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괴상한 대전차 전술 - 전차포 포구 쏘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25 08:41



 미 해병들이 유담리에서 전개하고 있다.
이 길은 덕동고개를 넘어 하갈우리로 통한다.
날씨가 얼마나 추웠는지 사진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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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6·25전쟁 참전군대에서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제일 머리를 많이 
굴린 군대가 중공군일 것이다.



원체가 믿을 것은 숫자 뿐이었고 맞선
부대는 화력 세계 최강인 미군이었다.


그러니 중공군은 그 격차를 줄이고자 잔머리 수준의
창의력을 무수히 시도했었다.

매복 기습이나 인해 전술, 한국군 선별 공격, 갱도 전술,
등은 중공군의 쉬지 않은 머리 쓰기의 결과물들이다.


이중에서도 전차도 대 전차 화기도 없이 미군 기갑 부대에
맞서는 수단 부재의 일선 보병 중공군들을 상대로 교육시킨
대전차 공격 수단이 상당히 특이 하다못해 괴상하다.

즉 적 전차와 맞붙으면 적 전차가 포탄 발사 후
즉시 전차 포신 내부에 화력을 퍼 부어 넣으라는 것이다.


M 26 퍼싱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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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은 중공군 소부대 지휘관들이 포탄을 발사하면
전차포 폐쇄기가
자동적으로 낙하 개방되며 탄피를 뒤로
배출하고 그런 상태로 다음
포탄 장진까지 열린 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폐쇄기는 그냥 아래로 열린 채 있다가 포탄을 장전하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위로 튀어 붙으면서 포미를
폐쇄 장전을 완료한다.


그러니 포탄 발사 직후에서 다음 탄을 장전할 때까지의
짧은 시간에
포신 속에 사격을 해대면 탄약수를 명중시킬
가능성은 충분하다.


M-26 퍼싱 전차의 90mm 포탄 적재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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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이 괴상한 대전차 공격술이
실제로
미군 전차를 상대로 실행되었다.


배경 설명이 잠깐 필요할 듯하다.

1950년 11월 해병 1 사단은 서북지방에서 북진하는 미 8군과
연결하기 위해서 함흥평야에서 고원인 장진호 지역으로 들어섰다.

입구인 수동에서 중공군을 박살 낸 이야기는 이 블로그에서
이미 소개했었다.


미 해병 1 사단의 진격로와 퇴각로 - 장진호 바로 아래
영국 해병대가 호되게 당한 Hellfire valley와
도착 예정지인 하갈우리와 출발지인 고토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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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위협이 현실화 되었을 때 장진호 진격 해병 1사단은
사단 전 병력이 좁은 산길에 뱀처럼 길게 배치된 취약한
상황에 있었다.


맨 뒤 고토리에 과달카날에서 맹렬한 전투 지휘로 유명했던
루이스
‘체스티’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 11연대가
후속하고 있었다


장진호반에서 고토리로 철수하는 미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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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 장진호 남단 넓은 개활지인 하갈우리에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해병 1사단 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좁은 협궤의 철로 종착역이다.

거기서부터 위로 올라가 강을 가로 막아 만든 긴 바늘 귀 같은
장진호가 있는데 장진호 좌안에 해병들 주력인
5연대와 7연대가
진격해 있었다.
리첸버그 대령이 통합 지휘를 했었다.


그리고 호수 건넌 장진호 우안 신흥리에는 미 육군 31연대
전투단이
전진해 있었다.

증강된 해병 1 사단을 공격하는 중공군 9병단 병력은
6만 명이나 되었다.

병단은 장진호에 들어온 긴 장사진의 해병 행렬을 따라 병력을
긴 포위망 형식으로 배치했다.


병단장 송 시륜[宋 時倫]은 유담리와 신훙리로 깊숙이 들어온
선두의 두 개 해병 연대와
우측의 육군 연대를 먼저 격멸하기로
하고  11월 27일 주력을 이곳에
집중해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신홍리 쪽 장진호 우안의 육군은 궤멸 되었지만
해병
두 개 연대는 중공군을 격퇴하고 하갈우리로 탈출해나갈
출구인 덕동 고개도 방어해 냈다.


비로소 해병대 사단 본부와 외부와 연결된 비상 활주로를
가지고 있는
하갈우리를 점령해서 해병들을 두 토막 내는 것이
옳다는 정보 판단을 한
송 시륜은 미약한 병력이 지키는
하갈우리를
전력을 다해 11월 28일 밤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갈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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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북쪽 유담리의 두 개 연대가 철수해서 하갈우리의
부대와
연계하기 전의 위급한 순간이었다.


스미스 장군은 후방 고토리의 11연대에 신속한 증원을 요청했다.
증원군은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는 산길을 16킬로나 통과해야
했다.

연대장 풀러 대령은 마침 전날 밤 후방으로부터 달려온
영국 해병대 병력을
주력으로 해병과 육군 병력으로서
병력 850명과 트럭 150여량,
그리고 탱크 1개 중대를
증원 부대를 구성, 11월 29일 아침 6시 30분에
고토리를
출발시켰다.


이 구원 특임 부대 이름은 영국 해병 지휘관 드리스데일 중령의
이름을 따서 드리스데일 부대라 임시 명명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 증원군 파견을 이미 예상하고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의 좁은 산길 좌우 산악에 대 병력을
새까맣게 깔아 놓고 대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중공군은 산길에 들어선 이 부대 선두의 트럭 한대를 격파시켜서
길을 막아 놓고 토막 난 부대를 낮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파상 공격을 했다.

다음날 몇 량의 전차를 중심으로 해서 소수의 병력이
살아 남아
하갈우리로 사단본부로 들어갔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이 지옥의 화염[Hellfire Valley]계곡 전투에서 섬멸되었다.


850명의 출발 인원 중 162명이 전사내지 실종되었고
절반이 넘는 450명이
포로가 되었다.


유담리의 해병 전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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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꾸로 방향을 돌려 고토리로 철수하다가
공격당한 부대도 있었다.

1 해병사단의 1전차 대대 B 중대였다.
장비는 M-26 퍼싱 탱크였다.


이미 출발한 드레스데일 특임 부대가 당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후방 고토리의
연대장 풀러 대령은 고토리
방어를 위해서 잔류했던
B중대의 2개 소대를 드레스데일
부대 구원을 위해 파견했다.


다른 앞 부대의 잔류 전차까지 합쳐서 12량의 퍼싱 전차와
이를 후속하는 20여량의 구난차, 유조차등등의 트럭들로
구성 된 긴급 구조 부대는 이미 석양이 지고 있는 오후
5시쯤 고토리를 출발했다.


하갈우리로 통하는 협궤 철도를 따라 철수하는 해병
-전방의 F4U 콜세어기가 투하하는 네이팜 공격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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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대에 중대장 윌리암 대위가 동행했었다.

이들이 8키로 쯤 가자 산산조각이 나서 길을 꽉 막고 있는
드레스데일
부대의 파괴 차량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


이런 상황에서 작전 임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중대장은
고토리로의 후퇴를 결심했다.

부대는 180도로 방향을 바꾸어 고토리로 향했다.

행군 방향이 거꾸로 되어 뒤에서 후속하던
트럭들이 이번에는 선두가 되었다.


중공군은 이 트럭들을 먼저 공격해서 역시
철수 부대의 후퇴
진행도 틀어막았다.
전차 부대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가 되었다.


9병단장 송 시륜 -대장정때 연대장을
했던 노병이었다.

모택동의 긴급지시로 11월 16일 장진호 주변에 전개를 끝낸
그는 11월 2일 장진호 입구 수동에서 해병들에게
섬멸당한 휘하 124 사단의 복수를 하겠다고 무리한 작전을 벌여
수만명의 중공군을 동장군의 먹이로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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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들은 어둠이 오는 속에서 방어진을 치고
밤새 벌떼처럼 몰려와서 공격하는 중공군들과 격전을 치렀다.


전차병들은 전차 위에까지 쇄도하는 중공군들을 상대로
혈투를 벌였다.


중공군들이 사격 후 즉각 전차 포구에 사격을 하는
대전차 전술을
구사한 것은 전투 초기였던 초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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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방어진을 친 곳은 하우갈리와 흥남을
연결하는 협궤도
철도 옆이었다.

철도는 도로보다 약간 낮은 위치에 있었다.
중공군이 포탄 발사 후 포구에 마구 사격을 해대는 대전차
전술을 구사했던 것을 전투 참가자 전차장 댄 베닛 하사가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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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 속에서 수많은 중공군이 철도 건너에 집결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철도와 우리 도로 사이에 농수로인 도랑이 있었다.이곳에도
중공군들이 잠복해있었다.


나는 포수 유진 멕과이어 병장에게 90mm 포신을 도로 아래로
지향하도록 내리고 철도변의 중공군에게 한방 먹이도록 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속에서 조준이 잘 안되어서 첫 발은
철도를
건너 건너편 산 사면을 후려쳤다.


나는 포수에게 조준을 더 낮추라고 지시했다.
조준 수정 후 두 번째 탄은 철로를 명중시켰다.

우리는 두 서 너 발을 계속 철로 옆에 흐르는 도랑에
숨은
중공군에게 날렸다.


계속 사격을 하며 전투 하고 있는 중에 믿을 수없는 일이 터졌다.
탄약수가 고폭탄 한 발을 약실에 장탄했는데 더 이상
들어가지도 않았고
다시 빼내려고 해도 빠지지를 않았다.

바로 어정쩡한 위치에서 포탄이 정지해버린 것이다.

탄약수 존 리렛 병장이 쩔쩔매자 베닛 하사가
폐쇄기 뒤에서 군화발로 포탄을 힘껏 내질렀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폐쇄기는 그대로 열린 채였다.



이런 포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베닛은
동료 전차의 승무원들을 구출해내는 전우애를
발휘해냈다.


중공군이 베닛의 앞 전차에 불을 지르자 전차장
스웨린거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탈춯해서 후방
수십 미터 뒤에 있던
베닛의 전차 밑으로 탈출했다.


전차 후미의 보병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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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중공군들은 전차를 맴돌며
치명타를 안길
기회를 노렸다.

탈출한 전차장 스웨린거가 베닛 전차 뒤에 장착된 보병 전화를 통해
구출을 요청하자 베닛은 전방 사수석 밑의 비상 탈출 해치를
열고 네 명의 차밑 은신 전차병들을
전차내로 구조해냈다.


장진호 전투에서 M-26전차뿐만 아니라 M4A3
전차도 많이 참전했었다. 하갈우리에서 진차창에
빠진 셔만 전차 구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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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상탈출 해치를 다시 주워 올려
재부착을 할 여유가 없었다.
[해치는 꼭 맨홀 뚜껑같이 생겼다.]


중공군 한명이 전차 위로 뛰어 올라와 탄약수 잠망
경을
권총으로 쏘고 전차 안에 사격을 가할 틈새를
찾았다.


중공군이 공축 기관총 바로 앞에 있었는데도 9명이
승차한
포탑 안은 숨도 쉬기 힘들 정도라서 이를 쏘지 못했다.


베닛의 전차는 급 발진과 급 정지의 과격한 기동으로
전차 위의 중공군을  떨어뜨려
위기에서 벗어났다.


전방 사수석 밑 비상 탈출구는 밤새 열려 있었다.

중공군들은 야간 전투 내내 베닛의 전차 밑이
해치가 없어
뻥 뚫려 있던 것을 몰랐었다.


만약 알았었다면 중공군의 수류탄 한발에 전차는
끝장이 났을 것이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 되었으나 전차 부대가 잘 방어 해냈고
새벽이 되자 중공군은 썰물처럼 물러갔다.

[증원 부대가 박살났음에도 하갈우리의 해병들은
 적 공격을 잘 싸워서 유담리의 해병이 철수했던
 12월 3일까지 사수해냈다.]

베닛은 중공군이 불을 질렀던 전차를 견인해서
다시 고토리로 돌아왔다.


그 전차의 후부 엔진실과 배기구 근처에 중공군이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으나 엔진의 전기 계통만 화재로 손상 되었을 뿐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다.


고토리에서 도착했던 베닛 하사는 싣고 온 부상병을 내려놓고
전투 초기에 약실을 틀어막고 꼼짝도 안하던 의혹의 90mm 탄을
제거해서 조사해 보기로 했다.


포신을 아래로 내리고 승무원 다섯 명이 달라붙어
포 꽂일 대로 밀어봤지만 포탄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갈우리의 비상 활주로에서 긴급후송되는 부상병
스미스 소장이 건설한 비상 비행장은 해병들의
성공적인 탈출에 지대한 굥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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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른 전차 포 꽂일 대를 빌려다가 연장 연결하여
이십여 명의 전 소대원이 이 긴 포 꽂일 대를 밀어대자
그 제야 포탄이 겨우 폐쇄기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상했던 포탄을 검사해보자 탄체에 박힌 두어 발의
중공군
따발총 실탄이 발견되었다.

장진중의 포탄이 요지부동을 했단 것은 두 가지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중공군이 발사한 실탄이 박히자 그 용량만큼 탄체가
팽창하여 포강 표면에 과도 밀착해버렸을 가능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중공군 실탄이 탄두와 포강내 표면사이에
들어 밖혀 단단한 쇄기 역할을 했던 것이리라.


간이 덜컹해진 베닛이 더 살펴보자 포신 안에서
두 세 발의 중공군의
실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M-26 전차 증공군이 노힉한 로케트 포에 당한
관통 부위가 포탑에 보인다.
차체 앞에 장착한 것은 비상탈출 해치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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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들은 그 아슬아슬 했던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간밤에 중공군들은 전차에 쇄도하여 전차 격파를
시도했었다.


어떤 중공군이 전차포 발사를 기다리고 있다가
포탄이 발사되자말자 낮게 내린 포구에 따발총을
들이대고 발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베닛의 포수가 90mm 포탄 장전이 1초만 늦었어도
중공군이 난사한 따발 총탄이 열린 폐쇄기를 통과해서
포탑 안을 휘저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운이 더 나빴다면 폐쇄기 뒤의 탄약수는 명중되었을 것이고
포탑 안에 마구 난비하는 실탄이 전차장이나 포수에게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정 떨어진 베닛을 그 손상된 포탄을 조심스럽게 가지고
나와서 고토리 옆을 흐르는
개천에 버렸다.


만약 따발총이 아닌 기관총의 예광탄이 포구 속에 발사되었더라면
90mm 포탄은 즉시 폭발해서 승무원들을 죽이고 적재 포탄의
유폭[誘爆]으로 전차는 대폭발을 했음이 틀림없다.



후에 베닛은 중공군 보병들이 전차에 육박 공격을 할 때
전차가 포탄을 발사 후 폐쇄기가 열려있는 짧은
순간에 포구에 실탄을 쏴 넣으면 포탑안의 전차병들을
살상시킬 수 있다는 대전차 공격 방법을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닛은 몇 십 년 뒤에도 진저리를 치며 회상했다.

“ 우리가 살아 남을 수있었던 이유는  우리 탄약수가
   조금 더 빨랐든가, 중공군이 조금 더
늦었던가 -- 아니면
   양쪽 다던가---
하여튼 우리는 운이 좋았습니다.“


빈약한 전투 자산에 막강한 미군 화력 앞에 내세울 것은
인명[人命]밖에 없었던 중공군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들어낸
고육지계[苦肉之計]가 이 지경까지도 갔던 것이다.


[나쁜 뜻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 중 국군이
 얼른 배워서 거꾸로 중공군에게 써 먹은 기발한 전술도 있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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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계곡의 까마귀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9.03 08:09
여순 사건 김지회의 최후 



수더분한 인상의 어린 여자가 높은 계급의 국군 장교들과 같이

같이 있는 사진이다.


옆의 정모를 쓴 장교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오고 만주군에서

군의관이 되었던 원 용덕 장군 이다.


해방 후 한국군으로 넘어 오면서 자기 주특기가 아닌
정규 군 쪽으로
돌아서 이 사진을 찍을 때는 호남 지구 토벌대의
사령관이었다.


왼쪽의 방풍 고글을 쓴 사람은 함 준호 대령이다.

6·25전쟁 발발과 동시 서울 북방 전선에서 적 전차포 사격에
전사했던 용맹한
장교다.


사진 속의 군복을 입은 여자는 보통의 여자가 아니다.

여순 반란 사건의 수괴 김 지회의 처 조 경순이다.


갓 20살의 제주도 비바리로서 전직 간호사였다.

그 녀가 일했던 광주의 도립 병원에 입원했었던 육군 중위
김지회와
사랑에 빠져 그의 처가 되었고 여순 반란 사건에
휘말려 들어간
비운의 여인이다.

여순 사건을 일으킨 14연대는 광주에 주둔했었던
4연대에서 갈라져 나온 부대라서 김 지회가 광주 도립 병원에
입원했었고  조 경순이 김 지회와 만나게 된 운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녀가 남로당 군사 총책 이 재복의 레포로
김 지회 포섭의 임무를 띄고 그에게 접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녀의 친지와 동료들은 이를 강력 부인한다.]


지리산에서 김지회와 빨치산 활동을 할 시기 항상 빨간 스웨터를

입고 다녀 언론에서 '빨간 스웨터의 공비 여두목'이라는 엽기적인

칭호를 받기도 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했다.

분명히 한 지아비의 아낙으로 평범하게 살아 갈 수도 있었을
간호사가
하필이면 국군 역사에서 오점을 찍은 군 반란 주모자

김지회와 인연을 맺어 그를 따라 빨치산이 된 것이다.


그 녀는 국군의 기습에 남편과 헤어져 산간을
헤매다가 체포 되었다.


1948년 10월19일 밤.

제주도 반군 토벌을 위해 여수에서 승선을 준비하던

14연대 소속 지 창수 상사 지휘하는 좌익 병사 40여명들이
간부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감언이설과 선동으로 부대 장악 뒤 신분을 노출한 김지회[
중위 -육사 3기]가 반란군의
총 지휘자가 되고 2개 대대의
병력을 몰고 여수 시내로 쏟아져 나가 지
방 좌익분자 600명과
함께 경찰관 가족과 양민들 400여명을 학살했다.


이들 반도들의 일부가 다음날 아침 09:30 기차를 탈취하여

순천으로 북상했다.

미리 연락이 있었던 순천 주둔 홍 순석 중위
[육사 3기 - 김지회와 동기]가
반란에 동참하여 이곳 순천에서도
경찰 400명을 포함한
500여명을 살해하는 무참한 학살이 이어졌다.


정부는 즉시 토벌군을 조직해서 이들을 제압하며 반란 9일 만에

여수를 해방시켰다.

반란군들은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지리산 토착 공비들과
합류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 기세는 얼마 가지 못했다.

11월 8일 구례에서 백 인엽 중령이 지휘하는 9연대를
야간 기습을 했다가
대패를 하고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 되었다.


이 전투 중에 김지회의 처 조 경순이 도주하면서 잃어버린
핸드백이 발견되었다.

패주한 김 지회 부대는 지리산에 잠적하여 약탈 행각을
계속하며
겨울을 났다.


봄이 되자 군은 토벌작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49년 3월1일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고 사령관에

정일권 준장이 임명되었다.


김지회 홍순석 일당은 화개장터에서 토벌군의 군의 9연대 3대대를

기습해서 토벌대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으나 3월 11일부터 시작된

대 토벌 작전으로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이 좁혀가자 이들 주력
500명은 지리산을 빠져나가 일로 북상하여

덕유산으로 이동 하였다.


이 때부터 이 작전지역을 담당했던 한 웅진 대위의 3연대
3대대가
토벌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3 대대장 한 웅진 대위. 육군 소장으로 예편,
박 정희 장군과 친하게 지냈었다.
--------------------------------------


홍 순석은 별도의 부대로서 거창쪽으로 이동해서 위천, 북상,

지서들을 습격해서 국군 토벌대의 주력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쓰면서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공비들은 산악을 타면서 하루 56킬로 이상을 기동하는
도피 기술을 발휘해서 토벌 군에게 좀체 꼬리를
잡히지 않았는데 이 위천 지서 습격으로 행방이 들어났다.

한 웅진 대대는 수색의 방향을 덕유산으로 바꾸어
토벌의 압력을 가중했다.

3월 28일부터 덕유산에 집중된 국군이 포위망이 좁혀들자

이들은 일부 부대로서 거창을 습격하는 양동 작전을 쓰면서 다시
지리산으로 복귀하다가 4월4일 지리산 북쪽 괘관산[1251 미터]
북쪽 천전동에서  한 웅진 대대에게
포착되었다.

적 병력은 약 100여명으로 추측되었다.
대대는 박격포 화력을 반란군에게 가해서
큰 타격을 주고 여러곳으로 분산 도주하게 하였다.

이 계관산 전투가 김지회 홍 순석 부대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결전장이 되었다.


이후 김 지회 홍 순석 부대는 작은 소부대로 분산되어 대부대로서의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로 도피를 계속하였다.


콩가루같이 흩어져 지리산으로 도주하던 김지회 홍순석의 지휘부는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서 정보망의 거미줄을 친 국군에게 다시
걸려들었다.


 

 

작전개요도- 하단에 김지회가 죽고 조경순이 체포된
반선리와 달궁 부락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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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웅진 대위가 지휘하던 3연대 3대대 정보과 선임 하사관

김 갑순 상사는
4월 8일 과원 두 명을 대동하고 산내면 반선리에
들어가 이 마을 주막
여주인에게 물었다.
" 여기 반란군이 온 일은 없었습니까?"
여주인은 미남인 김갑순 상사에게 호감을 보이며 대답했다.
" 가끔 와요."

김 상사는 화장품을 건네주고,

“그들이 오면 요구하면 밥과 술을

  다 제공해주고 가능하면 재우십시오. 
  그들이 잠이 들면 입석리 3대대 본부로 
알려 주기 바랍니다.
  나중에 후사하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줄기차게 김지회 일당을 추적하던 3대대는
반선리에서 6킬로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동해서 야영 중이었다.


반선리는 20여 호의 민가가 있는 작은 부락이었다.

김 갑순 상사의 부탁에 주모는 새겨들었던 모양이다.


다음날 4월 9일 새벽, 00:30에 대대 본부에 반선리 부락 청년

단장이 달려와 주막에 공비 30여명이 나타나 술과 밥을 먹고

잠들어 있다고 신고했다.


대대는 즉시 출동 가능한 대대 본부 요원 60명을 트럭과 쓰리쿼터
2 대에
분승시키고 달려갔다.


주막에서 주린 배에 밥과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김 지회 일당은

트럭의 엔진 소리를 듣고서야 깨어나  허둥지둥 도주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트럭의 토벌군은  달려오면서  도주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더구나 달빛까지 훤해서 공비 일당은 멀리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비명을 지르고 자빠져 나갔다.


이 반선리 전투에서 홍 순석과 정치부장, 후방 부장등 김 지회 부대

수뇌부중 17명이 죽고 문화부장을 위시해서 7명이 생포되었다.


순천에서 반란을 주도했던 홍 순석은 농구화에 토끼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고 있었으며 홍 순석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분을
쉽게 확인 할 수 있었다.


생포된 자들은 김 지회와 그의 처 조 경순이 자신들과 같이
기습현장에 있었다고 했으나
두 부부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3대대는 일대에 병력을 투입하여 며칠간 김 지회 부부를 계속
수색했지만
부부의 행적은 묘연하였다.


그러던중 4월 13일 반선리에서 5킬로 남서쪽으로 떨어져
지리산에 
더 가까운 덕동리 달궁 부락에서 여자 한 명이 낀 수명의

공비 일당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갑순 상사는 2 명의 과원을 데리고 그 마을로 들어가서
잠복했다가
일당을 사로잡았다.


소문대로 빨간 스웨터를 입고 있은 여자는
김 지회의 처 조 경순이었다.


김 상사가 조경순을 심문했지만 조 경순도 반선리에서 기습을
받은 뒤
김 지회와 헤어져 그를 찾아 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김상사는 이 자백에 김지회가 부상을 입고 도주 하다가
반선리 인근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들었다.


반선리 전적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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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순 상사는 주민들에게 근처에서 까마귀가 몰려

다니는 곳이 있는지를 탐문 수사했다.

주민들은 인근 연장리 골짜기에서 까마귀 떼가 몰린다고
귀뜸해주었다.

이에 부근을 수색했던바 반선리 주막에서 600미터 떨어진
후미진 곳에서
까마귀에게 심하게 훼손된 시체 1구를 찾아냈다.


너무 훼손이 심해서 신원 확인도 불가능했다.

이 시체를 조 경순에게 보여주니 조 경순만이 그를 알아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김 지회의 등에는 화개장터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상처가
있었는데
이를 조 경순만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김 지회는 반선리 기습에서 총상을 입고 사력을 다해
여기까지
도주 해 와서 죽었다.


이렇게 해서 김 지회 홍 순석 두 육사 동기생은 야망을 품고

내지른 반란의 불장난을 6 개월 만에 허망하게 끝내야 했다.


3대대는 전원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입었다.

공이 큰 김 갑순 상사는 특별 훈장 수여와 함께 상금 백만원이
지급되었다.



여담이지만 남은 공비 잔당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를 신고해서

죽게 만든
반선리 주막 여주인을 그냥 두지 않았다.


주막 여주인의 최후는 이 태 지음 ‘남부군’에도 소개되어있다.

여주인은 무참히 살해당하고 주막집은 불태워진 뒤 파괴 되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에 대한 사진은커녕 그들의 간단한 약력 정도도

구할 수가 없다.

국군 역사의 치욕이라는 여순반란 사건의 주모자인 두 사람의

관련 자료는 모두 폐기 된 것 같다.


단지 주모자 김 지회가 함흥고보 졸업생으로 북한 강동 정치학원
[ 대남 침투 훈련기관] 출신이고 시조 시인 이 은상씨의 추천을 받고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했다는 자료만 발견할 수가 있었다. 

칼 맑스가 놓아준 무지개 다리를 타고 오르는 모택동이나
김 일성을 보고
무산자 혁명이라는 무지개 자락을 잡으려 하다가
무참히 까마귀의
밥이 되고 거의 잊혀진 김 지회나 홍 순석과는
그들의 생전에는 꿈꾸기도 싫은 최후였을 것이다.


여순 반란 사건은 대폭적인 숙군[肅軍]의 도화선에 불을 질렀다.

일본군 헌병대 오장 [하사]출신 김창룡의 공산당 소탕은

무자비하고 철저했다.

여순 사건의 발발은 아직도 국군 내부에 발
붙이고 있던 좌익들을 소탕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숙군의 개시와 함께 남한 공산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는
정부의 노력은 계속되어 김 지회 시체가 발견되고
며칠 뒤인 49년 4월 18일 공비 토벌을 위한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가 설치되고 정 일권 소장아 부임했다.

토벌은  다음 해 1950년 1월 15일 지리산 지구가
해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계속된 토벌에  남부의 공산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다고 판단한
정부는  1950년 2월 5일 호남 지역의 계엄을 해제하였다.
여순 사건이 발발한지 실로 1년 3개월만이었다.

해방후 이데오르기의 혼란 속에서 잘못된 꿈을 꾸었던 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체 게바라와 같은 이상가들이 이렇게

자신도 파멸하고 가족도 파멸하고 죄 없는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만 주고 비명 속에 죽어갔다.


글 앞 머리에 나온 조 경순의 최후는 ?

그녀는 1949년 사형을 선고 받고 9월에 처형되었다.

아직 소녀티도 못 벗은 비바리, 그 녀의 죽음은 남편 김 지회의

죽음과 달리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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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야나 2010.09.14 19: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순반란사건은 일면 대한민국을 구원한 사건이기도 하지요....여순반란사건으로 인해 숙군을 통하여 군내부의 좌익을 모두 축출할수 있었읍니다.....만약 군내부 숙군이 없이 6 25가 터졌다면 박헌영의 말대로 남한 군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났을거고 유엔군참전전에 대한민국은 끝장났을지도 모릅니다....역사란 참 아이러니하지요?

  2. chaffee2080 2010.09.18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 울프독이 자기 블로그에 글쓰기를 막아놨네요. 그럼 뭐 이제 여기서나 건건히 평을 달아드리리다. 사람을 잘못본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글쓰기 막기와 블로그 차단이라. 후후 어디 봅시다. 옹졸하고 비루하네요.... 까마귀같이.

  3. 이기자 2010.12.31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제 제2의 김창룡이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사회 온갖 곳에; 숨어있는 프락치들, 아니 일부 놈들은 공공연히 대놓고 씨부려대고 있지. 정치권, 가짜 성직자놈들...

  4. homeownerinsurance and pittbull ownership 2012.05.26 1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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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florida home insurance 2012.05.26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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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calculator 2012.06.07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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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Chat Random 2013.04.03 01: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한군은 아군의 핵심방어선인 캔사스선과 후방

  8. rc helicopters 2013.04.25 15: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로 전하던 신념은 후세에도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비극적 전쟁에서 우리와 함께 싸워준 미군은 그 당시에도 저희에게 힘을 주었다는게

  9. chatrandom 2013.04.27 05: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순 사건을 일으킨 14연대는 광주에 주둔했었던
    4연대에서 갈라져 나온 부대라서 김 지회가 광주 도립 병원에
    입원했었고 조 경순이 김 지회와 만나게 된 운명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0. Bookmark Access 2013.05.11 0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을 통하여 군내부의 좌익을 모두 축출할수 있었읍니다.....만약 군내부 숙군이 없이 6 25가 터졌다면 박헌영의 말대로 남한 군내부에서 봉기가 일.

미 해병들의 횡재 - 장진호 목재소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8.20 08:52

 


6·25전쟁중 변변치 못한 군용품들이었지만 공산군의 일부

군용품중 한국군과 UN 군 사이에 인기를 끌던 노획품들이

있었다. 


소제 TT 권총이 한국군뿐만 아니라 UN군 장병 사이에

제일 인기가 있었고 따발총도 인기 노획품이었다.


미군들도 중공군의 큼직한 야전삽을  즐겨 사용되었고

국군들 사이에 그들의 튼튼하게 만든 농구화도 인기가 있었다.

인천 상륙 성공직 후 맥아더의 축하를 받는 미 1 해병 사단의
스미스 소장 -  빈  권총집이 말해주듯 그는 속기사 자격증도
있는 온건한 학구파였다.그러나 인천과 장진호 전역에서
어느 맹장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용맹한 지휘를 했다.
----------------------------------------------------

그런 노획품 중에 대단히 특징 있는 것이 있었다.

미 해병들이 장진호반 아래 하갈우리에서 노획한 산판 제재소와

엄청난 양의 벌채된 통나무였다.

이 원목들은 장진호 일대의 원시림에서 벌채 된 것이었다.


다른 전투 상황이었다면 이 통나무들은 미 해병들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50년 겨울, 혹독한 추위가 몰려온 이 고원지대에서

미 해병들은 이 통나무들을 모두 제재소에서 가공해서
정말 요긴하게 잘 활용했다.


하갈우리
---------

어떻게 통나무들이 그렇게 잘 활용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아보자.


6·25전쟁에 8월부터 참전한 미 해병 제 1사단은 과달카날과

유황도에서 극악하게 저항하는 일본군들을 격멸하고 섬들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운 미 최 정예 보병 사단이었다.


6·25전쟁 개전한달 만에 한국으로 파병되어 낙동강 전선의

위기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월에는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 탈환의 영웅적 주인공이 된다.

이 사단은 서울 탈환 후 다시 동해안으로 이동하여

흥남을 거쳐 장진호로 향하게 된다.


해병 1사단은 배속된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이 구상한대로

한반도 북방을 동서로 가로질러 동쪽 평안북도에서 북상중인

미 1 기병사단과 상봉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한반도의 북쪽을 양단하는 작전이었던 만큼 잘만 되었으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 참전을 결정한 중공군이 이미 10월 16일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쪽 워커 장군의 8군과 동쪽의 아몬드
10군단 사이 80마일
공간을 파고 들어 잠복하고 있었고 그 뒤로도
추가 병력이 계속 후속해서 증파 되고 있었다.


즉 1 해병 사단은 둥지를 틀고 있던 적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작전을 수행하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제대로 정보 수집과 판단도 하지 않고 대 전략을 구상했던

아몬드의 실수였다.


해병의 작전을 간파한 모택동이 움직였다.

그는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송 시륜의 6병단에게 UN군의

한반도 북부 절단을 거부하는 대작전을 개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6병단은 동계 장구도 제대로 못 한 채 급히 한반도로 출동했다.

[이 결과로 수없는 동사자와 동상자가 생겨서 병단은 전투력을

 잃은 폐병단이 되어 다시 몇 개월간 다시 부대 편성을 해야했다.]


그러나 미 해병 1사단은 50년 11월 초 흥남에서 장진호로 향하는

길목인 수동에서 송시륜  휘하 중공군 124사단과 초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서부 전선의 군우리에서 미 육군이  중공군에게 대패했던 것과

대조가 되었다.

이것은 전체 중공군의 첫 한반도 참전 대패였다.

패전한 중공군 124사장 위치량
---------------------------


그러나 장진호반으로 들어갈수록 저돌적인 아몬드 장군과는

다르게
1 해병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전방에 대군의 중공군이

증강되어 대기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아몬드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전진속도를 최대한 지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 해병의 5및 7의 두 개 연대가 산맥과
장진호반의 좁은 사이인
유담리로 들어갔고 배속된 육군 7사
31연대는  비슷한 지형의 호수 건너
풍구리로 들어갔다.


뒤에서 후속하던  미 11 해병  연대는 고토리를 통과 중이었다.

호수 제방 남쪽 하갈우리에 도착한 이 시점에 스미스 장군은

결과에서 입증된 정확한 결단을 했다.


유담리와 신흥리의 해병과 육군 연대에게 전진을 최소한
늦추고
근처 고지를 점령하게하고 넓은 하갈우리에 비행장을

만들게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해병들은  하갈우리 근처 고지를 점령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여차하면 해병 사단이 모두 철수해야할 비상상황에
만반의 대비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몬드의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전방에 정찰을 계속

실시하며 상황의 눈치를 보았다.

적정은 날로 우려스러워졌다.


날씨는 엄청나게 추워져서 땅이 돌처럼 굳어졌다.

활주로를 밀고 있던 불도저의 날이 상해서 예비 날을 용접하여

사용하여야 했다.


하갈우리에는 함흥으로 이어지는 좁은 협궤  철도가
들어와 있다.


이것은 일제가 장진호 부근의 울창한 산림을 벌채해서

운반해내던 철도였다.


용의주도한 준비에는 하갈우리에 많은 시설 건설이

필요하였다.건축 자재도 필요했다.


이 모든 자재를 흥남에서 좁은 길로 운반해 오려면

수송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이 길은 중공군에 의해서 차단되고 오직 급히 건설한
비상 비행장만이  외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비행기로 목재를 운반하는 것은 낭비적인

짓이었다.


이 순간에 해병들이 철도의 옆에서 발견한 제재소와

산더미 같은 통나무 원목은 해병대의 행운이었다.


해병 건설 공병들은 대원을 파견해서 제재소를

다시 가동하고 통나무를 제재하기 시작했다.

그 산더미 같은 원목을 다 제재해서 가공하기에 며칠이 걸렸다.


한편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토막 낼 포위망을 형성한

중공군 제 9 병단 6만 명의 지휘관 송 시륜은 드디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초전의 수동 전투 패배에서  체면을 깎이고
악에 바쳐 있었다.


6병단장 송 시륜
-------------------


11월 27일 중공군의 주력[6만명의 병력중 5만 병력]은 유담리에

들어간 최선두의 미 해병
두 개 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고지를 선점했던 해병들은 잘 싸워서 이들의
공격을 무산시키고 큰 피해를 주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출현한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에 놀란 해병은
시급한 철수를 결정했다.

유담리의 공세에서 실패한 송 시륜은  비로서 상황을 파악하고
공격 방향을 돌려 호수 건너 신흥리의  육군 7사단 31연대와
하갈우리의 해병사단 본부도 공격했다. 


육군 31사는 고전했지만 하갈우리의 해병들은 중공군을
격퇴해냈다.


유담리 구호소의 해병 부상자들 -상당수가 동상환자였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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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이 난 송시륜은 한국 참전 최초의 인해전술까지

써가며 맹공격했으나 
하갈우리를 점령할 수는 없었다.

최초에 하갈우리의 병력과 전투력을 얕보고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장진호 산길에 길게 배치된  해병들의 부대에서

사단 본부가 위치한 하갈우리가 전략적으로 제일 중요했었고

또 제일 허술하게 방어되고 있었는데 송 시륜은 큰 작전 실수를

했다고 하겠다.

이곳을 집중해서 쳤다면 해병의 사단본부는 섬멸되고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인 비상 비행장을 잃고 사단은
3분되어 그 운명을 짐작하기가 곤란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집을 세우던 아몬드는 상황을 뒤늦게 파악하고 해병들에게

이미 총 퇴각 명령을 내려 놨던 터였다.


철수하는 해병대가 전방의 항공 폭격을 지켜보고 있다.
하갈우리로 통하는 협궤 철도가 바로 아래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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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 유담리의 2개 해병 연대가 무사히 철수해서 하갈우리로

돌아오게 되면 혹독한 추위 속에 이들을 단 며칠이라도 따뜻하게

수용할 숙소가 필요하다.
그들은 전투와 추위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엄청난 수의 텐트를 건립해야 했다.


하갈우리 여기저기 안전한 곳에 텐트촌에 건설되었다.

이 텐트 촌  건설에도 목재가 필요했다.

미군의 크고 작은 텐트들은 지주목(支柱木)이 필요했고
그 양은 막대했다.

북한이 해병들에게 선사하고 떠난 통나무 원목은 대부분
지주목으로
가공되었다.


한국전중 미군 텐트 촌 - 군용 텐트는 여러형이 있었으나
모두 지주목이 있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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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결국 유담리 쪽의 해병 2개 연대는 적의 봉쇄를 깨고

무사히
장진호 동쪽 하갈우리 사단  본부로 철수할 수가 있었다.


호수 오른쪽 신흥리로 전진했던 육군 7사단 31연대는 산산조각이

나서 연대장과 연대장 대리가 전사하고 연대기를 빼앗기는

대패를 했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병력이 호수 얼음을 통해 탈출해

왔다.



유담리의 해병들
---------------


유담리의 해병들은 덕동고개를 넘어 하갈우리로 진군해

들어올 때 해병대 찬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12,000명이었다.


전방의 병력이 합류한 하갈우리 사단본부의 병력은
20,000명이 가까웠다.
텐트촌의 크기도 엄청나게 컸다.

하갈우리에서 발견한 제재소와 통나무들이 이 엄혹한

시기에 나타나 준 것은 해병들의 큰 행운이라 하겠다.

2차 세계 대전 때의 모로코 전선의 미군  천막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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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와 추위에 지친 해병들은 북한 정권의 선물로 세운

따뜻한 텐트 안에서 뜨거운 식사와 휴식을 즐겼다.


환자들은 역시 긴급 치료를 받고 비상 비행장을

왕래하는 수송기를 타고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미 해병들의 천막은 다양해서 이런 원추 모양의 중소형 천막도
다량 설치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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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격렬한 전투를 겪었지만 하갈우리의 해병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주변 산악의 중공군들에게 겹겹이 포위당한

그들이지만 부대에 믿기 힘든 루머가 떠돌았다.


루머는 해병들이 하갈우리에서 두어 달 시간을 보내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트루만이 핵무기로 한국 참전

중공군들을 쓸어버리고 다시 국경 쪽으로 진격해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한다는 루머였다.


겹겹이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그만큼 해병들의 자신감과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루머는 함흥평야로 철수할 때까지도 끈질기게 떠돌다가

흥남 철수가 결정된 것을 알게 된 뒤에야 사라졌다.


해병들은 중상자들을 후송시키고 휴식과 정비를 한 다음

적 차단을 뚫고 고토리로 철수했다.

고토리의 해병11연대와 합류해서 사단 일체가 된 해병들은

이제 겁날 것이 없었다.


중공군은 계속 평북 군우리나 운산 같은 골짜기 기습을 노렸지만

해병들은 모두 극복하고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장진호 입구]의

차단한 중공군도 격멸해 버리고 죽음의 함정을 탈출해 나갔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해병들이 고토리 좁은 산길로 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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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지 않아하는 해병들을 대군의 적병들이 잠복한 위험한

산길로 몰아넣었던 10군단장 아몬드는 해병들이 엄청난 병력에게

포위 된 사실을 알게 되자 모든 장비를 모두 버리고 신속히

해안으로 탈출하라고 지시했었다.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중공군의 거센 공세를

맞받아치면서 모든 장비는 물론 전사자의 사체까지 모두

운구해 가지고 철수했다.


하갈우리에서 제재한 텐트 지주목도 모두 가지고 나와

흥남에서 다시 텐트촌을 만들고 승선을 대기할 때 다시 요긴하게

썼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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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is be 2010.08.22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병특수수색대출신의50대입니다. 감동적으로 글 잘 읽었습니다. 한번해병은 영원한해병

  2. 시라소닉 2010.08.25 04: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과 목재와는 거리가 멀거라 생각했는데 엄청 요긴하게 쓰였네요...
    글과 함께 실린 사진 덕분에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3. Amoled 2010.09.17 10: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울프독 님은 퍼싱이라는 분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블로그에서 엄청나게 비난하고 싸우시던데. 연유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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