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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2 음지에서 승리를 이끈이들 (6)
  2. 2010.01.21 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3)

음지에서 승리를 이끈이들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7.22 08:30

  전쟁의 승패에 있어 병참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6·25전쟁 또한 군수지원의 중요성이 입증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이던 북이던 38선을 넘어 서면서부터 심각한 군수문제에 시달리고는 하였습니다. 특히 제공권, 제해권을 유엔군에게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수송수단도 열악한 공산군 측의 군수조달 문제는 전쟁 내내 고민거리였습니다.


[수송기를 이용한 보급은 장진호 전투 당시 미 해병 제1사단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군수조달 환경이 좋았던 아군 측이라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산악이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다보니 최전선의 군수지원에 있어서 상당히 불리하였습니다. 도로가 많이 개통된 현재도 동부전선의 산악지역은 폭설이라도 한번 내리면 병참선이 차단 될 정도로 조건이 나쁩니다.


[미군도 산악지대에서 달구지를 이용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한데 사회적 인프라가 거의 없다시피 한 6·25전쟁 당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히 1951년 말부터 휴전까지 진행된 참호전은 대부분 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지에 주둔한 제 부대에 대해서 제때 병참지원을 해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전쟁 중반기이후 고지전으로 바뀌자 병참문제가 더욱 중요하여졌습니다.]


  그래서 고안된 전술(?)이 일반 노무자들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산악지대에 대한 보급을 민간에게 아웃소싱을 한 것이었는데, 전쟁 발발 직후부터 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소위 보국대를 비롯하여 유엔군 참전 이후 만들어진 민간 운반단 (CTC - Civilian Transport Corps), 한국근무단(일명 노무단), 부두하역단 등이 다양한 형태로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산악전을 지원을 위해 조직된 민간인 부대의 모습]


  그중 최전선의 산악 고지전을 치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속칭 지게부대라고 불린 노무대가 있었습니다.  이 노무대는 전쟁 동안 산세가 험한 지역에 위치한 부대에게 포탄, 식량 등의 보급품을 지게에 지고 운반하여 주었는데 대부분이 당장의 호구지책이 어려웠던 월남해 내려 온 청장년들이나 피난민들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집으로 충당되기도 하였습니다.


[포탄 같은 중량물도 이 분들의 보급 수송에 절대 의존하였습니다.]


  물품운송에 민간을 동원하한 것은 전쟁 시작과 동시라고 추측은 되지만, 6·25전쟁사에 최초로 지게부대가 등장한 것은 1951년 2월에 있었던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 때였습니다. 1.4후퇴 후, 재반격에 나선 미 제25사단은 수리산 일대에서 저항하는 중국군 제150사단의 응전에 진격이 멈추었습니다. 이때 아군은 50여명의 노무자가 지게를 이용하여 고지대로 보급을 추진하는데 성공하였던 반면 중공군은 보급이 차단되어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화물 적재 후의 모습]


  전쟁 당시 노무자들의 규모는 육군 사단에 편성되어 전투근무지원을 직접 수행한 노무단원 9만여 명을 포함하여 약 30여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며 공식 기록에 의하면 전쟁 시 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당한 노무자들의 규모가 전사 2,064명, 실종 2,448명, 부상 4,282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으나, 많은 수의 노무자들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규모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미군들은 이 분들을  A특공대라고 불렀습니다.]


  노무자들의 지원 수단은 주로 지게였는데 그 모습이 알파벳 A와 흡사하다고 하여 통상 근무단을 ' A Frame Army ' 즉, 지게부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James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회고록에서 "만일 노무자들이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 했을 것이다."고 이들의 노고를 극찬하였습니다.

 

[이 분들의 노고는 조국을 수호하는 원동력 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처럼 지게부대는 戰史의 전면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군의 승리를 위하여 묵묵히 맞은바 임무를 다한 최고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음지에서 묵묵히 힘써 주신 지게부대 대원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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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인영 2010.07.22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보급품을 수송한 분들이네요.

  2. 모글리 2011.10.15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BS스펀지 131회 방송도 있네요...

    쫌 내용은 틀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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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1.21 08:26

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6.25전쟁 개전 당시에 남북한 간의 전력은 많이 벌어져 있었고, 이런 차이는 개전 초에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공군은 경우는 일방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격차가 컸습니다. 당시에 북한군은 200여기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일명 건국기(建國機)라고 불린 T-6 훈련기 9기를 포함한 2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지만 전투기는 단 1기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이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T-6 건국기]

 

  6월 25일, 북한 지상군이 공격을 시작한지 6시간 후인 10시경이 되자 북한군의 IL-10 전투기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정찰 활동을 시작하였고, 12시경에는 YAK기 4기가 용산 상공에 나타나 용산역, 서울공작창, 통신소, 육운국 청사 등에 기총소사와 함께 폭탄을 투하하면서 6.25전쟁 최초의 공습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인 16시경에는 5기의 YAK기가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을 공습하였는데, 이때 국군의 T-6연습기 1기가 파손되었고 한국에 체류하던 미국인을 소개시키기 위해 김포 비행장에 긴급 투입되어 있던 미 공군 소속의 C-54수송기 1기가 격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공군의 공격을 하늘에서 막을 방법이 국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공대공 전투를 벌일 전투기가 없어서 개전 즉시 제공권을 북한 공군에게 내줄 수 박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국 공군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전투기능이 없는 훈련기들 밖에 없었지만 한국 공군은 이들을 출동시켜 전선을 정찰함과 동시에 육군 작전을 육탄으로 지원했습니다. 조종석 밖으로 손을 내밀어 폭탄 274개와 수류탄 500개를 북한군 행렬에 투하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지상에서처럼 맨주먹으로 근근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군의 활약은 3일 천하(파괴된 북한의 IL-10)]


  하지만 이와 같이 일방적이었던 북한 공군의 우세는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국군의 전력이 갑자기 커져서 북한 공군을 막아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의 조기 참전 결과였습니다. 육군이나 해군과 비교해 신속한 이동과 전개가 가능한 미 공군이 한반도로 긴급 투입되면서 곧바로 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개전 4일 경과하였을 때 38선 이남에서 북한 공군기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오히려 38선 이북의 북한 후방에 위치한 공군기지는 물론 적의 요충지가 공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지상에서는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하고 있던 6월 29일의 경우만 보아도 미 제5공군 제3폭격비행단 소속 B-26 경폭격기 18기가 적의 심장인 평양을 폭격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작전으로 미 공군은 8월 10일까지 북한 공군을 완전 무력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후방차단과 근접항공지원(CAS)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공군의 F-51전투기]


  이와 더불어 6월 27일, 한국 공군은 미 극동 공군의 협조로 조종사 10명을 선발하여 일본 주둔 미 공군 기지에서 단 며칠간의 훈련을 받고, F-51전투기 10기를 인수해 대구기지로 귀환했는데 이때부터 한국공군도 전투기를 운용하게 되었고 7월 3일부터 한·미 공군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전 초에 일방적이었을 만큼 많은 전력차이가 있었지만 우리 공군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 나갔고 그러한 용기는 도움을 받아 곧바로 힘으로 승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승화된 힘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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