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전투 - 영국군의 해피밸리 전투(제 2편)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0 08:38

퓨시리어 대대와 같이 한 시간 만 더 일찍 명령을 접수했다면

얼스터 대대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명령접수 지연은 그날 밤 큰 불행을 얼스터 대대에게 안겼다.


철수명령을 늦게 받은 대대는 유기 장비들이 없도록 모든

짐을 다 트럭에 적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다.


미군들은 급한 상황 철수시 모두 버릴 장비도 영국군은

모두 챙겼다.


보병들은 언덕에서 내려와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철수 행군 순서는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B중대가 앞장서고

그 뒤를 대대 본부가 뒤따랐다.


그리고 전투식량과 탄약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다음,

그리고 C,D A,중대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을 크롬웰과 대대에 배속된 탱크 지원중대의

파견대가 후위를 맡았다.


마지막 기만과 정찰을 위해서 박격포로 무장한 소대병력
장갑차 부대가
작은 고개에 잔류하여 불규칙한 교란 사격으로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 부대의 장갑차들은 11시 20분에 철수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낮에 제일 높을 고지인 작은 고개를 점령했다가 공습으로

공격대가 전멸당한 중공군은 고지에서 영국군이 모두 철수하자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고지를 점령하고 그 연이은 언덕들에
신속히 침투하였다.



철수로는 우측 위의 쟁고개로부터 아래로 그은 푸른 선이다.
이 소로옆을 따라 언덕이 연이어 있다.
동그라미로 표시한 곡릉철교를 전후에서 전투가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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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증에 비극의 현장을 이 된 이 작은 고개 지역은 100미터도
안되는
언덕들이 도로를 따라 몇 백미터 내려오다가
곡릉천을 만나면 오른쪽
즉 하류 쪽으로 휘어져 하천을 따라 갔다.


다른 말로 쉽게 설명하면 ‘ㄴ’를 거꾸로 휘어 놓은 것 같은

형태를 띄우고 있다.


지금은 작은 고개를 통과한 도로가 남쪽을 향하여 직선으로
힘차게 뻗어 갔지만
영국군이 싸울 때는 도로가 바로
작은 고개를 넘어와 곡릉천을 만나면
다시 옆으로 휘어져
언덕과 하천 사이를 따라 가다가 하천을 건너 삼하리
벌판을 
가로 질러 매내미[큰 고개]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작은 도로였다.
새도로가 뚫리고 이 도로는 없어졌다. 


우마차나 겨우 다니는 소로였고 지역 물류나 교통은

이 지역을 지나는 열차가 담당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대대를 수송할 차량부대가 이 역 L자가 끝나고

곡릉천을 건너 삼하리로 들어가는 지점, 다시 말하면 교외선의

철교가 지나는 지역의 눈 덮인 논에서 정렬하여
대기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곡릉 천변에 아직도 남아 있는 구도로 -이 길로 영국군의
보병들과 전차들이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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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지점이 중공군이 은폐해서 접근할 수 있는 언덕애서
불과
2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대는 어둠 속에서 중공군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근처 언덕을 따라  빠르게 전개했다고 믿었다.


그래서영국군은 어둠을 이용해서 이 소로를 타고
빨리 전선을 벗어 나기로 했다.

기도비닉이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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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약방문 격이지만 이는 잘못된 전술적 판단으로 보인다.

중공군의 전투 자산은 ‘밤’과 ‘산’이다.


이 중공군의 전술적 자산은  밤이 되면 산을 타고

은밀하게 유엔군의 틈새로 침투해서 후방 도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활용되었다.

이미 한달전 미 1 기병사단의 한 대대가 이같은 우회침투와
도로 차단의 전술에 의해서 궤멸 되어 버렸다.

영국군의 철수로 좌측은 낮은 산[언덕]이 동행하듯 같이

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이는 영국군 철수도중 중공군이 얼마든지 도로차단과

측면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공군 전술이 이날 밤 이 순간에 꿈틀대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군에게 이 우회 침투 가능성이 높은 도로 옆
언덕[산]에서
일 분이라도 빨리 떨어지는 것이 중요하였다.


즉 '기도비닉'보다도 '신속이탈'의 전술적 명제가

더 급한 상황이었다.

쟁고개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철수로와 나란히 뻗은
언덕형 산맥- 철수시 이 언덕의 위험을 인지하고
빨리 이탈해야 했었는데 --- 유감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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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부대 지휘관 쿠퍼 대위가 선두에 서겠다고 자원했지만

전차의 요란한 엔진 소리가 적에게 부대 철수를

알린다고 믿어서 이 요청은 거절당했다.


모든 트럭과 보병이 떠난 후  전차 부대는 뒤에서 천천히

후위를 맡아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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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공론을 또 해본다.

먼저 전차와 트럭에게 보병 1개 중대를 배속시켜

중공군이 붙은 우측 산에서 신속하게 이탈하여

후방 매내미 고개로 철수하고  이들로 하여금

철수 부대의 화력지원을 하게 한다.


보병들은 도로에서 벗어나 구보로 삼하리 들을 가로지르는
직행으로 3킬로 떨어진
매내미 고개로 가게 했다면 그날 밤
아무리 상황이 나빴어도
전차 14량을 다 잃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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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계획대로 되어 가는 듯했다.


우측 언덕의 중공군은 영국군이 철수하는 줄은 알았지만

어둠 속에서 길 위의 이 부대를 무턱대고 공격할 수는 없었다.

병참이 빈약한 중공군은 실탄을 물처럼 쏴대는 미군들에 비하면

무척 사격군기가 강해서 실탄을 아껴 함부로 교란 사격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전투 지역에 두 개의 철교가 있다.
이 철교는 첫번째 철교로서 얼스터 대대는 그 우측 길을
무난히 통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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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수 부대에 갑자기 불행이 찾아 온 것은 밤 9시 30분이었다.

선두 B중대와 본부 중대는 이미 매내미 고개를 넘어서

전투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고 그 뒤를 일부 부대가 승차한

트럭 부대가 후속하는 철수의 중간이었다.


검은 하늘에 출동한 미 공군기가 낮에 항공 공격을 했던

이 지역에 이르자 조명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움직이던 영국군의 모든 것이 언덕위의 중공군에게

백일하에 들어났다.

중공군은 즉시 자동화기 포문을 열고 공격을 개시하고 이어서

수백발의 박격포탄이 날아보냈다.



중공군의 매복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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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던 영국군과 트럭들은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았다.

일부 트럭들은 정지하기도 하고  불에 타기로 했고

많은 보병이 죽어 나갔다.


최대의 비극적인 전투가 대대가 최종 목적지인 곡릉천 이북

철교 근처 작은 마을 불미지 인근의 수송 트럭 집결지에서
발생했다.


영국군이 중공군에게 불의의 첫 일격을 맞은 곳은

곡릉천 철교 오른쪽의 논에 수송트럭들이 집결한 곳이었다.


중공군의 지휘관은 매우 노련하였다.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으로 영국군의 지휘체계를

충분히 흔들어 놨다고 판단하고 언덕으로부터 이 지점으로의

돌격을 명했다.


돌격 나팔 소리와 함께 언덕으로부터 중공군 대병력이

새까맣게 언덕 아래 영국군의 측면으로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와
부대를 덮쳤다.



중공군들이 내려와 영국군을 급습한 낮은 언덕의 한 부분.
이 연속 언덕은 앞 사진 언덕의 연속이지만 앞의 언덕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이 언덕은 곡릉천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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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항상 장기로 삼는 단병접전(短兵接戰)의 전술이

어둠 속에서 실행되는 순간이었다.


적의 공격은 집요했다.

그들은 사격을 하며 몰려와 삽시간에 영국군과 뒤섞여 버렸다.

아무리 정예 부대라도 이 상태로 기습을 당해
지휘체계가 붕괴 되었다면 어쩔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근거리의 영국군을 닥치는대로 쐈다.

영국군들도 스텐 기관총과 소총, 브렌 기관총으로 용감하게
응전했으나
이미 지휘체계가 마비 된 상황에서 그것은 각 병사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전투는 탈출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영국군과 이를

살육하려고 쫓는 중공군 때문에 전투장이 서쪽과 남쪽으로

직경 1km정도로 확대되었다.


앞서 말한대로 서쪽으로는 전진하는 영국군이 진입한 불미지

마을과 그 동쪽 터널로 전투장이 확대되었다.


영국군의 기록에 의하면 중공군들이 크롬웰 전차의 궤도를

궤도 파괴용 특수 폭탄을 써서 파괴 했다고 되어 있지만

현지를 방문해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중공군은
특수 폭탄이 아니라
평범한 방망이 수류탄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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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전차의 궤도는 방망이 수류탄에도

파괴 될 만큼 좁고 얇고 연약하였다.


방망이 수류탄에 전차 14대가 나가 떨어지는

전무후무한 진기한 기록을 만들었다.


현지에 가서 확인했지만 이곳 지형은 센츄리온 전차나

크롬웰 전차의 기동에 차별적 제약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 탁상공론만 하지 말고 더 튼튼한 궤도를 가진 센츄리온

전차를 파견 헸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국전에 참전한 센츄리언 마크 3 형 전차- 20 파운드[84mm]
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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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 센츄리언 탱크는 특히 그 탁월한 야지 횡단
능력과 고지 등판 능력으로 미군들의 전차들 보다도
휠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 튼튼한 철 궤도의 현수장치는 나중에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할 때 참조했었다. 

1960년대에 한국군에서 센츄리온 탱크와 비슷한

크기의 M-47 탱크 철궤도에 수류탄을 넣고 폭파하는

실험을 했지만 궤도는 끄덕 없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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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롬웰 전차대의 소대장 알렉산더는 사방에서 공격하는

중공군들을 피해서 곡릉천 제방 위를 달렸다.



곡릉천. 이 하천은 당시 얼어 있었다. 남쪽 제방에서 본 북쪽 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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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하면서 그는 중공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진지에 75mm

전차포를 발사했다.

크롬웰 전차들과 보병들은 적이 점거한 불미지 마을로 진입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전차는 불미지를 통과했지만 적의 방망이

수류탄 공격으로 궤도가 벗겨지고 정지해야 했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내밀고 상황을 살피다가 피격당해

전사했다.

그의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를 버리고 탈출했다,


뒤에서 후속하던 대장 쿠퍼 대위 역시 전차 궤도가 끊어져

포수 쿠퍼 하사와 함께 곡릉천쪽으로 피했지만 이들은

중공군 20여명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목격당하는 것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일부 전차들은 철로를 따라 고양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집요하였다.


철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 터널 [용본 터널-동네 어르신네는
굴칸이라고 부른다.]
안에 진입한 크롬웰 전차를 공격해서
기동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뒤에 따르는 두 여대의 전차들도 정지하고 승무원들은 중공군의

사격 속에서 피신할 곳을 찾은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 유기된 크롬웰 탱크.
중공군이 고정 포대로서 활용하려고
위장 했었다.

크롬웰 전차 한 대는 중공군이 몰고 한강 철교까지
내려와서 배치되었다가 마침 반대편의 남안에 나타난
영국군 센츄리언 탱크에 의해서 격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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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은 영국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섬멸작전을 계속하였다.

불길에 휩싸인 불미지는 영국군의 묘지가 되었다.


부대의 맨 뒤에서 행군하던 대대장 대리 브레이크 소령은

이 난전을 지휘하려 애쓰다가 이 동네 외곽에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중공군의 공격은 곡릉천 남쪽 양주시 삼하리에서도 전투가
격심했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철교와 불미지 마을 일대가
최대의 격전장이었다고 했다.



전투의 분깃점인 곡릉철교- 이 좌측에
해피 밸리 전투 최대의 격전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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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후에 곡릉천 북쪽 선유리에서만 파괴되고 유기된 전차만

6-7대나 되었다고들 하였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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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항모 트라이엄프의 6·25전쟁 참전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3.25 09:16
 

[트라이엄프의 활동을 함재기 화이어플라이기 중심으로 보여주는 동영상]


  6·25전쟁중 영국군은 상당한 육해공의 병력을 파견해서 중요한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싸웠다. 
1951년 봄, 임진강 전선에서 중공군 춘계 공세에 큰 피해를 입었던 그로스터 연대의 용맹한 일화를 육군이 남겼고, 압록강 상공에서 성능이 한참 떨어지는 미터어 쌍발 전투기로 공산군 미그 15기와 힘겨운 공중전을 벌인 영국 공군의 분투기도 한국 항공 전사에 기록했었다.


  영국 해군 역시 남침을 저지하기 위한 유엔군으로 김일성 남침 불과 며칠 후부터 적극적으로 참전했다. 남침 불과 일주일 후인 1950년 7월 2일 미국 해군 순양함과 같이 동해안에서 남파 병력 호송대를 호위하던 북한 어뢰정 세 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었다.
6·25전쟁중 영국 해군은 황해를, 미군은 동해를 맡아서 3년간 작전했었다. 영국 해군은 6·25전쟁 참전중에 여러 전투 기록을 남겼는데 그중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특이한 활동으로서 최초로 파견된 영 항공모함 트라이엄프의 활약을 소개한다. 트라이엄프는 2차 세계 대전 바로 후인 1946년 5월 6일 취역했다. 총 톤수 1,7000 인 경항모였다.


[영 항모 트라이엄프]


  6·25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에섹스급 항모들이 27,000톤의대형이어서 80기의 전투기나 공격기를 탑재하는데 트라이엄프는 작전시에 단지 24기만 탑재했었다. 트라이엄프의 함재기들은 이미 구식이 되어가는 프로펠러 전투기 씨화이어와 역시 프로펠러 전투기인 화이어플라이 기들이었다. 씨화이어 기는 유명한 스피트화이어기들의 해군용이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고 착륙 장치가 강화된 것이다.


[씨화이어]

 

  이 전투기는 빠르고 운동성도 좋지만 그 모양[실루엣]이 북한 공군의 야크 9와 비슷해 자주 오인을 받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1950년 6월 트라이엄프는 영국 해군 극동 함대에 이동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죠지 앤드류스 소장이었다. 배속된 극동 해역으로 항해하던 중 홍콩 근해에서 트라이엄프와 다른 호위함들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받았다. 트라이엄프와 호위하던 구축함 코삭과 함께 최고의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항해를 계속하여 일본 구레[吳]항에 기착했다. 구레 항은 호주군 해군이 관리하고 있었는데 작전해역으로 투입 전 트라이엄프는 호위하고 있던 구축함 코삭과 함께 이 군항에서 재급유와  재보급을 실시하였다,


  이곳에서 비행하기 힘들만큼 상태가 안 좋은 네 기의 씨화이어기와 두 기의 화이어플라이기를 내려놓았다. 작전을 위한 격납고내 여유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트라이엄프는 다시 한국 해역으로 출발하면서 다른 영국과 호주함들과 기동 함대를 구성했다.


[영 함재 공격기 화이어플라이 기]


  기동함대를 구성했던 영국함들은 순양함 저메이카, 구축함 HMS 콘소트였다. 두 함들은 6·25전쟁중에 활발한 활동과 전과를 거두게 된다. 이 영국함들에 호주 프리게이트 함 HMAS 숄하벤과 영국 급유함 웨이브 콘퀘러가 가세해서 6·25전쟁참전 영연방 함대를 이루었다. 트라이엄프 함대는 출항하자 오키나와로 남하하여 급유를 받은 다음 미 7함대의 미 항모 부대와 함께 연합 함대를 구성 출동하였다. 황해 작전 해역에 도착한 트라이엄프의 함재기[827 해군 항공대]들은 미 함대와 합동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1950년 7월 3일 첫 출격이 있었다. 미 해군 항모 밸리 포지[에섹스급 항모]와 협동 작전이었다. 트라이엄프의 12기의 씨화이어와 9기의 화이어플라이기들이 출동하였다.


[미 항모 밸리 포지]


  영 함재기들은 황해도 해주 비행장을 들이쳤다. 유감스럽게도 적기는 없었다. 공격대는 비행장 빌딩과 격납고를 파괴하고 귀함했다. 다음 날에도 트라이엄프의 공격대가 출격했다. 이 날에는 괄목할 전과가 있었다. 연안과 해주 사이의 철교를 부수어 철로를 끊고 북한군 병영과 고사포 진지를 기총소사했다. 트라이엄프는 대지 공격이 없으면 주로 대잠 정찰과 대공 초계 업무를 맡았다.


  평양 폭격이 있은 지 2 주 뒤인 7월 19일, 트라이엄프가 탑재한 구난기인 씨 오터 쌍엽기가 조종사 케인 중령이 조종하고 황해에서 한반도를 가로질러 동해 원산 앞 바다까지 장거리를 날아가 격추된 미군 콜세어 기의 조종사를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를 무릅쓰고 가까스로 구출해내는 위험한 구조 임무를 완료했다.   이 구난 업무는 구식 씨 오터 기들의 마지막 전시 출동 임무였다.


[항모 탑재 구난 비행정 씨 오터. 1943년 취역했다.]


  7월 28일 거의 비극으로 끝 날 뻔한 재난이 발생했다. 씨 화이어 일개 편대가 함대 북동방 공역에서 함대의 레이다가 잡은 미확인 비행체들을 확인 차 출격하였다. 씨화이어들은 그 미 확인 비행체들이 함대에 내습하는 적기가 아니라 미 공군의 B-29임을 발견하고 안심하였다. 마음 놓고 접근했던 씨 화이어 3번 기는 300야드 거리에서  B29 한 기로부터 느닷없는 불줄기의 세례를 받았다. 앞에서 말한 듯 멀리서 보는 씨 화이어의 실루엣[외형]이 북한 야크기와 비슷했기 때문에 한 미 B 29기의 기총수들이 기관총을 쐈기 때문이다.


[씨화이어 기들과 비슷하게 보이는 야크 9기]


  씨화이어기들이 일제히 회피 기동을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한 기의 연료 탱크에 기총 탄이 명중했다. 기체에 불이 붙으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화이트 조종사는 크게 화상을 입었으나 기체를 뒤집고 자유 낙하하는 방법으로 낙하산으로 비상 탈출했다. 파도가 너무 거칠고 높아 항모에 탑재한 씨 오터 기로도 바다에 표류하는 그를 구할 수가 없었다. 화이트 조종사는 속절없이 한 시간동안이나  파도에 떠밀려 다니다가 연락을 받고 현장에 달려온 미국 구축함  에버솔에 구출되었다. 이 사건 뒤 영국 전투기들은 동체와 날개에 검고 흰줄을 쳐서 야크기가 아님을  알렸다.


[식별 표식을 한 씨화이어 기]

 

  트라이엄프는 계속 현장에서 대공 및 대잠 활동을 수행하고 다시 일본의 구레로 돌아왔다. 8일간 머무르며 재정비와 보급을 마친 트라이엄프는 7월 9일 영 순양함 케니아와 구축함 코머스, 그리고 두 척의 카나다 HMCS 아타바스칸 과 수우등의 전투함과 같이 출항했다. 이번에 주어진 주요 임무는 적 항구에 대한 집중적인 사진 정찰이었다. 함대는 적에게 점령당한 남한의 목포나 군산 그리고 인천을 정찰했고 북쪽의 진남포까지 항공 촬영하였다. 비행대장 맥라크란드 중령은 순양함 저메이카가 군산시에 위치한 대형 공장을 포격하는 것을 유도했다.


  8월 14일 진남포 인근 대동강 하구에 큰 대형 선박 세 척이 정박 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케인 중령 지휘 아래 오후에  6기의 씨 화이어기들과 6기의 화이어 플라이기들이 로케트 탄으로 무장하고 출격하였다. 편대는 대공포화가 격심했지만 로케트 공격으로 이 선박들을 대파시켰다. 나중에 격파된 한 척은 북한 해군 소해정이었고 한 척은 2,000톤 크기의 화물선, 한 척은 800톤의 연안선으로 밝혀졌다. 며칠간의 작전에서 기동 함대는 교묘하게 위장한 북한의 150톤 되는 무장선 한 척을 열 여섯 발의 로케트로 격침시켰다.


 

[영 씨화이어의 착함 모습 - 착륙할 때 후미의 훅이 걸리는

과정을 살펴 보시기 바람]


  정찰 업무가 끝나고 트라이엄프는 계속 서해를 초계하며 작전을 이어 나갔다. 며칠간의 작전에서 교묘하게 위장한 북한의 150톤 되는 무장선 한 척을 열 여섯 발의 로케트로 격침시켰다. 연안용 작은 배들도 여러 척 격침했고 해변에 설치된 오일 탱크를 파괴하였다.


  8월 19일에는 영국 구축함 콘소트와 트라이엄프의 화이어플라이가 협동하여 군산에 있는 공장을 포격했다. 8월 23일 고장 사고 격추등의 이유로 작전 가능했던 24기의 함재기가 단지 9기만 남자 트라이엄프는 일본의 사세보 항으로 돌아왔다. 트라이엄프는 일본 사세보로 돌아와 싱가폴에서 함재기들을 수송해온 항모 개조 공작선 유니콘으로부터 14기의 함재기를 인수받았다. 


  트라이엄프가 사세보에 기항해있는 사이 황해에서초계 항해를 하던 구축함 HMS 코뮤스는 군산 서쪽 85마일 해역에서 북한 공군 IL-10 두 기의 공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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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기는 김포 아니면 수원 비행장에서 출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피격위치는 어청도에서도 중국쪽으로 한참을 더 가야하는 곳인데 제공권도 없는 북한기가 이렇게 먼곳까지 출격을 나왔던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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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의 우현이 파괴되고 수병 한명이 전사했고 한 명이 부상했다. 함은 동료함 콘소트의 호위 아래 사세보로 돌아왔다.


[소련제 IL 10 공격기]


  8월 26일 다시 출항한 트라이엄프는 한국의 서해안으로 출발하였다. 북한 서해안에 정찰비행을 나간 두기의 화이어플라이기 들은 해변에서 숲으로 우거진 세개의 이상한 섬을발견하였다.그러나 잘 살펴보니 나무와 풀로 뒤덮어 위장한 세척의 북한 위장선이었다. 세 척은 위장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이어플라이기에 즉각 파괴되었다.  이번 출동에서 적의 100톤짜리 어선을 비롯한 여러 척의 북한 배들을 파괴하였다. 트라이엄프는 통상의 초계업무를 했고 함대의 순양함 저메이카와 구축함 채리티의 연안 함포사격을 위한 사전 정찰과 탄착점 유도를 하는 지원 업무를 했다.


 

  8월 29일 트라이엄프 함상에 큰 사고가 발생했다. 함재기 화이어플라이 기가 꼬리에 달린 정지 후크없이 착륙하다가 항모 갑판을 미끄러져 안전벽에 부딪힌 사고가 발생했다. 나무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가 함교로 날아가 작전실의 유리를 부수고 안으로 뛰어들어 맥라크란 중령을 후려쳤다. 맥라크란 중령은 800 해군 비행대의 대장이었다. 맥라크란 중령은 이 불운한 사고에서 얻은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남한 해역에서 의식을 갖춘 장례식으로 수장되었다. 그는 6․25전쟁중에 사망한 유일한 해군 조종사였다.


[영국 해군의 함상 장례식]


  9월 3일 출동한 트라이엄프 함대는 군산 비행장과 군산역을 포격한 저메이카를 위한 탄착점 유도를 했다. 9월6일 트라이엄프는 캐나다 구축함 아타바스칸, 아라뭉가, 그리고 바타안과 같이 황해를 떠나서 동해안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작전하던 미 7함대 항모 부대의 작전임무를 인계 받았다. 7함대는 일시 휴식과 보급 그리고 정비를 위하여 일본의 모항으로 귀항해야만 했다. 트라이엄프 함대의 동해안 작전은 9월 8일부터 시작했다. 함재기 화이어플라이와 씨화이어등은 연일 북한 땅의 목표들을 공습해서 북한의 전쟁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했다.


  첫 주요 목표는 철도였다. 원산 남방으로 뻗은 철도를 따라 내려가던 6기의 씨 화이어와 6기의 화이어플라이는 한 작은 역에서 열차를 발견하고 공격해서 화차들을 모두 벌집이 되게 파괴하고 기관차는 완전히 운행불능인 고철이 되게 부수어 놓았다. 이어서 동해안 철도를 따라 계속 수색하여 고원 역에서 80량의 화차를, 영흥 역에서 40량의 화차들을 발견해서 모두 파괴해버렸다.


[유엔기의 공습을 받는 북한 열차]

 

  9월 9일 불순한 일기 때문에 트라이엄프는 단지 여덟 번의 출격만 했지만 4기의 화이어플라이들은 동해안 한 도시의 비행장을 파괴하였다. 역시 고장과 추락등으로 함재기가 단지 6기로 줄어든 트라이엄프는 9월 10일 사세보로 돌아왔다. 9월 12일에 보급 및 재정비를 마친 트라이엄프는 호위하는 와라뭉가,채리티와 콕케이드, 콩코드등과 함께 기동 부대를 만들어 사세보를 출항했다. 목적지는 한국의 인천이었다. 바야흐로 역사적 인천 상륙작전이 임박했던 것이다.


[폭격받는 인천시]


  함대 승무원들에게는 행선지는 물론 비밀로 했다. 트라이엄프 기동부대의 임무는 상륙 작전 사전에 항공지원을 해주는 것이었다. 상륙작전 직전 함대는 화력지원과 정찰 업무를 개시했다. 트라이엄프의 함포 사격 지원은 큰 성공을 가져왔다. 순양함 저메이카와 케니아의 함포는 화이어플라이가 지시한 고지의 북한군 목표를 포격해서 대 폭발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곳에 적 탄약고가 있었던 것이다. 산 꼭대기가 날아가 버리고 엄청난 연기가 2,500미터 이상 솟구쳤다. 그날 저녁 영 함대 사령관 앤드류 소장은  맥아더 원수로부터 치하 전문을 받았다. 인천 상륙 작전의 첫날 13,000명의 병력과 장비가 상륙했다.

 

  다음날 17일 새벽 북한 야크기 두기가 인천 앞 바다의 상륙 함대를 공습했다. 두 기는 미 순양함 로체스터를 폭격하고 그중 한 기는 겁 없이 더 먼 바다에 있던 영 순양함 저메이카를 기총소사를 했다. 수병 한 명이 전사하고 두 명이 부상했지만 야크기는 저메이카의 대공 사격에 격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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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공습 전투기가 야크- 9기라는 설과 IL-10  기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영국 기록은 이 북한 기들을 IL-2로
 적어 놓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두 기가 투하한 폭탄의 크기가
 전투기용인 소형으로 보여 야크기 설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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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양함 저메이카]


  트라이엄프는 인천 상륙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9월 21일 일본 사세보 항으로 귀항했다. 이 번이 트라이엄프의 마지막 작전 항해였던 것이다. 함재기들의 손실도 많았고 함의 이곳 저곳도 손을 보아야 할 함들이 많아 한국 파견 임무를 종결해야했다. 트라이엄프는 이틀간 사세보 드라이 독크에 들어가 작전 중 입은 파손 부위를 긴급 수선했다 9월 25일 트라이엄프는 임무를 일주일 뒤에 극동해역에 도착할 다른 항모 테세우스에게 인계하고 홍콩으로 떠났다.


[테세우스 - 트라이엄프와 같은 급이댜.]

 

  트라이엄프는 그 후 영국 해군에 장기간 더 봉사했다. 50년대 말에는 함정 수리를 전담하는 공작함으로 변신해서 재 취역을 했다. 퇴역한 트라이엄프는 1981년 스페인 고철 업자에게 팔려 해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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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꾸는 세상살이 2010.03.25 12: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것에 그 한계가 있으니 한때의 용맹스럽던 트라이엄프도 수를 다하고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또 한 편의 역사가 쓰여진 것을 쓰여진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역사가 후에 어떻게 적혀질지 생각하고 현 시대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2. mami5 2010.03.26 07: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좋은 시간이되세요..^^

  3. 야후 낙화 2010.03.26 14: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 기고글 잘 보았읍니다
    감사 드립니다 독님

  4. li815 2010.03.26 2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좋은 정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5. phy1133 2010.03.27 16: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방부 기고가가 되신 ~님께 축하 메세지 남김니다. 즐감~

  6. 장대수 2010.04.10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어요~

  7. Douglass Pabich 2012.05.31 1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유익한 기사 극단적인 재미를 발견했습니다. 이 문제 내에있는 모든 사람을 겪고 있습니까? 나 역시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쓰는 사람의 방법을 만끽하는 데 도움 것을 보내 겠소. 감사

  8. Michel Alvidrez 2012.05.31 17: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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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medical emergency kit supplies 2012.10.21 00: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것에 그 한계가 있으니 한때의 용맹스럽던 트라이엄프도 수를 다하고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또 한 편의 역사가 쓰여진 것을 쓰여진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역사가 후에 어떻게 적혀질지 생각하고 현 시대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15. Full Term Insurance 4 Sale Article 2014.03.31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월 9일 불순한 일기 때문에 트라이엄프는 단지 여덟 번의 출격만 했지만 4기의 화이어플라이들은 동해안 한 도시의 비행장을 파괴하였다. 역시 고장과 추락등으로 함재기가 단지 6기로 줄어든 트라이엄프는 9월 10일 사세보로 돌아왔다.

9. 침략자의 실책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1.25 08:34

  9. 침략자의 실책

 
   3일 만에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사실은 개전 초기의 주도권을 북한이 확실히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이것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치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서울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빼놓고 단지 전투의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서울 점령이 북한에게 그리 만족할만한 전과를 올려주지 못했음은 이후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점령 당시에 선전수단으로 이용된 전차]


  우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운용술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북한 전차에 밀려 국군이 눈물을 흘리며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많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사실 북한군도 그들의 승리를 이끌어 준 전차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천혜의 교통로인 경원축선에서 벌어진 실책이었습니다. 북한은 서울을 공격할 주 공격로로 경원축선의 동두천-의정부 도로와 포천-퇴계원 도로, 두개를 선정하고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연대를 각각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포천-퇴계원의 도로상으로 전차가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은 탱크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험한 지형이었습니다. 결국 105전차여단 예하 109전차연대는 서파까지 진입했다가 다시 포천으로 역행군을 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포천-퇴계원간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정부-창동의 좁은 통로에 2개의 보병사단과 2개의 전차연대가 몰리면서 교통체증을 겪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전차부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은 6월 26일 13시에 이미 의정부를 점령하고도 미아리 방어선까지 15킬로미터를 더 진출하는데 무려 35시간이나 소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울 점령이 최소한 하루 이상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105전차여단 소속 T-34]


  하지만 가장 큰 미스터리는 6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북한군 주력인 북한 제1군단이 서울에서 3일간을 지체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애당초 한강 이남에서의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주장부터 남한의 민중봉기를 기다렸다는 설, 심지어 북한이 자축연을 벌이면서 아무 생각 없이 3일간을 허비했다는 설까지 다양합니다. 더구나 북한의 서울 점령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도 남아있어서 도강의지만 있었다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었고 이미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하구를 건너 김포반도에서 영등포로 향하고 있던 중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북한 제6사단이 국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안 한강을 건너 진격을 계속하여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쟁 전 소련 고문단이 수립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서울의 점령보다 서울 일대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 개전 초 작전의 주목적이었는데 북한군의 서울 지체는 이런 계획 자체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북한이 한강을 도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보다, 도강 할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 제2군단의 남진을 저지한 국군 제6사단의 용전과 김포반도에서 급조된 병력으로 긴박하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하를 막았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분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대 포위 섬멸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실책이면에는 국군의 투혼이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겉으로 드러난 승리 이면에 숨어있던 실책이 있었고 이것은  국군이 낙동강까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런 실책을 범하게 된 데는 단지 그들의 착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여 침략자를 피로 막아낸 국군의 놀라운 투혼이 있었기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1950년 6월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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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othing factory 2011.05.25 20: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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