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0.08.13 전멸한 북 사이드카 부대 (7)
  2. 2010.06.21 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7)
  3. 2010.04.30 밤의 死神, B-26 폭격기 (4)

전멸한 북 사이드카 부대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8.13 13:41

태평양 전사를 읽다 보면 마리아나 군도(群島) 칠면조 사냥
-Marianas Turkey Shoot.-이라는
낯선 단어가 나온다.


1944년 6월 19일 20일 간 사이판 섬  상륙작전을 실행하던

미 스프루언스 제독의  미 기동함대에 도전했던 
일 오자와 제독의 일본 항모가
세 척이나 침몰당하고 함재기가
600기나 격추당한 해전을 미 해군들이
부르는 속칭이다.

정식 명칭은 필리핀 해 해전이다.


숙련 조종사들을 거의 다 잃은 일본 해군이 급히 양성하여
구식 항공기에 태워 출격시킨
미숙한 신참 조종사들은 훈련도
잘 받고 신형 전투기를 조종하는
미 해군 조종사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필리핀 해 재전에서 필사적으로 미 해군기의 뇌격과 폭격을 피하는
일본 전투함들.- 오른쪽 가까이는 중순양함 조카이, 아니면 마야
이고 더 먼 곳의 회피 기동을 하는 것은 항모 지요다이다.
잘 보면 왼쪽에서 달려가는  어뢰들의  두 줄 흔적이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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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 사냥이라는 것이 한국 언어 정서에는 없는 소리지만 이를

'파리 떼 두들겨 잡기' 정도로 해석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6·25 전쟁에서도 그런 칠면조 사냥이라는 별명이 붙은 전투가 있었다.

해상이 아니라 육상이었고 파괴 대상이 함재기가 아니라

모터 사이클과 트럭, 짚차등 차량이었지만 공격후 수 킬로에 널 부러진

그 잔해가 마치 칠면조 사냥을 연상케 헤서 이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고성의 칠면조 사냥이다.[Kosong turkey shoot,]


1950년 6월 25일 불의의 기습을 감행했던 북한군은 사흘 뒤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좌익들이 동원한 서울 시민의 강제 환영을 받으며

서울시가 행진을 했다. 

행렬 중신에 105전차 여단의 T-34 탱크와 함께 긴 장사진을 친
모터 사이클
부대가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전쟁 기념관의 모터 사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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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들이 사이드 카 부대라고 부른 이 부대는  적 105전차

여단 소속 83기계화 보병연대였다.


이들의 주력은 중국 인민 해방군 47군 소속이었던 조선족
부대였다.
47군 소속 조선족이 모두 차출하여
북한에 보내진 5,400 명중
1,000명이 105전차 여단의 83기계화 
보병 연대에 편입되어
주력이 되었던 것이다. 



북한 105 전차 여단- 서울 점령후 사단으로 승격- 소속 T-34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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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기계화 연대는 북한군들에게 사이드 카 부대로 불렸다.]

서울 입성 후 시가행진에서 위풍당당하게 굴러 가던

이 정예 부대는 그로부터 40일 뒤에 서울에서 한참을 남해안

고성 서방에서 전멸을 당해 그 기계화 부대라는 간판을 내려야 했다.



좌익들이 조직한 환영 인파 사이를 당당히 행진하는 서울 점령
북한군- 이들중 몇 명이나 살아 돌아  갔는지 궁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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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초.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은 낙동강 교두보라는 한반도 일각에
몰려 버렸다.

비록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새로운 병력과 보급품들이

계속 밀려오고 있었지만 공격의 이니시어티브를 잡은 북한군의
공세는
거세기만 했다.


부산 교두보 확보에 불길한 적신호가 발령된 것은 서부 전선에서

국군 1사단과 잠깐 대결하고 한강 하구 쪽을 도강했던
방 호산 소장의
북한군 6사단이었다.

[한국군 1사단과 정면 대결 했던 북한군은 최 광이 지휘하는

 북한군 1사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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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호산은 1913년 함경도 출신으로  공산계 항일  무장 투쟁의
경력이 깊다 .모스크바 유학 경험이 있어서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방 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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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6·25전쟁 초기 전투지휘를 높이 평가한 중국의 전사가들은
그를 항미원조 전쟁[6·25전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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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사단은  문자 그대로 바람 같은 기동력을 발휘하여

서해안을 따라 급거 남진했다.

호남 지방을 관통하고 남해안에 도달하자 그대로 좌로 방향을
틀어  
섬진강을 건너서 낙동강 교두보의 측면에 나타났다.


워커 중장에게 이 부대의 측면 출현은 심야에 도끼를 든 도둑이

옆 울타리를 뜯고 나타난 것과 같았다.


놀란 미8군은 북 6사단을 격퇴하기 위해서 19 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19연대에 배속된 29연대는 2대대는 7월 22일 하동고개에서

북한군의 매복에 걸려  35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대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전임 채병덕 참모총장이 전사했다.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미군의 자문역으로
백의종군했었다.


여세는 몰은 6사단은 7월31일 진주를 점령했다.

마산의 점령은 시간문제였다.

측면에 나타난 적이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부대라는 것을

알게 된 워커는 막강한 반격부대를 구성했다.


미 25사단과 본토에서 도착한 5전투단[RCT] 그리고 긴급히

한국으로 출동한 미 해병 1여단이었다.


낙동강 교두보의 서부에 나타난 북 6사단을 구축하고 잃은 땅을

회복할 임무를 부여받은 부대는 미 25사단장 킨 소장의 이름을

따서 킨 태스크 포스[TF]라고 명명되었다.



우측 창원으로 부터 공격을 개시한 미 해병은 남쪽 축선을 따라
고성으로 진격했다.- 최종 목표는 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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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을 향한 반격은 8월 6일부터 개시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의 전사에는 이 쪽 공격을 담당한 부대가 방 호산의

6사단뿐이었다고만 하지만 실상은 북 105여단의 83기계화 연대와

북 5사단 병력이 증파되었었다. - 뒤에 말한다-


사흘간 이들을 산과 계곡에 들어 밖여 저항하는 이들을
분쇄하고
전진을 하기 전에 사흘이나 소비해야 했다.

북한군은 마산 진동리 일대의 적을 소탕하고 서쪽의 진주를
향하여
전진해  갔다.


이 이야기는 서쪽을 향해 전진하던  해병 1여단의 정예 5연대가

8월 10일 공격 방향을 남으로 돌려 고성을 공격했을 때 발생했다.


해병들이 낮은 구릉과 논이 많은 고성 북쪽을 향해 진격하자
적들은
지형을 이용해서 반격해왔다.

그러나 해병들은 고성으로 들어가는 남행 도로가 스쳐가는

대다복 고개를 성공적으로 돌파했다.


고성 못 미처 지역에서 충분한 경계 태세로 한밤을 지센 해병들은

다음날 8월 11일 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해온

북한군과 격렬한 전투를 한 차례 치러 이들을 물리치고

다시 얼마 멀지 않은 고성을 향해 진격했다.


북한군은 47mm 일본군  속사포까지 잠복 해놓고
해병들을 포격했다.

한 해병 장교의 짚 차가 이 포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속사포는 뒤에서 후속하던 전차까지 공격하다가 전차포의
반격으로
파괴되었다.



일본제 1 식 47mm 속사포 [대 전차포]. 남양전선에서 활약.
북한군이 이것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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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앞세운 해병들이 북쪽에서 무섭게 밀고 들어오고 해병대의

포병 포화까지 집중하던 점심 무렵에 고성의 북한군의 기계화 부대는

전 부대 이동 장비를 몰고서 서쪽 사천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트럭과 짚 차 그리고 모터 사이클들은 모두 동원되었다.

그 긴 행군 장경[長徑]은 무려 수 킬로미터나 되었다.

그들이 달리는 곳은 비포장 도로였고 뜨거운 태양에

바짝 마른 도로의 먼지는 자욱하게 상공을 가렸다.

인근 상공 어디서나 발견되는 대부대의 이동이었다.

이 부대는 앞에서 소개했던 105 전차 사단의 83기계화 보병연대였다.


이 무렵 105 전차 사단은 낙동강 북쪽에 있었다.

유엔군의 서쪽 측면이 의외로 쉽게 뚫리자 북한군 전선 사령부

[충북 수안보 위치]가 83연대를 따로 떼어서 서쪽으로 급파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83기계화 보병 연대는 원칙으로 보면 북쪽에서 육박해 들어오는

해병들의 기세를 판단하고 그 전날 야음을 틈타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해병들이 고성읍을 점령하기 일보 직전에야 보따리를 싸서

허겁지겁 도망 길에 오른 것은 북한군 상부의 융통성 없는
사수 명령에
시간을 보내다가 늦게야 철수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콜세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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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대의 각종 전투 장비가 수 킬로 뿌연 먼지를 날리며

도로를 달리는
것을 북한군은 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해상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해병 VMF-323 전투 비행단 소속 F4U
콜세어 기 편대를 놓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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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병 비행단은 지금 F/A 18로 장비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미라마의
해병 항공대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


고성 공습의 수훈 부대 해병 항공대 VMF-323 부대의 현재 전투기
F/A -18 호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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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세어 기들은 먹이를 본 독수리처럼 이 먼지 속으로 급강하했다.

공격은 행렬 선두 차량에 집중되었다.

선두 차량이 파괴되면 행렬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선두 차량에 이어 맨 후미 차량도 첫 번 공격의 대상이었다.


차량 행군 대열을 앞뒤로 막아버린 콜세어들은 20mm 기관포와

로케트 포탄으로 북한군 표적들을 무자비하게 타격하기 시작했다.

도로 양쪽은 논이었다.

차량이건 모터 사이클이건 바퀴 달린 것이 도망 갈 곳은 없었다.



콜세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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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북한군들에게 검고 괴상하게 생긴 콜세어 기는

생긴 것부터가 두려운 존재였다.
이  괴물이 폭음도 요란하게 날아오며 기총소사를 하자
북한병들은 질겁을 하고 
논으로 튀어 흩어졌다.

100여량의 장비중 온전하게 남아있는 차량도 없었지만
북한군도 200여명이나
격멸되었다.


도로는 금방 검게 탄 차량의 연기와 파편과 죽은 시체로 가득 찼다.

고성을 점령하고 금방 현장으로 달려온 해병들은 행군을 가로막는

파괴 차량들을 도저 전차로 밀어 내면서 그날로
사천 남방 장천까지 전진했다.



북한 83 기계화 보병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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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콜세어 기중에 한 기가 저공으로 기총소사를 하다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산언덕과 박치기 하여
조종사 한 명이 전사하였다.


지상에서 맞대응한 기관총에 맞았는지 기체 고장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 참전 해병 조종사에서 최초의 전사자이다.


몇 십 분에  걸친 항공 공격으로 득의만만하게 서울 입성의
시가행진을 하던
  83 기계화 보병 연대는 사실상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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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습에서 한 작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 해병대의 L-19 연락기를 조종하던 허버트 바렌타인 상사는

이 죽음의 함정에서 탈출했거나 먼저 출발했던  북한군 짚차
한 대가
행열의 훨씬 앞서
사천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는 것을
발견했다.


해병 정찰기 OY .-육군 명 L-19로서  나중에 0-1 버드 독으로
불렸다. 미 세스나 회사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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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짚 차에는 운전병과 고급 장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뒷 좌석에 타고 있었다.


그 짚차 한 대 잡자고 바쁘게 적 차량과 모터 사이클 들을
부수고 있는
콜세어 기를 부를 수는 없었다.


그와 뒷좌석에 탑승하고 있던 포병 관측장교 패트릭 시버트 중위와

둘 다  장비하고  있던 38구경 리볼버로 이들을 공습하기로 했다.

몇 차례나 저공비행을 하면서 두 사람은 북한군 짚의 승차인간들에게
권총 사격을 했지만 짚 차는 그저 정신없이 달리기만 하였다.


대상이 무장하지 않은 경비행기인 것을 안 북한군은 계속  

달리면서 권총으로 대응했다.


두 어 번의 공습이 실패로 끝나고  실탄도 남지 않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보기로 하였다.

경비행기가 다시 저공으로 접근하자 운전병은 매번 하듯
뒤를 뒤 돌아 보았다.

그러나 너무 길게 돌아 보았다.


앞은 구부러진  언덕길이고 앞은 낭떠러지에 가까운

계곡의 급사면이었다.

짚 차는 그대로 계곡으로 돌진하여 거꾸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 상태라면 두 북한군은 죽었거나 중상을 입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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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특수 임무 부대는 방 호산의 6사단 부대를 몰아부쳤지만

독한 호산은 형편이 어려워져도  단념하지 않았다.

북 6사단 특공대는 전진하는 미군의 후방으로 침투해서
진동리의 2개의 포병대대를 기습해서
큰  타격을 주었다.


사천 점령을 앞두고 급히 되돌아온 해병들의 반격으로 6사단은
격퇴 되었지만
포병 장비는 모두 항공 공격으로 파괴하여야 했다.

그러나 다시 서쪽을 위한 공격은 일단 정지해야 했다.

북쪽에서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의 대부대가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원래 적이 점령한 진주로 예정했던 킨 특수부대의 임무는 적의

마산 공격 눙력을 분쇄한 것에 만족하여야 했다.


방 호산은 이 낙동강 교두보 서쪽 전투에서 2,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는 9.15 인천 상륙작전으로 낙동강의 북한군이 붕괴하여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할 때 부대를 잘 인솔하고 귀대해서 김일성의 격찬을 받았고

이중 영웅을 칭호를 수여 받은 뒤  군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김 일성은 명성이 높아지고 
북한 체제에 불만이 많았던 방 호산을 그냥 놓아 두지 않았다.

방 호산은 1955년 숙청당해서 지방의 
탄광 부지배인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 뒤의 소식은 알지 못한다.


김일성의 직속 졸개였었고 김 일성의 처 김정숙 동생의
남편이었던
83기계화 보병 연대의 직속 사령관 유경수가
승승장구하던 것과는 대조된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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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imothy 2010.08.17 01: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감니다. 이글은 북괴군 입장에서 보니 감이 새롭고 더욱 실감이 있어 좋읍니다. 감사합니다.

  2. esk0441 2010.08.17 1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글 쓰신분이 북괘 군 인가여?

  3. chaffee2080 2010.09.14 18: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북괴군은 아닙니다. 다만 좀 외곬수인듯...^^

  4. 김광수 2010.10.01 17: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동전투에서 사용된 oy-1,정찰기는 고성인근에 활주로가 없어서 미군들이 합판을 논에다가 깔아서 활주로로 사욯했다는것을 읽은적이 있네요, 부모님이 진주서 사셨는데 그 당시 피란을 가는데 인문군이 사이드카에 기관총을 달고
    먼지를 일으키고 달려오는것을 보고 놀라 고갯마루옆으로 할머니랑 어머니랑 도망을 가는데 이 북한군들이 사이드카를 세우고 "동무들 도망가지 마시라우 같은 동포인데 왜 도망하느냐 "하더라는데 아마 선무부대 아니였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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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21 09:00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중동부전선의 원주 돌파구가 계속 확대되고 있어 상황은 극히 비관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1월 20일을 전후하여 감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또다시 후퇴하여야 한다는 패배의식이 전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 합동참모본부는 여기서 불과 50킬로미터 만 더 후퇴한다면 한반도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전쟁에서 손을 들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37도선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으나 패배의식이 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선에서는 막상 후퇴한 유엔군을 추격할 것 같았던 중공군의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이제 어떻게 싸워야할지 난감해 하던 유엔군은 생각과 달리 적이 나타나지 않고 숨 막히는 적막만 전선에 흐르자 오히려 초조해졌습니다. 비록 원주에서 미 제2사단이 선전을 펼쳐 중부전선의 위기를 막아내기도 하였지만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보다 군의 사기 회복이 선결문제로 부각되었고 신임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교육을 통하여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정신교육보다 사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승리였습니다.


  결국 국지적인 승리라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지금까지 나타나기만 기다리던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항공정찰 등을 하였음에도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해진 리지웨이는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정찰대를 구성하여 위력수색(威力搜索)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이 배속되어 증강된 제25사단 27연대가 작전에 나섰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명명하였습니다. 비록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전이었지만 이것은 6·25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위력수색에 나선 제27연대원 들의 모습]


  1월 15일 아침, 제27연대전투단은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수색을 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밀번 미 제1군단장은 제27연대전투단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 제3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방향으로 진출시켜 수원-용인 간 국도를 차단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들 작전 참여부대들은 첫날, 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다음날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는 대규모의 중공군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목표가 전투가 아닌 수색이었으므로 군단장은 철수를 명령하였고, 항공기의 공중엄호로 중공군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진까지 뚫고 들어가 교전을 벌이며 직접 확인한 위력수색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수원-이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는데 의외로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대규모의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울프하운드 작전이 불과 1개 연대전투단이 겨우 이틀간에 걸쳐 펼친 소규모의 작전이었지만,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겼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제8군 전체가 한번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전선의 상황을 직접 파악한 콜린스 는 처음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와 달리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야전지휘관들에게 주지시키려 한국을 찾았지만 울프하운드 작전 결과는 자신들이 너무 중공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극복한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리지웨이)


  콜린스 대장은“중공군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의 확고한 신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철군이냐 확전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유엔군은 비록 확전은 아니더라도 철군을 하겠다는 패배적인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콜린스 대장이 이후 그의 자서전인 『평화시의 전쟁(War in Peacetime)』에서 “철군문제의 변화를 가져다준 장본인은 바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라고 하였을 만큼 리지웨이의 신념과 그가 주도한 울프하운드 작전은 비록 작았지만 전쟁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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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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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윤곤 2010.06.2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 오타네요 ^^

  2. 박애경 2010.06.21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정말 이사진과 글을 읽고 정말많은것을 알게되었다 전말 감동이다

  3. 이상용 2010.06.22 0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는 6.25 전쟁 생생한 전설 같은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들!!



    내 나이 60세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나이로는! 나는 1951년1월24일(음력) 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여 났다.

    정확히 말해서 약력으로 1951년 3월 1일에 경기도 양평군 지역의 어느 탕광 혹은 금광 터널에 안에서 태여 났다 .



    이때가 우리 한국 전쟁이 중공군에 개입으로 UN군이나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UN군이나 국군이 엄창난 희생을 초래 하였던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압록강 까지 진군한 국군이나 미군이나 속절없이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태여 나기전 약 1개월전에 1951년2월경 어머님는 날 배속에 만삭이 였던 그때였다. 얼마전에 6개월전에 피난을 같다가 다시 북한 공산군 후퇴하기 시작하고 국군이 회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집으로 돌아 온 때였다.



    우리 집은 6번국도 양평에서 강원도 홍천 방향 24km 지점 양평군 청운면 비룡리 국도변. 6번국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홍천 과 횡성의 갈림길 )에서 서울쪽으로 3Km 지점.

    그래서 아버님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먹을것도 없고 하여 집 돌아가 땅속에 감추어 놓있던 식량을 찾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 온것이다.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은 완전히 망거지지는 않았던것을 확인 하고는 뒷 마당 외진곳에 감추어 놓앗던 곡식을 찾아 모처럼 밥을 가족과 해드시고 너무 곤역스럽워던 피난 생활에 지처던 가족과 초 저녁밤을 보내려는 순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북한괴뢰군 패잔병 7명이 후퇴 하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총으로 위협하며 음식를 요구하며 쉬여 갈 방을 요구하여 남아 있던 보리쌀로 저녁을 하여주고 방 하나 를 제공하여 우리 가족 5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2`3경에 우리 방문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아주 낢은 국군복장의 국군2명이 들어 오면서 작은형님의 귀에다 대고 "우리는 국군 특수부대 요원이며 함흥부터 여기까지 2명이 간신이 살아왔다면서 혹시 여기 북한군이 어디있는지 안느냐'물어보는 것이 였다.

    형님은 너무 당황 스럽고 무섭고하여 아무리 소리 않고 손가락으로 저쪽 방에 북한군 괴뢰군 있다는 손짓으로 알려 주니 그들은 고양이 처럼 움직여 옆방으로 가던이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리던이 잠잠한 후에 그들이 다시 와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갑니다" 어디 쯤 국군이 있는것 같으냐?" 아버님이 그들에게 "여기서 30리 정도 가면 지평리 인데 거기쯤 국군이 있을거라고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때 그들은 눈에 살기가 돌았으며 두 눈에서 불빛이 나듯 두눈이 빨간 눈동자 같았다고 회고 한다. 형님은 회고 하기를 이들 국군은 몇몇일을 굶은것 같아서 음식을 해주겠다고 어머님이 이야기 하니 그 국군들은 이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당신 가족도 위험 하니 피하기 바란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들 국군2명은 즉시 움직여 어둠속으로 살았젔다.



    그 다음 날까지 우리 가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아버님은 동력이 트기전에 북한괴뢰군 7명의 시체를 뒷산 구덩이에 파뭇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 국군 2명이 살았 갔는지 굉장히 걱정하시던 것을 지금도 그 6.25 전쟁의 잔상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군 선배님들이 6.25 전쟁시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하였는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용 5기생

  4. 이상용 2010.06.26 0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는 6.25 전쟁 생생한 전설 같은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들!!


    내 나이 60세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나이로는! 나는 1951년1월24일(음력) 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여 났다.

    정확히 말해서 약력으로 1951년 3월 1일에 경기도 양평군 지역의 어느 탕광 혹은 금광 터널에 안에서 태여 났다 .

    이때가 우리 한국 전쟁이 중공군에 개입으로 UN군이나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UN군이나 국군이 엄창난 희생을 초래 하였던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압록강 까지 진군한 국군이나 미군이나 속절없이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태여 나기전 약 1개월전에 1951년2월경 어머님는 날 배속에 만삭이 였던 그때였다. 얼마전에 6개월전에 피난을 같다가 다시 북한 공산군 후퇴하기 시작하고 국군이 회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집으로 돌아 온 때였다.

    우리 집은 6번국도 양평에서 강원도 홍천 방향 24km 지점 양평군 청운면 비룡리 국도변. 6번국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홍천 과 횡성의 갈림길 )에서 서울쪽으로 3Km 지점.

    그래서 아버님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먹을것도 없고 하여 집 돌아가 땅속에 감추어 놓있던 식량을 찾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 온것이다.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은 완전히 망거지지는 않았던것을 확인 하고는 뒷 마당 외진곳에 감추어 놓앗던 곡식을 찾아 모처럼 밥을 가족과 해드시고 너무 곤역스럽워던 피난 생활에 지처던 가족과 초 저녁밤을 보내려는 순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북한괴뢰군 패잔병 7명이 후퇴 하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총으로 위협하며 음식를 요구하며 쉬여 갈 방을 요구하여 남아 있던 보리쌀로 저녁을 하여주고 방 하나 를 제공하여 우리 가족 5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2`3경에 우리 방문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아주 낢은 국군복장의 국군2명이 들어 오면서 작은형님의 귀에다 대고 "우리는 국군 특수부대 요원이며 함흥부터 여기까지 2명이 간신이 살아왔다면서 혹시 여기 북한군이 어디있는지 안느냐'물어보는 것이 였다.

    형님은 너무 당황 스럽고 무섭고하여 아무리 소리 않고 손가락으로 저쪽 방에 북한군 괴뢰군 있다는 손짓으로 알려 주니 그들은 고양이 처럼 움직여 옆방으로 가던이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리던이 잠잠한 후에 그들이 다시 와서 "고맙습니다."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갑니다" 어디 쯤 국군이 있는것 같으냐?" 아버님이 그들에게 "여기서 남쫒으로 30리 정도 가면 지평리 (6.25 전사 "지평리 전투") 인데 거기쯤 국군이 있을거라고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때 그들은 눈에 살기가 돌았으며 두 눈에서 불빛이 나듯 두눈이 빨간 눈동자 같았다고 회고 한다. 형님은 회고 하기를 이들 국군은 몇몇일을 굶은것 같아서 음식을 해주겠다고 어머님이 이야기 하니 그 국군들은 이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당신 가족도 위험 하니 피하기 바란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들 국군2명은 즉시 움직여 어둠속으로 살았젔다.

    그 다음 날까지 우리 가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아버님은 동력이 트기전에 북한괴뢰군 7명의 시체를 뒷산 구덩이에 파뭇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 국군 2명이 살았 갔는지 굉장히 걱정하시던 것을 지금도 그 6.25 전쟁의 잔상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군 선배님들이 6.25 전쟁시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하였는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용 3사학교5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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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死神, B-26 폭격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4.30 08:58

밤의 死神, B-26 폭격기.


6·25 전쟁에서
폭격하는 B-2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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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6·25전쟁에 참전했던 한 폭격기에 관련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은근히[?]좋아 했던 여선생님의

태어난 곳이 전북 군산 비행장이 있던 옥구군이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는 지금도 미공군 기지가 있다.


그 분은 어느 날 우리들에게 자기는 야간에 출격하는 폭격기의

소란스러운 폭음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회고했었다.


거의 매일 잠이 들 만한 시간이면 요란한 소리를 내고 폭격기들이

여러 차례 출격했고 다시 새벽녘이면 몇 번에 걸쳐 이것들이
시끄럽게
돌아오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고 했었다.


이 시끄러운 폭격기들이 때로는 주간에도 수십 기씩 편대를 지어

북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는데 이 놈들 수 십 기가 출격하면
조용한
시골 마을의 상공이 찢어 질 듯한 폭음에 휩싸였었다.

그런데 휴전이 되고 보니 소란스럽기 짝이 없던 밤이
거짓말같이
조용해지더라는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 공군의 B-26 폭격기였다.



B-26 인베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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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항공력의 역할과 실적은 절대적이었다.

한국전에서 활약한 군용기중 우리에게 제일 잘 알려진

스타 군용기로서 미그 킬러인 F 86, 한국 공군의 F-51,

태평양 전쟁의 명성을 6·25전쟁 참전으로 이어온 B-29,

인천 상륙 작전의 해병대 F-4U 콜세어 기,‘호줏기’로

널리 알려진 미티어 기[영국과 호주의]등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유명 스타기 반열에 편입할만큼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지상 폭격의 궂은일을 밤낮을 마다하지 않고

담당했던 전투 항공기가 B-26 쌍발 폭격기다. 

다시 말하면 B-26은 유엔 공군 실적의 적지 않은 부분을

달성했던 폭격기였던 것이다


이 폭격기는 6·25전쟁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북한군이 남한 침공을 개시하고 단 이틀 뒤인 6월 27일 일본에서

출격한 B-26 편대들은 서울 외곽에 진입하기 시작한 북한군에게

폭격을 개시했다.


이 폭격은 때로는 너무 서둔 관계로 오폭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북한군에게 패퇴하고 있었던 국군에게 미군 참전 소식을
알려 주어
말할 수 없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었다.


B-26기의 개전초기 첫 출격은 북으로 이어졌다.

미군의 참전은 없을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남침을 개시한

북한 수뇌부에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폭격이 그들의

심장부에 가해졌던 것이다.


1950년 6월 29일 평양과 그 교외 순안 비행장등에

B-26기의 첫 폭격이 있었다,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밴 프리트 장군의 아들인 밴 프리트 중위가

돌아오지 못한 마지막 출격에서 몰고 나간 폭격기가 이 B-26이다.



1951년 2월 얼어붙은 북한 상공을 나는 B-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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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전장에 첫 데뷔를 이렇게 장식한 B-26은 전쟁 내내

적 저항 거점이나 후방의 시설물, 군수품 야적장, 철도,

보급로등의 폭격등, 적의 대공포화에 맞서야하는 궂은
대지공격을
마다 안하고 내내 수행했는데 이중 대부분은
야간에 출격한 것이었다,



한국전의 대표적 유명 사진인 이 사진도 B-26이
실시한 폭격 장면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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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목표물을 찾아 야간에 산악 많은 북한 상공을 저공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출격자체가 기본적으로 큰 위험을
내포한 것이다. 


유엔군의 항공력이 두려워서 어두운 야간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공산군 보급대에게 갑자기 폭음과 함께 나타나 조명탄을

쏘거나 써치 라이트를 비추고 이어서 기총소사나 폭탄을 퍼붓는

B-26은 밤 도깨비 같은 괴로운 존재였다,


야간 출격을 B-26만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야간에 절대 필요한

많은 폭탄 적재량과 긴 항속거리등을 B-26만큼 갖춘 이상적인

공격기는 없었다,


유엔군이 1951∼1952년,적 후방에 일정지역을 정해놓고 밤마다
출격해서
적 철도등의 보급로를 폭격했던 교살 작전
[OPERATION  STRANGLE]에서도 작전의 최고 적임자는
B-26밖에
없음을 증명해주었다,



야간 출격 비행중인 B-26의 조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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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6의 이력과 제원을 알아보자.

B-26은 미국이 한창 전쟁 중에 있던 1942년 첫 비행을 하고

실전 배치는 1944년부터였다.


그러나 항공기 매니어라면 조금 이상한 사실을 느낄 것이다,

역사에 B- 26의 이름을 강하게 각인 시킨 활약 중의 한 해전으로

미드웨이 해전이 있다,


미드웨이 섬에서 출격하여 어뢰를 품고 일본 기동함대에 육박하던

4 기의 B-26기들이 다 격추되거나 대파 된 일이 있었다,


이 때가 1942년 6월이다.

한국에서 활약하던 B-26이 첫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던
1944년 보다
2년이나 앞선 해이다.


그러나 이차 세계대전의 경폭격기로 맹활약하던 B-26와

6·25전쟁 중에 활약하던 B-26과는 같은 프래트 & 휘트니사의

R-2800 엔진을 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항공기다.


다시 말하면 B-26기가 두 기형이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시 활약하던 B-26은 마로더라는 이름을 가졌고

마틴 사에서 제조하였다.



마틴 B-26 마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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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에서 활동했던 B-26은 이차 세계 대전 중에는 A-26이라는

모델명이 활약했고 별칭은 인베이더였다.

태평양 전쟁 초기 활약하던 A-20 허드슨 폭격기의 후계기다.


A-26인베이더의 전신 A-20 허드슨기가 비스마르크해전에서
반도폭격으로 일본 수송선을 격침 시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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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의 명공격기 스카이레이더의 제조 회사였던

더그라스사가 개발 생산했다.


전쟁이 끝나고 마틴 사의 마로더 폭격기는 은퇴하고 1949년

A-26이 마틴 마로더의 B-26이라는 제식 명을 승계 받아

활동을 계속했다.


전후 삭감되어 제한된 예산으로 두 가지 비슷한

성능의 폭격기를 운용한다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리고 A-26이 기존 B-26보다 성능상 여러모로 더 낫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B-26 인베이더는 여러 파생형이 있지만 크게

B와 C 의 두 가지 주력 모델이 있다.


하나 즉 인베이더 B형은 기수에 8정의 Cal. 50 기관총을

장비한 대지 공격형이다,


더 발전한 형은 양 날개에도 각기 3정, 총 6문의 기관총이

장비되어서 총 14정의 기관총을 가진 형도 있다,



B-26 B형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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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형은 C형으로서 기수가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고

정밀 폭격을 위한 노르덴 조준기가 붙어있다.


노르덴 조준기는 자이로 장치가 붙어있어 비행 중 기체가 흔들려도

조종수는 흔들림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밀 폭격을 할 수가 있다,

B-17을 정확한 폭격으로 유명하게 만든 정밀 장치이다,

B-26 기 두 모델 다 한국전에 참가했었다.

6·25전쟁중 최초 출격했던 B-26은 미 공군 3 폭격 비행단의
B-26 C 형이다.

한국전이 격화되자 경폭격기가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해 8월 19일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예비역으로

편입하고 활동을 중지했던 제 452 예비 비행단이
다시 소집되었다.


소집된 452 비행단은 그 해 11월 일본 규우슈의 이타쓰케
비행장을
기지로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기존의 3 비행단이 야간 출격을

전담하고 452 비행단은 주간 폭격을 수행했다.



B-26기의 조종석
---------------


중공군의 참전이 확대되자 더 가까운 혼슈의 서쪽 해안에 있는

미호 비행기지로 옮겨가 출격했다.

1951년 초에는 부산의 동쪽에 있는 비행장으로 옮겨가 출격 수를

증가시켜서 주간은 물론 야간 폭격까지도 감행했다.


1951년 5월 경험이 축적된 452 비행단은 야간 출격 전문의

3 폭격 비행단과 같이 야간 폭격만을 전담 출격했다.

두 비행단은 한반도를 수직으로 나누워 동해안 쪽 절반은
452 비행단이
담당하고 서해안쪽 절반은 3 폭격 비행단이 담당했다.


452 폭격 비행단은 1952년 5월에 다시 동원 해제되어

예비 비행단이 되고 장비와 인원은 17 비행단으로 흡수되었다.


452 비행단은 활동 기간에 15,000회를 출격했는데 이중
7,000회는
야간 출격이었다.

인적 손실도 상당해서 85명이 전사했다.


휴전이 될 때까지 3비행단과 452 비행단은 적 후방 폭격을 통해서

38,500대의 차량과 406량의 기관차와 철로로 다니는

철도 트럭 3,700대를 파괴했다.

[도로망이 빈약했던 소련이 개발했던 것으로 타이어는

 기관차 바퀴로 교체해서 운행했다.]

적 비행장의 폭격으로 적기 7기를 파괴하는 기록도 수립했다.


B-26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발효되기
불과 24분 전까지도
야간 폭격 임무를 수행했었다.


6·25전쟁중 B-26기의 총 전투 출격 비행시간은

232,000 시간이나 된다 .

전쟁 중 발사한 Cal 50구경 실탄만 2,000만발이 넘는다



B-26의 폭탄 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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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 전략가는 B-26이 주로 적의 보급로 차단작전에
대단히
성공적인 활약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 평가는 전후 북한 공군의 고위 간부가 한국전쟁 중
가장 두려웠던
유엔군의 항공기가 밤에 북한 상공을 누비고
다니던 B-26기들이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뒷받침 해준다.


B-26은 한국에서의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에도
그 왕성한 활동을 세계 여러 곳으로 확대해 나갔다.


B-26 엔진- 2000마력으로서 1600마력의 무스탕 엔진보다도
더 마력이 좋고 두 대형 엔진이 내는 큰 폭음은 B-26의
특징이라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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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군이 B-26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사용했는데 유명한

디엔 비엔 푸에서도 포위된 프랑스군을 지원 출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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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B-26은 유명한 사건으로 세계의 이목을 받게 된다.


즉 케네디 정부는 카스트로 정부 타도를 위해서 반정부 세력을

쿠바 피그스 만에 상륙시켰다가 모두 카스트로 측에 토벌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상륙 작전 직전에 미 CIA 소속 조종사가[망명 쿠바인]
쿠바 공군으로
위장하고 쿠바 기지를 폭격하고 플로리다로
망명하는 위장극을
연출했었다.

이 장면은 세계의 톱 뉴스로 보도되었다.

크게 실패한 이 작전에 동원된 CIA의 B-26기는 20기가
되었지만
그중 9기나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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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B-26은 세계 여러 곳의 분쟁지역에서
활약했다.


월남전 초기 CIA가 펼친 동남아시아 여러 곳 작전에서
이 폭격기는
단골로 얼굴을 내밀었었다.


아프리카 앙골라의 포루투갈이, 그리고 아시아의 인도네시아 군이,

비아프라군 이 B-26기들을 도입해서 실전에 사용했었다.


미국의  B-26기는 주 방위군이 마지막까지 사용했으나

1972년 모두 은퇴했다.

[그 뒤 소수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산불 진압용으로 사용되었다.]



B-26의 편대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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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폭격기는 전장에서의 활약은 아직 종말을 고하지 않았다.

1978년 인도네시아가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서 티모르를

침공 했을 때 인도네시아 공군은 B-26기의 마지막 전투 출격을

감행했었다.


이미 제트 시대가 왔는데도 이 탁월했던 성능의

폭격기는 수명이 다 할 때까지도 활약을 했던 것이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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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태 2010.05.03 1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26 폭격기가 두가지가 있었네요.
    여기까지 와서 울프독님 글을 보니 참 좋습니다.
    건필~~!

  2. get addiction recovery program 2012.05.29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제는 이런 종류의 내가 비록 지금 자신의 정보가 뛰어난 될 수 있습니다 대해 고려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정 정보를 제공을 위해 감사합니다.

  3. visit site for assistance 2012.05.29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검토와 함께 우수한 기사의이 유형에 대한 감사, 나는 완전히 astounded입니다! 되는가 도착 만요.

  4. rattan indonesia 2012.12.30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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