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 해당되는 글 181건

  1. 2010.06.21 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7)
  2. 2010.06.15 53. 알려지지 않은 적 (3)
  3. 2010.06.01 49. 흥남 철수작전 (16)

55.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21 09:00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에서 철수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으나 중동부전선의 원주 돌파구가 계속 확대되고 있어 상황은 극히 비관적이었습니다. 더불어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1월 20일을 전후하여 감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또다시 후퇴하여야 한다는 패배의식이 전선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미 합동참모본부는 여기서 불과 50킬로미터 만 더 후퇴한다면 한반도를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전쟁에서 손을 들어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37도선에서 방어선을 펼치고 있었으나 패배의식이 팽배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선에서는 막상 후퇴한 유엔군을 추격할 것 같았던 중공군의 움직임이 전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나타나면 이제 어떻게 싸워야할지 난감해 하던 유엔군은 생각과 달리 적이 나타나지 않고 숨 막히는 적막만 전선에 흐르자 오히려 초조해졌습니다. 비록 원주에서 미 제2사단이 선전을 펼쳐 중부전선의 위기를 막아내기도 하였지만 중공군 참전이후 계속된 연이은 패배와 그로인한 후퇴로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전투보다 군의 사기 회복이 선결문제로 부각되었고 신임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교육을 통하여 전투의지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하지만 정신교육보다 사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승리였습니다.


  결국 국지적인 승리라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소규모의 선공을 결심하고  지금까지 나타나기만 기다리던 중공군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항공정찰 등을 하였음에도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답답해진 리지웨이는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정찰대를 구성하여 위력수색(威力搜索)을 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미 제1군단에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이 배속되어 증강된 제25사단 27연대가 작전에 나섰고 이를 울프하운드(Wolfhound)작전으로 명명하였습니다. 비록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서 실시한 작전이었지만 이것은 6·25전쟁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위력수색에 나선 제27연대원 들의 모습]


  1월 15일 아침, 제27연대전투단은 항공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평택-오산을 연결하는 1번 국도를 따라 수원방향으로 수색을 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밀번 미 제1군단장은 제27연대전투단의 동측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 제3사단의 1개 연대와 국군 제1사단의 1개 대대를 안성-용인방향으로 진출시켜 수원-용인 간 국도를 차단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이들 작전 참여부대들은 첫날, 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다음날 아침 수원에 진입하면서부터는 대규모의 중공군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목표가 전투가 아닌 수색이었으므로 군단장은 철수를 명령하였고, 항공기의 공중엄호로 중공군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안전하게 철수를 완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진까지 뚫고 들어가 교전을 벌이며 직접 확인한 위력수색의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수원-이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는데 의외로 화력지원과 보급수준이 매우 열악하여 가까운 시일 내에 대규모의 공세를 재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울프하운드 작전이 불과 1개 연대전투단이 겨우 이틀간에 걸쳐 펼친 소규모의 작전이었지만, 이제까지 신비스러운 군대로 여겼던 중공군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면서 제8군 전체가 한번 싸워볼만하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작전은 철군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방한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Lawton J. Collins) 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시되었는데, 전선의 상황을 직접 파악한 콜린스 는 처음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와 달리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철군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야전지휘관들에게 주지시키려 한국을 찾았지만 울프하운드 작전 결과는 자신들이 너무 중공군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중공군과 그들이 사용한 전술이 낯설었을 뿐이지 결코 미국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극복한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리지웨이)


  콜린스 대장은“중공군을 군사적으로 응징한다”는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의 확고한 신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철군이냐 확전이냐의 갈림길에 섰던 유엔군은 비록 확전은 아니더라도 철군을 하겠다는 패배적인 생각을 접게 되었습니다. 콜린스 대장이 이후 그의 자서전인 『평화시의 전쟁(War in Peacetime)』에서 “철군문제의 변화를 가져다준 장본인은 바로 리지웨이 장군이었다”라고 하였을 만큼 리지웨이의 신념과 그가 주도한 울프하운드 작전은 비록 작았지만 전쟁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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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윤곤 2010.06.21 10: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정일권과 작전을 검토하는 ← 오타네요 ^^

  2. 박애경 2010.06.21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난 정말 이사진과 글을 읽고 정말많은것을 알게되었다 전말 감동이다

  3. 이상용 2010.06.22 0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는 6.25 전쟁 생생한 전설 같은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들!!



    내 나이 60세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나이로는! 나는 1951년1월24일(음력) 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여 났다.

    정확히 말해서 약력으로 1951년 3월 1일에 경기도 양평군 지역의 어느 탕광 혹은 금광 터널에 안에서 태여 났다 .



    이때가 우리 한국 전쟁이 중공군에 개입으로 UN군이나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UN군이나 국군이 엄창난 희생을 초래 하였던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압록강 까지 진군한 국군이나 미군이나 속절없이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태여 나기전 약 1개월전에 1951년2월경 어머님는 날 배속에 만삭이 였던 그때였다. 얼마전에 6개월전에 피난을 같다가 다시 북한 공산군 후퇴하기 시작하고 국군이 회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집으로 돌아 온 때였다.



    우리 집은 6번국도 양평에서 강원도 홍천 방향 24km 지점 양평군 청운면 비룡리 국도변. 6번국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홍천 과 횡성의 갈림길 )에서 서울쪽으로 3Km 지점.

    그래서 아버님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먹을것도 없고 하여 집 돌아가 땅속에 감추어 놓있던 식량을 찾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 온것이다.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은 완전히 망거지지는 않았던것을 확인 하고는 뒷 마당 외진곳에 감추어 놓앗던 곡식을 찾아 모처럼 밥을 가족과 해드시고 너무 곤역스럽워던 피난 생활에 지처던 가족과 초 저녁밤을 보내려는 순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북한괴뢰군 패잔병 7명이 후퇴 하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총으로 위협하며 음식를 요구하며 쉬여 갈 방을 요구하여 남아 있던 보리쌀로 저녁을 하여주고 방 하나 를 제공하여 우리 가족 5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2`3경에 우리 방문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아주 낢은 국군복장의 국군2명이 들어 오면서 작은형님의 귀에다 대고 "우리는 국군 특수부대 요원이며 함흥부터 여기까지 2명이 간신이 살아왔다면서 혹시 여기 북한군이 어디있는지 안느냐'물어보는 것이 였다.

    형님은 너무 당황 스럽고 무섭고하여 아무리 소리 않고 손가락으로 저쪽 방에 북한군 괴뢰군 있다는 손짓으로 알려 주니 그들은 고양이 처럼 움직여 옆방으로 가던이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리던이 잠잠한 후에 그들이 다시 와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갑니다" 어디 쯤 국군이 있는것 같으냐?" 아버님이 그들에게 "여기서 30리 정도 가면 지평리 인데 거기쯤 국군이 있을거라고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때 그들은 눈에 살기가 돌았으며 두 눈에서 불빛이 나듯 두눈이 빨간 눈동자 같았다고 회고 한다. 형님은 회고 하기를 이들 국군은 몇몇일을 굶은것 같아서 음식을 해주겠다고 어머님이 이야기 하니 그 국군들은 이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당신 가족도 위험 하니 피하기 바란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들 국군2명은 즉시 움직여 어둠속으로 살았젔다.



    그 다음 날까지 우리 가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아버님은 동력이 트기전에 북한괴뢰군 7명의 시체를 뒷산 구덩이에 파뭇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 국군 2명이 살았 갔는지 굉장히 걱정하시던 것을 지금도 그 6.25 전쟁의 잔상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군 선배님들이 6.25 전쟁시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하였는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용 5기생

  4. 이상용 2010.06.26 02: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아는 6.25 전쟁 생생한 전설 같은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들!!


    내 나이 60세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나이로는! 나는 1951년1월24일(음력) 에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여 났다.

    정확히 말해서 약력으로 1951년 3월 1일에 경기도 양평군 지역의 어느 탕광 혹은 금광 터널에 안에서 태여 났다 .

    이때가 우리 한국 전쟁이 중공군에 개입으로 UN군이나 국군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여 UN군이나 국군이 엄창난 희생을 초래 하였던 시기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압록강 까지 진군한 국군이나 미군이나 속절없이 밀렸기 때문이다.

    내가 태여 나기전 약 1개월전에 1951년2월경 어머님는 날 배속에 만삭이 였던 그때였다. 얼마전에 6개월전에 피난을 같다가 다시 북한 공산군 후퇴하기 시작하고 국군이 회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집으로 돌아 온 때였다.

    우리 집은 6번국도 양평에서 강원도 홍천 방향 24km 지점 양평군 청운면 비룡리 국도변. 6번국도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홍천 과 횡성의 갈림길 )에서 서울쪽으로 3Km 지점.

    그래서 아버님 이제는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먹을것도 없고 하여 집 돌아가 땅속에 감추어 놓있던 식량을 찾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 온것이다.


    아버님은 집으로 돌아 와 보니 집은 완전히 망거지지는 않았던것을 확인 하고는 뒷 마당 외진곳에 감추어 놓앗던 곡식을 찾아 모처럼 밥을 가족과 해드시고 너무 곤역스럽워던 피난 생활에 지처던 가족과 초 저녁밤을 보내려는 순간에 마지막 남아 있던 북한괴뢰군 패잔병 7명이 후퇴 하다가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총으로 위협하며 음식를 요구하며 쉬여 갈 방을 요구하여 남아 있던 보리쌀로 저녁을 하여주고 방 하나 를 제공하여 우리 가족 5은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새벽 2`3경에 우리 방문을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아주 낢은 국군복장의 국군2명이 들어 오면서 작은형님의 귀에다 대고 "우리는 국군 특수부대 요원이며 함흥부터 여기까지 2명이 간신이 살아왔다면서 혹시 여기 북한군이 어디있는지 안느냐'물어보는 것이 였다.

    형님은 너무 당황 스럽고 무섭고하여 아무리 소리 않고 손가락으로 저쪽 방에 북한군 괴뢰군 있다는 손짓으로 알려 주니 그들은 고양이 처럼 움직여 옆방으로 가던이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들리던이 잠잠한 후에 그들이 다시 와서 "고맙습니다."우리는 지금 남쪽으로 갑니다" 어디 쯤 국군이 있는것 같으냐?" 아버님이 그들에게 "여기서 남쫒으로 30리 정도 가면 지평리 (6.25 전사 "지평리 전투") 인데 거기쯤 국군이 있을거라고 알려 주었던것이다".

    그때 그들은 눈에 살기가 돌았으며 두 눈에서 불빛이 나듯 두눈이 빨간 눈동자 같았다고 회고 한다. 형님은 회고 하기를 이들 국군은 몇몇일을 굶은것 같아서 음식을 해주겠다고 어머님이 이야기 하니 그 국군들은 이 집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당신 가족도 위험 하니 피하기 바란다면서 미안하다면서 그들 국군2명은 즉시 움직여 어둠속으로 살았젔다.

    그 다음 날까지 우리 가족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아버님은 동력이 트기전에 북한괴뢰군 7명의 시체를 뒷산 구덩이에 파뭇었다.
    형님은 지금도 그 국군 2명이 살았 갔는지 굉장히 걱정하시던 것을 지금도 그 6.25 전쟁의 잔상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군 선배님들이 6.25 전쟁시 얼마나 어려운 전투를 하였는지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용 3사학교5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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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알려지지 않은 적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15 08:54

 

  개전 직전 북한 공군은 전투기를 포함한 200여기의 작전기를 보유하여 불과 20여기의 훈련기만 보유하였던 대한민국 공군을 압도하였지만, 훈련량 등이 절대 부족하여 실전에서 그리 커다란 전과를 기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6·25전쟁이 개시되었던 얼마간의 순간을 제외하고 휴전이 될 때까지 하늘에서는 유엔군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미 공군 덕분에 처음부터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마음 놓고 근접항공지원과 후방차단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고 이것은 위기의 순간에 국군과 유엔군을 지탱한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 공군 B-29의 융단폭격 모습]


  미 공군이 6·25전쟁이 참전하자마자 북한 공군은 괴멸되었고 이후 한반도의 하늘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습니다. 아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순간에도 적진 한가운데인 평양에 대한 공습이 연일 이루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 이후부터 지상군 같은 완전히 역전당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늘의 상황도 변하였습니다. 1950년 11월 8일에는 압록강 건너 만주 기지에서 발진한 중공군 소속의 MIG-15 전투기가 미군 F-80 전투기를 공격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비록 찰나의 조우였고 피아 모두 별다른 전과는 없었지만 이것은 항공전사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역사상 최초의 제트기만의 공중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1950년 11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10여 개월 f동안, 미 공군 전투기나 폭격기들이 중공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 주변에 출현하면, MIG-15는 만주의 안동기지에서 출격하여 유엔군 공군을 요격하였습니다. 4기로 구성된 MIG-15 편대는 이륙 후 2기씩 2개 편대로 분리된 후 공격을 시도하고는 재빨리 만주로 도주하는 전형적인 히트 앤드 런(Mit & Run) 전법을 구사하였습니다. 이러한 MIG-15의 갑작스런 등장은 아군에게 경악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의 주력 전투기는 F-80이었지만 몇 차례 조우결과 MIG-15에 절대 열세임이 판명되었고 B-29같은 폭격기는 MIG-15에게 손쉬운 먹이거리기 되었습니다.


[출격 준비 중인 중공군 MIG-15]


  특히 1951년 9월부터는 중공 공군의 출격횟수가 더욱 증가되어, 12월에는 46기로 구성된 미 공군 B-29 폭격기 편대에 대항하여 한꺼번에 105기의 MIG-15를 출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중공군의 일일 최대 출격 소티는 400회, 최대 동시 출격 기수는 180기에 달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유엔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MIG-15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작전 나가는 것을 거부하였을 만큼 순식간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결국 MIG-15의 등장은 미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인 F-86이 조기에 전쟁에 등장하도록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이 한반도 상공에서 펼쳤던 숨 막히는 공중전은 항공전사에 커다란 한 획이 되었고 MIG-15와 F-86은 최고의 라이벌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MIG-15는 주로 청천강이북에서만 주로 활동하였고 대부분의 공중전도 이 부근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MIG-15가 자주 출몰하였던 이 지역을 흔히 미그회랑(MIG Alley)이라 불렸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감탄한 MIG-15의 성능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아스러운 부분입니다. MIG-15가 대지공격 능력이 없는 순수한 제공전투기이기는 하지만 최전선에서 지상의 공산군을 공격하는 유엔군 전술기를 요격하지 않고 오로지 미그회랑에서만 활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최근의 에어쇼에도 자주 등장하는 F-86과 MIG-15]

[최고의 라이벌로 항공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당시에 중공군복을 입은 수많은 소련 조종사들이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비록 동체에는 중국 국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전투기 모두와 상당수의 조종사를 소련이 공급한 것이어서 한반도에 등장한 MIG-15는 소련 공군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련말로 교신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고 만일 격추되더라도 안전한 지역에서 작전을 펼쳐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MIG-15는 미그회랑 일대에서만 주로 목격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소련과의 교전 사실을 정식으로 인정하면,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탓에 소련군 이 참전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련도 미군과 직접적인 대결을 회피하였을 만큼 상대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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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흥남 철수작전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6.01 08:15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12월 6일, 미 제8군이 평양을 내어주고 38선으로 철수하자, 흥남 일대로 모여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순식간 적진에 고립되어 버렸습니다. 한때 함흥-원산해안일대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저항하는 방안도 검토하였지만 12월 8일 맥아더는 해상철수를 지시하였습니다. 작전을 총지휘한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흥남항을 통해 아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퇴조항~함흥~동천리를 연결하는  반경 12킬로미터에 교두보를 설치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흥남 앞 바다에는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되었고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으로 중공군의 접근을 거부시켰습니다.


[흥남항에 집결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흥남에서 철수하는 아군의 병력은 총 105,000여명, 차량이 18,422대 그리고 각종 전투물자 35,000여톤의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 해군은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으나, 절대량이 부족하여 2회 이상 운항을 하여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영웅적인 장진호 전투를 치르며 포위망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1해병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2월 12일부터 개시된 해상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흥남 남쪽에 위치한 연포 비행장을 통한 항공철수도 병행되었습니다.


  교두보 밖에 중공군이 몰려들기는 하였지만 공격은 예상외로 미약했습니다. 한반도 북부의 동부지역에 12개 사단을 집중했던 중공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는 흥남 일대에 밀집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을 일거에 격멸시킬 수 있는 호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주력 대부분은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해병사단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부분 허물어져 내렸고 남은 전력 또한 유엔군의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중공격으로 만들어진 불벼락의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흥남철수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습니다. 아군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장사진을 이루며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피난민에 대한 해결방책이 사실 없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평양철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또한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수십만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전쟁 내내 남북 간의 인구 이동 추이를 보면 약 200여만의 북한 주민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던 반면 자발적으로 북으로 올라간 인구는 극히 미약합니다.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목숨을 걸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 피난민들의 통계는 체제의 우월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해상으로 탈출하는 피난민들의 모습]


  알몬드는 최초 약 3,000명 정도의 피난민을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으나 예상외로 많은 피난민이 부두지역으로 쇄도하자,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장군 등의 건의를 수용하여 선편이 닿는 데로 피난민을 철수시키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같은 극적인 조치로 98,000여명 정도의 피난민이 해상을 통하여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보아도 찾아보기 힘든 철수작전이었습니다. 때문에 흥남철수는 단지 군사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철수작전을 넘어 인도주의 작전으로도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비록 구출되지 못하고 흥남 일대에 남아있는 피난민도 이와 비슷한 숫자였지만 당시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래가 없는 대규모의 함포와 공중폭격 덕분이었습니다. 이때 미 제7함대에서 발사한 5인치 함포는 18,637발이었는데 이것은 인천상륙작전 시 보다도 70퍼센트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4일 14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였던 것인데 이로서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은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철수선이 떠나면서 파괴되는 흥남항]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흥남에서 철수함으로써 지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내달려간 아군은 불과 85일 만에 38선 남으로 모두 내려오게 되었고 통일의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북진은 불과 25일만 달콤하였고  새롭게 등장한 적에 의해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이날은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공세로 전쟁의 종결을 희망한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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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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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r insurance 2011.10.08 19: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모씨네요.거기에 동조한 채명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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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관 밝은 모습으로 당당히 봉사활동을 했었다는...취재진들의 질문이나 포즈에도 적극 응해주고 말이

  3. Kitchen Design 2011.10.18 0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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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그 시점의 포항 공격이 예상 못 했던 것이라 학도병들이 최전방에 처하게 된 것이고요.
    댓글

  5. medical billing and coding 2011.10.28 15: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모씨네요.거기에 동조한 채명신옹도 마찬가지고....도대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양반이 장군 칭호 붙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

  6. BCAA 2011.11.05 17: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시점의 포항 공격이 예상 못 했던 것이라 학도병들이 최전방에 처하게 된 것이고요.
    댓글

  7. Zack Ceconi 2012.05.30 18: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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