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된 포로수용소장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8 15:56

납치된 포로수용소장

 

판문점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불미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공산군은 의도적으로 포로수용소에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직화하고, 공산군 휴전회담 대표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친공 포로들의 폭동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도합 15만 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이 나뉘어 수용소 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였다. 이러한 가운데 송환 희망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한 포로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제62동은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사팀이 제62동에 진입하였을 때 친공포로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미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포로들은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당하였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의 포로들.

 

이에 판문점 공산군 측 대표단이 즉각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혈사건’이라며 항의하였다. 이 사건은 유엔군 대표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폭동과 사건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시위를 벌이고 있는 친공포로들.

 

이 사건 직후 막사 경비대와 포로들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정이 안고 있는 취약점으로 인해 포로를 다루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친공포로의 폭동을 진압하는 유엔군.

 

포로수용소 내 적 공작원들의 위장침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 공작원들이 계획적으로 투항해 수용소 내로 침투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주로 북한군 정치보위부 소속이었는데 그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수용소로 들어간 다음 특별지시를 수행할 대원을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판문점 공산군 휴전회담 대표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밖에도 이들은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잠입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침투하자 친공포로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고, 포로수용소 내의 병원은 첩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친공포로의 본거지로도 활용되었다. 북에서 파견한 공작원들은 포로수용소 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철두철미하게 배후에서만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친공포로의 최고 지휘자는 북한 장교 제66수용소의 이학구 총좌(대령)였다.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 내에서 조직을 강화하여 세력을 넓혀 나가자 반공포로들이 이에 맞섰다. 자연스레 이들 간에 유혈충돌이 발생하였다. 경비병들이 야간에는 수용소 내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충돌이 잦았으며, 폭행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친공포로들은 유엔군의 정훈교육에는 극렬히 저항하는 한편 철물제조 교육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종류의 사제무기를 제조하였다.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연행되는 이학구.

 


 

국군 경비병이 압수한 친공포로의 사제 무기들.

 

 

도드 포로수용소장의 납치사건

수용소 내에서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전대미문의 사건은 바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된 일이었다. 1952 5 7일 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하던 중에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포로들의 사전 계획에 따른 올가미에 갇힌 것이었다.

 

포로들은 수용소장에게 자신들이 작성한 요구사항을 들이밀었다. 그들의 최초 요구는 각 막사 간에 전화시설을 갖추고 포로조직을 인정하라는 등 7개 항이었다. 이에 대해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 참모장 콜슨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면서, 도드 준장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는 요구서를 포로들에게 전달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장군.

 

 

도드 장군으 납치모습. (유적관)

 

이와 같이 포로들은 의도적으로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원의 조종에 따라 휴전협상에서 공산군 측의 입장을 지원하며 유엔군의 입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지속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막사 주변 시신의 암매장터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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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iv 3 2014.03.27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것은 그것의 이전 궤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2. deer velvet spray 2014.05.07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06 14:3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휴전협상은 1951 7 10일부터 1953 7 27일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유엔군과 공산군은 협상 중에도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유엔군은 협상 과정에서 주요 쟁점사항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공산군에게 휴전조건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증강을 도모하고, 일부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는 등 군사력 과시를 통한 휴전회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투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일면 협상, 일면 전투’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높게 쌓인 협상 기록 옆에서 있는 유엔군 장교.

방대한 기록물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협상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엔군은 현재 전력으로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더 이상의 유혈을 방지하고자 회담에 응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이용, 진지보강과 전력 증강을 꾀하면서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군사목표를 이루겠다는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고 중단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휴전협상 중 유엔군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조건을 공산군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였다. 유엔군은 협상 중에도 제한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고지쟁탈전을 택하였다.

 

공산군 역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엔군 진지 가운데 돌출되어 있거나 취약한 진지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등 고지쟁탈전을 펼쳤다. 결국 쌍방 모두 휴전 협상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휴전회담장을 지키는 북한군.

비무장 지역이어야 하는 회담장을 중무장한 북한군이 둘러싸고 있다.

 

공산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의 화력이 강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중동부 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351고지(동부), 펀치볼 지역,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중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고지쟁탈전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높은 곳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먼저 차지하는게 중요하였다.

 

미 제8군은 1951 8월 중순부터 펀치볼 및 피의 능선 지역에서 하계공세를 개시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고전하였다. 특히 피의 능선에서는 4×5㎞ 정도의 조그마한 고지를 탈취하는 데 3주나 소비되었고, 인원손실은 3,000명이나 되었으며, 포탄도 4만여 발을 소모하였다. 고지쟁탈전의 피해를 실감한 밴 플리트 장군은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실시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따라 8월 말에 공세계획을 수립해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건의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입힐 경우 휴전회담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지상작전은 승인하였다. 이와 같은 통제로 인해 미 제8군은 기존과 같은 고지쟁탈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고지쟁탈전의 현장들

 

그 결과 한편으로 휴전회담장에서 말로 싸우는 설전(舌戰)을 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전선에서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라는 혈전(血戰)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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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2.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Tip. 3성 장군이 중령으로 전쟁에 참전한 몽클라크(Ralph Monclar) 프랑스군 대대장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13 10:39

Tip. 3성 장군이 중령으로 전쟁에 참전한 몽클라크(Ralph Monclar)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프랑스 파한대대 제1대 대대장(1950. 11. 29 ~ 1951. 11. 30)이다. 몽클라크는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간 중에는 해외에 망명하여 반독투쟁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제1,2차 세계대전 중에 18번의 부상을 입고 18번의 훈장을 탄 맹장이었고, 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58세의 나이에 프랑스군의 대대장으로 참전을 지원하였다. 장군이 어떻게 대대를 지휘할 수 있느냐며 프랑스 국방차관이 만류하였지만, “나에게 계급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나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나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전하기 위해 내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하였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억압받는 민족을 돕는 게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은 군인의 신념이고 본분이라고 말씀하셨고, 유엔군 최초로 평화를 위해 파병되었다는 사실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몽클라르 중령이 지휘하는 프랑스 대대는 1950 11 29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 후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되어 원주전투와 지평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평리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수십 배나 되는 중공군의 파상공격에도 불구하고 방어진지를 끝까지 고수하여 지평리를 방어하는 데 결정 적인 역할을 하였다.



 

2010년 방한한 몽클라르 장군의 외동딸 파비엔 몽클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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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홍주 2013.11.16 15: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존경스러운 분인것 같습니다. 군인정신의 표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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