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1.08.10 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3)
  2. 2011.05.31 남북 포로 조우(遭遇)때 생긴 돌발 상황 (11)
  3. 2010.11.05 97. 멈추어진 전쟁 (140)

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8.10 17:45

 6ㆍ25전쟁 동안 공산 측에 포로가 되었던 미군은 약 7,000명 정도 되었다. 이중 40%가 학대와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국군 포로의 사망률은 극히 낮았는데, 이 사실로 미군들의 극한 상황을 견디는 신체적 심리적 능력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학대는 중공군이 관리했던 포로수용소보다도 북한군이 운영했던 포로수용소가 극히 심했었다.

[미군이 공중 촬영한 북한의 직동 포로 수용소]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군 노병을 만났는데, 자기는 파주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중공군이 관리하던 창성 수용소에서 2년 넘게 수용됐었다고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어요. 북한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라면 못 돌아왔을지도 몰랐어요. 그 곳은 지옥이었으니까----"

[중공군의 벽동 포로 수용소, 면 전체의 주민들이 쫓겨나고 각 민가가 포로 수용소로 접수되었다. 앞에 압록강이 보인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북한으로서 증오스런 미군에게도 특별히 나은 대우를 해줄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이런 혹독한 포로수용소의 환경을 알거나 겪은 미군 포로들은  탈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탈출했었다. 6ㆍ25전쟁 기록에 의하면 공산측에 포로가 된 미군의 10퍼센트인 670명이 탈출했었다. 그러나 이 탈출은 적에게 포로가 되고 얼마 안 되는 후방 후송전이거나 최전선 야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북한의 먼 후방인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는 집 편지 나누어주기, 편지를 받는 중공군 복장의 미군들]


 6ㆍ25전쟁 때 남한은 공산포로들을 미군들이 일괄 관리하여 거제도 수용소 한 곳에 수용했지만(포로 폭동 후 분산했지만) 공산측은 유엔군 포로들을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했었다. 북한과 중공군의 대부분의 포로수용소는 전선에서 아득히 먼 북쪽 압록강 연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중공군 관리하의 벽동 수용소에서는 돼지도 공급이 되었었다. 도살이나 요리는 미군의 몫이었다.]


 이렇게 머나먼 적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례가 무려 50여건이나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였다. 험악한 지형과 현지 북한 주민들과 전혀 다른 생김새, 그리고 전선까지의 장거리가 탈출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급식은 특히 최악이었다. 병으로 죽는 포로들이 급증하자 부랴부랴 급식 형편을 개선했다.

[식탁도 없이 걸인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미군 포로들]


 이들 포로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보이는 아득히 먼 북쪽인 한 중 국경지대의 압록강의 만포진 포로 수용소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북한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서울 동북방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 세 명이 있다. 

 세 명의 미군들이 탈출을 감행 한 것은 북한의 엄동인 12월이었다. 폭격으로 인해 미군들에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북한 주민들 사회에서 확연히 다른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고, 그 먼 길을 탈출에 성공한 실화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탈출을 주도했던 존 그래험 해병 상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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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장진호 전투 때 최전방까지 진격했던 해병 7연대 장병으로서 철수중 중공군에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미 해병 구호소, 중공군 3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때 7연대가 전위를 맡아 포위망 돌파를, 5연대가 후위로서 밀려드는 중공군들과의 전투를 했다.]


 그래험은 철수 작전 도중 눈 쌓인 벌판에서 흰 위장포를 쓰고 접근해온 중공군과 격돌했다. 양측이 동시에 발사했고 나는 턱에 따발총을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한 오두막 집안에 다른 아군 병사 여섯 명과 누어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는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들처럼 하갈우리 방향으로 철수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된 육군 부상자들도(미 육군 7사 31연대 전투단) 있었다. 

 우리 모두 부상자였지만 희한하게도 내 턱은 붙어 있었다. 아마도 뼈를 스친 유탄에 맞은 것 같은데 그 충격은 정신을 잃을 만큼 컸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얼굴은 얼어붙은 피에 온통 뒤 덮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우리를 북한군에게로 넘겼고 놈들은 우리를 총검으로 몰아 세우며 며칠 동안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미군은 총검에 찔려 죽었다. 며칠 후 한 작은 마을에 이르러서 심문을 받은 일행은 분산되었는데 나는 북한군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대열 속에 끼게 되었다. 

 수주일간 산길을 따라서 밤에 걷고 낮에는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한 끝에 한 중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변의 한 마을, 만포진에 이르렀다. 포로로 끌려간 해병에게나 육군에게나 그 곳은 참으로 고약한 시설이었다.

[페렌바크의 유명한 한국전쟁 책에 소개된 탈출한 포로들이라는 사진인데 탈출 인원이 다섯 명인 것으로 보아 그래험 일행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곳에 보내진 자들은 악질분자라 했으며 그래서 북한군의 지극히 ‘부드럽고 자애로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 한 명만은 악질이 아니었다. 변절자가 있었던 것이다. 

 탈출을 의논하고 있던 나는 덕분에 10일간을 땅 구덩이에 갇혀서 물만 마시고 지내며 교화를 받아야 했다. 밀고한 변절자는 디킨슨이라는 하는 테네시 출신 녀석이었다. 

 수용소에서 23개월을 지낸 어느 겨울 날, 콜세어의 한 편대가 언덕을 넘어와 인근의 중공군 시설을 폭격하더니 또 다시 한 편대가 뒤를 이었다. 인접한 건물에 네이팜탄이 떨어져 불타고 대공포가 간단없이 포효하는 소란 속에 경비병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평소 탈출을 모의했던 우리 세 명, 뮬린스와 포드등 합 세 명의 동지 포로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포진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무조건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그날 밤 밤새 걸어서 적의 추격망을 벗어났다. 날이 새자 험한 지형의 잡목더미 속에 숨어 들어가 쉬었다. 그 뒤에도 주민들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숲 속에 숨고 밤에는 걸고 하는 탈출 행을 계속하였다. 배가 고프면 민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음식물이나 닭을 훔쳐서 허기진 속을 채웠다. 날씨는 무척 추웠으나 북극을 능가하던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혹독한 날씨에 비하면 그런대로 참을 수가 있었다.

 거의 2주일을 그렇게 남하했을 때 우리는 먼 전방에서 포화가 은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뛸 뜻이 기뻐했다. 그러나 남으로 갈수록 적병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우리는 조심과 조심을 거듭하면서 전선으로 접근했다. 최전선 직 후방의 계곡에 숨어서 밤을 보낸 우리는 날이 부옇게 새자 적 경계선을 은밀하게 돌파하고 드디어 건너 전선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미군들에게 구조 될 수 있었다. 그 곳은 서울 동북방 전선이었으며 우리를 구조해준 미군은 미 제 1기병사단이었다.

[포로 교환 때 돌아온 미군 포로들이 수용된 자유의 집]


 나는 이 고통스러운 탈출 중에 손가락에 심한 동상에 걸려 그 손가락들을 모두 잃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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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ㆍ25전쟁 중에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나온 국군 장병들 또한 여럿이었다.

[박정인 소령]


 비교적 잘 알려진 탈출 이야기는 사단 19연대 작전 주임이던 박정인 소령[후에 3 사단장 역임]과 3명의 장교와 1명의 병사가 1951년 1월 23일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두 달 뒤인 3월 14일 귀환에 성공했던 일화이다. 

 미군인 그래험의 북한 탈주 경우의 2주는 무척 빨랐다고 하겠다. 미군으로서 북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돌아온 것은 이 그래험 상병의 예가 유일할 듯하다.

[유명한 라이프지의 사진,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존 프로크 상병이 믿어지지 않는 귀환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더구나 그가 그 멀디 먼 압록강변에서 탈출해서 주민들이나 북한 추격대에게 발각되지 않고, 전선을 통과해서 돌아 온 것은 ‘기적’이라 생각된다. 국군이라면 모를까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티가 나는 백인 얼굴들로 한반도 북반을 종단해서 남하하였다는 사실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험은 현재 80세의 나이에 몬타나 주의 카네지 읍에서 생존해 있다. 위는 카네지 읍내 주민이며 조각가인 그래이저가 영웅으로 추대받은 그에게 헌정한 독수리 조각상. 그래험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아들 존 H. 그래험(왼쪽)이 받았다.]


 지도도 없이 정확히 남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탈출 일행 중에 별을 보고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남하하는 용의주도한 조심성이 이들의 탈출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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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포로 조우(遭遇)때 생긴 돌발 상황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5.31 16:06

내 친구 형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6.25전쟁 때 서울과 문산 사이 철도 옆에 살았단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마을 앞으로 북으로 돌아가는 공산군 포로들을 실은 열차들이 자주 통과했었다.


<포로 교환 열차 -아래 연합 뉴스의 사진들은 당시 송환 열차에 동승했었던 미 사진병 폴 굴드 슐레진저 씨의 따님이 제공한 것이다.>


동네 젊은이들은 적기가와 김 일성 장군의 노래 따위를 부르며 포로 교환 장소인 판문점으로 가는 이들의 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그만큼 김일성의 남침으로 겪은 고통이 불러온 반공 사상은 남한 사람들로 하여금 과격한 증오를 남김없이 표출하게 하였다.

포로 교환 열차가 지나가는 것만 보면 주민들은  철도옆에 늘어서서 열차 창문에 우박 같은 돌팔매 선물을 가했다. “ 빨갱이 새끼들! 가다가 다 뒈져라!” 돌 세례를 받은 북한 귀환 포로들도 맞고만 있지 않았다. “이 간나 새끼들! 다음에 밀고 넘어오면 다 죽여 버리겠다!


<열차 내부의 송환 북 포로  모습>


북한 귀환 포로들은 포로생활의 수모를 타고 갔던 객차의 내부를 갈가리 다 찢고 부수어서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포로 교환 장소인 판문점에서는 옷을 홀딱 다 벗어 버리고 한ㆍ미 장교들에게 입에 못 담을 욕을 퍼 붓고 북으로 올라갔다. 북에 억류되어 있던 국군 포로들은 북한 주민들로부터 더 심한 취급을 당했다.

국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도보로 이동할 때면 동네 주민들이 예외없이 돌팔매질과 욕을 하였고 몽둥이를 들고 뒤쫓아 오며 “이 미제 놈의 개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다오!”하며 구타하려고 하는 극단적인 인간들도 있었다. 북한의 선전과 세뇌, 그리고 유엔군의 밤낮없는 폭격, 북한군의 다수 유가족 발생등이 주민들의 포로들에게 행패를 부리게 했었다. 그런데 각기 적지에서 수모를 당한 이들 남한 포로와 북한 포로가 귀환 길에 개성 북방에서 서로 만난 일이 있었다.


<상이군인의 모습으로 송환하는 북한군>

누구보다도 서러운 학대를 당한 존재들이기에 상대방들에게 극단적인 혐오감과 증오감을 표현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해프닝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대구 의학 대학 재학중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북진하는 국군의 일원으로서 평북 덕천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박 진홍 선생이 쓴 ‘돌아온 패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1950년 11월에 있었던 덕천 전투에서 한국군 2군단의 2개 사단이 붕괴하고 두 명의 연대장을 포함한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포로가 되었는데 위생병이었던 박 진홍 선생도 본대가 철수하고 뒤에 남아서 부상병을 돌보다가 포로가 되어 3년간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기적적으로 귀환하신 분이다. 글은 포로가 되어 북한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개성 향교로 이동해서 포로 교환을 준비하던 때부터의 부분을 옮긴다.

1953년 8월 17일 아침 식사를 끝내자 북한군은 우리 포로들을 전원을 소집시켰다. 광장에는 소련제 카스토바[군용트럭 4륜차]가 십여대 정렬해 있었다. “드디어 이 차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구나!” 만감이 교차하였다. 포로 번호 817번 나는 8월 17일 교환되었다. 포로 번호와 나의 교환 일자가 동일하였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신기했다. 우리는 감시병 지시에 따라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다. 한 차에 20여 명씩 탔다. 양쪽에 10여 명씩 갈라 앉았다. 모두가 교환의 기쁨을 환호를 지를 것 같았지만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가 출발해서 남쪽으로 달렸다. 뒤를 돌아 보았다.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휴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충 지대란 팻말도 없었다. 우리는 판문점 일대에 완충지대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남으로 가고 있었다. 멀리 맞은 편에서 트럭 한 대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미제 군용 트럭 [GMC]였다. 북으로 가는 북한군 포로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는 않았다. 고함 소리만 요란하였다.


<열차 내부의 송환 포로들>


북한군들이 탄 차가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 목청껏 외치며 손을 흔드는 북한군 귀환 포로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손만 흔들었다. 그들은 최 일선에서 총부리를 마주했던 상대였다. 어떻게 “고생했다. 잘 가거라!”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북으로 돌아가서 사상검증을 받을 때 그 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염려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양손을 입에 대고 목청껏 외쳤다. 우리도 점차 동화되기 시작했다. 윗도리를 벗어들고 그 쪽을 향하여 마구 흔들어댔다.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도 질렀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 우리는 남으로 그들은 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가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느 전쟁사에 이런 광경이 또 있을까 같은 말을 사용하는 동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한 핏줄의 뜨거운 동족애를 느꼈다.


<악을 쓰며 북으로 송환되는 북한군 여자 포로들. 미군용 송환 열차에 욕설을 담은 플랜카드를 걸고 있다.>


누군가 상의를 벗어 던졌다. 남으로 가면 이제 필요 없다. 한사람 두 사람 옷을 던져 버렸다. 이제 팬티만 남았다. 신발까지 던져 버렸다. 지난날의 서러움과 고통과 괴로움을 옷과 함께 저 멀리 던져버렸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북으로 가는 북 포로들도 북한군 귀환 포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미 상의와 바지가 없거니와 신발도 없었다. 우리와 교차할 때는 2미터가 채 될까말까하는 거리였다. 서로가 손을 뻗으면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완충지대 4키로는 감격의 거리로 변했다. 이제는 손에 들고 흔들 옷도 없었다. 맨손을 흔들었다.


<송환직전 옷을 벗어던지고 미군 장교에게 마지막 욕을 퍼붓는 북한 포로>


북으로 가는 북한군 포로들의 자동차가 다섯 대 지나갈 때 우리 차는 1대 지나갔다. 우리보다 그들이 숫적으로 많았다. 서로가 교차할 때는 열광의 도가 극에 달해 광적이라 할 정도로 소리쳤다.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전쟁에 수많은 불확실성과 이변을 동반한다. 두 포로들의 만남이 의외로 이렇게 전개되었다는 것은 확실히 이변중의 이변이다.


<돌아 오는 영국군 포로>


박 선생이 말한대로 동포라는 요소외에 동병상린이라는 인간의 심리적 요소도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박 선생은 생환해왔으나 고통이 다 지나간 것은 아니었다. 포로들은 남해의 고도 용초도라는 곳에 격리 수용되어 엄중히 심문을 받았다. 그 뒤에 전방으로 보내져 근무하다가 겨우 제대를 할 수가 있었다.

박 선생을 전쟁 덕분에 4년이나 늦게 복학하여[1954년] 1960년에야 졸업할 수가 있었다. 지금 8 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셔서 대구에서 ‘박 진홍 정형외과’를 개업 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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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멈추어진 전쟁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1.05 08:13

  휴전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전쟁의 제1당사자인 한국정부가 휴전을 반대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이동풍 같은 공산군 측과 2년간 밀고 당기며 어렵게 협상을 마무리 짖게 되었지만 막상 같은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이 휴전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정부는 반대를 넘어 오히려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고 호헌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많은 희생을 보았음에도 막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불완전한 분단이 계속 이어지는 휴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대의명분상으로 타당하였습니다.


[한국정부는 표면적으로 휴전을 반대하였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음은 한국정부가 오히려 잘 알고 있었고 더불어 휴전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없었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결사반대를 외친 이면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전쟁재발 방지와 관련한 문제였습니다. 1953년 7월 초순까지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는 이에 대해 심각한 이견(異見)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1949년 미군 철군 후 곧바로 북한의 침략을 받아 패망의 위기에 까지 몰렸던 한국 정부의 뼈아픈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더불어 휴전 후 미군과 중공군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군한다 하더라도 중공군은 압록강만 건너면 언제든지 북한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도 그런 우려를 충족시켰습니다.


  결국 미국이 특사를 파견하여 상호방위조약처럼 전후 안전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표명해 주고 더불어 대부분의 현안이 합의되자 이승만 대통령도 휴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나름대로 실리를 취하면서도 명분상으로 마지못해 이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겉으로 보여준 우리정부의 단호한 모습이 공산군측을 상당히 불안하게 만들었고 특히 휴전 조인직전에 보여준 반공포로 석방은 그런 의구심을 증폭시켰습니다. 따라서 판문점에서 재개된 휴전회담에서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에‘한국정부로 하여금 정전협정을 이행하도록 하는 대책’을 집중적으로 요구하였을 정도였습니다.


  2000년대 들어 북한측이 이슈화하고 있는 서해의 NLL(Northern Limit Line 북방한계선)은 막상 군사분계선 설정 시 해군력이 압도적이었던 유엔군이 스스로 이 이상 북으로 올라가 군사작전을 벌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오히려 공산군측을 안심시켰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 만큼 유엔군은 휴전성립을 위해 한국 정부를 안심시킴과 동시에 공산군측을 달랬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공산군측을 불안하게 만들고 미국으로부터 차후 안전보장 책을 얻어낸 한국정부의 당시 행태는 전략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해리슨과 남일]


  이처럼 공산군측은 내면적으로 미국보다 휴전에 더욱 매달리던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동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으며 비극적인 전쟁을 벌인 대가로 얻게 된 소득이라는 것은 어느덧 감내하기 힘든 선까지 다 달은 엄청난 피해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전선에서 실질적인 군사행동은 거의 중단되었고 포로의 인도 장소와 정전협정의 조인 장소 문제만 남아있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거듭한 양측은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정전협정의 조인 일자를 7월 27일로 조정하여 당일 22시를 기해 전면 발효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10시 양측을 대표한 유엔군측의 해리슨 장군과 공산군측의 남일은 조인 장소에 착석했습니다. 그리고 인사도 교환하지 않은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된 협정서에 10시 12분 조인을 마치자마자 해리슨은 헬기를 타고 문산리로 향했으며, 남일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프차를 타고 회담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까지 상대 진지를 향한 마지막 포격과 폭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특히 유엔군의 전폭기들은 북한의 전투력을 조금이라도 더 감소시킬 목적으로 북한의 비행장, 철로 등을 강타하였으며 해상에서 해군의 군함들이 함포사격을 실시했습니다. 그 만큼 상대가 너무나 미웠던 것이었습니다.


[휴전직후 비무장지대 설정 전 군사분계선에서 대치 모습 ]


  그리고 정각 22시가 되자 한반도 전역에서는 포성이 멎었고 마침내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던 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종전이 아닌 말 그대로 휴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쟁의 끝이 아닌 엄연히 전쟁 중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어느 일방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면 곧바로 확전이 될 수 있는 불안전하고 어정쩡한 미완의 평화였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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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았음에도 막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불완전한 분단이 계속 이어지는 휴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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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피알앤애드 2014.06.25 1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포스팅 관련하여 사진자료가 필요해서 퍼다 씁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