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연대'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10.06 화령장 전투 (10)
  2. 2010.09.07 78. 국군 제6사단의 와신상담 (40)
  3. 2010.07.13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 [ 2 ] (10)

화령장 전투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10.06 08:24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퇴각하던 암울한 시기, 
대승리를 거둔 화령장 전투는 1950년 7월 17일과
7월 20일 양일간, 경북 상주군 화령장 인근 상곡리와
동관리에서 아군 17연대가 적 15사단을 격파한 대첩을 말한다. 

북한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은 7월 중순,
충청북도를 지나 경상북도까지 물러섰다.


서울 점령후 시가 행진하는 북한군 -이 때만 해도 김일성은
남한을 금방 먹어 치울 줄 알았었다.
---------------------------------------------------------


한반도 중앙 축선에서 후퇴하던 국군은 초등학교의 엉성한
괘도를 가지고
작전을 짜느라 괴산과 상주를 잇는 977도로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었다.


[나중에 미군은 일본이 총독부 시절부터 작성해서 보관했던
한반도
지도로 긴급히 군사지도를 만들어서 미군과 한국군에
지급했다.]


이 지역은 좌측의 국군 1사단과 우측의 6사단 사이의
30km
빈 간격이었다. 여기에는 국군이 한 명도 없었다.


북한군은 이 방면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15사단을
충북 괴산에서 상주 방향으로 977번 도로축을 따라
침투 시켰다.


김일성이 만주 안도현에서 불량 농촌 소년들을 모아서
무장 단체를
조직했던 초기부터 따라 다니며 유격대 활동을 하던
그의 졸개
박성철이 사단장인 이 사단은 이미 국군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었다.


북한 15사단의 대표적인 대패는 7월 7일 충청북도 동락리에서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에게 호되게 당한 동락리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김치구 중좌가 지휘하는 15사단 48연대는
궤멸적인
섬멸을 당했다..


그런데 2주가 지나 그럭저럭 재정비와 충원을 한 이 연대가
다시 남침의 선봉에 서서 화령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 부대가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들어서자 주민들은
신속히
경찰라인을 따라 국군 1군단과 2군단과 정보 부서에
신고했다

1군단과 2군단, 두 군단은 정찰 부대를 내 보냈다.


[1군단 정찰대는 방원철 소령이,
2군단 정찰대는 
배상록 대위가 지휘했다.]


1군단장 김 홍일 장군-오래간만에 뵙는
사진이라 업로딩한다.
------------------------------------

결과 북한군 15사단이 이 텅 비어놓은 틈을 이용해서
은밀히 남하 중임을
확인했다.


군단은 이 보고에 옹진반도에서 싸웠던
17연대를
2군단으로 배속 변경하여 이 쪽으로 급파했다.

이 연대는 옹진 반도 철수후 대전에 집결했다가
진천과 청주등에서 격전을 겪은 뒤 보은에 잠시 주둔중이었다.

17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먼저 보은의 1대대[대대장 이관수]를
급히 화령장으로 파견했다.

부대는 자정경 명에 의거 출발했다.
[연대장은 백인엽 대령이었으나 부상으로
후송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지휘]


역시 서울 시내를  행군하는 북 T-34 탱크.
----------------------------------------

이 날이 1950년 7월 17일 오전 07:00 이었다.

1대대가 977 도로를 타고 진입했을 때 한 주민이 차량 행렬을
가로 막고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 선발대가 이미 지난밤에
이 길을 따라 상주 쪽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1 대대는 적의 부대 중간에 끼게 된 것이었다.


연대장은 적의 후속 부대가 필히 있을 것이니
이렇게 된 바에야 상주로 간 부대를 놔두고 후속 부대를 치자고
결심하고 괴산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977도로 중간에 있는
갈령 남쪽 방향을 따라있는 상곡리 일대에 1대대 병력으로
길게 매복진지를 만들었다.



화령장 북동쪽 977도로의 상곡리에서 
있었던 매복 전투 상황도.
푸른 선이 아군, 붉은 선이 북한군이다.
-------------------------------------


매복을 완료한 부대는 매복 지대 아래 상주 쪽에 있는

상곡교에서 자전거로 북상하고 있던 북한군 연락병을
잡아 이미 선두로 상주로 내려간 부대가 박 성철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확보했다.


1대대는 이 통신 보고서에서 적 48연대가 곧 후속할 것이며
바로 1대대 매복진지 앞의
일대에서 숙영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1950년 8월 고되게 행군하는 한국군- 복장으로 보아
전투 경찰로 보인다.
------------------------------------------------


16:00가 조금 지나자 갈령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이 행군 대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보부대에 뒤이어 각종 포와 탄약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40여 대의 우마차를 끌고 왔으며 북한 연락병
통신문에서와
같이 국군 17연대 1대대 정면 길가에 정지하더니
대 휴식에 들어갔다.


이들의 일단은 매복 정면 북쪽인 하송리의 송계 초등학교
부근에서
휴식하고 다른 일단의 병력은 상곡리 일대에서
휴식했는데
이들은 학교 교정과 도로가에 사총[斜銃]한 후
경계는 소홀히 한 채
일부는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가 하면
일부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마을에 들어갔는데 잠시 후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들은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군의 서쪽 사면 3부 능선에 매복하고 있던 제 1 대대
장병들은 코밑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한군의 목욕 광경 등을
숨을 죽이며
지켜보면서 사격 명령이 빨리 하달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매복 병력의 후방 390고지에서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적이 목욕을 하는 등
무방비 상태이기는 하나
넓게 흩어져 있으므로 좀 더 좋은
여건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인 19:30분경 흩어져 목욕하던 북한군 병사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집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병사들은
수저를 놀리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가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판단한 이관수
대대장은
대대 작전장교 김희재 중위로 하여금
적색 오성 신호탄을 발사하여
사격명령을 내렸다.

대대장의 사격명령에 따라 400여 정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고
박격포와 기관총도 쉴 사이 없이 쏘아댔다.


저녁 식사를 하려고 집결하거나 식사를 하고 있던 북한군은
불의의
집중사격을 받고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쓰러져 갔고 그 때까지도 하천에서 목욕하던 자들은
옷을 입지도 못한 채 쓰러졌으며 다행히 살상을 면한 자들은
부락으로 숨어들거나 삼밭에 몸을 숨겼으며 일부는 뒷산으로
도주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40여 필의 말과 소들이 포성에 놀라
날뜀으로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제 1대대가 1시간 가까이 적을 섬멸하는 사이 연락을 받은
연대장 김희준 중령이 전투현장에 도착하였는데 대대장이
소탕 작전을 건의하자 연대장은

“야음이 다가왔고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내일 17연대
  본대가
도착한 후에 하라“라고 명령하며 전투 현장에서
살아 남은 적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 매복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대대장은 후방 진지에서 예비대로 있었던 제 2중대를
북한군이 행군해왔던 도로의 후방을 차단해서 도주자를 색출했다.


김희중 연대장은 어제 16일 밤에 청주 전투에서 고전을 하고
철수하여
보은에 집결하고 있던 제 2대대와 제 3대대를
화령장으로 급파시켰다.


먼지로 뒤덮힌 한국의 도로는 미군들에게 고역이었다.
--------------------------------------------------

대승을 한 1대대는 살아남은 적을 색출하가며 잔적소탕을 했다.

북한군이 식사하려고 집합했던 곳은 시체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기습 현장의 뒷 산으로 도주했던 잔적들을 소탕했다.


북한군 정치 장교 놈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아 바위 뒤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아 !부산은 벌써 함락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저항하느냐!" 하며 속임수의 선동을 하다가
국군의 사격에 도주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살했으나 뒷산 바위틈에서 기관총탄이 계속 날아왔다.


박격포 사격으로도 제압되지않아 특공대를 투입해서 제압하고
보니 북한군 간부들은 기관총 사수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발목이
쇠사슬로 묶이고 기관총에 연결된 채 죽어 있었다.


[모두 단 죽어가는 현장에서도 북한군 간부들이 사병을
 희생삼아
살길을 도모했던 치사함이 노출 되어 보인다.]


전장 정리의 마무리가 끝나고 전과 확인을 해보니 포로 30여명,
사살 250명, 박격포 20문,45mm 전차포 7문, 소총 1,200정,
그리고 수점의 통신장비와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부대를 확인한바 북한군 15사단 48연대의 보병 2개 대대로서
통신 중대와 대전차 포 중대 및 기마대인 것이 밝혀졌다.


총을 사총[斜銃]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으므로 도주한 자들은
대부분 비무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노획한 소총이 많았음에 유의]


미국 기록은 두 사람이 북한군이라고 설명했지만 평양에서
신상철 사단장과  다른 사단장이 촬영한 것이다.
------------------------------------------------------


연대장 김희준 중령은 18일 적의 후속 부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정보참모 유 창훈 소령을 지휘관으로 한 정보 부대를
전방으로
파괴하였다.


이 부대는 전투 현장에서 북쪽인 갈령을 넘어가서 잠복했다가
자전거를 타고 고개를 올라오는 두 명의 북한군 연락장교를
잡았다.


두 연락 장교로부터 15사단장 박 성철이 이미 궤멸된
48연대장 김 치구에게 아무런 보고하지 않음을 질책하고
49 연대가
곧 후속함을 알리는 통신문이 압수했다.


박성철은 이렇게 두들겨 맞은 48연대의 운명을 알지도
못 했을 뿐더러
후속 연대가 뒤따른 것이라는 것을 국군에게
알려준 것이다.

-------------------------------------------------------
 1대대 상곡리 기습에서 후방으로 도주해서 48 연대가
 섬멸되었음을 
제대로 보고한 적군이 한 명도 없었을 뿐더러
 [전멸을 의미함]북에 정보 협조해주는
주민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군이 정보 획득에 주민들의 절대적인 협조를 받은 것과
 대비된다.


 또한 중요 정보를 자전거를 탄 전령들로부터 연달아
 두번이나 입수한 것이 특이하다.
-----------------------------------------------------

김희준 연대장은 19일 전투후 적을 기습하기로 하고
송호림 소령이 지휘하는
2대대를 파견했다.


2대대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1대대가 대첩을 거둔
577도로의 위쪽,
즉 갈령과 기습 현장인 심곡리 사이에 있는
동관리와 하성리 중간 계곡에
매복진지를 구축했다.


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며칠 전 차량 전복 사고로 기동조차
불편한
형편이었지만 용기를 내어 진지를 구축하고 후속할
적 49연대를 기다렸다.


그는 적이 계곡 안에만 들어와 준다면 일개 연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대대가 집결지인 화령장에서 동관리로 이동하여 매복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1대대가 전장 정리를 완료한 20;00이었다.


아래 심곡리에서 윗쪽으로 올라간 곳인 동관리에서
화령장의 두번째 전투가 벌어졌다.[3개 중대의 공격선이
표시되어 있다.
----------------------------------------------------


7중대를 적이 들어올 입구인 좌측 갈령 쪽, 5중대를 중앙,
6중대를 적이 나가는 방향인 우측 상주 쪽 으로 배치했다.


다음날 7월 19일 16;00시 말을 탄 적 장교 두 명이 인솔하는
우마차 20대와 적 20여명이 7 중대 매복 망에 들어왔다.


대부대를 기다리는 대대로서 그냥 통과 시키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 병사가 선두 기마 장교를 우발적으로 사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7 중대는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 기습으로 적병 17명, 소 두 마리, 말 3마리를 사살하고
소 두 마리와
말 9마리를 생포했으며 우마차에 실려 있는
많은 양의 탄약과 식량들을 노획하였다.

이들이 징발했던 민간인 두 명도 희생된 것은 유감이엇다.


송 호림 대대장은 이 우발 사격을 크게 질책하고
대대 관측소를
전방의 7중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더 이상의 
실수가 
없도록 중대를 직접 통제했다.


다음날 7월 20일 새벽이 되었지만 적정이 없었다.
송 호림 대대장은 연대 본부에 이상 없음을 보고했다.


김희준 중령이 이거 우리가 속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어 2대대 철수를 생각할 때 선두 7중대장 조 경학 중위는
송 호림 대대장에게 피아 식별 불능의 대병력이 갈령에서
도로를 따라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북한군의 훈련. 앞에 지형 모형 사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술 훈련중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


날이 훤히 샐 무렵이었지만 골짜기는 안개가 온통

뒤 덮여 길 위로 이동하는 부대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적 부대는 4열 종대로 행군해 오고 있었다.


적 부대는 7중대 앞을 이미 통과하여 선두 부대는
7중대 화망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송호림 대대장으로부터 적 식별을 분명히 하라는 지시를
받은 조경학 중위는 유선 전화기로 안개 사이에 희미하게
통과하는 대부대에 관한 관측 정보를 계속 보고하였다.

“배낭 같은 것을 모두 메고 있다.”

“총에 긴 송곳 같은 것이 꽂혀 있다.[총창이다]”

“바퀴 달린 기관총을 끌고 가고 있다.[수냉식 맥심 기관총이다.]”
등의 정보를 보고하는 조 중위는 이 대열이 분명 적이라고
판단하는
어조였다.


소제 수냉식 1910년 맥심 기관총.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이 체코 군에게서 
구입한 이 기관총들로 일본군을 격멸함,
바퀴가 달려 있어서 강아지처럼 줄을 매어 끌고
이동할 수가 있다.
-----------------------------------------------


당시 한국군은 한강 이북에서 배낭을 모두 잃어버려서
배낭이 없는 상태였고 배낭이 있는 부대도 배낭은 차량으로
운송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피아 식별을 하고 싶었던
송 호림 대대장은
주저했다.


적이 7중대를 통과하여 좌측 6중대 지역으로 진입하자
6중대장 곽성범 중위는 이들의 선두가 중대 정면을 지나가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빨리 사격명령을 내려주기기를 간청했다.


김희준 연대장에게 보고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송호림 대대장은 자신의 판단으로 아군 부대를 잘못
공격했을 때는
죽음으로 속죄하기로 하고 적색
오성 신호탄 3 발을 쐈다.
전 대대 동시 사격 명령이었다.


명령일하 전대대의 화력이 도로에서 행군하던 적에게 쏟아졌다.
동관리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면서 아비규환이 되었다.


대대는 적 후미인 갈령 방향에는 81mm 박격포로 견제사격을 하고
중대간의 중기관총으로 교착사격을 하며 도로 건너편 개활지와
산으로 도주한 적에게는 중대의 60mm 박격포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인 화기는 977번 도로를 최저 표적사 할 수도 있도록
지가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안개로 인하여 표적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사격만
하면 화망 안에 깔려든 적은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습사격을 받은 북한군은 숨을 곳을 찾아 이리저리 뛰었으나
은폐물이 없는데다 근거리에서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쓰려져 갔고 일부 병력은 논바닥에 엎드려 저항을 하였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송호림 대대장은 불편한 몸 상태를 잊고 붉은 기를
흔들며 “죽여라! 죽여라!”하고 부대를 독려하였다.


08:00경 안개가 걷힌 후 977도로 위와 논바닥에는 시체와
장비가 즐비하였고 아직도 삶을 찾아 헤매는 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삭발한 머리였다.
박박깎은 머리는 북한군의 특징이다.

기습한 국군은 이들이 진짜
북한군들임을 이제야 육안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반대편 산으로 도주했던 적들은 미리 746고지에 배치했던
7중대의 1개 소대에 격멸되었다.


이틀 전 1대대의 상곡리 전투에서는 이 배비가 없어서 적들이
반대편 산에
붙어 저항했지만 이번에는 아래 계곡해서
도주해 오는 북한군을  산정에서 사정없이
쏴 거꾸러뜨렸다.

09:00, 제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예비로 있던 제 6중대로
하여금 잔적 소탕을 하게 하였다.


6중대가 소탕 작전을 전개하자 이때까지 죽지않고 논바닥에
엎드려 있던 북한군들은 상당한 저항을 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소탕 되었다.


이 당시 5중대에 탄약 추진차 갔다가 전투를 관전하게 된
하송리의 박 무진 씨는

“적이 길 위와 논바닥에 새카맣게 쓰려져 있었는데 7-8명이
 
하천 직경 70cm의 배수관 속으로 기어 들어가자
  소탕 작전을 하던
국군 한 명이 배수관 속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았어요. 
  국군들은 참 용감하였습니다.“

이날 작전은 오후 14;00에 종료되었다.


송호림의 2대대는 적 현장 확인 사살 356명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투 며칠 후 현지민들이 논과 도로에서 모아다가
매장한 적군 시체만 600구가 넘었었다.

노획 무기로서 박격포 16문, 반 탱크 총 2문,
기관총[수냉식 15문, 경기관총 15문, 체코 식 경기관총 23정,]
소총 186정 이었다.

------------------------------------------
격멸된 15사단의 두 연대 보유 노획 무기가 빈약함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2주전인 1950년 7월 7일, 국군이 충북 동락리에서 6사단
7연대에게
1차로 격멸당한 48연대에서 거둔 노획품은 막대했다.

동락리 사살은 2186명, 포로가 132명,

노획 장비는 122mm 곡사포가 6문,
76mm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12.7mm 중기관총 6정,
장갑차 4량, 2 1/2트럭 60대, 1/4 짚차 15대,
사이드카 7대등이다.


탄피를 수거하고 있는 국군, 탄피의 양으로 보아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화령장 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 24연대가 이어 받아 7월 25일까지
계속되었고 북한군과 미군사이에 엄청난 포격전이 있었다.
-----------------------------------------------------

이 두 북한 연대는 남침 때는 완전 차량화 되어 있었다.
참패했던 동락리에서도 전 연대가 차량을 타고
매복선에 들어와서 주차했다가 기습을 당했다.

이 동락리 전투에서 막대하게 노획했던
차량과 중포가 화령장에서는 전무함이 들어난다.


보건데 적 15사단 48연대는 동락리에서 전 장비를 상실하고
인원만을 급히 충원했지만 한국 침공 개전 때의 화려한 장비는
북한으로부터 재보급 받지 못해 우마차나 자전거 같이
빈약한 것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48연대장 김치구 중좌는 동락리 전투 대패후
국군이
다 후퇴했다는 거짓 정보를 주어서 큰 피해를 입었다며
지방 주민들을 수 십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

동관리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4명에 부상 30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 15사단은 15:00에야 자기들 연대가 섬멸된 것을 알고
감히 갈령을 넘어 오지는 못하고 포격만 했지만 2대대는
적의 반격에 대비해서 이미 진지 이동을 한 뒤였다.


김 일성이 생각없이 일으킨 6.25남침으로 남북 양쪽의
주민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손자를 데리고 강을 건너는 피난민 할아버지
--------------------------------------------------

이번 화령장에서 적 15사단의 두 개 연대를 섬멸하는 승리에는
한국군 정보부대의 민활한 활동에 크게 힘입은 바가 컸지만
현지 주민들의 협조가 압도적인 공헌을 하였다.


화령장 주민들은 첫 첩보 부대인 방 원철 부대나
배 상록 부대가 화령장에
파견되었을 때부터 국군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는데
대한 청년단원들은 단장
김 기영을 중심으로 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마을을
경비하며 보급 추진 업무를
도와주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탄약 운반이나 취사 업무등은
우리가 맡을 터이니 군인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전장에 나가서
적을 물리치도록 해 달라“고 하면서
탄약 운반, 취사등을 자원했으며
박 삼덕[청년 단원- 38세]씨는
자신의 약방을 치료소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약품을 지원하고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서울 탈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북한군들
-------------------------------------


박성철은 동락리와 화령장 두 번의 대패로 사단장에서 해임되었다.


김일성이 아무리 신임하던 졸개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어처구니
없는 대패에는 어쩔 수없이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사단은 남침 3개월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급조직
된 사단으로서 출발 초기부터 그 전투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북한 군부내있었다.

그래서 남침초기 최 선봉에도 서지 못하고 예비대로
따라오다가 국군과 맞붙으면서 그 문젯점을 여지없이 들어냈다.

무기를 다 빼았기고 문자 그대로 거덜이 난 이 15사단은
두 달간 계속된 낙동강 전투에서 옹골진 전투력 한 번
발휘하지 못하고 비실대다가 북으로 패주했다.

15사는 6·25전쟁 최약체 북한 사단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령장 전투 전승행사 안내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회령장 2010.10.06 10: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짜 어이없겠네요... 아니 말을 탔다고 북한군으로 간주하다니.... 본 순간 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

  2. 화령장 2010.10.06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윗 분 무슨 소리하고 있는가 ?

    본순간부터 진짜 황당함이 자체가 나옵니다라고 ?

    말을탔다고 붃한군으로 간주했다니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나?

  3. chaffee2090 2010.10.07 15: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탄피 회수 장면은 실제 화령장 전투 당시가 아닌 것이라는 얘기죠?

  4. 조조 2010.10.24 0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럭리 전투에서 대패한 15사단 박 성철의 군대가 화령장에서 다시 국군의 재물이 됏구먼 북괴15사는 완전 봉이였구먼,,,,ㅎㅎ 정말 웃기는 넘들이엿군 15사

  5. clothing factory 2011.05.25 20: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성 인터넷 프로토콜 (VoIP, Voice over Internet Protocol) 은 인터넷 프로토콜 을 이용 하여 소비자 에게 음성 통신 제공 을 하는 시스템 을 말한다.

  6. auto insurance web correspondence 2012.05.21 1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가 활동 독특한 혁신적인 준비를 지원하기 위해 더욱 세련된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천사들 이제 끝났다. 그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한랭 기법 내부 웹 페이지 웹 사이트 독자 실드 빚어낸 당신은 그들을 따뜻하게 할 수 있습니다.

  7. auto insurance web peoms 2012.05.21 15: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의 부분에 우수한 소재, 친구. 나는 이전의 학습 자들 문제를했고 당신은 정말 너무 대단해요. 난 바로 여기이든 부러워 해요. 당신이 종사하고 여전히 good.This 버는 방법을 찾는 것은 정말 멋진 웹 사이트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인지 확인합니다.

  8. auto insurance web videos 2012.05.21 15: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의 일부 신사에 관한 탁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나는 이전에 귀하의 항목을 검토했고 당신은 단순히 너무 대단해. 난 당신이 여기 있나하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즐겁게 만드는되지만 그냥 정말 멋진 웹로그 당신은 토론 감사드립니다 정말 그것이 intelligent.This 유지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9. 625 2013.11.14 1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미지가 안뜨는데 이미지 다시 올려주실 수 없나요?

  10. free facebook likes 2014.03.09 23: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굉장 게시 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있는 많은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읽을 사랑 해요.

78. 국군 제6사단의 와신상담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9.07 13:53

 

  결론적으로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중공군 최대의 패배로 기록될 만큼 엄청난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그 과정 중에 국군 제3군단 해체라는 국군 역사상 최악의 기록도 남겼습니다. 밴 플리트가 분노하여 즉시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하고 이후 형식적이나마 존재하던 국군의 지휘권을 박탈하여 유엔군 단일 지휘체계 안에 포함시키는 강수를 두게 하였을 만큼 참담하였습니다. 평창-횡성전투, 사창리전투의 연속된 패전으로 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신뢰가 거의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벌어진 현리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국군을 믿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대한 전투가 바로 인근에서 벌어졌습니다.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대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51년 5월 16일, 제6차 공세를 감행한 중공군과 북한군은 중동부 전선에 주공을 투입함과 동시에 조공이 서부지역의 유엔군이 국군 제3군단지역으로 증원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북한강 계곡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이곳에 나타난 공산군은 중공군은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19병단예하의 제63군이었고 이들은 지난 4월에 있었던 제5차 공세당시에 사창리에서 혼쭐이 난 국군 제6사단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중공군은 미군을 피해서 집요하게 국군이 담당하던 섹터로 돌파구를 확장하려 시도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용문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적이 이곳을 점령하면 아군의 전선은 서부와 동부로 양분되어 각개 격파될 수도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였습니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은 해발 1,157미터의 용문산일대를 점령하여 방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에 있었던 사창리패전의 경험과 이후 위기를 대신 막아낸 영연방 제27여단의 가평전투를 직접 목도한 장도영 사단장은 무엇보다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회복이 중요하다가 판단하여 병사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면서 훈련에 열중하였습니다. 사창리전투 후 구사일생으로 부대가 해체될 수도 있는 위기는 넘겼지만 주변의 미군들로부터 겁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수모를 겪던 국군 제6사단은 이처럼 묵묵히 내실을 다지며 치욕을 극복할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결사라는 글자를 새긴 머리띠를 둘러맨 제19연대 2대대병사들]


  제6사단은 용문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제19연대를, 동쪽에는 제7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는데, 주저항선이 북한강에서 12~1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있어 적이 전면으로 도하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따라서 장도영 사단장은 예비로 후방에 빠져있던 제2연대를 홍천강 남단에 추진 배치하는 역발상적인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후방에서 최전선으로 전개 된 제2연대의 제1대대가 미사리의 559고지에, 제2대대가 해발 381미터의 울업산에, 제3대대가 연대의 예비로 울업산의 후방인 353고지에 각각 전면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더불어 장병의 각오를 다지기 위하여‘결사’라고 쓴 머리띠를 착용하였습니다. 그만큼 비장한 각오로 방어진지를 준비하고 결전을 기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규모 중공군이 남하하며 북한강 일대에서 전운이 감돌자, 제2연대의 서측에 배치된 국군 제2사단 31연대와 동측에 배치된 미 제7사단 17연대가 후방에 마련된 주저항선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제2연대만이 적진에 홀로 돌출 되어 포위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사창리의 실패를 여기에서 만회하겠다’는 굳은 결의에 불타있던 제2연대의 장병들은 중공군의 포위공격에 대비하여 전면방어 태세를 더욱 굳건히 하고 있었습니다. 청성부대는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고립방어에 들어가 원주에서, 지평리에서, 설마리에서, 가평에서, 펀치볼에서 압도적인 중공군을 막아내거나 지연시켰던 유엔군의 교훈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지 구축 완료 후 얼마 되지 않아 북한강 북쪽에서 중공군의 활동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연대 정찰대가 5월 17일 적의 예상도하지점을 정찰하던 중 중대규모의 중공군이 이미 홍천강을 도하하여 계곡에 집결중인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교전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중공은 도처에서 북한강과 홍천강을 도하해오자 정찰대는 방어선 안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도하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5월 18일 아침이 밝아오자 중공군은 중대 규모로 나뉘어 도처에서 홍천강 도하를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온 제2연대는 과감한 저항으로 이들의 도하를 저지시켰습니다. 주간 공격에서 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돌파가 실패한 중공군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아군의 전면 방어진지를 우회하여 제2연대를 완전히 포위하고자 대구모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제2대대가 방어하는 울업산과 제1대대가 담당하는 장락산맥에 연대 규모의 중공군이 나타나 도하공격을 개시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전 댓글 더보기
  2. suboxone doctors 2011.10.19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있다는 자신감 회복이 중요하다가 판단하여 병사들의 정신무장을 강화하

  3. Salmon Fishing Alaska 2011.10.23 1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런데 바로 그때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대한 전투가 바로 인근에서 벌어졌습니다.

  4. medical billing and coding training 2011.10.26 2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진 상태에서 벌어진 현리전투의 결과는 그야말로 국군을 믿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5. Plus Size Clothing 2011.10.27 0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여기서 행복이고 좋은 사회로 당신과 함께

  6. pizza hut coupons 2011.10.27 0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 또한 여기에 댓글 행복

  7. write my essay 2011.10.27 06: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항상 구입 싶었던 것이 휴대폰이다. 나는 곧 그것을 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바랍니다

  8. neurosurgeon salary 2011.11.01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런데 바로 그때 국군의 명예를 회복하는 위대한 전투가 바로 인근에서 벌어졌습니다.

  9. what is cash advance 2011.11.05 22: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였을 만큼 참담하였습니다. 평창-횡성전투, 사창리전투의 연속된 패전으로 국군에 대한 유엔군의 신뢰가 거

  10. iPhone 4 covers 2012.02.09 0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게시물의 작성자에게 감사 해요,이 블로그에 업데이 트를 계속이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추가하고 싶습니다.

  11. Computer Network 2012.02.10 1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난 이런 행사를 통해 6.25전쟁이 어떻게 전쟁이 났는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내가 봉사를 많이하고 돈을 아껴써야되는 것도 깨달게되었다
    난 이런 캠페인이 더욱더 개발되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12. gold trading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야되는 것도 깨달게되었다
    난 이런 캠페인이 더욱더 개발되어 더 많은

  13. common homeowner insurance charge 2012.05.25 1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놀라운, 좋은 포스트, 그것에 대해 검색 사람을 많이하거나 여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것에 대해 제출 한 번 더로 us.Remember하는 공개를 위해 publish.Thank 귀하가 충분한 자원을 발견할 수있다.

  14. helpful web-site session blueprints 2012.05.25 1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군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준비가 당신에게 활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그 세련된 위에있다. 당신의 작은 친구 천사는 일반적으로 수행된다. 그들은 고려 꽤 확률이 걸릴지도 모르지 않을 꺼야. 웹사이트 웹사이트 독자 당신은 그들을 따뜻하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냥 한랭 단계에서 종료를 방어.

  15. home insurance ebook prices 2012.05.25 1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정말 시간이 합리적인 길이는 연구가 있습니다 가장 특별한 정보 사이트입니다. 당신은 거의 그것에 대한 전자책을 작성 답게 내에서 정보와 사실의 수량은 놀랍습니다. 이 문제를 훨씬 더 이해하고자하는 모든 이들에게 귀하의 사이트는 완벽. 그레이트 제품; 당신이 그것을 유지한다!

  16. jual baju online 2012.06.15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진정으로 훌륭한 사본 작가로 바뀌 있어요. 내가 처음 당신을 상상이 사이트로 여행 개시 한 시간은 가능성의 큰 거래를 홀리고. 그것은 감소의 노력 얘기를 잘 쫓아낼 당신 열어 응답 AA을 많이받을 수 일어날 것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17. 신창균 2012.08.12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충성!

    1107 공병단 130환경대대 상병 신창균입니다.

    국군 6사단의 와신상담편 잘봤습니다. 패전을 계속하다 결사라는 머리띠를 둘러맨 19연대 제2대대 병사들을 보면서 결연한 의지를 느꼈습니다.
    땅에 떨어진 국군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배수의 진을 치는 국군 제 6사단이 존경스럽습니다. 비장한 각오와 장도영 사단장의 후방의 제2연대를 홍청간 남단에 추진 배치하는 역발상적인 초강수를 두는 등 전략과 각오가 대단했다는 것을 글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충성!

    tlsckdrbs123@hanmail.net

  18. cheap true religion jeans 2012.11.29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땅에 떨어진 국군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배수의 진을 치는 국군 제 6사단이 존경스럽습니다. 비장한 각오와 장도영 사단장의 후방의 제2연대를 홍청간 남단에 추진 배치하는 역발상적인 초강수를 두는 등 전략과 각오가 대단했다는 것을 글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19. modern rattan furniture 2012.12.27 21: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 전체에 해당 건너 왔다고 생각하게 말하자면이 문제에 관한 통해

  20. free credit report 2013.01.09 04: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단에 추진 배치하는 역발상적인 초강수를 두는 등 전략과 각오가

  21. onlineaccountsoftware 2013.02.13 19: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感谢您写这样一个容易理解的文章就这一议题。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 [ 2 ]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7.13 07:59

 

  한강교량 폭파는 시기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후퇴 시 한강교량 같은 거대한 다리의 폭파는 철수하는 아군이 철수가 완료된 후 적의 추격 도하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실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한강교량들이 폭파될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우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 성급하게 폭파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관련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한강교량의 폭파는 시기부터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다리가 폭파되던 당시에 북한군 주력은 아직 서울 외곽에 있었고 오로지 2대의 북한군 전차만이 당시 서울의 북쪽 경계인 미아리를 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서울 방어를 위해 투입된 많은 아군부대들이 한강 북쪽에서 고군분투 중이었는데, 동부전선의 제6, 8사단과 옹진반도에서 퇴각한 독립 제17연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들이 이곳에 투입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서울 방어의 중핵인 의정부 지구에서 선전을 독려하는 최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군수뇌부]


  비록 제7사단처럼 초전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대들이 많아 서울의 함락이 예견될 정도로 상황은 암울하였지만 반면 경의축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던 제1사단처럼 고군분투하던 부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건재가 유지되었건 아니면 무너졌건 한강 이북에 있던 모든 국군 장병들은 침략자를 막아내기 위해서 그야말로 고군분투 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후방의 한강다리 폭파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던 국군에게 한강교량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후퇴로가 없어졌다는 의미로만 해석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창 전투와중에 한강다리들을 폭파함으로써 국군 지도부 스스로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이북에 있던 부대들의 전투 의지 또한 급속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아군은 모든 중장비를 유기한 체 단위부대 별로 흩어져 한강을 건너게 되는데 바로 이때 전쟁 초기 아군의 전력이 가장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나룻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도하하여 후퇴하는 국군의 모습]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 나온 미 군사고문단의 처치(John H. Church) 준장은 미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서울에서 적극 시가전을 펼칠 것을 권고하였지만 육군본부는 다리를 성급히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사수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반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 작전 당시에 전력이 열세였던 북한군은 서울을 요새화하여 무려 열흘 가까이나 방어해 내었습니다. 이처럼 서울은 적에게 점령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어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서울은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내어준 것에 가까웠습니다.]


  다리 폭파직전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전개한 부대는 서울을 방어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야반도주한 위정자들을 따라 함께 내려온 육군본부와 김포반도에 긴급 배치된 일부 부대들뿐이었습니다. 즉, 한강교량의 폭파는 어떠한 전후좌우 사정도 가리지 않고 국군 주력을 한강 이북에 그대로 둔 상태로 무턱대고 벌인 우발적인 사건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한강교량 폭파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었냐는 폭파 당일의 모습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한강교량 폭파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위정자들의 보여준 무책임의 극치였습니다]


  비록 방송에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위정자들이 서울을 버리고 야밤에 줄행랑쳤다는 소문이 돌자 수많은 시민들이 한강교량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제하지도 않은 체, 다리를 폭파하여 최대 800명으로 추산되는 서울 시민들이 폭사하거나 한강으로 떨어져 익사하였고 50여대의 차량도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아무리 위급한 전시라도 이것은 결코 용납하기 힘든 작전이었습니다.


[개전 초 북한의 남침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최근 드러났습니다 ]


  결국 한강교량의 폭파는 필요하였지만 시기와 방법이 완전히 잘못된 작전이었습니다. 한강교의 폭파로 잃은 것은 수도 서울의 조기함락, 국군의 조속한 붕괴 그리고 죄 없는 민초들의 엄청난 희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을 대가로 얻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은 미미하였습니다. 처음 언급하였던 것처럼 처음에는 북한군의 진격을 3일간 막은 이유로도 보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 계속 )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Seo, Seo company 2012.05.07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那一个有趣的职位。这是值得访问您的博客和您的博客,我有书签。希望能再次访问

  2. ink cartridge world refurbished 2012.05.28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와 관련 게시 도움이됩니다. 당신은 좋은 가치 또한 유용한 기사의이 종류를 제공 감사합니다

  3. ink cartridges renovated file 2012.05.28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여기에 문제의 유형의 사람이 쓰기 들고 심각 ...을 즐기다. 유용하고이 데이터는 이제 크게 내 시간을 저장하고있다. 사용자가 쓰기 최대 검토할셔서 감사합니다. 좋은이 결과를 제공 계속합니다. 많이 고마워


  4. ink cartridges used help save 2012.05.28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짜릿한 웹사이트 배치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정말보고 즐겁게, 당신은 훌륭한 작가입니다. 사실 나의 즐겨찾기 수 있도록 귀하의 사이트를 추가하고 definately 추가 changes.Best의 기원에 대한 기대 수준을 유지합니다 ..

  5. Local seo 2012.06.06 17: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Great information you got here. I’ve been reading about this topic for one week now for my papers in school and thank God I found it here in your blog. I had a great time reading this.

  6. 참으로. 2012.06.26 0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민들의 생명을 아무렇지않게 폭파시킨 당시 위정자들에게 치가 떨린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지니 눈에 보이는것없이 그런 명령을 내려서 국민이 살려고 건너는 것을 알고도 죽였는가? 자신의 뒤에 어머니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더라도 네 아들 딸이 있었더라도 그랬겠나?

  7. mikrolån med betalningsanmärkning 2013.09.04 0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퇴 시 한강교량 같은 거대한 다리의 폭파는 철수하는 아군이 철수가 완료된 후 적의 추격 도하가 이

  8. Real estate news in Miami 2013.09.15 23: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 성급하게 폭파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관련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9. Looking for oceanfront real estate 2013.10.24 19: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10. data entry speed test 2013.11.06 17: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 성급하게 폭파가 이루어졌는데, 이후 관련 재판에서도 그 책임소재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