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비들 고사시킨 전투 경찰의 매복 전술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0.07.05 09:50


6·25전쟁 후, 한국 전투 경찰의 활약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않다.


내가 기억하는 전투경찰의 활약상을 소개한 책자는

불과 서 너 권 밖에 되지가 않다.

그러나 6·25전쟁 전후  경찰 전사자는 일만명이나 되었었다.


월남전 8년간 전몰 파월 장병이 5천명임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 희생의 크기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경찰은 육군에 비하면 훈련도 장비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한창 때의 공비들은 경찰 전투력을 우습게보기도 했었다.


한때 지리산 일대에 일 만 명이나 세를 불려 기세를 올린

공비들에게 연타를 안겨 그 세를 꺾은 것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던 육군이었지만 6·25전쟁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간을 물고 늘어져 소멸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주인공은 이 전투 경찰들이었다.


한국 경찰은 육군처럼 강력한 병력과 화력이 없었기에

산야를 쓸어내리는 듯한 대규모 토벌을 자주 실시할 수가 없었다.



라이프 지의 한국 경찰 기사에서 빌려온 사진을 다시
싣는다. 부상 공비를 운반하는 전투경찰.
-------------------------------------------------


그런 형편이었던지라 빈약한 병력으로 공비들에게 타격을 주는

전술을 개발해내고 또 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여

공비들을 실핏줄을 토막토막 잘라 말려죽이듯 서서히

섬멸해갔다.

전투 경찰의 전술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비용대 효과의

절대 기능을 발휘했다고 하겠다.


한국 경찰이 일선에서 몸을 부딪혀가며 창안하고 개발해낸

그 공비 말려죽이기 전술은 ‘매복 전술’이었다.


해방 후부터 경찰에 몸담으며 공산당 무리들과 싸웠던

김두운 선생의 공비 토벌 수기‘지리산 호랑이'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김두운 씨는 일본 중앙대학교 재학 중 일본군에 학병으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자 경찰에 투신했다.



김 두운 서장-1951년 무주 경찰서장 시절
--------------------------------------


그 분의 수기에서 식량 약탈을 자행하고 귀소(歸巢)하는

부안군의 공비 일당을 매복 섬멸했던 작전을 자세히
기술(記述)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 경찰의 공비 소탕 매복 전술을 엿 볼 수가 있다.


그 분이 전북 부안 경찰서 경무 계장으로 근무하던 1949년

늦은 가을철이었다.


김두운 선생은 타 경찰서에서 이미 공비 토벌을 경험하며

자신 나름의 공비 토벌 전술을 터득한 상태였다.


경찰 입문 이래 호남 일대에 공비들이 준동하자
아무 군사 훈련도
실전 경험도 없었던 간부들은 단지
일본군 부대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공비 토벌을 
떠 맡겼다.

그는 전북 도경의 기동대장으로 임명되어 토벌에 나섰다.


군 경험이래야 일본군 고사포 부대에서 약간 근무했을 뿐이었던

김두운 씨는 부하들을 데리고 우왕좌왕 산을 쏘다니며

허탕을 치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작심하고
연구를 거듭하여
매복 섬멸전의 비법[?]을 개발해냈다.


--------------------------------------------------------

공비 토벌의 초창기에 여러 일선 경찰서에 매복

전술만이 토벌의 최고 유효 수단이라는 의견은 떠돌았었다.


그러나 표준 교안이 없어서 일선 전투 경찰 지휘관들은

김 두운 씨처럼 연구와 실전 경험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비방[?]을 개발해갔다

--------------------------------------------------------

김두운씨는 자신이 개발할 매복 전술에서 전투요령을
복격술이라 이름짓고 아래와 같이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첫째, 소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자세를 낯춘다음
오른 손바닥을 귀에 대고 다가오는 소리를 감지한다.

둘째, 기동선을 따라오는 적의 순서와 우리의 매복 순서에
맞추어 한 명이 적 한 명만을 겨냥한다.

세째, 쏴의 신호와 동시 단 한발만 발사하고 함성없이
그대로 각자 조준했던 적에게로 돌진해 생포,또는
확인 사살을 한다.

넷째, 도망치는 적은 너무 멀리 추격하지 않는다.

----------------------------------------------------
여기서 관심 있게 볼 대목은 그가 공비들이 통과할 목을

미리 집어내고 매복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마치 돼지 명포수가 목을 잡는 요령과 비슷해서

흥미롭다,


아래는 김 두운씨의 글이다.

전북 도경 기동대장에서 부안군 경무계장으로
전출되었을 때 겪은 전투를 회상한 것이다.

-----------------------------------------------------

사살 된 공비 시체 확인
----------------------


1949년,늦은 가을 저녁.

일과를 끝내고 신도종 서장이하 간부들이  바둑을 두고 있던

전북 부안 경찰서에 부안군 산내면 지서로부터 중계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6·25전쟁 이전 부안 관내에는 자생한 소규모 공비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남로당 부안 군당으로서 총인원은 9명 이었다.

나중에 지리산 일대에서 기세를 올리던 공비들의 규모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민폐가 극심했다.


남로당이 불법화되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입산(入山)한

공비들로서 이들은 다른 남로당 군당들에 비하면 골수분자들로

상당히 투쟁적이었다.

[전쟁 전 입산자들은 구빨치로 분류된다.]


여순 사건 뒤에 체포된 14연대 반란병들.
이들은 대거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신빨치의
주력이 되었다.

-----------------------------------------


이들은 변산의 기상봉 아래 있는 천연암 근처에 주 아지트를
두고
부근 마을, 특히 산내면 중계리를 ‘민주 부락’[ 이 당시

민주란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문으로 쓰던 용어였다.- 나중에
남한
군경들에게 통비 부락[通匪 部落]으로 불리게 된다.]으로
장악해 놓고
열흘에 한번 정도 약탈을 자행했다.


거리 관계 때문인지 이들은 특히 산내면 일대에 심한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부안 군당의 공비들은 외팔이 부대로 통하고 있었다.

군당의 책임자는 장순언의 장남인 장모[張某]였다.

그는 고향인 부안군 산내면 진백리에서 진백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진백 수산 강습소를 나와 남로당 부안 군당에

입당, 산에 들어갔다.


말단 대원이던 시절 그는 경찰 토벌대와 총격전을

벌이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왼쪽 팔은 절단이 되었다.

그해 5월 경 그가 군당 책임자가 되면서 부안 군당을

외팔이 부대라 칭하게 되었다.


국민 학교 시절 그이 생활 기록부에는‘두뇌가 명석하고 비교적

활발함' 이라 적혀 있었다.


공비 토벌은 각 경찰서 경비계장의 업무였다.

공비 출현의 보고가 접수되었는데도 토벌작전에 경험이 없는

경비계장은 우왕좌왕했다.


-------------------------------------------------------

서장은 출현 공비의 토벌 작전과 지휘를 경험자인 경무계장

김두운 경감에게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단조로운 경무계장의 업무에 지루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김두운 경감은 이 지시를 반갑게 수락했다.

-------------------------------------------------------

전투 경찰이 주요 도로에 설치한 요새
-----------------------------------

나는  먼저 경비계장이 가져온 5만분지 1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공비들의 기동선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므로 무턱대고

출동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 아지트가 있다는 천연함에서부터 지도상에 붉은 선을
긋고
보니까 다음의 예상 출몰 지역은 상여봉 밑 마을이나
상서면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는 것이 손금 보듯 빤히
들여다보였다.


---------------------------------------------------------

붉은 그리스 펜으로 공비 근거지와 출현 지점을 직선을 그어

연결하고 이 직선 주변을 분석해서 공비가 필히 통과 할 목을
찾아내는 것이 김 두운 씨의 목잡기 비법의 첫 단계였다.

---------------------------------------------------------



부안군 지도
-----------


그는 경비계장에게 정예 10명만 선발하라고 부탁했다.


쫓는 쪽의 입장에선 적의 2,3배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지만 이 당시의 공비, 소위 구빨치 시대에는
어느 지역이나
무장을 절반도 못해 있던 형편이었다.


공비들은 두 부락을 그냥 지나쳤으므로 다음 부락 어디에선가는

약탈을 자행할 것이었다.


늦더라도 다음 출몰 시까지 기다려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어디에 나타나든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그때 출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공비들은 맨몸으로 하산할 때는 시간당 약 6킬로미터를
보행하고
약탈을 마친 뒤 짐을 지고 돌아 갈 때는
3 킬로미터도 보행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지트로 돌아가는 예상 기동선만 정확히 판단한다면

시간은 넉넉했다.

적은 현재 아지트에서 약 8 킬로미터 이상 벗어나 있을 터였다.


시간은 저녁 7 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예상했던 상여봉 아랫마을을 지나쳤거나 현재 약탈이
진행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암사 아랫 부락이리라.

바드재를 넘어 보안면 쪽으로 갈 확률은 없었다.

지도상 그쪽은 산이 얕고 민가가 많았다.


나는 저들의 목적지가 개암사 아랫마을일거라고 단정하고

대원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우리도 서장실에서 식사를 마쳤다.


그 때였다.

다시 비상 전화통이 비명을 질렀다.


경비계장이 화닥닥 전화를 받았다.

전화는 상서면 지서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10리 떨어진 개암사 쪽에서 계속 총성이

들린다는 보고였다.

출현 지역은 적중했지만 저들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비상! 비상!”

경비계장은 고함을 지르며 부리나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사찰계장도 따라가 보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즉시 출동했다.


적이 아지트로 돌아갈 기동선은 너무도 빤했다.

저들이 지나쳐 왔던 길을 되밟아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새재를 지나 뱀사골을 거쳐 천연함 아지트에 이르는

기동선을 따라 갈 것이었다.


밤 8시 읍내를 벗어나자 한밤중을 방불케 했다.

도로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마을에서 듬성듬성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정겨웠다.


차는 밤길을 가르며 출렁출렁 마구 달렸다.

나는 스리쿼터 적재함에 탔다.

조수석에는 행선지를 일러준 사찰주임만 탔을 뿐

경비계장도 적재함에 대원들과 함께 타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차는 길가의 작은 마을 앞을 지나쳐 멈추었다.

이 마을 서쪽 1킬로 지점에 공비 통과의 예상 목인

새재가 있었다.


대원이 가리키는 새재를 보며 나는 후레쉬의 불빛으로

지도를 비춰보았다.


예상이 적중한다면 틀림없는 위치였다

나는 전원을 하차시키고 차를 멀리 대피시켰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나면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영 불쾌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앞쪽은 불리할 상 싶었다.

적들도 마을을 가로지르지는 않을 터인데

우회 길을 우리의 매복 지점 훨씬 전에서

돌아 버린다면 허사였다.


나는 대원을 이끌고 비탈 밭을 멀리 돌아

마을 끝으로 갔다.


누런 반달이 산위에서 떠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고춧대가 서있는 비탈 밭머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가르마처럼 나있었다.


그 길은 밭둑길로 이어져 희미하게 마을로 뻗어있었다.


나는 그 곳 밭머리를 잠복지접으로 결정하고 10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위치를 지적해서 순서대로 배치했다.

마른 고춧대가 무성하게 서있어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한 좋은 잠복지점이었다.


거기다 둑길 아래의 위치는 밭뙈기들은 아래로 비탈이

져 있어서 밭고랑에 엎드려 바라보니 둑길은 그대로 달빛아래

다 노출이 돼있었다.

또한 귀를 땅에 대고 기울여 접근해오는 적의 부대를

청음[廳音]으로 감시할 필요도 없었다.


달빛 아래 멀리 마을까지도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절대 정숙을 명하고 종대(縱隊) 잠복 병력의 중앙인
5번과 6번의
중간에 자리 잡고 엎드렸다.


그 자세로 몇 십 분이 흘러갔다.

※ 2편으로 계속 클릭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홍이아빠 2010.07.06 23: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 노년 모습입니다.

  2. 홍이아빠 2010.07.06 23: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두운 서장약력입니다.

    약 력

    1923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3. trading account 2012.04.16 14: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19사단 입대, 일본 육군소위입명, 귀국 후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반민특위 전북특경대장등, 정읍·무주·남원·충북 영동·이리·부산 동래 경찰서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 정읍군수를 마지막으로 공

  4. allstate auto insurance corp 2012.05.26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그냥 캔트 정지 이것을 스캔. 그것은 결과적으로 내가 단순히 모르는 사실들이 즐비, 정말 대단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자와 여자가​​ 현재 그것에 우리 모두의 여러 가장자리를 보여주는, 그 똑똑한 방법으로이 문제에 대해 얘기되어보세요 감사 해요. 당신은 멋진 블로거에요. 당신은 그것을 계속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렵게오고 왠일 읽어 그만 넣어 찾습니다.

  5. carinsurancecompany push 2012.05.26 1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놀라운 정보는 참을 수! 저는 개인적으로 확실히 그것을 통해 읽기, 사랑, 당신은 가능성이 가장 높은 멋진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얼마를 반환합니다 모든 중 귀하의 사이트를 즐겨찾기에 유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성하여 환상 계속 다른 사람을 촉진해야 멋진 저녁 보유!

  6. 김현석 2013.03.25 23: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당히 좋은 글이지만 일제 때부터 항일투쟁으로 빛났던 좌익세력을 죽인 건 크나큰 오류였습니다
    특히 6.25를 전후해 들불처럼 일어났던 반일,반미,반이승만,반독재,민주투쟁은 우리 역사에 두고 두고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남조선노동당 부안군당의 혁명 전사들은 죽인 김두운 서장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 국제정세는 미국의 무한독주가 무너지고 러시아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또 아프간,이라크의 저항이 빛을 봐 미군들이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미국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참된 민주해방국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려면 미국의 저항이 거셀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미국을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돈과 권력을 쥔 세력들의 마지막 발악이 거셀 텐데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단결해 이 자들은 저 미국으로 쫒아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단결합시다 투쟁합시다 항일세력들을 죽이고 가두고 고문하던 반민주,친일친미 세력들을 반드시 처단합시다 그리고 역사의 장대한 길에 이자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후세들에게 진실된 역사들 가르칩시다
    투쟁합시다 투쟁 얼어죽고 맞아죽고 굶어죽을 때까지 싸웁시다 투쟁

    • ㅉㅉ 2014.03.25 0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 미쳤네. 민주주의도 좋지만, 이런 놈 헛소리 해대는 거 보면 진짜 어느 정도 민주주의도 제한해야 한다. 꽁꽁 잡아 북한으로 보내던지. 투쟁? 혁명전사? 미친놈.

[포토 에세이] 대한해협 해전, 그 날을 되새기며

생생! 6·25/퍼싱의 군사 이야기 2010.07.05 08:21

  어떻게든 전투함정을 구입하기 위해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해군 장병들의 모금으로 구입한 해양실습선 "백두산함"


  오늘날의 구축함들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초계정에 불과했지만 이 배는 당시 이 정도 함정을 도입하기 위해 발버둥쳐야했던 한국 해군의 참상을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야간, 부산 서북방 해상에서 한국해군의 백두산함은 거수불명의 선박을 향해 국제 해양신호 규정에 따른 발광신호 신호를 보냈습니다.
   '단쓰쓰쓰, 단단쓰단!'
   이것은 모르스 부호로 표기하면 ‘ㆍ--- , ㆍㆍ-ㆍ’이 되고 의미를 유추하자면 국제 해양신호 규정에 따라 "지그, 폭스( J.F )" - "귀하의 국기를 게양하라!"는 의미가 됩니다.
   당시 백두산함은 6월 25일 새벽 4시 30분을 기해 개전이 벌어지면서 유사시를 대비한 북한 해군의 작전에 대비해 15시, 주둔지인 진해를 출항한 상태였습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정이라 본격적인 구축함이 아니었기에 무장은 가장 강력한 것이 3인치 포 1문일 정도로 취약했지만 장병들은 물러서지 않고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켰습니다.

  19시 30분을 기해 백두산함의 견시수는 국기를 게양하지 않은 거수불명의 선박을 발견, 2시간에 걸친 추격 끝에 21시 30분까지 수차례에 걸쳐 선박에게 신호를 보내 국적과 목적지를 물었지만 묵묵부답만 이어졌고 북한 해군 선박으로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2시 30분, 마침내 백두산함은 최후의 신호인 "쓰쓰쓰, 단쓰단단"( OL ) 즉, "즉각 정선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를 발신했습니다.
  그리고 주포인 3인치 포를 사격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거수불명 선박의 100m 전방까지 접근했습니다.
  발광신호의 섬광을 이용해 선박을 세밀하게 살핀 결과 선명도, 국기조차 없는 문자 그대로 유령선박, 혹은 괴선박 그 자체였기에 백두산함의 수병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간, 갑판에 늘어서 있던 사복차림의 인원들 사이에서 북한 해군의 수병복을 착용한 인원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적이다! 서둘러 적함으로부터 이격한다!!"
  순식간에 백두산함은 비상 체제로 돌입했고 해군본부에 신속하게 상황을 타전했습니다.
  당시 해군 함정 도입 협상을 위해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손원일 제독을 대신해 해군본부를 지키고 있던 김영철 대령은 지체할 것 없이 6월 26일 00시 10분, 적함을 격침시킬 것을 지시했습니다.
  마침내 6월 26일 00시 30분,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으며 대한해협 해전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백두산함은 주포 실탄 사격을 실시한 적이 없었지만 포수와 장전수는 침착하게 조준해 적함을 향해 꾸준히 3인치 포탄을 날려보냈습니다.
  이 때 사격한 20발의 포탄 중 5발이 적함에 명중했고 백두산함은 보다 효과적인 유효탄을 날리기 위해 적함의 좌현 1마일 전방까지 항진했습니다.
  "좋아! 절대 놓치지 마라. 사격!!"


  백두산함의 투혼으로 600명에 달하는 무장 유격대원을 태운 북한 무장 수송선은 결국 동해상에서 격침되고 말았습니다.

  1마일 내로 접근한 백두산함은 일제히 3인치 포와 중기관총, 기관포를 난사했고 거리가 가까웠던 덕분에 발사한 포탄 10발이 전부 적함에 명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온 518정이 37mm 기관포를 난사함으로써 백두산함은 든든한 속사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북한 무장 수송선 역시 37mm 기관포와 12.7mm DshK 중기관총을 난사하며 대응했고 이 때문에 백두산함에서 부상병들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백두산함은 물러섬없이 적함 1,000m 전방까지 치고 들어가 3인치 포와 중기관총을 난사해 마스트를 부러뜨린 후 기관실 외부 선체를 벌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격렬한 공격을 받은 북한 무장 수송선은 마침내 01시 10분을 기해 서서히 좌측으로 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최후를 맞이할 수 없다는 듯 침몰하는 와중에도 적함은 사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400m 거리에서 적의 포탄이 백두산함의 조타실 좌현 하부를 관통하고 3인치 주포에도 명중해 주포를 작동불능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김종식 소위 등 여러 장병들이 부상을 당했고 전병익 중사와 김창학 하사는 끝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피해가 만만치 않았던 백두산함은 결국 적함을 끝장내지 못한 채 거리를 벌렸지만 01시 35분을 기해 해역에 돌아와 보니 이미 북한의 무장 수송선은 침몰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대한해협 해전을 통해 약 600여명의 무장 유격대원들을 수송하던 북한 무장 수송선을 격침시킴으로써 전략적 요충지인 부산 일대에 대한 북한군의 후방 교란 작전 기도가 완전 봉쇄되었고 이후 부산항은 전쟁 전 기간 동안 중요 보급항과 교두보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열악한 여건이었지만 끝까지 전투를 포기하지 않은 백두산함의 투혼으로 우리 군은 개전 초기 지연작전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날 행사의 기함이 된 독도함( 모든 사진은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 날의 빛나는 승리로부터 60년이 지난 2010년 6월 25일, 대한해협 해전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부산 해군작전사령부에서는 한국군의 자랑스런 독도함을 중심으로 한 해군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해전 재현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몰려든 내빈들의 인파로 독도함의 헬리콥터 갑판은 금새 가득차 버렸습니다.

  아마 그 날의 승리가 오늘날 어린 꿈나무들의 밝은 미래를 열어줬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산 대남초등학교 학생인 윤지원·김남훈 학생.

  앞으로 학교생활하면서 6.25 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몸바친 선열들을 잊지 마시길...

  마침내 백두산함 참전용사들이 입장하는 가운데 대한해협 전승행사가 펼쳐졌습니다.

  당시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었던 최영석 예비역 대령이 선두에 섰습니다.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절도있는 자세를 잊지않는 모습에서 그 날의 감격이 문득 스쳐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캐논 파워샷 G10으로 현장을 촬영하고 계시는 백두산함 참전 용사

  이 날 우천 관계로 일부 참전자 분들은 우의를 착용하셨습니다( 정작 절 포함한 취재진과 독도함 간부들은 그렇지를 못하네요 )

  당시 소위 계급으로 참전해 그 날의 상황을 설명하시는 최영석 예비역 대령.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조국인데 오늘날 참여연대의 천안함 격침사건 관련 서한 제출 등 이적행위가 벌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

  묵묵히 선배님들의 상황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해군 장교 및 부사관들

  이 날 대한해협 해전 재현에는 폐어선이 동원되었습니다.
  격침되기 전의 모습

  이 날 백두산함의 대역을 맡은 울산급 호위함인 FFK-959 부산함이 북한 무장 수송선 역할을 맡은 폐어선을 향해 76.2mm 주포를 사격하고 있습니다.

  76.2mm 주포탄과 40mm 기관포탄을 얻어맞은 북한 무장 수송선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기울기 시작합니다( 클릭하시면 적함을 향해 날아드는 40mm 포탄의 궤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

  백두산함의 맹렬한 포격으로 적함은 순식간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이 날 518정 역할을 맡은 포항급 초계함인 PCC-765 "여수함" 역시 76.2mm 주포와 40mm 기관포를 난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당한 천안함은 포항급 14번함입니다.

  북한 무장 수송선이 완전히 격침된 후 이어진 해상사열에서 항진하는 윤영하급 고속함인 PKG-713 "조천형"함
  제2차 연평해전에서 불시의 기습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투혼을 불태운 참수리 357정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할 것입니다.

  사열의 선두를 맡은 KDX-Ⅱ 대조영함의 장병들이 일제히 독도함의 내빈들을 향해 경례하고 있습니다.
  대한해협 해전 승전 60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 해군은 강력한 이지스 구축함을 중심으로 214급 잠수함을 보유하는 등 대양해군의 위상을 강력하게 구축했습니다.
저작자 표시 변경 금지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형래 2010.07.11 07: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포탄의 궤적이 정확하게 찍혔네요

    저도 DSLR 카메라 한 대 장만하고 싶어집니다.

    만슈타인님, 요즘 좋은 카메라 뭐가 좋을까요? ^^

  2. 강여은 2010.07.11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여군 부사관 분 외모가 출중하시네요

    요즘 여군이 부쩍 눈에 잘 띄어서 같은 여자로서 자부심이 높습니다.

  3. 강효섭 2010.07.19 20: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조영함의 위용을 보니 백두산함부터 시작한 대한민국 해군의 역사가 한 눈에 스쳐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잘 감상하고 갑니다.

  4. 김수민 2010.07.19 2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부산함 오랜만에 보네요 ^^

    탄막 사격의 궤적까지 정확하게 잡아내시는 실력 놀랍습니다.

    • ╋만슈타인╋ 2010.07.20 18: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김수민님// 감사드립니다.

      항상 정확하고 신속한 포착과 보도를 중시하는 디펜스타임즈 코리아 사진/취재기자로서의 사명감이 자아낸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보도 사진들이 게재될 예정이며 7월 20일에 발행될 8월호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5. 박소영 2010.10.02 18: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폐어선을 침몰시킨 건가요?

    폭발 잔해가 어초가 되는 건 좋지만 해양오염의 우려도 좀 크네요 ^^

  6. chaffee2093 2010.10.16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차피 어선의 수를 줄여야하는 판국인데 육상에서 해체작업해도 이리저리 골치입니다.

    다만 바다가 쓰레기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듯

  7. 관리자님 2011.04.15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6.25 전쟁에 관심이 많은 중학생입니다.

    그동안 6.25전쟁에 대해 어떻게 소개를 할까 하다가
    이 블로그를 발견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블로그에 있는 글을 제 미니홈피로 퍼가고 싶슨데
    괜찮으련지요?

  8. Haberdashery 2011.10.30 00: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번도 없이 목숨을 내걸고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이 있으니 또한 고마울따름입니다.

  9. across the country car insurance business 2012.05.25 1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냥 웅장한 제출! 분명히 항목을 통해 읽기, 즐겁게, 당신은 훌륭한 창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귀하의 블로그를 표시 예약 및 definately 언젠가 빨리 돌아올 것이다 확신합니다. 제가 확실히 잘 만드는 방법에 대한 계속해서 당신을 자극해야 좋은 아침 해!

  10. auto insurance 2012.05.25 1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는 콘텐츠 물질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많은 감사를 블로그를 작성할 수 있고 자주 있습니다. 이 문서는 진정 산과 내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웹 블로그를 표시하고 달성 가능한 정보와 사실을 확인하게 예약하러 갈거야.

  11. car insurance firms 2012.05.25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는이 본 게시 이상 사이에서 게시하는 것을 고려하십시오. 그것은 원본입니다. 나는 심각하게 당신이 문서에서 제시하는 주요 아이디어를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중요한 전망과 더​​ 많은 블로그와 포럼을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식의이 특정한 선물 선물 바구니를 위해 운이 좋은 사람의 이런 종류. 그것을 올리세요!!

  12. rattan indonesia 2012.12.30 2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더 중요한 전망과 더​​ 많은 블로그와 포

한강다리 때문에 멈추었나? [ 1 ]

생생! 6·25/August의 군사세계 2010.07.02 07:59

 

  거대한 전쟁의 이면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종종 벌어지고는 합니다. 이를 흔히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6.25전쟁 또한 미스터리로 불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고 일부는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곧바로 한강을 건너 아군을 추격하지 않고 서울에 머무르며 3일간 진격을 멈추었던 사실입니다.


[남로당의 환호 속에 서울로 입성하는 북한군 T-34전차]

  그런데 이들은 3일간 전진을 멈추었고 이것은 이후 미스터리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부전선의 북한군 조공이 춘천-홍천을 돌파한 후 급속 우회하여 수원을 조기 점령함으로써 국군의 퇴로를 일거에 끓으려 했던 북한의 초기 전쟁전략이 국군 제6사단의 분전으로 와해되었다는 의견, 그 동안 남한에 은밀히 내재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의 봉기를 기다렸다는 의견, 북한군의 역량 문제로 부대 재편과 보급을 하기 위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는 의견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의 낙서에서 계속 남진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서울에서의 3일간의 지체는 이후 북한군에게 커다란 짐이 되었습니다.


  사실 미스터리는 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원인을 명확히 모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사유를 북한 스스로 정확히 밝힌 것이 없어 아직도 미스터리로 분류되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지 못한 체 추격을 멈추었다고 추론하고 있고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전쟁 개시의 원죄가 있는 북한 측은 전쟁자료를 비공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 동안 위에서 분석한 내용들보다 확실한 이유로 거론되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한강교량 폭파였는데, 한강에 놓여있던 한강교량들(인도교, 철교, 광진교)을 아군이 폭파함으로써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즉, 아군의 군사작전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와 관련한 주장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개할 내용은 이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폭파되어 끓긴 한강 인도교]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 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 구교)와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뒤이어 귀청을 찢는 커다란 폭음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여 들어갔습니다. 바로 6.25전쟁사 초기의 비극 중 하나인 한강교 폭파사건이었고 이것은 북한군에게 서울이 함락됨을 암시하는 암울했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점령지 서울에서 벌어지는 인민재판 ]


  적의 진격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 교량이나 주요 교통 시설물을 자의로 파괴하는 작전은 오래전부터 시도된 보통전술입니다. 한강교량은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시설물이었으므로 국군이 이를 파괴한 것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습니다. 6·25전쟁 발발 초에 임진강철교와 춘천의 모진교 폭파에 실패하여 방어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전쟁 중 파괴된 압록강 철교의 모습]

  한강 철교와 달리 적 후방 차단을 목적으로 아군이 파괴시킨 교량입니다.


  반대로 공격을 가하는 군대는 돌격로를 확보하기 위해 수색부대 같은 선도부대들로 하여금 본진이 진입하기 전에 주요 길목에 있는 교량을 먼저 확보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당연한 군사전술일 정도입니다. 따라서 적에게 밀려나고 있던 국군이 한강의 다리들을 폭파시킴으로써 적의 진공을 둔화시켜야 할 절대적인 필요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강교량의 폭파는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잘못된 작전이었다고 비판받는 한강교량 폭파]


  당시 정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보다,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었다는 비판적인 주장이 아직도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군사전략상 교량폭파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폭파의 시기와 방법이 너무 문제가 많았고 더구나 효과가 미진하였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폭파시기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 이것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국군 역사의 치욕이기도 합니다. ( 계속 )

Posted by LG Innotek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excursion us all these days 2012.05.25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언제든지 가장 효과적인 문서로서이 문서를 고려해보십시오. 그것은 정말로 특별한입니다. 사실 당신이 작성한 콘텐츠에 동안을 제공하고 주요 개념을 감탄. 우리는 더 중요한 생각과 더 많은 블로그와 포럼을 위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전문 지식이 특정한 보상 선물 바구니를 소유하는 그러한 행운의 사람이있어. 좋은 일을 계속!!

  2. home warrantee quotes org property insurance vocals rapidly 2012.05.25 17: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신은 좋은 블로그를 기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에게도 당신이 여기이 특정 훌륭한 문서를 확산 고맙다는 말을 좋겠어. 이곳은 서면 문명화됩니다. 이 사이트에 의해 사람의 귀중한 풍경을 공유하기위한 감사합니다. 사실 bared 그래서 블로그 안에서 매혹적인 제품을 반복했다.

  3. head to people news 2012.06.07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것은 당신이 제공하고 있고 또한 떨어져 공짜로 제공되는 환상적인 소스의 일종 이죠. 저는 무료로 환상적인 학습 자원을 제공하는 욕망을 알고 목격 웹사이트를 좋아해요. 이 놀라운 소스에 대한 감사!



  4. indonesia rattan furniture 2012.12.30 21: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료로 제공되는 좋은 참고 이러한 유형입니다. 난 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