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단'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1.07.01 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2/2) (3)
  2. 2010.10.06 화령장 전투 (10)
  3. 2010.09.29 그것을 패배로 볼 수는 없다 [ 上 ] (6)

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2/2)

생생! 6·25/6·25전쟁 10대전투 2011.07.01 21:05

 6ㆍ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것은 엄청난 치욕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을 수복하였지만, 엄밀히 말해 서울을 탈환한 주체는 미 10군단이었습니다. 때문에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호언장담했었던, 이승만 정부는 평양 탈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서울 피탈은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치욕이었습니다>


 국군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비슷한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조바심이 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무슨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미 8군의 우익을 담당하며 한반도의 정중앙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 2군단의 일부 예하부대들이 평양을 향하여 진격방향을 좌측으로 틀었습니다.

 그 결과 국군 1사단 15연대가 본평양에 입성하던 시간과 거의 비슷한 19일 밤, 대동강을 건넌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 8연대도 김일성대학을 점령하며 평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군보다 국군이 선점한 것은 맞는데 먼저 평양에 도착한 부대가 15연대인지 8연대인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1사단과 7사단에게 평양을 탈환한 부대라는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대동강을 도하한 7사단 8연대도 거의 동시에 평양에 진입합니다>

 


 하지만 당시 국군은 UN군에게 지휘권을 일임한 상태여서 국군 2군단의 독단적인 진격은 명백한 군령 위반행위였습니다. 미 1군단에 속해 연합작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이 국군 7사단 8연대가 평양에 왔다는 소식에 놀라서 직접 찾아가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대노하였던 사례만 보더라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국군 역사에 평양탈환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지만 사실 과유불급이었습니다.

 당시 국군 2군단이 진격 방향을 좌측으로 바꾸자 전선 중앙이 순식간 텅 비어져 버렸고 이틈을 노려 북한군 잔당들이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평양탈환 후, 원 위치하였지만 우회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렇게 한 번 벌어진 틈은 이후 중공군이 침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10월 30일 평양 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였지만 최전선의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던 중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평양시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의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후 후퇴 당시에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고 중공군에게 즉시 내어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상징성은 컸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의미 있는 거점은 아니었던 평양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평양 탈환이 전쟁의 끝이 아닌 이상 그 임무는 원래 예정된 부대들에게 맡겨야 했는데, 조급함에 사로잡혀 전선의 상당 부분을 공백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한 곳으로만 집중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제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50년 10월은 국군의 역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시간이었고 그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평양탈환이었습니다. 특히 국군 1사단이 여건과 장비가 월등히 좋았던 미 1기병사단과 벌인 경쟁은 국군의 위상을 널리 알린 쾌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창설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군대가 이토록 쾌속의 진격을 선보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터에 제작된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狀 감격 속에 탈환한 평양을 이처럼 비극적으로 내주었습니다>


 엊그제까지 지옥의 인공치하 시기를 보내었던 국민들은 적의 심장을 국군이 점령하였다는 낭보에 감격하였고 곧바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냉정을 잃고 즉흥적으로 내달렸던 대가는 불과 한 달 만에 달콤했던 북진이 끝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50년 10월에 있었던 감격스러웠지만 과하였던 평양탈환은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끝)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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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ow-cost full dental coverage plans auto insurance 2012.05.28 1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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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장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06 08:24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대승리를 거둔 화령장 전투는 1950년 7월 17일과
7월 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을 말한다. 

북한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7월 중순,
충청북도를 지나 경상북도까지 물러섰다.


서울 점령후 시가 행진하는 북한군 -이 때만 해도 김일성은
남한을 금방 먹어 치울 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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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앙 축선에서 후퇴하던 국군은 초등학교의 엉성한
괘도를 가지고
작전을 짜느라 괴산과 상주를 잇는 977도로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나중에 미군은 일본이 총독부 시절부터 작성해서 보관했던
한반도
지도로 긴급히 군사지도를 만들어서 미군과 한국군에
지급했다.]


이 지역은 좌측의 국군 1사단과 우측의 6사단 사이의
30km
빈 간격이었다. 여기에는 국군이 한 명도 없었다.


북한군은 이 방면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15사단을
충북 괴산에서 상주 방향으로 977번 도로축을 따라
침투 시켰다.


김일성이 만주 안도현에서 불량 농촌 소년들을 모아서
무장 단체를
조직했던 초기부터 따라 다니며 유격대 활동을 하던
그의 졸개
박성철이 사단장인 이 사단은 이미 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었다.


북한 15사단의 대표적인 대패는 7월 7일 충청북도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에게 호되게 당한 동락리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15사단 48연대는
궤멸적인
섬멸을 당했다..


그런데 2주가 지나 그럭저럭 재정비와 충원을 한 이 연대가
다시 남침의 선봉에 서서 화령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들어서자 주민들은
신속히
경찰라인을 따라 국군 1군단과 2군단과 정보 부서에
신고했다

1군단과 2군단, 두 군단은 정찰 부대를 내 보냈다.


[1군단 정찰대는 방원철 소령이,
2군단 정찰대는 
배상록 대위가 지휘했다.]


1군단장 김 홍일 장군-오래간만에 뵙는
사진이라 업로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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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북한군 15사단이 이 텅 비어놓은 틈을 이용해서
은밀히 남하 중임을
확인했다.


군단은 이 보고에 옹진반도에서 싸웠던
17연대를
2군단으로 배속 변경하여 이 쪽으로 급파했다.

이 연대는 옹진 반도 철수후 대전에 집결했다가
진천과 청주등에서 격전을 겪은 뒤 보은에 잠시 주둔중이었다.

17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먼저 보은의 1대대[대대장 이관수]를
급히 화령장으로 파견했다.

부대는 자정경 명에 의거 출발했다.
[연대장은 백인엽 대령이었으나 부상으로
후송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지휘]


역시 서울 시내를  행군하는 북 T-34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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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1950년 7월 17일 오전 07:00 이었다.

1대대가 977 도로를 타고 진입했을 때 한 주민이 차량 행렬을
가로 막고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선발대가 이미 지난밤에
이 길을 따라 상주 쪽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1 대대는 적의 부대 중간에 끼게 된 것이었다.


연대장은 적의 후속 부대가 필히 있을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야 상주로 간 부대를 놔두고 후속 부대를 치자고
결심하고 괴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977도로 중간에 있는
갈령 남쪽 방향을 따라있는 상곡리 일대에 1대대 병력으로
길게 매복진지를 만들었다.



화령장 북동쪽 977도로의 상곡리에서 
있었던 매복 전투 상황도.
푸른 선이 아군, 붉은 선이 북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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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을 완료한 부대는 매복 지대 아래 상주 쪽에 있는

상곡교에서 자전거로 북상하고 있던 북한군 연락병을
잡아 이미 선두로 상주로 내려간 부대가 박 성철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확보했다.


1대대는 이 통신 보고서에서 적 48연대가 곧 후속할 것이며
바로 1대대 매복진지 앞의
일대에서 숙영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1950년 8월 고되게 행군하는 한국군- 복장으로 보아
전투 경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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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가 조금 지나자 갈령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이 행군 대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보부대에 뒤이어 각종 포와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40여 대의 우마차를 끌고 왔으며 북한 연락병
통신문에서와
같이 국군 17연대 1대대 정면 길가에 정지하더니
대 휴식에 들어갔다.


이들의 일단은 매복 정면 북쪽인 하송리의 송계 초등학교
부근에서
휴식하고 다른 일단의 병력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했는데
이들은 학교 교정과 도로가에 사총[斜銃]한 후
경계는 소홀히 한 채
일부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마을에 들어갔는데 잠시 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의 서쪽 사면 3부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제 1 대대
장병들은 코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한군의 목욕 광경 등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면서 사격 명령이 빨리 하달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병력의 후방 390고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적이 목욕을 하는 등
무방비 상태이기는 하나
넓게 흩어져 있으므로 좀 더 좋은
여건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인 19:30분경 흩어져 목욕하던 북한군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병사들은
수저를 놀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판단한 이관수
대대장은
대대 작전장교 김희재 중위로 하여금
적색 오성 신호탄을 발사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에 따라 400여 정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고
박격포와 기관총도 쉴 사이 없이 쏘아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집결하거나 식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은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쓰러져 갔고 그 때까지도 하천에서 목욕하던 자들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쓰러졌으며 다행히 살상을 면한 자들은
부락으로 숨어들거나 삼밭에 몸을 숨겼으며 일부는 뒷산으로
도주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40여 필의 말과 소들이 포성에 놀라
날뜀으로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 1대대가 1시간 가까이 적을 섬멸하는 사이 연락을 받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전투현장에 도착하였는데 대대장이
소탕 작전을 건의하자 연대장은

“야음이 다가왔고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내일 17연대
  본대가
도착한 후에 하라“라고 명령하며 전투 현장에서
살아 남은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 매복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대장은 후방 진지에서 예비대로 있었던 제 2중대를
북한군이 행군해왔던 도로의 후방을 차단해서 도주자를 색출했다.


김희중 연대장은 어제 16일 밤에 청주 전투에서 고전을 하고
철수하여
보은에 집결하고 있던 제 2대대와 제 3대대를
화령장으로 급파시켰다.


먼지로 뒤덮힌 한국의 도로는 미군들에게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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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한 1대대는 살아남은 적을 색출하가며 잔적소탕을 했다.

북한군이 식사하려고 집합했던 곳은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기습 현장의 뒷 산으로 도주했던 잔적들을 소탕했다.


북한군 정치 장교 놈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아 바위 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아 !부산은 벌써 함락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저항하느냐!" 하며 속임수의 선동을 하다가
국군의 사격에 도주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살했으나 뒷산 바위틈에서 기관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박격포 사격으로도 제압되지않아 특공대를 투입해서 제압하고
보니 북한군 간부들은 기관총 사수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발목이
쇠사슬로 묶이고 기관총에 연결된 채 죽어 있었다.


[모두 단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북한군 간부들이 사병을
 희생삼아
살길을 도모했던 치사함이 노출 되어 보인다.]


전장 정리의 마무리가 끝나고 전과 확인을 해보니 포로 30여명,
사살 250명, 박격포 20문,45mm 전차포 7문, 소총 1,200정,
그리고 수점의 통신장비와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부대를 확인한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보병 2개 대대로서
통신 중대와 대전차 포 중대 및 기마대인 것이 밝혀졌다.


총을 사총[斜銃]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으므로 도주한 자들은
대부분 비무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획한 소총이 많았음에 유의]


미국 기록은 두 사람이 북한군이라고 설명했지만 평양에서
신상철 사단장과  다른 사단장이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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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18일 적의 후속 부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정보참모 유 창훈 소령을 지휘관으로 한 정보 부대를
전방으로
파괴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 현장에서 북쪽인 갈령을 넘어가서 잠복했다가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올라오는 두 명의 북한군 연락장교를
잡았다.


두 연락 장교로부터 15사단장 박 성철이 이미 궤멸된
48연대장 김 치구에게 아무런 보고하지 않음을 질책하고
49 연대가
곧 후속함을 알리는 통신문이 압수했다.


박성철은 이렇게 두들겨 맞은 48연대의 운명을 알지도
못 했을 뿐더러
후속 연대가 뒤따른 것이라는 것을 국군에게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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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대 상곡리 기습에서 후방으로 도주해서 48 연대가
 섬멸되었음을 
제대로 보고한 적군이 한 명도 없었을 뿐더러
 [전멸을 의미함]북에 정보 협조해주는
주민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군이 정보 획득에 주민들의 절대적인 협조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또한 중요 정보를 자전거를 탄 전령들로부터 연달아
 두번이나 입수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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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연대장은 19일 전투후 적을 기습하기로 하고
송호림 소령이 지휘하는
2대대를 파견했다.


2대대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1대대가 대첩을 거둔
577도로의 위쪽,
즉 갈령과 기습 현장인 심곡리 사이에 있는
동관리와 하성리 중간 계곡에
매복진지를 구축했다.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며칠 전 차량 전복 사고로 기동조차
불편한
형편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진지를 구축하고 후속할
적 49연대를 기다렸다.


그는 적이 계곡 안에만 들어와 준다면 일개 연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대대가 집결지인 화령장에서 동관리로 이동하여 매복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대대가 전장 정리를 완료한 20;00이었다.


아래 심곡리에서 윗쪽으로 올라간 곳인 동관리에서
화령장의 두번째 전투가 벌어졌다.[3개 중대의 공격선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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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중대를 적이 들어올 입구인 좌측 갈령 쪽, 5중대를 중앙,
6중대를 적이 나가는 방향인 우측 상주 쪽 으로 배치했다.


다음날 7월 19일 16;00시 말을 탄 적 장교 두 명이 인솔하는
우마차 20대와 적 20여명이 7 중대 매복 망에 들어왔다.


대부대를 기다리는 대대로서 그냥 통과 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 병사가 선두 기마 장교를 우발적으로 사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7 중대는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기습으로 적병 17명, 소 두 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두 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했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는
많은 양의 탄약과 식량들을 노획하였다.

이들이 징발했던 민간인 두 명도 희생된 것은 유감이엇다.


송 호림 대대장은 이 우발 사격을 크게 질책하고
대대 관측소를
전방의 7중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더 이상의 
실수가 
없도록 중대를 직접 통제했다.


다음날 7월 20일 새벽이 되었지만 적정이 없었다.
송 호림 대대장은 연대 본부에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김희준 중령이 이거 우리가 속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2대대 철수를 생각할 때 선두 7중대장 조 경학 중위는
송 호림 대대장에게 피아 식별 불능의 대병력이 갈령에서
도로를 따라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한군의 훈련. 앞에 지형 모형 사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술 훈련중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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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훤히 샐 무렵이었지만 골짜기는 안개가 온통

뒤 덮여 길 위로 이동하는 부대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적 부대는 4열 종대로 행군해 오고 있었다.


적 부대는 7중대 앞을 이미 통과하여 선두 부대는
7중대 화망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송호림 대대장으로부터 적 식별을 분명히 하라는 지시를
받은 조경학 중위는 유선 전화기로 안개 사이에 희미하게
통과하는 대부대에 관한 관측 정보를 계속 보고하였다.

“배낭 같은 것을 모두 메고 있다.”

“총에 긴 송곳 같은 것이 꽂혀 있다.[총창이다]”

“바퀴 달린 기관총을 끌고 가고 있다.[수냉식 맥심 기관총이다.]”
등의 정보를 보고하는 조 중위는 이 대열이 분명 적이라고
판단하는
어조였다.


소제 수냉식 1910년 맥심 기관총.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체코 군에게서 
구입한 이 기관총들로 일본군을 격멸함,
바퀴가 달려 있어서 강아지처럼 줄을 매어 끌고
이동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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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군은 한강 이북에서 배낭을 모두 잃어버려서
배낭이 없는 상태였고 배낭이 있는 부대도 배낭은 차량으로
운송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피아 식별을 하고 싶었던
송 호림 대대장은
주저했다.


적이 7중대를 통과하여 좌측 6중대 지역으로 진입하자
6중대장 곽성범 중위는 이들의 선두가 중대 정면을 지나가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빨리 사격명령을 내려주기기를 간청했다.


김희준 연대장에게 보고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송호림 대대장은 자신의 판단으로 아군 부대를 잘못
공격했을 때는
죽음으로 속죄하기로 하고 적색
오성 신호탄 3 발을 쐈다.
전 대대 동시 사격 명령이었다.


명령일하 전대대의 화력이 도로에서 행군하던 적에게 쏟아졌다.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대는 적 후미인 갈령 방향에는 81mm 박격포로 견제사격을 하고
중대간의 중기관총으로 교착사격을 하며 도로 건너편 개활지와
산으로 도주한 적에게는 중대의 60mm 박격포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 화기는 977번 도로를 최저 표적사 할 수도 있도록
지가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안개로 인하여 표적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격만
하면 화망 안에 깔려든 적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숨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뛰었으나
은폐물이 없는데다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쓰려져 갔고 일부 병력은 논바닥에 엎드려 저항을 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송호림 대대장은 불편한 몸 상태를 잊고 붉은 기를
흔들며 “죽여라! 죽여라!”하고 부대를 독려하였다.


08:00경 안개가 걷힌 후 977도로 위와 논바닥에는 시체와
장비가 즐비하였고 아직도 삶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삭발한 머리였다.
박박깎은 머리는 북한군의 특징이다.

기습한 국군은 이들이 진짜
북한군들임을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반대편 산으로 도주했던 적들은 미리 746고지에 배치했던
7중대의 1개 소대에 격멸되었다.


이틀 전 1대대의 상곡리 전투에서는 이 배비가 없어서 적들이
반대편 산에
붙어 저항했지만 이번에는 아래 계곡해서
도주해 오는 북한군을  산정에서 사정없이
쏴 거꾸러뜨렸다.

09:00, 제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예비로 있던 제 6중대로
하여금 잔적 소탕을 하게 하였다.


6중대가 소탕 작전을 전개하자 이때까지 죽지않고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북한군들은 상당한 저항을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소탕 되었다.


이 당시 5중대에 탄약 추진차 갔다가 전투를 관전하게 된
하송리의 박 무진 씨는

“적이 길 위와 논바닥에 새카맣게 쓰려져 있었는데 7-8명이
 
하천 직경 70cm의 배수관 속으로 기어 들어가자
  소탕 작전을 하던
국군 한 명이 배수관 속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았어요. 
  국군들은 참 용감하였습니다.“

이날 작전은 오후 14;00에 종료되었다.


송호림의 2대대는 적 현장 확인 사살 356명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 며칠 후 현지민들이 논과 도로에서 모아다가
매장한 적군 시체만 600구가 넘었었다.

노획 무기로서 박격포 16문, 반 탱크 총 2문,
기관총[수냉식 15문, 경기관총 15문, 체코 식 경기관총 23정,]
소총 186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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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멸된 15사단의 두 연대 보유 노획 무기가 빈약함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주전인 1950년 7월 7일, 국군이 충북 동락리에서 6사단
7연대에게
1차로 격멸당한 48연대에서 거둔 노획품은 막대했다.

동락리 사살은 2186명, 포로가 132명,

노획 장비는 122mm 곡사포가 6문,
76mm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12.7mm 중기관총 6정,
장갑차 4량, 2 1/2트럭 60대, 1/4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등이다.


탄피를 수거하고 있는 국군, 탄피의 양으로 보아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화령장 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 24연대가 이어 받아 7월 25일까지
계속되었고 북한군과 미군사이에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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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북한 연대는 남침 때는 완전 차량화 되어 있었다.
참패했던 동락리에서도 전 연대가 차량을 타고
매복선에 들어와서 주차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이 동락리 전투에서 막대하게 노획했던
차량과 중포가 화령장에서는 전무함이 들어난다.


보건데 적 15사단 48연대는 동락리에서 전 장비를 상실하고
인원만을 급히 충원했지만 한국 침공 개전 때의 화려한 장비는
북한으로부터 재보급 받지 못해 우마차나 자전거 같이
빈약한 것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48연대장 김치구 중좌는 동락리 전투 대패후
국군이
다 후퇴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며
지방 주민들을 수 십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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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리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에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 15사단은 15:00에야 자기들 연대가 섬멸된 것을 알고
감히 갈령을 넘어 오지는 못하고 포격만 했지만 2대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이미 진지 이동을 한 뒤였다.


김 일성이 생각없이 일으킨 6.25남침으로 남북 양쪽의
주민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손자를 데리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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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령장에서 적 15사단의 두 개 연대를 섬멸하는 승리에는
한국군 정보부대의 민활한 활동에 크게 힘입은 바가 컸지만
현지 주민들의 협조가 압도적인 공헌을 하였다.


화령장 주민들은 첫 첩보 부대인 방 원철 부대나
배 상록 부대가 화령장에
파견되었을 때부터 국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는데
대한 청년단원들은 단장
김 기영을 중심으로 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마을을
경비하며 보급 추진 업무를
도와주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탄약 운반이나 취사 업무등은
우리가 맡을 터이니 군인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장에 나가서
적을 물리치도록 해 달라“고 하면서
탄약 운반, 취사등을 자원했으며
박 삼덕[청년 단원- 38세]씨는
자신의 약방을 치료소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약품을 지원하고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서울 탈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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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은 동락리와 화령장 두 번의 대패로 사단장에서 해임되었다.


김일성이 아무리 신임하던 졸개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대패에는 어쩔 수없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사단은 남침 3개월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급조직
된 사단으로서 출발 초기부터 그 전투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북한 군부내있었다.

그래서 남침초기 최 선봉에도 서지 못하고 예비대로
따라오다가 국군과 맞붙으면서 그 문젯점을 여지없이 들어냈다.

무기를 다 빼았기고 문자 그대로 거덜이 난 이 15사단은
두 달간 계속된 낙동강 전투에서 옹골진 전투력 한 번
발휘하지 못하고 비실대다가 북으로 패주했다.

15사는 6·25전쟁 최약체 북한 사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령장 전투 전승행사 안내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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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령장 2010.10.06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어이없겠네요... 아니 말을 탔다고 북한군으로 간주하다니.... 본 순간 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

  2. 화령장 2010.10.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 분 무슨 소리하고 있는가 ?

    본순간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라고 ?

    말을탔다고 붃한군으로 간주했다니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나?

  3. chaffee2090 2010.10.07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탄피 회수 장면은 실제 화령장 전투 당시가 아닌 것이라는 얘기죠?

  4. 조조 2010.10.24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럭리 전투에서 대패한 15사단 박 성철의 군대가 화령장에서 다시 국군의 재물이 됏구먼 북괴15사는 완전 봉이였구먼,,,,ㅎㅎ 정말 웃기는 넘들이엿군 15사

  5. clothing factory 2011.05.25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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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free facebook likes 2014.03.09 2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굉장 게시 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있는 많은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읽을 사랑 해요.

그것을 패배로 볼 수는 없다 [ 上 ]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9.29 08:34

  지난 6월, 모방송사의 퀴즈프로그램 담당자로부터 문제감수를 문의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6·25전쟁과 관련된 내용으로 정답은 ‘장진호 전투’였습니다.  방송사 담당자가 사전에 작성된 문제를 읽어 주었는데, 다음 예문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전략) ... 당시 뉴스위크도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던 참패였고 ... (후략)


[포위망을 돌파 중 휴식을 취하는 미 해병대원들 과연 이들은 패전을 당한 병사들일까요 ?]


  감수는 차치하고 놀랐던 이유는 과연 장진호 전투를 그렇게 평가절하 하였나하는 점이 상당히 의심스러워서였는데, 방송사 담당자는 유명한 온라인 백과사전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해당 싸이트를 찾아보니 정작 영문판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었고 한국어판에 서술되어 있지만 정확한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아 그 진의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온라인 백과사전에 소개된 장진호전투]


  그런데 의외로 유명한 시사 잡지인 뉴스위크에서 언급하였다는 위의 내용은 여러 신문기사에도 수시로 나올 만큼 흔하게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언론매체에서도 인용할 정도라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라 생각하여 그 진의를 찾으려 하던 중, 최근 유명한 미국 역사관련 싸이트인
www.americanheritage.com에서 다음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the campaign was called “America’s worst military licking since Pearl Harbor” in Newsweek


[유기된 각종 장비들의 모습 하지만 이것들은 패전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장진호전투를 미군이 패배한 전투로 낙인찍었다는 유추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결론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해당전투에서 당한 피해가 엄청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올해 개설된 장진호전투 제 60주년기념 공식싸이트 (www.chosinreservoir.com)에서 태평양전쟁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으로 평가되는 이오지마전투와 비교하여 설명한 내용을 참고하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미 해병대의 전설이 되어버린 이오지마전투를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그런데 장진호전투에서 얻은 피해는 이오지마전투를 능가합니다.]


  36일간 진행된 이오지마전투에서 미군은 총 6,135명이 전사하였는데, 이것은 하루 평균 171명이 사망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15일간 벌어진 장진호전투에서 3,115명의 미군들이 전사하여 하루에 1개 중대 규모의 208명이 매일 사망당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장진호전투가 얼마나 참혹한 전투였는지 잘 알려주고 있고 이런 결과 때문에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사한 해병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영현병들]


  또한 이 전투로 미 해병 제1사단뿐만 아니라 함경남북도 일원에서 한만국경을 향해 전진하던 유엔군을 중공군이 일거에 몰아내었으니 단순히 이분법적으로만 따진다면 유엔군의 패배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스스로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중공군이 미군을 북한 땅에서 몰아내었다는 사실만으로 장진호전투를 과연 유엔군의 패배라고 단언 할 수 있을까요 ?


[장진호전투를 중공군의 승리라고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적어도 전쟁사를 연구했던 사람들이라면 장진호전투를 중공군의 완벽한 승리였다고 단정 지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진호전투는 보기에 따라 승자와 패자의 위치가 완전히 바뀔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승패를 단순히 공간의 점령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던 경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공간의 장악이 반드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장진호전투는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장진호 인근의 첩첩산중 60여 년 전 이런 오지에서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전체를 바라보는 전쟁은 공간의 장악이 최종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지표일지는 몰라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 각개의 전투는 단순히 공간을 점령하였다고 승리를 의미하거나 반대로 후퇴하였다고 패배를 뜻하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리적으로 계량화할 수는 수치를 가지고 승자와 패자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계속)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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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lothing factory 2011.05.25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2. 247insurancequotes guidebook 2012.05.21 17: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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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47insurancequotes tackle 2012.05.21 1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이의 후면에 마음이 이렇게 훌륭한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로부터 얻을 수있는 훨씬 분명히있다.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다량의.

  4. rattan furniture exporter 2012.12.30 22: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이트 및이 웹 사이트의 다양한 기사 또는 블로그 게시물에 대한 좋은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5. http://www.bestessays.com/custom_writing.php 2013.01.30 0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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