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상'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3.12.16 휴전협상의 배경 (7)
  2. 2013.12.0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2)
  3. 2010.10.26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207)

휴전협상의 배경

 

6·25전쟁에서 휴전협상은 전쟁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 6월을 전후하여 제기되었으며, 그 후 7 10일 쌍방 협상대표들은 개성에서 만나 최초 회담을 개최하였다.’

 

 



1951 7 10,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출발하기 전 헬리콥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유엔 측 대표들,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지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쌍방의 휴전협상 제의 과정

6·25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공산정권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전 한반도를 공산화한다는 목표로 1950 6 25일 남침을 자행함으로써 발발하였다.

 

이에 한국을 지원하여 자유진영의 유엔군이 참전하고, 뒤따라 공산진영의 중공과 소련(공군)이 북한을 지원하여 직접 개입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전쟁으로부터 국제적 성격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양측은 군사적으로 격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북한의 남침 직후에는 주로 유엔의 주도 아래 평화의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유엔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선에서 전쟁을 중단시키려 여러 차례 시도하였지만 공산군의 반대로 유엔의 제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다.

 

먼저, 1950 6 25북한이 남침을 자행하자 유엔은 결의를 통해 북한이 침략을 중지하고 즉각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한 1950 12월에는 유엔총회가‘정전 3인위원회’를 설치하여 중공에 대해 38도선 이남으로 침공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등 한반도에서 평화를 회복하려 노력하였다.

 

 

 


정전위원회는 평회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공산군은 195010월 초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 패주할 때 38도선에서 휴전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제의는 ‘외국군 즉각 철수’등의 불합리한 조건을 달고 있어 유엔군 측이 수용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제의는 유엔군의 38도선 돌파를 지연시키며 이미 출병을 결정한 중공군의 참전 준비에 시간을 벌고자 하는 위장 평화제의였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파병결정에 따라 참전준비를 마친 중공군.

 

해가 바뀌어 1951년 초에 접어들어서도 유엔의 평화회복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3월 하순 유엔군이 38도선을 회복할 무렵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직접 공산군사령관 펑더화이에게 휴전회담을 제의하였으나 이 제의 역시 묵살되었다. 이는 상대방이 그때마다 힘으로 전쟁목표를 달성하려는 정책을 계속 추구 한데 기인하였다.

 

전선 교착과 휴전협상

쌍방은 1951 45, 이른바 중공군의 춘계공세에서 개전 이후 최대의 결전을 치렀다. 여기에서 피아 모두 최악의 인명손실을 입은 후에야 무력으로 승리를 쟁취하려는 정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데 양측 모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국이 주도한 미·소의 막후 접촉에서 소련이“전쟁 전 현상에서 휴전으로 평화를 회복한다”는 데 호응해 옴으로써 마침내 휴전협상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휴전을 제의하고 있는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1951 6 23일 유엔 라디오 장면.

 

그러나 협상이 성사되기까지 힘에 의한 타결 시도가 몇 차례 더 반복되었고, 그 중에는 ‘국지적 제한 전쟁이냐 또는 확전이냐’라는 기로에까지 이른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 남북한은 총력전을 펼쳤고, 동서 양 진영도 동원할 수 있는 최대 역량을 투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군 측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유엔군 측은 침략자를 응징하고 자유를 수호하며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피를 흘렸다.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끝난 1951 6, 전선은 또다시 38도선 부근으로 회귀하였고 그 후 교착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무렵 중공군은 춘계공세에서의 실패와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재기불능의 손실을 입어 더 이상의 공세가 거의 불가한 상황이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치열한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공산군 측은 그들의 힘으로 전 한반도를 통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엔군 측으로서도 힘에 의한 응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소련과 미국은 각각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이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대의 의도를 확인하였고, 이로써 이 지역에서 냉전구조의 균형을 파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공동의 인식하에 쌍방은 기존 정책과는 달리 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해 교착된 전선에서 휴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측에서는 유엔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미국이 전쟁 이전 상황에서의 휴전정책을 확정한 데 이어 공산국 측에서도 소련이 중심이 되어 1951 6 13일 모스크바 조·중·소 회담에서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측의 협상목표와 전력증강

양측의 협상 목적과 목표는 각기 달랐다. 유엔군 측은 군사협상을 통해 일단 휴전한 다음 유엔기구를 통해 정치적 수단에 의한 통일 민주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1951 7 8일 휴전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을 벌인 개성의 광문동 민가.

 

 

 

예비접촉 당시의 모습.

 

 

 

휴전 예비 회담시 북한군과 중공군.

 


 

반면 공산군도 전선이 교착된 6월부터 방어태세를 취하면서 지상군의 정비와 공군력의 전개를 통해 전력을 회복한 다음 8월 이후에 공세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고, 이 기간 중에 휴전회담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여건을 마련하기에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1951 7 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 측 대표단. 백기를 다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지만 공산군 측의 유엔군 측을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1951 7 8일 첫 접촉에 나선 유엔군 측 대표단.

왼쪽은 이수영 중령, 오른쪽은 키니 대령.

 

 

 


휴전회담 첫 날의 모습.

  



이때 병력 면에서는 공산군이 2:1로 우세하였지만 화력이나 해·공군 전력 면에서는 유엔군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이처럼 1년 동안의 격전 끝에 대치한 양측은 휴전에 대비해 방어선을 강화하고 부대의 재편성·재배치를 통해 전력을 재정비하면서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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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omment hacker un compte facebook 2013.12.22 0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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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how to improve credit score 2013.12.23 04: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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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yhellotoyou 2013.12.23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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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생생! 6·25/만화형 전쟁사 "우리가 겪은 6ㆍ25전쟁" 2013.12.06 14:36

 휴전협상 속의 고지쟁탈전

 

휴전협상은 1951 7 10일부터 1953 7 27일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그런데 유엔군과 공산군은 협상 중에도 치열한 전투를 계속 벌였다. 유엔군은 협상 과정에서 주요 쟁점사항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공산군에게 휴전조건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전력증강을 도모하고, 일부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는 등 군사력 과시를 통한 휴전회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투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일면 협상, 일면 전투’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높게 쌓인 협상 기록 옆에서 있는 유엔군 장교.

방대한 기록물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협상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엔군은 현재 전력으로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더 이상의 유혈을 방지하고자 회담에 응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휴전회담을 이용, 진지보강과 전력 증강을 꾀하면서 전쟁에서 달성하지 못한 군사목표를 이루겠다는 흑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고 중단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휴전협상 중 유엔군은 협상이 결렬될 경우나 유엔군이 요구한 협상조건을 공산군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전투를 재개하였다. 유엔군은 협상 중에도 제한된 목표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고지쟁탈전을 택하였다.

 

공산군 역시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엔군 진지 가운데 돌출되어 있거나 취약한 진지에 대해 공격을 가하는 등 고지쟁탈전을 펼쳤다. 결국 쌍방 모두 휴전 협상 후 생길 군사분계선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지쟁탈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휴전회담장을 지키는 북한군.

비무장 지역이어야 하는 회담장을 중무장한 북한군이 둘러싸고 있다.

 

공산군은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의 화력이 강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중동부의 산악지역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중동부 전선은 고지쟁탈전의 격전지가 되었고 351고지(동부), 펀치볼 지역,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수도고지(중부), 저격능선, 백마고지 등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열한 고지쟁탈전

유리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높은 곳에서 제압할 수 있는 감제고지를 먼저 차지하는게 중요하였다.

 

미 제8군은 1951 8월 중순부터 펀치볼 및 피의 능선 지역에서 하계공세를 개시하였는데, 이때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고전하였다. 특히 피의 능선에서는 4×5㎞ 정도의 조그마한 고지를 탈취하는 데 3주나 소비되었고, 인원손실은 3,000명이나 되었으며, 포탄도 4만여 발을 소모하였다. 고지쟁탈전의 피해를 실감한 밴 플리트 장군은 고지쟁탈전을 지양하고 중동부전선에서 대규모의 공세작전을 실시하여 상황을 반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따라 8월 말에 공세계획을 수립해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건의하였다. 리지웨이 장군은 공산군에게 치명타를 입힐 경우 휴전회담에 큰 장애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휴전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지상작전은 승인하였다. 이와 같은 통제로 인해 미 제8군은 기존과 같은 고지쟁탈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고지쟁탈전의 현장들

 

그 결과 한편으로 휴전회담장에서 말로 싸우는 설전(舌戰)을 벌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 전선에서 휴전 후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라는 혈전(血戰)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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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2. affordable essay writing 2013.12.23 2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오거든요.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자국내에서

92. 전설로 남게 된 백마고지

생생! 6·25/북한의 남침에서 휴전까지 2010.10.26 08:13


  1951년 11월 27일 열린 휴전협상에서 현재 양측이 접촉하고 있던 임진강어구-판문점-철원북방-금성남방-문등리-가칠봉-고성남방의 전장 237킬로미터의 전선을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고 1개월간 한시적인 정전을 갖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데 이 시기에 양측의 생각은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엔군은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했던 군사분계선 문제가 타결되었기 때문에 이후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판단하고 방심하였지만 반면 공산군은 이때를 전력의 열세를 최대한 만회하는 절호의 시기로 삼았습니다.


[완벽하게 구축된 진지에 엄폐된 중공군 전차]


  결국 1개월의 잠정휴전기간은 공산군 측에게 유엔군의 공습을 걱정하지 않고 벌건 대 낯에도 마음 놓고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하였습니다. 공산군의 진지는 참호와 교통호가 완벽하게 구축되면서 그동안 유엔군의 우위를 보장하였던 공군력과 화력의 효과가 급속도로 반감되었습니다. 비록 공산군 측도 협상이 파국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인 휴전시도보다는 시간 지연에 몰입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협상과 고지전이 계속 병행되었습니다.


  특히, 1952년 들어 포로에 관련한 협상에서 이견이 커지면서 휴전이 난망한 상태로 보이자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에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기위한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습니다. 이때 전선 중앙인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던 395고지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그저 그런 흔한 야산이었지만,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395고지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지점의 견부(肩部)를 구성하는 요충지에 자연스럽게 놓이게 되자 순식간 전쟁의 핵심지역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만일 적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橄制) 하에 놓이면서 중부지역의 많은 통로를 아군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395고지의 모습]


  이곳을 담당하던 부대는 1951년 10월 17일 미 제3사단과 교대한 국군 제9사단이었고 395고지 북쪽 후방의 효성산에 위치한 중공군 제42군은 이곳을 되찾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전투는 1951년 11월 3일, 1개 대대의 규모의 중공군이 국군 제2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이를 쉽게 격퇴하였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11월 5일 21시를 기하여 증강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재차 공격을 감행하였고 아군 제29연대 1대대가 진지를 사수하지 못하고 후퇴함으로써 395고지를 적에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군의 반격도 즉시 이루어져 제28연대가 하루 만에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전초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이 일대는 소강상태를 계속 유지하였는데, 약 1년이 지난 1952년 중반기에 중공군이 최정예로 평가되던 제38군으로 교체되면서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1952년 10월 6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중공군은 북쪽 전방에 있는 봉래호 수문을 폭파하여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킴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국군 제9사단은 10월 15일까지 3개 사단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하는 중공군 제38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6·25전쟁에서 벌어졌던 고지전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395고지를 놓고 무려 10일간 쉬지 않고 벌어진 전투는 12차례의 쟁탈전을 통해 고지의 주인이 7회나 바뀌었습니다. 이곳을 반드시 지켜내어야 할 당위성을 잘 알고 있던 아군의 불같은 인내력은 3배나 많았던 중공군은 무참히 녹여버렸습니다. 국군 제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적 사살 8,234, 추정살상 6,098명, 포로 57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공군 제38군은 완전히 소멸된 것과 다름없는 엄청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국군은 계속하여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두면서 전략적인 작전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우의 시신 옆에서 고지를 사수하고 있는 국군' 이런 모습으로 백마고지를 지켜내었습니다.]


  작전기간 중 중공군은 총 55,000발, 아군은 총 219,954발이라는 어마어마한 포격을 이 작은 고지에 집중시켰는데 이것은 단기간의 지역전투로써는 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예입니다. 전투 결과 395고지 정상은 풀 한 포기 남아있을 수 없는 민둥산으로 변하였고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여 이 후부터 395고지일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이끈 제9사단은 백마부대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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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certification of dentists 2013.08.18 2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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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earn money 2013.09.14 2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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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call center offshore 2013.09.29 23: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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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kabale 2014.03.18 0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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