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경찰의 칠보 발전소 탈환작전(2/2)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5.01 15:39

적의 반격에 대비하여 그날 밤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요소요소에
고지 근무를 하도록 병력을 배치해놓고 차기 작전 채비로
이진찬 보급 주임을 전북 도경 본국(本局)으로 급파하였다.

그의 임무는 이미 그날 전투로 거의 소모한 실탄을
재보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은 아군보다 훨씬 우세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군이 전투 초기 병력을 크게 부풀렸던 과장 전술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진지를 공격하다가 사살당한 공비들의 사체를 확인하고 있다.

예측한대로 적은 야음을 타서 대부대로 공격해왔다.
그들은 아군의 군세가 별 볼일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병력을 재정비,
야음을 틈타 고지와 지서, 그리고 발전소를
포위 공격했던 것이다.

적은 고지의 경우 10미터, 지서는 30미터, 발전소는 50미터,
근처까지 육박 해왔다.

나는 칠보 지서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공비들이 아군이
탈환했던 선왕봉 고지가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고 후방의 보급로가
차단되었다는 연락병의 긴급 보고를 받았다.

나는 죽을 때까지 발전소와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과 함께
예비로 남겨 두었던 실탄까지 모두 지급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의 포위망은 점차 압축되었다.
우리는 실탄은 거의 다 떨어지고 수류탄만 소량 남아 있어
수류탄으로 힘겨운 최후의 대항을 하다가 숨져 가는 대원들도
한 둘씩 생겼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은 전주 본국(本局)으로 실탄을
수령하러 간 이 진천 보급 주임의 신속한 귀대뿐이었다.
그러나 공비들이 칠보에 이르는 각 도로망을 차단해 버렸다는
정보에 우리의 낙담과 불안은 커졌다.

그때 이 주임은 실탄을 싣고 태인까지 도착했지만 공비들의
보급로 차단으로 태인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실탄만 충분하면 공비 대부대는 두려할 바가 없었다.
우리는 결국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실탄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 전멸을 면치 못할 운명이었다.
그 때 아군에게 남은 실탄은 소총탄 1인당 4,5발,경기관총탄 60발,
소련제 기관총탄 5발뿐이었다
이 정도로 적의 부대에 장시간 응전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태인과 연결되어 있는 경비 전화를 들었다.

“이 주임, 실탄을 탈취당하더라도 사력을 다해 칠보로
 들어오라!”
이 주임은 불안한 어조로 대답했다.

“대장님 우리는 불과 세 명뿐인데 불과 세 명이   적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전화기를 통해 결연한 명령을 내렸다.

“우리 결사 특공대가 보급로를 개통했다고 했으니 염려 말고 즉시 태인을 출발하라!”

나는 전화기를 놓고 나서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았다.
내가 전우를 속인 것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전멸의 위기에 있는 부대원들을 구하기 위한 부득이 한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가 않았다.

공비들의 비트에서 노획한 총기들.

이 주임에게 전화로 돌파를 명한 것은 6시 15분이었다.

“출발하라! 돌파 할 때는 양쪽에서 엄호 사격을 하겠다!”
하고 전화를 끝낸 뒤 적이 막고 있는 옹동 길 방향으로
박격포,경기관총,소총을 조준하고 팔목시계를 보았다.

옹동에서 칠보까지 최고 속도로 달리면 7분이면 주파가 가능하다.
1분, 2분, 3분이 지난 뒤 침묵을 깨고 일제 사격을 명령을 내렸다.

“쏴!”

각종 화기가 옹동 방향을 향하여 불을 뿜었다.
그 순간 이 주임이 탄 보급 트럭이 쏜살같이
갈라진 포위망을 뚫고 칠보 지서에 도착하였다.
아차! 한 공비들은 그제야 놀라 중구난방으로 사격을 했지만
이미 트럭은 사지(死地)를 빠져 나간 뒤였다.

탄약이 도착하자 불안했던 대원들의 사기는 고조되고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데도 낮은 포복으로 트럭의 탄약들을
각자의 진지로 운반해갔다.

그 때 실탄이 자동차 운전석의 운전병과 호송원의 가슴에 명중해서
사망케 하고 자동차의 엔진을 관통해서 운행 불능상태로
만들었다.

실탄 보급을 받은 부대는 공비들에게 집중적인 화력을 쏟아 부었다.
공비들도 지지 않고 응전해왔다.

치열한 사격전이 세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세 시간이 지나자 공비들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의 포위망은 부서지고 보급로는 다시 열렸다.

모두들 불사신 같은 전투 정신으로 돌격과 사격으로 칠보 발전소와
지서를 이중삼중으로 포위했던 적을 물리친 것이다.

1월 14일 개시했던 탈환 작전에서 연대가 거둔 전과는
적 사살 68명이었고 노획 무기는 개인화기 12정이었는데,
이중 3정이 M1, 소제 모신 나강이 2정, 수류탄 5개, 실탄 600발이었다.
발전소를 확보하기까지 우리의 피해는 전사 12명, 부상 22명이었다.

탈환 작전이 성공리에 마무리되고 몸이 이상해서 옷을 벗어 보니
살갗이 따끔따끔 아리고 빨갛게 총알이 스친 자국이 여럿 있었다.
단 1,2센티만 통과 위치가 달랐어도 총알은 명중되었을 것이 아닌가!
전선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은 단 1,2센티의 거리차이였던 것이다.

발전소를 확보하고 발전 설비를 살펴보니 적은 취수로에 짚단을
대량 던져 넣어 차단하고 발전기의 모터와 터빈을 파괴하여
가동 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중앙청 전기국에서 온 기사 한 명과 전업회사 기술자들과 함께
복구 공사에 착수하였다.
워낙 엄동설한인데다가 산간벽지인지라 인부조차 마음대로 구하지
못해서 우리 대원들이 옷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물속에 들어가 취수로에 박혀 있는 짚단들을
빼내다가 몸이 얼어들면 잠시 나와 불을 쬐곤 다시 들어가 복구 작업을 했다.

대원들은 살이 얼어 터지고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지면서도
노력한 끝에 취수로를 복구하였다.
송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감격은 어느 승리 못지않은 것이었다.

탈환 한 뒤에 경찰 1개 대대가 경비했던 칠보 발전소-1953년 사진

우리는 적이 물러간 뒤에도 당분간 칠보에 주둔하며
발전소를 수습하는 한편 발전소를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서인근 공비들을 소탕하는 후속 작전을 구상하였다.

일대의 공비들을 쓸어내지 않으면 칠보 발전소의 안전은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경비 사령부의 자동차 사정이 완화되자 응원부대가 계속 도착하여
조직적이고 기동력있는 작전 계획을 수립할 수가 있었다.

후속 작전의 공격 첫 목표는 공비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인근 독고봉을 중심으로 하는 안시내 고지 점령이었다.
두 번 째 작전 목표는 미수복지인 칠보 인접 정읍군
산내면과 산외면의 해방이었다.

1951년 2월 4일,칠보 발전소를 탈환하고 3 주 뒤인
이 날 우리는 준비하던 후속 작전을 개시하였다.

목표는 소백산맥의 연줄로서 가장 험준한 봉우리인 독고봉이었다.
정읍군당의 정예 기포병단이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지이기도 했었다.

그간 아군이 이 고지를 수차 공격을 해보았으나 그 때마다
희생만 컸을 뿐 실패를 거듭했었다.

우리 부대는 칠보 발전소를 확보한 이후 적에게서 노획한
소제 기관총 -사진의 데그챠레프 [떽뚀로쁘]경기관총- 50여발을 쏘며
공격을 개시하여 드디어 세시간만에 목표를 점령했다.

독고봉 전투는 제 1중대장 우 희갑 경위가 발전소로부터
산외면을 향해 공격하고, 2중대는 내가 직접 지휘하고 고지를
우회하여 적의 정면을 공격하는 작전에 따라 행해졌다.

독고봉에 꽂힌 인공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꽂고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실로 감개무량한 생각이 들었다.

독고봉 점령 작전을 완료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하고 정비를 하면서
열흘정도 소강상태의 기간을 가졌다.

2월 15일.

도경 본국 백 한종 경무과장과 박 상남 공보주임 인솔하에
위문 예술대가 우리의 부대를 찾아 왔다.
대한 부인회 전주 지부장 김 채봉 여사와 대한 부인회 정읍군 칠보면 지회장
서 순자씨,김 외준 정읍 서장도 동행했다.
전북 도지사의 표창장과 정읍군수, 발전소 직원일동,정읍 칠보 면민 일동의
감사장 수여식후 공보실 위안대의 위문 공연이 있었다.

‘조국의 태양’이라는 연극과 김 보라의 노래는 일품이었다.
전선에서 무디어진 전투 경찰들의 마음에도 흘러간 노래는
훈훈하고 신선한 혈맥을 감돌게 해 오랜만에 즐겁고 유쾌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2월 16일.
독고봉 점령의 후속 작전이 개시되었다.
목표는 미 수복지인 정읍군 산외면과 산내면의 탈환이었다.
먼저 산외면에 진격하여 그 곳을 완전 복구시켜 지서와 면 행정기구가
비로소 기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이어서 일주일 동안 산내면 지서 관할 능교리 뒷산에 근거지를
둔 도당 직속의 카츄샤 병단과 번개 병단을 계속 추격 격멸하여
산내면을 탈환하였다.

산외면과 산내면에 가한 후속 토벌작전의 전과는
대략 적 사살 72명, 생포 23명이었고 무기 노획은 소련제 경기관총 1정,
소련제 모신 나강 소총 2정외 총기 10정, 일본도 3조, 사이드 카 1량,
박격포탄 7발, 수제(手製)수류탄 2발이었다.
우리 측의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6 명이었다.
전사자중에는 적진 백여 미터까지 돌진하다 적탄에 맞아 쓰러진
권 홍문 경위가 있었다.

전사한 전투경찰 박 원기의 귀향과 어머니의 서러운 통곡

그의 고향은 산내면이었는데 아깝게도 고향의 수복을 보지 못하고
전사한 것이 전우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송전 시설이 복구되어 송전이 가능하게 된 후 우리 부대는
잠시 산내면에 주둔하여 여태껏 공비의 수탈이 심했던 산내면의
치안 회복에 주력하였다.

정읍군 산내면은 산간 지대로서 주민은 반농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남자들은 모두 길게 머리를 땋은 총각들이 흔치 않게 보이는,
그야말로 전통적 전통과 농촌 전래 풍속이 그대로 살아있는 18세기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우리 부대의 손으로 수복되었을 때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탈환 작전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주민들은 9.28수복이후 도시에서 도주한 적색분자 출신 공비들이
몰려들어 식량과 의류를 약탈하는 등 극심한 횡포에 시달려 왔었다.
리는 토벌 때마다 공비 아지트에서 몰수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주민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작전상 또는 발전소 공사 진행상
주민의 노력 동원이 필요할 때는 부대의 주,부식을 절약해서라도
품삯을 꼭꼭 지불해주었다.
주민들은 공비들에게 품삯을 받아 본 일이 없었던지 우리가
품삯을 주자 처음에는 희귀한 이롤 여기는 듯했다.

칠보 발전소 탈환을 계기로 전개한 작전으로 전북 내륙지방의
취약지구를 회복한 뒤에 20일 가까이 평정 사업을 전개했던 우리는
이 지역의 위협이 제거 되었다고 판단되자 1951년 3월 3일
명에 의해 작전 종료를 하고 전주로 철수하였다.

막강한 대군의 적을 토벌하러 소수의 병력을 인솔하고 대응하러
출동하던 1월 13일 부터 따져 보니 무려 50여일 만의 본대 복귀였다.

칠보 발전소에서 송전되는 전기로 휘황한 전주 거리를 보는 순간
대원들은 눈물이 나올 만큼 가슴이 뭉클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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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roofing nj 2013.06.20 2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병력을 배치해놓고 차기 작전 채비로
    이진찬 보급 주임을 전북 도경 본국(本局)으로 급파

  3. privatlånmedbetalningsanmärkning.net 2013.08.01 07: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이 전투 초기 병력을 크게 부풀렸던 과장 전술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4. home accessories 2013.08.19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님 우리는 불과 세 명뿐인데 불과 세 명이 적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5. sida 2013.08.27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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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순자씨,김 외준 정읍 서장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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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순자씨,김 외준 정읍 서장도 동행했다.

  21. Crib and Whip Articles 2014.03.27 2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송전 시설이 복구되어 송전이 가능하게 된 후 우리 부대는
    잠시 산내면에 주둔하여 여태껏 공비의 수탈이 심했던 산내면의
    치안 회복에 주력하였다.

전투경찰의 칠보 발전소 탈환 작전(1/2)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5.01 15:28

6ㆍ25전쟁 기간동안 남한 도처에서 준동하던 공비들과 싸운
군대는 국군도 있었지만 전투경찰도 있었다.

전투 경찰의 호국 공적은 전사자 숫자로서 입증된다.
1945년부터 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의 8년간의
세월 동안 전투 경찰 전사자들은 무려 1만 명이 넘는다.

총 30만 명의 한국인이 싸웠던 참전 8년간의 월남전에서
전사한 분들이 5,000명이었던 사실에 비하면 두 배나 되는 피해다.

전투 경찰들은 장비도 열악했었고 훈련의 정도도 낮았다.

9.28수복 후 공비들이 창궐하던 지역 경찰서는 중앙에서 무기 지급을
해주지 못하자 유지들에게 성금을 거두어 암시장이나 미군들에게서
무기를 구입해서 공비를 토벌했었다.

공비들은 이런 배경으로 허약한 전투력을 가진 전투경찰을 멸시했었다,
그러나 남한 중심부 산간지역에서 준동하던 공비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말살시킨 것은 전투 경찰들이었다.

전투경찰은 군이 가지지 못한 지역 밀착의 이점을 살려 매복과
사찰과 수사로서 공비 조직의 실핏줄을 하나하나 말려 죽였다.

그러나 전투경찰들의 활약과 희생은 공비들이 준동하던 지역에서만
먼 전설처럼 전해오기만 할 뿐 그 전투 기록은 너무도 보기 힘들다.

이들의 공적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질 우려에 큰 불안을 안 가질 수가 없다.

전쟁 기념관의 전투경찰 전사자 명단[1945-1953],
공비들이 준동하던 호남지방의 전남과 전북 경찰국 소속 경찰들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블로그에서 가능한대로 6ㆍ25전사의 당연한 한 부분으로 존재해야할
한국 전투 경찰의 전투 기록을 발굴,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는 지리산 공비의 대명사 남부군 이현상 부대와 최후까지 추적해서
남부군과 이현상의 종말을 가져오게 하고 사살 된 그의 사체를 화장하여
섬진강에 뿌려준 차일혁 총경의 칠보 발전소 탈환작전 수기이다.

차 일혁 총경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중국의 중앙 군관 학교를
나온 뒤 귀국, 국민 방위군과 육군을 거쳐 경찰에 투신했다.

공비들이 창궐하던 9.28 수복후 경감의 계급으로 전북도경 전투경찰
18대대장이 된 차일혁 총경은 여러 공비 토벌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지전사[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와 그 후신인 서전사[서남부 지구 전투 사령부]의
연대장으로서 공비 토벌에 큰 활약을 하였다.

전후 행정 경찰로 변신하여 임실, 충주, 진해, 경찰서장등을 거쳐
공주 경찰서장이던 1958년 8월8일 금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작고하였다.

아래 칠보 발전소 탈환 작전기는 차 일혁 총경의 아드님 되는 차길진 씨가
아버지가 싸우시던 현지를 방문하고 당시의 관계자 분들을 면담한 결과를 토대로
자서전 형식으로 쓴 부친의 일대기 중에서 빌려온 것이다.

차일혁 총경

1951년 1월 12일이었다.
수복 후 경감으로 임관하자마자 급편한 전투경찰 18대대를 지휘하여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서 준동하던 공비들을 성공적으로 소탕한 나는
전주 전북 도경에서 급하게 소집한 공비대응 작전회의에 참석했다

1.4 후퇴 직후 남한에서 유일하게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 정읍군
칠보면 섬진강 상류 운암호 [지금은 옥정호로 이름이 변경되었다]에 있는
칠보 발전소가 공비 부대의 공격으로 완전 포위되었다는 것이다.

아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호남 지방은 아직도 공비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회문산에 공비 도당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고 쌍치면 가마 골에
공비들 연합 사령부가 준거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읍군 칠보면
시산리에 소재하고 있는 칠보 발전소가 공비들에 의해서 완전 포위 된 것이다.

칠보에 파견된 이 원배 경위의 아(我)부대와 칠보 지서원,
향방(鄕防)대원 및 학도병들은 실탄이 떨어져 전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식사조차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칠보 발전소와 칠보 지서의 함락이 경각에 달려있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칠보 방어 소병력의 아군을 포위하고 있던 공비 부대는
무려 2,000명으로 추산되는 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칠보 발전소는 남한 유일의 전기 생산 발전소였다
강원도 영월 발전소가 적에게 점거된 직후라
남한 일대의 송전을 도맡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적의 포위로 송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호남 일대 평야 부근의 관개에 큰 역할을 하는 동진 수리조합의
저수지[운암호-지금의 옥정호]까지 적의 수중에 들어가 버려서
우리가 받는 피해가 컸기때문에
중앙 정부에서도
이를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앙 치안국의 성화와 압력도 대단했다.

경비계장 정 순식 경감이 침통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풍전등화에 위기에 놓인 발전소와 지서를 탈환하고 죽음 직전의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서 구의면에서 토벌 전투를 끝내고 집결지
행동중인 나의 18대대 출동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라이프 잡지 사진, 차량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서 고개 위에 설치한
감시 초소에서 고개 아래 차량들에게 통과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직도 99식 소총을 사용하고 있다.

11사단 13연대가 현재 전주에 주둔하고는 있었으나 마침 순창에서
작전 수행중 엄청난 손실을 입어 출동이 불가능해서 칠보 지서와
칠보 발전소에 증원할 만한 부대는 우리 부대 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상황파악을 한 나는 입을 열었다.
“전투를 하기 위한 전투 부대인만큼 전투를 위한 출동은 
 당연한 일이나 선결 문제는 부대 수송용 차량의 확보입니다.
 차량만 배치해 주면 지금 곧 출동하겠습니다.“

1.4후퇴 직후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져 중공군이 ‘천안에 왔네, 대전에 임박했네’
하는 헛소문들이 돌아 부유층과 권력층들이 피난 짐을 나르느라고
대부분의 민간 차량이 피난 행렬에 들어섰기 때문에
공비토벌을 위한 차량 동원은 용이치 않았다.

지방의 치안이 시시각각 위협받고 있는데 대다수의 동족을 뒤로 하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대부분의 자동차가 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안전지대로 향했기 때문에 전투 부대가 출동하려고 해도
차량 동원이 어렵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한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출동을 그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력 끝에 전북 도경의 스리쿼터 3대, 김제 경찰서 트럭 2대,
마침 치안국에서 온 차 1대등 겨우 5대의 배치를 받아 일단
나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구이면 항가리로 향했다.

전라북도 경찰 60년사에서 빌려옴. 1952년 고창 경찰서 공음지서. 공비침투를
막기 위해서 지서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인기있었던 노획품인
데크챠레프 기관총들이 보인다.

1월 13일 저녁
5대의 차에 불과 105명의 대원과 중화기를 싣고 항가리를 떠나 칠보로 출정했다.

음력 섣달의 어스름한 초승달 밑아래 영하 9도의 추위, 쌩쌩 몰아치는
혹독한 맞바람을 뚫고 달릴 때 뼛속 마디마디가 얼어붙는 듯하였다.

불과 105명의 병력으로 2,000여 명의 적과 부딪친다는 것은
전략상 어떻게 보아도 승리를 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비겁하게 동료를 버리고 후퇴하느니 적과 부딪쳐 돌가루처럼
깨끗이 산화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기에 용기가 저절로 났다.

적과 싸우다 함께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는 했지만 한편 적의
포위망을 뚫고 우군 동료들과 양민들을 구출한 후에 남한에서
유일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는 칠보 발전소를 탈환해서
원상 복귀시키겠다는 결의만은 버리지 않았다.

혹한의 한밤중 거친 산길을 달리던 자동차 한 대가 금구에서
고장이 나서 그 차에 탔던 30명을 내려놓고 75명만이 다음 날
아침 5시 경 태인에 도착했다.

태인 지서의 상황 보고에 의하면 적은 칠보, 옹동 방면을 완전히
포위하고 시시각각으로 태인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미 포위당한
우군은 전멸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70 : 2,000.
아군과 칠보를 포위하고 있는 적과의 비율이다.
고금의 전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비율이다.

더구나 적은 지형상 유리한 고지를 모두 점령하고 있고
아군보다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있다.

아무리 작전 계획을 구상해보아도 어떤 큰 기적이 없으면
도저히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고 오전 6시 출발, 차를 몰아 옹동으로 향했다.
옹동에 거의 이르니 칠보를 포위하고 있는 적의 기척이
칠보 언저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졌다.

칠보와 지척지간인 옹동에 다다랐을 때는 긴 겨울밤이 샐 무렵이었다.
“이제 구부러진 길모퉁이만 돌면 적과 직면한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앞에 보이는 길모퉁이가 무슨 암시를 주는 것 같았다.

“그렇다! 차를 정지시켜라.”

급커브 하는 길 앞에서 공비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4 대의 차를 세워놓고
먼저 1대씩 커브를 돌아 저편으로 갔다가 헤드 라이트를 끄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고 또 다음 차가 갔다가 불을 끄고 되돌아 오고
이렇게 하기를 여러 차례를 하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빨간 신호탄을 계속 쏘아 올려
아군의 도착과 전개를 칠보 지서와 발전소에 있는 우군에게
알려주고 동시에 마치 적에게 수십 대의 차량으로
수송되는 대병력이 증원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기만 행동을 했다.

예측한대로 적은 대규모 병력이 공격해 오는 줄 알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산 중턱의 공비들을 향하여 일제 사격 명령을 내렸다.
각 대원들의 총구는 불을 뿜기 시작했고 그 위세는 어둠 속에서는
분간할 수 없는 엄청난 숫자인 것처럼 당당했다.

당황한 적들은 일부 포위를 풀고 비껴 시작하였고 그 틈을 이용하여
계속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포위를 뚫고 칠보 지서에 도착하자마자
지서를 포위한 적병들이 발사하는 실탄들이 비오듯 곁에 떨어졌다.

지서에서 3일간이나 적에게 갇혀서 이제는 총알조차 떨어져 최후의
백병전을 각오하고 있던 지서원 및 향방대원 학도병 등 300여명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나는 김 진환 지서주임의 보고를 받음과 동시에 박격포로 지서와
발전소 사이에 있는 시산 고지를 때리기 시작하는 한편 지서 후방에 있는
선왕봉 고지를 우희갑 경위로 하여금 학도병을 이끌고 올라가서
점령하게 하였다.

장수군 산서 지서 보루

서의 안전을 확보한 작전의 다음 단계는 발전소의 안전 확보였다.
칠보 발전소를 경비하다가 적 대병력의 기습으로 발전소 지하실에
고립되어 있던 아군 175명에게 박격포를 지원할테니 산내면에 통하는
800고지 장군봉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을 보내야 했다.
작전을 통지해주고 두 부대가 동시에 공비들을 협격하자는 작전이었다.

칠보 지서에서 발전소까지 불과 1.5 킬로에 불과했으나 사방의
고지들을 적들이 점령하고 있어서 발전소까지의 진출은 목숨을 걸어야했다.

무모하지만 다시 특공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먼저 현지 지리에 밝은 학도병이 지원하여 지서 옆의 개천 뚝 밑을 따라
엄폐하며 발전소로 나가던 중 1백 미터를 남겨 놓은 지점에서
남방 고지에서 날아온 적탄에 맞아 나동그라졌다.

다시 한 학도병이 나섰다.
그는 손에 작전 명령서를 쥐고 200미터를 나갔으나 다리에 실탄을 맞고 또 쓰러졌다.
바라보는 대원들의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나는 더 이상 학도병을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한섭 경위의 화랑 소대원 중 자원한 한 대원에게 다시 작전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우리 모두는 일심으로 그의 성공을 빌었다.
그러나 그 역시 300미터 지점에서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지고 말았다.

대원들은 모두 숙연한 채로 말이 없었다.
적의 총탄은 불을 뿜었지만 부대원들 사이에는 팽팽한 고요만이 감돌았다.

나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 때 다시 한 대원이 앞으로 나섰다.

“대장님! 제가 가겠습니다!”

그는 화랑 소대장 이한섭 경사였다.
학교 선생이 꿈이라는 이한섭은 노총각이었다

“가면 죽을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가겠느냐?”
“제 고향은 제가 지켜야죠.”

소대장에 이어 같은 화랑소대 대원 이영수와 심갑천, 양성근이 앞으로 나섰다.

“너희들도 죽음을 마다않고 같이 가겠다는 것이냐?”
“함께 죽겠습니다. ”

네 명의 대원은 즉시 배낭에 흙을 잔뜩 담아서 방패처럼 둘러메고
제방 밑을 포복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엄폐물을 이용해서 네 명의 결사대는 낮은 포복으로 이동하자
주변 공비들이 사정없는 총탄 세례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네 명의 결사대는 무사히 사격 노출 지대를 벗어났다.
휴우우! 하고 모든 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작전명령은 이원배 중대장에게 전달되었다.
나의 신호로 증원대와 지서 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다.
칠보 발전소에 포위 고립되었던 아군 175 명도 우리 부대의 공격으로
적이 지리멸렬 도주하기 시작한 틈을 타 최후의 위기에서 뛰어 나와
환호성을 지르며 양면 공격을 전개했다.

적도 우리 편에 대한 집중사격을 가해 자동차 타이어가 터지고
총탄이 계속 비오듯 펑펑 날아왔으나 우리는 적을 향해 돌진하였다.

적은 점차 도주하여 선왕봉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왕봉을 따라 후퇴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학도병을 이끌고 여섯 번 공격하였다가 여섯 번 물러난
제 1중대장 우희갑 경위를 불렀다.
“너도 알다시피 공비들이 경찰들을 검은 개라고 부르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서 무슨 빨치산 토벌을 할 수 있겠느냐?
 이번이 일곱 번째 후퇴다. 또 후퇴한다면 모두 다 여기서 죽자!”

우희갑 부대는 옥쇄로 부딪쳐 죽겠다는 각오를 하고
일곱 번째 적을 공격하여 발전소 후방 고지 장군봉과 8백고지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밀고 밀리는 육박전 속에서 공비들은 발전소 지역에서 완전히 퇴각해 버렸다.

그 때는 시각이 어둠의 장막이 덮이기 시작하는 오후 5시,
적과 교전한지 11시간 만이었다.

이 때가 1월 15일이었다.
선왕봉 고지, 시산 고지, 남방 고지, 장군봉, 800고지 등이 모두 탈환한 뒤에
발전소에 고립되었던 아군 부대와 감격적인 상봉의 악수를 나누었다.

3일간 적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어야 했던 아군 동료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배부르게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그 날 저녁은 선왕봉 전투에서 어린 학도병의 몸으로서 크게 용전한
학생이 있어서 그를 불러서 공로를 치하하였다.
그는 17살의 김우술이라는 학생이었다.

적을 단시간 내에 몰아내고 지서와 발전소를 확보한
기대 이상으로 전과를 올린 것은 큰 천운이라고 생각되었다.(계속)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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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edical pills xls 2013.06.01 0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간 적에게 포위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어야 했던 아군 동료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배부르게 제공할 수.

  3. debt relief 2013.06.09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전 8년간의 월남전에서
    전사한 분들이 5,000명이었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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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의 공적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질 우려에 큰 불안을 안 가질 수가 없다.

  8. good resource 2013.08.19 0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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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lån med betalningsanmärkning 2013.10.12 2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주 경찰서장이던 1958년 8월8일 금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작고하였다.

  14. Resouces 2014.01.18 1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서가 굉장 난 정말 기사 작가에 대한 그것과 엄지 손가락을 즐겼다

  15. Quality Cufflinks 2014.02.03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들의 공적이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질 우려에 큰 불안을 안 가질 수가

  16. choosing cufflinks 2014.02.03 2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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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perfect gift ideas for boyfriend 2014.02.11 0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주 경찰서장이던 1958년 8월8일 금강에서

  20. Discover China US Ability 2014.03.27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희들도 죽음을 마다않고 같이 가겠다는 것이냐?

  21. علاج الادمان 2014.04.03 22: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희들도 죽음을 마다않고 같이 가겠다는 것이냐?

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2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6 08:23


 


처형을 앞둔 경찰관 살해 공비들 .
경찰을 죽이고 탈출을 시도해서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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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있기는 한 고역이었다.

참기가 어려워 뒤척이는 순간 누가 신호를 보냈다.

“쉿!”

분명 적이 멀리서 흔적을 보였다.

공비들은 한 줄로 서서 달빛 속을 걸어왔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산들바람을 타고

먼저 대원들에게 도착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했다.


공비들이 마을 앞을 태연자약하게 통과해서 오는 것을 보니

과연 소문대로 대장 외팔이는 대담한
성격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공비들이 고추밭에 들어서자 마른 고춧대가 사각거리며

소음을 냈다.


공비들 특유의 악취가 짙어 지더니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그리고 어둠 저편에서 공비들의 상반신부터 노출이

되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공비들이

잠복 지점으로 들어섰다.


20미터, 10미터, 5미터, 소총을 든 공비 선두 첨병이 

내 앞을 지나갔다. 등의 짐을 이기느라 고개를 앞으로

뺀 적들이 2,3미터 간격으로 우리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완전한 돌출 타겟이었다.

네 명이 나의 정면을 통과했던 순간이었다.

“ 쏴라!”


빠바바앙 -!

일제 사격에 돌출 사격은 무너져 내렸고

대원들은 스프링처럼 공비대열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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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았던 월남의 매복전에서도 일제 사격과 크레머를

터뜨려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하고도 이렇게 총검돌격을

하는 일은 없었는데 하여튼 이 시절 한국 전투경찰이
대단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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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닥쳐야 할 육박전의 대상은 없었다.

기습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 두어 명이 노루처럼

이리저리 뛰어 달아나는 뒤에다 대고 대원들이 따라가며

총을 쏘았다.


미처 짐을 벗지 못한 적 한명은 총 개머리 판에

타격되어 생포됐으며 나머지는 총이나 약탈 짐을 지고

둑길 아래에 쳐 막혀 있었다.


생포 1명에[김경준, 선전책] 사살 5명의 전과였다.

일차 타격으로 부안 공비 9명중 6명을 섬멸 한 것이다.


생포자가 머리에 손을 얹고 끌려오자 나는

신원확인 질문으로 시간을 끄는 사찰계장과 우두거니 서있는

경비계장을 제치고 이들을 직접 심문했다.

“ 제 2의 비상 집합 장소는 어디냐?”

“-----”
“제대로 말하면 살려 주겠다.그렇지 않으면--”

즉결 처분한다는 위협이었다.


“천연암 아래요.”

“제 3의 장소는?”
“그 너머 고지라우.”

“무장은 소총 몇 정이었나?“
”석 자루 뿐이었어유.“

소총이 3 정뿐이라면 달아난 적은 모두 비무장이라는

결론이다. 시체에서 거둔 총이 석 자루였다.


나는 경비계장에게 생포자를 재갈 물리고 앞세워

곧바로 제 2, 제 3의 비상 장소를 찾아가도록 시켰다.

대원 중 6 명이 그 뒤를 따랐다.


나와 사찰 계장은 공비 시체 검사를 맡았다.

내가 죽은 공비들 시체에 섞여있는 외팔이의 시체를 검사하고

있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던 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어! 이거 멀쩡하네!“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죽은 시체로 보였던 공비에서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놔라! 이 싸가지 없는 개들아!”


나는 달려가 보았다.

여자 공비였다.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다량의 출혈을 한 것이

어둠 속에서도 확인 되었다.

그녀는 악을 쓰며 죽여주기를 원했다.

“언제 입산했나?”

“묻지 마라 이놈아 ! 나는 혁명 전사다 어서 죽이라 !”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싶었다.


그 녀는 결국 힘을 모아 “조선 의용군가”를 부르고

대원에게 처형당했다.


도주한 두 명의 공비는 제 2의 접선장소에서

체포가 되었지만 한 명은 끝내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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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공비중  한 명인 임한근은 김두운씨와

줄포 국민 학교 동창으로 밝혀져 그가 구해 내려고 노력했지만

수포로 돌아가고 친구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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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공비들도 군경이나 그 가족들을 함부로 죽였지만

군경도 포로들을 가차없이 즉결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붙잡힌 포로 세 명도 김두운 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찮게 생각한 부안 경찰서 사찰 계장이
모두 사살해버렸다.

어두운 한국사의 한 시절이었다.

김두운 씨는 이 사건뒤에 생포한 공비는 처형이 아니라
반드시 설득하고 감화시켜 전향시키기로 맹세했다.



죽음이 일상화 되었던 6·25전쟁후 한국.
여순 사건때 반란군들이 학살한 무고한 양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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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이야기가 있다.

전쟁이 터지고 김두운 씨는 동료들과 다급한

후퇴 길에 올랐다.

시골 고향에서는 형님이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날 도주했던 공비가 따발총을 가진 무장병을 데리고

김두운 씨 가족을 몰살하러 왔다가 다행히 동구에서

형님을 만나 이미 김두운 가족이 좌익에게 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차며 그대로 돌아갔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중국에서 공산화 대박을 터뜨린 모택동의 신화를

재현할 꿈을 가지고 입산했던 수 천 명의 남한 공비들은

모두 섬멸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로 소위 유격활동을 할 구역이 너무 좁았고

주변도 인구 밀집지역으로 뻗어나갈 공간도 없었다.


두 번째로 북한과의 연계 실패다.

북한은 공비들이 다 섬멸되기는 손가락을 물고 구경만

했지 한 푼의 지원도 해주지 못했다.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가 식량 확보의 실패다.

이것은 첫 번째의 실패이유와도 연관이 있다.

빨치산들은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고

식량을 공급해줄‘해방구'도 인구 밀집의 남한에서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투 경찰 경비아래 수확하는 농민들.
이 단계부터 경찰은 식량을 공동관리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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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공비들의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공동 추수를 독려하고 수확물은 지서에 공동으로 보관시켰다.

부락민들은 식구의 한 끼만 가져가서 밥을 해먹도록 했다.


쌀이 손에 안 들어오자 공비들은 식량을 찾으러 민가로 내려왔다.


경찰은 이들을 매복전술로 맞받아 쳤다.

식량이 이들 입으로 가져가기 직전 좌절시키는 작전이었다


마침 내가 찾아낸 더 큰 경찰 매복 전술의 성공적인 사례를 

조금 이른 시기의 것이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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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산의 식량 사정은 더 나빠져서 대원들이 며칠씩 굶는 날이

  많았다. 1950년 4월 16일 도당 간부 몇 사람만 남겨놓고
  무장대원
40명 비무장 대원 20명, 모두 60명이 합쳐
  보급투쟁에 나섰다.


  구례 간전면 제기암 골에서 백운산 상봉은우회하여

  진상면 야지로 나가려는 것이다.

  그것은  결사적인 시도였다.

 

  이틀간의 잠복 끝에 가까스로 식량 확보에는 성공했으나 
  돌아오는
도중 고리봉[상봉]근처에서 앞질러 와서 매복하고 있던

  경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다 .

 

  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쫓기며 귀환을 시도했으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찰의 추격으로 겨우 20명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다.


  이로서 전남 도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식량을 비롯한
  제반 사정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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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시간이 지나고 경찰이 매복 토벌을 체계화 하자

식량 확보는 이들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전쟁 후반은 공비들은 식량 확보에 모든 전력을 쏟는

기현상의 유격전이 벌어졌다


공비들에게 식량은 생명이었고 이의 확보가

바로 전쟁이자 전투였다


식량 약탈은 보급 투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계급투쟁이 공산주의자의 목표인데 남한의

공비들은 식량약탈 투쟁을 주업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농민해방이니 부르조아지 타도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때깔 좋은 소리는 그들에게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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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비들은 자주 저녁 식사시간에 동네를 급습했다.

식구들의 밥상을 통째로 빼앗아서 미친 듯이 쓸어 넘고도

부족해서 밥을 더 담은 밥그릇을 가지고 다니며 게걸스럽게

밥을 먹을 정도로 굶주렸었다니 공비들의 뱃속

사정을 짐작할 만하다.



항공 촬영한 호남 농촌지역
공비 아지트가 있는 산에는 식량이 없었다.
식량 공급처인 농촌지역의 확보 실패가 공비를
죽음의 보급투쟁으로 내몰았다.

공비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 농촌으로 오는 길에
경찰이 설치한 '매복'이라는 죽음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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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쌀 강탈해간다는데 좋아할 농민들이 없었다.

인심은 당장 돌아서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에 호의를 가지던 주민들도 한번 이라도

약탈을 당하면 당장 경찰 편으로 돌아섰다.


물고기인 공비들의 물이 되어줄 농민들은

그들을 적대시하고 경찰 토벌에 협조했다.


그러나 공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보급투쟁은

더욱 먼 거리까지 확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자기들에게 등을 돌리는 주민들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고 오고 가는 장거리에 여러 매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짓이었다.


과거 빨치산 생활을 경험한 분에 의하면

공비들이 마치 침투 간첩이 하듯 식량 약탈의

루트를 개척해 놓으면 경찰들이 단 시간 내에 귀신 같이

파악해서 매복을 했다고 회고했다.

즉 자신들의 아지트는 수십겹의 경찰 매복의 그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보급투쟁은 목숨을 걸어야 했었다.
앉아 있어도 죽음이 있었고 서서 움직여도 죽음이 있었던
것이 공비들의 운명이었다.



희생당한 전투 경찰 박원기의 장례식.
그칠 수없는 어머니의 통곡이 너무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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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의 공비들은 모택동의 정강산이나 연안의 화려한

꿈 대신 거지와 도둑이 결합된 화적떼로 퇴화하여 볼품없는
소멸의
길을 갔다.


식량 부족이 공비들을 말려 죽인 것이다.

공비들을 말려 죽였다고 할만한 매복전술은

한국의 전투경찰들이 몸으로 부딪히고 희생하면서 터득한 것이다.


한국 전투 경찰의 매복전술은 육군 대부분의

전술 교리가 미국 FM에서 가져온 것에 비하면 토종

한국형 전술이다.


나의 좁은 지식에 나중에 채 명신 장군이 월남에서 사용했던

중대기지 전술과 중공군 인해전술에 수류탄 대량 투척으로 맞섰던

고지 방어 전술 외에 이에 비견할 특별하게 폭 넓게 적용된

한국형 유명 토종 전술은 생각나지가 않는다.


군사 전문가들은 군의 환경을 맞추어서 자생적으로 창안되고

개발된 전술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중국 모택동의 유격 전술이나 이스라엘 군대가 개발하고

활용해온 이스라엘 식 전격전 전략은 이 말을 증명해준다.


나는 20년 전 남아공의 특수 부대가 사막거주 부쉬만 종족들의

비법인 동물이나 사람 발자국 추격 술을 세세하게 캐묻고
연구하고 체계화해서 특수부대 교육용 매뉴얼로 만든 것을
보고 감탄한바 있었다.

특수부대는 이 교범으로 부대원를 훈련시켜 반도들의
추적 작전에
활용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6·25전쟁 이나 월남전중 선배들이

몸으로 희생하며 터득하고 개발한 전훈을 교리로서

정리하는 측면이 매우 부족했다.


6·25전쟁 후 전투경찰의 매복 전술의 세련도는 분명 육군의

그것보다 한 수 앞선 것이었다.


한국 전투경찰의 매복전술이 정리되고 교범으로 정리되어
후배들에게 전달이 되었더라면
월남전등에서나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고 한국의
전투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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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이아빠 2010.07.06 2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http://www.wonbuddhism.or.kr/wonnews/interview/i1108.html

  2. 냥햏 2010.07.07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ㄱ-; 안그래도 소통이 잘 안된다는 평을 듣는것 같은데 .. 뎃글마저도 '승인'이 필요한건가요? 가끔 와서 좋은글 읽고 갑니다만 .. 운영 방식이 너무 구시대적인 것 같아 안타깝네요.

  3. Gray 2010.07.11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읽고 갑니다.

  4. 요츠 2011.05.23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뜨질 않네요..
    사진을 보고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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