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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01 49. 흥남 철수작전 (16)
  2. 2010.05.21 46. 죽음의 계곡 (4)
  3. 2010.04.05 32. 감격적인 합류 (6)

49. 흥남 철수작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01 08:15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12월 6일, 미 제8군이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 적진에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한때 함흥-원산해안일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는 해상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작전을 총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흥남 앞 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으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흥남항에 집결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철수하는 아군의 병력은 총 105,000여명, 차량이 18,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5,000여톤의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으나, 절대량이 부족하여 2회 이상 운항을 하여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영웅적인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포위망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12일부터 개시된 해상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흥남 남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한 항공철수도 병행되었습니다.


  교두보 밖에 중공군이 몰려들기는 하였지만 공격은 예상외로 미약했습니다. 한반도 북부의 동부지역에 12개 사단을 집중했던 중공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는 흥남 일대에 밀집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일거에 격멸시킬 수 있는 호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주력 대부분은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부분 허물어져 내렸고 남은 전력 또한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중공격으로 만들어진 불벼락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흥남철수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습니다. 아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이루며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피난민에 대한 해결방책이 사실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평양철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또한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수십만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전쟁 내내 남북 간의 인구 이동 추이를 보면 약 200여만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던 반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올라간 인구는 극히 미약합니다.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피난민들의 통계는 체제의 우월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해상으로 탈출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알몬드는 최초 약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으나 예상외로 많은 피난민이 부두지역으로 쇄도하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장군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선편이 닿는 데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같은 극적인 조치로 98,000여명 정도의 피난민이 해상을 통하여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철수작전이었습니다. 때문에 흥남철수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철수작전을 넘어 인도주의 작전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구출되지 못하고 흥남 일대에 남아있는 피난민도 이와 비슷한 숫자였지만 당시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래가 없는 대규모의 함포와 공중폭격 덕분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7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8,637발이었는데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시 보다도 70퍼센트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4일 14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였던 것인데 이로서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은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철수선이 떠나면서 파괴되는 흥남항]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함으로써 지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내달려간 아군은 불과 85일 만에 38선 남으로 모두 내려오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북진은 불과 25일만 달콤하였고  새롭게 등장한 적에 의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은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공세로 전쟁의 종결을 희망한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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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r insurance 2011.10.08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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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관 밝은 모습으로 당당히 봉사활동을 했었다는...취재진들의 질문이나 포즈에도 적극 응해주고 말이

  3. Kitchen Design 2011.10.18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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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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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모씨네요.거기에 동조한 채명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6. BCAA 2011.11.0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점의 포항 공격이 예상 못 했던 것이라 학도병들이 최전방에 처하게 된 것이고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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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죽음의 계곡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5.21 09:42

 

  제8군은 언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을 붙인 대대적인 진격작전을 개시하였지만 오히려 실제로 전선은 후퇴를 거듭하는 황당한 사태에 직면하였습니다. 11월 27일, 덕천과 영원 일대의 국군 제2군단이 붕괴되자 제8군은 전 부대를 청천강 선으로 철수하였고 이것으로도 위기를 감당할 수 없자 곧이어 평양-원산을 연하는 선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은 이중으로 아군 주력을 포위하여 제8군을 일거에 격멸하려는 야심만만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제38군이 덕천을 돌파하여 군우리(軍隅里) 후방으로 진출하여 내곽을 포위하고, 제42군은 영원, 북창을 거쳐 순천 및 성천 방향으로 진출하여 외곽을 봉쇄하려 하였습니다.



[중공군은 제8군을 일거에 격멸하려는 대공세를 개시하였습니다.]


  당시 청천강 상류의 교통 요충지인 군우리 일대를 방어하던 부대는 미 제2사단이었는데,
11월 29일 군우리 전방에 출몰한 중공군 제40군의 압박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숙천 후방으로 부대를 철수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군우리 후방으로 파고들던 중공군 제38군 113사(사단)가 군우리와 순천중간인 갈고개를 점령함으로써 위기가 증폭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중공군 제42군을 순천북방 신창리에서 미 제1기병사단이 저지하는데 성공하여 철수할 수 있는 통로를 겨우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안전은 장담하기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2사단이 숙천으로 철수하는데 이용될 수 있는 도로가
2개였는데, 하나는 사단 후방에 있는 군우리~순천~성천에 이르는 도로였고 또 하나는 미 제1군단 관할지역인 신안주~숙천~성천에 이르는 도로였습니다. 따라서 순전히 지휘관의 의지에 따라 철수로를 선택할 수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 제1군단장 밀번은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urence B. Keiser)에게 도로 상태가 양호한 신안주~숙천간 도로를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카이저는 미 제1군단과 철수로가 겹치면 혼잡할 것으로 예상하여 군우리~순천 간 도로를 따라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극의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철수로를 정찰하려 먼저 급파된 전차
소대는 저항 없이 갈고개를 넘었고 이상이 없음을 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찰대는 험준한 협로 양측 위에서 매복하여 있던 중공군 제113사가 미 제2사단 본진을 살상지대로 유인하기 위하여 그대로 통과시켰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낙관적으로 보이자 사단은 11월 30일 새벽, 제9연대, 사단 본부, 포병 및 지원부대, 제38연대, 국군 제3연대, 제23연대의 순서대로 철수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험준한 협곡 안으로 진입하자 좌우측에 매복한 중공군으로부터 집중적인 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노출된 병사들은 중공군의 조준사격에 차례차례 쓰러져 갔지만 이 상태에서 뒤로 돌아 빠져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군우리 협곡에서 저항하는 제2사단 공병대대]


  이런 미 제2사단에게 위기기 닥치다 공군의 지원과 외곽에서 미 제9군단이 배속된 영국군 대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모두 무위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후 죽음의 계곡으로 명명된 군우리에서 용원리까지 10킬로미터를 통과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은 모든 장비와 대응을 포기한 상태로 몰매를 맞아가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철수를 개시한 미 제23연대는 연대장 단독으로 신안주로 우회하여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으나 제23연대의 작전지역 이탈로 사단 본부가 더욱 많은 피해를 보게 되어 후일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군우리 전투에서 미 제2사단은 3,000여명의 사상자와 사단의 전 장비를 상실하여 부대가 완전히 와해되는 참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대해체까지 고려하였지만 전통 있는 부대를 이대로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후 미 제2사단은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군들은 군우리
전투가 좌우측으로 늘어서 있는 형(刑) 집행인 사이를 죄인이 통과하도록 하여 몰매를 가하는 ‘인디언의 태형’ 방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인디언의 태형(笞刑 : Gauntlet)’이라고 부르며 뼈아픈 교훈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군우리 전투 당시에 가도에 몸을 숨긴 미 제2사단 장병들 ]


  미 제2사단이 전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그나마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후방을 차단한 중공군이 강력한 화력으로 궤멸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매복한 상태로 소화기에만 의존하는 공격을 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중공군 제113사의 뒤에는 미 제9군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지원에 나서 강력하게 압박을 가했다면 오히려 중공군이 전멸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나중에 전황을 분석하며 알게 된 것이었지만 이때 까지만 양측 모두는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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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꽁보리밥 2010.05.21 1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믹시때문에 오랜만에 방문합니다.
    여전히 6.25 관련글을 꾸준히 올리고 계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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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2. Colin Stroinski 2012.05.12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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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감격적인 합류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4.05 08:36

 

  국군 제1사단의 선전으로 낙동강방어선이 일순간 붕괴되자 북한군은 소백산맥과 금강일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9월 21일경부터 인천상륙 소식이 전선에 전파되었고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북한군은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북한군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며 독전을 강요하였지만 이런 비이성적인 노력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워커 제8군사령관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9월 22일부로 추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드디어 전쟁 개시 후 처음으로 낙동강으로부터 전선을 밀고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낙동강을 벗어나 북으로 진격하는 미 제1기병사단]


  워커로부터 경부가도를 따라 38선으로 밀고 올라갈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이었고 그중에서도 선봉은 제7기병연대였습니다. 제7기병연대는 보다 신속하게 전방을 개척하고자 린치(James H. Lynch)중령이 지휘하는 예하 제3대대를 특수임무부대로 편성하여 9월 22일 08시, 다부동을 출발시켰습니다. 그날 중으로 낙동강을 도하한 린치특임대(TF Lynchs)는 다음날 상주까지 진출하여 북한군의 저항 태세를 점검한 결과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해도 될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26일, 사단의 후속부대들이 상주에 집결을 완료하자, 린치는 그의 특임대에 배속된 제70전차대대 C중대 3소대에 수색대를 합류시켜 “보은-청주-천안-오산방향을 따라 전차가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전진하고 저항하지 않는 적은 대응하지 말라”는 진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린치의 판단대로 전선은 밀고 댕기며 교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군의 진격이 멈춘 곳에서 전선이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일 보은으로 출발한 수색대는 오후에 청주를 지나 저녁에 진천 남쪽에서 진격을 멈추었는데 그것도 북한군의 저항 때문이 아니라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색대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북한군이었습니다. 마침 부근을 지나던 북한군 수송대가 미군 전차를 발견하고는 3대의 트럭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공교롭게도 트럭에는 휘발유가 가득 실려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연치 않게 연료를 보충 받은 수색대는 전차에 다시 시동을 걸고 전진을 계속하여 그날 20시 30분경 천안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교통정리를 하던 북한군 병사에게 “오산?”하며 길을 묻자, 북한군 병사가 얼떨결에 오산방향을 안내하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까지 발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진격은 빨랐습니다.


[양쪽에서 전진하던 아군의 선두 부대들은 오산부근에서 연결됩니다.]


  쉬지 않고 오산남쪽 16킬로미터 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전방에서 갑자기 치열한 사격이 벌어져 노출된 전차병 1명이 전사하면서 일순간 긴장 상태에 빠졌지만 곧 교전이 멈추었습니다. 전방 부대는 인천으로 상륙하여 오산으로 남진하고 있던 미 제7사단 31연대였는데, 다행히도 오인으로 인한 아군간의 교전이 확대되기 이전에 서로를  알아보았던 것이었습니다. 이때가 9월 26일 22시 26분으로 인천상륙부대와 낙동강 반격작전 선두부대가 감격적으로 이렇게 연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선두부대가 조우한 장소가 미군이 한반도에서 북한군과 처음 접촉하여 망신을 당한 죽미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8시경, 미 제1기병사단 본대가 상륙부대인 제7사단의 본대와 연결 되면서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던 전선은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결국 맥아더의 대담한 도박은 제8군의 낙동강 반격이 성공함으로서 단숨에 북한군 13개 사단의 배후를 포위해 버리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적으로 반전을 이루고 38선을 향한 진격은 계속되었지만 포위망 안에 갇힌 북한군 패잔병의 소탕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전의를 상실한 잔적을 소탕하는 것보다 전쟁이 종결을 위해서 전진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남한 각 지역에 쪼개져서 게릴라가 되어 갔지만 그리 위협적으로 여기지는 않고 천천히 소탕하면 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지리산 부근에서 생포한 빨치산]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판단과 달리 북한군 패잔병 게릴라들은 두고두고 후방지역의 암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엔군의 놀라운 진격에 일순간 패퇴하였지만  북한군 대부분은 부대 건제를 유지한 상태로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로 잠입해 아군 병참선 차단과 습격 등의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하였고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까지 지연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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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4.05 13: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2. mami5 2010.04.06 07: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킨을 시원스레 바꾸신거네요..^^
    글 잘 보고갑니다..^^

  3. home insurance mail quotes 2012.06.05 1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 블로그 사이트와 함께 제공 내용은 이해하기 절대적으로 매우 가치뿐만 아니라 간단하다. 그것은이 웹 사이트를 참조 반가워하며 유료 교육입니다.많은 감사합니다.

  4. home insurance renowned estimates 2012.06.0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좋은 기사, 화려한 텍스트입니다 .. 밀린! 당신의 능력 밖으로 볼 수있다, 우리는 당신이 우수한 기사를 작성하는 계속 기대 ..

  5. mercury insurance arkansas 2012.06.07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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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pocket fm radio best reception 2012.10.21 0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잡은 빨치산 중에 정말 빨치산인지 아니면 당시 강제로 끌려가서 활동하게 된 사람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을 두고 가려낼 정도로 한가한 상황도 아니니 뭐라 말할 평편도 아닙니다.
    그러나 평시 같으면 무고한 사람이 당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고 그것을 짊어지고 적군 전차로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나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안 가본 사람이 긴박한 상황의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됩니다. 전쟁에서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면 그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다음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서 이론과 실제는 다릅니다.
    많은 이론 중에 무수히 변하는 변수를 모두 기록한 교범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시기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지요. 물론 경험이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경험이야 말로 순간적인 반사행동으로 나오기 쉽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