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전선'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8.05 68. 굴욕 그리고 그것을 막은 자 (4)
  2. 2010.07.30 66. 다시 서울을 노린 중공군 (12)
  3. 2010.06.14 52. 예상을 벗어난 위기 (3)

68. 굴욕 그리고 그것을 막은 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05 08:09

  나름대로 서부전선에서 선방하며 중공군의 제5차 공세를 저지하고 있던 그 시점에 커다란 위기가 중부전선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공세 이전인 4월 22일까지 춘천북방의 사창리-화악산 일대에서 육단리-와수리 방향으로 공격하던 부대는 미 제9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6사단이었는데, 군단으로부터 사단 전방에 대규모의 적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으로 보아 중공군의 대공세가 충분히 예견되는 시점이어서 사단장 장도영(張都暎)은 16시경 공격을 중지하고 부대를 방어태세로 전환시켰습니다. 더불어 사단 좌측의 미 제24사단과 우측의 미 제1해병사단도 공격을 방어로 전환하며 진지구축에 들어갔습니다.


[중공군의 공세가 예견되자 방어태세로 바꾸었습니다.]


  이들 앞에 등장한 적군은 중공군 제9병단이었는데, 이들은 화천-가평 축선으로 신속히 진출하여, 중동부의 미 제9군단과 서부의 미 제1군단의 연결을 끓어 서울을 공격하는 주공부대(제19, 3병단)의 동 측방을 엄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중공군의 새로운 공세가 서울 재 함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므로 조공에 해당되던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서부전선에서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의 분전에 막혀 중공군 주력이 남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동안 오히려 조공이었던 중공군 제9병단이 전선에 커다란 구멍을 내어 전선전체에 커다란 위기를 불러왔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을 겁내 사창리에 집결한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데, 만일 이곳을 뚫어버리면 양측에 있던 미 제24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의 후퇴도 자연적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4월 22일 17시경, 중공군은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부대 간격으로 침투해 국군 제6사단의 후방지역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좌전방 제19연대는 순식간 적중에 고립되었는데, 이 소식을 접한 우전방 제2연대와 예비인 제7연대는 겁에 질려 차량 및 장비를 포기한 채 분산 철수하였는데, 갑작스런 제6사단의 후퇴로 말미암아 후방에서 사단을 지원하던 미군 포병들도 순식간 중공군에게 포위당하여 다수의 화포를 유기한 상태로 철수했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제6사단은 항공기와 포병의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둔화시키면서 화악산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반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그날 밤 중공군의 공격에 의해 또다시 돌파되었습니다. 결국 4월 25일에 제6사단이 긴급 배치된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 하에 가평일대로 철수를 완료하였을 때 집결한 병력은 후퇴 이전 정원의 60퍼센트 수준에 불과한 6,313명이었습니다. 이들의 무질서한 후퇴는 주변 미군들의 분노를 촉발시켰고 국군에 대한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군방어선이 돌파당하여 후방 미군지원부대까지 위협을 받았습니다.]


  사창리에서 제6사단이 조기에 붕괴되었던 것은 하급제대의 지휘관 및 참모들의 지휘통솔 및 전투능력 부족과, 하사관들의 사기 저하 등에 기인 한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명을 내려도 통하지 않던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제6사단의 문제가 아니라 1951년 중반까지 한국군 전체의 가장 큰 취약점이기도 하였습니다. 6·25전쟁 초기의 병력은 낙동강까지 밀려가면서 소진이 되었고 그 이후 징집된 병력은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체 북진에 나섰지만,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본 적도 없이 단지 걸어 다니기만 하였던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국군 제6사단을 격파한 중공군은 23일과 24일,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서부전선과의 연결고리인 서울-춘천간의 도로를 차단하려 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막힌 중공군의 제5차 대공세가 엉뚱한 곳에서 성공하려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긴급 투입되어 가평에 진지를 구축하고 강력히 저항에 나선 영연방 제27여단에 가로 막혔습니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병사들로 구성 된 영연방 제27여단은 무려 5배가 넘는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가평을 사수하는 기적을 만들었고 중공군의 제5차 공세는 실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지난 2월 지평리에서 미 제2사단 23연대가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좌절시킨 것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가평의 전설을 만든 영연방 제27연대 소속의 뉴질랜드 포병대 ]


  그런데 이것은 이후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힌트가 되었습니다. 추후 공세는 미군이나 유엔군이 담당하는 전선이 아닌 국군이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하여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번 공세에서 국군 제1사단이 나름대로 분전하였지만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공세에서 중공군이 위세를 떨쳤던 것은 아쉽게도 주로 국군이 담당하던 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유엔군이 구멍을 틀어막아 위기를 해소하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다면 다음 중공군의 공세는 국군들이 담당하고 있는 곳으로 예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굴욕적인 역사지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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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그네 2010.08.05 1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만보면 6사단은 참...대실패와 대승리를 오가는군요. 사단이 와해될정도의 피해를 입었다가도 3개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지를 않나..파란만장하고도 드라마틱한 사단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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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다시 서울을 노린 중공군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30 08:13

  암울했던 1.4후퇴의 기억을 멀리하고 1951년 4월 중순, 봄이 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의 주력부대들은 38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양양을 연하는 캔사스(Kansas)선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이전으로 상황이 다시 돌아간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난 6개월간의 경험을 통해 중공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에서는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려는 생각은 포기하고 있었고 현재 확보한 캔사스선을 중심으로 휴전을 구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덧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북으로 전선을 밀어붙였습니다.]

  반면 유엔군 측의 이러한 생각과 달리 공산군 측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제4차 공세가 비참한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아직까지도 지난 3번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기분 좋았던 과거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전략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에 대규모의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하여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감지한 신임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은 철의 삼각지대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작전명 불굴(Dauntless Operation)로 명명한 일련의 공세를 독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임자였던 리지웨이에 비해 상당히 공격적인 성향의 지휘관이었던 밴 플리트는 그의 성향대로 먼저 선제 타격에 나선 것이었는데,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격이 4월 22일 오후가 되면서부터 전선 도처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이 감지되면서 진출이 저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을 국군과 유엔군에게 군말 없이 내주고 후퇴를 거듭해온 공산군은 이때쯤 새로운 공세준비를 완료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지난 제4차 공세가 중동부전선을 돌파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단절 시키려 하였던 전술적인 목적이 컸다면 이번 공세는 상당히 전략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서울의 재점령이었습니다.


  공산군 측 최고사령관 펑떠화이는 중공군 27만과 북한군 3만 5천으로 이루어진 총 30만 5천명의 대병력을 이용한 전형적인 인해전술로 서울을 일거에 포위하여 한강이북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노동절(May Day)전에 서울을 탈취해서 마오쩌둥에게 선물로 바치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펑은 지난 3월 서울을 순순히 내준 대신 한강이북으로 건너온 서부전선의 유엔군 주력을 이번 공세에 일거에 격멸하여 서울을 다시 탈취하여 전선을 한강까지 밀어 붙임과 동시에 유엔군의 항전의지를 철저히 꺾으려 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서울을 재점령할 대공세를 계획하였습니다.]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공산군은 아군의 전 전선에 4시간에 걸친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하면서 전사에 중공군의 제5차 공세로 기록된 대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포격이 멈추자 서부전선의 중공군은 서울을 포위하기 위하여 3개의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각각 9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19병단(서방의 야전군 개념)이 개성-문산 축선에서 국군 제1사단과 영 제29여단을, 제3병단이 연천-동두천 축선에서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향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직접 서울을 노렸습니다.


  마치 6·25전쟁 개전 당시의 모습과 흡사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이 투입되었지만 이번에는 같은 장소로 무려 18개 사단이 공격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외곽에서는 제9병단 예하 3개 사단이 김화~포천 축선에서 광덕산줄기를 따라서 미 제25, 24사단을 목표로 남하하였고 나머지 6개 사단이 화천-춘천 축선에서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북한군 제3, 5군단이 동부전선의 인제-신남 축선에서 공세로 나왔습니다.


[중공군 제5차 공세 상황도]


  공산군은 이번 작전에서도 예외 없이 기동력과 화력이 열세인 국군 사단들이 담당하고 있던 지역을 먼저 돌파하여 후방으로 진출한 후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공산군의 이 같은 공격으로 서부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이 담당하고 있는 파평산 일대와 바로 옆 설마리를 담당하던 영국 제29여단이 중공군의 대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고, 중부전선에서는 사창리에서 유엔군의 외곽을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6사단이 집중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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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호성 2010.09.22 2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만 좀하시지!

  2. 한호성 2010.09.22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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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예상을 벗어난 위기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14 08:30

 

  서울에 미련을 두지 않고 37도선까지 후퇴한 아군은 1월 6일 평택-안성 간에 설정된 방어선을 점령했으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서울에서 추격을 멈추었습니다. 마치 중공군의 그림자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간 꼴이 되어버린 제8군은 이러한 의외의 상황에 상당히 당황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중공군의 제3차 공세 목표는 유엔군 격멸이 아니라 서울의 점령이었고 여기에서 그 동안의 계속된 공세로 지쳐있던 부대를 재편할 예정이었습니다. 어쨌든 중공군은 최초 등장이후부터 매번 예측을 벗어나는 행태를 보여 계속하여 아군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중공군은 알려진 것이 없는 미지의 군대였던 것이었습니다.


[유엔군에게 있어 중공군은 아직까지도 미지의 군대였습니다.]


  이처럼 1951년 들어서자마자 숨 가쁘게 서울을 내주고 물러났지만 양측 주력이 팽팽히 길항하던 서부전선은 곧바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가평-춘천 지역으로 공세를 펼친 중공군 2개 군이 국군 제2, 5사단 지역을 돌파한 후 서부전선과 연결을 시도하여 이곳에도 일시적으로 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으나 1월 8일을 전후해 일제히 멈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공군의 모습과 달리 북한군이 공세를 벌인 홍천-원주 지역은 전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국군 제8, 3사단이 담당하던 전선이었는데, 정면에 북한군 2개 군단이 압박을 가함과 동시에 후방에서 암약하던 유격대가 아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왔습니다.


  이들은 순식간 영월-단양 일대까지 진출하면서 제8군의 후방 병참선을 위협하면서 순식간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2군단 10사단은 안동지역까지 급속 남하하여 아군을 초긴장상태 몰아넣었습니다. 한마디로 1950년 여름 북한군의 최대 진격선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진출속도는 오히려 당시를 초과하였습니다. 위기를 직감한 제8군사령관은 급격히 무너지고 있던 국군 제3군단을 1월 3일자로 미 제10군단에 배속하여 중부전선의 위기를 수습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당시 미 제10군단은 대구 및 부산 등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있던 중이었고, 이곳에는 군우리에서 학살과 같은 참화를 겪고 망신창이가 되었던 미 제2사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 제2사단은 중부전선의 최대 위기처인 원주를 사수할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당시의 요도]


  이제 1951년 1월 초, 유엔군의 최대 관건은 서부전선보다 원주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북한군이 원주를 돌파하여 청주-대전방향으로 진출한다면, 서부전선에 포진한 유엔군 주력은 후방이 차단될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을 내어주고 중공군의 공세가 주춤한 1월 4일 이후부터는 북한군의 공세가 극성을 부린 원주가 제8군의 최대 관심지역으로 부각된 것이었습니다. 북한군 제5군단은 피란민으로 위장했던 부대를 원주 정면에 투입함과 동시에 원주 서측 문막에 제12사단을 투입하여 방어에 나선 미 제2사단의 후방을 위협했습니다. 군우리의 악몽이 떠오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포위당하여 몰 살 당할 악몽을 경험하였던 미 제2사단은 퇴로차단을 우려해 1월 7일 밤, 원주 남쪽의 목계 방향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주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군단장의 명령으로 현지사수로 목표를 바꾸었고 1월 8일 아침, 항공기의 근접지원과 함께 역습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격렬한 공방전 끝에 1월 11일 오후, 원주를 감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247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4일간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하게 되었고, 미 제2사단은 제8군의 위기를 수습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전투를 기화로 미 제1사단은 군우리에서 당한 패배의 앙금을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던 점입니다.


[원주를 공격하는 미 제2사단 (1950년 1월 10일 사진)]


  1950년 12월말, 연합사령부를 구성하면서 공산군 측 지휘권을 펑떠화이가 모두 차지하게 되었던 것을 내심 김일성과 북한 군부가 반발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중부전선에서 있었던 북한군의 단독공세가 사전에 중국 측과 조율되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북한군에게 단독 공격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만들었고 더욱 더 중국 측의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은 제3차 공세는 마오쩌둥의 지침에 따라 서울점령이라는 작전목표를 손쉽게 달성하였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서부전선의 주력을 보존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다를 통해 후퇴한 미 제10군단이 즉시 전선에 재투입되기에 곤란한 상황이어서 상대적으로 중동부전선의 방어선이 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이때 중공군이 북한군과 함께 원주지역으로 전력을 집중하였다면 상황은 수습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하지만 마오의 명령에 따라 예정보다 빨리 제3차 대공세를 개시한 중공군도 준비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아군은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수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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