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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국군 제3군단 최후의 날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30 08:20

 

  중요한 목지점인 오마치고개를 중공군이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아군이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미 제10군단 예하 인 국군 제7사단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중공군이 국군 제3군단 후방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9사단은 만일을 대비하여 사단이 보유한 차량과 중장비 200여대를 창촌 일대로 철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오마치고개의 피탈이 파악되었습니다. 이들 철수 차량제대가 후방의 창촌으로 가려면 오마치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동 중에 중공군으로부터 급습을 당하였고 이를 통해 고개가 차단당한 사실을 인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근 국군 제3사단과 군단본부에도 즉시 보고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오마치고개 점령 사실은 국군 붕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단본부는 이를 잘못된 보고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설령 적이 오마치고개를 장악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침투부대나 공비들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직 그곳을 관할하는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어떠한 사실도 통보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떻게 반나절 만에 중공군이 전선을 가르고 30킬로미터 후방까지 침투 할 수 있었겠냐하는 막연한 생각도 그런 오판을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단본부가 이처럼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막상 중공군은 오마치고개는 물론 훨씬 남쪽 후방인 침교에서도 두 번째 포위망을 구축하던 중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퇴로가 엄중히 차단당한 국군 제3, 9사단이 오마치고개를 거쳐 후방으로 후퇴가 5월 17일 오후에는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설령 오마치고개를 넘었다하더라도 후방인 침교마저 적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여서 오마치고개의 중요성은 이미 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어볼 점은 오마치고개가 아니라 바로 국군 제3군단의 항전의지였습니다.


  국군 제3군단과 예하 사단들은 단지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접하자마자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후퇴를 결심하였습니다. 물론 퇴로의 차단은 포위를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패배와 몰살을 뜻하는 단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마치고개의 피탈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3군단은 5월 17일 오전 중에 이미 항전을 포기하고 철수를 목적으로 대책 없이 현리일대로 전방부대들이 집결하는데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도 공산군은 아군을 부분적으로 포위만 하였지 압박을 가하던 상태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국군 제3군단은 후퇴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국군 제7사단의 붕괴로 말미암아 먼저 뚫려 버린 미 제10군단 지역은 미 제2사단의 선전으로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국군의 무능이 바로 펑떠화이가 이번 공세를 국군지역으로 하게 만든 이유였고 철저하게 불행히도 그런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갔습니다.


[능선을 기어오르며 인해전술을 펼치는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


  국군 제3, 9사단이 고심 끝에 시도한 작전은 결사항전이 아니라 한심하게도 오마치고개 돌파작전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오로지 후퇴를 염두에 두었던 작전이었습니다. 양 사단에서 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5월 17일 21시, 오마치고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한마디로 앞에서 밀려오는 적은 그대로 놔두고 퇴로를 뚫기 위해 뒤로 돌아 공격을 가하는 치욕적인 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 부대에 대한 통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부대들은 북한군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개방되어 있던 방대산을 무질서하게 넘어 철수, 아니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 화기까지 버린 병사도 있었으며, 주요 간부들은 계급장마저 떼어버리고 철수하는 그야말로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으로 작전상 철수가 아닌 도망이었습니다. 적에게 패해 후퇴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줄행랑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3군단은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부대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방대산의 철수로가 얼마나 혼잡하였던지 그냥 서 있으면 떠밀려서 앞으로 나아 갈 정도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대열 속에는 말단의 사병은 물론 국군 제3사단장 김종오준장, 제9사단장 최석(崔錫)준장, 군단 참모장 심언봉(沈彦俸)준장등 3명의 장성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군의 이러한 비참한 도주는 창촌-광원리-하진부리까지 70킬로미터를 내려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5월 27일까지 70퍼센트 정도의 병력과 30퍼센트 정도의 장비가 간신히 수습될 수 있었는데, 어쩌면 이 정도의 병력이 수습된 것만 해도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우측으로 남하한 북한군 3개 군단이 정상적으로 진출하여, 최초 계획대로 3중 포위망을 완성하였더라면, 방대산 및 계방산 일대에서 무방비 상태에서 무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기 때문입니다.


[5월 27일 전투상황도]


  하지만 이러한 예측도 엄밀히 말하면 사상 최대 패전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다녔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라는 가정이 나오는 것이었지, 결코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국군 제3군단을 공산군이 양익에서 완전히 포위하였어도 공중으로 보급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결사항전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저항은 애초부터 생각도 못했고 도망만 다니다 국군은 역사상 최악의 패전을 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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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름과자 2010.08.31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 군단장 유제흥장군이 먼저 비행기 타고 달아나서 그게 부대내에 악영향을 끼쳐서 순식간에 무너진걸로 압니다

  2. 2010.09.03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걸 보고 가마귀 날자 배 떨러진다고 하죠..
    물론 유장군의 책임은 크지만.....

  3. Kim 2010.09.03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나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장군은 맡는 보직마다 참패를 겪었지요. 개전 초 7사단의 궤멸적 타격, 2군단장 재임시 덕천전투 패배 3군단장 재임시 3군단의 현리전투 패배. 이때 밴플리트 장군과의 대면에서 대단한 명언도 남겼는데 뭐 어쨌든 전쟁에서 지휘부의 혼란이 예하병력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좋은 전례라 하겠습니다.

  4. Computer Network 2012.02.10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난 이런 행사를 통해 6.25전쟁이 어떻게 전쟁이 났는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내가 봉사를 많이하고 돈을 아껴써야되는 것도 깨달게되었다
    난 이런 캠페인이 더욱더 개발되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5. expedia deals with regard to airfare 2012.05.21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러한 AA 대단한 위해 고마워 검토와 함께 게시 .. 전 완전히 astounded! 접근의 유형과 비슷한 제품을 잡아.

  6. expedia leasure activities 2012.05.21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그들이 지역 사회와 연결된 거의 모든 주요 국가에 대한 지식을 곱하면하는 진보적 계획이다. 나는 국가의 추가 금액을 동일한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7. 피알앤애드 2014.06.25 1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포스팅 관련하여 사진자료가 필요해서 퍼다 씁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