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사단'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1.08.31 동해안 18포병대대의 진내[陣內] 혈전 (12)
  2. 2010.10.20 91. 파로호를 장악하다 (17)
  3. 2010.10.07 86. 희생을 필요로 한 고지전투 (3)

동해안 18포병대대의 진내[陣內] 혈전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8.31 17:25

 6ㆍ25전쟁 발발 당일 38선 동부전선, 동해안 쪽 방어는 8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 사단도 초전에서 옆 중부 전선 가평-춘천-양구 방면의 6사단과 비견될 만한 선전(善戰)을 했다. 8사단은 장비와 인원을 잃지 않고 북한군에게 타격을 주며 축차적인 철수를 했다. 8사단 포병인 18포병대대의 분전을 소개한다.

 전사에 크게 알려진 이웃 6사단의 16포병대대가 호쾌한 전투를 했다면, 8사단의 18포병대대는 처절한 전투를 겪었다고 하겠다.


[국군 포병과 M-3 105mm포]


 1950년 6월 25일 대대장 장강석 소령(육사 5기)은 서울로 출장을 떠나 있었고, 포대장 3명 역시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출발한 상황이라서 대대 부관 이남구 대위가 3중대는 대대본부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전포대장들이 지휘하는 2개 중대를 이끌고 출동을 했다.

 대대는 사천면 미노리 사천 초등학교로 나아가 1중대를 사천 건너 석교리에, 2중대는 사천 초등학교 운동장에 배치하고 포를 방열했다. 이 곳의 위치는 대강 경포호 이북으로써 매봉에서 발원한 사천[沙川]이 동해안으로 흐르는 곳이다. 과거에는 명주군이었지만 지금은 강릉시가 되었다.

 18포병대대는 포 방열 후에 양지말에 집결한 적에게 타격을 가했고, 석교리에 위치한 1중대는 적의 장거리포에 위치가 노출되어, 16:00경 사천 초등학교 서쪽의 밤나무 숲속으로 진지를 이동해야 했다.


[현재의 사천 초등학교]


 하루가 지난 26일 교육을 갔던 3개 포대장들이 모두 귀대했고, 그 다음 날 27일 대대장도 귀대해서 전투를 지휘할 수가 있었다. 27일 동해안 방면의 적들은 대공세를 취해서 아군은 악전고투(惡戰苦鬪)를 해야 했다. 압도적인 병력의 적이 포병 대대의 전면에 쇄도하여 화력을 통제할 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각 포 단위로 사격하는 변칙적인 운용으로 적을 계속 포격하였는데 이때 각 중대장의 명령은 사격제원을 부여하는 사격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각 포, 계속 쏴!"의 한 마디 뿐이었다. 이와 같은 포병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밀물처럼 밀어닥친 적의 진출을 지연시켰으며, 사단이 사천선[沙川線]에서 병력을 수용하고 지연 진지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단장 이성가 소장은 전방 전투 부대가 분산되어 후퇴하자 화력지원 부대의 안전을 위해서 포병대대에게 철수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포병대대 장병들은 공격하는 적의 기세를 일단 제압한 후 안전한 철수를 하기 위해서 포격을 줄기차게 퍼부었다. 이렇듯 사격에 열중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밤나무 밭으로 포진지를 이동하여 분전중인 제 1중대를 북한군이 기습했다.

 이들은 북한군 육전대로써 후방인 경포 해안에 상륙하여 후방에서 기습하여 온 것이다. 맨 먼저 포병 관측반이 그들과 충돌하여 전방 관측병과 한명화 하사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다급해진 중대장 박동엽 대위는 영거리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였으나, 끝내 적병들이 포진지에 몰려 들어와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 영거리 사격 : 포를 쏜 뒤 바로 포탄이 터질 수 있도록 조절하여 하는 사격. 가까운 거리의 목표물에 실시한다.

 그런데 18포병대대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서북 청년단 출신으로서 실향의 뼈저린 아픔이 있었다.

* 서북 청년단 : 1946년 11월 월남한 청년들로 조직되어 반공운동의 선봉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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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에 입대해서 싸운 서북 청년 단원들은 특히 그 용감성이 대단했다. 충주시 동락리 대첩에서 싸운 6사단 7연대 2대대도 서북 청년단들이 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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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포병이지만 육박전에서 적 보병들에게 밀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강해 뒤로 물러서는 포병은 한 명도 없었다. 포병들은 소총, 곡괭이, 야전삽, 돌멩이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손에 잡고 적과 맞붙어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을 벌여 끝내는 적들을 격멸하였다.


[초기 국군 포병의 제식포 M-3, 기존 105mm포를 공수가 가능토록 포신을 줄이고 경량화함.]


 이 날 18포병대대의 백병전과 직접 조준사격은 어느 전투에서도 그 유례가 드문 처절한 싸움이었고, 장병들의 용감성은 전사 상에 길이 빛날 한 장을 수놓았던 것이다. 1중대는 진내(陣內)에 몰려든 북한군 병사들을 모두 격멸하자 곧 영거리 사격을 계속하는 한편 포를 문(門)단위로 뽑아내서 철수를 했으며, 인접 2중대가 1중대 포들의 철수를 엄호했다.

 그러나 대치한 적은 조금도 공격을 늦추지 않았으므로 1ㆍ3번포는 눈물을 머금고 폐쇄기만 분해하여 가지고 철수하였다. 이 때 1번포 사수는 왼팔에 관통상을 입어 선혈(鮮血)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폐쇄기를 뽑아내어 그 무거운 것(43kg)을 한손에 들고 나옴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하였다.

 포차 운전병 심우택은 백병전 상황에서 포차로 진지 이탈 중 전사하였다. 장사로 소문난 대대 최서종 중사는 그가 미처 야전용 유선통(wire drum)을 가지고 나오지 못한 것을 뒤늦게 알아 차렸다. 그는 "나의 무기가 그것인데 어찌 군인이 무기를 버릴 수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중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후 콩 볶는 듯한 총소리만 들려 왔을 뿐 영영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2중대장 김영택 대위는 1중대 진내에 몰려든 북한군에게 연속적인 사격을 집중하여 이를 교란ㆍ격퇴시켰다. 같은 중대 관측장교 김용운 소위는 "그 때의 상황은 참으로 처참했다. 적의 포격이 어찌나 치열했던지 포진지에 떨어진 포탄이 터지면서 포 폐쇄기를 잡은 포사수의 몸뚱이가 날아가고 끊어진 손목만 남았는데 다른 병사가 폐쇄기에 엉켜 붙은 그 손목을 떼어내고 다시 사격을 계속했다." 라고 처절했던 상황중의 한 장면을 되새기며 증언하였다.

 이와 같이 사단 포병이 사천 초등학교 일대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있을 때 8사단 21연대 3대대가 증원되고 적의 기세 또한 크게 꺾였다. 18포병대대는 이 틈에 21연대 3대대의 엄호를 받으며 난곡동 오죽헌 부근으로 철수하고, 13:00부터는 다시 화력 지원을 계속하였다.

 최서종 중사는 비록 전사했지만 그의 투철한 책임감과 군인정신은 18포병대대 전통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구전되는 사천 전투 무용담에서 빼어놓지 못할 화제중의 꽃이 되었다.

 1950년 6월 27일 사천 초등학교 일대에서 전개된 18포병대대의 혈전은 이곳 주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 뒤 피난갔던 주민들이 돌아오자 그들은 전투장에 흩어진 유해를 한데 모아 안장하였다.


[제 18포병대대 전사 묘비, 이북이 고향이라 영현을 거두어줄 유족들이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러간 1970년 3월 1일 사천 초등학교로 부임한 김유진 교장이 이 사실을 알고 면 유지 염재근씨(명주군 사천면 미노리)를 비롯한 관내 기관장들의 협조 아래 무명용사 3위의 묘를 복원하고 호국 영현으로 모시고 추모하였다.

 다시 10년이 지난 1980년 3월에는 포병 출신인 사천면 예비군 중대장 장천[張天]씨가 수소문 한 끝에 그 3위의 영령 신원이 최종서, 한명화, 심우택임을 밝혀냈다. 내용을 알게 된 18포병대대 전우회와 사천면 유지들은 사천 초등학교 뒷산에 묘비를 세우고 매년 현충일에 참배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1991년 정부의 지원으로 깅릉지구 포병 전공비가 건립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강릉시 사천면 사무소에 확인해본바 이들 산화 장병 3위의 묘와 추모비는 현재도 그 위치에 있으며 잘 관리되고 있다고 말해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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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희준 2011.09.01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잘 읽고있습니다. 계속 건투를 빕니다!

  2. 엄경대 2011.09.01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사천초등학교 출신입니다..현충일에 저곳에서 헌화 및 묵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3. 알바트로스 2011.09.06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첫 번째 사진에 나오는 포는 105MM 가 아니라 76MM 포입니다.

  4. lexington 2011.09.06 16: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바트로스께서 틀렸습니다. 사진은 M-3 105mm 곡사포가 맞습니다.

  5. magento theme 2011.09.19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퍼갑니다. 60년전을 떠 올리게하는 사진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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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무기가 그것인데 어찌 군인이 무기를 버릴 수가 있느냐"라고 하면서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중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후 콩 볶는 듯한 총소리만 들려 왔을 뿐 영영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91. 파로호를 장악하다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20 11:28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과 수입면에 걸쳐 있는 해발 1,124미터의 백석산 일대는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전형적인 강원도 두메산골로 서측에는 북한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남측에는 파로호(화천호)가 동에서 서로 북한강과 연결된 곳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전선이 남쪽으로 심한 만곡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미 제10군단은 좌측을 담당한 미 제9군단과의 연결을 단축시키고 동시에 우측에 있는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에서 고군분투하던 미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전선을 북상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백석산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전선을 단축하고 파로호를 완벽하게 확보하기 위해 전선을 북상시켜야 했습니다.](1951년 5월 파로호와 화천댐의 모습)


  당시에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는 국군 제7사단이었는데, 장마가 끝난 8월 18일부터 피의 능선을 공격중인 미 제2사단과 보조를 맞추어 서서히 북상을 개시하였습니다. 제7사단은 9월 16일에 백석산 남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772고지(일명 마가터)를 점령하고, 이어서 9월 18일에선 백석산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883고지(선의대)를 점령하는 등 계획대로 주변 고지들을 점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군 제7사단은 그 동안 장기간에 걸쳐서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부대재편이 요구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석산 점령은 진지를 인계받을 제8사단이 담당하기로 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단장의 능선을 공격 중이던 미 제2사단이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고전을 면치 못하자 이곳에 집중되어 있던 적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이어스 미 제10군단장은 백석산의 탈환 없이는 단장의 능선지역에 몰려있는 적을 분산시키기 어렵다고 결론내리고, 9월 22일 진지교대를 앞두고 있던 국군 제7사단에게 즉시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이로써 후방으로 빠질 준비를 하던 제7사단은 황급히 공격준비를 갖추어 9월 24일부터 백석산 공략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지원 포격과 함께 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예하 제8연대가 서측능선으로, 제3연대가 동측능선을 따라 9월 25일부터 양면공격을 개시하였고 이틀간에 걸친 공세 끝에 백석산의 정상부근까지 도달하였지만 제7사단은 그동안 너무 지쳐있던 상태여서 점령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9월 28일부로 임무를 노전평 지역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동한 국군 제8사단에게 인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때 백석산을 담당하던 북한군 제5군단 32사단도 많은 피해를 입어 같은 날 북한군 제12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습니다. 이로써 백석산은 피아 양측 모두 새롭게 충전된 부대들이 정면에서 격돌하는 결전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아군의 폭격과 포격에 북한군의 전력은 급속도로 저하되고 있었지만 만일 백석산을 아군에게 피탈당하면 10킬로미터 후방인 해발 1,277미터의 어은산까지 후퇴하여야 하기 때문에 백석산을 지켜야 한다는 북한군의 의지만은 상당히 컸습니다. 최영희(崔榮喜) 제8사단장은 좁은 능선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면 적들도 전투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고 서측에 제26연대, 중앙에 제16연대, 동측에 제10연대를 배치하여 3개연대가 9월 30일 06시 동시에 공격에 나섰습니다.


  대대적인 포격이 백석산 정상과 후사면을 강타하였고 뒤이어 공격제대가 정상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공격제대가 적진지에 접근해 갈수록 적의 저항은 강렬해 져서 목표를 불과 200미터를 남기고 공격이 돈좌되었습니다. 최영희 사단장은 서두르지 않고 일단 정상 인근에 급편진지를 편성하여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다음날 아침, 항공기가 적의 진지를 강타한 틈을 타서 2개 대대가 좌측 봉우리와 우측 봉우리를 동시에 공격하여 마침내 10월 1일 12시경 백석산을 점령하였습니다.


[백석산을 점령하면서 이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되었습니다.]


  제8사단은 백석산 점령을 공고히 하기 위해 10월 6일부터 백석산 북방으로 내려와 어은산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10월 28일에는 현재의 휴전선 부근인 북한강변 동측의 삼막골-슬구내미-1090고지(어은산 남쪽 2킬로미터 부근)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공격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후 제8사단은 어은산을 지척에 두고 적의 반격에 대비하여 진지강화에 힘쓰게 되면서 이때 확보한 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로 인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화천댐과 파로호는 확실하게 아군이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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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희생을 필요로 한 고지전투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07 08:52

  공산군 측의 지연전술로 말미암아 휴전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자,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협상을 강요하기 위하여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극동해군 사령관 죠이(Charles T. Joy) 중장과 극동공군 사령관 웨이랜드(Otto P. Weyland) 중장에게 북한의 후방지역 기간시설과 공산군의 집결지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을 감행하라고 지시함과 동시에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에게는 적에게 적극적인 압력을 가하여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리지웨이는 협상을 강요하기 위한 공격을 명령합니다.]


  저돌적이었던 밴 플리트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군 방어선 중 가장 취약지역으로 있던 해안분지(亥安盆地)를 7월 21일 공격하였습니다. 강원도 양구 북방에 위치한 이곳은 사방이 해발 1,200미터 내외의 고지에 둘러싸인 해발 450미터 내외의 분지로 운석의 충돌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지형인데, 남북으로 7.5킬로미터 동서로 5.5킬로미터의 커다란 규모로 항공기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화채그릇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른바 펀치볼(Punch Bowl) 이라고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원래 방어에 취약한 이곳을 유엔군은 선점하려 했지만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공격을 유보한 상태였습니다.


  공격이 개시되자 미 제2사단 38연대가 국군 제1해병연대가 탈취한 도솔산에서 펀치볼의 서측방을 공격하여 주요 거점인 해발 1,179미터의 대우산을 7월 27일 탈취하였습니다. 하지만 장마시기와 맞물려 때마침 쏟아진 30년만의 폭우로 인하여 추가 공격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험준한 산악지대의 고지전에서의 악천후는 아군의 공격도 저지하였지만, 사실 적도 엄청난 곤란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고지전투는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지에서 펀치볼을 감시하는 미군 병사]


  한편 미 제2사단의 진격과 더불어 펀치볼 서측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고지인 가칠봉(加七峰)을 향하여 국군 제5사단이 1951년 9월 4일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초전에 제5사단은 북한군 제27사단을 격퇴하고 가칠봉을 탈취하였으나, 즉시 북한군의 역습을 받게 되면서 무려 40여 일 간의 공방전이 험준한 고지일대에서 벌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 1,000여명을 사살하고 250여명이 포로로 생포하면서  아군이 승리하였으나 반면 692명이 전사하고 4,000여명이 부상당하는 커다란 피해도 함께 입었습니다.


  양구일대의 혈전과 더불어 우측 인제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었습니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과 고성군 수동면 사이의 백두대간 서쪽 깊숙한 험준한 산악 지대인 노전평(蘆田坪)은 현재 군사분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여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전쟁 전에는 서화계곡을 통하여 남북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이어서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펀치볼 지역을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분지 서측의 대우산-가칠봉과 함께 동측의 노전평 지역을 장악해야만 했고 당연히 이곳의 요충지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두고서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국군 제8사단이 노전평 지구에 투입되어 8월 18일 적의 주저항선인 1,031고지와 965고지를 공격하였습니다. 당연히 적의 저항도 격렬하였고 수시로 고지의 주인이 바뀌기를 반복한 치열한 1주일간의 공방전 끝에 북한군 2개 연대를 괴멸시키고 제8사단은 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노전평전투에서 제8사단은 북한군 938명을 사살하고, 57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지만 반면 전사 90명, 부상 536명, 실종 17명이나 되는 막대한 피해도 입었습니다.


[고지쟁탈전은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하는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 북한군 전사자를 바라보는 미군 )


  이 같은 피의 대가를 지불한 노전평전투는 가칠봉전투와 함께 펀치볼의 요충지를 확실하게 아군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었으며, 시화계곡의 기동로를 아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반면 북한군은 서화계곡에서 저항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한 채 북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그 상태로 휴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전투들은 피아 모두에게 극히 제한적인 지역전투에서 발생한 인명손실 치고는 너무도 큰 희생을 안겨주었습니다. 고지를 매개로 한 고지쟁탈전에서의 승리는 오로지 피의 대가를 전제로 한다는 뼈아픈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던 것이었고 이점은 앞으로 전선에서 계속 반복 될 고지쟁탈전의 특징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Posted by LG Inno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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