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힌 용전분투, 대한해협전투

생생! 6·25/6·25전쟁 10대전투 2011.06.06 13:05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접한 해군본부는 우리가 보유한 최대 전투함인 PC-701 백두산 함에게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출동명령을 내린 본부나 출동한 백두산 함도 당장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지 정확히 모르던 상황이었으나, 이러한 신속한 대응은 우리의 생명선을 지킨 위대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대한해협전투에서 승리한 PC-701 백두산 함>


 진해항을 빠져나와 부산 외곽을 거쳐 동해로 북상하던 백두산 함은 20시 경 남하하는 괴(怪)선박을 발견하였습니다. 함장은 괴선박의 출현을 보고함과 동시에 신호를 보내 교신을 시도했으나, 괴(怪)선박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남진을 계속하였습니다. 하지만 공해상이었고 적대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턱대고 나포나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던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밤 9시 30분경 괴선박의 100미터까지 백두산 함이 접근하여 탐조등을 비추니 선명도 국기의 표식도 없는 1,000톤 정도의 선박에는 600여명으로 추산되는 북한군이 가득 실려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괴선박 발견 4시간이 경과한 26일 00시경 공격 명령이 하달되어 남북한 해군 간의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백두산 함의 승조원들은 실 사격을 하여 본적이 없었습니다.

<전쟁 발발 직전 촬영한 백두산 함의 승조원들>


 백두산 함은 변변한 함정이 한 척도 없음을 한탄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하 장병들이 월급을 털어 마련한 기금에다가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장만하였습니다. ‘함’이라 명명하였지만 미국의 대학에서 실습선으로 활용하던 구형 선박에 3인치 포를 장착한 450톤 규모의 소형 전투함이었으나, 태극기를 게양한 백두산 함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1950년 4월 10일 진해에 입항하였을 때 국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만큼 귀중한 전투함이었습니다.

<구입 후 3인치 포를 설치하는 모습>

 너무나 가난했던 당시에 함께 구입한 포탄이 불과 100발에 불과하여 이를 함부로 소모할 수 없었습니다. 실 사격 훈련은 엄두도 못내었고, 단지 함포를 닦고 쪼이고 조준연습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어려웠던 시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던 우리 해군의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긴급히 출동한 우리의 백두산 함은 북한 선박과 맞닥드렸고, 이내 백두산 함은 적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였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조준하여 명중탄을 날리기는 힘들었지만 평소 훈련대로 차근차근 탄착 지점을 조정하면서 백두산 함은 적함에 불벼락을 떨어뜨렸습니다. 적함도 포와 중기관총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한 밤의 바다는 포성과 총성으로 뒤덮였습니다. 약 한 시간의 격렬한 교전 끝에 우리 해군은 2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적함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며 북한군을 멋지게 격퇴하였습니다.

<대한해협전투 상황도>


 암울했던 그 당시, 1950년 6월 27일 발행된 신문 1면에 승전보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대한해협전투라 칭하게 된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적함은 부산항을 교란하거나 점거시킬 특수부대가 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만일 부산에 적 특수부대가 상륙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즉 백두산 함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당시 신문>

 이처럼 개전 초에 압도적인 적에게 밀려 고전을 거듭하였던 바로 그때 대한민국의 해군은 서전부터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그것은 암울했던 시기에 어둠을 밝혀준 횃불과 같았습니다. 비록 ‘10. 3. 26일 북한의 기습으로 천안함이 폭침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대한민국 해군은 이처럼 자랑스러운 전통과 역사를 가진 구국의 보루이며, 앞으로도 전투형 군대의 표상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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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시작된 줄다리기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9.27 08:16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첨예한 신경전을 보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회담장에 마주앉았지만 처음부터 회담이 잘 되었을리 없었습니다. 7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으나 협상에 임하는 양측의 자세부터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엔군 측은 협상의제, 휴전감시방법, 전쟁포로 등 군사적인 문제만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라고 주장했지만, 공산군 측은 즉각적인 적대행위 중지, 외국군 철수 등을 우선적으로 토의하자며 정치적인 주장을 앞세워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다못해 공통의제로 떠오른 군사분계선마저 우리는 현 전선보다 북쪽을, 북한 측은 전쟁 전의 남북 분계선인 38선을 주장하였을 정도였습니다.


[회담장 출발 직전 리지웨이의 환송을 받는 휴전협상 대표단]


  처음부터 이렇게 난항을 겪은 것은 휴전회담을 철저하게 정치적인 대결의 장으로 만들고자하는 공산군 측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대표단만 해도 유엔군 측은 정치에 관여해 본 일이 없는 순수한 야전 군인들로 구성하였지만, 반면 공산측은 군복을 입었지만 정치경험이 있는 자들로 선발했을 정도였고 더구나 회담을 실질적으로 막후에서 지휘하던 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그는 형식상 마오쩌둥에게 회담의 전권을 위임한 것처럼 하였지만 회담장소를 최초에 유엔군 측이 제시한 공해상의 덴마크 병원선에 동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공산군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회담을 벌이도록 전문으로 통해 지시하였을 만큼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이러한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제1차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유엔군은 1개월간의 전투중지 명령을 내렸을 정도로 몇 주일이면 회담이 완전히 끝나고 휴전에 이를 것으로 낙관적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치열한 설전 끝에 7월 26일에야 총 5개항으로 구성된 토의의제를 겨우 합의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의제선정은 이제부터 말로써 싸울 범위를 선정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이렇게 겨우 합의를 도출한 제1차 휴전회담은 이후 2년간 계속되는 지루한 마라톤의 출발점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처음에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인 것은 토의의제 중 제 2항에 규정한 군사분계선 설정이었습니다. 전쟁이전 남북 간 분계선이었던 38도선을 주장하는 공산군 측과 해-공군의 우세를 반영해 오히려 현 접촉선 보다 아군의 전략적인 공격 범위에 노출 된 북쪽에 분계선을 설정해야한다는 유엔군 측과 주장이 팽팽히 맞섰고 결국 8월 23일, 공산군 측이 일방적으로 회담불참을 선언함으로써 회담이 결렬되었습니다.


[첨예한 회담 이면에는 이런 모습도 간혹 있었습니다.

회담장 밖에서 단소를 나누는 유엔군 헬기 조종사와 북한여군]


  이에 유엔군은 군사적 압박을 가하여 공산군을 회담장으로 다시 불러낸다는 방침을 수립하고, 또한 차후 예상되는 군사분계선 설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려기 위한 제한적인 군사작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양구 지역의 해안분지(이른바 펀치볼),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백석산 등지를 점령했고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월비산을, 중부지역에서는 국군 제2사단이 금성의 서남쪽 후방까지 진출하였으며, 국군 제6사단이 금성천과 교암산을 점령했습니다. 결국 아군의 행동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낀 공산군 측은 결국 회담 재개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엔군은 회담장소의 불리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당시 접촉선인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어룡리의 널문리 마을로 장소변경을 주장하였고 회담 재개가 다급해진 공산군 측이 개성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회담성사가 어려워 질것으로 예측하여 여기에 전격 동의함으로써 이곳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선정되었습니다. 그 만큼 1951년 초가을에 있었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아군의 압박은 전사에는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공산군 측에게 상당한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던 군사작전이었습니다.


[널문리의 임시 회담장, 이후 이곳이 판문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 측이 제시한 곳은 널문리 마을 초입에 있던 주막 앞은 사방이 탁 특인 평범한 콩밭이었는데 여기에 텐트를 치고 회담이 재개 되었습니다. 이곳은 단지 남북 간 군사 접촉선에서 평평하게 교통로가 확보되어 있는 중간지점으로 어느 일방도 사전에 매복하고 있다가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기는 힘들다는 지리적인 이유만으로 선정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널문리의‘널’자를 교전당사국중의 하나였던 중국어로 표기할 수 없어 이를 의역하여‘널문리 주막’의 한자어 표기인 ‘판문점(板門店)’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판문점은 남북분단의 상징으로 바뀌었고 세계적으로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지명이 되었고 아쉽게도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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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 질 수 없는 전투, 제2차 인천상륙작전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9.16 08:21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1.4후퇴로 평택-삼척선까지 밀려난 전선을 38선 인근으로 다시 올리기로 결심했는데, 인천항 일대에 교두보를 다시 확보한다면 차후 반격 시에 상당히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거대한 상륙작전까지는 필요 없고 강력한 제해권을 발판삼아 단지 인천항을 확보할 수 있는 소규모의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1.4후퇴 이후 반전을 이끈 명장 리지웨이]

(우측은 통역을 하는 언더우드가문의 원재한 선생)


  이에 따라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작전주체로 선정되었는데, 인천 앞바다와 도서는 아군의 통제권 하에 있었고 인천항 주둔 공산군도 그리 강력한 것으로 판단되지 않아 충분히 가능한 작전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작전을 총괄한 미 제95기동부대의 사령관 스미스(Allan Edward Smith) 소장은 YMS-510 강경함의 함장인 함덕창 대위에게 인천항 현황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의 수집을 지시하면서 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스미스제독과 작전을 숙의 중인 손원일제독]


  1월 27일 07시 만조 때, 인천항 북쪽 인천기계제작소(현 만석부두 인근)앞에 침투한 강경함은 적 1개 소대가 경비하던 방어진지에 포격을 가하여 적을 격멸시킴과 동시에 4명의 특공대가 기습 상륙하여 정보 획득을 위한 2명의 포로를 생포하여 귀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날의 전과로 적의 방어 형태를 파악한 아군은 본격 상륙작전을 2월초로 예정하고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작전의 주역인 YMS-510 강경함]


  수립된 계획에 따라 인천에 상륙하기로 예정된 부대는 덕적도에 주둔하고 있던 김종기 해군 소령 지휘하의 해병대 1개 중대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노명호 소령이 지휘하는 PC-701 백두산함이 2월 2일 덕적도에 도착했습니다.  수차례의 기만작전을 통하여 면밀히 분석을 마친 아군은 37도선에 정렬한 아군이 다시 북진을 개시하는 것(이른바 Thunderbolt작전)과 발맞추어 2월 10일 18시 만조 시간을 D-Day로 잡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전에 참여한 PC-701 백두산함]


  아군 함대가 포격을 가하여 탄막을 만드는 동안 100여 명의 해병대가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하는데 바로 그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져 덕적도에 주둔한 해병대의 탑승이 지연되어 예정 만조시간에 상륙이 불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급보를 접한 노명호 함장과 김종기 소령은 인천 외항에 집결한 각 함정의 수병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총 37명의 특공대로 구성된 상륙 부대를 긴급 편성하였습니다.


[6·25전쟁 당시의 국군 해병대]


  드디어 D데이 H아워에 지원사격이 시작되어 포탄의 불벼락이 공산군 진지에 정확히 떨어지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자 이틈을 이용하여 김종기 소령이 지휘하는 특공대가 인천기계제작소 앞 부두에 안전하게 상륙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교두보를 확보한 후, 김종기 소령은 전 대원에게 각자 담당한 목표를 제압한 후 21시까지 기상대고지(현 제물포 고등학교 인근)에 집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음은 전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상륙 직전 인천 도심의 모습]


  “이제 우리들은 적지에 있다…(중략)…너희들은 돌아가려해도 보다시피 우리를 싣고 온 함은 이미 이안하고 없다. 나를 믿고 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중략)…지시한 대로 인천시 기상대고지에 집합하라. 21시까지 집합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자로 확정한다.”


[작전을 준비하는 한국 해군의 모습]


  탄막이 걷히자 아군 특공대원은 함성을 지르며 각자 목표한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달려 나갔습니다. 당시 인천항은 적 1개 중대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아군의 진격에 놀라 뒤도 돌아보지 못한 체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시 아군은 소수의 특공대가 아니라 대부대가 상륙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제1대대 돌격 앞으로, 제2대대 돌격 앞으로” 하는 식으로 크게 소리 지르며 적을 기만하였고 적은 이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상륙 후 점거한 해안포대의 모습]


  21시, 아군 특공대는 계획대로 기상대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여 인천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23시에는 시청(현재 중구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적은 방어를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고, 악천후로 덕적도에 대기하고 있던 해병대 본진이 다음날 07시에 상륙하여 점령지를 특공대로부터 인수인계 받음으로써 성공적으로 인천항 확보작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기상대고지를 점령한 특공대]


  이처럼 소수의 자원 특공대원들에 의해 1.4후퇴 이후 한 달 만에 인천은 다시 탈환되었습니다. 전사에는 이를 제2차 인천상륙작전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비록 1951년 2월의 작전은 5개월 전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도 않지만, 엄연히 적진 속으로 강습하여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작전 후 기념촬영을 한 특공대원들의 모습]


  바로 그때 유엔군이 북진작전을 개시하자 공산군은 더 이상 한강이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1.4후퇴 한 달 만에 아군은 다시 서울부근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적의 측면에 비수를 들이대는 위치인 인천을 확보한 해군 특공대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그 규모와 상관없이 전술적으로도 그리고 전략적으로 길이 빛날 위대한 작전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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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웅진 2010.09.16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 사진이 "그 유명한 다시 노획된 크롬웰 전차" 아닌지요? ^^

    그건 그렇고 배 이름과 제독님 이름 캡션... 뒤바뀌었습니다. -ㅅ-;

  2. 비도승우 2010.09.22 0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노획된 크롬웰 전차는 1951년 1월에 경기북부지역에서 전차전중 영국전차대가 제노획하지

    않았나요?(지역과 날짜는 잘 기억이 안나네요..)이 사진은 또다른 사례같아요..사진보고 흥분했음.

  3. 울프 독 2010.09.22 14: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기도 고양 전투에서 모두 유기된 크롬웰 전차대[14량]중 1량은
    한달 뒤 한강변에서 영 센추리언 전차에게 파괴 되었습니다.

    크롬웰을 북한군이 인천에 가져다 놓은 것은 처음 알았고
    북한군들이 크롬웰 전차위에서 촬영한 사진의
    미스테리를 이제 이해 했습니다.

  4. Computer Network 2012.02.10 18: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난 이런 행사를 통해 6.25전쟁이 어떻게 전쟁이 났는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내가 봉사를 많이하고 돈을 아껴써야되는 것도 깨달게되었다
    난 이런 캠페인이 더욱더 개발되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5. progressive online login 2012.05.23 1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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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progressive home insurance sign in 2012.05.23 13: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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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SunVPN VPN service 2013.01.06 18: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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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custom essay 2013.02.10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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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spiderman motocross 2013.09.22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천 앞바다와 도서는 아군의 통제권 하에 있었고 인천항 주둔 공산군도 그리 강력한 것으로 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