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p. 3성 장군이 중령으로 전쟁에 참전한 몽클라크(Ralph Monclar) 프랑스군 대대장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13 10:39

Tip. 3성 장군이 중령으로 전쟁에 참전한 몽클라크(Ralph Monclar)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프랑스 파한대대 제1대 대대장(1950. 11. 29 ~ 1951. 11. 30)이다. 몽클라크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간 중에는 해외에 망명하여 반독투쟁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제1,2차 세계대전 중에 18번의 부상을 입고 18번의 훈장을 탄 맹장이었고, 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58세의 나이에 프랑스군의 대대장으로 참전을 지원하였다. 장군이 어떻게 대대를 지휘할 수 있느냐며 프랑스 국방차관이 만류하였지만, “나에게 계급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나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나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전하기 위해 내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하였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억압받는 민족을 돕는 게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군인의 신념이고 본분이라고 말씀하셨고, 유엔군 최초로 평화를 위해 파병되었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는 1950 11 29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 후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되어 원주전투와 지평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평리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수십 배나 되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에도 불구하고 방어진지를 끝까지 고수하여 지평리를 방어하는 데 결정 적인 역할을 하였다.



 

2010년 방한한 몽클라르 장군의 외동딸 파비엔 몽클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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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홍주 2013.11.16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존경스러운 분인것 같습니다. 군인정신의 표상 입니다

남한을 혼란시켜라! (인민유격대의 남파)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05 11:37

남한을 혼란시켜라! (인민유격대의 남파)

 

김일성은 1948 7남북 노동당연합중앙위원회의 구성, 1949 6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창설, 1949 7 1일 남로당과 북로당(북조선노동당)조선노동당으로 통합 등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거나 통합하여 완전히 평양이 주도하는 권력체계를 확립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해 그간 남로당을 이끌던 핵심 멤버들도 평양으로 넘어가고 남한에는 서울지도부만 남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남정책과 공작의 구심점도 자연히 북으로 옮겨 갔고, 남로당의 혁명 역량은 단지 보조적인 수단으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

 

이처럼 남북 양쪽에서 두 공산당 세력 사이에 벌어진 한반도 적화를 위한 지하공작활동의 주도권 다툼에서 그 구심점은 평양의 김일성 쪽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부터 남로당은 북로당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하위 부서로 들어가 종전의 독자투쟁 노선에서 점차 평양의 노선과 지시를 수행하는 하급 단위조직으로 전략되어 갔다.

 

주도권 싸움에서 뒤쳐지게 되자 고립감과 초조감을 느낀 남로당은 상황반전의 수단으로 무장 유격투쟁을 전개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러한 노선변경은 남한 내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정부가 각종 좌익사건을 계기로 1948 12월 초 국가보안법을 입법화하고, 1949 10월부터 남로당을 불법 이적집단으로 규정해 그들에 대한 단속조치를 취하자 활동영역이 축소된 남로당의 처지에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장 유격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남로당은 194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무력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세포 중 열성당원을 무장시켜 각 지방의 유격 거점으로 입산시켰다. 또 각 도마다 한두 곳을 해방구로 설정하여 북한군이 남침할 때까지 그 지역을 확보토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시기 남한 각지에서 발생한 각종 유격 소요사건은 기본적으로 남로당이 수행한 것이 사실이지만, 큰 틀에서는 북한정권이 무력통일 노선의 전초전으로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 북한 인민유격대 (당시는 빨치산으로 불렸다)

 

Tip.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또는 프랑스어 파르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정규 군사조직을 뜻한다. 즉 적의 배후에서 신속한 이동과 기습을 통해 적에게 피해를 입히며, 일정한 조직체계가 없는 소규모 전투부대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빨치산은 그 당시 좌익 무리의 잔당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속치 빨갱이와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빨치산이란 6.25전쟁 전후에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한 공산게릴라를 일컫는다.

 

 

북한은 대남적화의 선행단계로서 북한 전역을 무력남침을 수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조성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1949 7인민유격대를 조직해 그 요원들을 양성.남파하였다.

 

인민유격대의 남파는 북한군이 강조하는 배합전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전선에서의 전투와 병행하여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비정규전 형식의 또 다른 전투를 유발하여 배후에 제2전선을 형성하려는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의 목적은 적의 동원 및 증원을 방해하여 전후방을 동시에 전장화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하여 격멸한다는 개념이 이었다. 이는 결국 조만간에 있을 북한 정규군의 남침공격을 앞두고 남한 내에서 그에 호응하기 위한 제2전선을 형성할 목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참모들

 

인민유격대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과 경남 지역에 집중돼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남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남한 내 각 지역의 무력투쟁은 이후 한층 격화되었다.

 

1948 11월부터 6.25전쟁 직전인 1950 3월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침투해 온 유격대원 수는 무려 2,400명에 이르렀다.

 



지리산지구 전투부대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표창장.


이들 인민유격대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2,000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지만 나머지 400여 명은 남한 각지의 오지에 틀어박혀 남침 직전까지 계속 저항하였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전방 사단의 일부와 후방 3개 사단을 포함해 총 4개 사단병력과 경찰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였다. 그 때문에 국군은 38도선의 방어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방경계도 허술하게 되는 등 적의 남침공격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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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염원을 안고 (국군과 유엔군의 38도선 돌파)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0.24 13:50

국군의 38도선 돌파

 

1950 9 29, 서울 환도식을 마친 뒤 이승만 대통령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곧 대구로 내려가 군 수뇌부회의를 소집, 북진 명령을 하달하였다.

 

명령을 받은 정일권 총참모장은 즉각 가장 북쪽에 진출해 있던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에 연락하여 “38도선 인근의 북쪽에 국군이 진격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지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1군단에서 3사단 정면 하조대(양양 남쪽)에 그런 곳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정일권 총참모장은 바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3사단이 38도선 북방 요지 (하조대)에서 사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고 있다. 38도선 지상에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를 공격하게 해 달라 고 요청 하였다. 워커 장군은 이 요구를 바로 승인하였다.

 



38도선을 돌파하는 국군



워커 장군의 승인을 받은 정일권 총참모장은 9 30일 강릉의 제1군단사령부를 거쳐 국군제3사단 제23연대 진지를 시찰하고 현장에서 구두로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10 1일 오전 5시에 국군 제3사단은 제23연대를 선두로 38도선을 돌파, 오후 2시에 양양에 돌입하였다. 이때 제3사단의 서측에서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양야에 동시에 입성하였다. 이어 10 3일에는 제3사단 제26연대가 제23연대와 교대하여 간성을 점렴하고 10 9일 원산 외곽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10 10일에 수도사단과 함께 공격을 개시하여 원산 시가지에 진입하였으며, 마침내 11일에는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북진의 선봉으로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국군 제3사단의 38도선 돌파기념 푯말.





38도선 돌파 후 행군하고 있는 국군 제3사단 장병들.





국군의 북진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기기 위하여 공보처가 발행한 전단



사실 9 29일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하달된 ‘38도선에서 진경 중지지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수뇌부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독자 노선은 미국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에 대한 열망은 트루먼 행정부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유엔군의 38도선 돌파

 

1950 9 27일 미 합참으로부터 북한지역 작전을 승인 받은 맥아더 장군은 북진작전계획을 수립하여 10 2일 예하부대에 하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맥아더 장군의 북진작전계획



1.   미 제8군은 38도선을 돌파하여 개성-사리원-평양 축선으로 진격한다.

2.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하여 제8군과의 연결 및 동부지역 작전을 담당한다.

3.    정주-영원-함흥선 이북지역의 작전은 국군에게 일임한다.

 


이 작전의 전체 골격은 미 제8군을 주공으로 하고 미 제10군단을 조공으로 삼아 원산에 상륙한 다음 북진하여 일명 맥아더 라인까지 진출한 후 그 이북지역의 작전은 국군이 전담한다는 것이다.

 


미 제1기병사단의 금천지역 전투 (1950 10 9 ~12)



 

유엔군사령부의 북진작전계획에 따라 10 4일부터 북진작전에 돌입한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10 8일 임진강을 건너 공격 당일 개성까지 진출하였다.



 


북진하는 도중에 어린이들을 대하는 호주군 병사.

 


북진작전의 주력인 미 제1군단은 미 제1기병사단을 주공으로 군단에서 지원 가능한 전투력의 대부분을 집중 지원하여 작전지역 중앙의 가장 양호한 통로인 금천-사리원-평양 축선을 따라 공격토록 하였다.

미 제1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의 우측에서 조공으로 시변리(토산)-신계-수안을 거쳐 평양 동쪽으로, 미 제24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의 좌측에서 조공으로 연안-해주로 우회하여 재령-진남포 방향으로 공격토록 하였다.




 

금천을 점령한 미 제1기병사단.

 


 

한편 미 제1군단의 북진은 10 9일 오전 9시에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이 배치된 금천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천은 평양방어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써 북한군이 결사적으로 저항하고, 대량의 지뢰를 매설해 놓아 작전에 제한이 많았다. 이 때문에 미 제1기병사단의 공격은 10 11일까지도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미 제1기병사단은 북한군 주력에 대한 정면공격과 병행하여 2개 연대를 북한군 좌우측으로 우회시키는 양익포위 전술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10 12일 저녁 무렵 우회부대가 후방지역인 한포리에 진출함으로써 북한군 2개 사단을 포위 격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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