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1.25 9. 침략자의 실책 (5)
  2. 2010.01.04 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3)

9. 침략자의 실책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1.25 08:34

  9. 침략자의 실책

 
   3일 만에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사실은 개전 초기의 주도권을 북한이 확실히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이것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치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서울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빼놓고 단지 전투의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서울 점령이 북한에게 그리 만족할만한 전과를 올려주지 못했음은 이후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점령 당시에 선전수단으로 이용된 전차]


  우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운용술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북한 전차에 밀려 국군이 눈물을 흘리며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많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사실 북한군도 그들의 승리를 이끌어 준 전차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천혜의 교통로인 경원축선에서 벌어진 실책이었습니다. 북한은 서울을 공격할 주 공격로로 경원축선의 동두천-의정부 도로와 포천-퇴계원 도로, 두개를 선정하고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연대를 각각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포천-퇴계원의 도로상으로 전차가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은 탱크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험한 지형이었습니다. 결국 105전차여단 예하 109전차연대는 서파까지 진입했다가 다시 포천으로 역행군을 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포천-퇴계원간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정부-창동의 좁은 통로에 2개의 보병사단과 2개의 전차연대가 몰리면서 교통체증을 겪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전차부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은 6월 26일 13시에 이미 의정부를 점령하고도 미아리 방어선까지 15킬로미터를 더 진출하는데 무려 35시간이나 소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울 점령이 최소한 하루 이상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105전차여단 소속 T-34]


  하지만 가장 큰 미스터리는 6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북한군 주력인 북한 제1군단이 서울에서 3일간을 지체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애당초 한강 이남에서의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주장부터 남한의 민중봉기를 기다렸다는 설, 심지어 북한이 자축연을 벌이면서 아무 생각 없이 3일간을 허비했다는 설까지 다양합니다. 더구나 북한의 서울 점령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도 남아있어서 도강의지만 있었다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었고 이미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하구를 건너 김포반도에서 영등포로 향하고 있던 중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북한 제6사단이 국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안 한강을 건너 진격을 계속하여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쟁 전 소련 고문단이 수립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서울의 점령보다 서울 일대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 개전 초 작전의 주목적이었는데 북한군의 서울 지체는 이런 계획 자체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북한이 한강을 도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보다, 도강 할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 제2군단의 남진을 저지한 국군 제6사단의 용전과 김포반도에서 급조된 병력으로 긴박하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하를 막았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분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대 포위 섬멸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실책이면에는 국군의 투혼이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겉으로 드러난 승리 이면에 숨어있던 실책이 있었고 이것은  국군이 낙동강까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런 실책을 범하게 된 데는 단지 그들의 착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여 침략자를 피로 막아낸 국군의 놀라운 투혼이 있었기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1950년 6월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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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1.04 19:35

 3. 3일만에 능욕당한 서울 

   치밀한 사전 계획에 의거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장단반도, 문산, 동두천, 춘천 그리고 강릉의 5개 방향으로 38선을 일거에 돌파하여 남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2개 군단으로 구성된 20만의 북한군 선두에는 잘 훈련되고 준비도 완벽하게 마친 7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6,1,4,3,2,7,5사단)이 도열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완편사단들이었고 더불어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부대를 배속 받아 화력이 증강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바로 뒤에는 돌파구를 확대하면서 후속 진군할 2선부대로 6개 사단(서에서 동으로 제7,10,13,9,15,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쟁개시와 함께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하였습니다]


                                    [전쟁초기 북한군의 공격축선 상황도]


   반면 당시에 국군은 8개 사단(수도경비사령부 포함) 그리고 1개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10만이었는데, 이중 4개 사단과 1개연대가 38선 일대를 경계하고 있었고(서에서 동으로 제17연대,제1,7,6,8사단) 나머지 사단들은 후방에서 공비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삼각편제 기준으로 완편 된 부대는 4개 부대밖에 없었고 이 또한 포병연대가 배속된 북한군과 달리 15문으로 구성된 포병대대밖에 없어 평면적으로 전력을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병력으로는 1:2 수준이었지만 화력을 계량화한다면 1:5수준으로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국군을 앞서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앞서 알아보았던 것처럼 6월 24일 0시를 기해 국군은 그동안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많은 병력이 휴가, 외출 등을 나와 있었던 관계로 개전 시점의 전력차이는 더욱 벌어져있던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동두천-포천으로 돌파하여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군할 북한군 주공은 2개 사단(후속할 제13사단까지 포함하면 총 3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총 3만2,000명 수준이었는데 반하여 이를 방어할 국군 제7사단은 총 7,000여명의 병력 중 2,500여명이 휴가나 외출중이어서 4,500여명만 부대에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병력으로도 7배였지만 화력은 무려 18배가 벌어진 엄청난 차이였습니다.


               [개전이 되자 국군의 이동이 이루어졌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력차이 중에서도 이후 두고두고 국군에게 오래 동안 콤플렉스가 되었을 만큼 가장 위협을 주었고 또한 막아내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전차였습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개전 당시 북한군은 242대의 소련제 T-34전차를 남침의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T-34는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당대 최고의 명품전차였는데, 그중에서도 소련이 북한에게 공급한 T-34는 85밀리미터 포를 장착하여 화력이 강화되고 장갑도 증가된 최신형이었습니다. 반면 이를 막아내기 위해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2.36인치 로켓포와 57밀리미터 대전차포였습니다.


   게다가 이들 대전차무기로 T-34의 장갑을 뚫을 수는 없었으며 더구나 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차를 북한군의 남침 당시 처음 보았을 만큼 구체적인 공격방법조차 모르던 상태였습니다. 비록 많은 용사들이 화염병이나 포탄을 직접 들고 특공작전을 벌여 전차의 진격을 막아내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대세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북한군 주공이 엄청난 압력을 가하여 내려온 의정부축선은 제7사단의 허무한 붕괴와 함께 돌파당하며 개전 하루 만에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북한군에 점령당하였습니다.


                                         [서울로 입성한 북한군 T-34전차]


   그런데 이런 전선의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총지휘하여야 할 정부와 군 수뇌부는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였고 어떻게든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조급증에 이끌려 후방에서 올라온 부대들을 축차적으로 전선에 투입하는 악수를 두어버렸습니다. 결국 뿔뿔이 쪼개져 후방에서 서울로 이동한 제2사단과 제5사단 예하부대들은 대오도 정비해보지도 못하고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차례차례 전선에 투입되면서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3개 사단을 쏟아 부으며 피로써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시내전역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치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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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ee Directory 2011.11.01 1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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