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강'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1.08.22 중공군의 '행진' 인해전술(1/2) (7)
  2. 2010.11.08 98. 전쟁이 남긴 것 (154)
  3. 2010.07.07 57. 간파된 적의 약점 (3)

중공군의 '행진' 인해전술(1/2)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8.22 09:15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전 중국 국방상 임표가 폐결핵을 치료하러 모스크바에 갔을 때 쥬코프 원수의 대독일 전쟁에서 구사한 전략을 보고 배워왔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인해전술이 6ㆍ25전쟁 때 중공군의 대표 전술이 된 것은 유엔군의 화력에 내놓을 것이라고는 인력밖에 없었던 팽덕회와 그 부하 간부들이 집중 사용했었기 때문이다. 6ㆍ25전쟁에 최초로 인해전술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50년 12월 초 장진호 하갈우리를 공격했을 때 였었다.

[하갈우리]


 인해전술의 변형인 행진 돌격은 그보다 더 먼저 있었다. 즉 도로를 따라 적을 공격해 올 때 공격 대형이 넓게 산개한 횡렬이 아니라 대오가 정연한 4열 종대로서 공격해 왔다는 사실이다. 공격이 아니라 행진이다. 즉 선두 병력이 방어측의 총에 몰살당하기 좋은 대형이다.

 이것은 비상식적인 군사적 행태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6ㆍ25전쟁 전사 곳곳에서 이 비상식이 발견된다. 미 해병들의 장진호 전투의 덕동 고개에서 그 비상식의 행진 공격이 선보인다.

[겹겹히 포위 된 덕동 고개의 F중대를 구출하기 위한 미 해병 7연대 1대대의 산악 기동, 하갈우리의 인해전술 공격 보다 조금 이른 덕동 고개 전투에서이다.]


 덕동 고개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일 까지 미 해병 7연대 F중대가 구출될 때까지 연대 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나흘간 막아내며 적을 2,000명이나 섬멸한 전투다. 미 해병 7연대 F중대는 유담리 하갈우리 도로에 옆에서 누에처럼 튀어나온 산줄기에 역시 산등성이에서 도로까지 누에처럼 길게 포진하고 있었다. 

 중대는 다음날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중대장 바버 대위는 예감이 좋지 않아 중대원 전원에게 개인호 구축을 명령했다. 전 중대원은 저녁 내내 개인호를 팠다. 중공군의 대군은 11월 27일 심야 유담리 쪽에서 4열 종대로 행진해 나왔다. 그 광경을 마틴 러스의 '브레이크 아웃'에서 살펴보자.

 참호를 다 판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든 중대장 바버 대위가 한숨 잤나 싶었을 때 그론왈트 하사가 급히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중대장님! 바버 대위님"
 "응 무슨 일이야?"
 "2소대장이 보고하기를 주민들이 전부 도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답니다."
 "주민들이? 지금 몇 신가?"
 "새벽 4시가 다 되었습니다."
 바버 대위는 일어나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알았어! 2소대에게 연락해서 우리가 심문하러 갈 때까지 주민들을 거기 정지 시키라고 해!"

 산 밑자락에서 경계를 서던 기관총 사수 잭 패이지 일병은 도로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관총의 장탄을 한 뒤 노리쇠를 잡아당기고 점점 더 커지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듣던 그는 100미터 위쪽의 도로가 굽어진 곳 근처에서 길게 뻗은 4열 행군 종대가 지고 있는 달빛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공군의 압록강 도강 행진, 전투 공격 때는 4열 종대였다.]


 민간인일 수가 없는 질서정연한 행군 대형이었다. 따발총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민간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사라졌다.
(해병들은 흰옷을 잘 입는 현지 주민과 흰 동계 위장복을 입은 중공군을 혼동했다. 이 중공군들은 바버 대위가 예상했던 덕동산 쪽에서 공격한 것이 아니라 유담리 쪽으로부터 도로를 따라 당당하게 공격해왔다.)

 패이지 일병은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 첫 사격에 중공군은 사방으로 콩 튀듯 흩어졌다. 일부는 도로 옆 2m 높이의 제방을 이용해 기관총 사격을 피할 수 있었으나, 산으로 도주 하려던 중공군들은 산기슭에 위치했던 피터슨 소대의 진지에서 쏟아지는 수류탄 공격과 기관총 사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기록해줄 미 해병대 F중대의 덕동 고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덕동고개의 행진 공격을 했던 중공군은 그래도 상식적인 공격 부대였다. 비슷한 시기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는 평북 가창 부근 미륵 고개에서 방어 진지를 편성하고 있다가 중공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의 대공격]


 7연대는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지시에 따라 후퇴하다가 1950년 10월 29일 심야 12시 중공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완전 붕괴되었었다. 연대장 이하 연대원들은 산산이 흩어져 엄중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겨우 탈출해 나와야했다. 연대는 겨우 장비와 신병들을 받아 재편성했었다.

 아래는 7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이대용 대위(준장 예편)의 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에서 발췌한 글이다.

[이 대용 대위 - 대대장 시절]


 이 대위의 1대대는 중공군 2차 전역의 대공세 때인 1950년 11월 29일 맹산 북창과 가창 사이에 있는 미륵 고개에 배치되었다. 명령을 너무 늦게 받아 1대대가 미륵 고개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0분경이었다. 미륵 고개에는 도로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산기슭에서 활의 활짱처럼 반원을 그리며 산고개로 향한 신작로와 산기슭에서 직선으로 산고개로 향하는 오솔길이었다.

 이 대위의 1중대는 산기슭에서 미륵고개로 일직선으로 형성된 오솔길 중턱 산의 5부 능선에 배치되었다. 신병들이 야전삽을 지급 받아 오지 않아서 참호도 파지 못하고 빨리 날이 새서 미 1기병사단과 진지 교대만을 하기를 바랠 따름이었다.

 그가 무덤 주변에서 잠깐 눈을 부쳤을 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며 전방의 신병들이 와르르 밀려 패주해왔다. 이 대위도 집중 사격을 받으며 얼떨결에 이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이 대위도 산 능선에 방어선을 펴볼 생각에 산고개로 후퇴했지만 대대장 김용주 중령으로부터 질타를 받고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고갯마루에서 10여보 내려간 곳에 신작로와 오솔길이 나누어지는 곳에 주막집이 있었다. 구 길인 오솔길은 직선을 그으며 골짜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고 신작로는 거의 직선 코스로 약 40-50미터 내려가다가 급 커브를 그렸다. 바로 그 급커브에 1대대 중화기 중대의 수냉식 기관총 1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M1917 수냉식 기관총]


 이 기관총은 만약의 경우 이대용 대위의 1중대를 돌파하고 올라오는 오솔길의 적을 사격하기 위한 종심 깊게 배치한 후방의 기관총이었다.(상황은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 수냉식 기관총이 돌연 총성을 내며 불을 뿜기 시작했다. 궁금했던 이 대위는 이를 지켜보았다.

 큰길을 따라 올라오던 먹구름 같은 군인 행렬의 집단은 기관총구의 불과 2-3미터 앞에서 정강이를 맞고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뒤에 따라오던 군인 집단의 일부는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를 소총으로 쏘고 있었다. 이 대위는 고개 아래 배치했던 아군 3중대가 퇴각하다가 화기 중대에게 사격을 당하는 것으로 알고 달려갔다.

 군인 대열의 선두는 기관총 사격에 정지 된채로 있었으나 그 뒤에 따라오는 군인의 물결이 뭉개뭉개 구름같이 몰려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대도시의 길 한복판에서 교통사고가 난 직후에 몰려드는 인파와도 같았다.

 이 대위는 이들이 퇴각하는 아군으로 착각하고
 "너희들 3중대냐?! 아군끼리 싸운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의 대답은 한국 말이 아니었다.
 "쏼라! 쏼라!"

 놀란 이 대위는 몸을 뒤 돌려 고개 마루 위로 달렸다. 그의 뒤로 따발총탄이 따라왔다. 이 대위가 따발총탄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날린 다는 것이 옆의 오솔길로 굴러 떨어졌다.

[따발총]


 충격으로 소지한 M2카빈 소총마저 부서진 그는 피신한 자세로 중공군이 행진해서 고개를 넘어 가는 것을 지켜 보아야했다. 미륵 고갯 마루 바로 밑에서 수냉식 기관총 사격에 잠시 멈칫했던 중공군의 행진이 다시 재개되었다. 중공군은 고개 마루터기에서 가창 방면을 향하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신작로를 향하여 쏼라 대면서 줄줄이 걸어 나갔다. 중공군의 행군 대열을 약 3시간이나 계속 되었으며 제일 후미에는 마차들이 굴러 가고 있었다.

 이 대위의 1대대는 중공군의 행진 인해 전술에 밀려 후퇴하였고 이 대위는 혼자 11시간 동안 중공군의 배후를 뚫고 미 1기병사단 제 8연대의 3대대와 만나 중대를 재집결할 수가 있었다. 중대는 약 20명의 실종 장병이 발생했다.

 전사의 한 첨부다. 중공군은 그 한 달 전인 11월 1일과 2일 사이 밤, 평북 운산에서 바로 이 1기병사단 8연대 3대대를 포위 차단해서 대대를 완전히 섬멸해 버렸다. 900명의 대대원 중에 무사히 이 죽음의 골짜기를 탈출해 나온 인원은 단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대장 로버트 오몬드 소령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전차 17량과 105mm포 13문을 상실했으며 다량의 중화기를 유기해야 했다. 대부분 부상병들인 미군 포로들은 북한군에게 인계 되었는데 북한은 이들을 청천강 지류인 구룡 강변에서 전원 학살해 버렸다.

[청천강을 건너 후퇴하는 유엔군]


 이 대위의 부대를 격파하고 전진했던 중공군은 가창에서 바로 한 달 전의 승리를 꿈꾸며 세차례나 1기병사단에게 야간 공격을 가했지만 미리 대비하고 전차 20여량을 주축으로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던 1기병 사단에게 대패했다.

 어찌된 일인지 미 전사에 1기병 사단이 대승리를 한 가창 전투는 크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들이 대패했던 운산 전투가 크게 언급되어 있는 것과 대조가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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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재흥 2012.04.08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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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전쟁이 남긴 것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1.08 07:57


  6·25전쟁은 이 땅에 무엇을 남겼을까요?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전쟁 전에 남북을 가르던 희미한 38선은 오히려 감정의 골이 더욱 깊게 파인 굵은 휴전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와 전쟁의 폐허만을 거머쥐고 남북한의 감정과 이념대결이 더욱 격화됨으로써 평화통일의 기대는 더욱 멀어져 버렸습니다. 결론적으로 3년 동안 파괴와 희생만 부르고 결국 원위치로 되돌아 온 것뿐이었는데 그로인한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었으며, 어느 쪽도 명확하게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남겨진 피해는 너무 컸습니다. ]


  그렇지만 지난 3년간 피를 바치면서 혈전을 벌여왔던 양측 모두는 전쟁이 멈추자 자신들이 이겼다고 맹렬히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전쟁을 계속하기는 곤란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존심까지 함부로 내팽겨 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세계최강의 미국에게 역사상 첫 패배를 안겨주며 남한의 북침을 저지하여 북한이 승리한 전쟁’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의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을 물리치고, 남한정부의 전복을 막아 자유를 수호하였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하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의 대가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작은 한반도에서 3년을 넘게 계속된 전쟁으로 남-북한 모두는 참혹한 전화(戰禍)를 경험하였습니다. 전선이 남으로는 낙동강까지, 북으로는 청천강 및 함경도 일대까지 오르락내리락 하였기 때문에 국토의 대부분에 포탄이 떨어졌다고 봐야했을 정도였고, 특히 주인이 수차례 바뀐 서울에서 38선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참혹한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하였으며 국토는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전사상 당한 국군과 유엔군의 손실은 77만 6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화력의 열세를 인해전술로 메우는 전술을 사용하던 북한 및 중공군은 약 2백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불어 후방의 민간 또한 이에 못지않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민간인의 경우 남한은 100만여 명, 북한 150만여 명 등 250만여 명의 인원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전쟁 전 남북한을 합친 총인구인 2,500만여 명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더불어 320만 명의 피난민과 3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 등은 그야말로 사회적 기반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수준이어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민간인의 피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더불어 소중한 개인의 재산은 물론 해방직후 미미하나마 존재하던 국가 기간산업시설과 공공시설마저도 송두리째 파괴되었는데, 이로 인한 재산적 손실만도 당시 가치로 32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습니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외침에 의해 국가가 멸망당한 최악의 경우도 있었지만, 6·25전쟁은 피해를 단순히 수치로만 계량화한다면 한민족 5천년 역사상 가장 비참했고 참혹했던 재난으로 인정하는데 결코 이의가 없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남북 서로가 주장하는 전쟁의 승리 주장을 떠나 전쟁의 결과는 남북한에 커다란 소용돌이를 몰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남북한 모두가 전쟁을 전후하여 인구의 재배치가 급속히 이루어졌는데, 특히 북한은 전쟁 중 대규모의 북한인구가 자진 월남함으로써 인적자원 면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구이동은 해방 및 분단 직후 비록 짧은 시기였지만 별개의 상이한 체제를 택하였던 남북간의 경쟁에서 어느 체제가 인간을 존중하였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명확한 바로미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체제에 반대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자진 월남함에 따라 공산정권으로서는 전쟁 전 보다 쉽게 ‘김일성 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반사 이익도 누렸습니다.


  외적으로 북한은 제2차 대전 후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과 전쟁을 치름으로써 제3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 서방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고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화 정책은 더욱 가속화되어 1958년에 이르러 모든 생산수단이 완전히 국유화되어 체제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외적으로 드러난 성과는 오늘날 경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에 이르게 될 만큼 급전직하 추락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피난민의 이동은 한반도의 인구분포를 바꿀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대한민국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대폭 들어난 인구의 대부분이 중부권에 집중됨으로써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시기의 인구 집중과 달리 단지 전란으로 인한 피난민의 증가는 의식주 해결에도 벅찰 만큼 힘든 환경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960년대까지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민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은근히 이어져 내려오던 봉건주의적 마지막 잔재가 무너지고 시장경제 질서에 급격히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초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확고한 반공이념을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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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crocs original 2013.11.20 15: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19. nhcp peninggi badan 2013.11.20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한다면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한반도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당연히 전쟁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20. jaket bola grade ori 2013.11.20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도

  21. 피알앤애드 2014.06.25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포스팅 관련하여 사진자료가 필요해서 퍼다 씁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57. 간파된 적의 약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7.07 15:53

  6·25전쟁을 살펴볼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의외로 서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전쟁이라는 행위가 처음부터 쌍방이 약속을 하고 일정한 규칙에 의해 벌이는 스포츠게임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전에 상대방의 전술이나 전력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발발부터 약 1년이 되는 1951년 6월까지 상대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치른 전쟁이었습니다. 특히 개전초기의 북한군이나 이후 갑작스럽게 등장한 중공군에 대해 너무나 몰랐고 이런 무지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상대에 대해 너무 몰라 톡톡히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무지함은 공산군 측도 사실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국군과 유엔군이 1월 25일부터 전 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내심 유엔군의 반격이 있다하더라도 빨라야 2월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유엔군이 썬더볼트 작전을 막 시작하였을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 고위간부회의에 참석하여 차후작전 방향을 논의하였는데, 여기서 나온 결론은 지난 3차례의 공세로 타격을 입고 전의를 상실한 유엔군이 곧바로 공세로 나올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1월 4일, 서울 점령 후 중공군의 방어 전략은 부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아군의 반격이 빨리 개시되자 중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공격을 최대한 지연하면서 한강선에서 강력히 서울을 방어한다는 방침을 수립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공군은 서부지역에 중공군 2개 군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을 투입하고, 중동부 지역에 중공군 4개 군단과 북한군 3개 군단을 투입하도록 지시함과 동시에 원산의 제9병단 예하 제26군(군단)을 철원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시간이 부족하였고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중공군도 그만큼 모르는 것이 많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공군의 늦장 대처가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에게 고민이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제3차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을 37도선까지 밀어낸 후, 약 20일 동안 꼼짝도 않고 있다가 아군의 반격에 당황하는 모습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미군 같으면 전선을 돌파하면 계속하여 적을 밀어붙여 전과를 확대해야하는데, 중공군은 바로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공세를 멈추는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은 중공군의 참전이후 새롭게 변한 전쟁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습니다. 바로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결정적인 순간에 공세가 약화되는 이상한 패턴을 반복하였습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한 이후의 공세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공군의 제1차 공세는 10월 25일에 시작되어, 11월 1일 청천강으로 철수한 유엔군의 추격을 중단함으로써 끝이 났는데, 공세기간은 8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공세는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 직후인 11월 25일 야간에 시작되어 12월 2일 중공군이 추격을 중단할 때까지였는데, 이때의 공세기간도 8일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제3차 공세는 12월 31일 시작되어 1월 7일 중공군이 진격을 중단할 때까지, 역시 8일간 실시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공군의 한 가지 패턴이 감지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세는 8일이 지나면 이상하다 싶을 만큼 약화되었고, 그 다음의 공세는 대략 1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벌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보급체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공세를 펼치다가 홀연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 아군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결코 신비한 전술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 할 방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중국이 공세에 나서기 위해서는 약 한달 간의 시간이 필요하고, 이런 준비기간 후 공세에 나서면 8일 정도밖에 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차후 이런 분석이 속속 입증되었는데, 당시 중공군의 보급능력은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엔 공군의 후방폭격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공군의 기동부대들은 최초의 보급으로 전투를 수행하며, 전투 중 재보급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중공군은 전투병이 최대한 1주일분의 식량, 탄약 등을 휴대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닥나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베일에 가려있던 중공군의 약점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중공군은 보급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중공군에게 다음의 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격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제8군 예하의 전 부대에게 1월 31일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로 1.4후퇴 후 도망가기에만 급급하였던 유엔군이 적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조기에 작전방침을 바꾸어 적극 공세로 바뀐 배경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소득은 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하였다는 점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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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ehicle insurance quotations 2012.05.28 10: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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