장에 대해 일부 분들은 "어찌 상관에게 항명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이형근 제2보병사단장의 반박이 무조건적으로 억지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습니다.
  당시 전황은 그만큼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죠.
  전선에서는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T-34/85와 Su-76으로 인해 사실상 공황상태 그 자체였고 한국군이 보유한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로는 일격에 전차를 격파하기가 어려운 상태!
  이 때문에 이형근 준장은 어차피 북한 전차를 상대할 제대로 된 무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천연 장애물인 한강선에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는 상식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건의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 화기로는 북한군의 T-34/85를 원거리에서 일격에 격파하기가 어려운 상태였고 이 때문에 한국군의 공황상태는 치명적인 패착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형근 준장의 건의를 일언지하에 일축하면서 "북괴군 놈들의 전차와 포병에 위축되지 마라! 강인한 정신력으로 반격을 감행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고함을 질러대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걸작인 것이 바로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적 전차에 육탄 공격을 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이 부분을 보자면 마치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군을 방불케하기 충분한 대목이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차에 대한 육탄공격은 보병으로서는 대단히 큰 모험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은 전반적인 전황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전황이 파국으로 몰리는 위기 상황 하에서 정작 단합되어 어떻게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할 작전을 수립해야할 육군 수뇌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6월 25일은 그야말로 전방과 후방에서 치열한 격전이 전개된 하루였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이 지속적으로 현실성이 결여된 명령만을 하달하자 마침내 제2 보병사단장 이형근 준장도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채병덕 총참모장이 이형근 준장의 반박에 분을 못참고 채찍을 휘둘렀다는 험악한 풍문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하니 제7 보병사단 사령부는 가장 길었던 하루( The Longest Day )를 보낸 셈이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과 달리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제2 보병사단장 이형근 준장. 하지만 채병덕 총참모장은 오로지 현 위치 고수와 반격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지휘 계통마저 무시한 채 직권으로 예하부대를 출동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자신이 명령에 제2 보병사단장이 끝까지 반박하자 마침내 채병덕 총참모장은 자신의 직권으로 제2 보병사단 5 보병연대 2대대장 차갑준 소령에게 직접 구두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조국의 운명은 바로 이 곳 의정부에 달려 있다. 현재 포천 방면에서 넘어오는 고개( 축석령 ) 앞에는 적 전차 30대가 포진하고 있으니 즉시 특공대를 편성해 격퇴시켜라. 이 작전에서 귀관이 성공한다면 진급 규정에 관계없이 중령으로 특진시키겠다.”
 
군인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것이 바로 진급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내려진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은 꽤 메리트가 큰 것이었고 따라서 차갑준 소령은 부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차갑준 소령의 2대대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탄약이 부족했던 것이죠!
  아! 6·25 방문자 여러분들 중 혹시 1997년에 개봉한 파울 베르회펜( Paul Verho"ven ) 감독의 "스타쉽 트루퍼스"를 감상하신 분들은 아마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군도 마찬가지지만 보병에게 지급되는 탄약의 양은 지독하게 적고 자동소총이 보편화된 현재 140발로는 택도 없는 지경입니다.
  아라크니드족의 대군을 맞아 요새를 지켜내야 하는 러프넥 중대원들의 사투 중 탄약이 바닥나 옆 동료의 탄창을 얻어쓰는 부분이죠.
  오늘날 한국군의 소총수는 개인당 140발의 5.56mm×45탄을 지급받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전시에 이 정도 양으로는 반나절도 채 못 버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히 K-2 소총의 경우 3점사나 연발로 사격할 때 30발 탄창 비우는데 20초도 채 안 걸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수치는 실제 제가 군복무 시 K-2 소총을 이용, 공포탄 20발 탄창 3개를 연발로 난사하여 측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쏘고 난 다음 3일 동안 방아쇠만 제외한 총의 전 부위를 완전 분해해 손질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 당시 한국군에게 지급된 미국제 M1 개런드 소총이 아무리 묵직하고 반동이 강한 7.62mm×63탄을 사용하더라도 최소 1인당 8발 클립 11개, 총 88발이라는 만만치 않은 양이 지급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카빈 소총은 15발 탄창 11개, 톰슨 기관단총은 30발 탄창 7개가 지급되었습니다 )
  문제는 당시 2대대 병사들에게 지급된 M1 소총탄은 1인당 평균 2~5개 클립, 총 16~40발이 고작이었다는 것으로 이는 전시 지급량의 절반도 못 채운 셈입니다.
  카빈의 경우는 더 심각해 평균 15발, 즉 1인당 1탄창이 고작이었고 브라우닝 자동소총의 경우 20발 탄창 4개 - 총 80발이 전부였습니다.


  차갑준 소령이나 예하의 중대장들이 봐도 이런 상태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상황이었고 회의 끝에 축석령에서 탄약을 재보급받기로 결정, 6월 26일 오전 3시를 기해 부대를 출동시킵니다.

  의정부의 운명이 걸린 축석령으로 향하는 2대대! 하지만 이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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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익열사 2010.09.03 0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형근 장군... 대한민국 군대 군번 1번 아닌가요?

  2. 박소영 2010.10.02 1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타쉽 트루퍼스의 요새 전투 장면은 지금봐도 긴장감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3. FPS를 할때 2011.06.06 0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콜오브듀티 5 월드앳 워에서 개런드 M1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128발이 주어지는데 여기서도 죽은 동료의 총알을 노획하지 않으면 사실상 한 게임 반도 못가서 총알이 바닥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게임 안에서도 이럴진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안봐도 뻔한 수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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