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3.12.18 납치된 포로수용소장 (2)
  2. 2011.08.10 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3)
  3. 2010.10.28 94.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224)

납치된 포로수용소장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18 15:56

납치된 포로수용소장

 

판문점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불미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공산군은 의도적으로 포로수용소에 공작원들을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직화하고, 공산군 휴전회담 대표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친공 포로들의 폭동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13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도합 15만 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들과 친공포로들이 나뉘어 수용소 내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세력다툼을 벌였다. 이러한 가운데 송환 희망포로의 수를 결정하기 위한 포로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제62동은 친공포로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사팀이 제62동에 진입하였을 때 친공포로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미군 1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포로들은 77명이 사망하고 140명이 부상당하였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의 포로들.

 

이에 판문점 공산군 측 대표단이 즉각 ‘수많은 우리의 인원을 야만적으로 학살한 유혈사건’이라며 항의하였다. 이 사건은 유엔군 대표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수용소 내 규율을 확립하기 위해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폭동과 사건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시위를 벌이고 있는 친공포로들.

 

이 사건 직후 막사 경비대와 포로들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정이 안고 있는 취약점으로 인해 포로를 다루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친공포로의 폭동을 진압하는 유엔군.

 

포로수용소 내 적 공작원들의 위장침투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북한 공작원들이 계획적으로 투항해 수용소 내로 침투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주로 북한군 정치보위부 소속이었는데 그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수용소로 들어간 다음 특별지시를 수행할 대원을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둘째는 판문점 공산군 휴전회담 대표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밖에도 이들은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잠입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침투하자 친공포로 조직이 결성되기 시작하고, 포로수용소 내의 병원은 첩보를 교환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친공포로의 본거지로도 활용되었다. 북에서 파견한 공작원들은 포로수용소 내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철두철미하게 배후에서만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친공포로의 최고 지휘자는 북한 장교 제66수용소의 이학구 총좌(대령)였다.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 내에서 조직을 강화하여 세력을 넓혀 나가자 반공포로들이 이에 맞섰다. 자연스레 이들 간에 유혈충돌이 발생하였다. 경비병들이 야간에는 수용소 내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에 충돌이 잦았으며, 폭행과 살인이 자행되었다. 친공포로들은 유엔군의 정훈교육에는 극렬히 저항하는 한편 철물제조 교육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종류의 사제무기를 제조하였다.

 



 

폭동을 주도한 혐의로 연행되는 이학구.

 


 

국군 경비병이 압수한 친공포로의 사제 무기들.

 

 

도드 포로수용소장의 납치사건

수용소 내에서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전대미문의 사건은 바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된 일이었다. 1952 5 7일 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제76수용소 출입구에서 포로 대표와 면담하던 중에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인질로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포로들의 사전 계획에 따른 올가미에 갇힌 것이었다.

 

포로들은 수용소장에게 자신들이 작성한 요구사항을 들이밀었다. 그들의 최초 요구는 각 막사 간에 전화시설을 갖추고 포로조직을 인정하라는 등 7개 항이었다. 이에 대해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 참모장 콜슨 준장을 신임 수용소장으로 임명하면서, 도드 준장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하는 요구서를 포로들에게 전달하였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장군.

 

 

도드 장군으 납치모습. (유적관)

 

이와 같이 포로들은 의도적으로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원의 조종에 따라 휴전협상에서 공산군 측의 입장을 지원하며 유엔군의 입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지속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막사 주변 시신의 암매장터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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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riv 3 2014.03.27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든 것은 그것의 이전 궤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2. deer velvet spray 2014.05.07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한 의제에 합의를 봄으로써

미 해병 포로들의 만포진 수용소 탈출기

생생! 6·25/울프독의 War History 2011.08.10 17:45

 6ㆍ25전쟁 동안 공산 측에 포로가 되었던 미군은 약 7,000명 정도 되었다. 이중 40%가 학대와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국군 포로의 사망률은 극히 낮았는데, 이 사실로 미군들의 극한 상황을 견디는 신체적 심리적 능력이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포로들에 대한 학대는 중공군이 관리했던 포로수용소보다도 북한군이 운영했던 포로수용소가 극히 심했었다.

[미군이 공중 촬영한 북한의 직동 포로 수용소]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군 노병을 만났는데, 자기는 파주 설마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중공군이 관리하던 창성 수용소에서 2년 넘게 수용됐었다고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어요. 북한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라면 못 돌아왔을지도 몰랐어요. 그 곳은 지옥이었으니까----"

[중공군의 벽동 포로 수용소, 면 전체의 주민들이 쫓겨나고 각 민가가 포로 수용소로 접수되었다. 앞에 압록강이 보인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북한으로서 증오스런 미군에게도 특별히 나은 대우를 해줄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이런 혹독한 포로수용소의 환경을 알거나 겪은 미군 포로들은  탈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탈출했었다. 6ㆍ25전쟁 기록에 의하면 공산측에 포로가 된 미군의 10퍼센트인 670명이 탈출했었다. 그러나 이 탈출은 적에게 포로가 되고 얼마 안 되는 후방 후송전이거나 최전선 야전에서 발생한 것이다. 북한의 먼 후방인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적십자사를 통해 전달되는 집 편지 나누어주기, 편지를 받는 중공군 복장의 미군들]


 6ㆍ25전쟁 때 남한은 공산포로들을 미군들이 일괄 관리하여 거제도 수용소 한 곳에 수용했지만(포로 폭동 후 분산했지만) 공산측은 유엔군 포로들을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했었다. 북한과 중공군의 대부분의 포로수용소는 전선에서 아득히 먼 북쪽 압록강 연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중공군 관리하의 벽동 수용소에서는 돼지도 공급이 되었었다. 도살이나 요리는 미군의 몫이었다.]


 이렇게 머나먼 적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던 사례가 무려 50여건이나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였다. 험악한 지형과 현지 북한 주민들과 전혀 다른 생김새, 그리고 전선까지의 장거리가 탈출을 극히 힘들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급식은 특히 최악이었다. 병으로 죽는 포로들이 급증하자 부랴부랴 급식 형편을 개선했다.

[식탁도 없이 걸인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미군 포로들]


 이들 포로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탈출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보이는 아득히 먼 북쪽인 한 중 국경지대의 압록강의 만포진 포로 수용소에서 과감히 탈출하여 북한 땅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서울 동북방 미군 전선으로 귀환한 미군 세 명이 있다. 

 세 명의 미군들이 탈출을 감행 한 것은 북한의 엄동인 12월이었다. 폭격으로 인해 미군들에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북한 주민들 사회에서 확연히 다른 용모임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고, 그 먼 길을 탈출에 성공한 실화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탈출을 주도했던 존 그래험 해병 상병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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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장진호 전투 때 최전방까지 진격했던 해병 7연대 장병으로서 철수중 중공군에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미 해병 구호소, 중공군 3만명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때 7연대가 전위를 맡아 포위망 돌파를, 5연대가 후위로서 밀려드는 중공군들과의 전투를 했다.]


 그래험은 철수 작전 도중 눈 쌓인 벌판에서 흰 위장포를 쓰고 접근해온 중공군과 격돌했다. 양측이 동시에 발사했고 나는 턱에 따발총을 맞고 쓰러지게 되었다. 의식이 돌아 왔을 때는 한 오두막 집안에 다른 아군 병사 여섯 명과 누어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는 호수 건너편에서 우리들처럼 하갈우리 방향으로 철수하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포로가 된 육군 부상자들도(미 육군 7사 31연대 전투단) 있었다. 

 우리 모두 부상자였지만 희한하게도 내 턱은 붙어 있었다. 아마도 뼈를 스친 유탄에 맞은 것 같은데 그 충격은 정신을 잃을 만큼 컸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 얼굴은 얼어붙은 피에 온통 뒤 덮여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우리를 북한군에게로 넘겼고 놈들은 우리를 총검으로 몰아 세우며 며칠 동안 어디론가 데려갔다. 끌려가는 도중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미군은 총검에 찔려 죽었다. 며칠 후 한 작은 마을에 이르러서 심문을 받은 일행은 분산되었는데 나는 북한군의 포로수용소로 가는 대열 속에 끼게 되었다. 

 수주일간 산길을 따라서 밤에 걷고 낮에는 숨어 지내는 생활을 반복한 끝에 한 중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변의 한 마을, 만포진에 이르렀다. 포로로 끌려간 해병에게나 육군에게나 그 곳은 참으로 고약한 시설이었다.

[페렌바크의 유명한 한국전쟁 책에 소개된 탈출한 포로들이라는 사진인데 탈출 인원이 다섯 명인 것으로 보아 그래험 일행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곳에 보내진 자들은 악질분자라 했으며 그래서 북한군의 지극히 ‘부드럽고 자애로운’ 대접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중 한 명만은 악질이 아니었다. 변절자가 있었던 것이다. 

 탈출을 의논하고 있던 나는 덕분에 10일간을 땅 구덩이에 갇혀서 물만 마시고 지내며 교화를 받아야 했다. 밀고한 변절자는 디킨슨이라는 하는 테네시 출신 녀석이었다. 

 수용소에서 23개월을 지낸 어느 겨울 날, 콜세어의 한 편대가 언덕을 넘어와 인근의 중공군 시설을 폭격하더니 또 다시 한 편대가 뒤를 이었다. 인접한 건물에 네이팜탄이 떨어져 불타고 대공포가 간단없이 포효하는 소란 속에 경비병들은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했다. 평소 탈출을 모의했던 우리 세 명, 뮬린스와 포드등 합 세 명의 동지 포로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포진 수용소를 탈출하였다.

 그리고 무조건 남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그날 밤 밤새 걸어서 적의 추격망을 벗어났다. 날이 새자 험한 지형의 잡목더미 속에 숨어 들어가 쉬었다. 그 뒤에도 주민들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숲 속에 숨고 밤에는 걸고 하는 탈출 행을 계속하였다. 배가 고프면 민가에 몰래 숨어 들어가 음식물이나 닭을 훔쳐서 허기진 속을 채웠다. 날씨는 무척 추웠으나 북극을 능가하던 장진호 호반 유담리의 혹독한 날씨에 비하면 그런대로 참을 수가 있었다.

 거의 2주일을 그렇게 남하했을 때 우리는 먼 전방에서 포화가 은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뛸 뜻이 기뻐했다. 그러나 남으로 갈수록 적병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우리는 조심과 조심을 거듭하면서 전선으로 접근했다. 최전선 직 후방의 계곡에 숨어서 밤을 보낸 우리는 날이 부옇게 새자 적 경계선을 은밀하게 돌파하고 드디어 건너 전선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미군들에게 구조 될 수 있었다. 그 곳은 서울 동북방 전선이었으며 우리를 구조해준 미군은 미 제 1기병사단이었다.

[포로 교환 때 돌아온 미군 포로들이 수용된 자유의 집]


 나는 이 고통스러운 탈출 중에 손가락에 심한 동상에 걸려 그 손가락들을 모두 잃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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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ㆍ25전쟁 중에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나온 국군 장병들 또한 여럿이었다.

[박정인 소령]


 비교적 잘 알려진 탈출 이야기는 사단 19연대 작전 주임이던 박정인 소령[후에 3 사단장 역임]과 3명의 장교와 1명의 병사가 1951년 1월 23일 압록강변 벽동 포로 수용소를 탈출하여 두 달 뒤인 3월 14일 귀환에 성공했던 일화이다. 

 미군인 그래험의 북한 탈주 경우의 2주는 무척 빨랐다고 하겠다. 미군으로서 북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돌아온 것은 이 그래험 상병의 예가 유일할 듯하다.

[유명한 라이프지의 사진,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존 프로크 상병이 믿어지지 않는 귀환에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더구나 그가 그 멀디 먼 압록강변에서 탈출해서 주민들이나 북한 추격대에게 발각되지 않고, 전선을 통과해서 돌아 온 것은 ‘기적’이라 생각된다. 국군이라면 모를까 한 눈에 보아도 확연히 티가 나는 백인 얼굴들로 한반도 북반을 종단해서 남하하였다는 사실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험은 현재 80세의 나이에 몬타나 주의 카네지 읍에서 생존해 있다. 위는 카네지 읍내 주민이며 조각가인 그래이저가 영웅으로 추대받은 그에게 헌정한 독수리 조각상. 그래험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의 아들 존 H. 그래험(왼쪽)이 받았다.]


 지도도 없이 정확히 남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탈출 일행 중에 별을 보고 방향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남하하는 용의주도한 조심성이 이들의 탈출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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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해방구가 되어버린 포로수용소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28 08:06


  공산군 포로는 아군이 반격을 개시한 1950년 9월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통일이 목전에 보여 획득된 포로를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않고 평양, 인천 등지에 임시적으로 분산수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쟁의 양태가 바뀌고 장기화 조짐이 보이자 획득된 포로들을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방의 부산으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산에 집결된 포로는 14만 여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것은 10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이 전선에 투입되는 것을 막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전경]


  하지만 부산은 유엔군의 물류 거점이자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으므로 이곳에 잠재적인 위험이 큰 대규모의 포로들을 집결시키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부는 거제도에 새로운 포로수용시설을 세워 순차적으로 포로들을 이곳으로 이송하였습니다. 전쟁 전에 거제도는 12만 여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10만의 피난민과 14만의 포로가 몰려들면서 식수가 모자랄 정도로 섬 전체가 북새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신현리 독봉산 기슭의 계곡에 밀집된 형태의 수용소가 마련되었는데, 이처럼 좁은 구역에 시설이 집중되다보니 경비가 용이하였던 반면 포로들의 집단행동이 가능하게 되어 버렸고 이것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국군 경비병과 북한군 포로사이의 벌어지는 사소한 충돌 외에 그다지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네바협정을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미군의 관리방침 때문에 국군 경비병들의 근무환경보다 오히려 포로들의 급식과 주거여건이 더 좋은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것은 결국 포로들의 조직적인 집단행동이 벌어지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어느덧 포로들은 단지 총기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지휘체계와 조직체계를 갖춘 무력조직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휴전회담이 진척되자, 수용소는 조속한 송환을 요구하는 친공(親共)집단과 송환거부를 주장하는 반공(反共)집단으로 크게 나뉘어 충돌이 일상화되는 단계까지 비화되었고, 1951년 9월 초순에는 인민재판이 열어 반공포로 15명이 살해되는 사건까지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특수요원들을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게 하여 수용소에 잠입시켰고 이들의 주도로 공산포로들을 조직화하여 반공포로들을 살상하는 등 후방지역의 분란을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제도 수용소는 대한민국 영토 최후방에 조성된 북한군의 해방구처럼 변모되어 갔습니다.


[국군 경비병이 압수한 사제 무기들]


  휴전회담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군사분계선 확정 문제보다 자유 송환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자 오히려 포로문제가 휴전의 걸림돌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자유 송환을 막기 위해서 송환심사를 거부하라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공산포로들이 소요를 일으켰는데, 이 과정에서 55명의 포로가 사망하고, 162명이 부상했으며, 소요를 진압하던 미군도 1명이 사망에 38명이 부상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의 폭동은 1952년 5월 6일 포로수용소장 돗드(Francis T. Dodd)가 인질이 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불러왔습니다.


  결국 미군은 포로들과 협상을 벌여 합의각서로 만들어 주는 굴욕을 겪은 끝에 돗드의 신병을 넘겨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신임 소장 콜슨(Charies F. Colson)이 서명한 각서에는 ①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들을 살상하였음을 시인한다. ② 포로의 송환문제는 판문점 결정에 따른다. ③ 포로들의 강제심사는 없다. ④ 포로의 대표단 조직을 승인 한다 등의 내용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 각서는 순식간 판문점 북한측 대표에게 전해져 포로문제 협상에서 유엔군 대표단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신임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클라크(Mark W. Clark) 대장은 책임을 물어 부임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콜슨을 5월 12일부로 해임하여 전임 수용소장인 돗드와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하였습니다. 이 같이 엄청난 일들이 반복되면서 1951년 1월에 수용소 개설 후 그해 9월까지 모두 8명의 수용소장이 교체되었는데, 사실 이처럼 포로수용소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너무 인권을 내세웠던 잘못된 운영정책에 기인한바 큽니다.


[폭동 주도혐의로 연행되는 이학구]


  결국 신임 수용소장 보트너(Hayden L. Boatner) 준장은 실력행사에 들어가 6월 1일~10일 사이에 무장 병력을 수용소 내부로 진주시켜,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를 강제로 분리시킴과 동시에 밀반입하여 숨겨놓은 수많은 무기들을 수거했습니다. 이로써 지난 1년간에 걸쳐 용의주도하게 준비하였던 포로들의 폭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포로의 관리체계는 새롭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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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rudi 2013.08.01 11: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 있다는 의미이기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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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buy followers 2013.09.18 0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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