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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12 지킨 자 그리고 도망간 자 (118)
  2. 2010.10.19 돌출부에 대한 단상 (11)
  3. 2010.07.26 최초의 반격 대첩-동락리 전투 (10)

지킨 자 그리고 도망간 자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1.04.12 21:51

1950년 6월 28일, 적에게 김포읍이 피탈 당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소사읍(현재 부천시)으로 후퇴한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이하 김포사)는
읍사무소(현재 부천시 심곡본동)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밤새워 대오를 수습하던 중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후퇴 와중에 사령관 계인주 대령이 실종되었고,
그 어느 누구도 그의 행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지휘소를 설치하였던 소사읍사무소

국군지휘부는 이런 황당한 소식을 보고받고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무릅쓰고 한강교를 폭파하는 초강수를 두며
북한군의 남진을 막고자 했지만 이미 북한군 6사단은
한강하구를 도하한 후 김포반도를 점령하고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북한군이 조기에 영등포를 점령한다면,
아군의 퇴로는 순식간 차단될 위기였는데
이를 최일선에서 막아내어야 할 부대가 바로 김포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강다리를 끓었지만 이미 적군은 한강을 도강한 상태였습니다

김포사는 무주공산으로 방치된 김포반도에 상륙한 북한군을 막기 위해
6월 26일 남산학교(정보학교)장이었던 계인주를 사령관으로
기갑연대 1장갑 수색대, 3도보 수색대, 8연대 3대대, 12연대 2대대, 15연대 12대대,
22연대 3대대, 18연대 2,3대대, 보국대대, 남산학교, 공병학교의 병력을 모아
급조한 부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사분란하게 통합 지휘할 지휘부의 역할이 컸는데
사령관의 갑작스런 실종은 상당히 치명적이었습니다.

독립 기갑연대 소속 M-8 장갑차도 김포사를 지원하였습니다

결국 3사단 참모장인 우병옥 중령이 신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김포사는 즉시 김포공항 탈환 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미군의 참전이 이루어진다면 김포공항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른 작전이었습니다.
작전 초기, 비행장에 돌입한 전초부대가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아군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압도적인 북한군에게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0년 7월 초에 촬영된 김포공항

그러나, 비행장 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일선 장병들은
적의 공세에 굴하지 않고 처절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선봉에 섰던 안영작 대위, 강문헌 대위, 김일록 중위,
박영수 소위, 김수동 소위 등의 중간 간부들은 적의 공세를 막아내다 전사하였고
현장에서 이들을 지휘한 김포사 참모장 최복수 중령은
단신으로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차를 몰고 비행장을 질주하여
적을 유린하다 장렬히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장렬히 생을 마감한 최복수 중령

이와 같은 부하들의 장렬한 전사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실패하고 부대가 와해된데 죄책감을 느낀 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공항이 내려다보이는 원미산 중턱에서 권총으로 자결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김포사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고 경인가도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부대가 시흥전투사령부에 흡수되어 해체되는 7월 4일까지
치열하게 적을 물고 늘어져 남진을 저지하는 투혼을 발휘하였습니다.

원미산에서 바라 본 개화동 방면
우병옥 중령이 이 부근에서 자결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전투 2일 만에 행방불명된 계인주가 나타난 곳은 어처구니없게도 부산이었습니다.
그는 전황이 불리하고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하여 부대를 무단이탈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도망갔던 것입니다.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겁하게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이었습니다.

팔미도 투입 직전 영흥도에서 촬영된 특공대(우에서 3번째가 계인주)

헌병대에 체포된 계인주는 재판에서 총살형을 언도받았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형을 잘 아는 요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미 해군정보국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풀려나 팔미도 작전에 투입되어 수훈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인주가 비겁하게 도주하였던 행위는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팔미도 작전은 굳이 그가 아니어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지만
김포사를 내팽겨 친 행위는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계인주의 도주 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한 행위였습니다(우측 뒤돌아 본 이)

역사를 보면 최복수 중령처럼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도 있고
우병옥 중령처럼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인물도 있지만,
계인주처럼 자신의 영달을 꾀하기 위해 의무를 거부한 이도 엄연히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는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반복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조국은 지키는 자에 의해서만 수호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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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부에 대한 단상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10.19 08:49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선 이북의 영토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현재 미치지 못하는 미수복지역입니다.  때문에 현재 대한민국의 주권이 행사될 수 있는 최북단 영토는 함경북도 온성군이 아니라 강원도 고성군입니다.

[아쉽지만 대한민국의 주권이 북한지역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지방의 DMZ은 여타지역과는 달리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휴전당시에 아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처럼 이 지역이 현재 대한민국의 주권이 행사되는 최북단으로 남게 된 데는 한미 지휘관간은 믿음과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의 DMZ이 북쪽으로 올라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951년, 중공군의 몇 차례에 걸친 대공세 이후 미국이건 중공이건 서서히 휴전을 염두에 두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길항이 있었으나 전선은 현재의 DMZ부근에서 거의 고착화되었는데, 그런 이유는 최대한 전선을 짧게 단축하는 것이 우리도 그렇고 공산군 측도 유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덧 전쟁은 서서히 고착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선에 참호가 깊게 파여지고 고착화 되었다면 그것은 공격보다 방어를 염두에 둔 배치인데, 이 경우 전선이 길게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이를 방어하는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볼 때 크게 2군데의 최단 횡단점이 있는데 하나는 동안만과 서한만사이의 북위 39도 50분 지점과 한강하구에서 속초에 이르는 38도선 지점입니다.

[북쪽의 횡단점은 전략상 공산군 측이 수용하기 곤란하여 두개의 횡단점 중 군사적으로 대치가 이뤄질 수 있는 곳은 한강하구에서 속초에 이르는 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성지역을 북에 넘겨주고 휴전을 하게 된 것은 아군의 공격을 공산측이 훌륭히 방어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한강-임진강 하구를 방어선으로 삼고자하던 전략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암묵적인 와중에서 볼 때 고성지역의 돌출부는 사실 조금 특이한 지역입니다.  만일 가칠봉에서 간성읍까지 최단거리로 DMZ이 형성되었다면 전선의 길이를 약 20Km 정도 단축하여 방어에 유리 할 것이고 이점은 북측도 알고 있었습니다.

[개성은 도심 뒤에 고지가 있어 군사적으로 이곳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 만큼 휴전선은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여 형성되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북으로 돌출하여 자유대한 지역으로 편입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1951년 6월 이후 동해안에서 작전을 벌이던 부대는 백선엽 소장이 지휘하던 국군 제1군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태백산맥 서쪽과는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국군이 전담으로 방어하다보니 타 전선에 비해 화력지원이 충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훗날 국군 최초의 대장에 오른 백선엽]


  포병전력의 확충이 여의치 않음을 고민하던 백선엽은 미 제7함대 제
5순양분대의 사령관으로 동해에서 작전 중인 알레이 버크(Arleigh Burke 1901~1996) 소장을 찾아가 고민을 이야기하고 함포지원이 가능한지를 문의하였습니다.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던 버크제독은 백선엽의 제의를 즉시 받아들여 국군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거침없이 함포 사격을 지원했습니다.

[알레이 버크 그 또한 해군대장까지 진급하였다]


  요청이 있으면 이유불문, 시간불문, 장소불문하고 즉각적으로 지원사격이 이루어졌을 만큼 두 장군은 궁합이 잘 맞았고 이러한 버크제독을 백선엽이 국군 제1군단의 포병사령관이라고 자랑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이 덕분에 국군이 전담하던 동해안은 공산군이 감히 탄막을 뚫고 내려올 생각을 못하였고 그 결과 동해안의 휴전선은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해상포격은 국군의 든든한 지원군이었습니다.]


  아군을 흥남으로 몰아넣고도 중공군이 배타고 후퇴하는 유엔군의 모습을 손가락 빨고 쳐다만 보았던 이유는 미 해군이 해상으로부터 쏟아부어대는 엄청난 탄막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내내 공산군은 해상포격으로부터 그들을 방어할 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해안선을 따라 진격을 하는데 많은 애로 사항을 겪었고 반대로 아군에게는 너무나 든든한 보호막 노릇을 하였습니다.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DDG-51 알레이 버크]


  호인이었던 버크는 전후 대장으로 진급하여 미 해군 작전부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미 해군발전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미 해군은 버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 해군 사상 최초로 생존해 있는 사람의 이름으로 새로 건조한 구축함의 이름을 명명하였습니다.  바로 최강의 전투함으로 평가받는 알레이 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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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武運長久 2010.10.19 16: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괴와 중공은 당시에 미주리같은 미국의 거함들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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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http://www.estyma.eu/ 2014.04.26 15: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 대한민국의 주권이 행사될 수 있는 최북단 영토는 함경북도 온성군이 아니라 강원도 고성군입니다.

  11. http://motowynajem.pl/ 2014.04.26 18: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 고민을 이야기하고 함포지원이 가능한지를 문의하였습니다. 직선적이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던 버크제독은 백선엽의 제

최초의 반격 대첩-동락리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6 08:37

이번  포스팅 글은 한강 이북에서 기습을 당해 참패를
당하고 후퇴하던
국군이 전쟁 발발 12일 만인 1950년 7월7일
충북 진천군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2 대대가 2개 중대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 15사단 1개 연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킨
전투를 소개하는 글이다.


전략의 본질이 공격이고 그 이상적인 형태는 기습임을

상기해보면 동락리 전투야 말로 대첩(大捷)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없는 6·25전쟁 최대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독립문에 선전물을 붙이는 북한군
---------------------------------


더구나 한강 이북에서 대패를 하고 미국을 위시한 여러 우방국으로

부터 그 전투력에 불신을 사던 한국군이 한판의 대승으로
면목을 일신한
전투이기도 하다.


승리의 주역에 대해서는 몇 주 전 이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다.

춘천 시 외곽 원창고개에서 북한군에게 기만을 당해 다 잡았던

완벽한 승리의 영예를 내놓고 철수했던 6사단
김종수 대대[7연대 2대대]다.


대승과 대패를 오갔던 풍운아 6사단의 부대답게 2대대는
대승을
동락리에서 거두고 실추한 위신을 당당히 회복하였다. 
[당시 충북 음성군 신니면 동락리, 현재는 충주시]



서울 점령후 한강을 도강하여 남하하는 북한군
--------------------------------------------

이 전투에 대한 기록과 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1960년대에 아직 전투의 기억이 생생했던 김종수

[욱군 중장-수산청장역임]장군이 일본 방위대학의

사사키 하루다카 씨[한국전쟁 전문가]에게

직접 회상한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  ----  ----

7월 7일 임부택 연대장으로부터 가엽산에서 644고지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개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자 도중에 큰 사찰이 있어 많은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부녀자이며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약간 세련된 느낌의 아가씨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쏘아 보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에 걸렸으므로 정보장교에게 물어보게 한바, 그녀는

동락국민학교의 교사라고 신분을 밝혔다. 말을 걸자

“지난 날에는 국군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꼴이냐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 같은 고생을 시키느냐?”

하고 거리낌 없이 울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죄어지고
기분이 무거워졌다.

춘천에서 이곳까지 후퇴하는 도중에도 무수한 피난민의
참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는데 국민으로부터 직접 이같이
후퇴의 책임을 추궁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어떻게라도 전쟁에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결의에 불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답답한 심정으로 고지에 올라 진지 편성에 착수했다.


당시의 대대 실 병력은 300명 정도였었고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대원들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으므로 망원경으로
산 아래를 둘러보자
적의 대부대가 동락국민 학교 교정에
모여 있었다.

[민간인이 달려와서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북진하는 국군
-------------


포나 인원수는 대충 눈어림해보자 실로 1개 연대의 대병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없었던 것이 이런 대부대가

아무런 경계를 안하고 있었다.


아마 패주에 급급했던 한국군들을 깔보는 분위기가 북한군
부대에 퍼져있던 것이
이런 느슨한 경계태세를 취하게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적은 15사단이었다.

나는 중대장을 모으고 긴급 작전회의를 하였다.


중대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 공격하자!”고 했다.


확실히 절호의 기회이었으나 내 임무는 644고지의 확보였으므로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축한 방어선을 버리고 산을 내려가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임무 밖이므로 작전 명령의 변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대와의 통신 수단은 없었으며 지휘소에 내려가

임부택 연대장의 인가를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적을 공격하기에 대대는 병력도 부족했고 중화기라고는

81mm 박격포 1문과 50구경 기관총 1 정뿐이었다.

적 대부대를 공격하기에 너무 화력도 약했다.


중대장들은 자꾸만 공격하자고 졸랐다.

망설였으나 마침내 독단으로 공격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결심에는 여교사의 꾸중을 들은 것이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피난민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자는 생각도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3명의 중대장과 작전회의를 통하여 1개 중대씩 적을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기로 했다.


작전은 곧 개시되었다.

사격 개시 시간을 17:00으로 미리 정했다.

시간이 되면 별도의 대대장의 별도 명령 없이 중대장이 알아서

사격명령과 공격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미리 정한 1700 대대의 제 6중대는 집중 사격을 개시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우왕좌왕하고 그늘에 숨었으나

교정에 정열 해 놓은 적 포들은 포구를 6중대 쪽으로 돌리고

시사(試射)했다.



소련제 76mm 사단포 방탄 장갑이 있다.
이 포는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약간 개조 된 PAK39 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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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김종수 대대장은 즉각 박격포 반장 

신동관[7기-준장예편]
중위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포신만 있고 포판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북한군 포병은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제 6중대는

폭연(爆煙)에 덮였다.

전멸했는가 싶을 정도로 지독한 포격이었다.


거기에 포판이 도착했으므로 신중위는 직접 조준으로
제 1탄을 발사했다.

사거리는 300미터 정도였다.

놀랍게도 초탄부터 적 포병들의 한가운데 떨어져 폭발하면서

적병 수 명을 날렸다.



미군이 2차 세계 대전시 사용하던 81mm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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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신 중위는 효력사로 옮겨 최대 발사 속도로

지역사격을
가하자 적의 포병은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제 7중대의 기관총 소사(掃射)에 포착되었다.


또한 동쪽으로 도망친 북한군은 용원리의
제 3대대에게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3대대의 역할이 크다는 이설도 비중이 크다.]

도망칠 곳을 잃은 북한군은 뿔뿔히 흩어져서 야음을 타고

북쪽 산속으로 궤란해갔다.


다음 8일 날이 새는 동시에 전장 청소했던바 유기시체만
800여구를
헤아렸으며 포로 90여명을 잡았다.


그 중에는 북한 제 15사단의 군수 참모인 모 소좌나

제 48연대 본부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이 적은 북한 제 48연대였는데
민간인들로부터 무극리 부근의 국군은 전부 철수했다고
들었으므로 안심하고 동락리에서 연대 정지를 했다.


저녁 식사 후에 다시 행군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므로
전연 경계하지 않았다.


제 2대대장이하 많은 장교가 전사했다.


대 승리를 올린 제 2대대 용사들은 자기들이 올린 전과에

스스로들 놀랐다.

막대한 전리품이 동락리 국민 학교 주변에 유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76mm포 12문 장갑차 3량, 박격포 35문, 각종 기관총 47정,

소총류는 약 1,000정, 차량 60량, 무선기 기타 다수였다.

또한 기막히게 놀랄 일은 이런 전과를 올린대대의 아군의 손상은

단 1명의 경상자뿐이었다.


6사단은 이 전리품들의 수송을 위해서 사단의 수송수단을
총 동원해서
대전의 수송되어서 시민들에게도 전시가 되었다.

동락리 대승은 거듭된 패퇴에 의기소침했던 민과 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했다.

각종 무기는 1점씩 유엔 본부에 보내져 북한 침략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크게 기뻐한 이승만 대통령은 전대대 장병들을
1계급씩 특진 시켰다.

이 전투의 후일담이 여럿 있다.

대패를 당한 15사단 사단장 박성철은 해임되었다.

이 정도라면 군인으로서 그 생명은 끝장이 나겠지만

박성철은 10대 때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그의

똘마니로 따라 다녔던 관계로 신임이 깊었다.


나중에 다시 중용되어 1971년 최초의 남북 대화 때
남한을
방문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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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없고 무식했던 빨치산 부대 출신 사단장
[박성철, 오백룡, 최용진등]들은 실전에서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중국 해방군 출신 사단장[김웅, 방호산, 이권무]들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역량이 못 미침을 들어냈었다.

박성철의 대패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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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주민들이 알려준 것은 거짓 정보가 아니었는데도 대패배로
머리가 돌은
그에게 진위를 따질 기분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대전에서 학살한 양민들- 국군 포로들과
미군 포로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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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전투 자체보다도 한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은 김종수 대대장을 부끄럽게 만든 김재옥 교사다.


그녀는 나중에 군인 김득주 중령과 결혼했다.

1963년 그녀에게 불행이 닥쳐와 고재봉이라는 살인범에 의해서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일가족이 오인 살해당했다

[그가 원한을 가졌던 전임 대대장 가족으로 오인했었다.
전임 대대장 부인은 고재봉을 절도로 고발해서
영창에 갔다오게 했었다.].


그 녀의 이야기는 영화 '전쟁과 여교사'로도 만들어 졌었다.

현재의 충주시 동락리 격전장에 그녀의 추모비가 서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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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코비치 2010.07.26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한국전쟁 관련 포스팅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혹시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미군, 국군에 의한 것은 많이 나와 있는데, 북한군에 의한 것은 찾기가 어렵더군요.

  2. 김현수 2010.07.29 1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국을 수호했던 선열 들이시여 삼가 감사 드립니다,

  3. 팬클럽회장 2010.08.01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재옥씨 배우자는 2대대 중위였던 이득주라고 인터넷에 나오네요. 그리고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신동관 아니고..)중위가 행양경찰대장때 현충비를 세웠답니다.

  4. Jeremy 2010.08.25 0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신지요.

    고 정일권 총리의 회고록(당시 참모총장이었죠)에도 첫번째 승리로 저 전투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그 책에는 한 여교사가 제보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동일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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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Greentree Legal Team 2014.04.10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10. http://andersenconstruction.co 2014.04.13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