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8.10 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3)
  2. 2010.06.01 49. 흥남 철수작전 (16)
  3. 2010.04.30 자유로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3편 (15)

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8.10 17:45

 6ㆍ25전쟁 동안 공산 측에 포로가 되었던 미군은 약 7,000명 정도 되었다. 이중 40%가 학대와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국군 포로의 사망률은 극히 낮았는데, 이 사실로 미군들의 극한 상황을 견디는 신체적 심리적 능력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학대는 중공군이 관리했던 포로수용소보다도 북한군이 운영했던 포로수용소가 극히 심했었다.

[미군이 공중 촬영한 북한의 직동 포로 수용소]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군 노병을 만났는데, 자기는 파주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중공군이 관리하던 창성 수용소에서 2년 넘게 수용됐었다고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어요. 북한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라면 못 돌아왔을지도 몰랐어요. 그 곳은 지옥이었으니까----"

[중공군의 벽동 포로 수용소, 면 전체의 주민들이 쫓겨나고 각 민가가 포로 수용소로 접수되었다. 앞에 압록강이 보인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북한으로서 증오스런 미군에게도 특별히 나은 대우를 해줄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이런 혹독한 포로수용소의 환경을 알거나 겪은 미군 포로들은  탈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탈출했었다. 6ㆍ25전쟁 기록에 의하면 공산측에 포로가 된 미군의 10퍼센트인 670명이 탈출했었다. 그러나 이 탈출은 적에게 포로가 되고 얼마 안 되는 후방 후송전이거나 최전선 야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북한의 먼 후방인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는 집 편지 나누어주기, 편지를 받는 중공군 복장의 미군들]


 6ㆍ25전쟁 때 남한은 공산포로들을 미군들이 일괄 관리하여 거제도 수용소 한 곳에 수용했지만(포로 폭동 후 분산했지만) 공산측은 유엔군 포로들을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했었다. 북한과 중공군의 대부분의 포로수용소는 전선에서 아득히 먼 북쪽 압록강 연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중공군 관리하의 벽동 수용소에서는 돼지도 공급이 되었었다. 도살이나 요리는 미군의 몫이었다.]


 이렇게 머나먼 적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례가 무려 50여건이나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였다. 험악한 지형과 현지 북한 주민들과 전혀 다른 생김새, 그리고 전선까지의 장거리가 탈출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급식은 특히 최악이었다. 병으로 죽는 포로들이 급증하자 부랴부랴 급식 형편을 개선했다.

[식탁도 없이 걸인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미군 포로들]


 이들 포로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보이는 아득히 먼 북쪽인 한 중 국경지대의 압록강의 만포진 포로 수용소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북한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서울 동북방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 세 명이 있다. 

 세 명의 미군들이 탈출을 감행 한 것은 북한의 엄동인 12월이었다. 폭격으로 인해 미군들에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북한 주민들 사회에서 확연히 다른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고, 그 먼 길을 탈출에 성공한 실화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탈출을 주도했던 존 그래험 해병 상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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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장진호 전투 때 최전방까지 진격했던 해병 7연대 장병으로서 철수중 중공군에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미 해병 구호소, 중공군 3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때 7연대가 전위를 맡아 포위망 돌파를, 5연대가 후위로서 밀려드는 중공군들과의 전투를 했다.]


 그래험은 철수 작전 도중 눈 쌓인 벌판에서 흰 위장포를 쓰고 접근해온 중공군과 격돌했다. 양측이 동시에 발사했고 나는 턱에 따발총을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한 오두막 집안에 다른 아군 병사 여섯 명과 누어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는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들처럼 하갈우리 방향으로 철수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된 육군 부상자들도(미 육군 7사 31연대 전투단) 있었다. 

 우리 모두 부상자였지만 희한하게도 내 턱은 붙어 있었다. 아마도 뼈를 스친 유탄에 맞은 것 같은데 그 충격은 정신을 잃을 만큼 컸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얼굴은 얼어붙은 피에 온통 뒤 덮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우리를 북한군에게로 넘겼고 놈들은 우리를 총검으로 몰아 세우며 며칠 동안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미군은 총검에 찔려 죽었다. 며칠 후 한 작은 마을에 이르러서 심문을 받은 일행은 분산되었는데 나는 북한군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대열 속에 끼게 되었다. 

 수주일간 산길을 따라서 밤에 걷고 낮에는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한 끝에 한 중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변의 한 마을, 만포진에 이르렀다. 포로로 끌려간 해병에게나 육군에게나 그 곳은 참으로 고약한 시설이었다.

[페렌바크의 유명한 한국전쟁 책에 소개된 탈출한 포로들이라는 사진인데 탈출 인원이 다섯 명인 것으로 보아 그래험 일행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곳에 보내진 자들은 악질분자라 했으며 그래서 북한군의 지극히 ‘부드럽고 자애로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 한 명만은 악질이 아니었다. 변절자가 있었던 것이다. 

 탈출을 의논하고 있던 나는 덕분에 10일간을 땅 구덩이에 갇혀서 물만 마시고 지내며 교화를 받아야 했다. 밀고한 변절자는 디킨슨이라는 하는 테네시 출신 녀석이었다. 

 수용소에서 23개월을 지낸 어느 겨울 날, 콜세어의 한 편대가 언덕을 넘어와 인근의 중공군 시설을 폭격하더니 또 다시 한 편대가 뒤를 이었다. 인접한 건물에 네이팜탄이 떨어져 불타고 대공포가 간단없이 포효하는 소란 속에 경비병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평소 탈출을 모의했던 우리 세 명, 뮬린스와 포드등 합 세 명의 동지 포로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포진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무조건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그날 밤 밤새 걸어서 적의 추격망을 벗어났다. 날이 새자 험한 지형의 잡목더미 속에 숨어 들어가 쉬었다. 그 뒤에도 주민들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숲 속에 숨고 밤에는 걸고 하는 탈출 행을 계속하였다. 배가 고프면 민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음식물이나 닭을 훔쳐서 허기진 속을 채웠다. 날씨는 무척 추웠으나 북극을 능가하던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혹독한 날씨에 비하면 그런대로 참을 수가 있었다.

 거의 2주일을 그렇게 남하했을 때 우리는 먼 전방에서 포화가 은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뛸 뜻이 기뻐했다. 그러나 남으로 갈수록 적병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우리는 조심과 조심을 거듭하면서 전선으로 접근했다. 최전선 직 후방의 계곡에 숨어서 밤을 보낸 우리는 날이 부옇게 새자 적 경계선을 은밀하게 돌파하고 드디어 건너 전선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미군들에게 구조 될 수 있었다. 그 곳은 서울 동북방 전선이었으며 우리를 구조해준 미군은 미 제 1기병사단이었다.

[포로 교환 때 돌아온 미군 포로들이 수용된 자유의 집]


 나는 이 고통스러운 탈출 중에 손가락에 심한 동상에 걸려 그 손가락들을 모두 잃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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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ㆍ25전쟁 중에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나온 국군 장병들 또한 여럿이었다.

[박정인 소령]


 비교적 잘 알려진 탈출 이야기는 사단 19연대 작전 주임이던 박정인 소령[후에 3 사단장 역임]과 3명의 장교와 1명의 병사가 1951년 1월 23일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두 달 뒤인 3월 14일 귀환에 성공했던 일화이다. 

 미군인 그래험의 북한 탈주 경우의 2주는 무척 빨랐다고 하겠다. 미군으로서 북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돌아온 것은 이 그래험 상병의 예가 유일할 듯하다.

[유명한 라이프지의 사진,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존 프로크 상병이 믿어지지 않는 귀환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더구나 그가 그 멀디 먼 압록강변에서 탈출해서 주민들이나 북한 추격대에게 발각되지 않고, 전선을 통과해서 돌아 온 것은 ‘기적’이라 생각된다. 국군이라면 모를까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티가 나는 백인 얼굴들로 한반도 북반을 종단해서 남하하였다는 사실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험은 현재 80세의 나이에 몬타나 주의 카네지 읍에서 생존해 있다. 위는 카네지 읍내 주민이며 조각가인 그래이저가 영웅으로 추대받은 그에게 헌정한 독수리 조각상. 그래험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아들 존 H. 그래험(왼쪽)이 받았다.]


 지도도 없이 정확히 남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탈출 일행 중에 별을 보고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남하하는 용의주도한 조심성이 이들의 탈출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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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흥남 철수작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01 08:15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12월 6일, 미 제8군이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 적진에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한때 함흥-원산해안일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는 해상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작전을 총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흥남 앞 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으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흥남항에 집결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철수하는 아군의 병력은 총 105,000여명, 차량이 18,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5,000여톤의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으나, 절대량이 부족하여 2회 이상 운항을 하여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영웅적인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포위망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12일부터 개시된 해상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흥남 남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한 항공철수도 병행되었습니다.


  교두보 밖에 중공군이 몰려들기는 하였지만 공격은 예상외로 미약했습니다. 한반도 북부의 동부지역에 12개 사단을 집중했던 중공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는 흥남 일대에 밀집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일거에 격멸시킬 수 있는 호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주력 대부분은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부분 허물어져 내렸고 남은 전력 또한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중공격으로 만들어진 불벼락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흥남철수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습니다. 아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이루며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피난민에 대한 해결방책이 사실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평양철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또한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수십만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전쟁 내내 남북 간의 인구 이동 추이를 보면 약 200여만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던 반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올라간 인구는 극히 미약합니다.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피난민들의 통계는 체제의 우월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해상으로 탈출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알몬드는 최초 약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으나 예상외로 많은 피난민이 부두지역으로 쇄도하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장군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선편이 닿는 데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같은 극적인 조치로 98,000여명 정도의 피난민이 해상을 통하여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철수작전이었습니다. 때문에 흥남철수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철수작전을 넘어 인도주의 작전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구출되지 못하고 흥남 일대에 남아있는 피난민도 이와 비슷한 숫자였지만 당시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래가 없는 대규모의 함포와 공중폭격 덕분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7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8,637발이었는데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시 보다도 70퍼센트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4일 14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였던 것인데 이로서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은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철수선이 떠나면서 파괴되는 흥남항]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함으로써 지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내달려간 아군은 불과 85일 만에 38선 남으로 모두 내려오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북진은 불과 25일만 달콤하였고  새롭게 등장한 적에 의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은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공세로 전쟁의 종결을 희망한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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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r insurance 2011.10.08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모씨네요.거기에 동조한 채명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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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관 밝은 모습으로 당당히 봉사활동을 했었다는...취재진들의 질문이나 포즈에도 적극 응해주고 말이

  3. Kitchen Design 2011.10.18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4. bad credit car loans 2011.10.18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워낙 그 시점의 포항 공격이 예상 못 했던 것이라 학도병들이 최전방에 처하게 된 것이고요.
    댓글

  5. medical billing and coding 2011.10.28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모씨네요.거기에 동조한 채명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6. BCAA 2011.11.0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점의 포항 공격이 예상 못 했던 것이라 학도병들이 최전방에 처하게 된 것이고요.
    댓글

  7. Zack Ceconi 2012.05.30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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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onlineaccountsoftware 2013.02.13 1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感谢您写这样一个容易理解的文章就这一议题。

자유로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3편

웹툰 모음 2010.04.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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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뽀로로 2010.04.30 18: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님 이번 에피소드가 젤 재밌어염~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 궁금 *^^*

  2. 연이랑 2010.04.30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결국 잡혔군요.
    계속 되는 자유에 대한 갈망
    빨리 귀환 하였으면 좋겠어요.ㅜㅜ

  3. 제이드 2010.04.30 2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오늘 나온 따끈따끈한 에피소드네요~~ 이번엔 탈출을 성공할 수 있을지~~~

  4. ㅠㅠ 2010.05.05 07: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하군요
    자유는 그렇게 고귀한 것인데 지금이 시대 너무 무감각한 것 같아요

  5. 하노이 2010.05.05 2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길하군요; 숱하게 탈출하고 기적처럼 성공했는데- 이번이 마지막 탈출이길 바랍니당. 작가님도 화이팅!!

  6. 과객5 2010.05.06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도 Happy ending이겠져?

  7. 최중원 2011.05.18 1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cafe.daum.net/soccerz2
    좋은만화 감사 합니다(_ _ )

  8. bag factory 2011.07.23 2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9. spring 2012 fashion trends 2011.09.28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ut what we can do, as flawed as we are, is still see God in other people, and do our best to help them find their own grace. That's what I strive to do, that's what I pray to do every day.해외그

  10. jewish holidays 2012 2011.09.28 16: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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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New proline boat cushions for sale 2011.10.20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It was not a religion that attacked us that September day. It was al-Qaeda. We will not sacrifice the liberties we cherish or hunker down behind walls of suspicion and mistrust. I want to know where to find proline boat cushions for sale, do you?성된 것

  12. ㅎㅎ 2012.03.27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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