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사단'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10.06 화령장 전투 (10)
  2. 2010.07.26 최초의 반격 대첩-동락리 전투 (10)
  3. 2010.03.15 25. 그해 9월의 마지막 혈전 (64)

화령장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06 08:24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대승리를 거둔 화령장 전투는 1950년 7월 17일과
7월 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을 말한다. 

북한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7월 중순,
충청북도를 지나 경상북도까지 물러섰다.


서울 점령후 시가 행진하는 북한군 -이 때만 해도 김일성은
남한을 금방 먹어 치울 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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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앙 축선에서 후퇴하던 국군은 초등학교의 엉성한
괘도를 가지고
작전을 짜느라 괴산과 상주를 잇는 977도로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나중에 미군은 일본이 총독부 시절부터 작성해서 보관했던
한반도
지도로 긴급히 군사지도를 만들어서 미군과 한국군에
지급했다.]


이 지역은 좌측의 국군 1사단과 우측의 6사단 사이의
30km
빈 간격이었다. 여기에는 국군이 한 명도 없었다.


북한군은 이 방면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15사단을
충북 괴산에서 상주 방향으로 977번 도로축을 따라
침투 시켰다.


김일성이 만주 안도현에서 불량 농촌 소년들을 모아서
무장 단체를
조직했던 초기부터 따라 다니며 유격대 활동을 하던
그의 졸개
박성철이 사단장인 이 사단은 이미 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었다.


북한 15사단의 대표적인 대패는 7월 7일 충청북도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에게 호되게 당한 동락리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15사단 48연대는
궤멸적인
섬멸을 당했다..


그런데 2주가 지나 그럭저럭 재정비와 충원을 한 이 연대가
다시 남침의 선봉에 서서 화령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들어서자 주민들은
신속히
경찰라인을 따라 국군 1군단과 2군단과 정보 부서에
신고했다

1군단과 2군단, 두 군단은 정찰 부대를 내 보냈다.


[1군단 정찰대는 방원철 소령이,
2군단 정찰대는 
배상록 대위가 지휘했다.]


1군단장 김 홍일 장군-오래간만에 뵙는
사진이라 업로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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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북한군 15사단이 이 텅 비어놓은 틈을 이용해서
은밀히 남하 중임을
확인했다.


군단은 이 보고에 옹진반도에서 싸웠던
17연대를
2군단으로 배속 변경하여 이 쪽으로 급파했다.

이 연대는 옹진 반도 철수후 대전에 집결했다가
진천과 청주등에서 격전을 겪은 뒤 보은에 잠시 주둔중이었다.

17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먼저 보은의 1대대[대대장 이관수]를
급히 화령장으로 파견했다.

부대는 자정경 명에 의거 출발했다.
[연대장은 백인엽 대령이었으나 부상으로
후송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지휘]


역시 서울 시내를  행군하는 북 T-34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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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이 1950년 7월 17일 오전 07:00 이었다.

1대대가 977 도로를 타고 진입했을 때 한 주민이 차량 행렬을
가로 막고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선발대가 이미 지난밤에
이 길을 따라 상주 쪽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1 대대는 적의 부대 중간에 끼게 된 것이었다.


연대장은 적의 후속 부대가 필히 있을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야 상주로 간 부대를 놔두고 후속 부대를 치자고
결심하고 괴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977도로 중간에 있는
갈령 남쪽 방향을 따라있는 상곡리 일대에 1대대 병력으로
길게 매복진지를 만들었다.



화령장 북동쪽 977도로의 상곡리에서 
있었던 매복 전투 상황도.
푸른 선이 아군, 붉은 선이 북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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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을 완료한 부대는 매복 지대 아래 상주 쪽에 있는

상곡교에서 자전거로 북상하고 있던 북한군 연락병을
잡아 이미 선두로 상주로 내려간 부대가 박 성철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확보했다.


1대대는 이 통신 보고서에서 적 48연대가 곧 후속할 것이며
바로 1대대 매복진지 앞의
일대에서 숙영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1950년 8월 고되게 행군하는 한국군- 복장으로 보아
전투 경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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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가 조금 지나자 갈령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이 행군 대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보부대에 뒤이어 각종 포와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40여 대의 우마차를 끌고 왔으며 북한 연락병
통신문에서와
같이 국군 17연대 1대대 정면 길가에 정지하더니
대 휴식에 들어갔다.


이들의 일단은 매복 정면 북쪽인 하송리의 송계 초등학교
부근에서
휴식하고 다른 일단의 병력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했는데
이들은 학교 교정과 도로가에 사총[斜銃]한 후
경계는 소홀히 한 채
일부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마을에 들어갔는데 잠시 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의 서쪽 사면 3부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제 1 대대
장병들은 코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한군의 목욕 광경 등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면서 사격 명령이 빨리 하달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병력의 후방 390고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적이 목욕을 하는 등
무방비 상태이기는 하나
넓게 흩어져 있으므로 좀 더 좋은
여건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인 19:30분경 흩어져 목욕하던 북한군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병사들은
수저를 놀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판단한 이관수
대대장은
대대 작전장교 김희재 중위로 하여금
적색 오성 신호탄을 발사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에 따라 400여 정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고
박격포와 기관총도 쉴 사이 없이 쏘아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집결하거나 식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은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쓰러져 갔고 그 때까지도 하천에서 목욕하던 자들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쓰러졌으며 다행히 살상을 면한 자들은
부락으로 숨어들거나 삼밭에 몸을 숨겼으며 일부는 뒷산으로
도주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40여 필의 말과 소들이 포성에 놀라
날뜀으로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 1대대가 1시간 가까이 적을 섬멸하는 사이 연락을 받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전투현장에 도착하였는데 대대장이
소탕 작전을 건의하자 연대장은

“야음이 다가왔고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내일 17연대
  본대가
도착한 후에 하라“라고 명령하며 전투 현장에서
살아 남은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 매복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대장은 후방 진지에서 예비대로 있었던 제 2중대를
북한군이 행군해왔던 도로의 후방을 차단해서 도주자를 색출했다.


김희중 연대장은 어제 16일 밤에 청주 전투에서 고전을 하고
철수하여
보은에 집결하고 있던 제 2대대와 제 3대대를
화령장으로 급파시켰다.


먼지로 뒤덮힌 한국의 도로는 미군들에게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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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을 한 1대대는 살아남은 적을 색출하가며 잔적소탕을 했다.

북한군이 식사하려고 집합했던 곳은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기습 현장의 뒷 산으로 도주했던 잔적들을 소탕했다.


북한군 정치 장교 놈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아 바위 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아 !부산은 벌써 함락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저항하느냐!" 하며 속임수의 선동을 하다가
국군의 사격에 도주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살했으나 뒷산 바위틈에서 기관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박격포 사격으로도 제압되지않아 특공대를 투입해서 제압하고
보니 북한군 간부들은 기관총 사수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발목이
쇠사슬로 묶이고 기관총에 연결된 채 죽어 있었다.


[모두 단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북한군 간부들이 사병을
 희생삼아
살길을 도모했던 치사함이 노출 되어 보인다.]


전장 정리의 마무리가 끝나고 전과 확인을 해보니 포로 30여명,
사살 250명, 박격포 20문,45mm 전차포 7문, 소총 1,200정,
그리고 수점의 통신장비와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부대를 확인한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보병 2개 대대로서
통신 중대와 대전차 포 중대 및 기마대인 것이 밝혀졌다.


총을 사총[斜銃]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으므로 도주한 자들은
대부분 비무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획한 소총이 많았음에 유의]


미국 기록은 두 사람이 북한군이라고 설명했지만 평양에서
신상철 사단장과  다른 사단장이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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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18일 적의 후속 부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정보참모 유 창훈 소령을 지휘관으로 한 정보 부대를
전방으로
파괴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 현장에서 북쪽인 갈령을 넘어가서 잠복했다가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올라오는 두 명의 북한군 연락장교를
잡았다.


두 연락 장교로부터 15사단장 박 성철이 이미 궤멸된
48연대장 김 치구에게 아무런 보고하지 않음을 질책하고
49 연대가
곧 후속함을 알리는 통신문이 압수했다.


박성철은 이렇게 두들겨 맞은 48연대의 운명을 알지도
못 했을 뿐더러
후속 연대가 뒤따른 것이라는 것을 국군에게
알려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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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대 상곡리 기습에서 후방으로 도주해서 48 연대가
 섬멸되었음을 
제대로 보고한 적군이 한 명도 없었을 뿐더러
 [전멸을 의미함]북에 정보 협조해주는
주민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군이 정보 획득에 주민들의 절대적인 협조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또한 중요 정보를 자전거를 탄 전령들로부터 연달아
 두번이나 입수한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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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연대장은 19일 전투후 적을 기습하기로 하고
송호림 소령이 지휘하는
2대대를 파견했다.


2대대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1대대가 대첩을 거둔
577도로의 위쪽,
즉 갈령과 기습 현장인 심곡리 사이에 있는
동관리와 하성리 중간 계곡에
매복진지를 구축했다.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며칠 전 차량 전복 사고로 기동조차
불편한
형편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진지를 구축하고 후속할
적 49연대를 기다렸다.


그는 적이 계곡 안에만 들어와 준다면 일개 연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대대가 집결지인 화령장에서 동관리로 이동하여 매복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대대가 전장 정리를 완료한 20;00이었다.


아래 심곡리에서 윗쪽으로 올라간 곳인 동관리에서
화령장의 두번째 전투가 벌어졌다.[3개 중대의 공격선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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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중대를 적이 들어올 입구인 좌측 갈령 쪽, 5중대를 중앙,
6중대를 적이 나가는 방향인 우측 상주 쪽 으로 배치했다.


다음날 7월 19일 16;00시 말을 탄 적 장교 두 명이 인솔하는
우마차 20대와 적 20여명이 7 중대 매복 망에 들어왔다.


대부대를 기다리는 대대로서 그냥 통과 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 병사가 선두 기마 장교를 우발적으로 사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7 중대는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기습으로 적병 17명, 소 두 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두 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했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는
많은 양의 탄약과 식량들을 노획하였다.

이들이 징발했던 민간인 두 명도 희생된 것은 유감이엇다.


송 호림 대대장은 이 우발 사격을 크게 질책하고
대대 관측소를
전방의 7중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더 이상의 
실수가 
없도록 중대를 직접 통제했다.


다음날 7월 20일 새벽이 되었지만 적정이 없었다.
송 호림 대대장은 연대 본부에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김희준 중령이 이거 우리가 속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2대대 철수를 생각할 때 선두 7중대장 조 경학 중위는
송 호림 대대장에게 피아 식별 불능의 대병력이 갈령에서
도로를 따라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한군의 훈련. 앞에 지형 모형 사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술 훈련중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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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훤히 샐 무렵이었지만 골짜기는 안개가 온통

뒤 덮여 길 위로 이동하는 부대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적 부대는 4열 종대로 행군해 오고 있었다.


적 부대는 7중대 앞을 이미 통과하여 선두 부대는
7중대 화망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송호림 대대장으로부터 적 식별을 분명히 하라는 지시를
받은 조경학 중위는 유선 전화기로 안개 사이에 희미하게
통과하는 대부대에 관한 관측 정보를 계속 보고하였다.

“배낭 같은 것을 모두 메고 있다.”

“총에 긴 송곳 같은 것이 꽂혀 있다.[총창이다]”

“바퀴 달린 기관총을 끌고 가고 있다.[수냉식 맥심 기관총이다.]”
등의 정보를 보고하는 조 중위는 이 대열이 분명 적이라고
판단하는
어조였다.


소제 수냉식 1910년 맥심 기관총.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체코 군에게서 
구입한 이 기관총들로 일본군을 격멸함,
바퀴가 달려 있어서 강아지처럼 줄을 매어 끌고
이동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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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군은 한강 이북에서 배낭을 모두 잃어버려서
배낭이 없는 상태였고 배낭이 있는 부대도 배낭은 차량으로
운송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피아 식별을 하고 싶었던
송 호림 대대장은
주저했다.


적이 7중대를 통과하여 좌측 6중대 지역으로 진입하자
6중대장 곽성범 중위는 이들의 선두가 중대 정면을 지나가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빨리 사격명령을 내려주기기를 간청했다.


김희준 연대장에게 보고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송호림 대대장은 자신의 판단으로 아군 부대를 잘못
공격했을 때는
죽음으로 속죄하기로 하고 적색
오성 신호탄 3 발을 쐈다.
전 대대 동시 사격 명령이었다.


명령일하 전대대의 화력이 도로에서 행군하던 적에게 쏟아졌다.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대는 적 후미인 갈령 방향에는 81mm 박격포로 견제사격을 하고
중대간의 중기관총으로 교착사격을 하며 도로 건너편 개활지와
산으로 도주한 적에게는 중대의 60mm 박격포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 화기는 977번 도로를 최저 표적사 할 수도 있도록
지가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안개로 인하여 표적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격만
하면 화망 안에 깔려든 적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숨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뛰었으나
은폐물이 없는데다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쓰려져 갔고 일부 병력은 논바닥에 엎드려 저항을 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송호림 대대장은 불편한 몸 상태를 잊고 붉은 기를
흔들며 “죽여라! 죽여라!”하고 부대를 독려하였다.


08:00경 안개가 걷힌 후 977도로 위와 논바닥에는 시체와
장비가 즐비하였고 아직도 삶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삭발한 머리였다.
박박깎은 머리는 북한군의 특징이다.

기습한 국군은 이들이 진짜
북한군들임을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반대편 산으로 도주했던 적들은 미리 746고지에 배치했던
7중대의 1개 소대에 격멸되었다.


이틀 전 1대대의 상곡리 전투에서는 이 배비가 없어서 적들이
반대편 산에
붙어 저항했지만 이번에는 아래 계곡해서
도주해 오는 북한군을  산정에서 사정없이
쏴 거꾸러뜨렸다.

09:00, 제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예비로 있던 제 6중대로
하여금 잔적 소탕을 하게 하였다.


6중대가 소탕 작전을 전개하자 이때까지 죽지않고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북한군들은 상당한 저항을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소탕 되었다.


이 당시 5중대에 탄약 추진차 갔다가 전투를 관전하게 된
하송리의 박 무진 씨는

“적이 길 위와 논바닥에 새카맣게 쓰려져 있었는데 7-8명이
 
하천 직경 70cm의 배수관 속으로 기어 들어가자
  소탕 작전을 하던
국군 한 명이 배수관 속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았어요. 
  국군들은 참 용감하였습니다.“

이날 작전은 오후 14;00에 종료되었다.


송호림의 2대대는 적 현장 확인 사살 356명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 며칠 후 현지민들이 논과 도로에서 모아다가
매장한 적군 시체만 600구가 넘었었다.

노획 무기로서 박격포 16문, 반 탱크 총 2문,
기관총[수냉식 15문, 경기관총 15문, 체코 식 경기관총 23정,]
소총 186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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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멸된 15사단의 두 연대 보유 노획 무기가 빈약함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주전인 1950년 7월 7일, 국군이 충북 동락리에서 6사단
7연대에게
1차로 격멸당한 48연대에서 거둔 노획품은 막대했다.

동락리 사살은 2186명, 포로가 132명,

노획 장비는 122mm 곡사포가 6문,
76mm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12.7mm 중기관총 6정,
장갑차 4량, 2 1/2트럭 60대, 1/4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등이다.


탄피를 수거하고 있는 국군, 탄피의 양으로 보아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화령장 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 24연대가 이어 받아 7월 25일까지
계속되었고 북한군과 미군사이에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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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북한 연대는 남침 때는 완전 차량화 되어 있었다.
참패했던 동락리에서도 전 연대가 차량을 타고
매복선에 들어와서 주차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이 동락리 전투에서 막대하게 노획했던
차량과 중포가 화령장에서는 전무함이 들어난다.


보건데 적 15사단 48연대는 동락리에서 전 장비를 상실하고
인원만을 급히 충원했지만 한국 침공 개전 때의 화려한 장비는
북한으로부터 재보급 받지 못해 우마차나 자전거 같이
빈약한 것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48연대장 김치구 중좌는 동락리 전투 대패후
국군이
다 후퇴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며
지방 주민들을 수 십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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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리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에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 15사단은 15:00에야 자기들 연대가 섬멸된 것을 알고
감히 갈령을 넘어 오지는 못하고 포격만 했지만 2대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이미 진지 이동을 한 뒤였다.


김 일성이 생각없이 일으킨 6.25남침으로 남북 양쪽의
주민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손자를 데리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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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령장에서 적 15사단의 두 개 연대를 섬멸하는 승리에는
한국군 정보부대의 민활한 활동에 크게 힘입은 바가 컸지만
현지 주민들의 협조가 압도적인 공헌을 하였다.


화령장 주민들은 첫 첩보 부대인 방 원철 부대나
배 상록 부대가 화령장에
파견되었을 때부터 국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는데
대한 청년단원들은 단장
김 기영을 중심으로 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마을을
경비하며 보급 추진 업무를
도와주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탄약 운반이나 취사 업무등은
우리가 맡을 터이니 군인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장에 나가서
적을 물리치도록 해 달라“고 하면서
탄약 운반, 취사등을 자원했으며
박 삼덕[청년 단원- 38세]씨는
자신의 약방을 치료소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약품을 지원하고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서울 탈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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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철은 동락리와 화령장 두 번의 대패로 사단장에서 해임되었다.


김일성이 아무리 신임하던 졸개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대패에는 어쩔 수없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사단은 남침 3개월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급조직
된 사단으로서 출발 초기부터 그 전투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북한 군부내있었다.

그래서 남침초기 최 선봉에도 서지 못하고 예비대로
따라오다가 국군과 맞붙으면서 그 문젯점을 여지없이 들어냈다.

무기를 다 빼았기고 문자 그대로 거덜이 난 이 15사단은
두 달간 계속된 낙동강 전투에서 옹골진 전투력 한 번
발휘하지 못하고 비실대다가 북으로 패주했다.

15사는 6·25전쟁 최약체 북한 사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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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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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령장 2010.10.06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어이없겠네요... 아니 말을 탔다고 북한군으로 간주하다니.... 본 순간 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

  2. 화령장 2010.10.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 분 무슨 소리하고 있는가 ?

    본순간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라고 ?

    말을탔다고 붃한군으로 간주했다니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나?

  3. chaffee2090 2010.10.07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탄피 회수 장면은 실제 화령장 전투 당시가 아닌 것이라는 얘기죠?

  4. 조조 2010.10.24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럭리 전투에서 대패한 15사단 박 성철의 군대가 화령장에서 다시 국군의 재물이 됏구먼 북괴15사는 완전 봉이였구먼,,,,ㅎㅎ 정말 웃기는 넘들이엿군 15사

  5. clothing factory 2011.05.25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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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free facebook likes 2014.03.09 2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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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반격 대첩-동락리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26 08:37

이번  포스팅 글은 한강 이북에서 기습을 당해 참패를
당하고 후퇴하던
국군이 전쟁 발발 12일 만인 1950년 7월7일
충북 진천군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2 대대가 2개 중대도
안 되는 병력으로
적 15사단 1개 연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킨
전투를 소개하는 글이다.


전략의 본질이 공격이고 그 이상적인 형태는 기습임을

상기해보면 동락리 전투야 말로 대첩(大捷)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없는 6·25전쟁 최대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독립문에 선전물을 붙이는 북한군
---------------------------------


더구나 한강 이북에서 대패를 하고 미국을 위시한 여러 우방국으로

부터 그 전투력에 불신을 사던 한국군이 한판의 대승으로
면목을 일신한
전투이기도 하다.


승리의 주역에 대해서는 몇 주 전 이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다.

춘천 시 외곽 원창고개에서 북한군에게 기만을 당해 다 잡았던

완벽한 승리의 영예를 내놓고 철수했던 6사단
김종수 대대[7연대 2대대]다.


대승과 대패를 오갔던 풍운아 6사단의 부대답게 2대대는
대승을
동락리에서 거두고 실추한 위신을 당당히 회복하였다. 
[당시 충북 음성군 신니면 동락리, 현재는 충주시]



서울 점령후 한강을 도강하여 남하하는 북한군
--------------------------------------------

이 전투에 대한 기록과 설이 여러 가지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1960년대에 아직 전투의 기억이 생생했던 김종수

[욱군 중장-수산청장역임]장군이 일본 방위대학의

사사키 하루다카 씨[한국전쟁 전문가]에게

직접 회상한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  ----  ----

7월 7일 임부택 연대장으로부터 가엽산에서 644고지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개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자 도중에 큰 사찰이 있어 많은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부녀자이며 멍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약간 세련된 느낌의 아가씨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쏘아 보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에 걸렸으므로 정보장교에게 물어보게 한바, 그녀는

동락국민학교의 교사라고 신분을 밝혔다. 말을 걸자

“지난 날에는 국군을 태산같이 믿고 있었는데

지금은 무슨 꼴이냐 ?“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 같은 고생을 시키느냐?”

하고 거리낌 없이 울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슴이 죄어지고
기분이 무거워졌다.

춘천에서 이곳까지 후퇴하는 도중에도 무수한 피난민의
참상을 보고
가슴이 아팠는데 국민으로부터 직접 이같이
후퇴의 책임을 추궁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어떻게라도 전쟁에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신에게 타이르고 결의에 불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답답한 심정으로 고지에 올라 진지 편성에 착수했다.


당시의 대대 실 병력은 300명 정도였었고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부대원들이 참호를 파기 시작했으므로 망원경으로
산 아래를 둘러보자
적의 대부대가 동락국민 학교 교정에
모여 있었다.

[민간인이 달려와서 제보했다는 설도 있다.]


북진하는 국군
-------------


포나 인원수는 대충 눈어림해보자 실로 1개 연대의 대병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없었던 것이 이런 대부대가

아무런 경계를 안하고 있었다.


아마 패주에 급급했던 한국군들을 깔보는 분위기가 북한군
부대에 퍼져있던 것이
이런 느슨한 경계태세를 취하게
만든 것 같아 보였다.


적은 15사단이었다.

나는 중대장을 모으고 긴급 작전회의를 하였다.


중대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이상의 기회는 없다! 공격하자!”고 했다.


확실히 절호의 기회이었으나 내 임무는 644고지의 확보였으므로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축한 방어선을 버리고 산을 내려가서 적을 공격하는 것은

임무 밖이므로 작전 명령의 변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대와의 통신 수단은 없었으며 지휘소에 내려가

임부택 연대장의 인가를 받을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적을 공격하기에 대대는 병력도 부족했고 중화기라고는

81mm 박격포 1문과 50구경 기관총 1 정뿐이었다.

적 대부대를 공격하기에 너무 화력도 약했다.


중대장들은 자꾸만 공격하자고 졸랐다.

망설였으나 마침내 독단으로 공격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 결심에는 여교사의 꾸중을 들은 것이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피난민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자는 생각도

들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3명의 중대장과 작전회의를 통하여 1개 중대씩 적을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기로 했다.


작전은 곧 개시되었다.

사격 개시 시간을 17:00으로 미리 정했다.

시간이 되면 별도의 대대장의 별도 명령 없이 중대장이 알아서

사격명령과 공격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미리 정한 1700 대대의 제 6중대는 집중 사격을 개시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우왕좌왕하고 그늘에 숨었으나

교정에 정열 해 놓은 적 포들은 포구를 6중대 쪽으로 돌리고

시사(試射)했다.



소련제 76mm 사단포 방탄 장갑이 있다.
이 포는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약간 개조 된 PAK39 포다.
---------------------------------------------------


그래서 김종수 대대장은 즉각 박격포 반장 

신동관[7기-준장예편]
중위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포신만 있고 포판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윽고 북한군 포병은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제 6중대는

폭연(爆煙)에 덮였다.

전멸했는가 싶을 정도로 지독한 포격이었다.


거기에 포판이 도착했으므로 신중위는 직접 조준으로
제 1탄을 발사했다.

사거리는 300미터 정도였다.

놀랍게도 초탄부터 적 포병들의 한가운데 떨어져 폭발하면서

적병 수 명을 날렸다.



미군이 2차 세계 대전시 사용하던 81mm 박격포
-------------------------------------------

이어 신 중위는 효력사로 옮겨 최대 발사 속도로

지역사격을
가하자 적의 포병은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제 7중대의 기관총 소사(掃射)에 포착되었다.


또한 동쪽으로 도망친 북한군은 용원리의
제 3대대에게 섬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3대대의 역할이 크다는 이설도 비중이 크다.]

도망칠 곳을 잃은 북한군은 뿔뿔히 흩어져서 야음을 타고

북쪽 산속으로 궤란해갔다.


다음 8일 날이 새는 동시에 전장 청소했던바 유기시체만
800여구를
헤아렸으며 포로 90여명을 잡았다.


그 중에는 북한 제 15사단의 군수 참모인 모 소좌나

제 48연대 본부 중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의 진술을 종합해보면 이 적은 북한 제 48연대였는데
민간인들로부터 무극리 부근의 국군은 전부 철수했다고
들었으므로 안심하고 동락리에서 연대 정지를 했다.


저녁 식사 후에 다시 행군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므로
전연 경계하지 않았다.


제 2대대장이하 많은 장교가 전사했다.


대 승리를 올린 제 2대대 용사들은 자기들이 올린 전과에

스스로들 놀랐다.

막대한 전리품이 동락리 국민 학교 주변에 유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76mm포 12문 장갑차 3량, 박격포 35문, 각종 기관총 47정,

소총류는 약 1,000정, 차량 60량, 무선기 기타 다수였다.

또한 기막히게 놀랄 일은 이런 전과를 올린대대의 아군의 손상은

단 1명의 경상자뿐이었다.


6사단은 이 전리품들의 수송을 위해서 사단의 수송수단을
총 동원해서
대전의 수송되어서 시민들에게도 전시가 되었다.

동락리 대승은 거듭된 패퇴에 의기소침했던 민과 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했다.

각종 무기는 1점씩 유엔 본부에 보내져 북한 침략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크게 기뻐한 이승만 대통령은 전대대 장병들을
1계급씩 특진 시켰다.

이 전투의 후일담이 여럿 있다.

대패를 당한 15사단 사단장 박성철은 해임되었다.

이 정도라면 군인으로서 그 생명은 끝장이 나겠지만

박성철은 10대 때부터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에 그의

똘마니로 따라 다녔던 관계로 신임이 깊었다.


나중에 다시 중용되어 1971년 최초의 남북 대화 때
남한을
방문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었다.


--------------------------------------------------------

경험 없고 무식했던 빨치산 부대 출신 사단장
[박성철, 오백룡, 최용진등]들은 실전에서 국공 내전에서
단련된 중국 해방군 출신 사단장[김웅, 방호산, 이권무]들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역량이 못 미침을 들어냈었다.

박성철의 대패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


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주민들이 알려준 것은 거짓 정보가 아니었는데도 대패배로
머리가 돌은
그에게 진위를 따질 기분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대전에서 학살한 양민들- 국군 포로들과
미군 포로도 학살했다.
------------------------------------


그리고 이 전투 자체보다도 한국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은 김종수 대대장을 부끄럽게 만든 김재옥 교사다.


그녀는 나중에 군인 김득주 중령과 결혼했다.

1963년 그녀에게 불행이 닥쳐와 고재봉이라는 살인범에 의해서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일가족이 오인 살해당했다

[그가 원한을 가졌던 전임 대대장 가족으로 오인했었다.
전임 대대장 부인은 고재봉을 절도로 고발해서
영창에 갔다오게 했었다.].


그 녀의 이야기는 영화 '전쟁과 여교사'로도 만들어 졌었다.

현재의 충주시 동락리 격전장에 그녀의 추모비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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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코비치 2010.07.26 15: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한국전쟁 관련 포스팅을 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혹시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미군, 국군에 의한 것은 많이 나와 있는데, 북한군에 의한 것은 찾기가 어렵더군요.

  2. 김현수 2010.07.29 13: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국을 수호했던 선열 들이시여 삼가 감사 드립니다,

  3. 팬클럽회장 2010.08.01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재옥씨 배우자는 2대대 중위였던 이득주라고 인터넷에 나오네요. 그리고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신동관 아니고..)중위가 행양경찰대장때 현충비를 세웠답니다.

  4. Jeremy 2010.08.25 0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신지요.

    고 정일권 총리의 회고록(당시 참모총장이었죠)에도 첫번째 승리로 저 전투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요, 그 책에는 한 여교사가 제보했다고 나와있습니다. 동일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5. united healthcare rate increases missouri 2012.05.26 1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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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Greentree Legal Team 2014.04.10 16: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대가 전멸당한 북한군 48연대 민치구 중좌는 자기에게
    국군이 없다고 알려 준 동락리 인접 무극리의 주민들
    남녀노소를 마구 학살을 했다.

  10. http://andersenconstruction.co 2014.04.13 17: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제 6중대와 제 5중대가 협격하자 북한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되어 퇴로를

25. 그해 9월의 마지막 혈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3.15 11:03



  폭염 속에 계속된 북한군의 8월공세가 아군의 선방으로 실패하였지만 그렇다고 북한군이 부산 함락에 대한 희망까지 완전히 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8월 공세가 서서히 둔화될 시점부터 오히려 북한군은 기존의 제8, 13사단 외에도 제7, 9, 10사단 등 3개 사단을 추가로 전선에 투입했는데 이것은 당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이었을 만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 9월공세에 쏟아 부었습니다.



[9월이 되자 북한군의 새로운 공세가 개시되었습니다]


  북한군은 8월 31일 마산-창녕일대의 서남부에서부터 공세를 재개하여 9월 2일에는 왜관-포항에 이르는 동북부전선에서도 공세를 시작하였는데, 서남부 지역을 먼저 공격한 이유는 유엔군의 시선을 그쪽으로 끌리게 하여 제9군 예비대의 이동을 촉진시킨 후, 동북부 지역으로 돌파구를 열려고 하던 전형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였습니다. 비록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전력균형은 서서히 국군과 유엔군의 우세로 바뀌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전선의 주도권은 북한군이 잡고 있어서 9월공세의 초전 분위기는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공세 첫날, 마산 정면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6, 7사단은 미 제25사단을 함안까지 밀어붙였고, 영산 및 창녕 일대를 공격한 북한군 제2, 4, 9사단은 미 제2사단이 담당한 방어선의 가운데를 돌파하여 미 제2사단을 창녕과 영산 지역으로 양분시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제8군사령부는 예비대를 영산에 투입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군이 원하던 바였습니다. 아군 예비대가 서남부로 움직이자 9월 2일부터 북한군 제2군단이 왜관-다부동 지역과 신령-영천지역, 안강-포항 지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마산지역에서 노획된 북한군 장비]


  이러한 북한군의 9월 공세는 과연 미 제8군이 부산을 지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게 만들만큼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그 기세 또한 격렬하여 지난 8월 내내 시체로 산을 쌓았던 다부동, 영천은 또 다시 피로 물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 제1사단을 대신하여 다부동에 투입된 미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자마자 불과 3일 만에 다부동을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킬로미터 후방으로 철수하고 말았고 9월 5일이 되었을 때 아군의 엄청난 손실에 놀란 제8군사령부는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를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회심의 반전 카드인 인천상륙작전을 위해서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야 했고 누구의 인내심이 더 큰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9월 12일 북한군의 공세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 10킬로미터 전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돈좌시켰습니다.


  다부동 돌파와 더불어 북한군 제8, 12, 15사단이 신령, 안강, 영천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하면서 이곳의 위기도 함께 고조되어 갔습니다. 특히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열려진 간격으로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하여 영천을 점령하면서 중․동부 전선이 순식간 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위기에 직면한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은 제1,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 씩 차출하여 영천에 투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북한군 제15사단은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는데 이것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북한군은 낙동강을 넘지 못하였고 대한민국은 살아났습니다.]


  제15사단을 측면에서 지원할 북한군 제8사단이 아군에게 격퇴당하며 움직이지 못하자 어느새 홀로 떨어진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9월 8일 국군은 영천을 탈환함과 동시에 9월 10일, 북한군 제15사단을 완전 포위섬멸하면서 북한군의 9월 공세를 막아내었는데 이로써 북한군 제15사단은 동락리 전투, 화령장 전투에 이어 영천 전투로 세 번째의 참패를 당하는 치욕을 맛보았습니다. 결국 여름의 마지막에 시작된 북한군의 9월 공세는 영천 전투를 마지막으로 서서히 막을 내렸고 대한민국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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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히 둔화될 시점부터 오히려 북한군은 기존의 제8, 13사단 외에도 제7, 9, 10사단 등 3개 사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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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어디서 출항했느냐’는 뜻의 신호 불빛이 또다시 대한해협의 검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파도 저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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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어디서 출항했느냐’는 뜻의 신호 불빛이 또다시 대한해협의 검푸른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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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전선 돌파의 주역으로 맹활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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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 오히려 북한군은 기존의 제8, 13사단 외에도 제7, 9, 10사단 등 3개 사단을 추가로 전선에 투입했는데 이것은 당시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이었을 만큼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한 9월공세에 쏟아 부었습니다.


  15. http://www.superman-stamina.net 2013.05.18 17: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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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Social Bookmark 2013.05.27 0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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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http://theptnet.com 2013.06.25 18: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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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see this 2013.07.20 20: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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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filing for bankruptcy 2013.07.31 06: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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