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10.26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207)
  2. 2010.10.21 철원 승일교 박승일 대령의 최후 행방은? (33)
  3. 2010.07.21 63. 다시 38선으로 (3)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26 08:13


  1951년 11월 27일 열린 휴전협상에서 현재 양측이 접촉하고 있던 임진강어구-판문점-철원북방-금성남방-문등리-가칠봉-고성남방의 전장 237킬로미터의 전선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고 1개월간 한시적인 정전을 갖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에 양측의 생각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엔군은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했던 군사분계선 문제가 타결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방심하였지만 반면 공산군은 이때를 전력의 열세를 최대한 만회하는 절호의 시기로 삼았습니다.


[완벽하게 구축된 진지에 엄폐된 중공군 전차]


  결국 1개월의 잠정휴전기간은 공산군 측에게 유엔군의 공습을 걱정하지 않고 벌건 대 낯에도 마음 놓고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하였습니다. 공산군의 진지는 참호와 교통호가 완벽하게 구축되면서 그동안 유엔군의 우위를 보장하였던 공군력과 화력의 효과가 급속도로 반감되었습니다. 비록 공산군 측도 협상이 파국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인 휴전시도보다는 시간 지연에 몰입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협상과 고지전이 계속 병행되었습니다.


  특히, 1952년 들어 포로에 관련한 협상에서 이견이 커지면서 휴전이 난망한 상태로 보이자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에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위한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습니다. 이때 전선 중앙인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395고지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그저 그런 흔한 야산이었지만,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395고지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지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는 요충지에 자연스럽게 놓이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만일 적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橄制) 하에 놓이면서 중부지역의 많은 통로를 아군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395고지의 모습]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는 1951년 10월 17일 미 제3사단과 교대한 국군 제9사단이었고 395고지 북쪽 후방의 효성산에 위치한 중공군 제42군은 이곳을 되찾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1951년 11월 3일, 1개 대대의 규모의 중공군이 국군 제2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이를 쉽게 격퇴하였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1월 5일 21시를 기하여 증강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재차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군 제29연대 1대대가 진지를 사수하지 못하고 후퇴함으로써 395고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군의 반격도 즉시 이루어져 제28연대가 하루 만에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전초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이 일대는 소강상태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약 1년이 지난 1952년 중반기에 중공군이 최정예로 평가되던 제38군으로 교체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중공군은 북쪽 전방에 있는 봉래호 수문을 폭파하여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킴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국군 제9사단은 10월 15일까지 3개 사단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하는 중공군 제38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에서 벌어졌던 고지전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395고지를 놓고 무려 10일간 쉬지 않고 벌어진 전투는 12차례의 쟁탈전을 통해 고지의 주인이 7회나 바뀌었습니다. 이곳을 반드시 지켜내어야 할 당위성을 잘 알고 있던 아군의 불같은 인내력은 3배나 많았던 중공군은 무참히 녹여버렸습니다. 국군 제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적 사살 8,234, 추정살상 6,098명, 포로 57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공군 제38군은 완전히 소멸된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국군은 계속하여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면서 전략적인 작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우의 시신 옆에서 고지를 사수하고 있는 국군' 이런 모습으로 백마고지를 지켜내었습니다.]


  작전기간 중 중공군은 총 55,000발, 아군은 총 219,954발이라는 어마어마한 포격을 이 작은 고지에 집중시켰는데 이것은 단기간의 지역전투로써는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예입니다. 전투 결과 395고지 정상은 풀 한 포기 남아있을 수 없는 민둥산으로 변하였고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여 이 후부터 395고지일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이끈 제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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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승일교 박승일 대령의 최후 행방은?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21 08:39


서울에서 북으로 올라가면 한탄강 상류에 놓인
승일교라는
다리와 만나게 된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을 있는 다리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다리는 남쪽 절반과 북쪽
절반의 디자인, 즉 생김생김이 다른 언바란스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승일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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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승일교라는 다리 이름이 남쪽의 이승만 정부가
절반을 짓고
북쪽의 김일성 도당이 절반을 지어
승만의 승자와 일성의 일자를
따서 승일 교라는 이름이
주어졌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자 승일교라는 이름은 6·25전쟁에서 평북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박승일 연대장[대령]을
기린 이름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승일교 다리 현장의 다리 설명이나 인접 승일 공원에도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념해서 명명했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박승일 연대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좀 알아가자 나는 꼭 같은 덕천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고근홍 대령이라는 분도 전사했음을 알았다.


고근홍 대령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다부동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국군 1사단이 분전할 때
백선엽 사단장 지휘 하에서 김점곤, 김종갑 대령들과 함께
연대장으로서 격전중의 어려운 전황에서 부대를 지휘했던 분이다.


나는 다부동 전투에 관련된 여러 글을 자주 읽어서
이 분의 이름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박승일 대령도 처음 접한 분이었다.
관심을 갖자
차츰 관련 정보들이 들어왔다.

고근홍 대령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고 박승일 대령은
만주군 출신으로서 둘 다 육사 1기 생이었다.
박대령은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20년 생이다.


오른 쪽에서 두 번째 카이젤 수염을 기른 분이 박승일 대령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 별을 단 철모를 쓴 분이 7사단장 신상철 준장.

내가 유일하게 구할 수있는 그 분의 사진이다.

승일교가 있는 철원군에서 행정 경로를 밟아 성우회와
연락해서 육사 1기생 앨범을 구해 보면
박승일 연대장의 사진을 찾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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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박승일 대령이 덕천에서
고근홍 대령과 같은 시기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전투 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글을 볼 수가 있었다.


글을 쓴 분은 6·25전쟁때 한국군 총 참모장이었고
총리도 역임한 정일권 장군이었다.


그 분은 회고록에서 박승일 대령이 부하들과 함께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산악지대로 탈출해서 한동안
유격전을 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 분은 박승일 대령이 유격전을 하다가 중공군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한 뒤 무선으로 "중공군이 온산을 겹겹히 포위했다"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내고 소식이 끊겼다고 썼다.


나는 그래서 박승일 대령이 상당한 세월 북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격 활동을 하다가 최후를
맞은 것으로 상상했었다.


그러면서 연대 급에 지급된 무선기가 어떻게 남한까지
교신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 3사단 장병들.
이때만 해도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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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여 년 전, 북한 문제에 관한 글도
많이 쓰고 책도 여러권 출판했던 이기봉 선생의
저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1950년 11월 덕천에서 작전중인 국군 7사단, 오른쪽의
무전기를 맨 병사가 이 기봉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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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국군 박승일 연대장의 7사단 5연대 소속
무전병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덕천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뒤 평양 인근 순안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가 1951년 4월 초 탈출 했었다.

그러나 대동강을 건너다가 붙잡혀서
평양 사동 교화소에서 당분간 수감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다시 탈출, 갖은 역경 끝에 그 해 5월 25일
임진강을 넘어 국군 1사단으로 귀대했다.

그는 그의 저서 제 5 전선- 장백산에서 임진강까지-
이라는 저서에서 포로가 된 박승일 연대장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 온 미군들 모습.
한 책자는 이들이 1951년 2월 중공군 4차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들이
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책자에는 중공군이 석방한 미군
포로들이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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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은 포로가 된 직후 온 천지가 얼어 붙는 추운 날씨에
북으로 끌려 가면서 수많은 참혹한 장면을 목격을 했었다.


그는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 고근홍, 박승일 대령이
포로가 되어
북한군에게 넘겨졌다는 정보를 동료
포로들에게 들었다.


궁금해 하던 그는 우연히 포로가 된 박승일 대령을 목격했다.
이 선생은 자기의 자서전에서 그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포로로 끌려 가서 아연 광산인 초산군 화풍 광산
얼음굴에서 고생하다가 다시 분류되어 이동하기 위해
광산 사무소 앞에 전 포로들이 집결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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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병들의 포로 인원 점검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었다.
“야! 저기 7사단 5연대장 아녀?”


포로 중에 누가 이렇게 외치며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나는 귀가 번쩍 틔어 그 쪽을 바라봤다.


물론 나뿐이 아니라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봐도
그는 분명히 박승일 대령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그는 지난 날 [6·25전쟁]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부터
이른바
귀신 유격대 대대장 [당시 제 5사단 3연대의]으로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거구와 카이젤 수염으로 이름난
명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이제 무운(武運)이 다 했단 말인가?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무척 인정 많고 부하를 친형제처럼 아끼던 지휘관이었다.
적병에게도 인자했다.


지난 날 중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북한군의 포로를
자기 지프에
싣고 의무대로 달리는 걸 보았고 때때로 최전방
초소에 나가 사병들과
산병호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지새우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박 대령의 부대[국군 제 7사단 5연대]에 배속되어
낙동강 전선의 영천에서부터 여러 번 전투에 참가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덕천에서 중공군 포위망에 빠져
함께 적중을
헤매다가 헤어지지 않았던가?


그 후 포로가 된 박 대령은 이 수용소 어딘가에 따로
감금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역시 국군의 고급장교
[연대장 또는 대대장급]로
짐작되는 수명의 다른 포로와 함께
소 달구지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박 대령의 얼굴에 그 인상적인
카이제르 수염이 안 보인다.
스스로 깎아 없애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쓰라린 심정이 오죽 했을까?


일반 포로들이 모여 서있는 광장 저만치 둔덕길 위에서
박 대령 일행을 태운 소달구지는 이내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는 착검한 총을 든 5-6명의 북한 병들이 따랐다.

“ 연대장님!”
포로 가운데 누군가가 이렇게 불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 대령은 달구지 위에서 머리에 쓰고 있던 방한모를
벗어
우리를 향하여 흔들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머리를 죄수처럼 박박 깎지 않았는가?
박 대령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 방한모를 흔든다 .

서글픈 듯한 미소를 띄우며---


“ 연대장님 !”

“ 박 대령님 !”

포로들의 목 메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잇달아 일어난다.
박 대령은 달구지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두 팔을 쳐들어
포로들의 아우성에 응답을 했다.

“아, 아니! 이 동무들 덜 돼 먹질 않았구만잉 !
  닥치라우. 쌍 ---!”

북한 경비병들은 당황해서 포로들의 머리 위에 총대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박 대령을 부르는 포로들의 아우성은 곧 잠잠해져 버렸고
박 대령과 그의 몇몇 고급장교 포로들을 태운 소달구지는
계속 계곡 아랫길로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압송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압송 당하고 있는 본인들도 물론 모르리라.
이것이 박승일 대령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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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봉 선생은 고근홍 대령의 신상도 전했다.

이 선생은 앞에서 말했듯 포로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평양 사동  교화소에 구속되었었다.


그는 이곳에 고근홍 대령이 갇혀 있었고 그가 수준 이하의
대접에 분노하여 격렬히 항의하자 교화소 경비자가 그를
구타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혜산진에 도달한 미 7사단 17연대 장병들이 두만강을
넘어 중국 땅을 바라보고 있다.

서부 전선이나 장진호 방면과 달리 이 방면에는
중공군이 투입되지 않아 한미 연합군은 비교적 쉬운 북진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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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연대장이 포로가 된 덕천 전투를 간단히 소개한다.
한국군의 7사단이 주축이고 6, 8사단이 구원군으로 나선
군단 병력이 중공군의 대병력에 두들겨 맞고
붕괴 된
덕천 전투는 1950년 11월 26, 27일 양일간에 걸쳐
평북 덕천에서
발생했었다.


중공군이 군우리와 운산에서 미군들과 한국군들을
격파해서 재미를 본 제 1차 전역에 이어 보급과 정비를
마치고
다시 공세를 시작한 2차 전역에서 7사단을 주축하는
국군의 3개 사단이
무참히 당한 것이다.


포위되었던 신 상철 7사단장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미 고문관과 함께 연락기 L-19로 탈출했다.

사단장도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라 장군을
포로로 넘겨줄 수 없다는 상부의 결정에 의한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덕천에서 북창 방면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는 설이 유력하기도 하다.]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왼 쪽]과 24사단장
윌리엄 딘소장[오른 쪽].

그는 대전 전투후 35일간 헤매다가 포로가 되었다.
북한은 그가 포로가 된 사실을 1년 반이 지난
1951년 12월 18일까지 알리지 않았다.

북한은 그의 손가락 밑에 성냥개비 같은 뾰족한 것을
넣고 고문했었다.

체구가 당당했던 그가 돌아 올 때는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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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사단의 국군 패잔병이 우글거리는 덕천의
텅빈 7 사단 CP에 모인
연대장들은 8사단 10연대의 고근홍 대령,
6사단 2연대의 김봉철 대령,
7사단 5연대의 박승일 대령,
7사단 8연대의 김용주 대령이었다.


이들은 선임인 고근홍 대령을 임시 총 대장으로 추대하고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부대가 혼재 되어 와글거리는 상황에서 지휘할
병력조차
파악 할 수가 없었다.

김용주 대령과 김봉철 대령은 산을 타고 탈출했지만
그런대로 부대를
편성해서 밤까지 저항하던 고근홍, 박승일
두 연대장은 부대가 궤멸되고 포로가 되었다.

박승일 대령은 산위에 고립되어 겹겹으로 포위 된 뒤에
중공군의 거듭된
권고에 할 수없이 산을 내려와 투항했다고 하니
앞서 정일권 장군이
회상한 유격전은 이 짧은 전투가
와전되어서 그렇게 오해를 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덕천 전투에서 피해가 컸던 7사단 중에서도
박승일 대령의 5 연대는 거의 전멸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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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다.

나는 그 뒤에도 틈만 나면 두 연대장이 북한에 남긴 무슨 자취가
있을까하고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 간 기회에 그 곳 연변 대학교 도서관에서도 자료를
찾아 보았는데
두 분의 자취는 없었고 좌익 월북자 강 태무
소령의 전후 행적만 부수적으로 수확할 수가 있었다.

이 자는 표무원 소령[지원병 출신]과 함께 군에 잠복하고
있었던 좌익이었는데 숙군의 초점이 자신들을 겨누자
지휘하던 대대를 이끌고 이북으로 넘어가서 국군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알아보니 그 자는 전쟁이 끝날 무렵 동해안에 주둔한
북한군의
사단장이 되어 있었다.


더 찾아보니 세월을 흘쩍 넘어 1980년대 초, 노쇠한 강 태무가
자신에 의해 강제 월북한 부하들과 촬영한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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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흑인 구성 24연대의 병사들-
전투력에 문제가 있어 흑인 연대는 해체되었다.

중.북한은 유엔군 포로들을 국군들 보다는 비교적
나은 대우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1951년 봄에 수용소에
창궐한 발진 티푸스로 절반이 사망했다.
이 기간 국군 포로가 당한 학대는 이루 표현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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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일 연대장은 물론이고 고근홍 연대장의 그 뒤
소식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접할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전 두 분이 과연 전사 처리가 되었는지 알기위해
전쟁 기념관을 찾아가 전사자 명단을 검색하니 고근홍 대령은
덕천에서
사망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단지 전사일이 덕천 전투가 있던 때보다 열흘 정도 빠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박승일 대령이 전사자 명단에 보이지 않았다.
검색을 여러번 시도해봐도 발견할 수가 없어서 한가닥
기대감이
생겼다.

행여 내가 모르던 사연이 있어 박대령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생존해 있기 때문에 다르게 분류되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이었다.

국군 전사자를 관리하는 국방부의 성기욱 사무관에게
긴급 부탁을 했다.


이런 것도 마치 국가 기밀인양 쉬쉬하던 인간들도 있었던지라
조바심이 났지만 이 국방부의 얼짱 사무관은 엘리트답게
이 주제의
중요성에 빠르게 관심을 가져 주었다.


그가 찾아낸 자료는 박승일 대령이 역시 덕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실오라기 같은 기대가 사라지자 낙심천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더 알아 볼 길은 없었다.


승일교 전경.
-----------

오늘도 한탄강의 상류에 걸린 승일교는 흐르는 물에
묵묵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다리는 등록 문화재 26호로서 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북한 김일성 일당의 손아귀에 그 운명이 던져진 것을
마지막으로 보이
고 사라진 박승일 대령의 최후는 물론
고근홍 대령 두 분 최후의 진실이 어땠는지 정말 궁금하다.

북한과 교류가 있으면서 궁금했던 이광수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의 마지막 모습들이 밝혀진 것처럼 북한에서
종적이 묘연해진 행방불명 국군중 제일 계급이 높았던
두 분 국군
장교들의 마지막도 밝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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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울프 독 2010.10.23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sppsp님
    감사합니다.

    연대장 구타 정보가 자꾸 출현하는 것을 보면
    저놈들이 이분들을 무척 구타한것은
    그 실제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3. 이재필 2011.07.04 2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큰아버지 두분이 형제분으로 7사단5연대에서 같이 전투에 참전하셨죠 큰형님이 바로 덕천에서 중공군에 잡혀서 북으로 잡혀가시다가 동료들과 함께 탈출하셔서 몇달몇일을 남쪽으로 산맥을타고 남아하셨는데 얼마후 대구 근방까지 오셔서 구사일생으로 귀환했지요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동생분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입니다 같은연대 대대인데 중대가 달랐는데 영천전투에서 작은 부상으로 후송같다는 같은중대 동료의 말이 마지막으로 듣지못햇죠 그후 병적확인 결과 최종부대가 7사3연대로 나오고 행방불명이 된시점이 51년11월4일 입니다 그시점이 강원도 양구에서 중공군에 밀릴때 오마치 고개에서 중공군 일개중대에 고개가 점령당하면서 3개사단이 괘멸된 시점인것 같은데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요 그리고 전사자 기록을 조회해도 같은 이름이 많고 그시절 시골집으로 전사통지서인지 행방불명 통지서인지 할머니가 받어셨다는데 워낙 빨치산이 많은 시절이라 경찰관이 주고간 서류를 가족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아궁이에 넣고 불질러 버려서 전사장소도 군번도 현제까지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4. Medical Tourism 2012.02.08 14: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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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네요...울컥하여 막걸리 힌잔 올립니다.............김일성과 좃도없는 공산주의 그리고 남북 분단과 내전!!!!!!그런 지금 남쪽의 종북은 뭡니가?

  8. 지나가다 2012.06.18 0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의 모든 비극은 스탈린과 김일성 그 좃같은 역도넘입니다...두고 보십시요...역사가 평가할겁니다...물론 미국/영국의 나몰라(남이라고)하는 태도도 있지만...그리고 근원적 실마리는 일본넘과 무능한 우리 민족에도 있지만..... 결국은 김가놈 그넘입니다........통일이 오고 그넘들의 실체가 들어날때 우리는 소름 끼치는 진실을 알겁니다!!!!

  9. do my writings 2012.12.22 0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명대학들이 주변에 널려있어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건물 하나인 것 같았는데, 아마도 주변의 건물들을 함께 사용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10. what are the top ten research paper writing companies 2013.01.12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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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너무 좋은 사이트를하지 발견했습니다

  16. 김석 2013.08.08 0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중요한 전쟁의 기록을 보고 지식을 얻고자 하는데 사진들이 모두 깨졌습니다. 웹사이트 관리가 안되는 것인지요.

  17. online transcriber 2013.08.10 2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소련은 동유럽의 직업 영역에 대한 자신의 협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미국의 직업 영역 경계에 동의하고, 그들이 어디에 서 각각 일본의 항복을 받아 들일 것 때문이다.

  18. Look for Christina Noble Movie Here 2014.02.16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미국의 직업 영역 경계

  19. what does bubblegum casting do 2014.03.23 1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승일교라는 다리 이름이 남쪽의 이승만 정부가

  20. Go to Crib and Whip 2014.03.27 2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5전쟁, 강원도, 공비토벌, 미군, 박승일, 서울, 승일교, 연대장, 이승만, 중공군, 지리산, 철원, 철원군, 포로, 한탄강

  21. Natural Garcinia Cambogia 2014.05.22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この記事は、多分この記事は、ここで説明を受けされる必要があり、特にここに掲載の画像は、他の人と比較して、このブログは、より優れた作るのですので有益である

63. 다시 38선으로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21 08:47

 

  서울의 군사적 의의가 반감되었다 하더라도 탈환한 이상 또다시 적에게 순순히 내줄 수는 없었습니다. 만일 서울을 한 번 더 적에게 내어준다면 그때는 전선이 한강일대에서 완전히 고착화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38선 일대인 임진강을 연하는 선까지는 전선을 밀어붙일 필요성이 절실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공세를 생각할 수 없도록 적에게 심대한 피해를 강요하여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반복적으로 공세를 수행하는 동안 중공군과 북한군은 아군이 포위망을 형성하기 이전에 철수를 반복함으로써 주력을 격멸하는데 만족할 만한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적을 후퇴시키고는 있었지만 격멸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때 의정부 북방에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군 제26군이 몰려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들 중 의정부 서북쪽의 북한군 제1군단은 아군이 밀어붙이면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포진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아군이 문산 북방의 교량만을 먼저 차단할 수 있다면 이들을 일거에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리지웨이는 대구에 위치하고 있는 제187공수연대를 임진강 남쪽에 공수시켜 퇴로를 차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제187공수연대는 3월 23일 07시에 대구비행장을 이륙하여 문산 북동쪽에 성공적으로 낙하하는데 성공하였고 북한군 136명 사살과 149명을 포로로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포로 들을 신문한 결과, 중공군과 북한군의 주력은 공수연대의 투입 바로 직전에 임진강북쪽으로 철수하였음이 밝혀지면서 적의 주력을 차단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이처럼 의정부 북쪽이 텅 비게 되자 다음날 국군 제1사단이 문산-법원리까지 진출하였고 이어서 미 제3사단과 미 제25사단이 임진강까지 북상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동해안 지역에서 국군 수도사단과 국군 제9사단으로 편성된 국군 제1군단이 3월 25일부터 양양을 향하여 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북한군 제69여단이 험준한 산악지역을 이용하여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동해상에 배치된 미 함정의 지원 함포사격에 의해 전의를 잃고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 27일 수도사단이 남대천을 도하하여 양양을 점령함으로써 한강하구 서쪽을 제외한 38선 일대에서 전선은 다시 형성되었습니다. 또 다시 전쟁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군은 다시 38선에 섰고 전쟁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습니다.]


  이렇게 아군이 다시 38선 일대에 정렬하자 미국정부는 38선의 재 돌파에 관한 모든 것을 야전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에게 일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난 1950년 10월에 있었던 북진과는 개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미국의 의도는 38선 이북을 완전히 회복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 상태에서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제한적인 돌파만 허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는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에 경고한 방어지대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였고 이를 캔사스선(Kansas Line)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방어선은 총 184킬로미터에 이르렀지만 서부전선에서는 22킬로미터는 한강하구를, 중부전선은 16킬로미터에 걸친 화천저수지를 방어에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4월 1일부터 현 전선을 38선에서 캔사스선까지 밀어 붙이기로 하고 이를 요철작전(Rugged Operation)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상태가 아니어서 아군은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부에서는 3.2~9.6킬로미터, 동부에서는 16킬로미터까지 손쉽게 북상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사실 애초 캔사스선은 38선 북방에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연결하여 임의적으로 설정한 방어선이었는데, 아마도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때부터 대략 이 곳을 기준으로 미래의 군사분계선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아군이 캔사스선에 이르렀을 때, 중공군의 대부대가 평강-철원-김화를 연결하는 삼각지대(이른바 철의 삼각지대 Iron Triangle)에 집결하여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원산과 서울의 중간지역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여서 중공군의 차후 공세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전에 단속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은 캔사스선 10~20킬로미터 북방에 와이오밍선(Wyoming Ling)을 설정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에 재차 돌입하였습니다. 4월 11일 개시된 작전의 명칭은 작전명 불굴(Dauntless Operation)이었습니다. 작전명답게 제8군은 쉬지 않고 진격을 재개하여  전선을 한 번 더 북으로 걷어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최초 공세는 비교적 용이하게 진행되었으나, 4월 22일부터는 도처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전진이 멈추었습니다.


[중공군은 대응이 거세어지면서 반격이 예상되었습니다. ]


  리지웨이는 이것이 적이 새로운 대공세 준비를 완료하였다는 신호로 해석하였습니다. 지난 4차 공세이후 두 달이 경과하는 동안 중공군의 특이 동향이 없었는데, 그것은 중공군이 공세에 나설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리지웨이는 각 부대에“적의 공세를 중단하고 적의 역공에 대비하여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철의 삼각지를 눈앞에 두고 공격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미의 관심사는 중공군이 언제 어디로 공격해 올 것인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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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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