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했던 기억 그러나 과하였던 순간, 평양탈환(2/2)

생생! 6·25/6·25전쟁 10대전투 2011.07.01 21:05

 6ㆍ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것은 엄청난 치욕이었습니다. 석 달 후에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을 수복하였지만, 엄밀히 말해 서울을 탈환한 주체는 미 10군단이었습니다. 때문에 ‘만일 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호언장담했었던, 이승만 정부는 평양 탈환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서울 피탈은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치욕이었습니다>


 국군 1사단이 미 1기병사단과 비슷한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조바심이 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무슨일이 있더라도 평양만은 국군이 먼저 점령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미 8군의 우익을 담당하며 한반도의 정중앙을 따라 북진하던 국군 2군단의 일부 예하부대들이 평양을 향하여 진격방향을 좌측으로 틀었습니다.

 그 결과 국군 1사단 15연대가 본평양에 입성하던 시간과 거의 비슷한 19일 밤, 대동강을 건넌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 8연대도 김일성대학을 점령하며 평양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군보다 국군이 선점한 것은 맞는데 먼저 평양에 도착한 부대가 15연대인지 8연대인지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1사단과 7사단에게 평양을 탈환한 부대라는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대동강을 도하한 7사단 8연대도 거의 동시에 평양에 진입합니다>

 


 하지만 당시 국군은 UN군에게 지휘권을 일임한 상태여서 국군 2군단의 독단적인 진격은 명백한 군령 위반행위였습니다. 미 1군단에 속해 연합작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던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이 국군 7사단 8연대가 평양에 왔다는 소식에 놀라서 직접 찾아가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대노하였던 사례만 보더라도 그 심각성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국군 역사에 평양탈환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지만 사실 과유불급이었습니다.

 당시 국군 2군단이 진격 방향을 좌측으로 바꾸자 전선 중앙이 순식간 텅 비어져 버렸고 이틈을 노려 북한군 잔당들이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평양탈환 후, 원 위치하였지만 우회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그렇게 한 번 벌어진 틈은 이후 중공군이 침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10월 30일 평양 시민의 열렬한 환영 속에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였지만 최전선의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던 중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평양시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의 상황은 급격하게 바뀌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후 후퇴 당시에 아무런 미련도 두지 않고 중공군에게 즉시 내어준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상징성은 컸지만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의미 있는 거점은 아니었던 평양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평양 탈환이 전쟁의 끝이 아닌 이상 그 임무는 원래 예정된 부대들에게 맡겨야 했는데, 조급함에 사로잡혀 전선의 상당 부분을 공백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한 곳으로만 집중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하였던 것이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이 제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50년 10월은 국군의 역사에서 가장 감격스러웠던 시간이었고 그중에서도 백미는 바로 평양탈환이었습니다. 특히 국군 1사단이 여건과 장비가 월등히 좋았던 미 1기병사단과 벌인 경쟁은 국군의 위상을 널리 알린 쾌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창설된 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 군대가 이토록 쾌속의 진격을 선보일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터에 제작된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 狀 감격 속에 탈환한 평양을 이처럼 비극적으로 내주었습니다>


 엊그제까지 지옥의 인공치하 시기를 보내었던 국민들은 적의 심장을 국군이 점령하였다는 낭보에 감격하였고 곧바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냉정을 잃고 즉흥적으로 내달렸던 대가는 불과 한 달 만에 달콤했던 북진이 끝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50년 10월에 있었던 감격스러웠지만 과하였던 평양탈환은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남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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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국군 제3군단 최후의 날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30 08:20

 

  중요한 목지점인 오마치고개를 중공군이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아군이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미 제10군단 예하 인 국군 제7사단이 붕괴되면서 엄청난 중공군이 국군 제3군단 후방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9사단은 만일을 대비하여 사단이 보유한 차량과 중장비 200여대를 창촌 일대로 철수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오마치고개의 피탈이 파악되었습니다. 이들 철수 차량제대가 후방의 창촌으로 가려면 오마치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이동 중에 중공군으로부터 급습을 당하였고 이를 통해 고개가 차단당한 사실을 인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근 국군 제3사단과 군단본부에도 즉시 보고되었습니다.


[중공군의 오마치고개 점령 사실은 국군 붕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단본부는 이를 잘못된 보고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설령 적이 오마치고개를 장악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침투부대나 공비들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직 그곳을 관할하는 미 제10군단으로부터 어떠한 사실도 통보받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떻게 반나절 만에 중공군이 전선을 가르고 30킬로미터 후방까지 침투 할 수 있었겠냐하는 막연한 생각도 그런 오판을 가져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군단본부가 이처럼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막상 중공군은 오마치고개는 물론 훨씬 남쪽 후방인 침교에서도 두 번째 포위망을 구축하던 중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퇴로가 엄중히 차단당한 국군 제3, 9사단이 오마치고개를 거쳐 후방으로 후퇴가 5월 17일 오후에는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설령 오마치고개를 넘었다하더라도 후방인 침교마저 적이 완전히 장악한 상태여서 오마치고개의 중요성은 이미 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어볼 점은 오마치고개가 아니라 바로 국군 제3군단의 항전의지였습니다.


  국군 제3군단과 예하 사단들은 단지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사실을 접하자마자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후퇴를 결심하였습니다. 물론 퇴로의 차단은 포위를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패배와 몰살을 뜻하는 단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마치고개의 피탈 소식을 전해들은 국군 제3군단은 5월 17일 오전 중에 이미 항전을 포기하고 철수를 목적으로 대책 없이 현리일대로 전방부대들이 집결하는데만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도 공산군은 아군을 부분적으로 포위만 하였지 압박을 가하던 상태까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국군 제3군단은 후퇴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국군 제7사단의 붕괴로 말미암아 먼저 뚫려 버린 미 제10군단 지역은 미 제2사단의 선전으로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국군의 무능이 바로 펑떠화이가 이번 공세를 국군지역으로 하게 만든 이유였고 철저하게 불행히도 그런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흘러갔습니다.


[능선을 기어오르며 인해전술을 펼치는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


  국군 제3, 9사단이 고심 끝에 시도한 작전은 결사항전이 아니라 한심하게도 오마치고개 돌파작전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오로지 후퇴를 염두에 두었던 작전이었습니다. 양 사단에서 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5월 17일 21시, 오마치고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한마디로 앞에서 밀려오는 적은 그대로 놔두고 퇴로를 뚫기 위해 뒤로 돌아 공격을 가하는 치욕적인 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 부대에 대한 통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부대들은 북한군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개방되어 있던 방대산을 무질서하게 넘어 철수, 아니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 화기까지 버린 병사도 있었으며, 주요 간부들은 계급장마저 떼어버리고 철수하는 그야말로 오합지졸들의 나 살기 경쟁으로 작전상 철수가 아닌 도망이었습니다. 적에게 패해 후퇴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퇴로가 차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줄행랑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국군 제3군단은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되어 부대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방대산의 철수로가 얼마나 혼잡하였던지 그냥 서 있으면 떠밀려서 앞으로 나아 갈 정도였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대열 속에는 말단의 사병은 물론 국군 제3사단장 김종오준장, 제9사단장 최석(崔錫)준장, 군단 참모장 심언봉(沈彦俸)준장등 3명의 장성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군의 이러한 비참한 도주는 창촌-광원리-하진부리까지 70킬로미터를 내려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5월 27일까지 70퍼센트 정도의 병력과 30퍼센트 정도의 장비가 간신히 수습될 수 있었는데, 어쩌면 이 정도의 병력이 수습된 것만 해도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우측으로 남하한 북한군 3개 군단이 정상적으로 진출하여, 최초 계획대로 3중 포위망을 완성하였더라면, 방대산 및 계방산 일대에서 무방비 상태에서 무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있기 때문입니다.


[5월 27일 전투상황도]


  하지만 이러한 예측도 엄밀히 말하면 사상 최대 패전에 대한 핑계일 뿐입니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다녔기 때문에 무방비 상태라는 가정이 나오는 것이었지, 결코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국군 제3군단을 공산군이 양익에서 완전히 포위하였어도 공중으로 보급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결사항전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저항은 애초부터 생각도 못했고 도망만 다니다 국군은 역사상 최악의 패전을 당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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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름과자 2010.08.31 12: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때 군단장 유제흥장군이 먼저 비행기 타고 달아나서 그게 부대내에 악영향을 끼쳐서 순식간에 무너진걸로 압니다

  2. 2010.09.03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걸 보고 가마귀 날자 배 떨러진다고 하죠..
    물론 유장군의 책임은 크지만.....

  3. Kim 2010.09.03 15: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나 당시 군단장이던 유재흥장군은 맡는 보직마다 참패를 겪었지요. 개전 초 7사단의 궤멸적 타격, 2군단장 재임시 덕천전투 패배 3군단장 재임시 3군단의 현리전투 패배. 이때 밴플리트 장군과의 대면에서 대단한 명언도 남겼는데 뭐 어쨌든 전쟁에서 지휘부의 혼란이 예하병력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좋은 전례라 하겠습니다.

  4. Computer Network 2012.02.10 18: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난 이런 행사를 통해 6.25전쟁이 어떻게 전쟁이 났는지 알게되었다.
    그리고 내가 봉사를 많이하고 돈을 아껴써야되는 것도 깨달게되었다
    난 이런 캠페인이 더욱더 개발되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5. expedia deals with regard to airfare 2012.05.21 15: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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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피알앤애드 2014.06.25 17: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5포스팅 관련하여 사진자료가 필요해서 퍼다 씁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나 변경은 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73. 피의 공세가 개시되다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08.17 08:13

 

  1951년 5월 16일 16시, 중공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었고 엄청난 포탄이 국군 제7사단의 전방연대 진지에 작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숨 막히던 긴장감을 깨고 피로 얼룩진 중공군 제6차 공세가 드디어 개시된 것이었습니다. 제7사단은 예하 제8연대를 서측 전방에, 제5연대를 동측 전방에, 제3연대를 예비로 운용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전방의 연대들이 엄청난 포연 속에 파묻혀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국군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에 소속이었지만 소양강 남단을 방어선으로 하여 군단의 가장 우측을 담당하면서 우측으로 국군 제3군단과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6·25전쟁 중 중공군이 사용한 야포 * 사진출처-LIFE)


  중공군의 포격으로 제7사단은 초전에 통신시설이 파괴됨과 동시에 후방의 포병대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어 화력지원 체계가 마비되었습니다. 2시간의 포격이 그치고 서서히 포연이 걷혀가자 엄청난 중공군이 소양강을 도하하여 공격해왔습니다. 무시무시한 사전 포격에서 살아남은 제7사단 장병들이 최초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였으나 연이어 중공군의 제파공세가 이어지자 더 이상 방어진지를 사수하기 힘들었습니다.


  중공군은 제20군 예하의 3개 사단과 제27군 예하의 3개 사단 등 무려 6개 사단을 집중하면서 순식간 아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제7사단 5연대는 진지 안으로 밀려들어온 중공군과 백병전을 펼치며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후방의 연대지휘소마저 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사단장은 현 진지를 고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미 제5연대는 분산되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좌익을 담당하고 있던 제8연대의 상황도 비슷했습니다. 후퇴하는 아군과 진지를 돌파하여 앞으로 내달리는 중공군과 뒤섞일 정도로 전선의 상황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후방에서 예비로 있던 제3연대에게 철수하는 전방 연대를 엄호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해서 주요고지 위주로 병력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비워버린 계곡사이로 중공군이 진출하여 제3연대마저 적중에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처럼 국군 제7사단을 가르며 쾌속의 진격을 계속한 중공군 제12군 60사단 178연대 2대대 6중대가 5월 17일 07시 30분경에 후방의 오마치(오미재) 고개를 점령했습니다. 불과 12시간 만에 최초 진격선에서 직선거리로 30킬로미터를 주파한 것인데,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그것도 심야에 시간당 평균 2.5킬로미터 속도로 진출한 경이적인 전과였습니다.


[중공군의 산악돌파 능력은 경이적이었습니다.]


  오마치고개는 당시에 미 제10군단 관할 하에 있던 고개 길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우측에 있던 국군 제3군단의 유일 후방통로였습니다. 무주공산이던 오마치고개가 이처럼 아침에 한개 중대에 의해서 순식간 점령당하였지만 후속하여 산길을 뛰어온 중공군이 시간대별로 증강되기 시작하더니 그날 밤 중공군 제60사단 전체가 고개 주변을 완전히 차단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 역사상 국군 최대의 참패를 불러오는 무서운 전주곡이 되었습니다.


  오마치고개가 점령당하던 그날 오후에 후방의 침교 일대를 중공군 제81사단이 거의 동시에 점령함으로써 국군 제3군단의 좌측은 적이 치기 시작한 2중의 포위망에 갇혀버렸습니다. 하지만 포위망을 완전히 공고화하려는 중공군의 공세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제12군이 가장 좌측의 국군 제5사단을 가르고 외곽지역을 크게 돌아 속사리로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중공군 제12군은 자은리 일대로 진격하여 내려왔는데,  정보 분석을 오판하여 국군 제5사단 담당지역이 아닌 보다 좌측인 미 제2사단 지역으로 출몰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외곽으로 돌아 3번째 포위망을 구축할 예정이던 중공군 제12군은 미 제2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진출이 저지되었습니다. 특히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미 제2사단 38연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지만 진내포격을 하는 초강수까지 두어가며 적의 진격을 물리치는 괴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이것이 지평리전투와 더불어 미 제2사단사에 빛나는 승전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벙커힐전투입니다.


[벙커힐전투는 공산군 전략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은 처음에 계획한 3중 포위망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는데, 만일 미 제2사단 38연대의 놀라운 분전이 없었다면 중공군의 제6차 공세는 대성공을 거두었을 것입니다. 현리전투결과를 추정하여 보았을 때 만일 공산군의 완전한 3중 포위망이 완성되었다면 6.25전쟁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전을 넘어 강원도 인제의 골짜기는 대학살극의 현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였습니다. 그만큼 벙커힐전투의 의의는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기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만 중공군 공세의 일부를 막아내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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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육이오 2010.08.17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날때마다 읽어서 일주일거의다되가네요 정말 좋은글같습니다./..

  2. 한국전쟁 2010.08.20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거의 매일 들러서 읽어보고 있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3. 오늘도 그대로 2010.08.25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주일째 기다리는데 다음편은 언제쯤 올라 올려나요...

  4. expedia vacation plans commercial airline 2012.05.21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한동안 주제의이 종류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몇 시간을 포함한 몇 가지를 위해 공부하고 항상 매우 흥미로 사이트를 식별됩니다. 행복을 빌어요.

  5. learn to get airfare unit web page 2012.05.21 17: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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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national airline carriers consignments 2012.05.31 1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음 문제는 환상적입니다 지금 사람의 지각하더라도 이미 대해 조사되었다고 하나입니다. 이 정보를 표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