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멸을 각오한 사투 다부동 전투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7.28 17:09
  혹심한 손실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혼을 발휘해 다부동을 사수해낸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6·25 전쟁 중 가장 격렬한 전투가 계속된 기간은 언제쯤일까요?
  많은 분들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와 고지 쟁탈전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의외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 인천상륙작전 )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대전 전투의 참패와 더불어 북한군 제6 보병사단의 전라도 석권으로 인해 한국군과 UN군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으로 밀려났고 곧 치열한 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경상남북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내어준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마저 상실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마저 없던 셈이었습니다. 
  낙동강에서 북한과 유엔군 측의 대결은 물자와 전투기술의 대결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신력과 의지의 대결이라 할 수 있었죠.

  치고 내려올 수 있는데까지 내려왔기에 최후의 승리를 목전에 둔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 좌측 사진 )은 이미 전 사단에 8월 3일에 8월 6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이미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 하에서 실시된 낙동강 도하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부산 점령의 날짜는 뒤로 밀리자 초조해졌습니다. 
  하지만 8월 12일 한국군이 대구 북방으로 퇴각하자 김책은 이 기회를 이용해 8월 15일까지 작전을 종결하고자 일선 사단장들에게 서둘러 대구를 함락시킬 것을 독촉했습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전선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대구로 접근하기가 용이한 다부동이 뜨거운 감자로 부각되었습니다.
   북한군은 이 곳을 사수하고 있던 국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개전 이래 숱한 실전을 겪으며 활약한 정예 부대인 제1, 13, 15 보병사단을 투입했습니다.
 
이로써 발발한 다부동 전투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보다 융통성있는 방어작전을 위해 전선을 축소 조정한 후 제1 보병사단이 경상북도 칠곡군의 다부동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8월 13~29일까지 무려 16일간이나 지속됐습니다.
  백선엽 준장의 제1 보병사단은 다부동 전면의 험준한 유학산 839 고지, 좌측의 숫데미산 518고지와 328고지, 그리고 우측의 신주막~대구 간 도로의 방어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사단 좌측 지경선 너머인 왜관 너머에는 미 제1 기병사단이 낙동강 중류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군위와 신녕을 방어하는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가 연접하고 있었지만 이 사단들은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에 쉽사리 지원부대를 보내주기가 어려웠습니다.
  문자 그대로 제1 보병사단은 나홀로 북한의 정예 3개 보병사단을 상대해야 했죠.
  만약 다부동을 사수하는데 실패해 대구가 함락당한다면 한국군은 전원 부산 앞바다에 빠져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용호동 해군 작전사령부 인근의 해안 절벽지대.
  한편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단숨에 붕괴시키고 대구를 장악하고자 했던 북한군은 제15 보병사단이 최영희 대령의 제15 보병연대가 사수하고 있던 숫데미산과 328고지를, 북한군 제1 보병사단은 박기병 대령의 제12 보병연대가 사수하고 있던 중앙의 유학산 정상 부근의 높은 절벽과 같은 고지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동쪽의 계곡 접근로에서는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이 김동빈 대령의 제11 보병연대 방어선을 붕괴시킨 후 신주막~다부동~대구 간 도로를 이용해 남하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 제8군은 즉각 제11 보병연대 방어선 후방에 미 제2 보병사단 23 보병연대, M26 "퍼싱" 중전차를 장비한 제73 전차대대 C중대와 포병 2개 대대를 증원부대로 배치했습니다.
  한반도로 투입된 F-86 "세이버" 전투기. 다부동 전투 시기에는 참전하지 못했지만 전쟁 기간 중 미 공군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제공권을 확고하게 장악함으로써 북한군의 주간 이동과 공격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습니다.
  북한군은 7월 한달간 미 공군의 맹렬한 폭격에 의해 후방보급선을 차단당함으로써 보급이 급격하게 악화돼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병사들은 하루 1, 2끼 정도만 섭취할 수 있었고 일부 전차·자주포·야포 수송차량 등은 포탄과 경유, 휘발유 공급이 끊겨 가동 불능상태에 처했지만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충천했습니다.
  골수 공산주의자들인 북한군 장교와 고참병들의 전의는 왕성했고 이에 따라 다부동 전투는 소강상태 없이 연일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반복되는 양상으로 전개됐습니다. 
  "어서 오너라! 괴뢰군!!" 대구 북방에서 90mm 대공포를 이용, 치열한 지원 포격을 감행하고 있는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장병들. 다부동 전투는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절대적인 현 위치 사수전이었습니다.
  이러한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제1 보병사단의 대응은 놀랍게도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반격작전을 감행, 함락당한 방어진지와 거점을 반드시 탈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8월 15일, 북한군 제15 보병사단에게 함락된
숫데미산 탈환을 위해 제12 보병연대 2대대는 무려 349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15 보병연대 역시 뒤지지 않겠다는듯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8월 15~16일에 일선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모든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동원했고, 이로 인해 부족한 T/O는 갓 자대 배치된 신병들에게 할당했습니다.
  이처럼 전멸을 두려워하지 않은 작전 전개로 인해 제15 보병연대
 1대대는 단 하루 만에 중대 병력 130명이 60~70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중 전투경험이 있는 선임병이 겨우 15~16명일 정도로 참담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초기 개전 부분에서 말도 안되는 고증 오류로 인해 비난을 받았던 MBC 미니시리즈 로드 넘버 원에서도 다부동 전투는 치열하고도 처절하게 묘사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혹심한 인명피해로 인해 사단 사령부는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만 수백 명의 신병을 보충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격렬한 전투 중 많은 지휘관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 후송당하는 통에 중대에서는 소대장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이렇듯 다부동 전투는 제1 보병사단은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사병이나 투혼을 발휘한 방어전이었습니다.
  특히 방어선에 갓 배치된 많은 신병들이 북한군의 함성소리와 쉴 새없이 날아드는 박격포탄의 작렬로 동요하고 흔들리자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접 착검한 M1 개런드 소총을 움켜쥔 채 돌격의 선두에 나섬으로써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에 따라 사단은 부대 건재와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한국군 제1 보병사단의 결사적인 방어전으로 잇따른 공세의 감행에도 불구하고 진격이 다부동 서측방과 중앙에서 돈좌되자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장 최용진 소장은  마침내 8월 21~23일 밤에 걸쳐 T-34/85 9대를 집중시켜 신주막~다부동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통해 야간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마지막 희망을 T-34/85에게 걸었지만 의정부와 오산, 대전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번 6·25 전쟁의 수호신, M26 "퍼싱" 중전차를 열람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훗날 "볼링 앨리" 전차전이라 불린 이 격전에서 미군은 M26 "퍼싱" 중전차를 동원해 치열한 야간 전차전 끝에 돌격해 들어왔던 T-34/85와 Su-76 대전차 자주포 대부분을 격파하는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북한군의 마지막 공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미군 전차대에 의해 마무리지어졌습니다.
  결국 다부동 전투 종전까지 북한군 제13 보병사단은 T-34/85 14대와 Su-76 대전차 자주포 5대를 손실해 사실상 기갑전력을 완전 손실하며 전투력을 상실했고 이로써 제1 보병사단은  혹독한 희생을 치른 끝에 적 3개 보병사단의 맹공을 격퇴시키며 다부동과 대구를 지켜냈습니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군의 T-54 전차. 만약 제1 보병사단이 다부동을 사수해내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런 사진을 바라보며 공산치하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부동 전투를 통해 전투는 의지와 인내력의 싸움이며 하도 전사자가 속출하다 보니 주변이 온통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차고 여름의 찌는 듯한 폭염 아래에서 죽음과 부상의 공포를 이겨내며 3배에 달하는 적을 맞아 승리할 때까지 버티며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고군분투한 제1 보병사단 장병들의 투혼에 존경심을 표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단장 백선엽 준장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문자 그대로 계급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감투정신은 북한군의 정예 3개 보병사단의 맹공을 막아낸 제1 보병사단의 승리라 더 후대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orbitz travel deals 2012.05.26 10: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이 각각의 사회의 거의 모든 핵심 영역에 대한 이해를 전파하기위한 혁명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위치의 추가 수량에 같은 수행하도록 제안합니다.

  3. uggs outlet 2012.12.20 17: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감동! 모든 아주,opl34ke 아주 분명하다, 개방 문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 red wing boots 2012.12.20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내가 이곳을 방문 처음이다.opl34ke 난 당신의 블로그에 특히 토론에 많은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기사에 대한 댓글의 t에서, 내가 여기있는 모든 여가를 갖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 그런 것 같아요!좋은 일을 계속.

  5. ugg boots on sale 2012.12.20 17: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모두가 나에게 매우 opl34ke 새로운이 문서는 정말 내 눈을 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당신의 지혜를 공유 ​​주셔서 감사합니다.

  6. ugg boots cheap 2012.12.20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YES! 드디어이 웹 opl34ke 페이지를 발견! 너무 오랫동안이 글 찾고 있었어요!

  7. cheap uggs for women 2012.12.20 17: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opl34ke 일반적으로 나는 전체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이 정보를 작성하는 방법은 간단 놀라운이며,이 독서에 관심을 보관하고 그것을 즐겼다.

  8. rattan indonesia 2012.12.30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중요한 전망과 더​​ 많은 블로그와 포

  9. jus mengkudu 2013.02.23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반적으로 나는 전체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

  10. Trend Software 2013.04.06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분들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와 고지 쟁탈전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의외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한국군과 북한군 양측이 사활을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 인천상륙작전 )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11. exercise bike reviews  2013.04.06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건 대규모 격전을 벌이던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 점령을 끝내고 통일을 경축하고자 했고, UN군과 한국군은 차후의 반격( 인천상륙작전 )을 위해 반드시 이 방어선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죠.

  12. ChatRandom 2013.05.02 0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많은 분들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춘계 대공세와 고지 쟁탈전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의외로 낙동강 방어 전선이 유지되던 1950년 8월초부터 9월 중순까지가 꼽히고 있습니다.

  13. Share It 2013.05.27 0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국이라는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마저 없던 셈이었습니다.

  14. xn--smsln500-d0a.net 2013.08.03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15. xn--smsln500-d0a.net 2013.08.03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기간을 떠올리시겠지만 전혀

  16. cool hairstyles for teenage guys0 2013.08.03 2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

  17. real estate buying tips 2013.09.15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내부

  18. sky vue 2013.09.16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임 내부습니다 이외에 한랭

  19. how to cure herpes 2013.09.22 20: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섭취할 수 있었고 일부 전차·자주포·야포 수송섭취할 수 있었고 일부 전차·자주포·야포 수송섭취할 수 있었고 일부 전차·자주포·야포 수송

  20. abouttorontomortgages.com 2013.09.30 19: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이라는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마저 없던 셈이었습니다.

  21. The Panorama 2013.10.02 16: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때문에 전선의 장병들은 더 이상

참담하고도 무모했던 반격작전[2]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7.21 08:32
  예나 지금이나 반격에는 항상 충분한 기동 예비전력이 필수입니다.
  고대 전사에서도 기병이 예비대이자 반격의 중추로 활약했고 대포가 발명된 이후에는 공격과 방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죠( 모든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반격작전을 지시하는 육군 총참모장에게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형근 준장에 대해 일부 분들은 "어찌 상관에게 항명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드실 겁니다.
  하지만 이형근 제2보병사단장의 반박이 무조건적으로 억지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습니다.
  당시 전황은 그만큼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죠.
  전선에서는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T-34/85와 Su-76으로 인해 사실상 공황상태 그 자체였고 한국군이 보유한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로는 일격에 전차를 격파하기가 어려운 상태!
  이 때문에 이형근 준장은 어차피 북한 전차를 상대할 제대로 된 무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천연 장애물인 한강선에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는 상식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건의를 했습니다.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대전차 화기로는 북한군의 T-34/85를 원거리에서 일격에 격파하기가 어려운 상태였고 이 때문에 한국군의 공황상태는 치명적인 패착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형근 준장의 건의를 일언지하에 일축하면서 "북괴군 놈들의 전차와 포병에 위축되지 마라! 강인한 정신력으로 반격을 감행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고함을 질러대는 한심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걸작인 것이 바로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적 전차에 육탄 공격을 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이 부분을 보자면 마치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군을 방불케하기 충분한 대목이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차에 대한 육탄공격은 보병으로서는 대단히 큰 모험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은 전반적인 전황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전황이 파국으로 몰리는 위기 상황 하에서 정작 단합되어 어떻게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할 작전을 수립해야할 육군 수뇌부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6월 25일은 그야말로 전방과 후방에서 치열한 격전이 전개된 하루였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이 지속적으로 현실성이 결여된 명령만을 하달하자 마침내 제2 보병사단장 이형근 준장도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채병덕 총참모장이 이형근 준장의 반박에 분을 못참고 채찍을 휘둘렀다는 험악한 풍문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하니 제7 보병사단 사령부는 가장 길었던 하루( The Longest Day )를 보낸 셈이었습니다.
   채병덕 총참모장과 달리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한 제2 보병사단장 이형근 준장. 하지만 채병덕 총참모장은 오로지 현 위치 고수와 반격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지휘 계통마저 무시한 채 직권으로 예하부대를 출동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자신이 명령에 제2 보병사단장이 끝까지 반박하자 마침내 채병덕 총참모장은 자신의 직권으로 제2 보병사단 5 보병연대 2대대장 차갑준 소령에게 직접 구두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조국의 운명은 바로 이 곳 의정부에 달려 있다. 현재 포천 방면에서 넘어오는 고개( 축석령 ) 앞에는 적 전차 30대가 포진하고 있으니 즉시 특공대를 편성해 격퇴시켜라. 이 작전에서 귀관이 성공한다면 진급 규정에 관계없이 중령으로 특진시키겠다.”
 
군인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것이 바로 진급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내려진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은 꽤 메리트가 큰 것이었고 따라서 차갑준 소령은 부대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차갑준 소령의 2대대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탄약이 부족했던 것이죠!
  아! 6·25 방문자 여러분들 중 혹시 1997년에 개봉한 파울 베르회펜( Paul Verho"ven ) 감독의 "스타쉽 트루퍼스"를 감상하신 분들은 아마 이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군도 마찬가지지만 보병에게 지급되는 탄약의 양은 지독하게 적고 자동소총이 보편화된 현재 140발로는 택도 없는 지경입니다.
  아라크니드족의 대군을 맞아 요새를 지켜내야 하는 러프넥 중대원들의 사투 중 탄약이 바닥나 옆 동료의 탄창을 얻어쓰는 부분이죠.
  오늘날 한국군의 소총수는 개인당 140발의 5.56mm×45탄을 지급받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전시에 이 정도 양으로는 반나절도 채 못 버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히 K-2 소총의 경우 3점사나 연발로 사격할 때 30발 탄창 비우는데 20초도 채 안 걸린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수치는 실제 제가 군복무 시 K-2 소총을 이용, 공포탄 20발 탄창 3개를 연발로 난사하여 측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쏘고 난 다음 3일 동안 방아쇠만 제외한 총의 전 부위를 완전 분해해 손질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 당시 한국군에게 지급된 미국제 M1 개런드 소총이 아무리 묵직하고 반동이 강한 7.62mm×63탄을 사용하더라도 최소 1인당 8발 클립 11개, 총 88발이라는 만만치 않은 양이 지급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카빈 소총은 15발 탄창 11개, 톰슨 기관단총은 30발 탄창 7개가 지급되었습니다 )
  문제는 당시 2대대 병사들에게 지급된 M1 소총탄은 1인당 평균 2~5개 클립, 총 16~40발이 고작이었다는 것으로 이는 전시 지급량의 절반도 못 채운 셈입니다.
  카빈의 경우는 더 심각해 평균 15발, 즉 1인당 1탄창이 고작이었고 브라우닝 자동소총의 경우 20발 탄창 4개 - 총 80발이 전부였습니다.


  차갑준 소령이나 예하의 중대장들이 봐도 이런 상태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상황이었고 회의 끝에 축석령에서 탄약을 재보급받기로 결정, 6월 26일 오전 3시를 기해 부대를 출동시킵니다.

  의정부의 운명이 걸린 축석령으로 향하는 2대대! 하지만 이들에게는 크나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우익열사 2010.09.03 0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형근 장군... 대한민국 군대 군번 1번 아닌가요?

  2. 박소영 2010.10.02 1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스타쉽 트루퍼스의 요새 전투 장면은 지금봐도 긴장감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3. FPS를 할때 2011.06.06 0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콜오브듀티 5 월드앳 워에서 개런드 M1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128발이 주어지는데 여기서도 죽은 동료의 총알을 노획하지 않으면 사실상 한 게임 반도 못가서 총알이 바닥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게임 안에서도 이럴진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을지는 안봐도 뻔한 수준이군요.

  4. absolutely free counceling obtain 2012.05.26 14: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일반적으로 우리를 도울 수있는 인터넷에 기사 구입했습니다. 상당한는 간편한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5. 247insurancequotes web page 2012.05.26 14: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환상적인 정보는이 문서에 도착 했어. 나는 또한 일주에 앞서이 주제에 대해서 통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 지금의 학교에서 내 자신의 보고서에 대해 이야기하며 좋은 내가 블로그 내에서 그들을 만났습 생각하자. 나는이 거기에있어 많은 즐거움을 함께 넣어했다.

  6. across the country lifestyle insurance 2012.05.26 14: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마음을 정말 맛있는데 그 뒤에 믿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존재한다는 정도가 있습니다. 너무나로부터 받았습니다.

  7. alcohol addiction recovery 2012.05.26 14: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훌륭한 웹사이트를 발견하고 나는 훌륭한 사이트보다 보았다. 블로그 이전 클래스의 여러 가지와 certainloy 순위에 오히려 도움이됩니다. 진정으로 사람의 제물은 헌신적인 시청자들을 고용 정보에서 기쁨을 얻을!

  8. auto insurance quotations 2012.05.26 14: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기쁘게 생각합니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정보와 매우 지능적인 보관됩니다. 당신이 실제로 작성한 게 개인이 완전히 모두에게 환자가 흥미하게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잠재력의 사용을위한 다음 사항을 저장하고.

  9. enterprise internet site assist 2012.05.28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당신은 흥미로운 정보 하겠어요 확실히이 웹사이트에있는 화면입니다이 사이트에있는 멋진 서비스 사용에 대한 매우 분명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이러한 종류의 블로그와 블로그의 다양한 기사에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10. indonesia rattan furniture 2012.12.30 2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많은 역경에 부담 위협하는 것은 아

[ 포토 에세이 ]《 대전 지구 전투 기념비 》( 2 )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6.20 11:04
  당시 북한군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소련군의 사진 자료로 대전 전투 당시 제3, 4 보병사단은 이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미 제34 보병연대는 논산 가도 방면의 방어를 위해 L중대를 배치했지만 서구 가수원동 일대에는 겨우 1개 소대만 배치하는 실책을 범했습니다.
  결국 L중대의 1개 소대는 논산 가도를 따라 공격해 들어온 북한군 제4 보병사단 16 보병연대에게 가수원동을 내주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곳 가수원동-관저동-성북동 축선은 오늘날 계룡대 및 계룡시-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당시 대전 전투에서 혹독한 희생을 치른 미 제24 보병사단 19 보병연대 장병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아파치 공격헬리콥터라도 1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수 있지만 아직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큰 차이가 없던 미군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취재 협조 : 미 육군 제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로드리게스 실 사격장, 필자 제공 )
  제24 보병사단 장병들은 연이은 북한군의 공세로 점차 수세에 몰렸고 결국 보문산 일대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시가지에는 T-34/85를 앞세운 북한군 제3, 4 보병사단이 들이닥치는 통에 공황상태가 벌어졌고  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막 공수된 3.5인치 바주카포를 이용해 전차 사냥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7월 20일, 대전은 북한군에게 함락되어 미 제24 보병사단은 세천 터널 일대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사전에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 제4 보병사단 18 보병연대의 매복에 걸려 참담한 손실을 입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사단장 딘 소장이 행방불명됩니다.
  당시 전투로 폐허가 된 대전 우체국의 모습입니다.
  대전 전투는 미군에게 있어 너무나도 뼈아픈 패배였고 이 때의 전훈으로 오늘날 주한 미 제2 보병사단이 기갑부대의 기동에 유리한 서부전선에 배치돼 사전에 북한군 기갑부대의 돌파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또한 대전 전투로 인해 부산에 상륙한 미 제1 기병사단은 신속하게 낙동강 방어선 일대로 전개하여 북한군의 남하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해주었죠 
  대전 전투 이후 미군은 지연전을 벌일 것 없이 한반도에 신속하게 전개할 수 있도록 주요 장비와 물자들을 후방에 비축함은 물론 유사시 이들을 신속하게 차량과 철도를 이용해 전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취재 협조 : 캠프 캐롤, 필자 제공 )
  또한 한국과 미군의 연합훈련도 강화했는데 그 일환이 바로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입니다. 사진은 지난 2009년 3월, 부산의 해군 작전사령부에 입항하는 CVN-74 "존.C.스테니스"호와 지휘함인 블루 릿지의 모습입니다( 취재 협조 : 해군 작전사령부, 필자 제공 )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을 통해 굳건한 방어태세를 확립한 한·미 연합군은 유사시 북한의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함은 물론 반격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숭고한 희생을 통해 시간을 벌어준 미 제24 보병사단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한국군은 휴전 이후 최후의 혈전이 벌어졌던 보문산에 2개의 전적비를 건립했습니다.
  이 전적비는 1959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자유는 피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 생활의 고귀한 상징이오, 평화는 자유를 살릴 수 있는 인류 공동의 신성한 이상이다. 이 자유와 평화를 획득, 수호하기 위하여 여기 국제연합의 거룩한 역사, 한 페이지가 이루어졌다. 단기 4283년 6월 25일 새벽 불법침략을 개시한 공산군은 일거에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침하였다. 세계 자유국가들은 총 궐기하여 이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 제24 보병사단은 국제연합군의 최선봉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적과 처음으로 대전하였으나 과불적중으로 인하여 7월 17일 적은 대전을 포위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24 보병사단은 20일 동안 결사적인 방어전을 감행하는 등 진두지휘에 나선 딘 소장이 불행히 실종되었었다. 이 처절무비한 악전고투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미 제24 보병사단의 영웅적인 혈투사를 영원히 빛내고 기리고자 이 작은 비를 세우노라. 단기 4292년 3월 31일, 육군 제1202 건설 공병단 세움"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전 지구 전적비는 바로 약간 더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보문산 야외 음악당 전면에 있습니다.
  당시 손수 3.5인치 바주카포를 짊어지고 T-34/85를 격파한 윌리엄.F.딘 소장을 중심으로 한 대전 지구 전적비의 위용은 참으로 듬직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전적비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인 1981년 12월에 건립되었습니다.
  대전 전투를 통해 우리는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혹시 보문산에 놀러가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한번씩 방문해보시기를 권합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송윤호 2010.06.20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순간 가수원 사진이 나와서 놀랐습니다
    그것도 제가 사는 아파트가 나오다니 ㄷㄷ

    예전에 증조할머니께서 가수원은 당시에 굉장히 미군들에게 중요했다고 하는 말을 오늘에서야 이해했습니다...

    • Koreanwar60 2010.06.21 0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송윤호님// 그러셨군요.

      직접 거주하시는 자택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당시 제34 보병연대가 가수원동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겠지만 워낙 병력이 부족한데다 북한군의 포위, 우회, 침투 전술이 너무나도 주효했던 탓이 컸습니다.

  2. 김윤곤 2010.06.21 1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제 친구가 은아아파트 거주하는데... 가수원...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

  3. 박애경 2010.06.21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사진이 멋있는것같다 탱크도 멋있다 우리 나라가 많이 변한걸 알게되어서
    공부가되었다

  4. 박소영 2010.10.02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강 방어전 못잖게 대전에서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었군요

    숭고한 미군의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5. save money on electric bill nj 2012.05.29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감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믿을만한 정보 원으로 매우 지적인 것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사람들이 오늘 완전히 당신을 위해 도전하고 환자 파악 수있는 요소를 구성. 난 그냥 장기 고용이 특정을 유지 해요.

  6. progressive house blog 2012.05.29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더풀 정보와 사실 당신은 여전히​​이 문서에 있습니다. 지금의 좋은 나는 블로그 내에 이것을 밝혀낸 것 이외에 대학의 문서에 대해 이야기하자이 문제를 첫 주에 관련된 읽어 오게했습니다. 이걸 스캔 멋진 시간을 함께 넣어했다.

  7. progressive commercial brad 2012.05.29 15: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것은 본질적으로 확실하게 해결하고 일정 기간에 읽어 물건을 고치는 가장 믿을 웹사이트입니다. 당신이 꽤 많이 제목에 쓴 것처럼 우리 내부의 정보와 사실의 수준은 놀라운 발견했다. 귀하의 웹 사이트는 정말이 문제에게 훨씬 더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최적입니다. 좋은 소재, 작문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