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사단'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5.18 44. 비호산에서 빛난 칠성 (6)
  2. 2010.04.13 33. 치열했던 서울탈환 (4)
  3. 2010.04.05 32. 감격적인 합류 (6)

44. 비호산에서 빛난 칠성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5.18 09:52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등장으로 초전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부대는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앞에 서있던 제6사단 2연대는 후방의 온정리가 점령되면서 연대 전체가 붕괴되는 참사를 입게 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출몰한 중공군은 야간 및 산악전투에 상당히 능숙했고 더불어 피리와 꽹과리 등을 이용하여 아군의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심리전에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습니다. 더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으로 제파식 집중공격을 감행하여 아군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은 참전 초기에 뛰어난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이와 같은 중공군 특유의 공격방식을 국군과 유엔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 불렀는데, 사실 중공군 참전 초기에는 중공군의 병력이 아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만큼 많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국군 담당지역이나 교통요충지처럼 반드시 돌파하여야 할 핵심지역으로 가용한 전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따라서 넓게 퍼져있던 아군 입장에서는 중공군이 출몰하지 않아 평온한 지역도 있었지만 중공군과 조우한 부대는 체감 상 엄청나게 많은 적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인해전술은 1951년 봄에 연이어 있었던 세 차례의 대공세 당시였습니다.


  엄청난 변화에 놀란 국군 제2군단은 10월 27일, 가용 전투역량을 총집중하여 10월 29일까지 3일 동안이나 온정리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중공군의 공격에 퇴로가 차단되어 증원부대들 까지 한 번에 붕괴되는 사태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제2군단은 무참히 붕괴되어가고 있던 예하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최대한 수습해 후방인 청천강 방어선까지 철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퇴로를 확보해 주어야 했는데 이때 구원투수로 평양탈환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 제7사단(칠성부대-七星部隊)이 나섰습니다. 당시 육군 예비로 영변 일대에 집결하던 제7사단은 제2군단이 붕괴되어 가자 10월 29일부로 제2군단으로 배속을 전환하여 군우리(軍隅里)로 출동합니다.


[제7사단이 위기를 막기 위해 출동합니다.]


  위기가 고조되어 가던 11월 2일, 제7사단은 청천강 상류지역을 감제(瞰制)할 수 있고 군우리에서 안주와 순천에 이르는 도로와 철도를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해발 622미터 비호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곳을 중공군이 점령한다면, 제8군의 후방으로 향하는 통로가 순식간 개방되면서 아군 전체가 일순간 붕괴될 수 있는 결정적인 지형이었으므로 제7사단은 반드시 사수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4개 사단으로 편성된 중공군 제38군(군단급 부대)의 선두부대가 제7사단 방어진지로 돌격하여 들어왔습니다.


  전쟁 중반기 이후에서나 볼 수 있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비호산에서 벌어졌습니다. 제7사단은 최초 중공군의 공격에 잠시 정상을 허락하였지만 반격을 가하여 즉시 되찾고 끈기 있게 방어해 내었습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에 결국 11월 5일 정상이 다시 중공군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중공군이 청천강 후방으로 곧바로 진출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을 잘 알고 있던 신상철(申尙澈) 제7사단장은 11월 6일 08시, 모든 역량을 총 집중하여 비호산 정상을 다시 탈환하였습니다. 이처럼 2차례의 공방전에서 패배한 중공군 제38군은 서서히 전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인근의 중공군 제39, 40군도 공세를 멈추었습니다.


[제7사단의 선전으로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였습니다.]


  비호산 전투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라는 상징성과 함께, 제8군 전체를 위기에서 구출한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중공군은 제1차 공세를 통해 제8군 전체를 일거에 격파하려 하였으나 운산, 온정리, 운산 일대에서 일부 아군부대를 격파하는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을 뿐입니다. 이후 밝혀진 여러 자료에 의하면 11월 5일을 끝으로 중공군의 보급역량이 바닥나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기 힘들었다고 밝혀졌지만, 중공군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 국군 제7사단의 용전분투가 없었다면 청천강 방어선 구축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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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치열했던 서울탈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13 07:58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10군단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서울탈환을 위해 동진하면서 김포공항과 영등포외곽까지 진출하였고,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는 낙동강에서 치고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기 위해 안양, 수원, 오산방향으로 남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서울 수복과 동시에 낙동강가 몰려있던 북한군을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대담한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수도 서울이었는데,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만큼 이곳을 사수하려는 북한의 집념도 컸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9월 20일 새벽 2시,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가 김포공항에서 행주산성으로 최초로 한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을 만큼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북한의 의지는 강력하였습니다. 결국 엄청난 폭격으로 북한군의 저항 근거지를 제거한 후 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장악한 아군은 곧바로 신촌 방향으로 진격하여 들어갔고 21일 저녁에는 중앙청 바로 목전인 연희동 일대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 진격한 미 제1해병연대는 영등포 시가지에서 치열하게 방어에 나선 북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22일 아침, 노량진 한강일대까지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중앙청(현재 광화문)까지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9월 22일, 국군 해병 제1대대는 연희고지를 공격했지만 점령에 실패하였습니다. 목표까지 거리는 불과 1킬로미터 정도였지만 이곳을 요새화한 북한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하여 이틀이 지나도 점령은커녕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말았습니다. 결국 국군을 대신하여 미 해병대가 공격을 계속하였는데도 연희고지는 함락되지 못하였고 결국 항공기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9월 24일 오후 천신만고 끝에 연희고지를 탈취하면서 북한군의 서울 서측방어선이 붕괴되었습니다. 더불어 미 제1해병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마포방향으로 진출했습니다. 인천상륙 후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을 만큼 이때의 전투는 격렬하였지만 적 1,750명이 사살 된 것으로 파악되었을 만큼 북한군의 피해도 극심하였습니다.


[연희고지 전투에서 피아간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한강 남쪽까지 순식간 진출하였을 때 당황한 북한은 최용건(崔庸建) 서해안방어사령관의 지휘로 경인지역에 흩어져 있던 잡다한 부대들과 사리원, 철원, 김천에 위치한 20,000여명 정도의 모든 가용 병력을 끌어 모아 서울에 투입하였고 또한 시민을 강제로 동원해 진지와 바리케이드를 구축해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남쪽에서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 번 차지한 서울을 결코 내어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습니다. 아니 바로 직전까지 부산을 집요하게 위협하고 있다가 일순간에 반전 된 이러한 상황을 북한수뇌부는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었고 그만큼 서울 시내에서의 저항은 극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서울탈환이 지연되자,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낙동강에서 반격하여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하려 수원방향으로 진출중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를 서울 공격부대로 추가 투입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9월 25일 미 제7사단 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가 서울 남쪽에서 공격하자, 힘을 얻은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연대는 일제히 북한군을 소탕하고 서울중심부로 돌입하여 들어갔습니다. 여기에서도 바리케이드를 치고 북한군이 격렬히 대항하였으나 사실 이 이상의 저항은 무리였습니다.


[환도식의 모습]


  9월 27일 15시 08분, 점령한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북한군의 저항은 종식되었고 서울시 전역에 대한 소탕작전을 완료한 국군과 유엔군은 28일을 기해 각부대별로 경계태세에 들어감으로써 전쟁발발 3일 만에 북한군에게 내어준 서울은 91일 만에 다시 수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스런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로써 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상황을 환원시켰으나 동시에 새로운 과제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38도선 돌파의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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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13 1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수.
    무엇을 사수하려 하는 가에 따라 역사가 달라집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수하는 것,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수하는 것,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사수하는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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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32. 감격적인 합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05 08:36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일순간 붕괴되자 북한군은 소백산맥과 금강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9월 21일경부터 인천상륙 소식이 전선에 전파되었고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북한군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북한군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며 독전을 강요하였지만 이런 비이성적인 노력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9월 22일부로 추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드디어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낙동강으로부터 전선을 밀고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을 벗어나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1기병사단]


  워커로부터 경부가도를 따라 38선으로 밀고 올라갈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고 그중에서도 선봉은 제7기병연대였습니다. 제7기병연대는 보다 신속하게 전방을 개척하고자 린치(James H. Lynch)중령이 지휘하는 예하 제3대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9월 22일 08시, 다부동을 출발시켰습니다. 그날 중으로 낙동강을 도하한 린치특임대(TF Lynchs)는 다음날 상주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의 저항 태세를 점검한 결과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해도 될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일, 사단의 후속부대들이 상주에 집결을 완료하자, 린치는 그의 특임대에 배속된 제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에 수색대를 합류시켜 “보은-청주-천안-오산방향을 따라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전진하고 저항하지 않는 적은 대응하지 말라”는 진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린치의 판단대로 전선은 밀고 댕기며 교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군의 진격이 멈춘 곳에서 전선이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일 보은으로 출발한 수색대는 오후에 청주를 지나 저녁에 진천 남쪽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그것도 북한군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색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군이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북한군 수송대가 미군 전차를 발견하고는 3대의 트럭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공교롭게도 트럭에는 휘발유가 가득 실려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연료를 보충 받은 수색대는 전차에 다시 시동을 걸고 전진을 계속하여 그날 20시 30분경 천안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교통정리를 하던 북한군 병사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자, 북한군 병사가 얼떨결에 오산방향을 안내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까지 발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진격은 빨랐습니다.


[양쪽에서 전진하던 아군의 선두 부대들은 오산부근에서 연결됩니다.]


  쉬지 않고 오산남쪽 16킬로미터 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전방에서 갑자기 치열한 사격이 벌어져 노출된 전차병 1명이 전사하면서 일순간 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곧 교전이 멈추었습니다. 전방 부대는 인천으로 상륙하여 오산으로 남진하고 있던 미 제7사단 31연대였는데, 다행히도 오인으로 인한 아군간의 교전이 확대되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9월 26일 22시 26분으로 인천상륙부대와 낙동강 반격작전 선두부대가 감격적으로 이렇게 연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선두부대가 조우한 장소가 미군이 한반도에서 북한군과 처음 접촉하여 망신을 당한 죽미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8시경, 미 제1기병사단 본대가 상륙부대인 제7사단의 본대와 연결 되면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전선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맥아더의 대담한 도박은 제8군의 낙동강 반격이 성공함으로서 단숨에 북한군 13개 사단의 배후를 포위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적으로 반전을 이루고 38선을 향한 진격은 계속되었지만 포위망 안에 갇힌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전의를 상실한 잔적을 소탕하는 것보다 전쟁이 종결을 위해서 전진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남한 각 지역에 쪼개져서 게릴라가 되어 갔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여기지는 않고 천천히 소탕하면 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지리산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북한군 패잔병 게릴라들은 두고두고 후방지역의 암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엔군의 놀라운 진격에 일순간 패퇴하였지만  북한군 대부분은 부대 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로 잠입해 아군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의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까지 지연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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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05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2. mami5 2010.04.06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킨을 시원스레 바꾸신거네요..^^
    글 잘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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