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력'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8.10 70. 매봉 및 한석산 전투 (3)
  2. 2010.04.02 31. 낙동강아 잘 있거라 (7)
  3. 2010.03.17 메뚜기로 시작한 도전의 역사 (62)

70. 매봉 및 한석산 전투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10 09:04

 

  공산군의 제5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자,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즉시 반격에 나섰습니다. 전임 사령관 리지웨이는 일단 상황을 본 후 점진적으로 공세로 전환하는 신중한 스타일의 지휘를 하였지만 밴 플리트는 저돌적인 성격대로 즉각 추격을 결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공산군의 전투력이 고갈된 취약시기를 이용하여 적을 38선 이북으로 완전히 밀어 붙이고 공산군에게 차기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재편성과 휴식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밴 플리트는 곧바로 반격을 개시합니다]

(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하고 있는 모습 )


  사실 이것은 상당히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약점이 무엇인지 간파한 이상 그들이 회복할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5차례의 공세를 통해서 중공군은 한번 공세가 끝나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의 회복기를 두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알게 된 이상 집요하게 파고들어 적을 괴롭게 만들수록 중공군의 재정비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이번 중공군의 공세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인 중동부전선을 좀 더 위로 쳐올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세 당시에 공산군 주력을 서부전선에서는 훌륭히 막아내었지만, 오히려 중공군 조공이 견제 공격을 가한 중동부 전선에서 아군은 고전을 겪었습니다. 전선 중앙의 사창리에서 벌어진 국군 제6사단의 붕괴는 서부전선에서 선전을 펼치던 아군이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한강 이남으로 철군하여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더불어 중-동부전선의 주 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간 도로가 북한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였습니다. 따라서 태백산맥 서쪽의 국군 제3군단과 동해안 연안의 국군 제1군단은 보급로가 제한을 받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밴 플리트는 전술도로의 탈환이 시급함을 깨닫고 서부전선에서 적의 공세를 좌절시키자마자 즉시 반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밴 플리트는 전방 각 사단들에게 5월 2일부터 위력수색과, 중요목표지역에 대한 공격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동부전선의 국군 6개 사단이 5월 7일, 미주리 선(Missouri Line)으로 명명된 춘천-인제-미시령-속초를 연하는 선을 향해 일제히 반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히 확보해야할 고지가 인제의 우측을 감제하는 위치에 있는 한석산과 매봉이었습니다. 당연히 적 또한 이곳을 계속하여 차지하려 하면서 연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한석산과 매봉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 포로가 된 북한군 )


  당시 한석산을 공격한 부대는 국군 제3군단 9사단 30연대였는데, 이 전투에서 제30연대는 72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적 사살 895명, 포로 42명과 4트럭 분량의 보급품 및 탄약을 노획함으로써 지난 제5차 공세 당시에 깊숙이 남진하여 있던 북한군에게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 전투는 1,000미터가 넘는 산악 능선에서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는데, 여담으로 참패를 당한 북한군은 약 1년 전 6.25전쟁 초기에 바로 인근의 홍천에서 굴욕을 겪었던 제12사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30연대가 혈전 끝에 확보한 한석산은 차후공격을 위한 유리한 발판으로 사용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실 고지는 차지하면 적을 감제하기는 쉽지만 후속 보급이 어려워 지속적으로 확보하기가 생각보다는 어렵습니다. 특히 전선이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어 유동적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뒤이어 실시된 중공군 제6차 공세를 견디지 못한 국군 제3군단이 현리 일대에서 붕괴되었을 때 어렵게 확보한 한석산은 이 같은 이유로 곧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음 공세를 준비완료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제5차 공세를 슬기롭게 막아내고 5월 2일부터 5월 중순까지 곧바로 실시된 반격작전으로 전선을 12~14킬로미터를 북상시켜 38선 일대에 다시 고정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중공군의 출혈을 유도하며 전선을 오히려 북상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패로 막을 내린 제5차 공세에서 공산군은 아군 전선의 결정적 약점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곧바로 개시된 제6차 공세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제5차 공세 당시에 중공군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6차 공세가 예상보다 빨리 실시되었고 이것은 전사에 엄청난 피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independent specialist redundancy benefits on the internet servi 2012.05.22 1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그들이 지구의 모든 주요 국가에 지식을 전파하는 인상적인 생각을 간주됩니다. 나는 국제적인 위치의 추가 금액에 대해 매우 동일한 완료하는 것이 좋습니다.

  2. independent specialist redundancy benefits on the internet servi 2012.05.22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항상 내 가족을 도울 수 중 인터넷에서 게시물을 사냥했다. 중요한 덕분에 실용적인 정보도 많이해야합니다.

  3. medical insurance charges arkansas 2012.05.22 12: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특정 게시 표현을 위해 건배 ... 이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발표이다.

31. 낙동강아 잘 있거라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02 08:31

 

  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9월 16일 09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드디어 제8군의 반격이 개시되었습니다. 피 말리는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내었던 힘들 중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뒤엎을 수 있다는 간절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대처럼 성공적으로 상륙부대가 적의 배후 깊숙한 곳을 강타하는데 성공하자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고 있던 아군은 교두보를 박차고 나와 북한군을 돌파하여 경부 축선을 따라 진격해 인천상륙부대와 연결하는 사전계획대로 진격을 개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김천에 설치한 전선사령부 예하의 13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이 낙동강가에 촘촘히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공군의 후방차단으로 보급 및 병력보충이 불가능하여 총병력은 7만 여명에 불과했고 그 대부분도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한 신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초훈련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여 전투력도 모자랐고 식량 및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사기도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전선붕괴는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총 16만여 명까지 늘어나 있었고 전차, 야포 등의 중화기 전력은 어느덧 10배 이상의 우위를 보였습니다. 더구나 하늘과 바다에서의 전력차이는 비교불가의 상태일 만큼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아군의 전선 돌파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천에 아군이 상륙한 이후인 9월 16일 까지만 해도 전장의 주도권을 아직도 북한군이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북한군은 7월 31일 이후 거의 고착화되어 있던 마산-왜관-영천-포항을 연하는 선에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아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된 9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어느 쪽이 공자(攻者)이고, 어느 쪽이 방자(防者)인지도 모를 정도로 전선이 혼란스러웠던 상태였고 더구나 기상악화로 항공지원이 곤란하자 제8군의 공격은 고착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대응은 집요하였고 전선 돌파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9월 18일, 비가 그치고 기상이 호전되자 돌파구를 개척하려 왜관-김천축선에 B-29폭격기 42기가 집중적인 공중폭격을 가하였으나 공격은 진척이 없었고 반격의 선봉으로 내정 된 미 제1기병사단은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있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낙동강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사단장까지도 유엔군의 인천상륙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계속 낙동강에만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당시의 낙동강방어선에 모여든 북한군은 자신들의 정확한 처지도 모르고 오로지 공격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자 제8군사령관 워커의 근심은 커져갔고 맥아더는 군산에 추가적인 상륙작전 준비를 지시했을 만큼 초조해 하였습니다. 자칫하면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이 경인지역에 고립되어 버릴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될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때 이런 어려운 고비를 뚫었던 것은 국군 제1사단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작별인사를 하고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원래 주공으로 예정되었던 미 제1기병사단의 우측에 있던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의 방어지역을 공격하던 중 가산산성 우측계곡이 텅텅 비어있던 것을 알고 이곳으로 신속히 돌파를 감행하여 9월 19일에 기습적으로 갈뫼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갈뫼가 아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대구공격에 투입되어 있던 북한군 제1, 3, 13사단의 동측이 완전히 차단되었는데,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낙동강가의 북한군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국군의 선전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19일 14시경, 북한군 제3사단을 붕괴시키면서 왜관을 탈환하고 이어서 저녁 무렵에는 낙동강을 건너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2일, 국군 제1사단이 지난 8, 9월 내내 양측이 명운을 걸고 피로 물들였던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자 나머지 국군과 유엔군의 모든 부대들은 낙동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앞으로 내달릴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02 15: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별!!
    좋은 작별도 있었네요.

  2. G-Crusader 2010.04.12 1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부동의 기적의 승리와 낙동강 방어가 있었기에...

    인천상륙이 가능했고...

    오늘의 자유대한이 있습니다.


    백선엽대장께서는 다부동의 승리가

    하나님께 받은 기도 응답이었음을 엊그제 간증하시더군요!


    무궁화(=Rose of Sharon=예수님의 꽃!)의 대한민국!

    하나님께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돌려야합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지상의 공산주의는 바로, 성경적인 Lucifer대사탄의 20세기 지상 재발현!

    북한은 광명성(=계명성, 광명성),적그리스도이자 루시퍼의 도구인,

    김정일의 사탄의 군대일뿐입니다.


    미카엘 대천사에게 진압되었던 반란 혁명군들일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21세기 대한민국!
    여호와 닛시~!

    In the name of Jesus Christ,
    Amen.

  3. home insurance britain rates 2012.06.05 15: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본 웹 사이트 가로질러 너무 기뻐요, 전에도이 문제에 동안 노하우를 모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웹 사이트를 실행하고 가능한 나를 인식하게 자유롭게면 난 네가 나를 위해 게스트 crafting 일을 원한다면, 인스턴트 메시징은 일반적으로 내 웹 사이트를 참조하기 위해 사람을 찾고 이동하십시오. 나중에 한번 코멘트 이별로 방문하여 확인하십시오! ...

  4. home insurance downloadable beautifully 2012.06.05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그것이 약간 단조로운 이전 게시물이있게 마련 믿었지만, 정말 내 시간에 관해서는 지불. 내 웹사이트에서이 웹 사이트로 링크 중 하나를 게시하려고하고 있습니다. 거의 확실히 내 사이트 방문자가이 특히 편리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5. home insurance fees 2012.06.05 15: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이 주제에 맞는 세부 쓰기까지 함께 얻을 수 있으며 특히 감독에게 우리의 의견 및 보고서를 줘야 조사에 관하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내용은 제가 상당히 될 수밖에.

  6. internet advertising agencies 2012.06.12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이 주제에 영향을주는보기입니다. 당신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 행복해하고 내 자신이 동의 찾습니다. 당신의 맑은 문체와이 작품에 투입했습니다 노력을 즐길 수 있습니다.사이트와 고체 작업과 행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크게 앞으로 더 많은 업데이 트를 기대합니다.

  7. first aid kit for caravan 2012.10.21 0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궁화(=Rose of Sharon=예수님의 꽃!)의 대한민국!

    하나님께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돌려야합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지상의 공산주의는 바로, 성경적인 Lucifer대사탄의 20세기 지상 재발현!

    북한은 광명성(=계명성, 광명성),적그리스도이자 루시퍼의 도구인,

    김정일의 사탄의 군대일뿐입니다.


    미카엘 대천사에게 진압되었던 반란 혁명군들일뿐~!

메뚜기로 시작한 도전의 역사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3.17 08:52


 

  연락기(Liaison)라는 특정목적을 위하여 운용되는 군용기가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당시 미군이 메뚜기(Grasshopper)라고 불렀던 연락, 정찰용 경항공기 중에 L-4 Piper Cub이라는 경량 군용기가 있었습니다. 무장도 없고 최고속도가 시속 130킬로미터 정도였으니 군용기라기보다는 요즘 레저용으로 애용되는 경량 항공기로나 쓰일 만한 물건이었습니다.


[미 육군의 연락기로 사용된 L-4]


  하지만 이렇듯 볼품없는 L-4는 우리가 최초로 운영하였던 역사적인 공군기였습니다. 우리 공군은 1946년 8월 10일 결성된 민간단체였던 한국항공건설협회에 참여하였던 여러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1948년 5월 5일 조선경비대 제1여단 항공부대로 창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명칭과 달리 막상 보유하고 있던 군용기는 없었습니다.


[국군의 모태가 되는 1946년 국방경비대의 훈련모습

구 일본군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해 9월 13일 서울에 주둔하였던 미 제7사단 항공대로부터 총 10기의 L-4를 인수받게 되었는데, 이때 부대이름을 항공기지사령부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하였습니다. 비록 L-4는 미군들에게는 메뚜기라고 불리던 보잘 것 없었던 존재였지만, 동체와 날개에 커다란 태극마크를 그린 대한민국의 L-4편대는 9월 15일 서울 일대에서 역사적인 전시비행에 들어갔습니다.


[역사적인 전시비행중인 L-4편대]


  광복군 출신이었던 최용덕 당시 국방차관은 전시비행을 바라보며 “내나라, 내강토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비행하는 비행기를 보니 죽어도 한이 없다”하며 눈물을 흘렸을 만큼, 당시 L-4편대의 비행은 모두를 감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후속 도입된 L-5연락기를 비롯하여 총 20여기의 항공기와 천여 명의 인원으로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이 정식으로 발족하였습니다.


[L-4 앞에서 지상훈련중인 모습]


  하지만 당시 국군을 지원하던 유일 세력인 미군은 한국 공군이 38선 정찰임무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우리 정부의 전투기 공급요구를 거절하였습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창군한 북한 공군은 야크전투기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200여기의 군용기를 보유하였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우리 정부는 항공기헌납운동을 벌여 모금된 성금으로 캐나다에서 10기의 T-6 Texan 도입할 수 있었고 이를 건국기(建國機)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건국기로 명명된 T-6]


  L-4나 L-5에 비하면 T-6는 상당히 고성능의 항공기였지만 공대공전투나 공대지공격에 사용할 수 없는 단순 훈련기였습니다. 결국 6·25전쟁 발발 당시에 우리 공군은 연락, 항공관측, 훈련의 용도에만 쓰이는 8기의 L-4, 5기의 L-5 그리고 10기의 T-6만 보유하여 전투력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메뚜기를 비롯한 이들은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출격하는 L-5 편대]


  비록 공대공전투로 적기와 맞상대할 수 없었지만, 남진하여 내려오는 적전차를 막기 위해 공군은 전선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들은 부평의 육군병기창에서 제작한 30파운드 국산폭탄 2~3발을 후방석의 정비사들이 휴대하고 있다가 눈으로 조준하여 손으로 투하하는 육탄작전을 펼쳤습니다. 좀 더 대형이었던 T-6는 날개에 폭탄걸이를 급조 장착하여 작전을 펼쳤으나 이 또한 제1차 대전 수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습니다.


[적 전차를 향해 육탄공격 하는 모습을 담은 삽화]


  비록 이러한 육탄공격이 미미한 성과밖에 기록하지는 못하였지만 보유한 274개의 폭탄마저 개전 3일 만에 바닥이 나자 더 이상 육탄공격을 진행 할 수 없었고 이후 공중 정찰 등의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반면 북한 공군은 개전 당일 서울 상공에 나타나 마음껏 유린하고 다녔습니다. 6·25전쟁 초기에 우리군 대부분은 북한군에 열세였지만 특히 공군은 아처럼 비교조차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동체의 그려진 태극기를 자랑스러워하였던 선배들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선배들은 이를 비관만하거나 탓하지 않았습니다. 조국이 위기에 닥쳤을 때 적진 깊숙이 돌진 하였던 L-4는 가냘픈 메뚜기가 아닌 우리공군의 자부심이었으며 자랑이었습니다.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도 조국을 지키고자 주저하지 않고 출격하였던 공군의 창군 요원 분들께 무한한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당신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screenplay analysis 2013.02.22 0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군은 한국 공군이 38선 정찰임무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우리 정부의 전투기

  3. online casino uk 2013.02.22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국방차관은 전시비행을 바라보며 “내나라,

  4. online casino uk 2013.02.22 2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국방차관은 전시비행을 바라보며 “내나라,

  5. obat herbal alami 2013.02.23 2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턴트 팀은 더 나은 비즈니스 여행에 대한 매우 강한의 주요 기초로 좋은 사업 계획을 만들 수

  6. online account software 2013.02.28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我想谢谢你的分享您的想法把时间和贴的东西!

  7. window replacement cost 2013.02.28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로 애용되는 경량 항공기로나 쓰일 만한 물건이었습니다.

  8. cipro 2013.03.24 2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경비대 제1여단 항공부대로 창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9. online poker 2013.03.26 2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相当令人惊异的文章。这真的是真正的非常精彩的和有益的职位。感谢您与我们分享他的!这是我第一次去参观。

  10. Acheter Vimax 2013.03.27 04: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이 웹 사이트

  11. cupcake blog 2013.03.29 22: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그저 만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순수하게

  12. banquet halls delhi 2013.04.01 0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식처를 수락에 승인하면, 지주는 재산 보전 휴식처를 수락에 승인하면

  13. The Embedded Blog 2013.04.04 04: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고 있음을 느끼고 경계하고 있었는데 6월 24일 북한군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었다.

  14. Finneen 2013.04.05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갖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에 양측의 생각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15. Chrtek Advice 2013.04.27 19: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군은 한국 공군이 38선 정찰임무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우리 정부의 전투기

  16. chat random 2013.05.02 0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용기라기보다는 요즘 레저용으로 애용되는 경량 항공기로나 쓰일 만한 물건이었습니다.

  17. Therabath 2013.05.04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찰임무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면 될 것으로 판단하

  18. obat kolesterol 2013.05.10 0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전선 돌파의 주역으로 맹활약하였습니다.

  19. Escorts Queens 2013.07.06 18: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고 있음을 느끼고 경계하고 있었는데 6월 24일 북한군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었다

  20. Oral Surgeon 2014.02.22 16: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또한 정말 독서를 즐길 수있는 아주 좋은 게시물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볼 수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일상 없습니다.

  21. Locum jobs UK 2014.02.24 2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또한 정말 독서를 즐길 수있는 아주 좋은 게시물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볼 수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일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