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1/2)

생생! 6·25/6·25전쟁 10대전투 2011.06.30 14:48

 불과 보름 전까지 한반도의 최남단인 낙동강을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면서 38선 인근까지 다가간 아군은 이곳을 넘어 북으로 내달리기 위해 조바심을 낼 정도로 상황은 반전되었고, 마침내 10월 1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38선을 넘은 것을 신호탄으로 역사적인 북진이 개시되었습니다.

<감격스러운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국군 3사단>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를 위협하던 북한군 주력의 대부분은 배후가 차단당한 체 붕괴되어 아군을 막을 적대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며, 행군속도가 바로 북진속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빠르게 북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군이 한만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8선에서 한만국경까지 가는 중간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놓여 있습니다.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로 진격하고 있는 미 8군에게 이곳을 탈환하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적국의 수도 점령은 단지 하나의 도시를 점령하는 행위일 뿐이며 승전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지만 정치적인 상징성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북한도 개전 초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서 이러한 선전효과를 톡톡히 누렸습니다.

<평양 비행장으로 맥아더를 영접 나온 워커>


 따라서 미 8군을 이끌던 워커(Walton Walker)는 물론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도 패주중인 북한의 전쟁 의지를 꺾고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최대한 빨리 평양을 탈환하도록 예하부대를 재촉하였습니다. 당시 미 8군은 미 1군단, 미 9군단, 국군 2군단으로 구성 되었는데 미 1군단과 국군 2군단이 각각 전선 좌우를 담당하며 북진하였고 미 9군단은 아직 38선 이남에 머물며 후방작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아군의 진격여건상 평양 탈환은 미 1군단 관할이었는데 당시 군단은 미 1기병사단, 미 24사단, 국군 1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선봉은 기동력이 가장 좋은 미 1기병사단이 담당하여 10월 4일, 38선을 돌파한 후 경의가도 본선이라 할 수 있는 개성-금천-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다가갈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미 1기병사단을 후속하여 우측에서 조공의 역할을 담당하며 북진에 참가한 부대가 국군 1사단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평탄한 경의가도를 이용하여 평양으로 진격하던 미 1기병사단>


 국군 1사단은 공격 우선순위에 밀려 10월 11일에서야 38선을 넘었고 대부분 행군에 의존했을 만큼 기동력도 부족한 상태로, 험악한 신계-수안-율리를 거쳐 평양으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적의 심장부를 우리가 먼저 점령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있어 그 속도는 가공할 수준이었습니다. 미군이 금천에서 고전하는 틈을 타 국군 1사단은 앞으로 내달렸고 이후 평양 선점을 향한 한미양국군의 경쟁은 치열하였습니다.

 10월 19일 거의 동시에 미 1기병사단과 국군 1사단은 대동강에 다다랐는데, 국군 1사단 예하 12연대가 미군보다 조금 빨리 선교리를 점령함으로써 제일 먼저 東평양을 점령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도주를 완료한 북한은 대동강 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였고, 평양(本평양 또는 西평양)에 입성하려면 강을 도하하여야 했습니다. 장비가 좋았던 미군은 지체 없이 부교를 가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 진입을 준비 중인 국군 1사단>

 자칫 눈앞에 두고도 평양 선점을 미군에게 빼앗길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바로 그때 국군 1사단은 그대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 인근 출신인 사단장 백선엽에게 대동강은 어릴 때부터 물놀이를 하던 곳이어서 얕은 곳을 잘 알고 있었고, 그곳을 도섭지점으로 삼아 급속도하를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하 15연대가 미군보다 하루 빨리 평양 도심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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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아군이 한만국경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20. The Hillford 2013.10.28 1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출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나고 북진의 최종 목표인 통일은 달성될 것으로 모두가 믿고 있었습니다.

  21. leasing or buying 2013.11.18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방패삼아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는 어느덧 사라져 버렸습니다.

또 하나의 인도주의 작전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10.14 08:03

  해상철수는 육지의 퇴로가 적에게 차단되었을 경우 사용하는 흔한 전술이지만 제해권이라는 한 가지 전제가 반드시 따라다닙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제해권의 확보 없이 바다를 이용한 철수는 불가능하고 더불어 제공권까지 장악하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때문에 UN군의 참전과 더불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즉시 확보한 아군은 6·25전쟁 중에 해상철수를 적절히 사용하였습니다.


[전쟁 중 바다와 하늘은 공산군 측에서 넘볼 수 없는 벽이었습니다. ]


  전사에 나타난 최초의 해상철수는 개전 초에 고립된 옹진반도에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제17연대의 철수작전이고 이후 1950년 8월 17일 낙동강방어선의 장사동에서 후방이 고립된 제3사단이 성공적으로 해상 철수한 작전도 중요한 성공사례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6·25전쟁 중에 있었던 해상철수작전이라면 단연코 흥남철수작전을 들 수 있습니다.


[철수를 위해 LST에 전차를 탑재시키는 모습]


  함경도일대로 깊숙이 진군하다가 중공군의 기습참전으로 배후인 원산이 조기에 점령되면서 고립된 10만 5천의 미 제10군단(국군 제1군단 포함)은 1950년 12월 12일~24일 사이에 압도적인 제공권과 제해권을 발판으로 흥남항 일대에 거대한 탄막을 형성시켜 중공군의 남진을 막는 사이에 동해바다를 거쳐 안전하게 후방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흥남철수의 대미를 장식한 부두폭파 모습과 마지막 철수선 USS Begor]


  심각한 타격을 입은 미 해병 제1사단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미 제10군단의 대부분 병력들과 더불어 2만여 대의 각종차량과 장비 그리고 3만 5천여 톤의 각종 군수물자까지 이동 전개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렇게 보존된 자원은 이후 재 반격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흥남철수작전의 진정한 백미는 공산치하에 남겨질 뻔한 10만여 북한 주민들과 함께 철수한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10만의 민간인이 함께 철수하였습니다.]


  빈곳이라면 어디건 상관없이 배가 침몰하지 않을 수준까지 피난민을 태우고 철수하라고 명령이 하달되면서 전쟁사에 보기 힘든 장엄한 인도주의 작전이 흥남부두에서 벌어졌습니다.  영하 20도를 밑도는 맹추위에도 불구하고 피난민들이 철수부대와 함께 자유를 향한 탈출에 올랐고 이것은 이후 한민족 역사상 최단 시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긴 문화인류학적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철수선의 갑판을 빼곡하게 메운 피난민들의 모습]


  그런데 흥남철수가 워낙 거대했고 극적이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보다 조금 앞서 서해바다에서도 감동적인 해상철수작전이 벌어졌는데, 바로 진남포철수작전이었습니다.  사실 중공군의 주력이 진입한 곳은 평안도방향이었고 따라서 이곳을 담당하던 미 제8군이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보다 더 많은 압박을 받아 일부 부대들이 붕괴되는 등 상당히 고전하던 중이었습니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보다 서부의 미 제8군이 받은 압박이 더 컸습니다]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 된지 불과 40일 만인 1950년 12월 4일,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어렵게 차지한 평양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38선을 향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병력은 경의가도를 통해 빠져 나왔지만 1,700명의 병력들은 퇴각로를 최후까지 지켜야 했습니다.  이들은 진남포를 통한 해상 철수가 결정되었고 중공군이 평양으로 진입하기 직전인 12월 5일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얼어붙은 진남포항을 빠져 나오는 철수선]


  마지막 잔여 병력들이 켈리(Samuel G. Kelly) 대령이 지휘하는 수송전대에 탑재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다도 얼어붙은 혹한의 진남포항에는 학정을 피해 피난가려는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12시30분, 선단의 마지막 함정인 호위구축함 포스(USS Foss-DE 59)가 진남포항을 떠날 때는 8,000여명의 피난민들이 선단의 빈자리를 촘촘히 메웠고 철수선에 탑승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100여척의 민간 선박을 타고 함께 남으로 향하였습니다.


[USS Foss의 출항 후 파괴되는 진남포항]


  진남포철수는 열흘 뒤에 개시된 흥남철수에 비해 시기도 겹치고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여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처럼 내용상으로는 흥남철수에 못지않은 인도주의적 철수작전이었습니다.  규모가 작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의미가 결코 퇴색될 수 없는 이유는 단 한사람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침략자에 맞서 싸웠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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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issertation writing 2013.01.15 0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드와 광산의 차이를 발견 할 날 30 분 걸 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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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seo Fort Worth 2013.04.23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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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fly agaric 2013.04.25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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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문에 UN군의 참전과 더불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즉시 확보한 아군은 6·25전쟁 중에 해상철수를 적절히 사용하였습니다.

  13. forex scalping system 2013.05.13 21: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발판으로 흥남항 일대에 거대한 탄막을 형성시켜 중공군의 남진을 막는 사이에 동해바다를 거쳐 안전하게 후방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14. lightbulb vaporizer 2013.05.22 16: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5사단은 서쪽에서 청송-기계 축선으로 남진하던 제12사단과 보조를 맞춰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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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읽고,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단단히 걸어 잠궜던 빗장을 풀고 의심 많은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면 모두가 친구이고 가족일텐데,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요? 예전에 비해 살기는 좋아졌다고 하는데, 진정 좋아진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요. 따뜻한 정 많이들 나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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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도를 통해 빠져 나왔지만 1,700명의 병력들은 퇴각로를 최후까지 지켜야 했습니다. 이들은 진남포를 통한 해상 철수가 결정되었고 중공군이 평양으로 진입하기 직전인 12월 5일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17. rent photobooth nj 2013.06.22 23: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악하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때문에 UN군의 참전과 더불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즉시 확보한 아군

  18. painters new jersey 2013.07.08 1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술이지만 제해권이라는 한 가지 전제가 반드시 따라다닙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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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10 key test 2013.11.06 19: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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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감탄한 터키 포로들의 정신력.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9.14 08:04

       

지난 4월, 6·25특집 TV 프로에서 터키 참전 용사인 슐레이만
비르빌레이라는 분이 60년 만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자신이
한국 근무시 딸처럼 살피던
한국인 여자 고아를 찾는 사연이
보도되었었다.


술레이만 씨와 어린 아일라 [지금의 김은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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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혈전장 평북 군우리 근처에서 부모를 잃고 떠도는
이 어린아이를 구한 25 세의 술레이만은 아이에게 아일라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한국 파병 기간동안 친 딸처럼 길렀다.


1952년 한국 파견 기한이 다 된 술레이만은 아일라를 터키로
데려 가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모색해 봐도 잘 되지가 않자
할 수없이 아일라를
터키군이 수원에 세운 고아원
‘앙카라 학원’에 맡기고 떠났었다.


술레이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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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화 속에 엮어진 휴머니즘의 이야기는 술레이만이
어쩔 수없이
귀국하여야하는 시점에서 영원히 헤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부녀 이상의 정이 든 두 사람은 그 긴 세월을 서로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를 앙카라로 방문했던 방송국의 협력으로 아일라라고 불리던

한국 고아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이미 손자들을 둔 아일라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된 아일라 김 은자 씨가 북받치는 울음 속에
슐레이만 씨와 부등켜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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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술레이만 부부는 방송국의 주선으로

여의도 앙카라 공원에서
60년 만에 옛 아일라였던 김 은자씨와
눈물의 재회를 했다.

그 장면은 나에게 가슴이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 상봉을 계기로 참전 터키군의 활동을 테마로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기회가 잘 되지 않았다.
오늘 그 기회를 가져본다.


터키 군은 6·25전쟁에 5,000명 규모의 여단을 파병해서
한국 방어의 일선에서 싸웠다.


터키군들은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전사를 뒤져 보면 6·25전쟁 참전 터키군은 특히 백병전에
강한 것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한국 참전 터키 여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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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어키 군은 돌격 선에서 총검을 번득이며 적진으로 돌격해서

온전한 생존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한 명 없이 섬멸해버리는
가공할 육박전 능력을 발휘했었다.


그러나 터키 군이 세계에 그 용맹함과 함께 이름을
드높게 날린 것은
포로 생활이라는 극한 상활에서
발휘한 강철 같은
군기와 강인한 정신력이었다.


한국 파병 터키 군은 1950년 10월 유엔군이 한창
북상할 때
한국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1950년 10월 부산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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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북쪽으로 이동해서 미군 25사 예하 부대로서

전선에
배치되었던 터어키 군은 11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연달아 격렬한 전투를 했다.


터어키 군 -참전국중 제일 많은 병사들이 콧수염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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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한국 전투에서 터키 군은  와원, 신림리,
군우리 협곡,
그리고 선천등에서 연달아 벌어진 네 번의 전투에서 
잘 싸웠지만
21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포로가 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매복을 당한 군우리에서의 피해가 제일 컸다,
 보유장비의 70%를 손실했다.]


터어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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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말 초전 기습에 재미를 보아 다수의 포로를 획득했던
중공군의 이들 유엔군 포로 취급은 교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군사 심리전에서 연구되고 있는 차원 높은 특유의
세뇌 기술이
적용되었다.
대륙에서 일본군과 장 개석군들 포로를 취급하면서
축적한 중공군의 노우 하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미군 포로들과 터어키 영국군등의 포로들은 1950년울
지나 1951년도 중반까지도 그들의 수용소가 있었던
‘지옥의 골짜기’에서 엄청난 고초를 치렀다.

포로들은 추위로 지옥 같은 고통을 받았고 환자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나갔다.
식량이라고는 귀리나 옥수수 따위 곡물을
자루 채 던져주고 먹으라고 했으나 양이 형편없이 부족했다
굶고 병든 포로들을 중공군들이 중국에서가져 온 장 티프스가
파도처럼 덮쳐서 한 수용소의 미군 포로들이 절반이나
사망하기도 했다.

포로들에게 부식 조달이 좋아진 것은 1951년 여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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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이 고착된 1951년 여름부터 보급도 좋아지고
병원 서비스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물질적인 상황을 개선하고 나서부터 중공군은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지나친 강제 노동도 없었고 심지어
중공군이
운영했었던 압록강가 벽동 포로 수용소는
보초병은커녕 울타리도 없었다.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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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인도적인 처우 뒤에는 중공군이 노리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포로들은 하루 여섯 시간 씩 영어를 잘하는 강사로부터
정치 강의를 들으며
미국 사회 구조의 차별성과 자본주의
비인간성을 강의 받으며 모국을 미워하는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반면 세계 최대 빈국이었던 중국은 인간미 넘치는 이상사회라는
거짓된 이미지가 세뇌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공산주의 선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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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서 중공군은 미군 포로 사회에 끊임없는 동요를 일으켰다.

중공군의 교묘한 갈등을 부채질 하는 음모는 포로와 포로들
사이에서도 공작
되었다.
포로들의 조직 통제 기능을 무력화 시키는 조처로서 장교들의
특권을 모두 무시하는 관리 지침이 하달되었다.

“여기는 계급이 없는 사회다. 너희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
이 조처에 철없는 미군 사병들은 당장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

그들은 그 때까지 상관으로 모셨던 장교들의 등을 툭 치며
야유를 보냈다.
“어이-! 잭!”
선임하사님이나 소대장님 그리고 중대장님의 호칭은
땅 속으로
버려져야 했다.
간부들에게는 은연중 굴욕적인 천하고 더러운 일을 시켜
사병들에게 경멸 당하게 만들었다.
포로들 자치 회장 격에는 자기 계급을 상사라고 거짓말한
질 안 좋은 일등병이 명색 '선거’로 임명되었다.
계급의 무시는 조직의 통제 내지 관리를 마비시켰다.
사회적 규범이나 개인적 염치를 챙기기 힘든 극한적인
포로생활에서
각 인간들은 묶는 끈이 다 끊어지다 보니
미군 포로들 집단들은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
서로 의심하고 반목하며 갈등하는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를 바라보며 내심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 최강국의 포로들이 자기들이 손을 좀 쓰니 콩가루가 되었고
콩가루들은 자기들의 밥이었다.

중공군의 단수 높은 포로 관리에 미군들은 중공군의 의도대로
심리적으로 각개 격파가 되었다.
물론 풀려날 때까지 꿋꿋이 버틴 미군들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포로들과는 갈등하면서도 중공군들에게는
협조하는
병사들은 훨씬 더 많았다.
몇몇 미국인들은 자신의 동포에 대하여 법죄적인 행위를,
그리고
매우 소수는 반역죄를 저질렀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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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포로 관리의 노회함은 결국 전쟁이 끝나고 21명의
세뇌된
미군들이 조국인 미국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당시 세계 최저
빈국(貧國)의 하나인 중국행을 택하게 만들었다.

미군으로 보면 반역자가 양산된 것이다.
전쟁 후 미국 관련 당국에서 중공군에게 휘둘려 포로들이
콩가루 집안이 되어 질시하고 반목하였던 이 포로들의
행태가 논란이 되었었다.

더구나 포로 신세가 되고 보급이 형편없는 식사와
전염병으로 다수의
미군들이 힘없이 사망했던 사건도
문제로 다루어 졌다.

최악의 상황에서 군인이 발휘해야 하는 강인성이
결핍된 사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옥수수나 콩 또는 귀리나 조 따위만 배급되었으니
어떻게든 이 알량한 음식이라도 악착같이 먹어서 체력을
조정해야 하는데
미군들 중에 이런 가축에게나 먹이는
사료를 먹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삶은 물만 마시는
철부지도 많았었다.
이렇게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허약해져
죽는 병사들이 많았었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터키군 포로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으면 들의 풀을 뜯어 먹는 강한
생존력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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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군의 개탄스런 포로생활의 진상을 조사하던 미군당국은

포로 생활에서 송환 된 미군들로부터 같은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터어키 군 포로들이 어떻게 이 고된 생활을 극복해냈는지를 듣고
경탄했다. 미군의 경탄은 바로 언론을 통하여 세계로 퍼져 나갔다.


포로 수용소의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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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6·25전쟁의 고전 작품이 된

‘This kind of War.'의 저자 T.R,페렌바크는 죽음의
계곡 수용소와 벽동 포로 수용소에서
생활을 했던
슐리히터 상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쓰고 있다.

“ 여러 가지 사실 가운데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은 미국인
포로중에
50 퍼센트가 죽고 영국군 포로의 사망률이
영국 정부에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포로는 별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터어키 포로들은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


터키 군들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초지일관
터키 군인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비록 포로의 몸이 되었지만 터키 군인들은 전투중의
명령체계를
단단히 고수했었다.


미군처럼 중공군에게 아부하던 병사가 선거로 자치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포로 중 가장 계급이 높은 터키 장교가 당연히
포로들의 지휘를 맡았다.
포로가 되었지만 장교는 장교였고 부사관은 부사관이었고
사병은 사병이었다.
명령은 명령이고 복종은 복종이었다.


페렌바크는 계속 써내려갔다.
터키군의 대장은 매일의 근무표를 작성했다.
따라서 누가 나무를 하고 물을 길며 병자를 간호하는가를
대해
조금도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부사관이나 군의관, 그리고 군목은
병자를 간호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자의 옷을 빨아 주며
불을 때는데 쓸 나무를
하도록 사병들에게
사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간부들이 사정을 하면 사병들은 “제길할 ----너는 뭔데?”
하고 빈정댔다.

벽동 포로들은 대부분 온돌을 사용하는 민가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대량의 장작을 만드는 것이 이들의 큰 업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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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포로들의 최고 책임자가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중공군
관리병들에게 반항했다는 죄로 붙잡혀 갈아 치워져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제 3, 제 4의 선임자 또는 그 아래의 책임자가 줄줄히 터키군
지휘를 맡아도 그들이 하는 터어키 포로들을 통솔하는 방법이나
형식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터키 포로가 지나치게 중공군과 친하게 지내면
군법회의가
열리고 슐리히터는 방청하도록 초청되었다.


선임하사가 심판관으로 앉고 법정은 열렸으며
논고와 증언이 속행되었다.


그 터어키 사병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는
개같이 두들겨 맞았다.

그의 변호인도 그런 반역자를 감히 변호했다고 해서 얻어맞았다.

슐리히터가 물었다.

“그런 짓을 두 번하면 어떻게 하는가?”
질문에 터키군 간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 때는 죽여 버린다.“


중공군은 세뇌시키려 든 대상에 물론 터키 포로들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6시간씩 포로들을 화장실도 못 가게하고 실시하던
정치 교육
이나 숱한 공산주의 선전물이나 영화 상연의 홍수에도
이들 중에 마음이 변심하여 조국 터어키을 버리고 중공으로
간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미군들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어 놨던 중공군의
인간적인 대우에도 터키 군들은 그 뒤에 숨어있는 흉계를
경계하며
마음가짐을 단단히 가졌다.


지루한 정치 교육후 형식적인 자체 분임 토의 시간.
영어를 모르는 터어키 군과는 관계없는 시간이었다.
터어키 포로는 이런 시간에는 몰래 코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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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 출신이 다수였던 터키 포로였지만

터어키 인들이 제일 증오하는 원수인 소련의 이데오르기가
공산주의였으니 그들이 본능적으로 거부했던 것은 당연했다.


터어키 포로들이 중공군이 떠벌리는 공산주의 세뇌교육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은 그런 헛 눈길은 자기의 사망 선고문에
스스로
도장을 찍는 행위였었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중공군이 뭐라 하루 종일 떠들어도 그들에게는 오직
알라
신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페렌바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학자나 군인이나 의사들은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왜 공산군의
포로 수용소에서 그렇게 많이 죽었는가, 
 왜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살아남았는가? 캐물을 것이다.

 그 답은 명쾌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계산기로 튕길 수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


그는 터키 군 포로들의 행태가 답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터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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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전쟁중에 1만 5천여 명의 터어키 군이 참전해서 2,000여 명이

부상하고 168명이 실종했으며 721여 명이 전사했다.
그 중 462명이 그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 낸 한국 남쪽
부산 재한 유엔 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다.

터키 여단은 전쟁이 끝나고 1960년까지 한국에 주둔했었다.


462명의 터키 전사자가 잠든 재한 유엔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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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앞에서 소개했던 술래이만 씨와 아일라와의

재상봉 장면에 어떤 한국 방문 UN군 장병들의 휴만 드라마보다도
한층 더 진한 감동을 받았던 것에는 그 배경이 있었다고
하겠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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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oogunking 2010.09.14 13: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괜히 터키가 세계 최강 제국 오스만 투르크가 된 것이 아니었군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2. 武運長久 2010.09.14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한 정신력과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적의 선전과 회유에 굴하지 않은 터키군은 진정한 이슬람 전사들입니다...

    그래도 포로수용소와 그곳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의 선전이라는게 정말 무서운것 같습니다...

    사병, 부사관, 장교 모두 갈라지게 만드는 중공군의 흉계...

    중공군의 포로대우가 북한군보다는 덜 가혹했다고 들었는데 그 부드러움 이면에 저런 무서운 내면이 있을줄은...

    명령을 받고 수행하고 따르기만하는 사병들의 심리와 스트레스를 이용해서 군기와 질서를 무너뜨리면...

  3. 武運長久 2010.09.14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런데 마지막에서 두번째 사진의 터키군 사진에 오른쪽 병사가 쓰고있는 모자는 소련군 전차병 모자 닮았네요...

  4. 웊프 독 2010.09.14 14: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 북진중에 노획한 것을 장난스럽게 쓰고 있는것 같습니다.

  5. chaffee2080 2010.09.14 1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어키는 당시 소련과 긴장관계에 있었고, 소련의 침공을 걱정하던 상황에서 참전했으므로 군인들의 반공의지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특히 배신자가 될 경우 본국의 가족들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하여서 이탈을 방지하였다고 합니다. 미군의 경우는 일단 숫자가 많아서 스스로 통제도 힘들었을 뿐더러, 고난을 겪어보지 않은 장병들인지라 비교적 힘든 고난을 당하면 의지가 쉽사리 무너졌다고 하죠.

  6. 열심히 달리기 2010.09.17 1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에 가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친절하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형제의 나라라고 이름을 붙일 만하게.

    오스만 투르크의 용맹한 전사들의 모습을 여기서 잘 보고 갑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육박전을 펼치면 부상병도 없게 상대편을 쓸어버린다는 이야기요.
    예니체리 군단의 후예들 답습니다. ㅎㄷㄷ

  7. 비도승우 2010.09.22 05: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돌궐의 후예들이 당나라의 후예들에게 이겼군요 !!

  8. 황태 2010.10.05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터키군의 육박전 이야기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영어가 잘 안되니 영어로 하는 세뇌교육되 무용지물일거고
    제일 중요한건 조직이 와해되지 않았다는것이겠네요.
    잘 보고 갑니다.

  9. clothing factory 2011.05.25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10. mahasiswa terbaik 2011.10.23 0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당신은 결과적으로 깨끗하게 일이! 내 배우자와 나 먼저의 모든을 통해이 길로 가고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초기 보조금 신청이 특정 문제에 사람을 위해 좋은 결과. 이 특정 방식을 최대의 시작 정말 감사. 이 우수한 웹사이트는 온라인으로 필요 한 지역, 일부 외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NET에서 새로운 도전을 주셔서 소중한 작업!

  11. visit my facebook page button 2012.05.23 18: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좋아! 매우 흥미로운, 전 더한 아이디어 실제 안쪽 의견은 대개 마찬가지로 좋은 바랍니다. 감사는 이것으로이 데이터를 제공.

  12. firefox refresh page every visit 2012.05.23 1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가 활동을 완전히 새로운 집합을 지원하는 데 그 고상한 위에있다. 작은 천사는 일반적으로 완료됩니다. 그들은 여러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무서워하지 않을거야. 웹사이트 웹 페이지 트래픽이 당신이 그들을 안락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한랭의 움직임 사이 가장자리를 보호 대상으로.

  13. how to save money 2012.05.23 19: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그냥 반했어요. 당신은 진정한 정보와 강렬한 지능 유지하고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완벽하게 당신을 위해 자극 주제를 작성한 파악 수있는 무언가를 제출했습니다. 지금 내가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이러한 특정을인양하고 있습니다.

  14. http://www.rushessay.com/ 2013.02.12 2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공유 할 열망 것을 분명 있습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그림은 천 가지 말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