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06 14:3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휴전협상은 1951 7 10일부터 1953 7 27일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유엔군과 공산군은 협상 중에도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유엔군은 협상 과정에서 주요 쟁점사항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공산군에게 휴전조건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증강을 도모하고, 일부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는 등 군사력 과시를 통한 휴전회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투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일면 협상, 일면 전투’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높게 쌓인 협상 기록 옆에서 있는 유엔군 장교.

방대한 기록물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협상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엔군은 현재 전력으로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더 이상의 유혈을 방지하고자 회담에 응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이용, 진지보강과 전력 증강을 꾀하면서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군사목표를 이루겠다는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고 중단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휴전협상 중 유엔군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조건을 공산군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였다. 유엔군은 협상 중에도 제한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고지쟁탈전을 택하였다.

 

공산군 역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엔군 진지 가운데 돌출되어 있거나 취약한 진지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등 고지쟁탈전을 펼쳤다. 결국 쌍방 모두 휴전 협상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휴전회담장을 지키는 북한군.

비무장 지역이어야 하는 회담장을 중무장한 북한군이 둘러싸고 있다.

 

공산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의 화력이 강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중동부 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351고지(동부), 펀치볼 지역,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중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고지쟁탈전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높은 곳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먼저 차지하는게 중요하였다.

 

미 제8군은 1951 8월 중순부터 펀치볼 및 피의 능선 지역에서 하계공세를 개시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고전하였다. 특히 피의 능선에서는 4×5㎞ 정도의 조그마한 고지를 탈취하는 데 3주나 소비되었고, 인원손실은 3,000명이나 되었으며, 포탄도 4만여 발을 소모하였다. 고지쟁탈전의 피해를 실감한 밴 플리트 장군은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실시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따라 8월 말에 공세계획을 수립해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건의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입힐 경우 휴전회담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지상작전은 승인하였다. 이와 같은 통제로 인해 미 제8군은 기존과 같은 고지쟁탈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고지쟁탈전의 현장들

 

그 결과 한편으로 휴전회담장에서 말로 싸우는 설전(舌戰)을 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전선에서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라는 혈전(血戰)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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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2.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6.25전쟁 최초의 공정작전 (숙천-순천 공정작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06 14:02

6.25전쟁 최초의 공정작전 (숙천-순천 공정작전)

 이 작전은 10 20일부터 22일까지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 일대에서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이 북한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고 북한 요인들을 포획하며, 후송할 것으로 판단되는 수백 명의 미군 포로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실시한 6.25전쟁 최초의 공정작전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평양함락 훨씬 전인 10 12일경에 이미 북한 관리들과 북한군 주력이 철수하였고 포로도 후송시켰다. 이 때문에 미 제 187공수연대는 본래의 작전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절반의 성과밖에 얻지 못하였다.

 

장소와 시간을 고민하다

9월 말, 미 제187공수연대는 북진작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예비부대로 김포비행장을 경비하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정권 수뇌와 북한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 부근에 수감된 유엔군 포로를 구출할 목적으로 이 부대를 평양 후방에 공중투하하기로 결심하였다.

 

공수부대 투하지역으로 평양 북쪽 교외와 청천강 도섭장, 그리고 숙천 및 순천 일대를 고려하였다. 평양 북쪽 교외 일대는 1개 지점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지만, 북한군 평양방어부대로부터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있었다. 청천강의 도섭장인 신안주 지역과 원리 일대는 평야으로부터 70~80km 후방에 위치해 있어 적 주력의 포착이나 포로의 구출은 용이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미 제8군과의 연결작전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목표지역을 공수부대가 투하된 이후 2~3일 만에 지상군과 연결이 가능한 양자의 중간지점인 숙천과 순천 일대로 결정하였다.

 

숙천은 평양에서 65km 떨어진 지역으로 평양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도로와 철도를 차단할 수 있고, 순천은 평양에서 60km 떨어진 지역으로 평양에서 만포진에 이르는 도로와 철도를 차단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청천강 이북에 이르는 도로는 이곳만 점령한다면 후방차단이 가능하였다.

 

 

^ 숙천. 순천 공수작전 전투상황도.

 

공수연대는 10 16일 이후 언제라도 출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최초 투하 시기는 사리원을 공략한 17일로 계획하였는데, 평양 남쪽에서 적이 강력하게 저항하고 기상도 좋지 않아 차후로 연기하였다. 두 번째는 지상군이 평양에 돌입한 19일을 고려하였으나, 이 또한 기상이 좋지 않아 다음날로 연기하였다. 계획한 20일 오전 6시에도 시계가 좋지 않아 지체하다가 12시가 되어서야 병력과 장비를 탑재한 수송기들이 이륙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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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을 혼란시켜라! (인민유격대의 남파)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1.05 11:37

남한을 혼란시켜라! (인민유격대의 남파)

 

김일성은 1948 7남북 노동당연합중앙위원회의 구성, 1949 6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창설, 1949 7 1일 남로당과 북로당(북조선노동당)조선노동당으로 통합 등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거나 통합하여 완전히 평양이 주도하는 권력체계를 확립하였다. 박헌영을 비롯해 그간 남로당을 이끌던 핵심 멤버들도 평양으로 넘어가고 남한에는 서울지도부만 남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남정책과 공작의 구심점도 자연히 북으로 옮겨 갔고, 남로당의 혁명 역량은 단지 보조적인 수단으로 평가절하된 상태였다.

 

이처럼 남북 양쪽에서 두 공산당 세력 사이에 벌어진 한반도 적화를 위한 지하공작활동의 주도권 다툼에서 그 구심점은 평양의 김일성 쪽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부터 남로당은 북로당과의 관계에서 종속적인 하위 부서로 들어가 종전의 독자투쟁 노선에서 점차 평양의 노선과 지시를 수행하는 하급 단위조직으로 전략되어 갔다.

 

주도권 싸움에서 뒤쳐지게 되자 고립감과 초조감을 느낀 남로당은 상황반전의 수단으로 무장 유격투쟁을 전개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러한 노선변경은 남한 내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즉 정부가 각종 좌익사건을 계기로 1948 12월 초 국가보안법을 입법화하고, 1949 10월부터 남로당을 불법 이적집단으로 규정해 그들에 대한 단속조치를 취하자 활동영역이 축소된 남로당의 처지에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장 유격투쟁 노선으로 전환한 남로당은 194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무력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세포 중 열성당원을 무장시켜 각 지방의 유격 거점으로 입산시켰다. 또 각 도마다 한두 곳을 해방구로 설정하여 북한군이 남침할 때까지 그 지역을 확보토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시기 남한 각지에서 발생한 각종 유격 소요사건은 기본적으로 남로당이 수행한 것이 사실이지만, 큰 틀에서는 북한정권이 무력통일 노선의 전초전으로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다.

 



^ 북한 인민유격대 (당시는 빨치산으로 불렸다)

 

Tip.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 또는 프랑스어 파르티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정규 군사조직을 뜻한다. 즉 적의 배후에서 신속한 이동과 기습을 통해 적에게 피해를 입히며, 일정한 조직체계가 없는 소규모 전투부대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빨치산은 그 당시 좌익 무리의 잔당이라는 의미로 쓰였고, 속치 빨갱이와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빨치산이란 6.25전쟁 전후에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한 공산게릴라를 일컫는다.

 

 

북한은 대남적화의 선행단계로서 북한 전역을 무력남침을 수행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조성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1949 7인민유격대를 조직해 그 요원들을 양성.남파하였다.

 

인민유격대의 남파는 북한군이 강조하는 배합전술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 전선에서의 전투와 병행하여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비정규전 형식의 또 다른 전투를 유발하여 배후에 제2전선을 형성하려는 전술이었다. 이러한 전술의 목적은 적의 동원 및 증원을 방해하여 전후방을 동시에 전장화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하여 격멸한다는 개념이 이었다. 이는 결국 조만간에 있을 북한 정규군의 남침공격을 앞두고 남한 내에서 그에 호응하기 위한 제2전선을 형성할 목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참모들

 

인민유격대는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 14연대 반란사건으로 진압부대가 호남과 경남 지역에 집중돼 후방경비가 허술해지고 남한사회가 혼란해지자 본격적으로 남한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산발적으로 전개되어 왔던 남한 내 각 지역의 무력투쟁은 이후 한층 격화되었다.

 

1948 11월부터 6.25전쟁 직전인 1950 3월까지 모두 10회에 걸쳐 침투해 온 유격대원 수는 무려 2,400명에 이르렀다.

 



지리산지구 전투부대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표창장.


이들 인민유격대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2,000여 명이 사살 또는 생포되었지만 나머지 400여 명은 남한 각지의 오지에 틀어박혀 남침 직전까지 계속 저항하였다.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전방 사단의 일부와 후방 3개 사단을 포함해 총 4개 사단병력과 경찰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하였다. 그 때문에 국군은 38도선의 방어력이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방경계도 허술하게 되는 등 적의 남침공격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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